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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②: 규장각 설치 이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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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0부 왕정복고 - 3장 마지막 실험과 마지막 실패, 도서관이 담당한 혁신②: 규장각 설치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1. 6. 2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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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 담당한 혁신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세자의 아들로서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즉위한 희한한 기록을 보유하게 된 정조는 마음 속에 깊숙이 가라앉은 앙금을 결코 씻어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할아버지가 남긴 숙제를 완수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아버지를 해원(解寃)한다는 사적 과제와, 왕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공적 임무가 결합되면서 그는 조선 역사상 가장 근본적이고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이번이 아마도 조선 역사상 마지막 체제 실험이 되리라는 것을 그도 예감했던 걸까?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조선은 완전한 왕국이 되어 격변하는 동북아의 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될 테고, 실패한다면 조선은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서구 열강의 제물이 되고 말 터이다.

 

즉위한 뒤 정조(正祖)가 맨처음으로 한 일은 아버지의 시호를 사도(思悼)에서 장헌(莊獻)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사도는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영조(英祖)가 내린 시호였으니 정조의 마음에 들 리가 없다(장헌세자는 나중에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정조가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는 것과 더불어 장조莊祖로 격상된다). 일단 이렇게 아버지의 원한을 어느 정도 달래고 나서 정조는 곧바로 왕당파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한다.

 

물론 이 발상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세조(世祖)도 그랬고, 광해군(光海君)도 그랬고, 영조(英祖)도 그랬다. 무릇 사대부(士大夫)들의 꼭두각시에 머물기를 거부했던 조선의 왕다운 왕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왕당파를 튼튼히 구축해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비록 발상에서는 같았어도 정조(正祖)가 구사한 수단은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었다. 세조, 광해군(光海君), 영조는 모두 기존의 사대부 세력 가운데 일부를 구워삶아서 왕당파로 삼았다.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신들을 측근으로 부렸고, 광해군과 영조는 각각 대북과 노론의 당파를 여당으로 성립시켰다. 하지만 정조는 그들이 실패한 이유를 바로 그 점에서 찾는다. 기존의 세력을 왕당파로 만들면 잘 되어야 자기 대에만 유지될 뿐이고 못 되면 오히려 반정을 부르게 된다. 세조와 영조가 전자의 경우라면 반정으로 실각한 광해군은 후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정조가 택한 방법은 새롭고 참신한 세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즉위하기도 전인 1776년에 그가 규장각(奎章閣)이라는 기구를 설치한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그는 1775년부터 영조(英祖)의 명으로 국정을 맡았다). 원래 규장이란 임금이 쓴 글을 뜻하는 말이니까 규장각도 새삼스러운 기구는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규장각은 일찍이 세조(世祖) 때 설치되었다가 폐지되었으며, 숙종(肅宗) 때도 환장각(煥章閣)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부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조(正祖)의 규장각은 다르다. 임금의 글씨나 그림을 보관한다는 기본 기능은 그대로 가져갔으나 규장각의 실제 기능은 그보다 훨씬 방대하고 야심찬 것이었다. 말하자면 규장각은 문화의 탈을 쓴 정치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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