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2부, 2장 문체와 국가장치
2장 문체와 국가장치
지식인들을 길들이는 첨단의 기제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반정, 그리고 문체반정(文體反正), 조선사를 장식하는 ‘반정(反正)’은 이 세 가지가 전부다. 물론 앞의 두 가지와 나머지 하나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유혈의 쿠테타’와 무혈의 ‘문화혁명’(?)이라는 점 말고도,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권력 밖의 집단이 거사를 일으킨 데 비해, 문체반정은 국왕이 직접 나서서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정조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통치자였다. 184권 100책에 이르는 개인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가 단적인 증거다. 경전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섭렵 및 주도면밀한 주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뿐더러, 왕실 아카데미인 규장각을 설치하여 신료(臣僚)들에게 직접 강의를 주도할 정도로 박학다식했다. 수시로 신하들을 경연에 불러모아 시문을 짓는 과제를 내곤 했으니, 신하들 입장에선 꽤나 피곤했을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정조가 아니고는 당시 유행하는 문체가 불온하다는 것을 감지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산림처사(山林處士)로부터 도학적 훈육을 받기에 급급했던 여타 평범한 왕들로서야 무슨 안목으로 시정에 유행하는 문체가 순정한지 타락한지 알아차릴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순전히 정조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대체 문체가 통치와 무슨 연관이 있길래 국왕이 손수 검열을 진두 지휘한단 말인가? 문체는 한 시대가 지니는 사유체계 및 인식론의 표현형식이다. 그것은 단지 내용을 담는 그릇이나 매개가 아니라 내용을 ‘선규정하는’ 표상의 장치이다. 중세 유럽의 ‘대학’에서 ‘수사학(修辭學)’을 주요과목으로 설정한 것을 떠올리면 일단 감이 잡힐 것이다. ‘어떤 어조와 제스처를 쓸 것인가’ 혹은 ‘어떤 장식음을 활용할 것인가’하는 따위는 단순히 테크닉이 아니다. 그런 테크닉을 숙련하는 과정 자체가 앎의 경계를 결정한다. 말하자면, 문체는 사유가 전개되는 ‘초험적 장’인 셈이다.
좀더 비근한 예를 들면, 지금 대학에서 양산하는 학문체계는 논문이라는 표현형식을 모든 구성원에게 부과한다. 그러므로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대학이 부과하는 규범화된 언표체계를 습득해야만 한다. 예컨대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서론에선 문제제기를 하고 연구사를 정리한 뒤, 연구방법을 제시한다, 또 결론에선 본론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남는 과제를 제시한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문장형식도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 이런 틀에 맞추려면 당연히 담을 수 있는 내용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 나물에 그 밥’, 이 체계를 일탈하는 순간 그것은 지식의 경계 밖으로 축출된다.
만약 논문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문체를 사용했다고 하자. 아예 논문 제출 단계에서 짤리고 만다. 그 정도까지 갈 것도 없이 약간만이라도 ‘아카데믹한’ 어법에서 벗어나면, 당장 제동이 걸리는 게 대학의 현실이다. 나 역시 그런 일을 숱하게 겪었다. 학위논문이 아니라, 레포트 수준에서도 좀 개성있는 문장을 시도해볼라치면, 가차없이 ‘그건 비평체 아냐’하는 질책을 받아야 했다(비평이 뭐 어때서?), 그러니까 대학에서는 비평 스타일조차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달라진 거 같진 않다. 문체야말로 체제가 지식인을 길들이는 가장 첨단의 기제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문체는 지배적인 사유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문턱’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고문이 바로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태어나서 문자를 익히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든 지식인들은 고문을 습득하기 위한 훈련에 진입한다. 얇은 곧 고문으로만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경(六經)의 문장과 사마천(司馬遷)과 반고로 대표되는 선진양한(先秦兩漢)의 문장 및 한유(韓愈)와 소식(蘇軾) 등 당송(唐宋) 팔대가의 문장이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이것은 사대부들의 사유 및 신체를 이 표상의 범위 안에 묶어 놓는다는 점에서 체제를 유지하고, 지배적인 담론을 재생산하는 유효한 장치로 기능하였다. 고(古)란 무엇인가? 중국의 고대이다. 고문이란 그때 완성된 문장의 전범들이다. 즉 시간적으로는 아득한 옛날, 공간적으로는 저 중원땅을 향하게 함으로써 ‘지금, 여기’를 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교묘하면서도 집요한 습속(習俗)의 장치! 그것이 바로 고문이었다.
▲ 김홍도의 「규장각도」
규장각은 정조가 설치한 왕실 아카데미다. 정조는 재야에 숨은 인재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아 ‘왕도정치’를 위한 개혁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연암그룹에 속했던 서얼 출신의 인물들 즉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등이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바 있다.
소품과 소설과 고증학
그런데 이 견고한 장치에 균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명말청초의 문집이 유입되면서 고문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언표들이 번성하게 된 것이다. 소품문(小品文), 소설(小說), 고증학(考證學)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내 일찍이 소품의 해는 사학(邪學)보다 심하다 했으나 사람들은 정말 그런지 몰랐다. 그러다가 얼마 전의 사건이 있게 된 것이다. 사학을 물리쳐야 하고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소품이란 문묵(文墨) 필연(筆硯) 사이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연소하고 식견이 천박하며 재예가 있는 자들은 일상적인 것을 싫어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므로 서로 다투어 모방하여 어느 틈엔가 음성(淫聲) 사색(邪色)이 사람의 심술을 고혹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 폐단은 성인을 그릇되이 여기고 경전에 반대하며 윤리를 무시하고야 말 것이다. 더욱이 소품의 일종은 명물고증학으로 한 번만 변하면 사학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사학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먼저 소품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홍재전서』 164권, 『일득록』 4, 「문학」4
予嘗言‘小品之害, 甚於邪學’ 人未知其信然. 乃有向日事矣, 蓋邪學之可闢可誅, 人皆易見. 而所謂小品, 初不過文墨筆硯間事, 年少識淺薄有才藝者, 厭常喜新, 爭相摸倣, 駸駸然如淫聲邪色之蠱人心術. 其弊至於非聖反經蔑倫悖義而後已. 况小品一種, 卽名物考證之學, 一轉而入於邪學. 予故曰: “欲祛邪學, 宜先祛小品.”
정조의 논리는 간단명료하다. 소품을 읽다보면 경학을 벗어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윤리를 무시하게 되어 마침내 삿된 학문에 물들게 된다는 것, 소품의 경박하고 참신함에 사람들이 금방 ‘혹하게’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를 표면에 드러내는 사학보다 교묘하게 스며들어 사람들을 어지럽게 만드는 소품체가 훨씬 더 위험하다.
그러면 소설은 또 왜 그런가? 소설은 일단 그 허구성이 용서받기 어려웠다.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는 허구성이야말로 문학적 글쓰기의 기본이지만, 그 당시에는 허구란 곧 황탄(荒誕)한 속임수를 의미했다. 우주의 비의, 천하의 도를 탐구하는 경학의 관점에서 보면, 소설처럼 얄팍하게 꾸며낸 이야기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기술에 불과하다.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거기에 빠지면 아무도 못 말리게 된다. 실제로 당시에 이상황 같은 마니아들이 속출했던 것 같다. 소설에 빠져 패가망신한 에피소드들도 적지 않고, 대표적인 소품작가이자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대상이었던 이덕무(李德懋)조차도 소설을 ‘바둑, 여색, 담배’와 나란히 놓으면서 “내가 자제들을 가르친다면 이 네 가지를 못하도록”하겠다고 했을 정도니. 덧붙이자면, 다소 역설적이긴 하나 이덕무는 대표적인 ‘소설 폐지론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가 유포된 것은 중국사에서도 ‘절대기문(絶對奇文)’이라 할 만한 작품들이 대량으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금병매』, 『수호지』, 『삼국지연의』, 『서유기』 등 지금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들이 물밀듯이 밀려 온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초대형 블록버스터들이 몰려온 셈인데, 웬만큼 사상무장을 하지 않고서야 이런 작품들의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금병매』가 한 번 나오니 음란을 조장함이 컸다. 소년들이 이 책을 보지 못하면 큰 수치로 여기니 해(害)가 또한 크다”고 한 이덕무의 언급이 저간의 사정을 대충 짐작케 해준다. 그러므로 “소설은 인심을 고혹시키므로 이단과 다를 것이 없다”는 정조의 인명이 단순한 ‘엄포용’ 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고증학의 폐해도 비슷하다. 고증학이란 말 그대로 옛 문헌을 읽되, 글자 하나하나를 엄밀하게 고증하는 것에 주력하는 학문이다. 정조가 판단하기에는 거기에 골몰하다 보면 시야가 한없이 좁아져 경전과 역사가 제시하는 비전을 간과하게 되고 만다.
결국 정조가 반정(反正), 곧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 할 때의 정(正)의 의미는 간단하다. 우주와 역사에 대한 깊고도 원대한 사유, 중후한 격식을 갖춘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경학의 고문(古文)이 바로 그 완벽한 모델이다. 소품은 경박한 스타일 때문에, 소설은 황당무계한 허구성 때문에, 고증학은 쪼잔한 시야 때문에 고문의 전범들을 와해시킬 우려가 있다.
그런데 다양한 흐름이 좌충우돌하긴 했지만, 정작 창작의 차원으로 들어가 보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즉 중국처럼 초대형 장편소설들이 탄생하지도 않았고, 고증학의 흐름 역시 별반 대단치 않았다. 판소리계 소설이 크게 번성하긴 했지만, 중국 소설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단편’에 불과하다. 결국 18세기 조선에서 성행한 문체적 실험은 소품문이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쟁점들을 풀어헤쳐 보면, 정조와 일군의 지식인들 사이에 벌어진 격돌은 ‘고문 대 소품문’의 대결로 압축된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이 바로 그 전선 한가운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