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진시(眞詩)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美學)
이하곤은 조선중기 이후로 진행된 시단의 변화상을 폐단 극복의 연쇄관계로 개괄하면서 백악시단의 ‘진시’가 출현하게 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國朝之詩, 自明宣以後, 盖累變焉. 蘇齋、芝川才具宏蓄, 氣力昌大, 然雅俗兼陳, 體裁未純, 故其弊也雜; 孤竹、玉峰以淸新秀警矯之, 然神寒骨薄, 氣象急促, 故其弊也隘; 東岳、石洲又以渾圓和平矯之, 然思冗語膚, 格調不高, 故其弊也腐; 東溟又以悲壯整麗矯之, 然叫呶紛拏, 情境不眞, 故其弊也虗. 於是乎金三淵、洪滄浪之詩出焉. -李夏坤, 『頭陀草』책16 「洪滄浪詩集序」】. “동명(東溟, 鄭斗卿)이 또 ‘비장(悲壯)’과 ‘정려(整麗)’로써 저들의 폐단을 교정하였으나 요란하고 혼란하여 정(情)과 경(景)이 참되지 않았기 때문에 허황된 폐단을 노정하였다. 이에 김삼연(金三淵)과 홍창랑(洪滄浪)의 시가 나오게 되었다.” 이하곤이 지적하였듯 부진(不眞)한 정(情)과 경(景)을 진(眞)하고 실(實)하게 하는 것, 이것이 곧 백악시단의 ‘진시’가 혁신해 가야할 길이었다.
앞서 살폈듯 백악시단은 시적 대상에 대한 형상화에 있어서도, 주체의 정감을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도 그 진실함을 고려하지 않고 전범의 형식적 재현 정도를 성취와 역량의 기준으로 여기는 풍조를 비판하며 ‘진시’를 제창하였다. 백악시단은 시 창작을 교양의 수단이나 기예로 사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학(詩學)을 도학(道學)의 차원까지 높이고 시도(詩道)에 대한 궁구를 통해 민멸된 시도(詩道)를 다시 진작하겠다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백악시단의 ‘진시’는 학시(學詩)에 있어서도 창작에 있었어도 정신적 가치를 대단히 중시하였다. 백악시단은 시적 대상을 마주하면 관조와 교감을 통해 그 진면목을 포착하고, 시적 주체의 정감을 표현하면서는 총체적 관계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거기서 발현된 참된 감정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천부(天賦)의 상태로 수양된 주체가 대상에 오묘하게 발현되는 천기(天機)와의 조우를 통해 천리(天理)를 체인해야 한다는 천기론은 그들 ‘진시’론의 지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본 장에서는 백악시단의 실제 작품들을 대상으로 대상과 주체의 眞이 어떻게 하나로 고양되고, 그러한 형상화가 거둔 미적 성취와 특징을 무엇인지 살피면서, 민멸된 시도(詩道)를 진작하겠다던 백악시단의 시적 지향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1. 형신(形神)을 통한 산수의 묘파(描破)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산수에 대한 애호가 각별하였다. 대표적 인물로, 김창흡은 19세에 금강산을 유람한 이래 모두 여섯 차례나 금강산을 찾았고, 설악산을 자신의 은거지로 삼아 만년까지 그곳에서 살았으며, 그 밖에도 호남, 영남, 관서, 관북 등 전국의 산수를 두루 유람하였다【김남기, 「김창흡의 산수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8면 참조.】. 권섭은 스스로 “나의 성벽(性癖)은 수석(水石)과 연하(煙霞)에 있으니 세상 어떤 일로도 이것과 바꿀 수 없다.”고 할 정도였는데, 관동 유람을 네 차례, 남도 유람을 여덟 차례, 해서 유람을 두 차례 하였고, 87세에는 함경도 일대를 유람하기도 하였다. 권섭의 유람은 대개 3개월 이상 소요되는 장대한 원유(遠遊)였는데 권섭은 유람을 마치고 나면 유람과 관계된 모든 것 ― 승람의 대상과 감회는 물론이요, 거리정보, 동반한 사람, 도움 준 사람, 소용된 물목에 이르기까지 ―을 「원유록(遊行錄)」에 남겼다【권섭의 유람에 대한 기록은 권혁대, 「옥소 권섭의 한시 연구」,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79~84면에 자세하다.】. 이하곤 또한 강화도 일대, 개성 일대, 속리산 일대, 금강산 일대, 호남 일대를 두루 여행하였다【이하곤의 유람에 대한 기록은 윤성훈, 「담헌 이하곤, 산수 애호와 문예 지향의 삶」,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 제24집, 2008, 173면 및 이상주, 『담헌 이하곤 문학의 연구』, 이화문화출판사, 2003, 25~32면에 자세하다.】. 이 밖에도 백악시단의 대다수 문인들은 금강산, 개성 등 조선의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였고, 지방관으로 부임하면 임지의 명승을 찾아 유람하였다. 그리고 백악시단의 열정적 산수 애호는 왕성한 시문 창작으로 이어져 그들의 산수시는 ‘진시’의 정수 가운데 하나로 뚜렷한 성취를 거두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산수는 공자의 태산(泰山) 등람(登覽)과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처럼 심원한 정신적 각성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사마천의 경우처럼 창작의 수준을 제고시키는 문필 실현의 장으로 여겨져 왔다. 그렇다면,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산수 유람을 어떻게 인식하였던가?
옛날의 고인과 일사를 살펴보면 이따금 몸을 숨겨 독서하느라 명산(名山)의 이경(異境)에 사는 것을 애호한 자들이 있는데 이것이 어찌 다만 적막함을 즐기고 심지(心志)를 탐닉하여 문사, 언어의 공교롭고 화려한 것을 구하는 데 그친 것이겠는가?
대저 명산(名山)의 이경(異境)은 그 기가 광대하고 성대히 모인 것이라 반드시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하다. 대저 (고인과 일사의 행위는) 그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한 기운에 의거하여 욕망을 말끔히 없애고 성령(性靈)을 도야하여 리(理)의 환함과 도(道)의 깨우침에 이르기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이제 자심(子深, 李眞源)이 가는 곳은 곧 남방의 명산으로, 높고 크며 기이하고 빼어나니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한 기(氣)가 여기에 광대하고 성대할 것이다. 부자께서 깊이 하고자 하신 바가 장차 리(理)의 환함과 도(道)의 깨우침을 구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아니면 문사(文詞)와 언어의 공교롭고 화려함을 구하려고 한 것이겠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심(子深)은 힘쓸지어다.
然窃觀古之高人逸士, 往往潛藏讀書, 而愛居名山異境者, 是豈特甘寂寞溺心志, 以求文詞言語之工麗而已哉!
夫名山異境, 其氣之旁魄而欝積者, 必淸明秀異. 盖欲資其淸明秀異之氣, 澄汰欲慮, 陶冶性靈, 以求至于理明道悟焉耳. 今子深所適者, 乃南方之名山, 而高大以奇秀, 則淸明秀異之氣, 於是焉旁魄而欝積. 可知夫子深所欲者, 將以求理明道悟歟, 將以求文詞言語之工麗而已歟. 子深勉乎哉. -李夏坤, 『頭陀草』책12 「送李子深序」
고인은 “모든 공인들은 작업장에 거하여 그 일을 완성한다.”고 하셨다. 이 말은 대개 작업장에 거하였다면 곧 그 마땅한 장소를 얻은 것이요, 마땅한 장소를 얻으면 외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 작업이 이내 정밀해짐을 의미하니 일을 이루고자 하면서도 마땅한 장소를 얻지 못한다면 일을 완성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사대부의 업(業) 또한 그러하다. 반드시 마땅한 곳을 얻은 뒤라야 이룸이 있을 수 있는데 마땅한 곳을 얻고자 한다면 의당 고요한[靜] 곳보다 더 나은 곳은 없다. 내가 세속의 사람들을 보건대, 간혹 학업에 뜻을 두었으면서도 늘 사물의 번다함과 벗들과의 지나친 종유에 뜻을 빼앗겨 이룸을 얻지 못하는 자가 대다수이다. …(중략)… 악주(岳州)는 곧 해서(海西) 지역이다. 경사와의 거리가 먼데다가 땅도 외졌으니 사물의 번다함과 벗들과의 지나친 종유는 반드시 없을 것이다. 계달이 이 땅에 가게 된 것은 그 마땅한 곳을 얻은 것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중략)… 또 내가 듣기로 해서(海西)에는 아름다운 산수가 많다고 한다. 옛날에 글을 쓰던 자는 반드시 많은 관람(觀覽)을 토대로 자신의 흉금을 넓혔다. 옛날 사마천은 약관의 나이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를 떠다니고 원수(沅水)와 상수(湘水)를 건넜으며 연(燕), 조(趙), 제(齊), 노(魯)의 유허(遺墟)를 직접 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그의 문장이 질탕하여 지기(奇氣)가 있게 되었으니 후세의 글쟁이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런즉 사마천이 얻은 산천의 도움[山川之助]은 심원한 것이었다 할 것이다. 무릇 계달은 고원한 뜻을 지니고서 거처의 마땅함까지 얻었으니 여기에 사마천과 같은 유람을 더한다면, 그 문장이 마치 대붕이 회오리바람을 타고서 반드시 구만 리를 날아오른 뒤에 그치는 것과 같을 것이니 그 성취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古之人有言曰: ‘百工居肆, 以成其事.’ 盖居肆則得其所, 得其所則不遷於異物而業乃精, 欲成其事而不得其所, 鮮有能成者矣. 今夫士之於業也亦然, 必得其所而後, 可以有成, 欲得其所, 宜無大於靜者矣. 余觀世之人, 間或有志於學, 而常奪於事物之膠擾、朋知之過從, 不得有成者多矣. …(中略)… 岳州卽海西也. 去京師旣遠, 地且僻, 其無事物之膠擾、朋知之過從必矣. 季達之適玆土, 可謂得其所哉! …(中略)… 且余聞之, 海西多佳山水云. 古之爲文者必籍觀覽之富, 以廣其胸次. 昔龍門太史弱冠, 浮江、淮, 涉沅、湘, 歷燕、趙、齊、魯之墟以歸, 故其文跌宕有奇氣, 非後世操觚者所及, 則其得山川之助可謂深矣. 夫以季達高遠之志, 得其所處之宜, 而加之以子長之遊, 則其於爲文也, 猶大鵬之摶扶搖, 必將九萬里而後已. 其所成就, 曷可量哉!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3 「送季達昌直之岳州序」
첫 번째 글은 이하곤이 부친을 따라 무주로 떠나는 벗 이진원(李眞源)에게 써준 글이다. 이하곤은 이 글에서 산수 유람의 목적을 산수에 내재된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한 기운을 얻어 리(理)와 도(道)를 깨우치는 데에 두었다. 산수의 기묘한 외형에 기대 창작의 질적 제고를 이루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은 종래의 도학자적 산수 인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산수의 외형적 특징을 청명하고 특별한 기를 얻을 수 있는 매개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도(悟道)의 경지로 나아가는 매개로서 산수의 ‘이경(異境)’이 상당한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산수도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대상으로 여겼던 도학자의 관념적 산수 인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하곤의 이러한 입장은 곧 산수에 오묘하게 발현된 천기(天機)를 조우하고 그것을 통해 천리(天理)를 체인해야 한다는 천기론을 충실하게 따른 것으로, 산수라는 대상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부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산수를 통해 정신적 오(悟)를 얻어야 한다는 입장은 백악시단 문인들의 일반적 견해였다. 김시보는 금강산 유람을 떠나는 조카 김순행(金純行)에게 경치 완상에만 빠지지 말고 산수의 오묘함을 관찰하여 인(仁)과 지(知)의 경지에서 마음에 갈무리 할 것을 당부하였고【噫! 善觀名山之難無異於觀聖. 汝其往矣, 毋以深搜博觀爲務, 察其流峙之妙, 會以仁智之符. 俯仰徜徉, 收之方寸, 無少流連光景, 遊玩適宜, 則其於爲學之功, 亦不爲無助也. -金時保, 『茅洲集』 권9 「與純行書」】, 김시민은 송도(松都) 유람을 떠나는 조명리(趙明履)에게 준 시에서 “자장(子長, 司馬遷)은 격이 낮아 문장에만 그쳤고, 강절(康節, 邵雍)은 오직 기수(氣數)에서 머무르고 말았네. 어약연비(魚躍鳶飛)의 이치가 충만한 곳은, 석 잔 술에 호한한 흥을 즐긴 축융봉일세.”【子長陋矣文章止, 康節惟於氣數終. 一理鳶魚充滿處, 三杯豪興祝融峯. -金時敏, 『東圃集』 권2 「贈趙姪明履仲禮遊松都」】라면서 축융봉에서 천리를 체인하고 우주와 소통했던 주자의 기상을 따를 것을 권하기도 하였으며, 박태관은 김창흡에게 보낸 시에서 김시습(金時習)과 김창흡을 비하며 김시습의 산수 유람을 문장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속견을 비판하고, 김창흡이 산수에 은거한 진정한 뜻은 산수의 고요함 속에서 도를 깨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산 아끼는 참 즐거움은 오직 고요함 탐해서니, 속세 피한 청한자(淸寒子, 金時習)는 본디 미친 게 아니었습니다. 이 노인은 정녕 알아 부끄러움 없었거늘, 사람들은 그저 좋은 문장만을 언급합니다. 산중 거처는 푸른 산봉 천 겹으로 가리시고, 도(道)의 맛은 맑은 못 백 굽에서 유장하실 터. 공께 묻길, ‘필경 무엇을 하실는지요?’, ‘복희 경전[周易] 한 부가 솔숲에 있다.’하시네[愛山眞樂惟耽靜, 避世淸寒本不狂. 此老定知無愧色, 今人但說好文章. 菴棲碧嶂千重掩, 道味澄潭百曲長. 畢竟問公何事業, 羲經一部在松林. -朴泰觀, 『凝齋遺稿』卷上 「奉贈百淵」].】.
두 번째로 제시된 김창흡의 글은 산수와 학문, 산수와 문장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논하였다. 김창흡은 『논어(論語)』 「자장(子張)」편의 “모든 공인은 작업장에 거하여 그 일을 완성하고, 군자는 학문으로써 그 도를 이룬다[子夏曰: ‘百工居肆以成其事, 君子學以致其道.’]”를 화두(話頭)로 삼아 산수가 도를 이룰 수 있는 최고의 학문 공간임을 강조하였다. 그런 다음, 산수 유람이 작문을 질적으로 고양시키는 계기가 됨을 말하였다. 김창흡은 후세의 글쟁이들이 미칠 수 없는 사마천의 성취는 사마천이 산수 유람을 통해 ‘심원한’ 산천지조(山川之助)를 얻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김창흡이 후세조고자(後世操觚者)와 사마천을 대비하면서 산천지조(山川之助)의 ‘심원함’을 운위한 것은 후세조고자(後世操觚者)의 피상적(皮相的) 유람과는 달리 사마천의 유람이 정신적 감수와 체득의 과정이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단에서 ‘자장지유(子長之遊)’라고 특기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김창흡은 이상의 생각을 종합하여 아우 김창직에게 산수 유람을 권하였다. 마지막에 언급된 고원지지(高遠之志)와 소처지의(所處之宜), 자장지유(子長之遊)는 산수를 매개로 학문이 깊어지고 학문이 깊어지면 창작상의 성취도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김창흡은 산수 유람에 앞서 충분한 학문과 수양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명악록(溟岳錄)』에 붙인 글에서, 세상 사람들은 사마천이 20세에 유람한 사실만 알지, 10살 때 이미 고문(古文)을 기송(記誦)한 사실은 모른다며, 사마천 같은 하늘이 내린 준재도 10년 동안 학문과 수양의 공을 쌓은 뒤에야 주유(周遊)에 나섰음을 강조하였다. “惟太史公以善遊特聞於世, 世之喜遊子弟亦頗欲慕而效之. 然獨知其二十而遊焉乎? 而獨不聞其十歲而則已誦古文乎? 以彼奇偉之才、卓犖之識, 固天縱之, 而然且搜羅旁剔, 猶待夫十年之積, 積而有可運於所適者. 然後起而作遊, 一覽而盡天下之變, 吐其胸中之奇, 卒成一家言, 傳之無窮.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3 「溟岳錄後序」】. 이처럼 김창흡은 산수를 정신적·학문적 측면에서 접근하면서도 문학과의 연관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참된 시문 창작이란 학문적 식견과 정신적 해오(解悟)에 토대해야함을 강조한 것으로 자신들의 ‘진시’론이 일관되게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학적 산수와 문학적 산수의 유기적 통합은 김창협의 다음 글에서 산수시 창작의 문제와 관련하여 더욱 정밀하게 개진되었다.
시가(詩歌)의 묘(妙)는 산수(山水)와 상통한다. 대개 청형준무(淸迥峻茂)하고 기려유장(奇麗幽壯)하여 그 모습은 변화가 많고 그 땅은 다 보기 어렵다. 바라보면 정신이 솟구치고 다가서면 마음이 녹아드는 것, 이것이 산수의 빼어남이다. 시가(詩歌) 또한 마찬가지이다. 산수와 시가 서로 만나면 정기(精氣)가 서로 모이고 경(景)과 취(趣)가 서로 펼쳐진다. 이는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물주에게는 완전한 공력이 없고 사람의 재주 역시 치우침이 있기 때문에 우주의 산수가 모두 빼어날 수 없고 사람의 시가(詩歌) 또한 오묘한 것이 드물다. 이 때문에 평범한 경치에서 기발한 말을 구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조잘대는 소리를 가지고서 아름다운 경관을 묘사하려 들면 조금도 닮지 못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는 산수와 사람이 서로를 저버린 것이지만, 사람이 산수를 저버린 경우가 많으니 대개 시도(詩道)가 쇠한 지 오래도다.
동방에서 산수를 말하자면 금강산이 가장 뛰어나 전대부터 시인들의 가영(歌詠)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그 빼어남을 근사하게 묘사한 말을 찾으면 끝내 찾을 수가 없다. 대개 조물주가 이 산에 오로지 신령하고 빼어나며 맑고 아름다운 기운만을 모아 주어 그 기운으로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을 만들고, 그 기운으로 맑은 샘과 깊은 골을 만들고, 그 기운으로 아름다운 나무와 기이한 풀과 금모래와 은자갈을 만들었으니, 그 뛰어남이 또한 오묘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시를 짓는 사람들은 비근한 것을 익히기를 좋아하여 진부한 것을 인습하고 한 번도 깊이 생각하여 독창적인 말을 해 본 적이 없으며 그 천기(天機)에서 움직인 것이 얕아서 흥취가 원대하지 못하여, 사물을 명명한 것이 조잡하고 묘사가 참되지 못하다[不眞]. 이런 상태로 산수에 가니 어찌 펼치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시가의 도가 떨쳐지지 않았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금강산을 저버린 것이 그친 때가 없었다.
詩歌之妙, 與山水相通. 夫淸迥峻茂, 奇麗幽壯, 其爲態多變, 其爲境難窮, 望之而神聳, 卽之而心融, 此山水之勝也. 而詩歌亦然, 故二者相値, 而精氣互注焉, 景趣交發焉, 是固有莫之然而然者矣. 然造化無全功, 人才有偏蔽, 故宇內之爲山水者, 不能皆勝, 而人之於詩歌, 亦鮮造妙. 是以踐常境而求奇雋之語, 則無助, 操哇音而寫瑰麗之觀, 則未肖. 是二者又交相負也, 而人之負山水也顧多, 蓋詩道之衰久矣.
語山水於東方, 金剛爲大, 而自前世詩人歌詠甚多, 然求一言之克肖其勝, 卒不可得. 夫造物者, 專以神秀淑麗之氣, 鍾之於是山, 以而爲奇峰峭壁, 以而爲淸泉邃谷, 以而爲嘉木異卉, 金砂銀礫, 其爲勝, 亦妙矣. 而世之爲詩者, 方且樂習卑近, 因陋而襲陳, 未嘗一致其深思, 以發獨創之語, 其動乎天機也淺, 而興象不遠, 命乎事物者粗, 而描寫不眞, 以此而之乎山水, 夫安能有所發! 余謂詩歌之道不振, 則東人之負金剛也, 無已時矣. -金昌協, 『農巖集』 권21 「兪命岳李夢相二生東游詩序」
이 글은 김창협이 유명악과 이몽상이 금강산을 유람하며 쓴 시에 붙인 서 문으로, 산수시 창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진시’, ‘천기론’과 연계하여 논의한 것이다. 김창협의 논리는 대단히 명료하다. 산수시는 산수라는 대상과 시인이 만나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빼어난 산수시가 되려면 대상도 빼어나야 하고 작시 주체도 빼어나야 한다. 그런데 금강산은 조물주의 공력이 가장 빼어난 산이다. 그런데도 금강산을 형상화한 시들이 범상한 데 그치고 만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금강산의 진면목을 인식하고 그것을 참되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창협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천기(天機)를 내세운다. 김창협은 금강산의 절경을 두고 “조물주가 이 산에 오로지 신령하고 빼어나며 맑고 아름다운 기운만을 모아 주어 그 기운으로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을 만들고, 그 기운으로 맑은 샘과 깊은 골을 만들고, 그 기운으로 아름다운 나무와 기이한 풀과 금모래와 은자갈을 만들었으니, 그 뛰어남이 오묘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금강산에 발현된 묘(妙), 즉 대상의 천기(天機)이다. 그리고 금강산에 드러난 묘(妙, 대상의 천기)를 인식하고 이것을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작시 주체의 깊은 천기 운용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작시 주체의 깊은 천기 운용은 앞서 「답황규하(答黃奎河)」라는 글에서 보았듯, 평상시의 ‘궁리(窮理)’와 ‘존심(存心)’ 등 학문과 수양에 의해 마련되는 것이다. 학문과 수양을 통해 주체의 천기가 천부(天賦)의 수준으로 보존되어 있을 때라야 대상의 천기(天機)와 조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체의 천기와 대상의 천기가 조우할 때, 즉 작가가 금강산의 진면목 ― 이하곤의 표현을 빌리자면, 금강산의 이경(異境)에 담긴 청명(淸明)하고 수이(秀異)한 기(氣) ― 을 포착할 수 있을 때 작가의 흥상(興象)은 원대해지고, 대상에 대한 형상화도 ‘진(眞)’하게 된다고 본 것이다.
김창협의 논리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수준 높은 산수시를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실재하는 대상에 나아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마주한 대상과 정신적 교감을 통해 대상의 진면목을 포착하는 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포착된 대상의 진면목을 정밀한 형용과 참된 묘사로 그려내야 한다. 이렇듯 김창협은 산수시 창작을 중심에 두고 도학적 산수와 문학적 산수를 유기적으로 통합하였다. 김창협의 견해대로라면, 실재 산수를 찾지 않고서 원리적 차원의 이념을 구하거나, 심원한 정신적 교감을 매개하지 않고 산수의 외면만을 그려내는 것은 모두 산수의 온전한 형상화가 아니게 된다. 산수시 창작이 실재 산수에 직접 나아가, 대상 산수와의 심원한 정신적 교감을 전제로 삼는 데 이르면 산수 유람과 산수시 창작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를 비켜서게 된다. 오히려 산수 유람은 도학에서도 문학에서도 상당한 보익(補益)이 된다는 점에서 적극 권장할 일이 된다.
백악시단 문인들은 이런 논리 위에서 산수 유람에 벽(癖)에 가까운 열정을 보였다. 산수 유람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산수에서 만나는 험지에 대한 인식에서 잘 나타난다.
산수의 승경은 잠깐 동안의 눈요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데 눈요기를 위해서 일신을 위태롭게 하니 이는 손가락 하나를 위해 어깨와 등을 잃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 쇠약한 늙은이가 이번 행차를 한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하였다.…(중략)…만약 비로봉 정상에 오른다면 솟은 산과 흐르는 물, 흩어져 수많은 모양이 된 것을 하나로 관통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니 우리 부자께서 천하를 작게 여기신 뜻과 천 년 뒤에 서로 부합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 사람의 남은 힘이 강하지 않아 그곳을 부여잡고 올라 밟을 수가 없으니 우두커니 서서 머뭇거릴 뿐이었으니 창망하고도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山水之勝, 不過片時之悅目, 爲悅目而危一身, 此不近於失肩背者乎! 深悔衰翁作此行也.…(中略)…若上毗盧絶頂, 則峙者流者, 散爲萬殊者, 庶可一以貫之, 而吾夫子小天下之意, 隔千載而相契矣. 顧此餘力不可強, 其所不能攀登躐躋, 則佇立夷猶, 悵望而已, 慨歎而已. -鄭曄, 『守夢集』 권3 「金剛錄」
작년에 금강산에 들어갔을 때 이르는 곳마다 위험한 곳을 딛고 올랐는데, 그곳에는 반드시 기이한 볼거리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미친 듯이 정신을 빼앗겨 거꾸러지는 것을 후회하지 않고 말하길, “늙은이가 일흔에 죽어 이 사이에 뼈를 묻어둘 수 있다면 다행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昨年金剛之入, 到處躡危, 必有奇觀. 故不悔狂而顚倒曰, 老七十而死, 藏骨於此中間, 幸耳. -權燮,『玉所稿』 「遊行錄·3」「耊南錄」
첫 번째 글은 수몽(守夢) 정엽(鄭曄, 1563∼1625)의 글이다. 잠깐의 눈요기를 위해 일신을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에 대해 정엽은 깊은 후회를 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비로봉을 올라 공자와 같은 정신적 오도(悟道)를 느끼고 싶었지만, 일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로봉을 오르지 않았다. 두 번째 글은 권섭의 글이다. 권섭은 험지를 올라보니 반드시 기이한 볼거리가 있었다며 험지를 만나면 피하기는커녕, 이런 절경 속에서 죽을 수 있다면 차라리 행운이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험지에 대한 상반된 두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것을 개인적인 기질의 차이로 돌릴 수도 있지만,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공히 험지를 마다 않는 모습을 보였다. 가령, 예를 들면 김창흡은 「경차가군운(敬次家君韻)」, 『삼연집습유(三淵集拾遺)』 권1라는 시에서, “산을 오르는 데 위험은 논하지 말라! 신선경에 들자마자 혼을 씻을 만할 테니[上山危險不須論, 纔入氷壺可濯魂].”라고 하였고, 이하곤은 “사람들은 백탑동의 험난함을 말하지만, 나는 백탑동의 기이함을 말하네. 기이한 곳이라 험난함이 있지만, 기이함을 좋아하니 위험함을 잊는다네. 이미 위험한 줄 모르니, 허리며 다리 피곤한 것이야 어찌 알겠는가? 기이한 경관 때문에 목숨을 거니, 사람들은 모두 나를 어리석다 비웃네. 허나 눈을 달고 이곳을 보지 않는다면, 어리석지 않다 한들 또한 어디에 쓰겠는가[人言百塔險, 我言百塔奇. 奇處故在險, 愛奇忘險危. 旣自不知險, 寧知腰脚疲. 以奇賭性命, 人皆笑我癡. 有眼不睹此, 不癡亦何爲. -李夏坤, 『頭陀草』책5 「百塔洞」]?”라고 한 바 있다.
유람에 대한 상반된 태도는 산수에 대한 변화된 인식에 기인한다. 조선 중기의 도학자 문인들은 산수를 철리적·관념적으로 사유하였다. 이들은 산수 유람을 통해 얻어야 할 것은 산의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수 속에 내재된 리(理)라고 생각했고, 리(理)는 만물에 균분(均分)한 것이지 험지와 절승이라고 더 많이 분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관(奇觀)을 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산수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백악시단은 천리(天理)는 만물에 균분한 것이 맞지만 천리(天理)를 체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천기(天機)는 명산의 이경(異境)에서 조우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김창협이 발언한 대로 금강산 같은 명산은 “조물주가 이 산에 오로지 신령하고 빼어나며 아름다운 기운을 모아” 주어 천기(天機)를 조우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인식 위에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기관(奇觀)을 찾아 험지를 마다 않는 열정을 보였다.
산수 유람에 대한 분명한 논리 위에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정신으로 산수를 마주하는 법에 대해 언급하기도 하였다.
무릇 산수를 잘 보는 자는 넓고 높은 그 가운데 정신을 응결시키기 때문에 천지의 고후(高厚), 일월의 광명을 거의 알지 못하고 사슴들이 앞에서 일어나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 우레와 천둥이 뒤에서 요란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릇 폐와 내장을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 나무와 바위이며 코와 입으로 호흡한 것은 모두 안개와 아지랑이니 대저 이 같은 연후에야 산수의 취(趣)를 깊이 얻었다 할 만하다. 만약 종이를 펼치고 붓을 빨며 뒷짐 진 채 주시하면서 시구를 조탁하는 데서 마음이 막히고 글자를 단련하는 데서 뜻이 분산된다면, 나의 정신이 이미 산수와 더불어 막연해져 서로 하나로 모일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어찌 산이 왜 높으며 물이 왜 맑은지를 아는 것이겠는가?
夫善觀山水者凝神於泓崢之間, 而殆不知天地之高厚、日月之光明, 麋鹿興于前而不瞬, 雷霆鬪于後而不懾. 凡槎牙腑肺者, 無非木石也; 噓吸口鼻者, 無非烟嵐也. 夫如是然後方可謂之深得山水之趣也. 若夫伸紙舐筆, 背手瞪目, 心衡乎琢句, 志分乎鍊字, 吾之精神已與山水漠然不相凑泊矣. 是焉知山何爲而高、水何爲而淸哉? -李夏坤, 『頭陀草』책16 「題沈叔平楓岳錄後」
怱怱嗟爾輩 迫暮又凌寒 | 아! 너희들 훌훌 가버렸구나! 세밑이라 다시 춥다고 하여. |
政是遊山法 惟須會意看 | 이때야말로 유산(遊山)의 방도이니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한단다. |
留神窮變化 不瞬視巖巒 | 정신을 붙여 변화를 궁구하려면 바위 하나 뫼 하나도 집중해서 봐야 한단다. |
所以三淵老 終年雪嶽山 | 이것이 삼연 노선생께서 종년토록 설악산에 사셨던 이유란다. |
「또 ‘한(寒)’자 운을 따라 짓다[又次寒字]」, 李秉成, 『順菴集』 권4
첫 번째 인용문에서 이하곤은 삼매(三昧)의 방법을 말하였다. ‘홍쟁지간(泓崢之間)’은 산수의 외형이 아닌 이면(裏面)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하곤은 산수와 작가가 일체의 개입 없이 혼연해진 상태를 “폐와 내장을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 나무와 바위이며, 코와 입으로 호흡한 것은 모두 안개와 아지랑이”라고 비유하면서 삼매를 통해 산수와 작가가 혼연해질 때 비로소 깊은 산수의 취(趣)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산수를 마주함에 있어 창작에 대한 의사가 먼저 개입되면 산수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며 경계하였다.
두 번째 인용된 시는 이병성이 김생과 아들 이도중(李度重)이 보림사를 다녀온 뒤에 지은 시편들을 보고 지은 시이다【이병성의 문집에는 인용된 시 바로 앞에 「차김생도아유보림산운(次金甥度兒遊寶琳山韻)」이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이병성은 이 시에서 산수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래도록 집중해서 보는 것이다. 수련의 ‘박모(迫暮)’와 ‘능한(凌寒)’의 상황은 통상적으로 유람이 불편한 때이다. 그런데 이병성은 오히려 이런 상황이야말로 유산(遊山)의 참맛을 알 수 있는 때라고 보았다. 직접 언술되지는 않았지만, 이때가 고요[靜]한 때이기 때문이며, 시각(視覺)의 제약으로 인해 산수에 대한 음미가 더욱 심화될 수 있는 때이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어지는 ‘의간(意看)’이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데, ‘의간(意看)’은 곧 대상과의 정신적 소통과정을 의미한다. 이병성은 ‘의간(意看)’을 이어 작가가 대상에 정신을 붙여[留神] 이치를 궁구하는[窮變化] 단계를 제시하였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오랫동안 집중해보기[不瞬視]이다. 이병성은 김창흡이 종년토록 설악산에서 은거한 까닭을 여기에서 구하였다.
이처럼 산수를 오래도록 집중해서 살피는 것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중시한 관람 방법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것은 주자의 산수 관법(觀法)을 따른 것이었다. 김창협은 「선유동(仙游洞)」이라는 시에서, “부자께선 상산사호(商山四皓) 아니심에도, 영지(靈芝)를 꺾으실 생각 품었네. 그 깊은 속을 어찌 측량하리까? 높은 흥 바야흐로 높아지셨네. 바위 앉아 오래도록 눈길 멈추고, 물가 임해 여러 차례 노래 불렀네. 정신은 만물의 묘리에 응결시키고, 도(道)는 천고의 유장함을 기약하셨네[夫子非綺皓, 猶懷採芝苗. 深寄詎易測, 高興方飄颻. 坐石久不瞬, 臨川屢興謠. 神凝萬物妙, 道期千載遙. -金昌協, 『農巖集』 권3 「仙游洞」].”라며 주자가 산수 유람을 통해 만물의 묘리를 깨우치고 도(道)를 체인하는 장면을 형상화하였는데, 주자가 만물의 묘리를 깨우치지 위해 취한 행동은 바위에 앉아 오래도록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대상을 관조하는 것[坐石久不瞬]이었다. 김창흡 또한 금강산 유람 중인 아우 김창집(金昌緝)에게 보낸 시에서, “마땅히 회옹(晦翁)께서 하신 법을 따라, 바위 하나 뫼 하나도 집중해서 보시게나.[須依晦翁法, 不瞬視巖巒]”【金昌翕, 『三淵集』 권11 「寄敬明蓬萊行中」】라며 주자가 그러했듯 김창집 또한 산수유람을 통해 만물의 묘리를 깨우칠 수 있기를 당부하였다. 한편, 이러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던 김창흡은 이병연의 「삼부연(三釜淵)」 시에 차운하면서 “잘 알겠네, 그려낸 것이 절묘하니 잠깐 배회한 것과는 같지 않음을[深知摸寫妙, 不似暫徘徊]”【金昌翕, 『三淵集』 권10 「次李一源詠三淵舊基韻」 3수 중 1수 尾聯.】이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이병연의 시가 오랫동안 집중해서 보기를 통해 대상의 진면목을 묘파했음을 칭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산수의 외형보다는 산수 이면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 더 많은 의의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치를 궁구하기 위해서 실재하는 산수와의 직접 대면을 일차적으로 요구하였다. 즉, 대상과 주체 간의 균형적 상호 지양을 통해 형태로서의 산수를 정신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리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대상[산수]에 대한 형상화 방식에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형상화에 있어 전신(傳神)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김창흡은 김시보에게 보낸 답장에서 “사진(寫眞)은 그 신정(神情)을 얻는 것을 귀히 여기니 다만 형골(形骨)에서 그친다면 곧 그 사람이 아니네. 시를 짓는 것 또한 그러하네. 그 형체를 본뜨다가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 검고 누런 색채를 대략하고 그 정신의 빼어남을 얻는 것만 못하다네[寫眞貴得其神情, 只以形骨而已, 則便非其人. 作詩亦然. 與其摸形而遺神, 不若略其玄黃而得其神駿也. -金昌翕, 『三淵集』 권9 「答士敬別紙」].”라고 하였고, 이하곤 또한 사령운의 “산수유청휘(山水有淸暉)”라는 시구를 산수의 취(趣)를 깊이 체득한 전신(傳神)의 예로 제시하면서 산수시 창작에 있어 전신(傳神)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나는 전부터 사령운의 ‘산수에 맑고 빛남이 있다’는 말을 좋아했는데, 마침내 ‘청휘’로 정자의 이름을 삼았다. 대개 산수에는 절로 일종의 맑고도 차며 빼어나면서도 이채로운 기운이 있어 사람이 그것을 감촉하면 마치 얼음과 눈이 심장에 스미는 것처럼 저도 모르게 상쾌해진다. 이것은 산수에 대한 취(趣)에 깊은 자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사령운의 이 시는 거의 산수의 전신(傳神)이니, 그렇다면 사령운 또한 산수의 취(趣)에 깊은 자라 할 것이다[余嘗愛康樂‘山水有淸暉’之語, 遂以‘淸暉’名之. 蓋山水之間, 自有一種淸泠秀異之氣, 令人觸之, 如冰雪沁入心腑, 不覺爽然, 此非深於山水之趣者不知也. 康樂此詩殆爲山水傳神矣. 然則康樂亦可謂深於山水之趣者矣. -李夏坤, 『頭陀草』책16 「淸暉亭記」].】.
그러나 주목할 것은 백악시단이 추구한 전신(傳神)은 형사(形似)를 매개로 한 전신(傳神)이라는 점이다. 백악시단의 산수시는 전신(傳神)에 궁극적 의의를 두었지만, 그렇다고 형사(形似)를 소홀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아래 이하곤의 글은 전신(傳神)을 추구하면서도 형사(形似)를 중시한 좋은 보기가 된다.
시는 성조의 고하와 자구의 공졸을 막론하고 그 그려낸 경(境)이 참되고[眞] 표현한 정(情)이 진실[實]해야 천하의 좋은 시라 할 수 있다. 이백과 두보 이후에 백낙천, 소식, 육유와 같은 여러 사람의 시는 그 성조가 반드시 모두 높은 것은 아니며, 자구가 반드시 모두 공교롭지는 않다. 하지만 또한 그들의 시는 참되지 않은 경(境)을 그려낸 적이 없고 진실하지 않은 감정을 말한 적이 없어 읽어보면 참으로 읽는 자가 그 땅을 직접 밟아보고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이야기를 듣는 것 같으니 역시 천하의 좋은 시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작시(作詩)는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는 것과 꼭 같다. 터럭 하나하나가 모두 꼭 닮은 뒤라야 그 사람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터럭 하나라도 닮게 그리지 못했다면 채색의 솜씨를 최고로 발휘했더라도 신정(神情)과는 곧 무관하게 되니 어찌 그 사람을 그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왕안도(王安道, 王履)는 ‘문장은 마땅히 옮기려 해도 움직이지 않아야 하니, 말머리의 굴레와 같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나의 뜻 그대로다.
詩無論聲調高下、字句工拙, 其寫境也眞, 道情也實, 斯可謂之天下之好詩也. 李、杜之後, 如白樂天、蘓子瞻、陸務觀諸人之詩, 其聲調未必盡高, 字句未必盡工, 然亦未嘗寫不眞之境, 道不實之情, 使人讀之, 眞若身履其地而面承其言也, 盖亦天下之好詩也. 故余嘗曰: ‘作詩正如畫工之寫眞, 一毛一髮無不肖似, 然後方可謂之寫其人矣. 苟或一毛一髮不能肖似, 則雖極丹靑之工, 而神情便不相關, 豈可謂之寫其人乎? 王安道曰「文章當移易不動, 愼勿與馬首之絡相似」, 正余此意也.’ -李夏坤, 『頭陀草』책17 「南行集序」
이하곤은 ‘경진(境眞)’과 ‘정실(情實)’을 좋은 시의 관건으로 제시하였는데 경(境)과 정(情)은 경(境)이 진(眞)해야 정(情)도 실(實)해지는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서 작시(作詩)를 화가의 초상화 그리기에 비유하였는데 여기에서 형사(形似)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터럭 하나하나까지 모두 꼭 닮게 그려야 한다’는 이하곤의 발언은 앞서 본 김창흡의 초상화 비유와 배치되는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하곤은 “만약 터럭 하나라도 닮게 그리지 못했다면 채색의 솜씨를 최고로 발휘했더라도 신정(神情)과는 곧 무관하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형사와 전신의 단계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밝힌 것이다. 곧 ‘전신을 위한 형사’, ‘형사를 통한 전신’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용문 하단의 왕리(1332~1383)의 말 또한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왕리는 「책이 완성됨에 장남삼아 이것을 써 스스로를 나무란다[帙成戲作此自譏]」라는 글에서 한유의 「남산시」가 10여 구절에서만 종남산의 모습을 담아내고, 나머지 구절은 꼭 종남산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형상화가 이루어진 점에 대해 비판하였다. 왕리는 한유의 「남산시」를 실제 공간의 형사를 소홀히 하고 관념적 표현으로만 전신한 작품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두보는 실사(實事)와 실경(實景)에 의거하여 형사와 전신,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의 높이에서도 문학적 표현에서도 모두 성취를 거둘 수 있었다고 보았다【昌黎「南山詩」二百四句, 鋪敘詳, 文采贍. 議者謂其似「上林」、「子虚」賦, 才力小者不能到, 是固然矣. 然余竊觀之, 其‘吾聞京城南, 兹維羣山囿. 東西兩際海, 西南雄太白. 突起莫間簉. 藩都配德運, 分宅占丁戊. 逍遙越坤位, 詆訐陷乾竇. 昆明大池北, 前尋徑杜墅. 坌蔽畢原陋, 初從藍田入.’等十餘句, 可以施之於終南山, 外此則凡大山皆有之, 皆可當不獨終南也. 移此以指他山, 誰曰不可? 況又每有梗韻生意, 使文辭牽綴而義理不得通暢者、固才力小者不能到, 但恐非終南之本色耳. 故先正謂‘文章當使移易不動, 愼勿與馬首之絡相似’. 竊謂縱不宜規規然傳神寫照, 亦豈宜泛泛然駕虛立空? 非駕虛立空之不足以成文, 然終無一主十客之理, 務駕虛立空以夸其多, 不亦‘雖多亦奚以爲’乎? 少陵則不然. 其自秦入蜀詩二十餘篇, 皆攬實事實景, 以入乎華藻之中, 旣不傳神寫照, 又不駕虛立空, 是故高出人表而不失乎文章之所以然也. -朱存理, 『趙氏鐵網珊瑚』, 電子版『四庫全書』) 권16 「帙成戲作此自譏[王履]」】.
이하곤이 자신의 생각을 대변했다며 언급한 “문장은 마땅히 옮기려 해도 움직이지 않아야 하니, 말머리의 굴레와 같아서는 안 된다” 말은, 시란 실지체험(實地體驗)에 바탕하여 그 시를 읽으면 그 곳을 알 수 있어야지 어디에라도 붙일 수 있는 범범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하곤 자신이 추구했던 ‘경진성실(境眞情實)’과 상통한다. 이하곤에게 있어 형사와 전신과 같은 형상화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각답실지(脚踏實地)하는 것이었다. 실제의 공간을 직접 체험하면서 정신적으로 소통한 실감(實感)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좋은 시의 요건이었던 것이다. 실재 공간을 직접 체험한 것이라면 형사와 전신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보다 자유롭게 구사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실제 대상과 이룬 교감은 전신만으로도, 형사만으로도, 형사와 전신을 아울러서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하곤의 윗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전신을 위해 생동감 넘치는 형사를 애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개의 시는 작품 안에 형신(形神)의 두 요소를 모두 담아내는데, 일부의 작품은 형사만을 전면화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전신(傳神)한 바를 느끼게 하고, 또 일부의 작품은 작가가 느낀 바만을 전면화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대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세 번째로 언급한, 전신만으로 이루어진 산수시는 그다지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대상의 의의를 상대적으로 높이 설정하는 시론에 따른 것으로, 왕리의 말처럼 작가의 주관적 흥회만을 내세워 꼭 그곳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시 쓰기를 배척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백악시단 산수시의 중요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대상 산수를 직접 체험하면서 산수에 오묘하게 발현되는 천기와 조우하고 그로부터 고양된 정신적 깨달음을 작품 안에 담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자신이 목도한 산수를 핍진하게 묘사하면서도 그 생생한 형사를 통해 작가의 깊은 정신적 흥회를 담아낼 수 있었다【이런 과정을 거쳐 창작된 산수시에는 자연스럽게 대상의 사실성과 작가의 정신성이 공존하게 되고 대상은 진경(眞景)에서 출발하여 진경(眞境)으로 고양되게 된다. 이는 백악시단의 문예론을 공유했던 정선의 금강산 그림이 실재 경관의 특징적인 면모를 구상화하면서도 육안(肉眼)으로 보이는 실재대로가 아니라 심안(心眼)으로 해석되고 재구된 특징을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의 산수시는 대상에 대한 실감(實感)나는 묘사가 특징적이면서도 한편으로 대상과의 깊은 정신적 교융이 온축된 이지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제 실제 작품을 통해 이러한 특징들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김창흡의 시를 보자. 아래 시는 『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 소개된 작품이다.
水落毘盧峰 | 물은 비로봉에서 떨어져 |
鍧鍧萬仞壑 | 굉음을 울리며 만길 골짝을 치달리네. |
東兼九井峰下溪 | 동쪽으로 구정봉 아래 시내와 합쳐져 |
流向海門石壁隘 | 바다 향해 달리니 바위 벼랑 비좁구나. |
西來五十有三佛 | 서역에서 온 쉰셋의 부처가 |
夜半驅龍以金策 | 한밤중에 금책(金策) 휘둘러 용들을 몰아내니 |
龍失宅 叫其子 | 용은 집을 잃고 새끼 찾아 울부짖는데 |
雲亦片片與龍徙 | 구름도 조각조각 용을 따라 옮겨갔다네. |
淪洞百丈龍實都 | 백 길 깊은 골짜기는 실로 용이 사는 곳인데 |
環以揷天雲錦壁 | 비단 구름 어린 절벽 하늘 찌르며 빙 둘렀고 |
九淵上下白石素 | 아홉 못 아래 위에 하얀 바위 더욱 흰데 |
明鏡爲底水銀滴 | 환한 거울 바닥으로 수은(水銀)이 떨어지네. |
鼓鬐磨鬣石痕古 | 갈기로 치고 비볐나? 바위에 흔적이 고색창연한데 |
龍之爲變見佛力 | 용이 변화를 부린 모습에서 부처의 힘을 보겠네. |
初淵觀者慄未逼 | 첫 못은 무서워서 보는 이들 다가서지 못하고 |
及至終淵髮皆肅 | 마지막 못에 와서도 머리칼이 빠짝 서네. |
髮森森 步躩躩 | 머리카락 쭈뼛쭈뼛, 발걸음은 주춤주춤 |
松林倚身足底瀑 | 솔숲에 몸 기대니 발아래가 폭포로다. |
冥游諸僧歌霽日 | 명유(冥游)하던 여러 중들 갠 날을 노래하니 |
爾忘風雷閃不測 | 그대들은 바람 우레 순식간의 불측한 변화 잊었도다. |
滄瀛苦闊巖竇小 | 푸른 바다 실로 넓고 바위 샘물 작지만 |
淵雲爲雨沛東國 | 못의 구름 비가 되면 동국 흠뻑 적시리니 |
誰知淵龍非海龍 | 누가 알랴! 못의 용이 해룡이 아님을 |
誰知九淵非一宅 | 누가 알랴! 아홉 못이 하나의 집이 아닌 줄. |
「구룡연가(九龍淵歌)」, 金昌翕, 『三淵集』 권2
이 시는 1685년 김창흡이 세 번째 금강산 유람에서 지은 것이다. 김창흡은 전 생애에 걸쳐 여섯 차례 금강산을 찾았는데, 두 번째 유람까지는 시를 남기지 않았다. 이는 자신의 말대로 금강산의 경관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며【金剛, 我國之山也. 然稱難見, 旣見又稱難詩, 所言來遠矣. 今人始聞金剛有瓌奇壯幻之觀, 則莫不以大心傾之, 又莫不以大事營之, 故卽事鮮辦. 蓋自生其難而未必金剛之爲難. 僅乃一得造焉, 則以彼動搖之心, 卒當不暇之接. 目將瑩焉, 口將胠焉, 氣且瞀焉, 意且閼焉. 求所以敵其雄奇而竟未能奇, 則益枵然而歸. 斯所謂神之不勝也. 余故於金剛遊者再矣, 詩則無一焉. -金昌翕, 『三淵集』 권25 「題兪命岳李夢相金剛錄後」】 금강산의 절경 앞에 허다한 감탄만을 남발하기 보다는 금강산의 절경과 소통할 만한 자신의 내적 역량을 쌓으려 했기 때문이다【詩近方, 文近圓. 定格而後俟感以禦卑, 精思而後出辭以禦易, 積學而後修藻以禦陋, 觸機而後成句以禦鑿. 才情未裕, 景事寡劑, 騖於雄奇莽蒼之觀, 而略於澹蕩優柔之致.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9 「漫錄」[論詩]】. 김창흡의 산수시는 세 번째 금강산 유람으로부터 산수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핍진한 묘사와 산수를 마주한 정신적 흥회가 어우러지기 시작하여 산수의 절경 속에서 이치를 구하고 깨달음까지 형상하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92면 및 100~101면 참조.】.
시는 비로봉의 높이와 석벽의 협소함을 대비적으로 구사하며 구룡연 물소리를 초점화한 뒤, 물소리의 굉대(宏大)함을 부처에게 쫓겨나 집도 새끼도 잃어버린 용의 울부짖음으로 환치한다. 굉음을 내며 치달리는 물을 구룡연의 설화와 결부시킴으로써 구룡연에는 거센 기세에 신비로움까지 더해지게 된다. 구룡연 주위로는 오색구름이 어우러진 석벽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있고 못가에는 분류(奔流)에 씻긴 바위들이 하얀 빛을 띠며 널려있고 거울 같은 소(沼)로는 수은(水銀) 같은 물방울이 쏟아진다. 바위를 할퀸 물의 흔적을 애통한 용의 몸부림으로 형용한 뒤 구룡연의 폭수(暴水)의 기세를 말하였다. 구룡폭포가 직하하는 첫 못은 접근조차 어려운 전율을 주었는데 그 기세는 마지막 아홉 번째 못에 이르러도 머리카락이 설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초연(初淵)’과 ‘종연(終淵)’을 부조적(浮彫的)으로 상치시켜 현장의 실감(實感)을 증폭시킨 것으로 모자라 전율하는 자기의 모습을 3자 구의 짧은 호흡으로 제시함으로써 구룡연의 장관과 기세는 더욱 생동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같은 생생한 형사를 통해 구룡연을 이미지화한 뒤 김창흡은 자신의 흥회를 붙였다.
함께 했던 중들은 구경을 마친 뒤 현상적 흥취에 빠져있는데 김창흡의 정신은 우주적 이해로 심화된다. ‘창영(滄瀛)’과 ‘암두(巖竇)’를 대소(大小)로 상치시키며 이 못에서 피어난 구름이 비를 내리면 동국(東國)이 흠뻑 젖을 것이라 상상하였는데, 이는 바다의 물이건 바위틈의 샘물이건 근원은 모두 하나의 물[一水]이라는 본원적 차원의 동질성을 자각한 것이다【萬殊之所以一本, 一本之所以萬殊, 如一源之水流出爲萬派, 一根之木生爲許多枝葉. -『朱子語類』 권27】.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구룡연의 용이 바다의 용과 다르고 구룡연 아홉 못이 모두 별개임을 누가 알겠느냐는 표현은 하나의 근원에서 생성된 만유가 무궁한 변화를 직조해내는 생생경(生生境)에 대한 자각이다. 곧 김창흡은 구룡연의 물을 통해 통체태극(統體太極)과 각구태극(各具太極)【自男女而觀之, 則男女各一其性, 而男女一太極也; 自萬物而觀之, 則萬物各一其性, 而萬物一太極也. 蓋合而言之, 萬物統體一太極也; 分而言之, 一物各具一太極也. -『近思錄』 권1】의 본원적 사유에 도달한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생생한 형사를 통해 구룡연을 하나의 활경(活境)으로 그려내고 거기에 일본만수(一本萬殊)의 우주적 통찰을 담아내었다. 다음의 시 또한 생생한 형사와 이지적 흥회가 잘 결합된 작품이다.
洞闢數千里 中成百千瀑 | 골짜기가 수 천리에 열리자 중간 중간 수천 폭포 이루어졌네. |
瀑流被磐石 大抵白玉白 | 폭포 물살 너럭바위를 타고 흘러 백옥과 부딪혀 흰 빛이 되네. |
殷殷起晴雷 颯颯洒飛雪 | 우르릉 마른하늘 우레가 일자 쏴아 쏴아 눈발이 뿌려지는 듯. |
楓林蕩倒光 丹綺燦相射 | 단풍 숲 거꾸로 비쳐 일렁거리니 붉은 비단 반사되어 찬란하구나. |
看看蘊奇秀 應接不暇目 | 볼수록 기수(奇秀)함을 갈무리하여 응접(應接)하느라 내 눈은 겨를이 없다네. |
瑩凈豈堪唾 懔慄自生粟 | 맑고도 차가운 물에 어찌 침을 뱉으랴 오싹하여 저절로 소름 돋는 걸. |
洗盡俗慮醒 稍覺淸明得 | 속된 생각 싹 씻어 각성케 하니 조금씩 깨닫노라! 청명(淸明)을 얻어 감을. |
將此擴充去 可入聖賢域 | 장차 이 청명함을 확충시켜 간다면 성현의 경지에도 들어갈 수 있으리니 |
不必神仙子 飄然蛻眞骨 | 반드시 신선처럼 표연히 탈태하여 진골(眞骨)될 필요 없지. |
「만폭동에서[萬瀑洞]」, 趙正萬, 『寤齋集』 권1
이 시는 조정만이 1691년 금강산을 유람하며 쓴 시이다. 시는 만폭동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1~10)과 만폭동 유람하고 난 감회를 표출한 부분(11~18)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1구와 2구에서 만폭동에 들어서 본 전체적인 모습을 말한 뒤, 시선을 대상에 밀착시켜 형상화를 시작한다. 폭포의 물과 너럭바위가 어우러진 모습을 하얀 옥[너럭바위]에 하얀 빛[폭포 물살]이 더해진다며 감각적으로 형용하였다. 폭포가 너럭바위를 입고 있다[被]고 한 표현도 선명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런 다음 폭포의 모습을 한층 끌어당겨 직류(直流)하는 폭포의 물에 초점을 맞추고 폭포성(瀑布聲)의 기세를 마른하늘의 우레로, 흩날리는 포말을 하얀 눈으로 비유하였다. 폭포수를 보던 시선은 이제 폭포수 밑 소(沼)로 이동한다. 소(沼)에는 붉게 물든 단풍 숲이 도영되어 일렁이고 있었는데, 작가는 이 광경을 실제 단풍 숲과 도영된 단풍 숲이 거울 같은 수면에서 반사되어 서로에게 찬란한 선홍빛을 보낸다고 형용하였다. 그리고 이런 절경을 보느라 눈이 쉴 겨를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태었다.
이 작품의 형사 부분에서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시선 처리와 이미지 창출능력이다. 사진촬영에 빗대어 보면, 작가는 광각의 팬포커스(pan focus)로부터 만폭동을 조금씩 줌인(zoom in)하여 폭포수와 도영된 단풍 숲을 부각하고 주변을 아웃포커스(out focus)하였다. 이러한 시선 처리를 통해 독자는 만폭동의 모습을 광각에서 접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화각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사진촬영에서는 불가능한 촬영하는 작가 자신을 화면 속에 담아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흥취와 몰입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까지 만으로도 한 편의 시로 손색없는 완성도를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작가는 초점을 경물에서 자신에게로 옮겨 이어질 신사(神似)를 예비한다. 또한 이미지 창출과 관련해서는 하얗고 투명한 색조에 붉은 색조를 곁들임으로써 백색은 더 하얗게 홍색은 더 선명해지게 하였는데, 이를 통해 독자는 시를 읽으며 눈이 정화되는 듯한 심미적 효과를 느끼게 된다. 또한 이렇게 창출된 맑고 선명한 이미지는 이어지는 부분에서의 마음의 청명(淸明)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작가는 신사의 첫 부분에서 소름이 돋는다고 하였다. 소름[粟]은 만폭동에서 얻은 정신적 쾌(快)를 구상화한 시어인데, 작가가 얻은 쾌는 속된 생각을 씻어버리고 정신의 각성을 얻은 데서 발현된 것이었다. 일체의 속된 생각이 씻겨나간 자리를 채운 것은 마음의 청명(淸明)함이었다. 조정만이 얻은 마음의 청명은, 앞서 이하곤이 말한 대로 명산(名山) 이경(異境)의 청명(淸明)하고 수아(秀異)한 기운을 얻은 것으로 천리를 체인할 수 있는 마음의 허명정일(虛明靜一)한 상태와 통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청명함을 확충시켜 가면 성현의 경지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수양론에 관해서는 김창협의 다음 글이 참조가 된다. “至於‘衆人無靜時’, 未知道以果曾有此說否, 而愚謂未可如此說殺. 昔南軒嘗謂‘衆人無未發時’, 胡廣仲以爲疑, 而朱子論之曰‘ 亦隨人稟賦不同’, 此言最當. 蓋雖非聖賢, 性靜而寡欲者, 亦自有此時節, 其餘則雖有而絶少, 最下者則全無焉. 雖須臾之間, 而此心未發, 則所謂中者, 固卽此而在, 但無戒懼工夫, 體而存之, 是以旋又汩沒失之耳. 衆人之所以異於聖賢, 只在於此. 今謂‘衆人元無靜時’, 則固太過. 而若謂‘衆人之未發, 不足以爲中’, 則是天命之性, 其在衆人, 却不能無偏倚矣, 其爲不識大本, 顧不甚哉! -金昌協, 『農巖集』 권19 「答道以」” 김창협은 보통 사람도 그 기질과 수양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미발의 때가 있으니 계구(戒懼)를 통해 미발시의 마음, 즉 심(心)의 허정(虛靜)한 상태를 확장 시켜나가면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마지막 두 구절은 신선술이나 다른 이단의 학설처럼 대번에 도를 얻으려 하지 않고 지난하지만【주자학의 지난한 학문과 수양과정을 이단(異端) 학설의 손쉬움과 대비하는 인식은 다수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인식은 일반적으로 이단(異端)의 경박함과 사학(斯學)의 근실함으로 대비된다. “至於大明之世, 王守仁輩繼出, 陸說大行, 朱學幾絶矣. 光運曰: ‘大抵心本虛明, 禪學以心觀心, 心上少有光明, 則謂之頓悟. 吾儒之學, 博雅然後, 一以貫之, 其工夫階梯甚多, 學者厭其高遠, 以禪學視爲捷逕, 靡然趨之, 宗普者出, 而假托儒家文字, 粧撰說出, 學者之誑惑益甚. 至如九淵之學, 一味禪會, 陽托尊儒, 陰諱其學, 雖以鴛鴦繡出從君看, 莫把金針度與人之句見之, 可知其全諱其學矣, 朱子生前, 其說只行於江西, 而王陽明輩出後, 遂大行於一世, 道德之學, 幾乎熄矣.’ -『承政院日記』 영조 4년 3월 1일”】 도를 추구하며 학문과 수양에 정진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시는 만폭동의 경치를 맑고 선명한 이미지로 형사하면서 그것을 작가의 정신적 흥과 각성으로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형사와 신사의 유기성이 잘 발현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앞서 김창흡의 「구룡연가」와 비교해보면 형신을 통해 대상을 형상화한 점은 같지만, 김창흡의 시가 주된 제재였던 물과 용을 작품의 신사(神似) 부분까지 일관되게 유지하여 시상과 정감의 통일성을 높이고 시적 흥취를 고양시킨 반면, 조정만의 시는 신사 부분에서 이치를 직출함으로써 정감의 유기성과 시적 흥취가 다소 떨어지게 되었다. 대신 조정만의 시는 이 신사를 통해 근실하고 방정한 의론성을 획득하였다.
두 작품이 보인 시적 경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모두 산수를 정신으로 체득하고 그것을 형신을 통해 드러냈다는 점에서 같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바로 작가 각자의 개성이요, 작가 각자의 ‘진(眞)’이라 할 수 있다. 김창흡의 시를 읽으면 김창흡의 사람됨을, 조정만의 시를 읽으면 조정만의 사람됨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실제의 경험을 통해 얻은 자기대로의 정감을 粉飾하지 않기 때문에 천편일률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바로 이것이 ‘진시’의 지향이었음을 상기해보면, 두 시편 모두 ‘진시’의 지향과 실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본 두 편의 시는 전신(傳神)한 바가 대단히 사변적이라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백악시단의 산수시가 모두 다 이렇듯 사변적인 신사를 하고 있지는 않다. 다음에 살필 작품은 유람의 흥취를 잘 담아내었다.
萬二千巖各滴淙 | 만 이천 봉 각각에서 방울져 떨어진 물 |
合爲轟瀑觸爐峰 | 합쳐져 폭포 되어 향로봉에 부딪치네. |
雷霆㙜怖雙靑鶴 | 대에 깃든 쌍청학은 우레 천둥 두려운데 |
雪雹潭噴五色龍 | 못에 서린 오색용은 눈과 우박 내뿜네. |
金地無蹊唯鐵鎖 | 금지(金地)엔 길도 없어 오직 쇠사슬뿐이요 |
玉山何水不珠舂 | 옥산(玉山)이라 어느 물인들 구슬 방아 안 찧으랴! |
飛流濺沫從他怒 | 날리는 물줄기 흩뿌린 물방울 예서 더욱 거세지니 |
只恐蓬萊字滅蹤 | 양봉래 새긴 글자 다 지울까 걱정일세. |
「만폭동(萬瀑洞)」, 趙裕壽, 『后溪集』 권2
만폭동은 내금강을 대표하는 명승으로 금강문으로부터 화룡담까지의 구간을 가리킨다. 이곳은 금강산 수천 지류의 물이 한데 모여 기암괴석과 격류(激流)하는 곳으로 많은 폭포와 沼가 금강산의 계곡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리용준·오희복 공역, 『금강산 한시집』, 문예출판사[평양], 1989, 172면 참조.】. 김창협은 이곳 만폭동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이곳 만폭동은 전체가 거대한 반석이 깔려있는데 바위는 모두 옥처럼 하얗다. 시냇물은 비로봉에서 내려와 여러 골짜기를 교차해서 흘러내려 다투어 내달리다 모두 이 만폭동에 모여든다. 만폭동의 바위 중에 험준하게 들쭉날쭉하고 얼기설기 얽혀 평탄하지 않은 것들은 또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어져 있으면서 계곡물과 기세를 겨룬다. 물이 이러한 바위를 만나면 반드시 치달리다 솟구치고 부딪쳤다 잦아들며 온갖 변화를 다 보인 뒤에야 비로소 성난 기세를 누그러뜨려 천천히 흘러 평탄한 시내가 되고 얕은 여울이 된다. 그러다 중간에 낭떠러지를 만나면 다시 떨어져 폭포가 되고, 폭포 아래에서 다시 고여 소가 된다. 폭포는 길이가 6, 7길에서 1, 2길 사이이고, 못은 넓이가 7, 8묘(畝)에서 3, 4무 사이로, 못의 이름은 구담(龜潭), 선담(船潭), 청룡담(靑龍潭), 흑룡담(黑龍潭), 응벽담(凝碧潭), 진주담(眞珠潭), 청유리담(靑琉璃潭), 황유리담(黃琉璃潭) 등인데, 벽하담(碧霞潭)이 가장 아름답고 화룡담(火龍潭)이 가장 웅장하다. 이것이 만폭동의 대략이니, 상세한 것은 나로서는 다 형언할 수가 없다.
蓋是洞全以大盤石爲底, 石皆白色如玉. 而溪水自毗盧峰以下, 衆壑交流, 奔趨爭先, 咸會于是洞. 石之嶔崎磊落、槎牙齦齶者, 又離列錯置, 以與水相爭, 水遇石必奔騰擊薄, 以盡其變, 然後始拗怒徐行, 爲平川爲淺瀨. 間遇懸崖絶壁, 又落而爲瀑, 瀑下又滙而爲潭. 瀑長自六七丈至一二丈, 潭廣自七八畝至三數畝. 其名爲龜爲船, 爲靑龍、黑龍, 爲凝碧, 爲眞珠, 爲靑琉璃、黃琉璃, 而碧霞最奇麗, 火龍最雄大. 此其大略也. 其詳則余無得以窮焉. -金昌協, 『農巖集』 권23 「東遊記」
조유수의 시 또한 만폭동의 격류가 빚어내는 변화무쌍한 기세를 형상화하였다. 수련에서는 수천 지류가 합류하여 폭포를 이룬 모습을 그렸고, 함련에서는 폭포의 위세를 비유적으로 묘사하였다. 우레와 천둥으로 비유된 폭포성은 석벽[청학대] 높이 사는 학마저 무서워할 정도라며 그 기세를 실감나게 형상화하였고 폭포수가 만들어내는 포말과 연무는 오색룡이 내뿜는 것으로 신비화시켰다. 경련에서는 폭포 주변의 경관을 담았다. 금지(金地)는 본래 사원을 가리키는 말로【『釋氏要覽』上: ‘金地或云金田, 即舍衛國給孤長者, 側布黃金, 買祇太子園, 建精舍, 請之居之.’ -『漢語大詞典』 [金地]】, 여기서는 보덕암을 가리킨다. 쇠줄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듯한 보덕암의 모습을 제시한 것은 폭포수가 금세라도 보덕암이 매달린 암벽을 쳐부술 듯 그 기세가 엄청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폭포의 기세는 더욱 격해지고 보덕암은 더욱 아슬아슬해지는 실감이 증폭된다. 또한 하얀 옥을 깎아 만든 듯한 향로봉에 엄청난 기세의 폭포수가 떨어지니 거기서 솟구치는 물방울들은 마치 옥을 빻아 만든 구슬 같다고 하였다. 폭포수의 기세는 미련으로 이어진다. 옥산에 부딪혀 더욱 거세어진 물줄기는 물방울을 사방으로 토해내는데 그 물방울이 양사언의 글자를 다 지울까 걱정일 정도라고 하였다. 김창협은 “양봉래(楊蓬萊)가 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용이 꿈틀대는 듯한 필치가 산세와 자웅을 겨루는 듯했다[楊蓬萊所書‘蓬萊楓嶽元化洞天’八大字刻在石面, 龍挐猊攫, 幾欲與嶽勢爭雄. -金昌協, 『農巖集』 권23 「東遊記」].”면서 양사언 글씨의 기세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조유수는 그런 양사언 글씨마저 지워버릴 기세라며 시상을 마무리 하였다.
조유수의 이 시는 거센 폭류(瀑流)가 일체의 속된 생각을 씻어 청정해졌을 작가의 정신 상태는 독자들로 하여금 행간에서 읽도록 하고, 오직 산수가 주는 흥취를 전면화한 점이 앞서 본 두 작품과 다르다. 그래서 조유수는 그런 흥취를 형상화하기 위해 감각적인 비유, 호한한 연상을 활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만폭동의 기세와 짝하는 호쾌한 미감을 성취할 수 있었다.
한편 백악시단의 산수시 가운데는 형사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여 현장감과 실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작품들도 있다.
衆壑遍淸絶 玆谷信靈邃 | 여러 골짜기 두루 맑고 빼어났지만 이 골짝은 참으로 신령스럽고 깊구나. |
秀巒似留雪 喬栝如揷翠 | 우뚝한 봉우리는 눈이 아직 남은 듯 높이 솟은 회나무는 비취를 꽂아둔 듯. |
泠泠巖溜滴 淺淺石瀨駛 | 똑똑똑 벼랑에선 물방울이 떨어지고 콸콸콸 바위에선 거센 물살 쏟아지네. |
荒塗屢迷惑 灌木恒森緻 | 험한 길이라 여러 차례 길을 헤매는데 관목들은 언제나 빽빽하구나. |
振策躡先登 蔭樾企後至 | 지팡이 떨쳐 잡고 한 발 한 발 먼저 올라 그늘에서 뒷사람들 오기를 기다리니 |
魚貫緣絶壁 猿掛窺無地 | 물고기를 꿴 듯 절벽에 바싹 붙고 원숭이처럼 매달려 디딜 곳을 엿보네. |
遊陟旣告勞 探眺彌恣意 | 높은 곳 유람은 전부터 힘들다고들 하니 차근차근 조망하길 오래도록 실컷 하네. |
遙畛辨綺錯 遠村俯棊置 | 저 멀리 들판은 비단이 뒤섞인 듯 저 먼 마을은 바둑돌을 늘어놓은 듯. |
雲日翳崦嵫 霜木耀崖寺 | 태양은 어느덧 엄자산(崦嵫山)으로 사라지고 서리 내린 나무가 벼랑 위 절집에 환하구나. |
沈吟悄欲下 揮管發幽思 | 시 읊을 적엔 시름겨워 내려가고 싶더니 젓대소리 울리자 그윽한 생각 일어나누나. |
「선암(船庵)」, 金昌業, 『老稼齋集』 권1
선암은 수미봉 아래에 있는데 암자의 위치가 대단히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선암이라는 명칭이 금강산이 바닷물에 잠겼을 적에 암자 아래에 배를 대어두었기 때문에 생겼다고 할 만큼 높고도 험한 곳이다【在須彌峯下, 處地極高絶. 僧傳玆山爲海所沈, 曾泊舡於庵下, 以此得名云. 語甚誕妄矣. -李夏坤, 『頭陀草』책5 「船庵」의 주석】. 이재(頤齋) 이의숙(李義肅, ?~1807)은 “암자는 높고 외진데다 대단히 위험하여 오는 이가 드물다. 높은 산봉우리들을 등지고 좌우로 높은 산줄기가 벌려 섰는데…(중략)…원통, 소망과 같은 여러 산봉우리들도 여기에 이르면 모두 앉아서 어루만질 듯하였다. 산 너머로 들이 보이고 들 너머로 멀리 산봉우리가 솟아있었다. 길이 암자 서북쪽으로 뻗어있는데 뱀이 기어가듯 구불거렸다. 혹 높은 벼랑에 길이 끊긴 곳에는 잡고 오를 쇠밧줄이 늘어져 있었는데 줄을 잡고 올라오자 또 다시 험난함이 처음 같았다. 무릇 3리쯤 머리를 숙이고 내려오니 선암이라 하였다[庵峻僻竆危, 罕致人. 負嶐峯, 左右列巘, …(中略)… 圓通、所望諸崗, 至是皆坐拊, 山外見野, 野外出遠岑. 逕出庵西北, 蛇緣跉行, 或崱壁斷道, 垂鐵鎖令攀引乃昇, 旣昇又澁難如初. 凡三數里, 方俛而降, 呼船庵. -李義肅, 『頤齋集』 권4 「金剛評」 중 船庵].”라며 선암의 높고 험난함을 묘사하였다.
김창업의 시 또한 높고 험한 선암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김창업은 금강산 여러 골짜기 가운데 이곳을 가장 신령스럽고 깊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선암(船庵)까지 이르는 길에서 본 풍경과 체험을 감각적이면서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우뚝한 봉우리는 백설이 덮인 듯 하얀 빛을 띠고, 쭉 뻗어 자란 회나무는 비취를 꽂아둔 듯하다며 비유를 통해 선명한 색채 이미지를 구사하였다. 뒤처진 사람들이 험로를 어렵사리 따라오는 모습 또한 대단히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벼랑에 딱 붙어 줄지어 가는 사람을 물고기 꿰미에 비유하고, 벼랑에 매달려 가는 사람을 원숭이에 비유하였다. 특히 원숭이처럼 매달려 발 디딜 곳을 찾아보건만 변변히 디딜 곳이 없다는 데 이르러선 아슬아슬한 실감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렇듯 험난한 길을 오른 시인은 고생한 보람을 오랜 조망에서 찾았다.
이의숙의 글에서도 들판에 대한 조망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김창업은 보다 감각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김창업은 붉은 빛의 단풍과 초록의 상록수와 그 사이로 보이는 황금빛 들녘의 빛깔을 뒤섞인 비단이라 묘사하였고, 들판에 붙어 아스라이 보이는 마을을 두고선 바둑알을 늘어놓은 듯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가 지고 달이 오르자 더욱 적막해진 선암에서 쓸쓸함을 느꼈던 시인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젓대소리에 그윽한 생각이 인다며 짧은 소회로 시상을 마무리하였다. 마지막 부분의 짧은 소회는 작가가 주제의식을 직출하기 보다는 다층적 해석 가능성을 열어둔 모호성(ambiguity)을 통해 시적 운치를 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감각적이고 실감나는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전체 20구 가운데 처음 2구와 마지막 2구를 제외한 16구가 생생한 형사로 이루어져 있다. 김창업이 이렇듯 형사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여 형상화한 것은 이런 형사만으로도 작가의 흥회를 전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창업은 형상의 비중을 압도적으로 높였지만 앞의 세 작품처럼 형사와 전신을 확연히 구분 지었다. 그러나 이제 살필 작품들은 형사와 신사의 경계를 허물고 형사 속에 신사를 더욱 공교롭게 온축한 작품들이다. 먼저 김시보의 작품을 보자.
遙夜宿崖寺 白雲生我衾 | 긴긴 밤을 벼랑 위 절에서 묵었더니 덮고 잤던 이불에서 흰구름이 피어나네. |
晨興讀遺碑 因以訪息菴 | 새벽에 일어나 비문 읽다가 마침내 식암을 찾게 되었네. |
遠望曖垂藤 稍入驚棲禽 | 멀리서 볼 적엔 드리운 덩굴로 어둑하더니 조금씩 들어가자 자던 새들이 놀라네. |
數椽出林杪 苔逕無人尋 | 두어 서까래 숲 끝에 솟았는데 이끼 낀 길엔 사람 흔적 전혀 없구나. |
昔聞眞樂公 於此遯世深 | 듣자하니 지난날 진락공(眞樂公)께서 이곳으로 세상 피해 깊이 숨었다는데 |
至今面壁處 千尺石嶔岑 | 지금 와보니 면벽하던 곳은 천 길 바위 절벽 까마득하네. |
流水無時已 盥盆宛溪潯 | 흐르는 물 그친 적이 없는데 대야처럼 움푹한 곳 물가에 있네. |
神飈颯然至 落葉滿廢龕 | 신령한 바람이 휙 불더니 낙엽이 버려진 감실에 가득 쌓이네. |
「식암(息菴)」, 金時保, 『茅洲集』 권5
이 시는 김시보가 55세 되던 1712년에 양구현감(楊溝縣監)으로 부임하면서 청평(淸平)의 식암(息菴)에 들러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식암에 가보지 않았던 사람도 식암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인적이 없어 덩굴이 시커멓게 드리워져 있고 축축한 습기로 파란 이끼가 무성히 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자그마한 암자가 숲 끝으로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까마득한 바위 절벽이 우뚝 버티고 서 있고 바위 절벽을 타고 물줄기가 내려오며 물이 떨어지는 곳엔 움푹 팬 바위가 마치 대야처럼 물을 담고 있다. 시를 읽으며 이런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은 이 시가 지닌 묘사력, 즉 생생한 형사(形似)의 효과이다.
그런데 전편이 형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제시된 경관이 실제의 경관임과 동시에 작가의 정신적 감수가 투사된 경관이라는 점이다. 형사를 통해 제시된 장면들을 다시 살펴보자. 흰 구름이 이불에서 피어날 만큼 높은 사찰은 이곳이 범상한 속객들이 찾을 공간이 아님을 의미한다. 멀리서 볼 적에는 덩굴 천지로만 보인다는 5구 또한 이곳을 절속의 공간으로 여기는 작가의 정신적 흥회가 반영된 것이다. 인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새도 아직 잠든 때에 시인이 이곳을 찾은 까닭은 무엇인가? 이곳이 바로 청평거사 이자현이 세상을 피해 은둔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김상헌의 기록에 따르면 식암은 고니알 만하여 두 무릎을 굽혀야 앉을 수 있는데, 이자현은 이곳에서 몇 달씩 묵묵히 수양을 쌓았다고 한다【시냇가를 따라 올라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6, 7리가량 가면 선동(仙洞)으로 들어가는데 구불구불하고 그윽한 곳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 암자 뒤의 석벽(石壁)에는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 진락공(眞樂公, 李資玄)의 글씨라고 한다. 구지(舊誌)에 “식암은 둥글기가 고니의 알과 같아서 겨우 두 무릎을 구부려야 앉을 수가 있는데, (이자현은) 그 속에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몇 달 동안 나오지 않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의 작은 암자는 바로 후대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암자 뒤에는 또 나한전(羅漢殿)이 있다. 나한전의 앞에는 계곡물이 절벽을 타고 흐른다. 석대(石臺) 아래에는 돌을 파낸 곳이 두 곳이 있었는데, 진락공이 손을 씻던 곳이다. 석대의 북쪽 바위 사이에는 고기(古器)가 보관되어 있는데, 일찍이 비가 와서 무너졌을 때 열린 적이 있었는데 전해 오는 말로는 진락공의 뼈가 묻힌 곳이라고 한다. 진락(眞樂)은 이자현이 바꾼 이름이다[由川上右轉六七里, 入仙洞, 崎嶇窈窕, 有小庵. 庵後石壁刻‘淸平息庵’四大字, 眞樂公筆云. 舊誌‘息庵團圓如鵠卵, 只得盤兩膝, 默坐其中, 數月不出者’, 卽此也. 今之小庵, 乃後人所建. 庵後又有羅漢殿, 殿前懸流側壁. 石臺下鑿石二所, 眞樂公盥盆. 臺北巖間藏古器, 嘗雨塌開視, 流傳眞樂瘞骨處. 眞樂者, 李資玄易名也 -金尙憲, 『淸陰集』 권10「淸平錄」「息菴」]】. 시인이 착목한 천 길 바위는 곧 이자현의 정신적 높이를 비유한다. 또한 시인의 시선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물줄기와 움푹한 바위에 담긴 물을 포착한 것은 부단한 수양의 모습과 그 결과 얻어진 청허(淸虛)의 마음을 은유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듯 김시보는 자기 흥회를 시의 외면으로 발출하지 않고 경관을 형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신령한 바람이 휙 불더니 낙엽이 버려진 감실에 가득 쌓이네.’라고 한 표현은 시인 자신과 이자현의 정신적 공명을 암시하는 부분으로 전신(傳神)이 극대화된 곳이다. 시인은 방치된 감실(龕室)에 낙엽만 수북한, 퇴락한 감실의 모습을 통해 이자현과 같은 사람이 제대로 기려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런데 시인은 낙엽을 불어 날린 바람을 ‘신표(神飈)’라 하였다. 여기서의 ‘신(神)’은 시인이 특별하게 의미를 부여한 시어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을 요한다. 흡사, 노래가 끝나자 바람이 불어 지전이 서쪽으로 날아갔다던 제망매가의 경우처럼, 자신의 정신을 담은 시가 일종의 감통을 보였음을 암시하고 있는 시어가 바로 ‘신(神)’인 것이다. 즉,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이자현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자현과 같은 초속적 삶의 경지가 식암 방문을 통해 시인 자신에게서도 의미 깊게 고양되었다는, 정신적 공명(共鳴)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김시보는 선경후정(先景後情) 식의 기계적 형신 결합을 벗어나 형(形)이 곧 신(神)이 되도록 하는 형상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아래 이병연의 시에도 잘 드러난다.
첫 번째
黃葉森森靜不飛 | 누런 잎들 빽빽하여 고요히 날리지 않는데 |
獨隨流水出禪扉 | 홀로 물을 따라 절집 문을 나섰더니 |
公然瀑布生風雨 | 넓게 트인 폭포에는 비바람이 일어나고 |
無數峯巒盡夕暉 | 무수한 봉우리엔 저녁 햇살 다해가네. |
龍卧九淵何日起 | 아홉 못에 누운 용은 어느 날에 일어날까 |
鶴辭西嶺別天歸 | 서쪽 봉을 떠났던 학 별계(別界)로 돌아오네. |
徘徊上下情何極 | 상하를 배회한들 정이 어찌 다할쏘냐? |
漠漠三淸碧樹圍 | 끝없는 삼청(三淸)에 푸른 숲이 둘러있네. |
두 번째
欲從何處問源頭 | 어디서부터 물의 근원 찾아야 하나? |
深淺相通上下求 | 깊고 얕게 서로 통해 위아래로 찾아보네. |
擾擾側峯爭隙地 | 비쭉비쭉 기운 봉우리 빈 땅을 다투고 |
蒼蒼橫嶺界高秋 | 창창하게 뻗은 능선 가을 하늘 가르네. |
洞開洞裏不窮路 | 골짜기 속에 또 골짜기 길은 끝없고 |
潭落潭中無靜流 | 못 속으로 못이 떨어져 고요한 물 없구나. |
薄暮如聞雲外磬 | 박모(薄暮)에 구름 너머 경쇠소리 들리는 듯하니 |
中林漠漠忽生愁 | 깊은 숲 속 막막하여 홀연 시름 이는구나. |
「만폭동에서(萬瀑洞)」, 李秉淵, 『槎川詩抄』卷上
이병연은 1710년 금강산 초도의 김화(金化)에 부임하면서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었다. 이병연은 김화현감(金化縣監) 시절, 두 차례의 금강산 유람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첫 번째 유람은 스승이었던 김창흡과, 두 번째 유람은 부친 이속(李涑), 아우 이병성, 벗 장응두(張應斗)와 정선이 함께 하였다. 이 시는 첫 번째 유람에서 지어진 시이다.
이 시는 저물녘 만폭동을 거닐며 쓴 시이다. 첫 번째 수의 수련은 작시의 정황을 보여준다. 저물녘 홀로 물길을 따라 산책을 나섰더니 바람 한 점 없던 절집과는 달리 만폭동의 폭포에서는 비바람이 일어나고 사방을 옹위한 산으로는 해가 지고 있다. 고요한 채 날리지 않는 나뭇잎과 폭포의 비바람을 대비한 것은 이곳 만폭동이 별계(別界)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특별한 공간에서 작가는 문득 묘한 생각에 잠긴다. 밤이 되면 못에서 자던 용이 일어나고 둥지를 떠났던 학은 신선을 태우고 올 것이라는 상상이 그것인데, 작가는 이러한 상상의 내용을 ‘용은 언제 일어날까?’라는 의문과 둥지를 찾아드는 학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이런 상상을 경련에 제시한 것은 밤이 되면 꼭 별계의 세상이 열릴 것만 같은 만폭동의 기위(奇瑋)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묘한 생각에 잠기자 작가의 감정은 더욱 묘연해진다. 그래서 만폭동 이곳저곳을 배회해 보지만 보이는 건 ‘삼청(三淸)을 두르고 있는 푸른 숲’ 뿐이다. ‘삼청(三淸)’은 도교 최고의 선경(仙境)인 삼청경(三淸境)인데, 이병연은 만폭동을 삼청(三淸)으로 환치시켜 기이한 흥감을 표현하였다.
두 번째 수는 만폭동의 ‘원두(源頭)’를 찾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첫 번째 수에서 만폭동을 별계로 형상화한 이병연은 그 원두(源頭)를 찾고 싶다는 소망으로 두 번째 수를 시작하였다. 수없는 물줄기들이 합류하는 계곡이라 어디서부터 물의 근원을 찾아야 하는지 막막하지만 작가는 선경의 근원을 찾고 싶어 만폭동 이곳저곳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만폭동에서 원두(源頭)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두를 찾아 물을 거슬러 올라가니 기우뚱해 보일 만큼 높은 산들이 빼곡히 서 있고 능선들은 높은 가을 하늘을 가르며 뻗어있다. 골짜기를 찾아 들어가면 또 다른 골짜기가 이어지고 골짜기마다에는 못에서 못으로 이어지는 물살이 분류(奔流)한다. 그러다 홀연 경쇠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돌아보니 이미 날은 저물고 절은 구름 저편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작가는 이내 걱정이 앞선다.
두 번째 수에서 형상화한 원두(源頭) 찾기 과정은 작가가 만폭동에 심취해가는 과정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오직 시선을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못에서 못으로 붙인 채 시간도 잊고 돌아갈 줄도 잊은 작가의 모습은 일종의 삼매(三昧) 상태이다. 이병연은 이 시 어디에서도 자기의 흥회를 직접 노출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행위와 자신이 본 광경만을 보였을 뿐이다【마지막 구의 ‘시름[愁]’이 감정을 표현한 시어이기는 하나 이때의 시름은 화자의 실제 걱정을 드러내기 위해 구사된 것이 아니라 돌아갈 길을 걱정할 정도로 만폭동에 푹 빠졌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병연이 얻은 정신적 흥회는 앞서 이하곤이 “무릇 산수를 잘 보는 자는 넓고 높은 그 가운데 정신을 응결시키기 때문에 천지의 고후(高厚), 일월의 광명을 거의 알지 못하고 사슴들이 앞에서 흥해도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 우레와 천둥이 뒤에서 요란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릇 폐와 내장에 삐쭉한 것은 모두 나무와 바위이며 코와 입으로 호흡한 것은 모두 안개와 남기이니 대저 이 같은 연후에야 산수의 취(趣)를 깊이 얻었다 할 만하다.”라고 한 그 상태이다. 그런데 이병연은 자신이 얻은 산수의 취를 가령 ‘여기 와서 진정으로 산수의 취(趣)를 얻었다’는 식으로 직출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그렇다면 이병연은 왜 이러한 형상화를 시도한 것인가? 작가의 직접적인 신사(神似) 노출은 시적 함축이 지니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명(共鳴)의 묘를 저해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얻은 정신적 흥회는 작가의 일방적 선언보다는 독자가 시를 읽으며 행간에서 그것을 만났을 때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병연의 정신적 경지는 바로 만폭동에 심취해 시간도 잊은 채 만폭동 계곡을 헤매는 그 모습에 있다. 이처럼 형신의 기계적 배열을 지양하고 형사만으로 신사를 온축하는 형상화 방식은 이병연의 특징적 작시 방식이다【이러한 형상화 방식은 독자가 작품 속에 온축된 작가의 정신을 찾을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독자가 작가의 감춰진 의사를 찾지 못하면 싱겁고 밋밋한 작품이 되고 마는 특징을 지닌다. 그래서 이병연을 위시한 후기 백악시단의 시 작품들은 진중하지 못하거나 정신성이 약한 것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작품에 대한 감수가 온전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막 쓴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깊은 뜻이 담겨 있는 이병연 시의 특징을 김창흡은 ‘閒肆精深仍自化 -安重觀, 『悔窩集』 권2 「寄三陟守李一源」’라고 하였고, 심노숭은 “일부 논자(論者)들은 ‘공의 시가 백거이(白居易)·육유(陸游)의 사이에서 나와 속된 말 쓰기를 좋아하여 간혹 장난에 가깝고, 법도가 없어 끝내 평이한 데로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 아니다. 크고 고우면서도 제 마음대로 구가하고, 깊은 맛이 있으면서 스스로 오묘함이 맞으니 공(空) 안의 상(相), 상(相) 밖의 울림이 있다[論者言‘公詩出白陸之間, 喜使俚語, 或近俳諧, 不有典則, 卒歸流易’, 此非知言也. 巨麗而惟意驅架, 雋永而自契悟妙, 空裏之相相外之響. -沈魯崇, 『孝田散稿』35책 「槎川選詩敘」]라고 하였다.】.
김시보와 이병연이 보인 형사와 신사의 경계 허물기는 보여주기를 전면화한 작품을 낳기도 하였다.
두 번째 수(其二)
睡起吾閒步 山深誰復過 |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로이 걷노라니 산이 깊어 누가 다시 이 길을 지났으랴! |
峰陰渾欲霧 林雪自開花 | 산그늘은 온통 안개 낀 듯 어둑한데 숲 속에 내린 눈은 절로 꽃으로 피었구나. |
石怪盤松老 菴憐畵佛多 | 괴이해라! 소나무는 바위에 서려 늙어가고 가련해라! 부처는 암자 벽화 속에 많구나. |
鐘鳴齋飯熟 啼啄有寒鴉 | 종 울리자 절밥이 다 됐나보다 까악까악 찬 까마귀 우는 것 보니. |
「관음사에서(觀音寺)」, 朴泰觀, 『凝齋遺稿』卷上
박태관은 관음사에 들러 스님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이러한 정황은 첫 번째 수에 보인다. 첫 번째 수는 다음과 같다. “重創蓮宮淨, 初來雪徑淸. 崖巖欹未墜, 寺地斸能平. 獨立檜何直, 孤懸月自明. 夜寒僧不睡, 爐火語深更. -같은 시, 其一”】 다음날 이른 새벽 홀로 산책을 나섰다. 발자국 하나 없는 첫새벽의 눈을 밟으며 박태관은 청정무구의 세계에 빠져든다. 안개가 낀 듯 자욱한 산길에는 가지마다 눈꽃이 피어있고, 하얀 눈을 인 노송은 차가운 바위에 뿌리를 내린 채 서려 있으며, 암자 벽의 그림 부처도 눈 속에 무방비다. 이 시의 묘미는 미련(尾聯)에 있다. 청정 세계에 빠져든 작가는 홀연 종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종소리를 따라 선문에 들어서려는데 어디선가 까마귀들이 날아와 부리로 쪼아대며 울고 있다. 박태관은 이 상황을 아침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에 까마귀들이 자기보다 먼저 알고 절집으로 모여 든 것으로 절묘하게 엮어냈다. 여기에 박태관의 시인으로서의 출중한 역량이 드러난다. 박태관이 본 장면은 사실 우연한 하나의 사건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박태관의 안목은 까마귀들이 종이 울리면 으레 절에 와서 아침밥을 공양 받았던 것으로 그리고 있다. 우연일 수도 있는 장면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이 작품 전체를 통관하는 ‘청정’에 정점을 찍는다. 박태관은 눈 내린 절집의 한 장면에서 나[我]와 저[彼], 인(人)과 물(物), 속(俗)과 선(禪) 등 일체의 차별이 무화(無化)된 진여(眞如)의 세계를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이처럼 보여주기를 전면화하면서도 심원한 의취를 수준 높게 형상화하였다.
또한, 형사 위주의 형상화는 시를 한 폭의 그림이 되도록 하였다.
두 번째 수
扁舟一曲採菱歌 | 조각배엔 한 자락 채릉가 노래 소리 |
落日飛霞水底多 | 지는 해 나는 노을 물 밑으로 쌓여 드네. |
三十六峯渾得瘦 | 서른여섯 봉우리들 모두 바짝 야위어서 |
不堪秋影漾淸波 | 가을 그림자 일렁일렁 맑은 물결 힘겨워하네. |
「삼일호(三日湖)·2」, 李秉淵, 『槎川詩抄』卷上
對石門開巧 層濤蹴馬蹄 | 마주한 바위 교묘하게 문이 되어 층층 파도 말발굽을 치네. |
棠紅春後色 千里白沙堤 | 봄 간 뒤라 해당화 붉어졌는데 천리 길엔 흰 모래 언덕. |
「문암(門岩)」, 權燮, 『玉所稿』 「詩·11」「關東十六爲任士敬作」 중 13수)
삼일포는 강원도 고성에 있는 호수로, 호수 가운데 사선(四仙)이 3일 동안 놀다 갔다는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김창협은 이곳에서의 유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식사를 한 뒤 삼일포를 찾아가 관람하였다. 삼일포는 둘레가 10여 리쯤 되는데 밖으로는 36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다. 안에는 작은 섬 하나가 있는데, 붉은 누각이 그 위에 높이 세워져 있었으니 이름하여 사선정(四仙亭)이라 하였다. …(중략)… 노를 저어 물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물이 깊고 넓어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굽어보면 마름풀 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를 또렷이 셀 수 있었으니 그 맑기가 이와 같았다.
飯後, 往觀三日浦. 周遭可十餘里, 外有三十六峰環之. 中則小島兀然, 朱甍出其上, 曰四仙亭. …(中略)… 棹船入中流, 滉漾渺瀰, 若不見涯涘者, 而俯視荇藻間, 游魚歷歷可數, 其淸如此. -金昌協, 『農巖集』 권23 「東游記」
이병연의 시는 김창협의 기문에서처럼 배를 타고 사선정으로 들어가면서 지은 것이다. 이병연은 저물녘 삼일호의 수면을 한 폭의 그림으로 포착하였다. 수면에는 낙일(落日)과 노을, 그리고 호수를 둘러싼 서른여섯 봉우리의 도영(倒影)이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이 화면 속으로 채릉가 노랫가락이 울려 퍼진다. 이병연의 시적 역량은 절묘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능력과 또 그것을 절묘하게 형상화하는 능력에 나온다. 이병연은 지는 해와 노을이 수면에 비치는 것을 물밑으로 차곡차곡 쌓여 많아지는[多]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붉은 노을이 물결을 따라 일렁이며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도영된 산의 모습을 ‘바짝 야위었다[渾得瘦]’라고 표현함으로써 잎을 다 떨군 산을 수경(瘦勁)한 멋으로 다시 살렸다. 묘미는 결구에 있다. 이병연은 비쳐든 산 그림자가 물결에 일렁이는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不堪]’고 하였는데, 이는 물결의 일렁거림마저 견딜 수 없을 것처럼 수척해진 가을 산의 진골(眞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낙조와 노을이 반짝거리는 화사함과 가을 산의 수경미(瘦勁美)가 어우러져 기위(奇瑋)한 미감을 창출하였다.
두 번째로 인용된 권섭의 작품 또한 문암(門岩)의 경관을 한 폭의 화면처럼 제시하였다. 화면 좌우로 문암과 바다의 모습을 포치시키고 그 사이로 해당화 핀 백사장을 가로질렀다. 김창협은 문암의 광경을 “문암에 도착했는데, 두 개의 바위가 마주 서 있어서 사람들이 오갈 때에 마치 문처럼 그 사이를 통과하였다. 문암은 흰빛을 띄고 모양이 매우 기이하였는데, 화초가 그 위에 알록달록하게 깔려 있는 모습이 마치 수를 놓은 것 같았다[數里至門巖, 二石對立, 人往來道其間若門. 色白而狀頗奇, 花草斑駁其上如繡. -金昌協, 『農巖集』 권23 「東游記」].”라고 묘사하였는데, 권섭의 시 속 장면 그대로이다. 권섭은 기구와 승구에서 문암을 지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전구와 결구에서는 파도가 말발굽에 부딪히고, 붉은 해당화와 하얀 백사장이 어우러진 장면을 그렸다. 권섭의 이 작품은 대상의 특징적 모습을 중심으로 화폭에 선명한 구도만 그려냈을 뿐【강혜선, 「옥소 권섭의 기행시문 연구」, 『한국한시연구』18집, 2010, 274면 참조.】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나 작가의 흥회는 형상화하지 않았다. 이는 형사만으로 신사를 담아내는 후기 백악시단의 형상화 방식 가운데서 가장 극단적인 예에 해당한다. 물론 권섭이 보인 형상화는 막힘이 없는 시원한 미감을 주지만, 한편으론 독자가 작품을 통해 작가의 정신을 만날 수 있는 단서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작가-시-독자가 파편화될 우려도 있다【절구의 짧은 시형에서 명사 위주의 시어를 통해 함축성을 극대화하는 형상화 방식은 후기 백악시단 가운데 이병연과 권섭에게서 뚜렷하게 발견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대표적인 예는 이런 작품을 들 수 있다. “만산(萬山)을 휘젓는 다리 권조원(權調元), 십년(十年)을 크게 누운 이일원(李一源). / 천지간에 일양(一陽)이 두 늙은이 붙들어, 칠십 구년 한훤(寒暄)을 목청껏 부르게 하네[萬山行脚權調元, 大臥十年李一源 . 天地一陽扶兩老, 高歌七十九寒暄. -權燮, 『玉所稿』 「朋遊唱酬錄·4」「南至贈庚友[李秉淵]」 제1수] 이 작품의 경우 80세를 맞이하는 이병연과 권섭의 우정을 그린 시로, 1구와 2구는 79세까지의 가장 특징적인 삶의 모습을 두 구로 함축한 것이다. 그러나 이 함축은 80이 되도록 산수 유람을 다녔던 권섭의 삶과, 만년에 다리를 절게 된 이병연의 삶을 알지 못해도 두 사람이 대조적 삶을 살면서도 돈독한 우정을 쌓았음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오히려 1구와 2구는 자잘한 설명 없이도 둘의 우정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형상화는 원숙한 작시 능력이 뒷받침 되었을 때, 시적 묘미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시상을 조직하는 원숙한 솜씨 없이 이런 형상화를 따르게 되면, 시는 지극히 무미한 것이 되거나 수수께끼처럼 변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권섭이 대상 산수의 특징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시편을 구성한 것은 자신의 주관적 흥회를 드러내기보다는 대상 산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대상 산수를 형신(形神)을 통해 보다 핍진하게 담으려는 노력은 백악시단의 문인들로 하여금 연작의 방식을 애호하게 하였다. 근체시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고시의 형식을 통해서도 핍진한 형사와 신사를 담아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고시는 한 편의 작품 안에 형사와 신사의 유기성을 확보해야 하고 더구나 긴 편폭에 어우러지는 정감의 변화까지 담아내야 하는 까닭에 자칫 시인으로 하여금 대상과의 진지한 교감을 소홀히 하고 시적 안배에 매달리게 할 우려도 있다. 그에 비해 연작시는 대상의 진면목을 다양한 측면에서 관조하고 입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는데, 이러한 장점은 산수와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산수의 진면목을 담아내려 했던 백악시단의 시적 지향과 잘 맞는다. 나아가 연작시는 형상화에 있어 형사와 신사를 보다 자유롭게 선택하여 조직할 수 있게 하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전대의 산수시와 비교할 때 백악시단이 연작 산수시를 상대적으로 많이 창작한 까닭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먼저 김창흡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둘째(其二)
二淵懸瓢似 瀑流喧吐呑 | 못은 달아 맨 바가지던가 멍멍하게 폭포 물을 삼켰다 뱉네. |
誰知呀然小 逈洞摶桑根 | 누가 알랴? 우묵하게 고인 작은 물이 멀리 통해 부상의 뿌리에까지 맺힐 줄. |
다섯째(其五)
五淵急回軋 南岸側成釜 | 못 급히 돌며 콸콸 대는데 남쪽 언덕 비스듬하여 솥이 되었네. |
馳波迭後先 赴隘徘徊舞 |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달리다가 좁은 곳에선 빙빙 돌며 춤추는 듯. |
여섯째(其六)
六淵美如璧 淸涵石紋粹 | 못 아름답기 구슬 같은데 맑게 씻긴 바위 무늬 티도 없구나. |
竦髮注眸深 高雲正泛翠 | 머리 선 채 못 깊은 곳 눈을 붙이니 높은 구름 참으로 비취 위에 떠있네. |
여덟째(其八)
八淵淺堪漱 潛龍易出身 | 못 얕아서 양치질할 만하니 숨은 용도 쉬 몸을 드러내겠네. |
日靜玩澹瀩 眞爲遭睡人 | 날이 고요해 못가에서 즐기다 보면 진실로 잠든 용을 만난 사람이 될 듯. |
「구룡연(九龍淵)」, 金昌翕, 『三淵集』 권2
두 번째 못에서는 그 모양을 주목하였다. 김창흡은 ‘달아놓은 바가지’같다고 비유하면서 소에 물이 차고 넘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였다. ‘탄토(呑吐)’라는 감각적 표현 또한 생생한 실감을 높이기 위해 구사되었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정신적 감수를 붙였다. 육안으로 보이는 소는 작은 물에 불과하지만 이 물은 결국 동해에까지 이어져 동해의 조종(祖宗)이 됨을 말하였는데 이는 현상적으로 각기 존재하는 물을 통해 본원적 ‘일리(一理)’를 체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섯 번째 못에서는 물살의 역동성을 주목하였다. 급히 돌아나가다 앞에 솥처럼 생긴 언덕을 만나 잠시 고였다 솥이 차면 다시 달려 나가는 물의 변화무쌍한 흐름을 그렸다. 여섯 번째 못에서는 구슬 같은 물빛을 주목하였다. 구슬처럼 고운 못은 그 영롱함이 못의 깊은 수심에서 발색되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못의 깊은 곳을 보는데 머리카락이 바짝 선다고 하였다. 두렵지만 고개를 빼고 바라본 못에는 하늘의 구름이 도영하여 비취빛 못물에 둥실 떠있었다. 비취빛 못과 하얀 구름의 색채 대비가 선명하고 곱게 그려졌다. 여덟 번째 못에서는 기이한 상상을 펼쳤다. 상상의 내용은 물은 얕고 날은 참으로 고요해서 못가에서 노니노라면 잠룡을 볼 수 있을 테고 잠룡을 만나면 용의 여의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조수(遭睡)’는 물가의 가난한 집 자식이 물에 들어가 용의 여의주를 주워오자 그 아버지가 용이 잠든 때를 기다려 용을 돌려주라고【河上又有家貧窮恃緯蕭而食者, 其子沒淵, 得千金之珠. 謂其子: ‘取石來鍜之. 夫千金之珠必在九重之淵而驪龍之頷下, 汝得之必遭其睡. 若龍寤, 子尙奚微之有哉? -『太平御覽』 권485】 한 데서 나온 말로, ‘잠을 만난 사람[遭睡人]’이 된다는 말은 용이 잠들었을 때를 만난 사람을 의미한다. 작가는 용에 대한 고사를 활용하여 구룡연의 기위(奇瑋)함을 신비롭게 그려내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연작의 형식을 활용하여 대상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관심과 포착을 자유롭고도 입체적으로 그려내었다. 형신의 형상화 양상을 보면 두 번째 수는 형사와 신사가 대등하게 그려져 있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수는 형사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덟 번째 수는 신사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형사된 모습으로 보자면 못의 모양, 물의 기세, 물의 빛깔, 못의 깊이 등이 다각적으로 조명되고 있으며, 구룡연의 역동적인 모습과 맑고 고요한 모습 등 대상이 지닌 대비적 특징까지 다채롭게 형상화하였다. 신사의 내용을 보면, 두 번째 수는 성리학적 각성을 담고 있고 여덟 번째 수는 도교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연작시가 지니는 분절성을 활용하여 구룡연이라는 대상을 다각적으로 형사하면서 작가의 신사 또한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방식으로 구룡연의 다양한 특징들을 핍진하게 형상화하였는데, 이인상(李麟祥)은 이러한 성취를 높이 사 이 작품을 토대로 구룡연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今年秋, 李君元靈本三淵金公昌翕所爲九淵詩而爲之圖, 屬余爲記. -黃景源, 『江漢集』 권9 「九龍淵記」】.
다음에 살필 이병성의 작품은 한 공간과 관련한 다양한 대상을 형상화하는 데 연작 시형을 활용하였다.
橫飆乍捲衆香峰 | 회오리바람 홀연 중향성으로 솟구쳐 |
片片輕霞西復東 | 조각조각 가벼운 노을 동서로 흩어지니 |
半露半遮遙隱映 | 반은 보이고 반은 가린 채 저 멀리서 비치는데 |
紫紗如罩玉芙蓉 | 자줏빛 깁으로 옥부용을 둘러 맨 듯. |
두 번째(其二)
漫道芙蓉與白玉 | 부용이니 백옥이니 대략 말하고 말았으니 |
松江題品亦疎麤 | 송강 어른 제품(題品) 역시 거칠다 할 밖에. |
香城萬古嬋娟色 | 중향성 만고토록 선연한 저 빛 |
微雪山陰一夜鋪 | 가랑눈 산그늘에 한 밤 내내 뿌렸으니. |
세 번째(其三)
如翔如舞幾重重 | 비상(飛翔)하듯 춤추듯 겹겹이 그 얼마냐 |
變態奇姿未可窮 | 변화무상 기이한 자태 궁구할 수 없구나. |
不必丹楓兼躑躅 | 단풍에다 철쭉을 겸할 필요 없으니 |
紅霞百朶作玲瓏 | 붉은 노을 백 송이가 영롱하면 그뿐인 것을. |
네 번째(其四)
能爲巨嶽與洪洋 | 거대한 산, 너른 바다 능히 그리려 |
鄭子毫端萬丈長 | 정원백의 붓끝이 만 길이나 높아졌는데 |
腕力今來還頓㥘 | 필력이 이제 와서 낭패할까 겁났는지 |
毘盧峰下漫彷徨 | 비로봉 아래에서 하릴없이 배회하네. |
[元伯方盤礴未下筆] | [원백(元伯)이 다리를 쭉 뻗고 앉은 채 붓을 대지 못하였다.] |
다섯 번째(其五)
不必新詩別有篇 | 새로운 시편 따로 있을 필요 없구나! |
泠泠歌曲洞中天 | 시원한 가곡소리 하늘까지 울리네. |
松翁死後無豪士 | 송강 어른 사후에 호방한 선비 없어 |
海嶽蕭條幾百年 | 바다와 산 몇 백 년이나 쓸쓸하게 방치될까? |
[聽弼文誦關東別曲] | [장필문이 관동별곡을 암송하는 것을 들었다.] |
「비 갠 뒤 천일대에 올라[雨後登天一臺]」, 李秉成, 『順菴集』 권2
첫 번째 수는 날이 개면서 드러나기 시작한 중향성의 모습을 형사하였다. 이병성은 바람이 구름을 흩어내자 반쯤 모습을 내비친 천일대의 모습을 붉은 비단으로 꽃받침 삼은 옥으로 된 연꽃으로 비유하였다. 두 번째 수는 천 일대에서의 조망의 흥취를 담았다. 햇살을 받아 선연한 중향성과 미설(微雪)이 펼친 색조의 향연을 보이면서 「관동별곡」의 “부용을 꽂은 듯, 백옥을 묶은 듯”이란 명구마저 실재 대상과 비교하면 대략 거칠게 표현하고 만 것이라 하였다. 이는 「관동별곡」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정철의 솜씨로도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금강산이 빼어남을 말하는 것이다. 세 번째 수는 형사와 신사, 신사와 형사를 교직하며 경관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역동적인 산세에서 변화의 무궁함을 느끼고 노을의 영롱함에서 유람의 흥취를 말하였다. 네 번째 수는 동반한 정선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정선이 다리를 뻗고 앉은 모습[盤礴]【반박(盤礴)은 『장자(莊子)』 「전자방(田子方)」에 나오는 말로 작가의 정신적 경지, 즉 일체의 속박을 떨치고 대상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말이다. “송나라 원군이 그림을 그리려 하니 여러 화공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들은 명을 받자 읍을 하고는 정해진 자리에 서서 붓을 고르고 먹을 갈아 대기하였는데, 인원이 많아 전각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반이었다. 그런데 한 화공이 늦게야 도착해서는 달려오지도 않고 천천히 들어와 읍을 하고는 서지도 않은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원군이 사람을 시켜 엿보게 했더니, 그는 옷을 벗고 두 다리를 쭉 뻗은 채 벌거벗고 있다고 전하였다. 그러자 원군이 말하기를 ‘됐다. 이 사람이 참다운 화공이다.’ 하였다[宋元君將畫圖, 衆史皆至, 受揖而立, 舐筆和墨, 在外者半. 有一史後至者, 儃儃然不趨, 受揖不立, 因之舎. 公使人視之, 則解衣般礴, 臝君曰: ‘可矣. 是真畫者也.’]”】은 금강산과 정신으로 교감하며 금강산의 진면목을 찾는 모습이다. 쉽사리 붓을 들지 못하는 정선의 모습을 통해 정선의 필력으로도 담기 어려운 금강산의 빼어남을 말하였다. 다섯 번째 수는 장응두의 관동별곡 가창을 들으며 든 생각을 말하였다. 정철 같은 호방한 선비가 없어 금강산은 지기를 잃은 채 오래도록 방치될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연작시의 특징을 활용하여 천일대에서 바라본 중향성의 절경뿐만 아니라 중향성의 빼어난 경관을 부각하기 위해 선뜻 붓을 들지 못하는 정선과 시원하게 관동별곡을 읊조리는 장응두의 모습도 그렸다. 또한 연작시의 특징을 활용하여 작가의 의도에 따라 형사와 신사를 자유롭게 조직하여 구사하였다.
김창흡과 이병성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듯 분절 형식을 지닌 연작시는 한 호흡으로 이어가는 장편 고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상을 충분히, 그리고 다각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리고 관조를 통해 포착해낸 대상의 진면목을 형신(形神)을 자유롭게 조직하여 형상화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대상과의 소통에서도, 자기 흥회의 표출에서도, 그 참됨을 담아내기에 용이한 연작 형식을 적극 활용하였다.
한편, 산수의 진면목을 시로 담아내기 위한 노력은 대상 산수에 대한 정보와 시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아래 이해조의 작품이 그 예이다.
정방연(正方淵)【일명 驚鷺淵이라고도 한다.】
정방연은 서귀포 동쪽 1리쯤 떨어진 해안에 있다. 100척의 바위 벼랑이 병풍처럼 몇 리를 에워싸고 있는데 폭포가 바닷물로 나는 듯 떨어진다. 동쪽 기슭은 솟아올랐다가 갑자기 끊어지니 그 위가 평평하여 천연의 대가 되었는데 고운 풀들로 덮여 있다. 대의 언저리에는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는데 큰 것은 모두 몇 아름이 넘고 묵은 가지는 용처럼 구불거리며 누웠는데 위로는 구름과 해를 가리고 아래로는 푸른 물결을 스친다. 삼도(森島), 초도(草島), 독도(禿島) 세 개의 바위섬이 바다 가운데 우뚝하게 늘어섰는데 깎아지른 바위 벼랑에 소나무가 어둑하게 가리고 있어 삼라만상의 아득한 자태가 동해 칠성봉(七星峯)과 흡사하다. 옥 같이 흰빛은 미치지 못하지만 푸른빛이 곱고 빼어난 것은 더 나으니 이곳은 이른바 한라산 주봉(柱峯)이 옮겨진 절벽이라 할 수 있다. 대에 올라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앞으로는 세 섬을 마주하고 뒤로는 한라산을 바라보며 좌측으로는 나는 듯한 폭포에 나가니 진보(鎭堡)와 어부의 집은 구름 속에 아련하고 돛배와 섬들은 소나무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하여, 술자리에 기기하고 교묘한 경치를 다투어 바치는 듯하니 비단섬 가운데 첫째가는 선경(仙境)일 뿐이 아니다. 영동의 이름난 곳과 비교해도 쉽사리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 때 피리 부는 악공 하나를 데려다 폭포가 떨어지는 바위 위에서 몇 곡조를 불게 하니 막속(幕屬) 가운데 노래 잘하는 이가 소나무에 기대어 피리 곡에 맞추어 한 곡조를 불렀다. 공활한 바다와 하늘에 맑은 음이 요량(寥亮)하게 구름 사이로 흩어지는데 황홀하게 봉우리를 감싸며 오르는 것은 통소 소리였다. 내가 수령에게 “사람들이 한라산 동쪽 무협(巫峽)에서 때때로 신선의 음악 소리가 들린다 하더니 또한 어찌 이보다 낫겠소?”하니, 수령이 “무협(巫峽)의 천악(天樂)은 그저 그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인데 지금은 그 사람의 모습까지 볼 수 있으니 아마 이것만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대 앞으로 작은 고기배가 서귀포 어귀에서 노를 저어 와 전복을 따는데 대여섯 사람이 알몸으로 물속에 뛰어들자 다만 물 위로는 표주박만 둥둥 떠 있었다. 이윽고 사람의 머리가 차례로 솟구치더니 전복 수십 갑을 주었다. 소나무 아래에서 회쳐 먹고 구워 먹으니 그 맛이 까무러칠 만큼 좋아 술잔 달라 부르는 소리도 모를 지경이었다. 취기가 심해 쓰러져 누워 말을 탈 수가 없어 석양 무렵에 견여를 타고 피리 불며 돌아 오니 또한 하나의 멋진 풍류였다.
正方淵.【一名, 驚鷺淵】
淵在西歸浦東一里海岸. 石崖百尺, 屛擁數里, 瀑流飛落於海水. 東麓隆起陡絶, 其上平廣, 天然作㙜, 軟莎被之. 㙜邊七松森立, 其大皆數拱餘, 老榦虬屈偃蹇, 上蔽雲日, 下拂滄波. 森島、草島、禿島凡三石嶼列峙海中, 巖壁峭削, 松檜蔭翳, 森羅縹緲之態恰似東海七星峯, 玉色不及, 而蒼翠娟秀過之, 此所謂漢挐柱峯之移峙者也. 登㙜撫松, 前對三島, 後矚漢挐, 左臨飛瀑, 鎭堡、漁戶隱約於雲靄, 帆檣、島嶼掩暎於松翠, 有若爭奇獻巧於樽俎之邊, 不但島中第一仙境, 雖較嶺東勝區, 亦未易優劣也. 時携一笛工, 快弄數曲於瀑巖上, 幕屬有善歌者, 倚松而和之. 海天空闊, 淸音寥亮飄散於雲霄之間, 恍然緱嶺上, 簫聲也. 余謂主倅曰:‘人傳漢挐東巫峽, 時聽仙樂, 亦豈勝此耶?’主倅曰: ‘巫峽天樂, 但聞其聲, 而今見其人, 恐不如也.’相與胡盧. 㙜前小漁艇, 自西歸浦口掉來, 載採鰒, 五六人躶身投水, 但見瓠子泛泛於水上. 俄頃, 人頭次第涌出, 供鰒數十甲. 松下鱠煑, 風味頓佳, 不覺頻喚大白. 醉甚頹卧, 不能騎馬, 夕陽肩輿, 吹笛而還, 亦一風流事也. (이하 시는 생략) -李海朝, 『鳴巖集』 권3 「正方淵」
浩蕩風濤滿眼前 | 드넓은 바람과 파도가 눈앞에 가득한데 |
古臺千尺立蒼然 | 태곳적 대는 천 길 높게 창연히 우뚝 섰네. |
不周山折分三島 | 부주산(不周山)이 쪼개져 세 섬으로 나뉘고 |
銀漢波傾落九天 | 은하수가 기울어져 구천에서 떨어지네. |
採鰒漁瓠遙泛泛 | 전복 따는 어부 박은 아스라이 떠있고 |
倚松雲盖坐翩翩 | 소나무에 기대니 구름 일산 너울너울 지나가네. |
梅花一曲江城笛 | 강가 성에 울리는 매화곡 피리 소리 |
愁殺天涯李謫仙 | 천애에 온 이태백을 시름겹게 하는구나. |
「정방연(正方淵)」, 李海朝, 『鳴巖集』 권3
이 시는 이해조가 1706년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로 나갔을 당시 지어진 작품이다. 이해조는 제주에 도착한 이래 제주에서 견문한 일들을 시에 담았는데, 이때 지어진 시편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시편마다 제목과 주석을 통해 대상에 관한 충실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제주라는 지역이 쉽사리 갈 수 없는 곳이고, 육지와는 풍속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정보가 될 만한 것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먼저 제주를 찾은 이해조의 선배 문인들 또한 제주의 풍속을 전하는 다양한 저작들을 남겼고 이해조는 그러한 기록들을 참조하기도 하였다【선배 문인들의 저작으로는 임제(林悌)의 『남명소승(南溟小乘)』,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 김정(金淨)의 『충암록(沖庵錄)』,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등이 있었다. 이해조는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을 인용하기도 하고 임제의 시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대의 기록물들은 산문이 대부분이고 간헐적으로 지어진 시들은 산문을 보조하여 흥취를 제공하는 데 활용되어 장르간의 편향이 뚜렷한 반면 이해조의 시는 기문(記文) 성격의 제인(題引)을 의도적으로 활용하여 한편에서는 산문의 특장을, 한편에서는 시의 특장을 작품 안에 결합하였다.
이 작품은 정방폭포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대로 시의 제목이 있고 그 아래에 서문(序文) 성격의 글【다른 작가의 시에는 이런 경우 ‘병서(幷序)’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해조의 글은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제목 아래 두었기 때문에 서문(序文)으로 보아야 할 지, 주석으로 보아야 할지 분명치 않은 점이 있다. 하지만 대체적인 성격은 서문(序文)에 가깝다.】이 붙어 있으며 그 아래 시가 제시되어 있다. 이해조 이전에 지어진 기록들은 대부분 제주도의 특이한 풍속이나 명승에 대한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문학적 감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다. 그런데 위에 제시된 이해조의 글은 오히려 문학적 감흥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 글은 대상에 대한 간략한 지리정보를 제시한 뒤 대상과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그곳에서의 감흥을 적고 있다. 글의 반 정도는 대상인 정방연을 묘사하고 나머지는 정방연에서 이루어진 풍류사(風流事)를 적었다. 정방연에 대한 묘사를 보면 정방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내기 위한 비유적 표현, 긴장과 이완을 조절한 문장 포치 등을 적절하게 구사하여 정방연의 절경을 그렸다. 또한 풍류사에 대한 서술에서도 대화를 배치하고 상세한 장면묘사를 활용하여 생동감을 부여하였다. 자체로 완결성이 뛰어난 한 편의 기문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배치된 시는 산문에 비해 더욱 함축과 과장을 활용하였다. 이해조는 정방연에 대해 산문으로 이미 자세하게 제시했다고 해서 시에서 자신의 소회(所懷)만을 읊거나 하지 않았다. 시의 구성 또한 전반부는 정방연의 절경에 대한 것이고 후반부는 풍류사(風流事)에 대한 것이다. 산문의 구성을 시가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인데, 이해조는 같은 구성을 취하면서도 산문과는 다른 시적 묘미를 활용하고 있다. 이해조는 산문에서 상세하게 묘사된 대(臺)의 모습을 ‘천 길 높이로 우뚝 선 모습’으로 함축하면서 거기에 ‘태고’라는 시간을 부여하여 절경의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다. 대에서 보이는 삼도(森島), 초도(草島), 독도(禿島)는 ‘세 개의 섬’으로 간략하게 제시되었지만 거기에 부주산(不周山)을 끌어와 역시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부주산(不周山)과 관련한 이야기는 『사기(史記)』「보삼황본기(補三皇本紀)」에 실려 있다. 축융씨(祝融氏)에게 진 공공씨(共工氏)가 화를 못 이겨 부주산(不周山)을 무너뜨리자 하늘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부러지고 땅을 동여매고 있던 밧줄이 끊어졌는데, 여와씨(女媧氏)가 오색 돌을 다듬어 하늘을 깁고 자라의 다리를 끊어 사방의 끝에 기둥으로 세웠다고 한다. 이처럼 이해조는 부주산(不周山)의 전고를 활용하여 삼도(森島), 초도(草島), 독도(禿島)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산문과는 달리 일어난 일의 순서를 바꾸어 시적 분위기를 고양시키고 있다. 산문에서는 피리를 불던 일이 어부가 전복을 따 준 일보다 앞서 있었는데 시에서는 전복 따는 일이 먼저 제시되고 피리 소리를 듣는 화자의 모습이 나중에 그려져 있다. 이는 다분히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시를 더욱 유장하게 하려는 시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구에 화자 자신을 이태백으로 비유함으로 산문에서 그려진 술자리 풍류와 연결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이 작품은 산문만으로도, 시만으로도 독자적 완결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이 둘이 결합함으로써 더욱 깊은 문학적 향유가 이루어지게 하는 특징이 있다. 김창흡은 이해조 시가 지닌 이러한 특징을 두고 “또한 시 가운데 허자를 잘 사용하여 의미의 연결을 이루고 아울러 그 제인(題引)과 견사(遣辭)가 종종 명쾌하고 절묘하니 좌사(左思)와 유종원(柳宗元)을 따른 듯합니다. 이로써 논하건대 아마도 문장이 시보다 나은 듯합니다. 어찌 그 全稿를 보여주지 않는 지요[且詩中善用虛字以轉意脉, 並其題引遣辭, 種種敏妙, 似從左柳中來, 以此論之, 窃恐文勝於詩. 而何由睹其全稿乎? -金昌翕, 三淵集拾遺권16 「答李子東」]?”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이해조가 제주어사 시기 창작한 시편들은 산문과 시가 지닌 장르적 특질을 상보적으로 결합하였는데 그 결과 독자는 한 작품을 통해 두 장르의 미적 성취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에서 백악시단의 산수를 대상으로 한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백악시단은 자신들의 시론인 천기론에 입각하여 산수에 내재된 진면목을 포착하고 이를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진면목을 포착하는 과정은 그들의 학문과 사상에 기반한 고도의 정신적 감수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감수한 정신적 흥회를 드러내기 위해 산수 자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천기론은 산수를 완물이 아니라 궁리의 대상으로 전화시키는 논리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이러한 논리에 기대어 그들은 남들이 회피하는 험지까지 열정적으로 탐방하였고, 산수를 마주해서는 대상에 한발 더 밀착하여 요소요소의 아름다움과 오묘함을 형상화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들의 산수 유람은 지금의 ‘관광’과는 다르고 오히려 ‘탐사’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산을, 숱한 위험까지 감내해가며 찾은 것은 탐사의 태도가 아니고서는 이해가 불가하다. 김창흡은 “마땅히 회옹(晦翁)께서 하신 법을 따라, 바위 하나 뫼 하나도 집중해서 보시게나[須依晦翁法, 不瞬視巖巒].”고 하였다. 그리고 유람을 통해서는 “십년 진세(塵世)의 상념이, 유수와 더불어 모두 사라지는구나![十年塵世念, 流水與俱空]”【洪重聖, 『芸窩集』 권3 「正陽寺」】와 같은 정신적 각성을 얻기도 하고, “청색 홍색 뒤섞여야 진정 애호할 만하니, 진홍색이 되자마자 곧장 쇠락할 테니[靑紅半雜眞堪愛, 纔到深紅便是衰]”【朴泰觀, 『凝齋遺稿』卷上 「楓林」】라거나 “산은 꾸밈이 없어야 바로 진짜지[山無粧點是爲眞]”【李秉成, 『順菴集』 권2 「表訓寺西臺」】와 같은 인생의 경구가 될 만한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으며, 거꾸로 말을 탄 채 폭포를 보는[嬴馬倒騎看瀑布]【李秉淵, 『槎川詩抄』卷上 「龍貢寺」】 풍류도 즐겼다.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철학하고 문학하는 산악인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탐사에 가까운 자세로 산수에 밀착했다. 그리고 그렇게 밀착하여 얻어진 산수의 면면들은 그들의 깊은 정신적 감수를 거쳐 한 편의 시로 탄생되었다. 백악시단의 산수시는 성리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한 높은 정신성과 탐사를 통한 진면목의 사생을 통해 자기 흥취가 위주가 되어 감정은 과잉되고 대상은 소략해지고 만 전대의 산수시를 극복해 갔다.
2. 민생(民生)에 대한 응시(凝視)와 핍진(逼眞)한 사생(寫生)
‘진시’의 대상은 산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그 산수 속 사람들의 삶 또한 시 속으로 깊이 끌어안았다. 성리학은 사민(四民) 가운데서 사(士)의 책무를 대단히 강조한다. 사대부는 위로는 임금이 성군(聖君)이 되도록 보좌하고 아래로는 왕화(王化)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계층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것은 벼슬살이의 여부와 상관없이 사대부라면 응당 해야 할 책무와 같은 것이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 또한 이러한 인식의 틀 위에서 백성을 사고하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민(民)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아래 작품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田翁夢旐旟 夢後江雨盈 | 전옹(田翁)이 풍년 징조를 꿈에서 보았는데 깨고 나니 강가에 비 흠뻑 내렸네. |
起舞銚鎒去 靑疇水將平 | 일어나 춤을 추며 호미 괭이 들고 가니 푸른 들녘 물이 장차 펀펀하겠지. |
煕皥何時還 望遠憑虗楹 | 태평시절 어느 때에 다시 올까나 먼 곳을 바라보려 빈 난간에 기대보네. |
天民無善惡 雨露變其情 | 천민(天民)은 선과 악이 없건마는 비와 이슬이 그 마음을 변하게 하네. |
「반계(盤溪)에서의 감흥[盤溪感興]·9」, 金昌翕, 『三淵集』 권3
농사철에 시우(時雨)가 내린 기쁨과 백성에 대한 염려를 담은 시이다. ‘조여(旐旟)’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무양(無羊)」에 “소와 양 치는 사람이 꿈을 꾸니, 사람들이 물고기로 보이고, 작은 기가 큰 기로 보였도다. 태인이 이것을 점쳐 보니, 사람들이 물고기로 보인 것은 올해 풍년이 들 조짐이요, 작은 기가 큰 기로 보인 것은 집안이 번성할 조짐이라 하도다.[牧人乃夢, 衆維魚矣, 旐維旟矣, 大人占之, 衆維魚矣, 實維豐年, 旐維旟矣, 室家湊湊.]”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풍년의 조짐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김창흡은 농사비가 흠뻑 내린 들판에서 백성들이 기쁘게 노동하는 모습을 조망하다 깊은 생각에 잠긴다. 시우(時雨)에 기뻐하는 저 순박한 천민(天民)들을 어찌하면 태평성세의 백성으로 살게 할 것인가. 김창흡은 백성을 ‘천민(天民)’이라 인식한다. 그리고 천민이 선해지고 악해지는 것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 의한 것이라 인식에 도달한다.
천민(天民)은 범상한 백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出謂之天民者, 蓋謂不是尋常之人, 乃天之民耳. 天民之云, 亦猶曰‘天下之善士’云爾, 與‘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者又不同. -『朱子語類』 권46】. 정자(程子)는 자신을 천민(天民) 가운데 선각자라 하면서 백성을 깨우치는 일을 자임한 이윤(伊尹)의 말【天之生此民也, 使先知覺後, 知使先覺覺後覺也. 予, 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 覺斯民也, 非予覺之而誰也? -『孟子集註』 「萬章章句·上」】을 풀이하면서 “저들이 깨우침에 이른 것도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다. 모두가 저마다 스스로 이 리(理)를 가지고 있으니, 나는 다만 그것을 깨우쳐 주었을 뿐이다.”【程子曰: ‘予, 天民之先覺, 謂我乃天生此民中, 盡得民道, 而先覺者也. 旣爲先覺之民, 豈可不覺其未覺者? 及彼之覺, 亦非分我所有以予之也. 皆彼自有此理, 我但能覺之而已.’ -『孟子集註』 「萬章章句·上」】라고 하였다. 이 풀이 속에서 민(民)은 리(理)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주자와 정자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천민(天民)은 천리(天理)를 깨우친 민(民)을 의미하게 된다【民者無位之稱, 以其全盡天理, 乃天之民, 故謂之天民. -『孟子集註』 「盡心章句·上」】. 이렇듯 천민(天民)이란 용어는 성리학적 우주론이 반영된 개념어로 수양의 정도가 대단히 높은 인격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김창흡이 시에서 말한 ‘천민(天民)’은 주자학에서 논의된 천민(天民)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김창흡이 말한 ‘천민(天民)’은 아직 천리(天理)를 깨닫고 온전히 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그것을 깨닫고 온전히 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천민(天民)’이 될 수 있는 사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백성을 천민(天民)으로 인식하는 것은 백성을 순천(順天)한 세상 구현의 동반자로 인식한다는 의미로, 이런 인식 위에 서면 사(士)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게 된다. 이윤(伊尹)이 그러했듯 선각자로서 민(民)이 천민(天民)이 되도록 하는 역할이 사(士)에게 부여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백성의 삶을 대하는 두 가지 상황과 태도가 나오게 된다. 첫 번째는 민(民)이 천민(天民)이 되지 못하는 상황, 즉 천민(天民)이어야 할 백성이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고통 받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士)는 현실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시정하기 위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른바 애민(愛民)이라는 입장이 여기서 마련된다. 맹자는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라도 요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들을 도랑에 밀어 넣은 것처럼 여겼으니 천하의 무거운 책임을 자임함이 이와 같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언급된 이윤의 마음이 곧 질곡 속의 백성을 대하는 입장이 된다. 두 번째는 민(民)의 천민(天民)으로서의 바탕을 확인하는 입장이다. 주자는 맹자에 인용된 이윤의 말을 풀이하면서 성현과 중인(衆人)은 모두 이 리(理)를 갖추고 있는데 중인은 스스로 그것을 깨달아 살피지 못할 뿐이라고 하였다【又曰: ‘伊尹說:「天之生斯民也, 使先知覺後知, 使先覺覺後覺. 予,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斯道覺斯民也. 非予覺之而誰也?」 「思天下之民,匹夫匹婦有不與被堯舜之澤者,若己推而納之溝中, 其自任以天下之重如此!」 聖賢與衆人皆具此理, 衆人自不覺察耳.’ -『朱子語類』 권130】. 이러한 입장에 서면 백성에게 있는 순천리(順天理)한 모습, 즉 천민(天民)의 자질을 확인하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된다. 백성에게서 천민(天民)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백성들의 삶 속에서 그들의 질박하고 순수한 면모, 참된 인간상의 모습을 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민생을 대하는 이 두 가지 태도는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민생을 형상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로 기능하게 된다. 먼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형상화한 시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我過淸州境 觀風一喟然 | 내가 청주의 경계를 지나며 풍속을 살펴보니 탄식만 나오네. |
誰爲懶明府 民病涉寒川 | 누가 관가의 부름에 늑장피우랴? 백성은 병든 채로 찬 냇물을 건너네. |
斫脛傷仁酷 乘輿用惠偏 | 정강이 깨졌으니 인을 해침이 가혹하고 수레를 타는 일도 그 혜택이 치우쳤구나. |
行人能殿最 可畏豈非天 | 행인들도 행적을 평가할 줄 아니 어찌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
「작천에 다리가 없어[鵲川無梁]」, 金昌翕, 『三淵集』 권8
관가의 부역으로 정강이가 깨진 채 차디찬 시냇물을 건너야 하는 백성을 안쓰러워하며 관리들에게 일갈(一喝)하는 시이다. 김창흡은 무지몽매한 백성이라고 무시하는 관가의 처사에 백성들도 잘하고 잘못하는 줄 분명히 알고 있다며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고 호통을 치고 있다. 이 시 속에서 백성은 곧 하늘로, 민심은 곧 천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김창흡의 이 시는 현장에서 터져 나온 것이기에 사실적이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 주는데, 이는 백악시단이 민생(民生)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뚜렷한 특징이다. 백성을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는 모습은 권섭의 다음 시에서도 확인된다.
乞人如佛佛如人 | 걸인이 부처요, 부처가 걸인이니 |
易地均看是一身 | 처지를 바꾸어 공평히 보면 모두가 한 몸이라. |
佛下庭前人上揭 | 불상 아래 뜰 앞에서 사람들은 떠받드는데 |
乞人尊佛辨誰眞 | 걸인과 부처 중에 누가 진짜인 줄 알리오? |
「걸인이라고 멸시하지 마라[乞人不可慢視]」, 權燮, 『玉所稿』 「詩·13」
권섭은 걸인도 부처도 ‘균간(均看)’하면 모두 다 한 몸이라 하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짜일 수도 있는 불상은 떠받들면서 눈앞의 진짜 부처는 걸인이라 멸시한다. 통념을 본원의 차원에서 전복하며 천한 거지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애민(愛民)’ 의식을 보여주었다. 권섭은 일찍이 “어린애라고 깔보지 마라. 어린 사람도 올바른 기준이 있다. 천한 사람이라고 쉽게 대하지 마라. 천한 사람도 기롱하는 줄 안다. 그런 즉 말을 하고 일을 할 때면 추호라도 대충 지나쳐서는 안 된다. 금수나 곤충 같은 부류도 모두 지각이 있으니, 사람이 어찌 그 곁에서 완전히 기탄없이 할 수 있겠는가?”【勿以小人而侮之, 小人亦有對頭; 勿以賤隸而易之, 賤隸亦知譏議, 則凡出言行事不可一毫放過矣. 禽獸昆蟲之類亦皆有知覺, 人豈可全無忌憚於其傍側乎? -權燮, 『玉所稿』 「散錄內篇·1」】라 한 적 있었는데, 약자는 물론이요 미물까지 염두에 둔 그의 인(仁)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권섭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관념적 사유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길을 가다 굶어 얼어죽기 직전의 사람을 구하고, “길에서 굶어죽었단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여러 중들 온힘 다해 불러 모았네. 들쳐 메고 온돌방에 편히 누였다, 호호 불며 죽을 쑨 뒤 일으켰다네[殣驚吾耳, 群僧盡力呼. 擔來臥溫室, 噓作粥糜扶. -權燮, 『玉所稿』 「詩·13」「救活凍丐」].”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가뭄으로 말라붙은 도랑에서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물고기를 손으로 건져 시내에 풀어주기도 하였다【余嘗行過旱溝, 見群魚喁喁待盡. 下馬而坐, 使傔人手掬而縱之傍溪. -權燮, 『玉所稿』 「散錄內篇·1」】.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마음으로 민생을 형상화한 시는 백성의 고통을 사실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할수록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애민의식에서 창작된 시는 대개 장편 고시의 형식을 취한다. 다음에 살펴볼 두 작품은 공히 애민정신에 의해 창작된 것이지만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먼저 권섭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民之有役自古然 | [1]백성들 부역은 예부터 있었다지만 |
東面之民何偏苦 | 동면 백성들 어찌 그리 고달픈가! |
朝朝夜夜犬吠咽 | 아침으로 저녁으로 개들은 울부짖는데 |
春夏秋冬不按堵 | 봄 여름 가을 겨울 편안할 적 없구나. |
官牌渡江走如鼠 | 공문서 강 건너 오니 쥐처럼 도망가서 |
竄伏林間甘倚虎 | 숲 속에 숨어도 호랑이가 오히려 반갑다네. |
松明乾炭兩等納 | 관솔이며 마른 숯 둘을 함께 바치려니 |
四色之茸應結戶 | 갖가지 잡풀들로 문을 엮어 만들밖에. |
非再非三進上外 | 진상할 것 이 외에도 두세 가지 아닌데 |
日朔之共歸地主 | 하루 한 달 공출도 지주에게 돌아가네. |
使客軍馬嶺南䭾 | 사신의 군마는 영남으로 실어가고 |
不時策應無定數 | 불시의 원조도 정해진 수가 없네. |
夥然名目豈堪耐 | 허다한 명목을 어찌 감내하겠는가! |
八面皆同寧寃愬 | 모든 면이 다 같다면 어찌 원통함을 호소하랴! |
他村所無峽山資 | 다른 마을엔 없는 것을 산골짝에서 내어야 하고 |
徵督唯須官用裕 | 징수 감독 오직 관가의 쓰임만 넉넉히 하네. |
生稚訥魚不拘節 | 산 꿩과 눌치 잡기 계절을 안 가리고 |
(中略) | (중략) |
松脂杻骨杻皮令 | 송진 싸릿대 싸리껍질 채취 명령 |
白蠟五味山葡賦 | 밀랍 오미자 산포도 채취 부역 |
生鮮日次白土掘 | 하루걸러 생선 잡고 백토도 파야하는데 |
種種難酬別分付 | 들어주기 어려운 가지가지 다른 분부 |
輪差里正日奔走 | 돌아가며 맡은 이장 날마다 분주하고 |
五貫靑銅三朔斁 | 다섯 관 청동을 석 달 만에 마쳤다네. |
(中略) | (중략) |
書員監官踏驗苛 | [2]서원(書員), 감관(監官) 답험(踏驗)은 지독하고 |
及唱使令別差屢 | 급창(及唱), 사령(使令) 별도 차출은 빈번하구나. |
軍官何事劇咆哱 | 군관은 무슨 일로 저리 씩씩 화를 내나? |
約正風憲亦可怖 | 약정(約正)과 풍헌(風憲)도 협박하긴 매한가지. |
家家酒饌恣醉飽 | 집집마다 술과 음식 제멋대로 다 처먹고 |
剪髮何敢言貧窶 | 머리 잘라 사는 마당에 어찌 가난 말하리오? |
纔去卽來彼主人 | 가자마자 즉시 오는 저들의 주인은 |
以村爲家勸農互 | 권농과 작당하여 촌락을 제 집으로 삼네. |
殫心供接少佛意 | 대접하기 꺼려하여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
誣揑終爲獄中庾 | 무고하게 엮어서 끝내 옥에 처넣네. |
哀哀東面民何生 | [3]애달파라! 동면 백성 어찌하면 살 것인가? |
疾痛呼天又呼父 | 괴롭고 아파 하늘에 호소하고 부모에게 호소하네. |
我來凌江洞裏行 | 내가 능강에 와 마을 안을 다니면서 |
耳聆愁悶慘目睹 | 귀로는 근심 듣고 눈으로는 참상 보고 |
嗚嗚一嗚作歌詩 | 구슬픈 원망 노래 한번 지어서 |
願誦淸風深邃府 | 읊조려 저 깊숙한 청풍부에 알리려 하네. |
(後略) | (후략) |
「동면민가(東面民歌)」, 權燮, 『玉所稿』 「詩·1」
이 시는 권섭이 44세에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청풍(淸風)에서 향촌 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에 지어진 것이다. 모두 40구로 이루어진 장편 고시인데, 논의에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인용하였다. 이 시는 크게 보면 세 개의 의미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의미단락은 동면(東面) 백성들이 겪은 착취의 참상을 그린 부분이고 두 번째 의미단락은 이들의 고혈을 짜내는 양반과 아전의 횡포를 밝힌 부분이며 세 번째 의미단락은 새로 부임한 청풍부사에게 선정을 당부하는 부분이다.
백성들의 착취는 부역과 공물에서 이루어졌다. 시도 때도 없는 부역 징발에 짖던 개가 목이 쉬고, 차라리 호랑이를 만나게 될지라도 산으로 피하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관솔과 숯을 바쳐야 해서 대문까지 허는 지경인데 허다한 명목의 공출에 골짜기 맹지(盲地)까지도 세금을 거두었다. 꿩부터 야생 열매까지 시시로 바쳐야 하는데 들어주기 힘든 사적인 부탁까지 가중되었다.
이러한 착취는 관가의 아전과 수령, 그리고 향촌 사족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아전들은 실무에서 위세 떨고 협박하면서 사적 착취를 하고, 그 상전인 수령은 향촌의 권농(勸農)과 작당하여 마을 전체를 제집처럼 마음대로 주무르고, 혹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리면 없는 죄도 만들어서 감옥에 처넣고 말았다. 이러한 착취와 백성의 피폐상을 목도한 권섭은 스스로 발분하여 시를 지었다. 그리고 이 시를 새로 부임하는 부사에게 알려, 부사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선정을 베풀기를 부탁하였다【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다. “吾歌易感又易激, 却恐忠言反逆忤. 淸風五載四遽代, 達城良侯來何暮. 其人其心眞士夫, 家世傳承自淸素. 分符百里亦非小, 一念吾民失呴哺. 曰爾吾之少小友, 曰民之隱爾悉布. 嗚乎一言我侯仁, 何不持心制喜怒. 我今築室凌江居, 益知東面事如縷. 諸般責出詎得已, 非此東面靡所措. 侯雖矯之又生疣, 莫如因之去蟊蠧. 蠲他徭斂簡出牌, 終歲唯專農爲務. 哀之愍之一存心, 逐事丁寧且撫護. 民非禽獸皆知侯, 後之還忘勤力努. 嗚乎我歌歌再闋, 願與東面民鼓舞. 歸來我侯色敷腴, 寒碧樓前一仰俯.”】.
이 시는 창작의 동기가 뚜렷하다. 권섭은 어린 시절 벗이었던 신임부사에게 자신이 목도한 부조리를 낱낱이 알려주어, 이러한 부조리를 시정하겠다는 의도로 이 시를 지었다. 그런 까닭에 이 시는 비위 사실을 고발하는 일종의 보고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벗이 부사로 부임해 오는 터라 부조리를 근절할 수 있다고 판단한 권섭은 작심한 듯 자신이 목도한 부조리를 시로 옮겼다. 그래서 이 시는 심미적 형상화를 고려하지 않고 사실에 기반 하여 현실 속 동면(東面)에 만연한 문제점들을 이성적으로 파헤쳤다. 이 시의 성취는 바로 이 사실성과 고발성에 있다. 이 시의 사실성은 착취상에 대한 구체적 제시에서 마련된다. 꿩, 눌치, 송진, 싸릿대, 사리껍질, 밀랍, 오미자, 산포도 등의 공출 목록과 서원(書員), 감관(監官), 급창(及唱), 사령(使令), 군관(軍官), 약정(約正), 풍헌(風憲), 권농(勸農) 등의 착취자 명단이 그 현저한 구체성의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아침으로 저녁으로 개가 울다 목이 쉬고”, “집집마다 술과 음식 제멋대로 다 처 먹고”, “머리 잘라 사는 마당에 어찌 가난 말하리오”, “권농과 작당하여 촌락을 제 집으로 삼네”, “무고하게 엮어서 옥에 처넣네” 등과 같은 직접적 서술을 통해 작가의 비판의식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요컨대 이 작품은 현실 고발을 통해 부조리를 근절하겠다는 권섭의 작시 의도에 맞게 자신의 의사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형상화 방법을 적절하게 구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이병연은 석이 채취민의 고달픈 삶의 모습을 극적으로 형상화하며 애민과 비판의식을 드러내었다.
萬丈之峯直上天 | 01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 곧바로 하늘로 솟고 |
全壁削成松不枳 | 02 깎아지른 벼랑이라 소나무도 못자라네. |
嵐蒸霧歊石色靑 | 03 산안개 자욱하여 돌 빛마저 푸른데 |
人言峯半産石耳 | 04 저 산 허리춤에 석이가 난다하네. |
楊州有氓趫而貪 | 05 양주고을 백성들 잽싸게 찾아다니니 |
白首輕身利於此 | 06 늙은이도 조심치 않고 석이 따서 재미 보네. |
山背微縫去因緣 | 07 산등성이 살짝 붙은 실 같은 길 기어서 |
旣臨其巔利在底 | 08 봉우리에 올라 보니 저 밑에 이물(利物)이 있네. |
齋香祭神訴貧窮 | 09 산신에게 향불 피워 빈궁함을 하소연하고 |
四顧彷徨拚一死 | 10 사방을 보고 서성이다 한번 죽기로 작심을 하네. |
絞麻百尺分兩端 | 11 삼으로 백 척 줄을 꼬아 양 갈래로 나누고선 |
纒在石角在腰裏 | 12 돌부리에 하나 묶고 허리춤에 하나 묶네. |
硬心用膽向虛空 | 13 굳세게 마음먹고 허공으로 몸을 날리더니 |
裊裊垂下稍安趾 | 14 흔들흔들 줄을 타고 절벽 아래 바위 끝에 발을 겨우 디디네. |
挑多擷深遍罅隙 | 15 깊은 틈새 두루 뒤져 있는 대로 따서 메니 |
日午肩重猶不止 | 16 한낮 되어 어깨가 묵직해도 그칠 줄 모르네. |
長繩時搖未見人 | 17 긴 줄만 이따금 흔들릴 뿐 사람은 뵈지 않으니 |
守繩危峭泣其子 | 18 가파른 곳에서 줄 지키던 아들놈 울음을 터뜨리네. |
子泣莫聞繩欲斷 | 19 아들놈 울음소리 안 들리는지 줄은 곧 끊어지려는데 |
凄風倒吹日黃紫 | 20 처량한 바람만 솟구치고 누런 해는 보랏빛으로. |
心動遺籃却上來 | 21 마음이 왈칵 불안했는지 바구니를 버리고 올라오니 |
翁孩向哭愁雲起 | 22 늙은이와 자식 서로 잡고 우는데 근심스런 구름이 피어오르네. |
溪南祖田水旱捐 | 23 “개울 남쪽 조상 밭은 홍수로 가뭄으로 버리고 |
負薪雪中空破屣 | 24 눈 속에 땔나무 졌지만 공연히 짚신만 망가뜨렸지요. |
一擔千錢且可資 | 25 한 번 메면 돈 천 닢 만질 수 있으니 |
只擬明朝向塲市 | 26 내일 아침 시장으로 가볼까 합니다.” |
亦知崖下有死骸 | 27 벼랑 아래 해골들 굴러다니는 줄도 알지만 |
苦爲百口忘一己 | 28 숱한 식솔 목구멍에 제 한 몸을 잊은 게지. |
嗚呼溺貨氓可罪 | 29 아! 재물에 빠진 백성이라 허물하랴! |
肉食諸公與有恥 | 30 호의호식 높은 님네 부끄럽긴 매한가지. |
性於耕鑿堯舜民 | 31 농사를 천성으로 알던 요순의 백성들을 |
誰遣知此石耳美 | 32 누가 이곳에 보내 석이의 맛을 알게 했는가? |
「석이 채취[石耳行]」, 李秉淵, 『槎川詩抄』 卷上
이 시는 석이버섯을 채취하며 사는 백성의 삶을 극적으로 그려내면서 이들을 사지(死地)로 내모는 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작품은 내용을 중심으로 서사, 본사, 결사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석이버섯을 본격적으로 채취하는 과정과 석이 채취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형상화된 7~26행까지가 이 시의 본사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면, 석이버섯이 자라는 곳과 석이를 따며 살아가는 양주민의 풍속을 언급한, 즉 석이채취와 관련된 주변적 상황이 언급된 1~6행이 서사가 되고, 석이채취의 과정을 형상화한 뒤 시인 자신의 주관적 의사를 드러낸 27~32행까지가 이 시의 결사가 된다.
먼저 1행과 2행에서는 석이가 자생하는 곳을 그렸다. 이병연은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에 깎아지른 벼랑이라 소나무도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표현으로 석이가 나는 곳의 험난함을 드러냈다. ‘높디높은’과 같은 직설보다 ‘소나무도 자랄 수 없는’ 장면의 제시가 그곳의 험난함을 더욱 효과적으로 직감(直感)하게 한다. 이어 3~6행에서는 석이를 채취하며 살아가는 양평 주민의 풍속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본사에 해당하는 7~26행에서는 시인이 석이채취의 현장에 동행하여 그곳에서 본 석이 채취의 과정을 핍진하게 그려내었다. ‘향불을 피워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런 뒤에도 한참 동안 사방을 서성거리다 한번 죽기로 작심을 한다[齋香祭神訴貧窮, 四顧彷徨拚一死]’는 표현은 석이를 따는 백성의 심리상태를 행동으로 보인 것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석이 채취가 ‘죽기를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임을 공감하게 한다. 아울러 이 부분을 통해 시 전편에 이어질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한 석이 채취 과정을 절묘하게 예비하였다.
11~22행에는 석이 채취 과정이 본격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시적 정황은 이렇다. 늙은 아비가 어린 자식을 데리고 석이를 따러 나선 길에 이병연은 관찰자로 참여하고 있다. 늙은 아비는 삼을 길게 꼬아 만든 줄을 한쪽은 바위에 묶고 한쪽은 자신의 허리춤에 묶은 뒤 굳은 결심을 하고 백 척 벼랑으로 내려간다. 흔들거리는 줄을 타고 절벽 가운데 발 디딜 곳을 간신히 찾은 뒤에는 바위 틈새를 두루 뒤져 망태기에 석이를 따 담는다. 정신없이 석이를 따다보니 얼마나 지났을까? 눈에 보이던 사람이 이제는 벼랑 아래로 고개를 빼고 봐도 보이지 않고 그저 줄만 흔들거린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어린 자식은 아버지를 불러보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고, 아비가 매달린 줄은 금세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데 처량한 바람만 허공을 솟구쳐 분다. 급기야 아버지의 생사가 걱정된 어린 자식은 울음을 터뜨리고 이에 아비도 마음이 동했는지 죽게 고생해서 딴 석이 바구니를 버리고 올라오게 된다. 금세라도 끊어져 버릴 것 같은 불안함을 아비도 느껴서일 것이다. 이에 무사히 올라온 아비와 자식은 서로 부둥켜안고 안도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게 된다.
23~26행에는 이처럼 위험천만한 일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백성의 처지가 백성의 목소리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들이 석이채취에 나서게 된 것은 자연재해로 얼마 안 되는 조상적 전답을 짓지 못하게 되자 나름 자구책으로 나무일도 해보았지만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고, 어차피 죽게 될 판이라면 석이채취가 돈이 된다니 그것에 목숨을 걸어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성을 동정하는 시선은 현실의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되었다. 요순의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건 바로 석이버섯을 진미라며 탐하는 권귀(權貴)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는 서사적 기법을 활용하면서 석이채취 과정의 위험천만함을 실감나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또한 석이를 채취하는 백성을 어리석거나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乘危却忘愁, 獲利翻自侈. 何如農圃翁, 安坐以卒齒. 哀哉世間人, 愚者多如彼. -李獻慶, 『艮翁集』 권9 「石耳-石耳, 玄色細皺, 品味淸淡, 蔬菜之良者也. 生於石崖嶄絶之上, 山民採者, 以長繩繫兜子, 乘之以上下如繘井然, 綆絶落崖而死者亦往往有之云. 噉之非如芻豢之味, 貨之不過錐刀之利, 而長吏責其供, 貧民要其直, 以危其性命, 悲夫!-」】 석이 채취민의 말을 직접 인용하여 그들의 처지를 십분 공감하게 한 뒤, 호사한 권귀(權貴)들에 대한 비판을 진행시킴으로써 애민이라는 주제의식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였다【이 부분은 졸고, 「애민시의 전통에서 본 석이행」, 『돈암어문학』24집, 2011을 요약한 것임.】.
권섭과 이병연의 작품은 백악시단이 고달픈 민생(民生)을 형상화한 시의 두 전형을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현장에 즉하여 생생한 사실주의 미학을 보이면서도 한 쪽에서는 문학적 형상화보다는 현실의 문제점을 이성적 시각으로 포착하여 고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장 심금을 울릴만한 특징적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현실 비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민생을 형상화한 백악시단의 ‘진시’는 대개 이 두 경향의 폭 안에서 애민과 비판정신을 구현해낸다. 아래 홍세태의 시를 보자.
大車彭彭服兩牛 | 수북이 쟁인 큰 수레를 두 마리 소가 끄는데 |
前牛後牛皆垂頭 | 앞 소며 뒤 소도 모두 머리를 늘어뜨리네. |
牛罷車重行不得 | 소가 멈추면 무거운 수레 갈 수 없는데 |
十步之內五步休 | 열 걸음 가는데 다섯 걸음 쉬는구나. |
借問車中載何物 | 묻노니 수레 안에 실은 것 무엇이더냐? |
官家鑄錢須銅鐵 | 관가에서 동전 만들 동철(銅鐵)이란다. |
此鐵由來出南蠻 | 이 철은 남만(南蠻)에서 나는 것인데 |
萊州大商緣其間 | 부산의 대상(大商)이 수입해 왔다네. |
滄溟萬舸簇蝟毛 | 너른 바다 수만 척 배 고슴도치 털처럼 빼곡히 모여 |
釜山掛帆來龍山 | 부산에서 돛을 달고 용산으로 옮겨왔다네. |
長安六月烘如火 | 도성은 유월이라 불같은 무더위인데 |
鐵車相連北山下 | 철 실은 수레는 북산(北山) 아래로 이어지누나. |
將軍幕府壓山谷 | 장군의 막부는 산골짝에 드높은데 |
萬夫槖籥張爐冶 | 만 명 일꾼 풀무질하여 가마에 녹이네. |
爐中一日得千萬 | 가마에서 하루에 천만 동전 만들어내면 |
鐵貨更與萊商販 | 동전은 다시 동래 상인에게 팔리네. |
萊商日富錢日賤 | 동래 상인은 날로 부자 되고 동전은 날로 싸지는데 |
九府何曾救人困 | 구부(九府)【돈을 주조하고 관리하던 기구.】에서 한 번이라도 백성 고통 구한 적 있나? |
還聞細民竊爲幣 | 듣자니 가난한 백성도 몰래 화폐를 만들어 |
往往私鑄干邦憲 | 이따금 동전을 위조하여 관리에게 바친다지. |
官家養牛亦有食 | 관가에서 기르는 소는 먹을 것이 있지만 |
車丁歲饑分牛飯 | 수레꾼은 흉년으로 소먹이를 나눠먹는다네. |
我謂車丁鞭莫疾 | 생각건대, 수레꾼이여 채찍을 서둘지 마오 |
牛蹄蹶兮車軸折 | 소가 자빠지면 수레 축이 부러지네. |
車軸折尙可 | 수레 축 부러지는 것이야 괜찮다마는 |
牛斃不可說 | 소까지 죽는 건 말도 안 되네. |
弓牛之角甲牛皮 | 소뿔로는 활 만들고 껍질로는 가죽 만들리니 |
官家鑄錢何時畢 | 관가의 동전 주조 어느 때나 끝나려나? |
「동철(銅鐵)을 실어 나르는 소[鐵車牛行]」, 洪世泰, 『柳下集』 권2
홍세태는 동전 주조용 철을 죽을힘을 다해 끌고 가는 소의 모습을 보면서 동전주조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시에 담았다. 홍세태는 동전의 주조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동전을 주조해봐야 인플레이션으로 현물 가치만 높아져 상인들은 톡톡한 재미를 보지만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홍세태는 주전(鑄錢)의 남발이 가져온 폐단을 백성들이 돈을 위조하는 것으로 구체화하여 동전이 통화(通貨)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단적으로 보였다. 조선후기 동전 주조에 관한 조정의 의견은 분분하였다【『英祖實錄』 권14, 3년 11월 5일 2번째 기사. 이 기사에서 이조참판 윤순(尹淳)은 동전 주조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중시킨다며 동전 주조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고, 판윤 김동필(金東弼)은 현물통화의 폐단을 극복하려 시행된 동전을 다시 현물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였고, 병조판서 이태좌(李台佐)는 30년이나 주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동전이 귀해져 빈부의 격차가 커졌으니 주전(鑄錢)을 통해 돈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민생의 입장에서 볼 때 체계적이지 못한 통화정책은 현실의 삶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동전 주조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동전이 유통된 이래로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졌으니 주전(鑄錢)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좌참찬 오정위를 두고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며 ‘동취공경(銅臭公卿)’이라 불렀다는 실록의 기사【『肅宗實錄』 권8, 5년 1월 16일 1번째 기사.】는 동전 주조에 관한 민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홍세태는 이 같은 백성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후반부는 의미심장하다. 작가는 수레를 모는 백성에게 철을 실어다 줘봐야 백성들만 피폐하게 하는데 무얼 그리 서둘러 소에게 가혹한 채찍질을 하느냐며 소를 천천히 몰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이어 그렇게 가혹한 채찍질에 소가 죽으면 그 소는 뿔이 뽑히고 가죽까지 벗겨지는 수탈을 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시에 제시된 소의 형상은 질곡에 빠진 백성을 상징한다. 감당할 수 없는 각종 부역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백성의 모습은 목을 쭉 빼고 숨을 헐떡거리며 열 걸음에 다섯 걸음을 쉬어야 하는 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이렇듯 소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파악하고 나면 가혹한 채찍질을 멈추라는 홍세태의 당부가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진 것을 알게 된다. 소가 불쌍하니 채찍질을 멈추라는 것은 표면적인 의미이고, 감춰진 의미는 결국 사람 잡을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홍세태의 당부는 이렇듯 소극적이나 저항할 것을 권유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홍세태의 당부를 그저 소에 대한 안타까움 정도로 이해하면 홍세태의 당부는 전체 주제와 시상 전개에서 이질적이고 동떨어진 것이 되고 만다.
홍세태의 이 시는 소라는 상징적 소재를 통해 주전(鑄錢)에 대한 비판적 자기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서사적 구성을 통한 극적 형상화를 배제하고 동철(銅鐵)의 산지로부터 동철의 유입과정, 주전(鑄錢)으로 인한 양극화 현상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상세하게 제시하였다. 이 작품은 홍세태 이전의 여항 시인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현실주의적 성취를 이루었는데【윤재민, 「조선후기 중인층 한문학의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153면; 강명관,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7, 256면 참조.】, 특히 후반부의 당부를 통해 소극적이나마 저항의 의미를 담은 점은 사대부들의 애민시가 자기 계급을 엄격히 비판하면서도 끝내 현실의 질곡을 자신들의 이상적인 -가령, 요순의 태평시대와 같은- 세계 속에 용해시키고 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세계인식과 미감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아래 정내교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赤日鋤禾霜天穫 | 땡볕 아래 김을 매고 서리 내릴 때 거뒀지만 |
水旱之餘能幾獲 | 물난리와 가뭄 끝에 건질 것 얼마더냐? |
燈下繅絲鷄鳴織 | 등불 아래 실을 켜고 닭 울음에 베 짜지만 |
戛戛終日纔數尺 | 종일토록 애를 써도 남는 것은 겨우 두어 자. |
稅布輸來身無褐 | 세포(稅布)로 실어가면 몸에는 걸칠 게 없고 |
官糴畢後缾無粟 | 관청 환자 갚고 나면 뒤주엔 쌀이 없다네. |
惡風捲茆山雪深 | 모진 바람 띠집 말아 올리고 산에 눈은 수북한데 |
糟糠不飽牛衣宿 | 지게미도 못 먹은 채 거적을 덮고 자네. |
두 번째(其二)
白骨之徵何慘毒 | 백골징포 어찌 그리 참혹하고 표독한지 |
同鄰一族橫罹厄 | 이웃 사는 한 집안이 횡액에 걸렸다네. |
鞭撻朝暮嚴科督 | 아침저녁 채찍질로 엄히 과세 독촉하니 |
前村走匿後村哭 | 앞마을 도망치고 뒷마을은 통곡하네. |
鷄狗賣盡償不足 | 닭과 개를 다 팔아도 갚기엔 턱없는데 |
悍吏索錢錢何得 | 독한 아전 돈 달라니 그 돈 어이 구할거나? |
父子兄弟不相保 | 부자와 형제도 서로 지키지 못하고 |
皮骨半死就凍獄 | 삐쩍 말라 반은 죽어 얼음 같은 옥에 갈 뿐. |
「농가의 탄식[農家歎]」, 鄭來僑, 『浣巖集』 권1
이 시는 정내교가 40세 되던 1720년에 지은 것으로 충청도 어느 마을에서 목도한 민생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고발한 작품이다. 첫 번째 수에는 수해와 한해로 수확이 줄었는데 먹을 양식은 환곡으로 모두 수탈당하고, 새벽까지 짠 베는 군포로 다 빼앗기고 말아 지게미, 쌀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한 채 거적을 덮고 자는 백성의 모습을 그렸다. 두 번째 수는 아침저녁으로 조세를 닦달하는 아전의 등살에 가족이 파탄 나고, 결국엔 피골이 상접한 채로 얼음장 같은 감옥에 갇히고 만 백성의 모습을 그렸다. 이 시는 형사만으로 백성들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전할 뿐 이러한 사태를 목도한 시인의 의식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내교는 왜 사실적 형사만으로 자신의 의식을 대신하려 했던 것인가?
그것은 홍세태의 경우처럼, 사대부와는 다른 중인층의 비판의식이 대단히 강렬하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세태가 여항시단에서 비판적 사회시 창작을 열었다면, 정내교는 그 비판적 형상화를 한층 심화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윤재민, 앞의 논문, 169면; 강명관, 앞의 책, 263면 참조.】. 사대부들의 사회시는 대개 작품의 후반에 자기 의사를 개진한다. 가령, 앞서 김창흡이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가?”라고 하면서 수령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고, 이병연이 “농사를 천성으로 알던 요순의 백성들을, 누가 이곳에 보내 석이의 맛을 알게 했는가?”라고 하면서 자기 계급에 반성을 촉구하며, 권섭이 위정자에게 선정을 당부하는 것들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들이 시에 위와 같은 자기 의사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사대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항인들은 그들의 신분 때문에 현실 정치를 담당하는 양반들을 직접 대고 비판할 수 없었다. 홍세태가 수레꾼에게 당부의 말을 하면서 중의적 수사를 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내교는 홍세태처럼 중의적 장치를 설치하지 않았다. 대신 정내교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감추고 농민의 입을 직접 빌리는 것이었다. 정내교의 시는 「농가의 탄식[農家歎]」이라는 제목처럼 전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농민의 탄식이 이쯤에 이르면 나올 수 있는 반응은 “이런 개 같은 세상” 내지는 “저런 쳐 죽일 놈들”과 같은 분노에 찬 과격한 언사가 될 것이다. 독자가 이 시를 읽으면서 가련한 농민들의 처지를 애달파 하면서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 정치에 공분하게 되는 것은 정내교가 의도한 바로서 이 시가 거둔 참여 시적 성취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신분적 제약에 의해 자신의 비판적 의론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여항인들은 시 창작에 있어 자신들의 불우한 세계인식을 불완전하고 모호하게 표출하기 보다는 부조리한 세상을 생생하고 실감나게 전달하는 형사에 몰두하게 되면서 사대부와는 다른 여항인 특유의 비판적 리얼리즘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상의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 백악시단이 민생을 형상화한 시들은 모두 생생한 실상 전달에서 빼어난 성취를 보인다. 이러한 성취는 백성을 천민(天民)으로 여기며 그들의 생활현장에 밀착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창작 태도로 민생을 형상화한 백악시단의 작품들 가운데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시에 직접 노출시킨 작품들이 많다.
春動江湖新浪生 | 봄 막 되어 강에는 새 물결이 일렁이니 |
舟人鼓楫唱歌聲 | 뱃사람은 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가 |
自言販穀扶安去 | 혼잣말하길, “곡식 팔러 부안으로 떠나면 |
三月花開可上京 | 춘삼월 꽃이 펴야 상경할 수 있으려나.” |
「강가 마을에서 있었던 일[江村卽事]」, 洪世泰, 『柳下集』 권1
墟里烟沉夕 山空雪欲落 | 마을은 저녁연기로 어둑한데 산은 텅 비고 눈이 곧 떨어질 듯. |
村翁宵索綯 松火照茅屋 | 촌 늙은이 밤이 되자 새끼를 꼬고 관솔불로 초가를 밝혀두었네. |
村犬吠如豹 柴門吏夜過 | 촌집 개 표범처럼 사납게 짖어대고 사립문엔 밤늦게 아전이 다녀갔네. |
今年秋稍熟 租稅較前多 | “금년은 가을 작황 좋지 않은데 조세는 전년보다 훨씬 많네요.” |
「전가(田家)에서 밤에 읊다[田家夜吟]」, 趙正萬, 『寤齋集』 권1
父老相逢說 今年良苦哉 | 노인들과 만나서 말을 나누니 “올해는 참 죽을 맛입죠. |
籓籬多帍患 畎畝半虫災 | 울타리에는 호환(虎患)이 잦았고요, 논밭은 벌레가 반이나 먹었습죠.” |
官遠何能達 民艱實可哀 | 관청이 머니 어찌 능히 알리랴? 백성들의 고달픔 참으로 슬프구나! |
秋來又奔走 嶺上別星廻 | 가을 와서 또 다시 분주하건만 고개 마루 위에는 관리의 행차. |
「우계(羽溪)에서[羽溪]」, 李秉淵, 『槎川詩選批』 卷下
첫 번째로 인용된 홍세태의 시는 어느 강가 마을에서 뱃사람과 있었던 일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얼음이 녹아 넘실대는 강물과 노 박자에 맞춘 구성진 노랫가락, 그리고 뱃사람의 말을 간결하게 연결시켰다. ‘곡식 사러 지금 부안으로 떠나면, 삼월 꽃 필 때나 올라올지 모르겠다’는 뱃사람의 말은 생활인으로서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먹고살기 위해 오랜 기간 가족들과 떨어져 먼 곳을 오가야 하는 애달픈 처지를 보여준다. 덤덤했을 뱃사람의 어조가 오히려 애상감을 불러일으킨다.
두 번째로 인용된 조정만의 시는 저물녘 어느 농가에서 유숙했던 경험을 적은 것이다. 조정만은 저물녘부터 밤까지 있었을 많은 일들 가운데 아전이 다녀간 뒤 탄식하는 늙은 농부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세밀한 상황묘사를 배제하고 툭 던져놓은 늙은 농부의 말을 통해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통, 그것을 연민하는 작가의 마음, 불평한 조세 집행에 대한 비판의식 등을 담아내었다.
세 번째로 인용된 이병연의 시는 삼척의 어느 마을에서 노인과 있었던 일을 적은 것이다.
노인은 작황의 상황을 알리고 이병연은 그들의 처지를 연민하였다. 호환이며 병충해로 한 해 농사가 걱정인데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관리들의 행차를 병치시키며 백성의 고달픈 삶을 형상화하였다.
세 작품은 모두 백성의 목소리를 시에 직접 드러냄으로써 민생의 현주소를 사실적으로 사생하였다. 제시된 백성의 목소리는 민생의 고단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현장의 모습을 직접 대면하게 함으로써 작가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고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근체시에서 이렇듯 백성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구사하였다. 애민시 계열의 시가 장편 고시 형식을 활용함에 비하여 위 작품들은 백성의 비판적 목소리를 직접 보임으로써 짧은 시형으로도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는 백악시단의 애민시가 거둔 의미 있는 성취라 할 수 있다.
한편, 天民이 고통 속에 신음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의식은 천민을 사지로 내몬 주체, 즉 현실 기득권에 속하는 자기 계급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열일곱 번째(其十七)
前官載太重 後官庫無積 | 전임 관리 쓸어간 게 얼마나 심했던지 후임 관리 창고에는 남은 게 없네. |
不知重記時 能無面發赤 | 모르겠네, 인수인계 할 적에 낯바닥 붉어지지 않을 수 있을는지. |
「갈역잡영(葛驛雜詠)을 이어 또 짓다[又賦]·17」,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11
海州多石石無神 | 해주의 많은 빗돌, 허나 돌에 무슨 신명 있다고 |
力盡年年曳石民 | 해마다 죽을 힘 다해 빗돌 끄는 백성들. |
衰草夕陽多少碣 | 시든 풀섶 석양 아래 허다한 비석들 |
前名磨滅後名新 | 앞선 이름 갈아내고 뒷사람 이름 새로 팠네. |
「선정비(善政碑)」, 李秉淵, 『槎川詩選批』 卷下
사대부는 왕과 백성 사이에서 왕화(王化)를 보좌해야할 책무를 지닌 존재였다. 그렇기에 사대부는 부단한 학문탐구와 철저한 자기수양을 사회적 역할로 공인받았다. 그러나 김창흡의 눈에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대부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시키고 권력을 부지하기 위해 현실의 부조리를 생산하는 주범이었다. 삼대(三代)의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고자 했던 고원한 이상은 기득권 보존의 방패막이로 변질시킨 채 선비라는 자들이 사사로운 욕망을 위해 온갖 횡포를 자행하는 현실, 김창흡은 이러한 현실을 묵과할 수 없었다. 김창흡은 「갈역잡영」을 통해 현실의 부조리한 면면을 가차 없이 고발하고 비판하였다.
첫 번째로 예시한 시는 김창흡의 「갈역잡영」 가운데 수령들의 비리를 폭로한 작품이다. 김창흡은 목민(牧民)해야 할 관리가 자기 욕심 채우기에 급급하여 염치마저 내던진 장면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전임 수령이 체임되면서 관아의 물건을 몽땅 쓸어가 후임 수령이 고을살이에 쓸 물건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을 두고, 김창흡은 ‘그러고서도 낯바닥이 붉어지지 않을 수 있겠냐’며 비판하였다. 최소한의 염치마저도 나 몰라라 팽개치는 수령에 대해 김창흡이 가차 없이 조롱하고 야유한 것이다. 김창흡의 「갈역잡영」 가운데 현실세태를 비판한, 그 가운데서도 자기 계급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한 작품들은 위 작품처럼 시가 지녀야할 우아함 내지는 서정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오히려 추악한 현실을 여과 없이 노출시키고 자신의 비판적 사유를 직접 개진하는 방식을 통해 전에 없이 첨예한 미감을 창출한다. 김창흡의 「갈역잡영」이 보인 이러한 미감은 후대 서얼문인들의 호응을 받아 하나의 시풍으로 발전하였으나 보수적 문학관을 지닌 문인들에게는 비판을 사기도 하였다【정조는 김창흡의 시가 보인 세계인식에 대해 충화(沖和)하고 평담(平淡)한 기상이 전혀 없다며 후생들이 절대로 배워서는 안된다고 하였고, 심노숭은 김창흡의 시풍이 초림체(椒林體)의 연원이 된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Ⅴ장에서 상세히 논하였다.】.
두 번째로 예시한 작품은 이병연이 배천군수로 재임할 당시 지어진 것이다. 선정비(善政碑)는 목민관의 은혜와 교화를 감사하게 여기는 백성들이 그 덕치를 기려 자발적으로 세우는 것이다. 그렇기에 선정비 건립은 목민관에게 대단히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선정비는 개인적 영예를 탐하는 수령에 의해 백성을 위협하거나 자신의 재물을 들여 억지로 건립되는 예가 적지 않았다. 영조조에 박문수는 역대 평양감사들의 생사당(生祠堂)과 선정비(善政碑)가 부지기수로 건립되어 있는데 감사에게 아첨하기 위해 군민(軍民)을 동원하여 건립한 생사당과 선정비는 폐단이 크므로 선정비를 모두 대동강에 빠뜨리고 사당의 화상들을 철거해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文秀曰: ‘臣過平壤時見之, 則前後監司之生祠堂、善政碑, 不知其數. 大抵監司之治不治, 姑舍之, 惟以媚悅爲習, 收斂軍民, 其費、其弊罔有紀極. 今之爲監司者必沈其碑於大同江, 且去其畫像, 然後民習方正矣.’ -『承政院日記』英祖 11년 1월 3일 入侍 기사】. 이병연의 작품 또한 선정비를 통해 기득권층의 탐욕을 비판하였다.
시의 전반부는 선정비로 사용될 돌을 나르느라 죽을 고생을 하는 백성들을 그렸다. 해주는 해주석(海州石)이라는 이름난 돌의 산지이다. 그런 까닭에 해주의 돌은 권세가들의 영예를 치장하기 위해 동원되기 일쑤였다. 해마다 무거운 빗돌을 옮기느라 죽을 고생을 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이러한 사정을 보여준다. 시인은 이러한 수탈상을 제시하면서 권세가들의 탐욕을 비판한다. 해주석이라는 이름을 좇아 백성들만 고달프게 하는 상황을 ‘돌이면 다 같은 돌이지 해주석이라고 특별한 신통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라며 기득권층의 허위의식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시의 후반부에는 빗돌을 나르느라 죽을 고생을 하는 백성들의 모습 위로 빼곡히 늘어선 선정비의 모습을 포개었다. 이병연이 이러한 시상을 구성한 것은 선정비가 지닌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시인의 눈에 빼곡히 늘어선 선정비는 ‘선정(善政)’이란 명칭과는 상반되게 노동력을 착취하는 악정(惡政)의 증거물들인 셈이다. 더구나 앞선 사람의 이름을 갈아내고 새로 자기 이름을 새긴 빗돌은 힘 있는 자들의 허위와 몰염치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이병연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장면을 겹쳐 보여주는 방식으로 신랄한 비판의식을 드러냈다. 이병연의 이 시는 관리들의 치적으로 자랑되는 선정비가 얼마나 허위에 찬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유사한 시편을 쉽사리 발견할 수 없다. 선정비라는 민감한 제재를 포착하여 선정비가 곧 악정비라는 도발적 비판의식을 드러낸 이 작품은 고달픈 민생의 현장에 밀착하지 않고서는, 또 부조리의 주범인 자기 계급에 대한 뼈저린 반성 없이는 쉽사리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이런 점에서 양반 기득권층을 신랄하게 질타한 김창흡과 이병연의 시편은 애민정신의 연장선에서 시가 지녀야 할 사회적 역할과 시적 주체가 지녀야 할 현실인식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백악시단이 고통 받는 민생을 형상화한 작품을 살펴보았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을 천민(天民)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현장에 한 발 더 밀착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이 직면한 부조리한 현실을 보다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들의 시편 속에 그려진 백성들은 악부시의 전통을 빌린 ‘베 짜는 아낙’과 같은 관념적 백성이 아니었다. 당대 조선이라는 현실의 시공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실존적 백성들이었다. 정강이가 깨진 채 찬 물을 건너야 했고, 새끼줄 하나에 목숨을 건 채 천심절벽에 매달려야 했던 그런 백성들이었다. 이상의 시편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민생의 현장은 애민(愛民)해야 한다는 당위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장면들이다. 백성의 삶을 바라보는 진실하고도 따뜻한 시선, 이것이 당대 백성들의 삶을 시 속에 생생하게 재현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게 한 힘이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민생을 대하는 두 번째 태도는 백성들의 삶에서 천민(天民)의 자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들의 삶에서 순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참된 인간상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백성의 삶에서 참된 인간상을 그려낸 작품들은 이른바 전통적인 “애민시”와 비교할 때 민생을 대하는 인식의 변화를 보인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선 시편들에서 살펴본 대로 애민시의 기본 구도는 백성을 현실의 질곡 속에서 좌절하고 눈물짓는 연약한 존재로, 작가는 그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하는 존재로 설정한다. 애민시의 이러한 구도는 백성들의 삶을 작품 전면에 부각시키지만, 정작 방점은 백성들의 삶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의식에 놓이게 한다. 즉, 애민시 속 백성의 삶은, 그것이 진지한 의식의 산물임에도, 여전히 사대부 자신들의 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존재한다.
반면, 두 번째 입장에서의 형상화는 그들이 백성들의 삶에서 발견한 참된 인간상을 현현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작가의 의사가 전면으로 노출될 필요가 없다. 다만 작가의 의식은 과연 어떤 모습에 참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형식으로 작품 외부에 존재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백성의 삶을 참된 인간의 삶으로 형상화한 작품들은 백성들을 수동적 경물이 아닌 능동적 주인공으로 부각시킨다. 이제 실제 작품을 통해 그 특징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이 만난 백성들을 따뜻한 인간애의 소유자로 형상화하였다.
有何嗤嗤叟 蒸薪卽山谷 | 어떤 어수룩한 늙은이 나무하러 산골짜기 찾아들어선 |
綢繆爲一束 拉雜松與栢 | 창창 감아 한 다발 만들었는데 꺾은 것은 잡다한 솔과 잣가지. |
來歸川上息 沈吟聊濯足 | 돌아오다 냇가에 잠시 쉬는데 흥얼흥얼 노래하며 발을 씻는다. |
濯足且徐徐 下見川魚躍 | 발을 씻다 또 천천히 뛰노는 고기를 굽어보다 |
捉鯉大如手 筐盛何濯濯 | 팔뚝만한 잉어를 잡으니 광주리에 한가득 얼마나 싱싱한가! |
有薪供釜鬵 歸共兒女食 | 땔감 있으니 가마솥에 불을 지펴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먹겠지. |
行路之好者 謝爾山澤樂 | 행로의 선한 사람이여 산택락(山澤樂) 보여 준 것 감사드리오. |
「땔감을 진 노인이 냇가에서 쉬다가 물고기를 잡아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見負薪叟息于川上捕魚而歸]」,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1
김창흡의 이 시는 땔나무 지게를 벗어둔 채 어떤 노인이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보고 쓴 시이다. 김창흡은 노인의 모습을 ‘치치(嗤嗤)’하다고 형용하였다. ‘치치(嗤嗤)’는 엉성해보고 우스워 보이는 모양새를 말한다. 그런 노인이 땔나무를 지고 오다 냇가를 만나자 지게를 벗고 발을 씻는다. 그러다가 물을 굽어보더니 이내 팔뚝만한 잉어를 낚아챈다. 김창흡이 본 모습은 여기까지이다. 김창흡은 이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연상을 이어간다. 땔감도 마련했고 물고기도 잡았으니 집에 가면 가마솥에 팔팔 끓여서 아내와 자식들과 별미를 즐기겠지. 그리고는 여행길에서 이렇게 순박한 삶을 살아가는 노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감사할 일이라며 시상을 마쳤다. 이 시는 노인을 어수룩해 보이지만 따뜻한 가족애를 지닌 인물로 형상하였다. 물론 가족과 함께 하는 장면은 김창흡의 상상이므로 이 노인이 실제 그렇게 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창흡이 이런 산수간 백성으로부터 참된 인간상을 떠올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창흡은 이 노인을 ‘길 가던 선한 사람[行路之好者]’이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들의 질박한 삶 속에서 참된 인간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백악시단 문인들의 눈에 비친 백성들은 넉넉하진 않지만 그래도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農家養牛堗 木落已可愛 | 농가의 쇠죽 끓이는 아궁이 잎을 떨군 나무지만 그래도 좋구나. |
主人留我宿 囑婦時向內 | 주인은 나를 잡아 하룻밤 묵게 하고는 아내를 재촉하며 자꾸 안을 쳐다보네. |
燈前送大梨 一擘淸火肺 | 등불 앞엔 보내온 커다란 배 한번 쪼개 베어 무니 불같던 속이 시원하구나. |
俄怪盤中珍 捕魚仍摘菜 | 이윽고 쟁반의 진미 무언가 했더니 막 잡은 물고기와 갓 뜯은 산나물. |
自從峽中行 往往看眞態 | 골짜기를 따라 여행한 이래 때로 이런 참된 모습 보게 되었지. |
鞍馬一宵稳 邂逅情可佩 | 편안히 하룻밤을 보내고 말에 오르니 해후의 정 간직할 만하네. |
拂曙還相辭 依依嶺月在 | 새벽에 일어나 서로 인사하는데 봉우리엔 희미한 달 남아 있구나. |
「창도역에서[昌道驛]」, 李秉淵, 『槎川詩抄』 卷上
이병연의 이 시는 창도역(昌道驛) 인근의 어느 농가에서 하루를 유숙하게 된 일을 형상화하였다. 이병연은 주인 내외를 다정다감한 인물로 형상화하였다. 늦었으니 하루 자고 가라고 만류하는 주인의 모습이며, 뭐라도 얼른 내오라는 남편의 재촉에 우선 급한 대로 배를 챙겨 보내고,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저녁을 준비한 아내의 모습은 참으로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모습들이다. 이병연은 이런 주인 내외의 모습을 ‘진태(眞態)’라고 하였다. 이하곤은 자신의 「동유기」에서 “저녁에 횡성읍에서 유숙하였다. 주인의 성명은 신인방인데 일찍부터 농촌에 살았다고 한다. 대접이 매우 정성스러웠다.”【夕宿橫城邑底, 主人姓名申仁方, 曾住農村云. 待之甚欵. -李夏坤, 『頭陀草』책14 「東遊錄」】라며 백성이 베풀어준 호의를 기록한 바 있는데, 이병연의 이 작품은 백성에게서 입은 호의를 시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길 위에서 만난 백성들의 호의를 깊이 감사했던 이병연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一鷄二鷄鳴 小星大星落 | 첫닭 울고 둘째 닭 울더니 작은 별, 큰 별 떨어진다. |
出門復入門 稍稍行人作 | 문을 들락거리며 조금씩 행인은 채비를 하네. |
客子乘曉行 主人不能遣 | 나그네 새벽 틈타 떠나렸더니 주인은 그냥 보내질 않네. |
持鞭謝主人 多愧煩鷄犬 | 채찍 쥐고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니 닭과 개만 괜스레 번거롭게 했구나! |
「일찍이 나서려다[早發]」, 李秉淵, 『槎川詩抄』卷上
이 시는 주인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몰래 길을 나서려다 닭 울음, 개소리에 주인이 깨고 말았다는 해프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백성의 호의에 진정 감사할 줄 아는 작가의 마음씨와 아직 잠도 덜 깼지만 그냥 가면 안 된다며 아침밥을 서두르는 백성의 온정이, ‘이럴 줄 알았으면 서둘지 말아 너희(닭, 개)들 잠이나 깨우지 말 걸’하는 우스개 속에 참으로 정겹게 그려진 작품이다. 이병연의 두 편의 시는 백성들을 따뜻한 온정을 지닌 진정한 교감의 대상으로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권섭 또한 백성에게서 입은 호의를 장편의 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稷山見日出 水原見日沒 | 직산에서 일출을 보았는데 수원에서 일몰을 보게 됐네. |
悠悠百里間 盡日行不息 | 멀고 먼 백 리 길을 온종일 쉬지 않고 걸음 했는데 |
雲陰天欲雨 晩後風益急 | 구름은 어둑해져 금세 비가 올 듯하고 저문 뒤라 바람은 더욱 세차니 |
黃埃亂撲面 薄綿寒徹骨 | 누런 먼지 흩날리며 얼굴을 치고 얇은 옷에 한기(寒氣)가 뼛속까지 파고드네. |
停轡問宿處 躊躇衢路側 | 말을 멈추고 묵을 곳을 물을 양으로 큰 거리 곁에서 서성이는데 |
官童見我拜 奔走借隣屋 | 관가 동자 나를 보고 인사하고는 근처 집을 빌리려 분주하건만 |
柴門拒不啓 勃磎饒婦舌 | 거절하며 사립문 닫아건 채로 내뱉는 아낙의 혀는 불어난 냇물 같구나. |
童遂目主人 申申謂語曰 | 관동이 마침내 주인장을 보고는 거듭거듭 간청하며 하는 말이 |
此客君莫嗔 權侯是其叔 | “이 손을 아저씨 마다 마셔요. 권후께서 이 분의 숙부랍니다.” |
侯恩詎可忘 我生伊誰力 | “권후의 은혜를 어찌 잊으랴? 내가 이리 사는 게 누구 덕인데.” |
主人始解顔 趍來謝僕僕 | 주인은 비로소 안색을 풀고 허둥지둥 달려와 사과하고선 |
擁篲掃其室 慇懃請我入 | 비를 들고 묵을 방을 쓸어낸 뒤에 정성스레 내게 들라 청을 하누나. |
入此且少休 藉背宜溫突 | 방에 들어 잠시 쉬자니 등을 붙인 온돌은 뜨듯해지고 |
呼兒喂馬飽 喚孃烹鷄熟 | 사내아이 불러선 말 먹이라 시키고 여자아이 불러선 닭 삶으라 시키더니 |
持盤勸我餐 發瓮要我酌 | 소반을 직접 들고 잡수시라 권하고 술동이 꺼내어선 한 잔 올리겠다고 원하네. |
飢腸好醉飫 大寢頗穩適 | 주린 창자 호사롭게 취하도록 실컷 마시고 잠자리도 대침(大寢)처럼 편안 했으니 |
深情荷主人 頓忘行李惡 | 주인의 깊은 인정 덕분에 잠시나마 여행길 고생을 잊었다네. |
「수원에 도착하여[水原行]」, 權燮, 『玉所稿』 「詩·1」
이 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 거리를 달려와 춥고 배고픈 권섭이 잘 곳을 찾고 있는데 화자를 알아보는 관동이 나타난다. 관동은 권섭을 대신하여 잘 곳을 알아보는데, 인근 집의 안주인은 냉정하게 거절하며 수다스럽게 불평을 늘어놓다. 말이 안 통해 곤혹해하던 관동은 집주인을 만나 권섭이 전 수원부사였던 권상유【권상유(權尙游)는 권섭의 숙부였다. 그는 1703년 수원부사가 되어 관리의 비행을 숙정(肅正)하는 치적을 남겼는데, 이에 대해 이의현은 “계미년(1703)에 금직(禁直)에서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발탁되었다. 막 부임하여 비리를 귀신처럼 적발하자 관리와 사람들이 놀라 움츠러들었고 도둑이 뿔뿔이 흩어져 경고(更鼓)를 치지 않아도 일체 잘 다스려졌으므로 정사의 명성이 크게 전파되었다[癸未, 自禁直擢拜水原府使. 始至, 發奸如神, 吏人讋伏, 盜賊散落, 桴鼓弗警, 一切治理, 政聲大播. -李宜顯, 『陶谷集』 권10 「吏曹判書權公神道碑銘」]라고 기록하였다.】의 조카임을 알린다. 권상유의 은혜를 잊지 않았던 집주인은 이내 사과를 하고 후한 대접을 베풀었다. 쌀쌀맞던 집주인이 전임 부사의 조카라는 말에 호의를 베푸는 장면은 시적이진 않지만, 그래서 더 사실적이다. 권섭은 손수 묵을 방을 청소하고 뜨듯하게 온돌을 데우며, 말을 먹이게 하고 닭을 삶게 하며, 손수 소반을 들고 들어가 술을 권하는 장면을 제시하여 집주인의 정성을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대침(大寢)’이란 시어를 통해 자신이 왕 같은 대접을 받았다며 깊은 감사를 표하였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시화(詩化)한다는 의식으로 인해 시상의 전개는 다소 매끄럽지 못하지만, 오히려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서의 사실성이 잘 발휘된 작품이다.
한편, 민생(民生)은 활기차고 풍요로운 것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秋田稻熟蟹如流 | 가을 들녘 벼가 익고 게들도 쏟아지니 |
生事江鄕百不憂 | 강가 마을 먹고 살 일 무엇 하나 걱정이 없네. |
上水女商爭操筏 | 물가의 아낙들은 다투어 뗏목 젓고 |
近湖童穉盡能游 | 강가의 아이들은 모두가 수영 선수. |
「두월정 옛터에 새로 연 주가(酒家)의 벽에 쓰다[題斗月亭舊墟新開酒家壁]」, 申靖夏, 『恕菴集』 권2
千燈截罾笱 入夜灘聲疎 | 등불 켜고 그물 통발 잘라 만드니 밤 되자 여울 소리 잦아드네. |
漁子喧相語 吾魚多爾魚 | 낚시꾼들 시끌벅적 서로 말하길 “내 고기가 네 것보단 훨씬 많지?” |
「원생을 위해 農菴에서의 여덟 가지 경치를 읊다[農菴八咏爲元生作]」 중 「광탄에서의 고기잡이 불[廣灘漁火]」, 權燮, 『玉所稿』 「詩·1」
潑潑靑魚龍島春 | 풀떡풀떡 청어 뛰는 용도(龍島)에 봄이 오니 |
巨網揮來擁萬鱗 | 큰 그물 내던져서 온갖 고기 끌어 잡네. |
伐鼓東歸覺船重 | 북 울리며 동쪽으로 가니 배가 묵직해짐 알았는지 |
兩村牛馬挾平津 | 두 마을 우마들이 평진(平津)을 둘러쌌네. |
「장삿배(商舶)」, 金時保, 『茅洲集』 권7)
세 작품 모두 백성들의 활기차고 풍요로운 삶을 형상화한 것이다. 신정하의 작품은 들판에 벼가 익고 강에는 게가 풍성하여 아낙들도 뗏목을 저어 게를 잡으러 가고 아이들은 헤엄을 치며 게를 줍는 모습을 그렸다. 아낙들이 다투어 뗏목을 젓는 장면과 능숙하게 헤엄을 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활기 넘치는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권섭의 작품 또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그렸다. 등불 아래서 통발을 만든 뒤에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았는데, 마지막 구에 ‘내가 너보다 더 많이 잡았지?’하며 자랑을 하는 백성의 목소리를 들려줌으로써 한밤 통발낚시의 신바람을 느낄 수 있다. 김시보의 작품은 봄을 맞아 배들이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모습을 그렸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가는 포구에 물고기를 실어갈 우마들이 나루를 빙 두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풍요로운 분위기를 극대화화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포착한 백성들의 풍요롭고 활기찬 모습은 모두 수확의 기쁨과 관련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항산(恒産)에 대한 시적 해석이 녹아있다고 할 수 있다.
민생에 대한 밀착된 시선은 생산 현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놀이문화 또한 시적 대상이 되었다.
橫馳直擣一場驚 | 가로 질러 바로 쳐서 한바탕 놀랐더니 |
急呼將軍大呌聲 | 재빠르게 “장이야” 큰 소리로 외치네. |
詭計奇謀千百道 | 위장 계책 기발한 꾀 천만 가지 방법으로 |
妙收殺處智何明 | 절묘하게 죽을 곳 피해가니 지략이 어찌 그리 환한고? |
何人安坐幾人驚 | 누구는 편히 앉고 몇 사람은 놀란 채로 |
逐坐隊分未大聲 | 자리 따라 편 나누고 숨을 죽이니 |
誰快勝乎張爾手 | 통쾌한 승리는 누구 것인가 “패를 까보게.” |
彼張手處此瞳明 | 저 쪽에서 패를 깔 적 이 쪽 눈동자 커지네. |
「아이들이 ‘경(驚)’자 운을 써서 바둑에 대해 읊었기에, 이 늙은이도 장난삼아 네 가지 잡기에 대한 시를 쓰다[兒輩用驚韻咏碁, 老夫亦戱題仍題雜技四詩]」, 權燮, 『玉所稿』 「詩·9」
권섭은 바둑, 쌍륙, 장기, 투전의 네 가지 놀이에 대해 시를 썼는데, 위에는 장기[博]와 투전(投錢)에 관한 시를 제시하였다. 장기를 형상화한 첫 번째 시는 공격과 방어가 일진일퇴하는 치열한 대국의 모습을 현장 중계하듯 그려냈다. 투전을 형상화한 두 번째 시는 승패를 가름하는 마지막 순간을 긴장감 넘치게 그려냈다. 두 시 모두에서 화자의 위치는 놀이의 현장에 있다. 첫 번째 시에서 “장이야!”를 호기롭게 부르자, 절묘한 지략으로 장을 받아치는 장면이나, 두 번째 시에서 죽을 사람은 이미 다 죽어 둘만 남은 상황에서 상대가 패를 까자 눈동자가 커지는 장면은 현장의 분위기를 대단히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다. 권섭의 이 시가 주목되는 것은 네 수의 연작 어디에도 이런 놀이에 대한 훈계식 논설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백성들의 놀이문화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인식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놀이와 관련하여 아래 이병연의 시 또한 주목을 요한다.
丙戌端陽節 嘉陵郡府前 | 때는 병술년 단양절이요 곳은 가릉군 관아 앞이라. |
闢塲初爽塏 傾巷早喧闐 | 마당을 여니 툭 트여 상쾌한데 온 마을이 아침부터 시끌벅적. |
始事圍高柳 頻摩似昨年 | 먼저 주위의 높은 버들을 부지런히 문질러 작년처럼 만들고 |
緣柯推勇敢 擲索縛牢堅 | 가지를 타고 용감하게 올라서는 던진 줄을 가지에 튼튼하게 동여매네. |
取蕩承旁蔓 貪高壓上巓 | 널찍하게 덩굴풀까지 이어지게 하고 높다랗게 산꼭대기에 닿게 했네. |
雙攀堪自擧 一縱若無緣 | 두 줄 잡으면 저절로 올라가서 한 번 놓으면 걸릴 것 없다네. |
裊弱先登㥘 飄颻仰望懸 | 가늘어서 먼저 오르긴 겁이 나 바람 속에 흔들리는 그넷줄만 쳐다보네. |
始催村少試 俄嬲里娘牽 | 시골아이 재촉하여 타보게 하고 조금 있다 장난치며 동네 처녀 끌고 가네. |
慣此風流戱 看他結束便 | 이런 풍류 섞인 장난에 익숙하기에 저 결속의 편리함도 볼 수 있구나. |
穿裁衫不扡 短作袖仍褰 | 잘 지어 만든 치마 날리지 않는데 짧게 만든 소매는 연신 나풀거리네. |
(中略) | (중략) |
踏板纔軒舃 鳴繩乍響拳 | 구름판을 구르자 곧 추녀까지 신발이 오르는데 그넷줄 갑자기 찌걱대자 손을 꼭 쥐네. |
莫言人挽送 終見自騰騫 | 남들더러 밀지 말라 말을 하더니 마침내 스스로 높이 차고 오르네. |
急引腰微擺 中張手政弦 | 급하게 끌 적에는 허리가 조금 흔들리더니 중간에 풀 적에는 손이 꼭 활 같구나. |
忙奔劈風箭 勇退急流船 | 빠르게 차오를 땐 바람을 가르는 화살 같고 용감하게 뒤로 갈 땐 급류 속 배 같구나. |
蹴處如相賤 蹲時學屢躚 | 차는 곳에선 미워하는 듯하고 웅크릴 땐 춤사위를 배우는 듯 |
飜來疑自墮 却上若難旋 | 뒤집혀 올 적에는 떨어질까 싶더니 도리어 차고 오르니 돌리기 어려울 듯. |
(中略) | (중략) |
極態低昂裏 生姿引却邊 | 오르락내리락 모양이 지극하고 끌었다 놓았다 맵시가 생겨나네. |
兼飛抱成㝈 末勢坐猶翩 | 나란이 껴안고 날아오르니 마지막엔 앉아도 날아오르네. |
逞手頻挼葉 傾巾或抓烟 | 신이 난 손은 자주 나뭇잎을 스치고 기울어진 두건은 혹 연기를 움키네. |
屢驚非揷羽 還道暫登仙 | 날개가 달렸나 자주 놀라고 도리어 잠시 신선이 되었다고들 하네. |
自得應如此 傍人倍悵然 | 스스로 터득함이 이와 같지만 곁에 사람들 갑절이나 걱정하네. |
送眸咸寂默 匝立漸團圓 | 숨죽인 채 눈동자만 그네에 맞추고 여기저기 섰던 사람 점차 둥그렇게 모였네. |
欲落愁平地 回看渺舊躔 | 내리려니 평지가 근심스럽고 돌아보니 지난 궤적 아득하구나. |
(後略) | (후략) |
「그네뛰기 40운[鞦韆四十韻]」, 李秉淵, 『槎川詩抄』 卷上
이병연은 그네뛰기를 40운이나 되는 장편으로 형상화하였다. 때와 장소, 그네의 설치, 그네 뛸 처녀 선정, 그네 뛰는 장면 등을 대단히 사실적이면서도 심미적으로 그렸다. 그네뛰기를 이렇듯 상세하고 생동감 있게 그린 작품은 찾기 어렵다. 가령, 그네를 차고 오를 때 허리를 굽히며 힘을 쓰는 모습을 ‘요미파(腰微擺)’라고 표현하거나, 발을 구르려고 웅크린 모습을 춤사위를 배우는 듯하다고 표현한 것[蹲時學屢躚], 그네가 최절정에 올랐을 때의 아슬아슬함을 숨을 죽인 채 눈동자만 그네를 따라 움직이는 것[送眸咸寂默]과 이리저리 흩어졌던 사람들이 어느새 둥그렇게 그네 틀 주위로 모이는 것[匝立漸團圓]으로 형상화하는 것 등은 이 시가 보인 문학적 형상화의 예라 할 수 있다. 이병연은 이 그네뛰기 놀이를 좋은 때의 즐거운 놀이로 인식했다[良辰眞一樂]. 이병연 또한 권섭의 경우처럼 백성들에게 있어 놀이가 가지는 의의를 십분 공감했던 까닭에 그들이 즐기는 놀이의 하나를 이렇듯 생생한 시편으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또한 민생에 밀착된 시선은 향촌민의 독특한 삶의 모습을 시로 형상화하게 하였다. 이해조는 제주순무어사(濟州巡撫御使)로 파견되었을 당시 자신이 목도한 제주의 산천과 풍속을 60운의 장편시로 남겼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石垣仍板屋 照里雜鞦韆 | 돌담에 둘린 판자집 조리놀이 그네뛰기 놀이 |
土堀寒無堗 茅茨亂不編 | 토굴엔 추워도 온돌이 없고 띠집 지붕 흩어져도 묶지를 않네. |
黃柑常抵鵲 朱橘不論錢 | 황감(黃柑)은 늘 까치가 먹고 주귤(朱橘)은 돈값어치를 따지지 않네. |
負桶民風是 踏田土性然 | 나무통을 지는 건 민풍이 그래서요 밭을 밟는 건 땅의 성질이 그래서라. |
富無如雍伯 壽或近彭籛 | 재산은 옹백(雍伯)같은 이가 없는데 나이는 곧 팽조에 가깝네. |
擣臼杵歌苦 迎郞棹曲傳 | 절구 찧은 방아노래 구슬프고 낭군 맞는 뱃노래가 전해오네. |
黃童皆佩劍 華髮尙彎弦 | 어린 애도 모두 다 검을 차고 늙은이들 아직도 활시위를 당기네. |
重女輕生子 無科貴備貟 | 여자를 중시하여 아들 낳기 경시하고 과거가 없으니 아전이 영예라네. |
「60운으로 지어 섬의 산천과 풍속을 기록하다[賦六十韻記島中山川風俗]」, 李海朝, 『鳴巖集』 권3
인용한 부분은 제주 가옥의 특징과 민속놀이를 말한 대목이다. 이해조는 이 부분의 주석에서, “촌가는 돌을 주워 담을 만들고 진흙을 바르지 않는다. 팔월 보름이면 남녀들이 함께 모여 가무를 즐기는데 조리 놀이를 하기도 하고 그네를 뛰기도 한다[村家聚石築垣, 不塗泥. 八月望日, 男女共聚歌舞, 設照里戱, 又作鞦韆戱].”라고 하였다. 이어 토굴에는 온돌이 없고, 띠집 지붕은 묶지 않는 특징과 황감(黃柑)은 천시되고 주귤(朱橘)이 귀한 점, 나무로 만든 허벅을 지고 말과 소로 밭을 밝게 한 뒤 파종을 하는 등 제주민의 특징적인 삶의 모습을 담아냈다【이 부분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촌가는 토굴을 쌓는데 방돌(房堗)이 없고 띠를 덮긴 하지만 묶지는 않는다. 남녀는 모두 나무통을 지는데 머리에 이지는 않는다. 땅의 성질이 날리고 건조하여 우마를 몰아 밭을 밟게 한 다음 비로소 파종을 하는데 이를 ‘족답(足踏)’이라 한다[村家築土堀, 無房堗, 覆茅而不編結. 男女皆負木桶而不戴. 土性浮燥, 故驅牛馬踏田, 始播種謂之足踏].”】.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제주민의 특징을 말하였다. 큰 부자는 없어도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여성들의 노동요와 낭군맞이 노래에 대해 언급하였다【이 부분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섬사람들은 대개 수를 누리지만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는 없다. 노역하는 일은 항상 여인 네댓 명을 모아서 한다. 절구 하나를 함께 찧으면서 반드시 방아노래를 부르는데 음조가 대단히 처량하고 구슬프다. 촌의 여인은 베필 있는 사람이 드물다. 매해 삼월이면, 곱게 꾸미고 포구로 방군(防軍)을 맞이하러 갔다가 자기 집에 이르도록 낭군 맞이, 낭군 전송 노래를 지어 부른다[島人多壽, 而無素封者. 勞役之事, 皆使女四五作隊, 共擣一臼, 必發相杵之歌, 音調甚悽苦. 村女鮮有伉儷, 每歲三月, 盛粧迎赴防軍於浦上, 引至其家, 作迎郞送郞曲].”】. 그리고 다음 대목에서는 섬사람들의 상무적 특성과 여자 중시를 중시하는 습속, 그리고 과거가 없어 아전이 영예롭게 대접받는 상황에 대해 말하였다【이 부분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섬에서는 적을 응대하는 데 익숙하여 관속과 촌민, 어린이도 모두 검을 차며 머리 하얀 노인도 강한 활을 당길 수 있다. 섬사람은 고기잡이에 종사하는데 바다를 가까이 하기 때문에 대개 물에 빠져죽는다. 그런 까닭에 여자 낳는 것을 중하게 여긴다. 도성이 멀리 떨어져 있어 과거를 보아 벼슬하기가 어려워 모두 관아의 집사를 영예로 여긴다[島中習於應敵, 官屬、村民、未壯皆帶劍, 皤皤者能彎强弩. 島民事漁, 狎海多溺死, 故以生女爲重. 京城隔遠, 難於科宦, 皆以執事官衙爲榮].”】.
이 시는 이처럼 제주민의 특이한 생활상을 하나하나 시로 적고 시구마다 주석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붙였다. 이를 통해 독자는 시를 읽으면서 제주에 대한 풍속을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이해조가 시와 산문을 결합하는 형상화 방식을 구사한 것은 제주의 풍속이 주석을 붙여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해조는 제주가 아닌 곳에서도 시와 산문을 결합하는 형상화 방식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상화 방식은 제주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관풍찰속해야 하는 어사의 직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해조가 보다 상세한 정보 전달이 가능한 산문 말고 시를 통한 형상화를 선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이해조가 시가 지닌 심미적 형상성에 대해 남다른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인용된 시와 주석을 다시 읽어보자. 그러면 독자는 상세한 주석으로부터 풍부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하게 된다. 이런 재음미의 과정 속에서 특징만을 간략히 진술한 시구들은 하나의 이미지로 전화된다. 이해조는 바로 시가 지닌 간결하고 선명한 이미지 창출 능력을 이처럼 활용했던 것이다.
백성들의 풍속을 읊은 백악시단의 작품들은 이 밖에도 다수 확인된다. 가령, 이하곤은 「장난삼아 오체(吳體)로 본주[전주]의 풍속과 토산에 대해 쓰다[述本州風俗土産戱爲吳體]」라는 시에서 “전주의 풍요함은 팔도에서도 드물어, 토속과 민풍이 도성과는 다르네. 머리 노란 추녀는 큰 다리를 비스듬히 올리고, 얼굴 하얀 날라리는 색동옷을 빼입었네. 주민들은 평량자(平凉子)를 즐겨 쓰고, 늘어선 가게마다 하얀 산자【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권26 「설부(說部)·5」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백산자(白散子)는 속명이 박산(薄散)인데 오직 전주에서만 만든다[白散子, 俗名薄散, 唯全州造之].”라고 하였다.】를 진열해 두었네. 생강 뿌리 절임이 가장 맛이 좋으니, 서울 나그네 처음 맛보고선 돌아갈 맘 잊을 정도.”【全州饒富八道稀, 土俗民風異京師. 醜女髮黃偏大䯻, 狡童面白更鮮衣. 居人愛戴平凉子, 列肆都排薄散兒. 薑鬚作葅味㝡美, 北客新嘗頓忘歸. -李夏坤, 『頭陀草』책9 「述本州風俗土産戱爲吳體」】라면서 전주 사람들의 스타일과 유행, 먹거리 등을 형상화하기도 하였다. 스스로 오체(吳體)라 밝혔듯, 시속의 어휘를 사용해가며 시인의 눈에 비친 전주의 특이한 풍속을 경쾌하게 담아내었다. 이병연 또한 「옹천으로 들어가[入甕遷]」라는 시에서, “팔을 걷고 매를 고르는 백령도, 맨몸으로 전복 따는 대청연. 돛단배가 때때로 등주 내주의 나그네를 떨구니, 통상하여 돈 만진 건 근년의 일이라네[袒臂調鷹白翎島, 赤身探鰒大淸淵. 風帆時落登萊客, 挾貨通啇自近年. -李秉淵, 『槎川詩抄』 卷下 「入甕遷」의 경련과 미련.].”라며 매와 전복을 중국 상인들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황해도 옹진군 백성들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하였다. 이렇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들이 본 백성들의 특이한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였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시로 쓴 풍토지(風土誌)라 할 만하다. 이병연은 자기 시의 이러한 특징을 두고, “여지승람 중수(重修)할 땐 나의 문집 봐야 하리, 얻은 대로 시 지을 뿐 다시 깎지 않았다네[重修輿地須吾集, 隨得隨題不復刪].”【李秉淵, 『槎川詩抄』卷上 「雜詠」의 미련.】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민생(民生)을 형상화한 백악시단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을 천민(天民)으로 인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천민이 고통 속에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러한 현실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러한 시들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현실을 고발하고 거기에 작가의 비판 정신을 표출하였다. 이들의 애민시는 실제 현장에서 마주한 것을 형상화했기 때문에 악부시 전통의 관습적 애민시와는 달리 당대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담아내며 진지한 비판 정신을 담아낼 수 있었다. 한편, 백성들의 삶에서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태도는 민생(民生)이 지닌 질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시편으로 형상화하게 하였다. 그 결과 참된 인간상의 발견으로부터 그들의 풍속에 이르기까지 민생의 다양한 모습이 생동감 있게 현현될 수 있었다. 백악시단이 민생을 형상화한 작품들은 산수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상과의 진실하고 깊이 있는 소통에 의해 그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백성들과의 진실한 소통을 위해 그들의 삶의 현장에 한발 더 다가섰고, 백성들의 삶에 밀착할수록 그들 삶의 다단한 국면들을 생생하고도 참신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요컨대 백악시단이 민생을 형상화한 시에도 대상의 ‘진(眞)’을 중시하는 그들의 논리가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3. 물아교감(物我交感)의 이지적(理智的) 흥취
일상은 행위 주체와 대상이 교섭하는 관계의 총체로서 ‘반복적’이고 ‘특별하지 않은’ 속성을 지닌다. 그런 까닭에 일상을 형상화한 시편 속에는 주체가 대상을 인식하고 교섭하는 특징적인 면모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백악시단의 ‘진시’는 창작에 있어 천부(天賦)의 상태로 수양된 주체가 대상의 진면목을 포착하고 거기서 발현된 정감을 형상화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백악시단이 자신들의 일상을 형상화한 시편들은 그들의 일상이 어떤 특징을 보이며, 그들의 ‘진시’가 어떤 지향을 보이는지 살펴볼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을 형상화한 작품들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모습 중의 하나는 바로 ‘고요[靜]’를 지향하는 모습이다. 아래 김창흡의 시를 보자.
新春雲雪半陰晴 | 새 봄 되자 눈과 구름에 맑고 흐린 것이 반반 |
山欲開顔澗有聲 | 산이 얼굴 열려 하자 시내에는 졸졸 물소리. |
杖屧平臯舒局促 | 막대 짚고 야트막한 언덕에 가 답답한 마음 펼쳐보고 |
圖書小閣納昭明 | 도서 갖춘 작은 집엔 밝은 햇살도 들여 본단다. |
扶衰實荷陽和力 | 쇠한 이 몸 부지함은 실로 따뜻한 봄기운 덕이건만 |
處靜猶慚妙道行 | 고요히 살면서도 깊은 도를 실천 못해 부끄럽구나. |
筆硯未焚花鳥逼 | 붓과 벼루 못 태웠는데 꽃과 새가 다가오니 |
恐因吟哢杜權輕 | 시로 인해 두권(杜權)이 가벼워질까 걱정이구나. |
「순행이 보내온 시의 운자를 따라 짓고 다시 보내다[次純行寄來韻却寄]」, 金昌翕, 『三淵集』 권16
이 시는 김창흡에게는 족손이 되는 김시보의 아들 김순행에게 보낸 시로 김창흡이 영위했던 일상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겨울과 봄의 전환점에서 절서의 변화를 체인하고 있다. 새봄을 맞아 좁은 국량을 펴기 위해 가벼운 산책에 나서기도 하고, 서재의 문을 열어 봄날의 햇살을 들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김창흡은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김창흡은 경련에서 자신은 천지운행의 도움만 받을 뿐, 고요히 살면서도[處靜] 정작 천지운행의 묘리를 체인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며 반성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처정(處靜)’이 표피적인 상태에 머무른 채, 더 깊은 차원으로 고양되지 못함을 반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성은 미련으로 이어진다. 붓과 벼루를 태운다는 것은 『진서(晉書)』 「육기전(陸機傳)」에서 육기(陸機)의 빼어난 필력(筆力)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는데【機天才秀逸, 辭藻宏麗, 張華嘗謂之曰: ‘人之爲文, 常恨才少, 而子更患其多.’ 弟雲嘗與書曰: ‘君苗見兄文, 輒欲燒其筆硯. -『晉書』 권54 「陸機傳」】, 여기서는 김창흡 자신의 필력이 육기에 못 미치니 붓과 벼루를 태워야 마땅하지만 아직 그러지 못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두권(杜權)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로【子之先生遇我也,有瘳矣,全然有生矣,吾見其杜權矣.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닫혀서 막힌 가운데 진행되는 변화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아직 겨울인 듯하면서도 약동하는 봄의 기운, 즉 천지운행의 묘리를 가리킨다. 김창흡은 미련에서 이제 봄이 완연해져 꽃이 피고 새가 울면, 육기만한 재주도 없이 시나 읊조리면서 이 천지운행의 묘리를 가볍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경계를 표현하였다.
이 시의 핵심적 의사는 고요하게 살면서[處靜] 우주 질서의 원리를 체인하겠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처정(處靜)은 내면의 정신적 고요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백악시단이 일상을 형상화한 시편들을 살펴보면 홀로 있거나, 문을 닫은 채거나, 시간으로는 새벽에 지어진 시들이 많은데, 이것은 그들이 일상에서 고요[靜]를 대단히 중요한 가치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처정(處靜)한 일상은 어떤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인가?
주자(周子)는 “성인은 중정인의(中正仁義)로써 만사(萬事)를 안정시키고, 고요함을 주로 삼아[主靜] 사람의 모범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덕을 함께 하시며, 일월과 그 밝음을 함께 하시며, 사계절과 그 질서를 함께 하시며, 귀신과 그 길흉을 함께 하신다[聖人定之以中正仁義, 而主靜立人極焉. 故聖人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四時合其序, 鬼神合其吉凶. -『近思錄』 권1].”고 하였다. 그리고 주자(周子)의 이 말을 풀이하면서 주자(朱子)는 “고요[靜]는 성(誠)의 회복이요 성(性)의 참모습이다. 진실로 이 마음이 적연(寂然)하여 사욕 없이 고요[靜]하지 않다면, 어떻게 사물의 변화에 대응하여 천하의 움직임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겠는가[“然靜者, 誠之復而性之眞也. 苟非此心寂然無欲而靜, 則亦何以酬酢事物之變而一天下之動哉? 故聖人中正仁義動靜周流, 而其動也必主乎靜. -같은 글”. 번역은 이광호 역주, 『근사록 집해·1』. 아카넷, 2013 참조.]?”라고 하였다. 핵심적인 뜻을 간추려보면, 정(靜)은 현상적 존재로부터 본원적 이치를 마주할 수 있는 인식 주체의 내면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김창흡이 시를 통해 부끄럽다며 스스로를 경계한 뜻은 결국 외형적 처정(處靜)에서 벗어나 진정한 정(靜)의 경지에 오를 것을 다짐하는 것이 된다. 정(靜)을 중시하는 태도는 김창흡에만 그치지 않는다. 아래 김시보의 글 또한 정(靜)을 중시하는 인식을 보여준다.
무릇 마음이 안정[定]되면 고요[靜]해지고 고요해지면 비는[虛] 것, 이것은 그 이치가 그러하다. 청허재(靜虛齋)란 호칭은 처음부터 거처의 그윽함에서 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젊었을 적, 지친(至親)들을 따라 운록(雲麓)에서 노닐 적에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평소부터 고요함을 좋아한다 하였더니 백씨(伯氏, 金時傑)가 ‘정(靜)’으로 내 집을 명명해주고 또한 ‘허(虛)’자도 내려주셨다. 이에 삼연께서 대단히 좋다 여기시고는 정허(靜虛)란 이름을 돌아보며 의(義)를 생각하도록 힘쓰라 당부하셨다. 그런데 지금 내 나이 오십여 세에, 말할 만한 조금의 실효도 없으니 외딴 거처에서의 탄식이 어떻겠는가! 그 사이 개석장(介石莊)이 있는 호서(湖西)에서 한가로이 거처할 적에 운록(雲麓)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마침내 ‘청허(靜虛)’라는 이름으로 재(齋)에 편액(扁額)하니 흡족하기는 이를 데 없지만 누구와 더불어 이 의(義)를 강구하고 밝힐 것인가? 아! 정자(程子)께서 마음의 허(虛)에 대해 논하셨고 주자(周子)께는 주정(主靜)의 설(說)이 있으며 주선생(朱先生) 또한 그것을 상세하게 논하였으니 그 공력을 쓴 바를 가히 알 수 있다. 허나 나는 늙고 병들었구나! 만사(萬事)가 모두 그치려 하는데 그래도 고요[靜]를 익숙히 하고 그 허(虛)를 온전히 하여 허(虛)로써 천리(天理)를 완미(玩味)하는 것을 하루의 공부로 책임지우는 것, 그것은 그래도 가(可)할 것인저! 갑진년(1724) 10월 임오일에 쓰다.
夫心定則靜, 靜則虗, 卽其理然也. 是號也, 初非取其居之幽廓也. 余少也, 從懿親遊於雲麓, 各言其志, 而余素喜靜, 故伯氏以靜命余齋, 而又錫虗字, 三淵亟嗟賞, 勖以顧名思義矣. 乃今五十餘年, 無寸效之可言, 則窮廬之歎何如哉! 間居閒于介石之湖, 追記前事, 遂用是扁齋, 而賞心盡矣, 誰與講明斯義乎? 噫! 程子論心之虗, 而周子有主靜之說, 朱先生亦論之詳, 則其所用功可知也. 而吾老且病矣! 萬事都休, 然且習靜而全其虗, 虗以玩理, 責其一日之功, 庶或其可歟! 甲辰陽月壬午書. -金時保, 『茅洲集』 권9 「靜虗齋記」
백씨(伯氏) 김시걸(金時傑)이 지어 준 ‘청허(靜虛)’란 재명(齋名)을 김시보가 만년에 충청도 광천의 모도(茅島)에 물러나 살면서 그 의미를 되새긴 글이다. 김시보는 이 글에서 마음이 정(靜)해져야 허(虛)할 수 있으며 마음이 허(虛)해야 천리(天理)를 완미(玩味)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앞서 본 주자(周子)와 주자(朱子)의 견해를 따르는 것으로 글 가운데서도 이 사실을 밝혔다. 요컨대 김시보의 일상은 성리학적 세계 인식과 수양론 위에서 영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여 노년의 자신도 처정(處靜), 전허(全虛), 완리(玩理)하는 삶을 살리라 다짐하였다. 여기서도 정(靜)이란 곧 천리(天理)를 체인(體認)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됨을 확인할 수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처정(處靜)의 상태에서 자신들이 마주한 경물을 통해 본원적 이치를 탐구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자세를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공유하고 있었음은 다음 시에 잘 드러나 있다.
병자년(1696) 섣달 보름 뒤에 나는 석실서원의 강당에서 중형[金昌協]을 모시고 여러 선비들과 초의 심지를 잘라가며 경전을 담론하였다. 이틀을 묵고 장차 돌아가려는데 하늘에서 대설이 내려 오도 가도 못하게 되어 하루 밤을 더 머무르게 되었다. 오경에 졸고 있는데 창가에 하얀 빛이 비치고 소리가 이부자리에 스미는 것을 느끼고 마침내 나가 사방을 조망하였다. 눈과 구름이 아득하여 내인지 땅인지 모르겠고 밤기운과 새벽빛이 쌓인 눈 위에 충막(冲漠)한데 담연히 맑고도 빛났다. 내가 드디어 기둥을 두드리며 기이하다 감탄하니 재방(齋房)의 여러 군자들이 모두 책 읽기를 그만 두고 나와 모여들었다. 엄숙하게 옷을 여미고 동쪽을 향해 오래도록 눈도 깜박거리지 않고서 바라보는데 이윽고 한 줄기 빛나는 기운이 덕포에서 불쑥 솟구쳐 양쪽 기슭으로 스며들면서 대양처럼 평평해졌다. 구산(龜山)이 그 사이에서 일렁이며 여러 차례 삼켜지고 뱉어지니 광경의 황홀함이 마치 여기에서 다 할 듯하면서도 아직도 미진함이 있는 듯하였다. 멀리 동쪽이 열리면서 서서히 햇무리를 보내자 이슬 같은 물기는 붉은 빛을 머금고 물결은 가늘게 주름지며 지는 달은 환히 빛났다. 서쪽 행랑과의 거리가 백여 척쯤인데 찬 광채가 더욱 사람을 쏘다가 섬돌을 따라 내려와 빈 정자를 빙 돌더니 다시 처음 보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잠깐 사이에 묘경(妙景)의 변태(變態)가 서로 이어지며 마치 서로 허여한 듯하였다. 조카 숭겸이 한쪽에 있다가 “용면(龍眠, 李公麟)의 솜씨로도 이것을 묘사하긴 어렵겠지요.”라고 하길래, 나는 “어찌 그리기만 어렵겠느냐? 고금의 시인들 또한 그 광경에 일구(一句)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오직 고요함을 지켜 허명해지길 기다려야만 가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배회하다 아쉽게도 그만 두었다. 여기에 와서 몇 수의 시를 얻어 지난 종적을 기록하였지만 유독 이 한 장면을 빠뜨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송백당(松栢堂)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고요히 누우니 아직도 맑은 기운이 마음을 통철(洞澈)하게 하는데 이전의 광경과 서로 유전(流轉)하여 없앨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남은 맑음을 즐기며 오언율시 한 수를 지었다. 그 기이함과 맑음을 묘사한다는 것은 만부당한 줄 알지만 한번 중씨의 자리에 삼가 올려 가르침을 구한다. 문채 있는 여러 군자들과 나와 함께 새벽 경치를 본 자들도 이것을 이어 화답해도 좋다. 시를 주고받으며 전의 경지를 늦게라도 풀어내어 이 청명함을 마음에 보존시키고 그 깨끗함을 고결한 인품에 모을 수 있다면 이 또한 하나의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이 어찌 백설가(白雪歌)를 상화(相和)하자는 것이겠는가? 곧 야기(夜氣)의 강설(講說)이기 때문이다!
丙子臈月之望後, 余往侍仲氏於石室之講堂, 兼與諸章甫, 剪燭談經. 信宿而將返, 則天下大雪, 乃爲所維縶, 因加留一夕焉. 五更睡間, 覺窓有白光, 韻透衾枕. 遂出而四望, 雪雲浩渺, 不分川陸, 夜氣曙色沖漠於積素之上, 而湛然澄且瑩也. 余遂扣楹稱奇, 則齋房諸君子皆輟讀來集. 儼然整襟, 東向而不瞬者良久, 俄有一道英英之氣滃然起自德浦, 浸滛乎兩岸而大瀛平焉. 龜山漾漾其間, 屢被其呑吐, 光景之幻若將窮於此而猶有未也. 遠東啓矣, 冉冉送暈, 沆瀣含赤, 洲渚微皺, 落月炯炯. 距西廂可百餘尺, 冷彩益射人, 循除而降, 步匝廣亭, 復歸於初縱目處, 盖須臾之間, 妙景之變態相嬗有如許者. 崇姪在隅曰: ‘雖龍眠之善畫, 殆難描此.’ 余曰: ‘豈惟難畫? 今古詩人亦難措一句於其間. 惟有靜挹而虗待爲可耳.’ 遂徊徨悵然而罷. 來時雖留得若干篇什, 以紀過從, 而獨以漏此一段爲耿耿也. 盖歸松栢堂, 閉戶靜卧, 猶覺有沁沁澄灝之氣 洞澈心肝, 與前際相流轉而不可泯遣也. 遂吟弄餘淸, 賦得五言律一首. 極知其於描奇寫淸萬一無當, 而試爲呈浼於仲氏席下以求敎焉. 斐然諸君子、凡同我曉望者亦不妨續此而和之也. 和來唱去, 因得追繹前境, 以存此淸明於靈㙜, 會其灑落於氷壺, 亦是一事. 斯豈白雪之相和歟? 乃夜氣之講說也!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5
夜氣含冲漠 晨光渺合分 | 밤기운이 충막(冲漠)함을 머금더니 새벽빛이 아득하게 분합(分合)하누나. |
忽焉江變海 終是雪和雲 | 홀연 강이 바다로 변했나 싶었더니 끝내 눈과 구름이 엉긴 것. |
月岸輝輝動 風灘遠遠聞 | 달빛 아래 강가 언덕 반짝반짝 일렁이고 바람 부는 여울 소리 저 멀리서 들려오네. |
森羅講堂下 天不隱諸君 | 강당 아래 펼쳐진 삼라만상은 하늘이 그대들에게 숨기지 않으신 것이라네. |
김창흡의 이 시는 1696년에 지어진 것이다. 1696년은 기사환국(1689년)으로 몰락했던 노론이 갑술환국(1694)을 통해 신원, 복권된 시점이다. 이 시기에 김창협은 석실서원에서 강학을 재개하였고, 김창흡은 송백당과 석실서원을 오가면서 김창협과 함께 강학을 이끌었다. 김창흡의 이러한 행보는 기사년 이후 뜻을 두었던 성리학【信謙又問曰: ‘專意濂洛諸書, 始自何年?’ 曰: ‘己巳以後, 却專意四書.’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31「語錄」】이 서서히 학문적 심화를 이루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석실서원의 강학 재개는 후배 문인들에게는 학문적 구심점이 다시 마련되었음을 의미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 가운데 이병연과 이병성은 재개된 강학을 통해 김창협, 김창흡과 사제의 의리를 맺게 되었다. 나머지 문인들의 경우, 재개된 석실 강학에 참여했는지 불분명하지만, 이 강학을 계기로 이병연 형제는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고, 서울로 이사한 뒤로는 정용하, 권섭, 심봉의, 김상리 등 후기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들과 망형지교를 맺게 되었다. 이렇듯 1696년은 변화된 정치 상황 속에서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궁구하던 시기였으며,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결집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시점이다. 위 시는 재개된 석실 강학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443字로 이루어진 긴 제목은 대설(大雪)이 내린 새벽에 맞이한 일출 광경의 이미지와 이지적 흥취가 선명하게 표현된 한 편의 기문이라 할 수 있다. 김창흡이 섬세하게 묘사한 눈빛과 햇무리의 신비로운 조화는 곧 특별하게 노출된 하늘의 기밀, 즉 천기(天機)이다. 김창흡은 밤기운과 새벽빛이 눈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충막(冲漠)’이라 형용하였는데, 충막(冲漠)은 만물 발생 이전의 본원적 천리(天理)의 상태를 의미하는 충막무짐(冲漠無朕)【冲漠無朕, 萬象森然已具. 未應不是先, 已應不是後. -『近思錄』 권1】327)에 근거한 표현이다. 야기(夜氣)와 서색(瑞色)이 대설(大雪)과 엉겨 분명하지 않은 모습에서 태초의 홍몽(鴻濛)을 떠올리고 그 홍몽을 가능케 한 본연지리(本然之理)를 추찰(推察)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설이라는 특별한 자연현상이 빚어낸 새벽 경관의 묘(妙, 天機)에서 김창흡은 오묘한 천리를 체인하게 된다. 천기와 조우하여 얻은 마음의 상태를 ‘통철(洞澈)’로 형용한 것이 체인을 상태를 보여준다. 통철(洞澈)은 태초의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마음의 상태로【榦曰: ‘竊嘗思之, 天地間萬物之生, 莫非氣之所爲, 而唯人也得其氣之秀, 人之一身, 五臟百骸莫非氣之所成, 而唯心也尤是氣之秀. 是故其爲物 自然虛靈洞澈, 而於其所具之理, 無所蔽隔. 然則所謂虛靈者, 只是稟氣淸明故也, 不是理與氣合然後方爲虛靈. 今且將自家去體察吾心, 一時間身氣淸爽, 則心便惺惺, 一時怠惰了, 便昏昏. 此處亦見心之虛靈是氣.’ 先生曰: ‘然. 故栗谷先生嘗以心爲氣.’ -宋時烈, 『宋子大全』 「附錄」권15 「語錄·2」】 미발시의 ‘허령불매(虛靈不昧)’, ‘허명정일(虛明靜一)’과 통하는 말이다. 즉, 김창흡은 눈 내린 새벽이 선사한 천기와 조우함으로써 미발의 마음 상태로 고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제목에 담긴 내용은 단지 눈 내린 새벽의 서정을 표현한 데 그치지 않는다. 단지 그런 서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긴 제목을 붙일 필요가 없다. 김창흡이 443자나 되는 긴 제목을 통해 자신이 본 경관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은 자신이 천기와 조우하여 체인한 바, 말로 형언하긴 어렵지만 그 오묘한 깨달음을 강학했던 동학들, 그리고 강호의 여러 현사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김창흡은 글의 마지막에 자신의 상화(相和) 제안을 두고 “이 어찌 백설가(白雪歌)를 상화(相和)하자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곧 야기(夜氣)의 강설(講說)이다!”라며 역설(力說)했던 것이다. 곧 김창흡의 상화(相和) 제안은 백설가(白雪歌)처럼 심오한 뜻으로 화창하기 곤란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야기(夜氣)의 ‘강설(講說)’이기 때문에 함께 ‘추역(追繹)’하여 그 경지를 공유하자는 취지였던 것이다【백설가는 따라 부르기 어려운 노래를 말한다. “客有歌於郢中者, 其始曰下里巴人, 國中屬而和者數千人; 其爲陽阿薤露, 國中屬而和者數百人; 其爲陽春白雪, 國中屬而和者數十人. 引商刻羽, 雜以流徵, 國中屬而和者不過數人而已. 是其曲彌高, 其和彌寡. -『文選』 권23 「對楚王問[宋玉]」” 본고는 ‘斯豈白雪之相和歟?’의 ‘白雪’을 백설가로 보았다. 김창흡의 상화 제안이 상대방에게 곤란함을 주려는 게 아니고 함께 이치를 궁구해보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시된 시의 경련까지는 자신이 조우한 천기를 형사한 것이다. 형사된 내용은 제목에서 상세하게 밝힌 바를 요약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시의 묘미는 미련에 있다. 김창흡은 미련을 통해, 삼라만상의 특별한 이치[천기]가 자신들의 강학 공간에 펼쳐진 것은, 천리를 체인하라는 하늘의 특별한 배려니 이것을 함께 궁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시는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자신들의 눈앞에 현현된 경물을 어떤 입장에서 감수했던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처정(處靜)을 중시하는 태도는 그들의 천기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처정(處靜)과 천기(天機) 인식의 관계는 다음 김창흡의 시에 명징하게 드러나 있다.
荏苒芳華事 猶殘小圃春 | 고운 꽃 핀 봄날 풍경 사라지는데 작은 밭엔 봄이 아직 남아있구나. |
愁中紅日駐 睡起綠陰新 | 시름할 땐 붉은 태양 꼼짝 안더니 자고 나니 녹음이 싱그럽구나. |
樊竹通雞逕 蔬花化蝶身 | 대밭엔 닭이 다녀 길이 생겼고 배추꽃엔 나비가 알을 붙였네. |
靜看機出入 忘却我爲人 | 고요 속에 천기(天機)의 출입을 보다가 내 자신이 사람인 줄도 잊게 되었네. |
「십구 일에[十九日]」, 金昌翕, 『三淵集』 권4
김창흡은 ‘고요 속에 천기의 출입을 본다[靜看機出入]’고 하였다. 김창흡이 본 천기의 출입은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만물의 교체, 변화상이었다. 겨울을 이겨낸 씨앗이 고운 꽃으로 피었다가 다시 스러지고, 진 꽃을 대신하여 왕성한 생명활동이 또다시 나타난다. 경련에 제시된 모습이 꽃을 대신하여 펼쳐진 생명활동의 현장인데, 대밭으로 길을 낼 만치 분주한 닭의 발걸음은 여름으로 접어드는 대밭의 왕성한 생태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나비는 배추꽃에 생명의 씨앗을 붙였다. 미련에서 김창흡은 이렇듯 생장소멸(生長消滅)하는 만물의 조화를 보노라니 자신이 사람인 줄도 잊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천기와의 조우를 통해 김창흡의 정신이 망아(忘我)의 경지로까지 고양되었음을 말한다. 김창흡의 이 시는 일상의 범상한 경물 속에서 유행불식(流行不息)하는 천리(天理)를 체인한 작품으로 백악시단의 시론인 천기론을 실천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김창흡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경물 속에서 천기(天機)를 조우하고 천리(天理) 체인의 이취(理趣)를 노래하는 모습은 다음 두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長夏林亭興不違 | 긴 여름 숲 속 정자 흥이 아직 남았는데 |
苔深一尺客來稀 | 객들이 찾지 않아 이끼가 한 자나 자랐네. |
薄雲漏日纔成映 | 얇은 구름 햇살 새어 이제 막 비추는데 |
細雨隨風忽作霏 | 가랑비가 바람 따라 갑작스레 뿌려지네. |
鬪巧蜘蛛空裡颺 | 솜씨 자랑하던 거미는 허공 속에 흔들리고 |
試輕蝴蝶草間飛 | 경쾌함을 시험하던 나비도 풀 사이로 날아드네. |
閑中物理看親切 | 한가한 가운데 물리(物理)의 친절(親切)함을 보게 될지니 |
已向頭頭括妙機 | 만물마다 오묘한 천기(天機) 담겨있구나. |
「어느 여름날에 있은 일[夏日卽事]」, 李夏坤, 『頭陀草』책6
蓬頭短褐爾云誰 | 짧은 갈옷, 봉두난발 너는 누구냐? |
盡日終宵何事爲 | 날 가도록 밤새도록 무얼 하느냐? |
獨立頹階叢竹外 | 대밭 저 편 낡은 계단에 홀로 섰더니 |
午來風雨長新枝 | 낮이 되자 비바람에 새 가지가 쑥 자랐네. |
「홀로 서서[獨立]」, 權燮, 『玉所稿』 「詩·9」
이하곤과 권섭의 시 두 편을 보였다. 두 시는 천기와 조우하는 장면을 형상화함에 있어 말하기와 보여주기라는 서로 다른 방식을 취하였다. 먼저, 이하곤의 작품을 보자. 이하곤이 일상에서 목도한 장면은, 여우비가 내린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구름 사이로 환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는데 바람을 타고 가랑비가 뿌려진다. 그러자 날이 갠 줄 알고 공교로운 솜씨로 집을 짓던 거미는 거미줄에 달라붙은 채 바람에 흔들리고, 경쾌한 비행을 시험하던 나비들도 비를 피해 풀숲으로 날아든다. 여우비와 그로 인해 벌어진 거미와 나비의 모습, 이것이 이하곤이 조우한 천기이다. 그리고 미련에서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경물마다 오묘한 천리(天理)가 천기(天機)를 통해 유로되고 있음을 말하였다.
권섭의 작품은 자문자답의 형식을 빌어 천기와 조우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봉두난발에 댕강한 옷을 걸친 사람은 화자 자신이다. 이러한 모습은 실제의 것일 수도 있지만, 일체의 속박을 벗어난 일사(逸士)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종일토록 무언가에 몰두해 있다. 이렇게 시의 전반부를 통해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한 화자는 시의 후반부에 답을 제시하였다. 그 사람은 대밭을 관조하고 있다. 대밭을 관조하고 있노라니 홀연 시원한 바람과 함께 빗줄기가 쏟아진다. 그리고 비에 씻겨 청신해진 대나무에는 어느새 새 가지가 쑥 자라나 있다. 화자는 바로 관조를 통해 생명의 활기(活氣)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에는 천기와 천리와 같은 관념어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시를 읽으면 작가의 의사가 비 갠 뒤의 청신한 경물을 말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권섭이 이 시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활발(活潑)한 생명력의 신비요, 생명의 조화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적 화자의 몰입은 일종의 이지적이고 심미적인 카타르시스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권섭은 시적 화자의 행위와 경물의 모습만으로 작가의 깊은 깨달음과 이취(理趣)를 표현함은 물론 깊은 여운까지 담아내었다.
우리는 두 작품을 통해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처정(處靜)하여 경물을 마주할 때면 포착된 경물을 매개로 본원적 사유를 전개하는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일상 속의 경물을 감각적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시작(詩作)을 경계하여 김시민은 심봉의에게 보낸 시에서 “군자는 원래 독실하게 수신(修身)하고, 성현은 스스로 타고난 성[成性]을 보존하네. 우리들은 가소롭게도 마음을 허비하여, 눈 속의 달빛과 바람에 흔들리는 꽃만 부질없이 읊고 있구려[君子修身元慥慥, 聖賢成性自存存. 吾儕可笑心虛用, 雪月風花漫浪言].”【金時敏, 『東圃集』 권5 「三疊示沈聖韶」의 경련과 미련.】라며 그저 경물의 흥취나 노래하지 말고 수양에 힘쓸 것을 다짐하였다. 또한 김창흡의 「갈역잡영(葛驛雜詠)」을 읽고서는 “이치를 밝히심은 주역을 보신 뒤에 깊어지셨고, 마음을 쓰시기는 산에 계셨을 때가 많으셨지. 눈 속의 달빛과 바람에 흔들리는 꽃은 공안(公案)이 아니었음을, 갈역(葛驛)서 지은 여러 시편 읽고서 비로소 알게 되었네[燭理深於觀易後, 用心多在處山時. 風花雪月非公案, 葛驛諸篇讀始知].”【金時敏, 『東圃集』 권5 「再疊閱葛驛雜詠」의 경련과 미련.】라고 하면서 경물의 흥취를 넘어 고도의 사유까지 겸비한 김창흡의 시를 본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높은 정신성을 중시하는 작시 태도가 경물을 통해 얻게 되는 심미적 흥취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섬세한 포착을 통한 심미적 흥취에 심오한 정신적 이취(理趣)를 아우르는 것, 이것이 백악시단의 ‘진시’가 추구하던 방향이었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작시에 있어 높은 정신성을 강조하면서도 대상 경물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래 김창흡의 시를 예로 심미성과 정신성의 결합 양상을 확인해 보기로 한다.
呀作淸池廣 涵來遠嶺奇 | 우묵하게 파놓으니 맑은 못 참으로 넓어 젖어 들어온 먼 산봉우리 참으로 기이한데 |
魚潛雲影住 燕掠浪花隨 | 물고기가 물에 들자 구름 그림자 머무르고 제비가 스치자 물보라가 따른다. |
우연히 삼연 어른신의 「대지(大池)」란 작품을 보고는 그 기이한 곳을 깨달았습니다. ‘우묵하게 파놓으니 맑은 못 참으로 넓다’는 것은 체(體)요, ‘젖어 들어온 먼 산봉우리 기이하다’는 것은 용(用)이며, ‘물고기가 물에 들자 구름 그림자 머무른다’는 것은 정(靜)이요, ‘제비가 스치자 물보라가 따른다’는 것은 동(動)입니다. 한 편의 시 속에 체용(體用)과 동정(動靜)을 동시에 갖추었으니 이는 지금껏 시인들에겐 없었던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 작품을 전에 이렇게 보셨는지요?
偶見淵丈大池詩, 益覺其奇處. 其曰‘呀作淸池廣’, 卽體也; 其曰‘涵來遠嶺奇’, 卽用也; 其曰‘魚潛雲影住’, 卽靜也; 其曰‘燕掠浪花隨’, 卽動也. 一詩中兼具體用、動靜, 此從古詩人之所無. 未知亦嘗如此看否? -申靖夏, 『恕菴集』 권8 「與金進士」
인용문에서 시의 형식을 갖추어 제시한 작품은 김창흡의 문집에는 남아있지 않다. 이 시는 신정하가 김창흡의 「대지(大池)」를 비평하는 편지 속에 소개된 작품이다. 신정하의 이 편지글은 이들의 독시(讀詩) 방식과 관련하여 좋은 참조가 된다. 신정하는 봄날 연못의 풍경을 섬세하게 형상화한 시구에서 체용(體用)과 동정(動靜)이라는 철리적(哲理的) 사유를 읽어내고 있다. 김창흡은 지금 자그마한 연못을 바라보고 있다. 한가로이 연못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안에는 저 먼 산도 와서 담겨있고 드넓은 하늘도 담겨있다. 신정하의 말대로 연못과 산은 체(體)와 용(用)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산은 못을 매개로 자신을 드러내었으니 못은 곧 체(體)가 되며 도영(倒影)된 산봉우리는 못이 드러낸 하나의 상이 되니 곧 체(體)의 용(用)이다.
후반부는 산과 못이 어우러진 하나의 세계, 그 속에서 일어난 변화의 상을 그렸다. 수면에 올랐다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는 물고기와 수면을 스치며 날아가는 제비는 연못으로 표상된 우주의 또 다른 존재들이다. 자유롭게 유영하던 물고기가 사라지자 그 자리에 구름이 고요히 떠있는 모습은 신정하의 말처럼 동(動)에서 정(靜)으로의 변화를 말하고 제비가 물을 스치자 물보라가 이는 모습은 정(靜)에서 동(動)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김창흡이 이처럼 동(動)과 정(靜)의 무한한 순환을 연속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유행불식(流行不息)하는 천리(天理)와 만유의 존재양태에 대한 김창흡의 깊은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은 이 작품은 작가가 관조한 하나의 경관 속에 성리학적 우주 인식, 존재 인식을 담아낸 대단히 철리적(哲理的)이고 이지적(理智的)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성취는 심오한 사변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작품에 그려진 모습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맑은 연못에 산봉우리가 거꾸러져 잠겨있고, 물고기는 자유로이 헤엄치며, 구름은 한가로이 떠있다. 그리고 제비가 경쾌하게 날며 수면을 스치자 물보라가 일어난다. 김창흡이 포착해낸 봄날 연못의 한 장면은 그 자체로 평화롭고 청신한 미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연못을 거울로 삼아 진(眞)과 환(幻)을 역전시킨 ― 제비의 하강은 기실 연못을 하늘로 알고 날아오르는 것이다 ― 결구는 이 시의 심미성이 빛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정신성과 심미성을 하나의 작품 속에 수준 높게 용융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창흡이 보인 이와 같은 성취는 공히 이치를 드러내고자 했지만 대상보다는 이치를 밝히는데 주력했던 전대 도학자들의 시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도학자들의 시를 일괄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도학자들의 시는 대체로 자기 의사가 주가 되어 대상이 종속적으로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는 가야산을 조망하며 쓴 「숙야재망야산(夙夜齋望倻山)」라는 시에서, “몸과 얼굴을 다 드러내지 않고, 어렴풋이 한 귀퉁이만 내어놓았네. 이제 조화(造化)의 뜻을 알겠거니, 천기(天機)를 다 드러내려 않으신 게지[未出全身面, 微呈一角奇. 方知造化意, 不欲露天機. -鄭逑, 『寒岡集』 권1].”라고 하였다. 이 시에 대해 송준호는 산의 전체는 하늘의 도, 하늘의 마음을 함묵하고 있는 심의적(心意的) 존재이며, 시적 주체는 그런 산을 통해 생장소멸, 유행불식(流行不息)하는 정대(正大)한 천리(天理)를 체인하고 그 경외감으로 “불욕로천기(不欲露天機)”라 읊었다고 하였다.(송준호, 「寒岡 鄭逑의 詩文學에 대하여-거울로서의 詩-」, 『東方漢文學』제10집, 1994), 38~40면.)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대상 경물 속에서 천지운행(天地運行)의 묘(妙)를 읽어내는 작자의 구도적(求道的) 자세와 경지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작자의 느낀 바와 의도한 바가 철학적 사유를 드러내는 데 맞추어져 있어 가야산과 구름 등 그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현실적 경물들은 시 속에서 그 자체로서의 의의가 현저하게 약화되어 존재한다. 그에 비해 김창흡의 시는 깊은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경물 자체가 지닌 심미적 형상 또한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김창흡의 이 작품은 백악시단이 일상에서의 이지적 흥취를 형상화한 작품을 감상할 때 하나의 지침이 된다. 곧, 감각적으로 형상화된 작품을 읽으면서 동시에 형상화 이면에 저류하는 작가의 정신성까지 감지할 때 백악시단의 ‘진시’는 그 실상을 온전히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의 이취(理趣)를 형상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관조(觀照)였다. 백악시단이 일상을 영위하며 관조를 중시하는 태도는 산수 유람을 하면서도 산을 오래도록 집중해서 봐야한다고 강조하던, 즉 시적 대상의 의의를 중시하던 창작논리가 자신들의 일상에서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이러한 관조를 통해 작품 안에 심미성과 정신성을 아우를 수 있었다. 다음 김창업(金昌業)의 시는 관조의 모습과 관조의 결과가 어떤 형상화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石梁俯小池 楓陰水常靜 | 돌다리에서 작은 못을 굽어보니 붉은 단풍 그늘 속에 물은 늘 고요한데 |
鯈魚戱從容 故觸丹書影 | 피라미란 놈 조용함을 희롱하여 짐짓 붉은 글씨 그림자를 건드리누나. |
「작은 못에 호미를 씻으려다[洗鋤小池]」, 金昌業, 『老稼齋集』 권2
寒房掩卷坐如癡 | 찬 방에서 책을 덮고 천치(天癡)처럼 멍하니 앉아 |
靜看窓欞日影移 | 고요히 바라보니 창문으로 해 그림자가 옮겨간다. |
羣雀每憎傷我稼 | 참새란 놈 내 곡식 망칠 적엔 매번 얄밉더니 |
却憐簷外凍相依 | 도리어 안쓰럽구나, 꽁꽁 언 채 처마 끝에서 기대 있으니 |
「홀로 앉아서[獨坐]」, 金昌業, 『老稼齋集』 권3
김창업은 지금의 성북구 장위동 인근의 송계(松溪)에 동장(東庄)을 마련하고 37세 이후로 생을 마칠 때까지 동장(東庄)에서 은거를 실천한 인물이다. ‘노가재(老稼齋)’란 호가 보여주듯 그는 평생을 농부로 살고자 하였다. 그런데 동장에 마련한 석뢰정(釋耒亭), 출거문(出耟門), 음독교(飮犢橋), 세서대(洗鋤臺)와 같은 건물명이 말해주듯, 그의 은거는 ‘농(農)’을 이상적으로 포장한 낭만적 은거가 아니었다. 스스로 농사를 짓고 아이들에게 쟁기 끄는 법을 가르쳤으며 농서를 지어 자손들이 대대로 농부로 살길 희망하였을【爲稼不知老, 高齋卧兀如. 眼看驅雀兒, 今年已把犂.(其一) 學稼須學拙, 此道老始知. 思欲著一書, 丁寧遺我兒.(其二) -金昌業, 『老稼齋集』 「老稼齋」】 만큼 그에게 농부로서의 삶은 참된 인간성을 실천해 갈 수 있는 하나의 자구책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가은(稼隱)’은 김창흡의 ‘산수은(山水隱)’, 이병연의 ‘리은(吏隱)’과는 또 다른 성격의 삶이었다【김창업의 동장(東庄) 경영과 문학에 대해서는 구본현의 「老稼齋 金昌業의 東庄에 대하여」 『退溪學論叢』제14집, 2008 참조.】. 김창업은 이곳 동장(東庄)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일상을 영위하였다. 인용된 두 편의 시는 모두 송계(松溪)의 동장(東庄)에서 지어진 작품들이다. 김창업은 농사를 마치고 나면 처정(處靜)하여 일상의 경물들을 관조하였는데, 그러한 관조를 통해 대단히 섬세하고 사실적인 풍광들을 포착해 내었다.
첫 번째 시는 관조량(觀鯈梁)이라 이름 붙인 돌다리에서 관조한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그는 농사를 마치고 작은 연못에 호미를 씻으려 했던 듯하다. 호미를 씻으러 못에 내려가기 전에 그는 관조량(觀鯈梁)에서 연못을 관조하였다. 바라본 연못에는 가을을 맞아 붉게 물든 단풍이 고요한 수면을 수놓고 피라미들은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고요히 관조하던 작가는 섬세한 장면 하나를 포착하게 된다. 그가 포착한 장면은 피라미들이 붉게 비친 글자를 톡톡 건드리듯 스치는 모습이었다. 이 장면을 포착한 작가는 여기에 절묘한 생각을 붙였다. 단서(丹書)가 곧 돌다리에 새긴 ‘관조량(觀鯈梁)’이란 글자임을 염두에 두면, 피라미들이 일부러 ‘관조량(觀鯈梁)’이란 글자를 스치며 글자를 흐리는 것은 곧 ‘뭘 봐?’라는 심사를 표현하는 행위가 된다. 그렇기에 작가는 피라미의 행위를 ‘희(戱)’라고 하였다. 고요한 수면을 조용히 관조하는 작가에게 피라미는 뭘 그리 심각할 것 있냐며 장난을 걸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앞서 본 김창흡의 시처럼 작은 연못을 하나의 소우주로 구성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정(靜)과 동(動)의 변환을 통해 존재의 의의를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리학적 세계 인식이 구현된 작품이다. 그러나 김창업의 인식은 피라미의 장난을 통해 한층 더 심화되어 나타난다. 관어(觀魚)는 성리학자들이 천기를 느끼기 위해 취하는 관습적 행위이다. 김창업이 ‘관조량(觀鯈梁)’이란 이름을 다리에 새긴 것도 아마 그런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물고기의 유영으로 ‘관조량(觀鯈梁)’이란 글자가 흐릿해지는 모습에서 김창업은 자신의 관습적 행위를 성찰하게 된다. 그리고 성찰은 ‘관조량(觀鯈梁)’이란 글자를 새기고 거기서 물고기를 봐야 천기를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즉 천기는 물 속 고기만이 아니라 만유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반성적 자각에 이르게 된다. 김창흡이 피라미가 붉은 글자를 건드리는 장면을 ‘고(故)’자를 써가며 시 속에 형상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자각을 표현한기 위한 것이다. 이 시는 이처럼 관조를 통해 포착한 섬세한 장면을 통해 청신하고 생생한 장면이 주는 심미적 쾌감과 그 장면에서 느낀 작가의 이지적 흥취를 수준 높게 온축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에도 관조를 통한 대상과의 교감이 잘 드러나 있다. 작가는 휴경기인 겨울철에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책을 덮고 천치(天癡)처럼 멍하게 앉아 사방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책을 덮고 관조를 행하는 모습은 실제의 행위이면서 이치를 책에서만 구하지 않겠다는 의식적 행위이기도 하다【백악시단의 작품들 가운데는 작가 자신이 마주한 자연이 곧 책이라는 ‘천지자연지문(天地自然之文)’ 혹은 ‘자연경(自然經)’ 의식을 표출한 작품들이 있다. 가령, 홍세태는 「술지(述志)」, 『유하집(柳下集)』 권2에서 “십년을 궁액 속에 허명에 매여, 부끄럽게도 길을 잃고 잘못 살아왔구나. / 요사이 도 속에 묘미 있음을 알아, 점차 몸 밖의 일엔 정을 잊으려 하네. / 갑자기 내린 비에 씻겨 산은 도리어 깨끗해졌고, 뜬 구름 지나가자 물이 비로소 맑아졌네. / 오늘 성현의 책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디서부터 나의 성(誠)을 붙여볼까?[十年窮厄坐虛名, 慙恨迷途枉此生. 近向道中知有味, 漸於身外欲忘情. 洗來急雨山還靜, 過盡浮雲水始淸. 今日聖賢書滿眼, 試從何處着吾誠.]”라고 하였는데, 미련의 눈에 가득한 성현의 책[聖賢書滿眼]이란 곧 경련에서 제시된 비에 씻긴 산, 맑아진 물과 같이 청신해진 자연을 의미한다. 그래서 결구에서 “어디서부터 나의 성(誠)을 붙여볼까”라고 한 것이다. 또한 김시민은 「乘舟呼韻」, 『東圃集』 권4이라는 시에서, 배에서 조망한 바다의 모습을 제시한 뒤[又被漁翁起, 乘舟午睡餘. 滄波同泛鳥, 白日見跳魚. 望海帆如簇, 經村樹不疎], 미련에서 “천풍이 수면에서 불어와서, 내 손의 책을 흩날리는구나[天風來水面, 飜我手中書].”라고 하였는데, 천풍이 책을 흩날리는 장면은 자신이 본 자연이 곧 책인데, 문자문(文字文)이 무슨 의미냐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김창업의 책을 덮는 행위가 곧 관조로 이어지는 것도 이러한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김창협은 처정(處靜)의 순간에, “만약 지금처럼 고요히 앉아 있는 기회에 책을 펼쳐 읽는 공부를 줄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본원을 함양하는 데에 집중한다면 그 효과가 반드시 독서보다 진일보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今若因此靜坐, 省却繙閱工夫, 一意致養於本原, 則其效必有進於書者矣. -金昌協, 『農巖集』 권13 「答林德涵」].”라고 하면서 독서를 벗어난 이치 탐색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창업이 제시한 바보처럼 앉아있는 모습[坐如癡]은 관조가 삼매의 경지에 들었음을 의미한다. 김창업이 해가 지도록 오랫동안 관조한 것은 참새였다. 작가는 참새를 관조하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가을철에 참새들이 애써 지은 곡식들을 따먹을 때는 얄밉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찬 겨울이 되어 먹을 게 없는 참새들이 추위라도 면해보겠다고 처마 끝에 앉아 털을 부풀리고 목을 파묻은 채 서로 기대있는 모습을 보니, 순간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시는 겨울철이면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실적 장면을 형상화하면서 대상과 교감하는 작가의 마음을 정감 있게 담아냈는데, 이러한 성취는 오랜 관조를 통한 대상과의 깊은 교감의 결과였다.
관조를 통해 대상의 진면목을 탐색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物과 我가 하나로 고양되는 물아무간(物我無間)의 이지적 흥취로 고양되었다. 먼저 김창흡의 시부터 살펴보자.
滌池如有待 纖月送飛光 | 정갈한 저 연못 누굴 기다리나 초승달이 한 줄기 빛을 보내네. |
潛魚松檻底 聽我誦詩長 | 숨은 물고기는 솔 난간 아래에서 밤늦도록 시 읊는 소리를 듣나보다. |
「갈역(葛驛)에서 이것저것을 읊다[葛驛雜詠]·102」, 金昌翕, 『三淵集』 권15
경물과 시인의 교감이 작품에 전면화된 시이다. 깨끗한 못에 초승달이 어리는 광경은 누구나 흥을 붙일 만한 호젓하고 운치 있는 광경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절로 시가 터져 나온다. 이 아름답고 조화로운 한밤의 흥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상식의 안쪽일 뿐이다. 마지막 구에 잠자러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는 물고기를 두고 시인은 절묘한 상상을 붙였는데 이로써 한밤의 맑은 흥취는 절정에 이른다. 연못과 초승달의 운치 있는 야연(夜宴)에 참석한 시인은 잔치를 빛내기라도 하듯 목을 골라 시를 읊조렸는데 그 소리가 또 너무 좋아 이제는 물고기까지도 이 야연(夜宴)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구의 상상은 물아일체의 흥을 한 차원 더 높게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밤 시인의 낭송은 물고기가 흥을 붙여 듣는 순간 세속을 초월하고 작위를 넘어선 자연(自然)의 음(音)으로 상승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시는 한밤에 펼쳐진 맑은 잔치에 시인과 만유가 함께 참여하여 물아의 경계를 허물고 조화의 흥취를 즐기는 장면을 산뜻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아래 김시보의 시에도 음악을 매개로 한 물아일체의 경지가 잘 나타나있다.
夜冷霜生竹 樓虗月上琴 | 밤이 차서 서리가 대나무에 엉기고 누대는 비어 달만 거문고 위로 떠오르는데 |
泠然廣灘水 流入大餘音 | 차가운 광탄의 물 대여음(大餘音)으로 흘러드누나. |
「달밤의 거문고 소리[月夜琴韻]」, 金時保, 『茅洲集』 권7
김시보는 거문고에 조예가 있었던 듯하다. 「숙야(肅也)와 함께 거문고를 타다[與肅也鼓琴]」, 『茅洲集』 권7)라는 시에서 “내가 중대엽(中大葉)을 놀리니, 그대는 북전조(北殿操)로 받는구려. 북전(北殿)이 비록 굳세고 높다지만, 나는야 느긋한 소리만 못한 듯하구려[我弄中大葉, 爾受北殿操. 北殿雖激越, 不如緩聲好].”라고 한 것을 보면 조예가 상당했던 듯하다. 이 시에서도 거문고를 매개로 물아(物我)가 하나 되는 경지가 그려져 있다. 대나무에 서리가 엉길 만큼 차가운 밤, 텅 빈 누대에 시인은 거문고를 무릎에 올린 채 앉아있고 마침 달이 떠올랐다. 고요한 밤 사위(四圍)를 울리는 맑고 찬 물소리, 그리고 물소리와 조화(調和)하여 울리는 거문고 소리. 그런 조화를 시인은 차가운 물소리가 거문고의 대여음(大餘音)으로 흘러든다고 하였다. 대여음(大餘音)은 연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악기의 여음을 뜻하는데【무릇 속악에서는 거문고와 생황 등의 악기소리가 노랫가락의 반주가 된다. 3장(章)을 마치면 가창자가 잠시 쉬게 되는데 그 때 악기는 여성(餘聲)을 연주하여 사이를 벌어주니 이것을 중여음(中餘音)이라 한다. 4장과 5장은 또 노래에 맞춰 반주가 되었다가 5장을 마치면 가창자가 다시 멈추고 악기가 여성(餘聲)을 연주하며 속악을 마치게 되니 이것을 대여음(大餘音)이라 이른다[凡俗樂, 琴笙諸聲與歌聲相和. 過三章, 則歌者少歇, 樂奏餘聲以間之, 謂之中餘音. 四章、五章又與歌曲相和, 五章畢, 歌者又止, 樂奏餘聲以終之, 謂之大餘音.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經史篇·經傳類」「俗樂辨證說」]】, 이를 통해 마지막 구절을 이해해 보면 화자가 거문고 연주를 마치자 물소리가 여음처럼 연주의 피날레를 장식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달을 청중으로, 물과 금객(琴客)인 시인이 벌인 한밤의 콘서트를 형상화한 것으로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소리가 하나의 음악으로서 앙상블을 이루는 고양된 경지를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시에 제시된 시어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시에 제시된 차갑고[夜冷, 泠然] 빈[樓虗] 심상의 시어들은 실재 경물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정화되고 각성된 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김시보는 달과 밤과 물소리에서 밝고, 차갑고, 맑은 정신적 가치들을 교감하고 그런 존재로 고양된 것이다. 그렇기에 광탄의 물소리가 협연하여 한 곡의 연주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음악을 매개로 작가와 경물이 하나의 정신적 경지로 승화되었음을 보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펼치는 한밤의 향연이 듣는 이의 귀마저 맑게 씻어주는 듯한 작품이다.
長閒只是睡眠爲 | 오래도록 한가하여 그저 졸다 자다했는데 |
今日頗欣事適宜 | 오늘 자못 마음에 맞는 일 참 좋구나. |
半醉桃花三盞酒 | 복사꽃 뜬 석 잔 술에 반쯤 취하고 |
爛評楓嶽百篇詩 | 풍악산 백 편 시를 멋대로 품평하노라. |
簾前落蘂高吟散 | 주렴 앞 떨어진 꽃술은 시 높이 읊자 흩어지고 |
檻外濃陰久坐移 | 난간 밖 짙은 그늘은 오래 앉아 있으니 저만치 가네. |
忽有飛來雙燕子 | 갑자기 날아온 두 마리 제비가 |
似探人意硯床窺 | 사람의 뜻 탐색하듯 벼루 놓인 상을 엿보네. |
「군거(君擧)가 술을 보내오고 치화(稚和)가 시를 논하여 자못 쓸쓸함을 달래주기에[君擧送酒稚和論詩頗慰愁寂]」, 金時敏, 『東圃集』 권6
이 시는 김시민이 58세 되던 1738년에 지은 시이다. 제목에 보이는 군거(君擧)는 홍현보(洪鉉輔)의 자(字)이고, 치화(稚和)는 이중협(李重協)의 자(字)이다. 수련(首聯)에는 시인의 무료한 일상이 진솔하면서도 운치 있게 그려졌고 함련(頷聯)에는 벗이 보내준 술과 시를 입과 마음으로 음미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경련(頸聯)에서는 시인의 고조된 흥을 내보였는데 경물을 이용한 솜씨가 공교롭다. 흥이 오른 시인이 벗이 보내준 시를 뽑아 소리 높이 읊조리자 ‘꽃잎이 흩어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시인의 흥이 떨어진 꽃잎을 흩날릴 만큼 고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은 시인의 높이 읊는 가락에 꽃잎이 춤사위로 수응(酬應)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흥취를 즐기고 있노라니 앉아있었던 그늘은 어느새 저만치로 옮겨갔다. 미련(尾聯)에는 제비와 시인의 교감이 그려졌다. 시인은 시간가는 줄도 모를 만큼 흥이 올랐다. 그런데 어디선가 날아온 제비 두 마리가 시인이 앉은 자리를 엿본다. 제비가 벼루 놓인 상을 엿보는 행위는 곧 시인의 청흥(淸興)에 동참의 의사를 보낸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이 시의 미련은 제비와 시인이 물아무간(物我無間)의 흥취로 고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는 마지막 구절의 심미적 마무리 덕에 시적 묘미가 한층 살아날 수 있었다. 마지막 구절에 자신의 감탄흥을 발설하지 않고 의미를 함축한 특징적 장면을 보여주기 방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시적 여운이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다음은 이병연의 시를 살펴보자.
蛙朝鳴 蛙暮明 | 아침에도 개굴개굴, 저녁에도 개굴개굴 |
或有喧喧起白晝 | 때로는 왁자지껄 대낮에도 개굴개굴 |
蛙一鳴 蛙二鳴 | 개구리 한 마리 울고 개구리 두 마리 울더니 |
忽復千萬如相鬪 | 갑자기 또 천만 마리 다툼이나 하는 양 |
低仰往復中律呂 | 오르락내리락 주거니 받거니 가락이 맞아 |
靜聽其音疑節奏 | 고요히 듣노라면 그 소리가 꼭 연주하는 듯 |
方其作也誰爲勸 | 그 시작은 뉘라서 권했던가? |
霎然而止被誰肘 | 갑자기 멈추는 건 또 누가 말려 선가? |
寂乎方息如雷收 | 고요하게 자자드니 우레가 걷힌 듯 |
嫋嫋孤吟猶殿後 | 가녀린 울음 하나 맨 뒤까지 이어지네. |
前潭後潭山月白 | 앞 못이며 뒤 못에 산월(山月)이 하얗고 |
草遠沙明六七畝 | 풀밭 멀고 모래 환한 예닐곱 이랑 |
幽人高枕松簷下 | 숨은 이 높이 누운 소나무 처마 아래 |
自然之樂蛙兩部 | 자연의 음악 소리 개구리 특별 공연. |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賦蛙聲]」, 李秉淵, 『槎川詩抄』卷上
여름철 개구리가 우는 소리는 조선조 문인들이 애용하던 시적 소재였다. 개구리 울음소리에 대한 작가들의 입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개구리를 한밤의 고요를 깨는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입장이고【“小齋如舫曲池淸, 獨坐無言睡晩晴. 頗厭邇來人聒耳, 亂蛙莫更送繁聲. -徐居正, 『四佳詩集』 권28 「小齋聞蛙」”; “黃梅時節雨霪霪, 平陸成川尺許深. 水面亂浮眞得意, 草根群吠更何心. 雖乘夏潦唇能鼓, 直到秋霜口自瘖. 別有羈窓堪惡處, 闇中偸入汚衣衾. -李承召, 『三灘集』 권4 「憎吠蛙」”; “聒聒群蛙吠, 終宵苦不禁. 乍停如有待, 齊唱更何心. 未暇官私問, 休方鼓吹音. 唯當塡小沼, 蒲葦莫敎深. -南龍翼, 『壺谷集』 권5 「憎蛙鳴」”】, 하나는 개구리의 울음을 천기 조우의 매개로 여기는 입장이다. 인용된 작품은 두 번째 입장에서 창작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개구리의 울음을 천기와 연결시켜 형상화한 다른 시들과는 그 시적 성취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개구리의 울음을 형상화한 시편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장유의 「와명부(蛙鳴賦)」라는 작품이다. 장유는 장편의 부(賦)를 통해 개구리 울음을 시끄럽게 여기던 묵소자(黙所子)가 인간의 허위와 천기대로의 개구리를 대조하며 본원적 차원에서 도를 궁구해야 한다는 객(客)의 주장을 통해 사유를 전환하게 된 과정을 서술하였다【仲夏之月, 霪霖浹旬. 潢潦汎濫, 后土沈湮. 默所子屛居于西郭之委巷, 環堵之宮翳于蓬藋, 連以幽藪, 帶以汚瀆, 奧草薈蔚, 泥濘漠漠, 群蛙據焉, 爲其窟宅. 生育繁息, 厥麗不億, 乘時得意, 叫呶自嬉, 命儔引類, 張頷樹頤, 齊聲合響, 若訌若爭, 閤閤殷殷, 靡晦靡明, 蓋似夫萬戶之聚梁齊之都, 轂擊肩摩, 喧闐乎九衢. 又如昆陽之戰, 涿鹿之師, 鼓譟轟天, 車騰馬馳. 蓋默所子方避喧習靜, 自適乎牢騷闃寂之域, 卒然聞此, 形神不攝, 視聽煩惑, 絃歌中輟, 佔畢廢閣, 瞑不安榻, 坐不怗席, 若狂若酲瞀亂陫側. 方將命蟈氏勅健僕, 試洒灰之方, 兼箠抶之策, 悉群醜以殱殄, 靡易種以遺育, 去所憎於耳目, 然后得以婾快, 事固有不如意者, 獨沈吟而永喟. 客有過而哂者曰, 甚矣子之惑也. 蓋未通乎人理之變, 與夫物性之適者也. 芒蕩大包, 萬類竝生, 稟形受氣, 天機自鳴, 各率其性而宣其情, 非以供乎吾人之瞻聆. 等是人也, 好惡亦殊, 彼咸池九韶之要妙, 猶見非於墨氏之徒. 子安能使蠢動之夥聲形之繁, 擧以充子之娛樂, 彼又安能易已之性枉己之天, 惟以悅子之耳目. 且夫最靈之族, 衿裾之列, 心聲所發, 可惡非一, 子胡不察, 蛙黽是誅. 略擧梗槩, 可推其餘. 道烏乎隱, 躗言滋起. 澤僞亂眞, 飾似混是. 祗園之敎, 稷下之辯, 百氏競馳, 雷犇浪卷, 簧鼓宇宙, 眩亂黝堊, 蛙有是哉, 乃蟊乃賊. 神徂聖伏, 大雅委地, 妖音促響, 衒淫售異, 雕鎪月露, 啽哢飛走, 竊華屛實, 傳譌襲陋, 嘲啾聒亂, 正聲以斁, 蛙有是哉, 乃蠱乃蠹. 讒人罔極, 緝緝翩翩, 謠諑是工, 敗類戕賢, 顚倒正邪, 變亂是非, 文姦濟惡, 以逞其私, 止棘之蠅, 詩人所疾, 蛙有是哉, 乃鬼乃蜮. 凡茲數者, 亂之源而僞之的, 大足以混淆道術, 小足以覆敗家國, 仁人志士痛心切骨, 思欲拔本塞源, 已其禍亂而不可得者也. 若蛙者陰陽賦其氣, 造化成其質, 生於泥淖, 處於汚澤, 跳梁乎井榦之上, 入休乎缺甃之隙, 自在而鳴, 群和互答, 無求於人, 不忤於物, 縱喧鬧之可厭, 亦何異夫吾人之叫呼而讙謔. 蓋物我之一致, 各自安其所而樂其適. 在昔達者, 知魚之樂, 亦有先正若張朱氏喜驢鳴而愜心, 聞蟬聲而醒耳, 樂吾之樂, 而與物同, 蓋默通乎至理. 今子本身而異物, 滯根而厭塵, 不知夫天籟之均寓通塞之同源, 必欲殄天物而逞吾志, 無乃蔽於理而傷於仁者耶. 抑且翫細娛而遺大患, 除小惱而恬巨害, 徒知惡蛙鳴之鬧吾耳, 不念夫大蛙大鬧之爲可惡之大者. 類之不充, 何其昧耶. 言未卒默所子矍然意下, 形慹神癡, 搭然無語, 穆然深思. -張維, 『谿谷集』 권1 「蛙鳴賦」】. 개구리 울음소리를 매개로 존재에 대한 우주적 성찰을 도도하게 전개하여 개구리의 울음을 대상으로 한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명편이 되었지만, 의론을 펼치는 것이 주가 된 까닭에 시인과 개구리와의 직접적인 교감은 형상화되지 못했다. 백악시단의 김창흡은 개구리의 울음을 음악소리로 형상화하였지만 개구리의 울음소리에서 근면함을 읽어내고 태평을 읽어내는 등, 여전히 개구리의 울음을 의론적 입장에서 보고 있어 역시 교감을 전면화 시키지 못하였다【自我池荒, 蛙日鳴止. 鳴止如何, 閤閤不已. 雲雨之會, 得以陸梁. 嘯群鼓侶, 厥聲滿坑. 鷄鳴而作, 通夜未央. 誠有不息, 哿矣其勤. 嗟爾繁蛙, 異乎吾聞. 噰噰喈喈, 萬歲南薰.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 홍세태 또한 개구리의 울음에서 무위(無爲)와 천기(天機)를 읽어내었다【蛙鳴自物性, 不必問公私. 高柳多風處, 靑山欲雨時. 短長如有節, 動息本無爲. 寂寞幽人宅, 天機在小池. -洪世泰, 『柳下集』 권11 「與李處士論蛙鳴」】. 이처럼 개구리 울음은 이치를 궁구하는 의론적 소재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이병연의 시는 의론적으로 말하는 시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병연의 시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개구리 울음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묘사이다. 밤새 개구리 울음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게 되는 사실성도 갖추었다. 개구리 울음은 대개 해가 저물 무렵부터 시작된다. 한 마리가 개굴거리기 시작하면 그 소리는 하나 둘 늘어나 수천의 소리로 확대된다. 이병연은 이러한 모습을 3구와 4구에서 묘사하였다. 다음에는 개구리 울음의 특징을 묘사하였다. 실제로 높은 톤으로 울어대는 개구리가 있는가하면 낮은 톤으로 울어대는 개구리도 있는데, 이들의 울음은 이쪽에서 울면 저쪽에서 화답하듯 사방으로 울려 퍼진다.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멈추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요란하게 울기도 한다. 이병연은 이러한 울음의 양상을 연주에 비유하였다. 단순하게 ‘연주 같다’는 비유적 표현에 그친 것이 아니고 개구리의 울음을 한 곡의 연주 과정으로 묘사하였다. 한 마리 개구리가 연주를 시작하자 서서히 다른 개구리들이 화음을 더해 참여한다. 연주는 서서히 고조되어 고음과 저음의 현란한 화성이 우레가 치는 듯 절정에 이른 뒤 고요하게 잦아든다. 마지막까지 가녀리게 이어지는 울음 하나는 연주의 마지막을 알리는 대여음(大餘音)이다. 그리고 연주가 끝난 뒤에는 공연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앞 못, 뒤 못에 달이 하얀 장면은 연주가 끝난 무대에 불이 들어온 모습과 흡사하다. 그리고 불 켜진 공연장에 청중도 보인다. 그 청중은 소나무 아래 작은 집에 숨어사는 사람이다. 이처럼 이 시는 개구리 울음을 기승전결이 갖추어진 한 편의 공연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이병연은 일반적으로 개구리 울음을 천기(天機)라는 의론적 소재로 활용하는 시편들과는 다른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병연은 의도적으로 의론적 표현을 배제하였다. 개구리 울음을 두고 심오한 의론을 개진하는 것은 이미 장유가 그 극단을 보였다. 이미 이루어진 성취를 비슷한 논조의 시로 다시 형상화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의론에 가려 소홀히 되었던 개구리와의 진정한 교감 자체를 형상화하는 것이 이병연이 택한 전략이었다. 개구리 울음을 소재로 한 시적 전통에서 이병연은 이미 성취된 의론성을 토대로 삼으면서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대상과의 교감 자체를 전면화했던 것이다.
소나무 아래 작은 집에서 개구리 울음을 한 편의 음악으로 들을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은 곧 장유의 시 속에서 묵소자의 생각을 깨우쳤던 객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다. 장유의 시구를 빌리면, 즉 속세의 편협한 사유를 넘어 미물과도 즐거움을 함께 하며[樂吾之樂而與物同] 유별(有別)한 현재태들이 본래 하나의 천리(天理)에서 비롯된 것임을 체인한[知夫天籟之均寓、通塞之同源] 높은 정신의 소유자인 것이다. 이병연은 교감의 이러한 경지를 ‘특별 공연[兩部]’이란 시어로 함축하였다. 양부(兩部)는 임금이 특별히 내리는 성대한 음악인데, 여기서는 남조(南朝) 제(齊)나라 공규(孔珪, 447~501)의 고사와 연관되어 구사되었다. 『남사(南史)』 「공규전(孔珪傳)」에는 “집안에 잡풀을 베지 않아 그 가운데서 개구리가 울자 어떤 사람이 ‘진번(陳蕃)처럼 하시려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공규가 웃으며 ‘나는 개구리 울음을 양부(兩部)의 연주와 같다고 여기는데, 하필 진번을 따르겠는가?’[門庭之内草萊不翦, 中有蛙鳴, 或問之曰: ‘欲爲陳蕃乎?’ 珪笑答曰: ‘我以此當兩部鼓吹, 何必効蕃?’ -『南史』 권49 「孔珪傳」]”라고 대답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진번은 집안 청소를 왜 안하느냐는 물음에 “대장부가 세상에 처하여 응당 천하를 소제해야지, 어찌 하나의 집을 일 삼겠습니까?[大丈夫處世當掃除天下, 安事一室乎?]”라고 대답했던 인물이다. 이렇게 보면 일화 속 공규의 대답은 개구리와의 교감이 진번의 경세(經世) 포부보다 더 높은 경지임을 강조하는 발언이라 할 수 있다. 이병연은 이처럼 다단한 의론들을 모두 온축한 채 ‘양부(兩部)’라는 두 글자로 여물동락(與物同樂)의 높은 경지를 밝혔다. 이병연의 이 시는 개구리 울음이라는 관습적 소재를 상투적인 천기(天機)라는 개념어로 뭉뚱그리지 않고, 구구한 의론 개진도 피하면서,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를 다정다감하고 재미나게 표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한가로운 정은 고요 속에 있다[閒情在寂寥]”【金時敏, 『東圃集』 권5 「除夕詠閒」】는 김시민의 시구처럼 처정(處靜)한 일상의 이취(理趣)는 한가로운 일상의 아취(雅趣)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微雪山齋禽語譁 | 산재에 가랑눈 온다고 산새들 조잘대는데 |
巷西人到巷南家 | 마을 서쪽 사람이 마을 남쪽 집에 왔구나. |
身閒擬和潘安賦 | 몸이 한가하니 반악(潘岳)처럼 한거부(閑居賦)를 짓고 |
喉渴堪評陸羽茶 | 목이 마르면 육우(陸羽)【육우(陸羽, 733~804)는 당(唐)의 경릉(竟陵) 사람으로 차를 좋아하여 세 편의 다경(茶經)을 저술했고, 차를 팔던 사람들은 그를 다신(茶神)이라 추존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한다.(『新唐書』 권196)】처럼 차 맛을 품평하네. |
菊意留盆一叢卧 | 국화는 마음을 화분에 남겼는지 한 떨기 누워있고 |
梅香粘袖數枝斜 | 매화는 향기를 소매에 붙이려는지 두어 가지 기우뚱하네. |
饕風未必欺衰骨 | 모진 바람도 이 늙은이 얕볼 수만은 없으니 |
有興休嫌蹋月華 | 흥이 일자 마다 않고 달빛을 밟아보네. |
「가랑눈[微雪]」, 洪重聖, 『芸窩集』 권2
苔色閑來碧 蟬聲睡後凉 | 한가하니 이끼는 더욱 푸르고 매미 소리 잠깨고 나니 더욱 시원해. |
蕭然聊隱几 寂爾卽禪房 | 한가하니 그저 자리에 기대고 고요하니 곧 선방(禪房)과 다름없네. |
山水忘憂物 文章却老方 | 산수(山水)는 시름을 잊는 물건이요 문장(文章)은 늙음을 물리치는 비방이라. |
心無關一事 幽味似茶長 | 마음에 한 가지도 걸리는 게 없으니 그윽한 이 맛 차 맛처럼 길구나. |
「한가한 생활[閑居]」, 李夏坤, 『頭陀草』책6
홍중성과 이하곤의 시 두 편을 보였다. 두 시 모두 고요 속에 이루어지는 한아한 일상을 그렸다. 홍중성의 시에는 가랑눈이 내리자 자신을 찾아온 벗과 시를 짓고 차를 마시며 국화와 매화를 감상하다 청흥을 따라 달빛 아래 산책을 나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하곤의 시에는 선방(禪房)처럼 고요한 집에서 짙어진 이끼를 보고 매미 소리를 듣는 화자가 제시되어 있다. 작가는 이렇듯 고요한 일상에서 산수를 찾아 시름을 잊고 시문을 지으며 문학적 열정을 발산하기도 한다. 그리고 홀로 즐기는 한가한 아취를 차 맛처럼 담백하고 깊은 것으로 비유하였다.
백악시단의 한아(閒雅)한 일상을 대표하는 소재는 꽃이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꽃에 대한 애호가 각별하였다. 전통적인 사대부의 꽃이었던 매화는 물론이요, 왜철쭉, 해당화, 작약, 장미, 모란 등등의 각종 꽃을 기르며 한아한 흥취를 즐겼다. 조정만은 「작년에 화훼 20종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지금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곳 설성(雪城)에 온 이래로 저것들과 떨어져 온 몸이 물만 두르고 있으니 실로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는 그것이다. 천애에서 홀로 앉아 있자니 각종 화훼들을 실로 면면이 마주하고픈 생각이 들어 다시 여러 수를 짓는다. 그러나 근래의 여러 작품은 득실이 있으니 전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昔年有花卉二十詠, 而今不得記焉. 來玆雪城, 與彼界隔一衣帶水, 儘是胡地無花草者. 天涯孤坐, 各種花卉, 實有面面之思, 更賦諸詠. 而年來諸品有得有失, 不無前後之異., 『寤齋集』 권2]라는 시에서 죽(竹), 국(菊), 송병(松屛), 백매(白梅), 홍매(紅梅), 영산홍(映山紅), 왜척촉(倭躑躅), 연화목란(蓮花牧丹), 백색작약(白色芍藥), 춘동백(春冬柏), 월사계(月四桂), 치자(梔子), 석류(石榴), 벽오동(碧梧桐), 백길경(白桔梗), 삼색도(三色桃), 홍벽도(紅碧桃), 전추라(剪秋羅), 목정향(木丁香), 분송(盆松), 분삼(盆蔘) 등 21가지 화훼를 연작시로 짓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두 수를 예시한다.
第一奇花高丈餘 | 가장 기이한 꽃이 높이가 한 길 남짓이니 |
剪霞裁錦較誰如 | 노을을 자르고 비단을 자른대도 어찌 비교하랴 |
風來紅暎靑山色 | 바람 불자 붉은 꽃잎에 푸른 산 빛이 비치니 |
實與其名信不虛 | 그 이름과 실상이 헛된 게 아니로다. [영산홍[右映山紅]] |
東風巧剪蜀羅紅 | 봄바람이 촉나라 붉은 비단 공교롭게 가위질하였으니 |
裁出秋芳石竹同 | 마름질한 듯 나온 가을 꽃잎 패랭이꽃과 같구나. |
華萼茁莖開次第 | 꽃과 꽃받침 싹과 줄기 차례로 열리니 |
娟娟獨冠草花中 | 고운 자태 화초 중에 으뜸이구나.[전추라[右剪秋羅]] |
조정만은 각각의 꽃을 형상화하면서 그 꽃이 지닌 특징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영산홍은 길게 자란 모습이 푸른 산과 겹쳐지는 모습을 이름과 연결시켜 형상화하였고, 전추라는 긴 고깔 같은 꽃의 모양과 꽃이 먼저 피는 생태적 특징을 형상화하였다. 조정만의 시는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꽃을 각별히 애호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꽃이 피면 벗들과 함께 시를 지었고【“躑躅花開二大叢, 寤齋西北小園中.[定而] 墻高影透巖雲碧, 島遠光偸海日紅.[子益] 絶艶向人咸動色, 衆芳回首揔成空.[定而] 洛城車馬誰來賞, 雨裡閒看獨兩翁.[子益] -趙正萬, 『寤齋集』 권2 「倭紅二樹方盛開, 三淵冐雨來過, 仍與聯句」”; 姨兄宅裏牡丹花, 每到春歸獨擅奢. 幽砌種來元國色, 新詩題品盡名家. 輕風有意翻雕珮, 小雨無端濕絳霞. 堪笑欄頭叢芍藥, 後時應亦避繁華. -申靖夏, 『恕菴集』 권2 「士相弼夏族兄亦爲姨從宅賞牡丹次羅鄴韻」】 화분을 빌려 감상하기도 했으며【久雨愁人欲放歌, 草生庭院亂如麻. 山中活計三升酒, 天下風流一樹花. 巷僻誰尋東圃老, 泥深亦阻北鄰家. 竹皮團席茅簷畔, 朝坐悠然到夕鴉. -金時敏, 『東圃集』 권3 「雨中借來北隣四季花」】 심지어는 지는 꽃이 아쉬워 비단을 잘라 직접 조화를 만들기도 하였다【蕉影桐陰㧾絶奇, 石盆何以假花爲. 隋園剪彩君休詑, 可笑吾儂却見欺. -金令行, 『弼雲稿』 권2 「槎川剪彩爲花, 逢人輒曰紅桃, 余亦見欺, 賦詩矣. 今知其假, 又寄一絶要和」】. 이들이 꽃을 두고 한아한 흥취를 즐기는 모습은 아래 이병연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첫 번째(其一)
宛轉幽禽囀 窺簾去復廻 | 예쁜 새 요란하게 지저귀면서 주렴을 쳐다보며 날아갔다 날아오네. |
重重勤報說 屋角杏花開 | 자꾸자꾸 부지런히 말을 전하니 집 모퉁이 살구꽃이 피었나 보다. |
세 번째(其三)
紅杏臨池發 池中寫綵霞 | 붉은 살구꽃 못가에 피어나니 못에는 고운 노을 그려져 있네. |
幽人携稚子 指與倒看花 | 숨어사는 사람은 아이 손을 붙잡고 손으로 가리키며 비친 꽃을 바라보네. |
네 번째(其四)
辛夷杜鵑落 縞李碧桃開 | 개나리 진달래 지고난 뒤에 하얀 배꽃 하얀 도화(桃花) 피어났구나. |
我是花盟主 朝朝點檢來 | 나는야 꽃동산의 맹주(盟主)라 아침마다 점검하려 여기 오노라. |
다섯 번째(其五)
白白紅紅艶 春光誰淺深 | 희고 붉은 고운 꽃들 봄 경치에 어느 것이 좋고 나쁘랴. |
詩人妄題品 傷我化翁心 | 시인이 망령되이 품제(品題)해서 조화옹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 |
「꽃밭에서[花園]」, 李秉淵, 『槎川詩抄』卷上
이 시는 모두 7수로 된 작품인데, 그 가운데 일부를 보였다. 첫 번째 수는 이 시의 서장(序章)인데 어떤 새가 재잘재잘 우는 소리에 살구꽃이 폈나보다며 꽃밭으로 향하는 모습을 그렸다. 세 번째 수는 살구꽃이 마치 노을처럼 연못에 도영된 모습을 형상화하였는데 손주와 손을 잡고 하나하나 가리키며 감상하는 모습이 다정하게 그려졌다. 네 번째 수는 철철이 이어지는 꽃의 향연을 말하였다. 자신을 꽃동산의 맹주(盟主)라 하면서 아침마다 무슨 꽃이 사라지고 무슨 꽃이 나왔는지 점검한다고 하였다. 재치 있는 표현이 돋보인다. 다섯 번째 수에서는 모든 꽃이 봄날을 구성하는 아름다운 존재임을 말하였다. 망령된 시인의 경솔한 품평이 조화옹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구절은 가볍게 말한 듯하지만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본원적 존재 인식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미운 꽃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병연의 시는 새와 교감하고 꽃과 교감하며 꽃밭에서의 아취를 산뜻하게 그려냈다.
앞서 많은 꽃들을 언급했지만 백악시단이 애호한 꽃을 꼽으라면 단연 매화를 꼽아야 한다. 매화가 사대부 꽃으로 여겨졌던 조선조의 통념을 감안하면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이들의 매화시는 전대 문인들의 작품과 비교하면 양과 질에서 빼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백악시단 이전의 문인들 또한 매화를 애호하여 수많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런데 전대의 매화시는 대체로 매화 자체보다는 매화에 결부된 절개, 지조, 결백 등의 정신성을 원용하여 형상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전대의 매화시는 매화 자체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드물다. 그에 비해 백악시단의 매화시는 연작시를 통해 매화의 모습, 매화의 존재론적 의미, 매화의 정신 등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조명한다. 백악시단의 매화시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매화를 인식하는 태도이다. 먼저 김창흡의 매화시를 살펴보자.
두 번째(其二)
玄化氤氳不輟溫 | 현묘한 조화의 성한 기운 그치지 않아 |
菊籬凋後又梅盆 | 울 옆 국화 시든 뒤에 다시 매화 화분으로. |
雪氷滿目嚴威缺 | 눈과 얼음 온 천지라 위엄은 이지러지고 |
天地無心苦癖存 | 천지(天地)는 무심하여 괴로운 벽(癖)만 남기더니 |
貞上一元流素蕊 | 정(貞) 위의 일원(一元)이 하얀 꽃술에서 흘러나오고 |
虗中妙色發玄根 | 허(虛) 가운데 오묘한 빛 검은 뿌리에서 피었구나. |
深房坐討眞消息 | 깊은 방에 틀어 앉아 참된 소식(消息) 궁구하니 |
床榻蕭然卽小園 | 책상이 호젓한 게 바로 곧 작은 동산. |
아홉 번째(其九)
半綻輕英數瓣懸 | 반쯤 터진 작은 꽃망울 두어 송이 달렸는데 |
冷槎何自著嬋娟 | 찬 가지 그 어디서 고운 자태 붙였는가? |
神精不盡枝梢內 | 정신이 가지 속에서 다하지 않아 |
影韻常流几案前 | 꽃 그림자, 맑은 운취 서안(書案) 앞에 늘 흐르네. |
遙夜懷羣應大庾 | 긴 밤 그리는 벗은 응당 대유령(大庾嶺) 매화일 테고 |
淸晨鍊氣自先天 | 맑은 새벽 정련된 기(氣)는 선천(先天)으로부터 나온 것. |
周旋轉覺吾形穢 | 함께 할수록 내 몸의 더러움을 알게 되니 |
頭白相看已閱年 | 흰 머리로 바라보며 지난 세월 반추하네. |
열세 번째(其十三)
染筆東牕旭日初 | 동창에 해 오를 적 붓을 적셔서 |
臨花方欲著形模 | 꽃을 보며 그 모양을 그리려 하니 |
輕綃剪素華而潔 | 가벼운 깁, 자른 명주처럼 곱고도 정결하고 |
密玉含溫冷不枯 | 촘촘한 옥 윤기 머금어 차면서도 생생하네. |
天上綠華猜淑骨 | 천상의 악록화(萼綠華)도 맑은 풍골 시기할 만하고 |
僊中杜子愧淸膚 | 신선계의 두자(杜子)도 깨끗한 피부엔 부끄러워할 만하네. |
神情別在忘言處 | 신묘한 정은 말을 잊은 곳에 따로 있으니 |
月曉羅浮影有無 | 달빛 두른 나부산 그림자가 보일 듯 말 듯. |
「송백당영매(松栢堂詠梅)를 이어 짓다[又賦]」, 金昌翕, 『三淵集』 권6
인용된 두 번째 수는 개화의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김창흡은 매화의 개화를 현묘한 우주의 조화로 인식한다. 현묘한 우주의 조화는 하나의 생명이 다하면 또 다른 생명체로 현현하며 유행불식한다. 국화도 없는 자리 고벽(苦癖)만 남아 애타게 다른 생명을 기다리니 매화가 처음으로 응답을 보낸다. 하얀 꽃술이 이제 조금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김창흡은 이 장면을 ‘정상일원류소예(貞上一元流素蕊)’이라 하였다. 정(貞)과 일원(一元)의 관계는 순음(純陰)과 일양(一陽)의 관계로 우주 순환의 원리를 顯示한 것이다. 원형이정의 맨 극단[貞]에서 다시 하나의 元이 시작되는 것은 무한한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 경련 상구는 그런 생명의 재개가 매화의 하얀 꽃술에서 그 기미를 보인다는 의미이다. 경련 하구는 절묘한 빛깔을 띤 매화라는 존재가 없음[虛]과 검음[玄]에서 나온 점을 부각시켰다. 특히 매화의 뿌리를 현근(玄根)으로 표현함으로써 천지운행의 오묘함을 더하였다. 미련의 참된 소식[眞消息] 또한 일차적으로는 매화의 개화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매화를 매개로 진행되는 생장소멸의 이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다.
아홉 번째 수에서는 매화의 고결함을 형상화하였다. 수련에서 매화의 모습에 경이감을 표한 뒤, 함련에서 매화의 본질이 정신(精神)임을 분명히 하였다. 여기서의 정신(精神)은 관념으로서의 정신이면서 정수(精髓)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련에서는 송백당의 매화를 대유령의 매화와 등치키시고, 매화의 정결함을 선천(先天)의 것으로 소급하였다. 대유령은 매화의 고향이요, 선천(先天)은 우주의 본체, 만물의 근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혼돈 이전의 절대 순수를 의미한다. 미련에서는 매화를 성찰의 계기로 삼았다. 절대 순수 앞에서 자신의 속물스러움을 반성하고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는 계기로 삼았다. 아홉 번째 수는 매화시의 일반적 전통처럼 매화로부터 정신성을 취하는 내용인데, 이 경우에도 매화와의 정신적 교감을 전면화할 뿐, 매화의 정신적 속성을 자기 의사 표현을 위한 매개물로 삼지 않는【이것은 “옥인(玉人)의 하고많은 한을 알고 싶거든, 붉은 눈물이 향그런 뺨 적시는 것을 보게나[欲識玉人多少恨, 試看紅淚染香腮].”라는 시구처럼, 매화라는 시적 대상[붉은 매화에 이슬이 맺힌 모습]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데 활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특징을 보이고 있다.
열세 번째 수는 매화의 맑고 고운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비단과 명주를 병치하여 화려하면서도 정결한 모습을 그렸고, 이슬 맺힌 매화를 옥이 윤기를 머금은 것으로 형상화였다. 신선인 악록화(萼綠華)와 두자(杜子)를 끌어들여 맑은 자태를 한껏 고조한 뒤 그 모습을 나부산의 매화선녀에 비하였다.
김창흡의 이 시는 석실서원의 강학이 재개된 무렵, 석실 인근의 송백당에서 지은 작품이다. 이 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매화를 인식하는 작가의 태도이다. 김창흡은 두 번째 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 매화를 생명의 신비, 존재의 본질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것은 곧 매화를 천기론의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김창흡은 매화를 통해 천기와 조우하고 매화를 통해 생명의 오묘한 조화[天理]를 체인하여 그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래서 김창흡의 시는 전대의 매화시와 달라지게 되었다. 전대의 매화시가 매화의 관념적 상징을 활용하여 매화를 부분적이거나 부수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에 비해 김창흡은 매화를 시적 대상으로 전면화하고 매화의 이런 속성, 저런 특징들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다만, 김창흡의 이 시는 매화의 모든 면을 정신으로 포착하겠다는 작가의식이 다소 과잉된 폐단을 보인다. 매화를 형용하려는 의식이 강해 비유가 남발되고 있고, 거기에 존재의 본질을 철학과 문학을 겸하여 표현하려다 보니 심오하게 구성한 의미망이 사변적 시어에 구속된 채 문학적 여운을 주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김창흡의 이 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매화를 생명의 신비, 존재의 본질로 대하는 백악시단의 기본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후기 백악시단의 이병연은 이러한 인식태도를 이어받으면서도 형상화에 있어서 특유의 심미성을 발휘하였다.
첫 번째
春風誰送寂寥濱 | 누가 봄바람을 이 고요한 물가로 보냈나? |
老樹深深斷問津 | 묵은 숲 깊고 깊어 문진(問津)할 길도 끊겼는데. |
田地纔從封埴得 | 밭에서 겨우 배양할 흙 얻었건만 |
胚胎已屬發生新 | 생명의 태 어느덧 맺혀 새 꽃망울 틔웠구나. |
欲知一氣神明處 | 일기(一氣)【일기(一氣)는 혼돈(混沌)의 기(氣)로서 천지만물의 본원을 의미한다. “彼方且與造物者爲人, 而遊乎天地之一氣.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의 신명한 곳 알고 싶다면 |
須驗元功接續辰 | 원(元)의 공(功)이 이어질 때 징험해야하리. |
花到開時詩亦就 | 꽃이 와서 피어날 적 시도 이룸 있으리니 |
分明天意餉斯人 | 분명 하늘은 이 사람 배불리 먹일 뜻이로구나. |
네 번째
從君結臘久成言 | 자네가 섣달에 맺힌 후로 오랜 약속을 맺어 |
寢食相通一氣溫 | 잘 때나 먹을 때나 서로 통하니 일기(一氣)가 온윤(溫潤)하네. |
歲暮天寒新紙屋 | 세모의 날씨는 새로 바른 종이 집에 차갑고 |
苔封土皺古陶盆 | 이끼 돋은 흙은 오랜 화분에 주름졌네. |
安身立命元幽獨 | 안신입명(安身立命)은 원래 그윽하고 고독한 것이지만 |
沃水焚香自早昏 | 물 대고 향 사르길 새벽부터 저녁까지 한다네. |
何處凍吟林逸士 | 숲 속의 일사(逸士) 언 입으로 시 읊는 곳 어디인가? |
澗邊籬落雪中園 | 개울가 울도 해진 눈 내린 정원이네. |
스무 번째
高處難將套語傳 | 높은 경지 상투어론 전신(傳神)하기 어려우니 |
暗香踈影未超然 | ‘암향(暗香)’이니 ‘소영(踈影)’으론 넘어서지 못하네. |
顔愚獨立三千上 | 안우(顔愚)는 삼천 제자 위에 홀로 섰고 |
茂叔初拈太極圜 | 무숙(茂叔)은 태극의 하늘을 처음으로 보였다네. |
要見胚胎存至妙 | 배태(胚胎) 속에 지극한 묘가 있음을 보아야하니 |
直須文字罷多緣 | 섣부른 문자로는 많은 연기(緣起) 흩고 말 뿐. |
深知渠亦專時晦 | 그도 또한 전일하다 때로 감추니 |
誰復鋪陳入譜編 | 누가 다시 펼쳐서 매화보(梅花譜)에 들이겠는가? |
「화분 매화[盆梅]」, 李秉淵, 『槎川詩抄』卷下
이병연은 백악시단의 문인들 가운데 매화 연작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다. 현전하는 그의 매화 연작은 「분매(盆梅)」, 이십수(二十首), 「송매(送梅)」, 십수(十首), 「매화오율(梅花五律)」, 「분매이십절(盆梅二十絶)」 등 모두 55수이다. 이병연의 매화시 창작열은 당대에도 인상적인 것으로 여겨져,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은 「이백천매화시서(李白川梅花詩序)」이라는 글에서 이병연의 매화시가 전인의 투식을 벗어나 기(奇)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고평하면서 성취의 원인을 이병연의 매화벽(梅花癖)에서 찾기도 하였다【辛亥春, 余在龍山, 始得李君梅花詩三十律, 誠一壯觀也. 自古詩家之詠梅者, 不勝其紛然, 而自有林逋月黃昏一句, 不復有佳作之對稱者. 近世詩人, 雖或有詠, 不出於踏襲前套, 過數篇則只益露醜而已. 一筆三十詠, 逾出逾奇, 能令人開眼者, 獨於李君見之矣. 余聞李君癖於詩, 一生用力, 所作不知幾千篇, 可想其無景不吟無物不詠. 而觀乎此詩, 則其所癖於梅者, 反甚於詩, 豈不淸且高哉? -趙觀彬, 『悔軒集』 권15 「李白川梅花詩序」】. 시를 살펴보면 조관빈의 기록처럼 이병연의 대단한 매화 사랑을 읽을 수 있다. 매화가 필 때부터 매화가 질 때까지 순간순간을 20수의 시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그 자체가 이병연의 매화벽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수는 매화의 개화를 읊은 것이다. 좋은 흙도 구하지 못했건만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를 보고 이병연은 이내 생명에의 외경(畏敬)에 빠져든다. 이병연은 그 외경감을 경련에서 말하였는데, 매화는 일기(一氣)의 신명한 조화가 산생시킨 존재론적 본질의 표상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입장은 앞서 본 김창흡의 인식태도와 같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시를 지으며 매화와 본격적인 교감을 나누겠다는 뜻을 보였는데 매화를 보내어 시를 쓰게 해준 하늘의 호의를 “분명 하늘은 이 사람 배불리 먹일 뜻이로구나.”라고 재미나게 표현하였다.
네 번째 수는 매화를 정성스럽게 가꾸며 교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병연은 매화를 인격화하여 ‘군(君)’이라고 불렀다. 매화가 피면 정성을 다하겠다는 약속처럼 침식(寢食)간에도 늘 보살피니 매화는 윤기가 돌고 생기어린 모습이 되었다. 그럼에도 차가운 날씨가 걱정되어 매화 감실에 새 종이를 발라주고, 흙이 미어질 정도로 이끼도 얹어주었다. 경련의 안신입명(安身立命)은 안택(安宅)에서 몸을 편안히 하고 명(命)을 세운다는 말인데【주자는 문인에게 보낸 답장에서 “비로소 드넓은 大化의 가운데 일가마다 하나의 안택이 있음을 알겠으니 바로 스스로 몸을 편안히 하고 명을 세워 지각을 주재하는 곳입니다[乃知浩浩大化之中, 一家自有一箇安宅, 正是自家安身立命主宰知覺處. -『晦菴集』 권32 「答張敬夫」]라고 하면서 안택(安宅)을 안신입명(安身立命)하고 지각을 주재하는 곳으로 보았다. 한편, 안택(安宅)은 『맹자(孟子)』 「공손추(公孫丑)·상(上)」에 “夫仁天之尊爵也, 人之安宅也”라 하여 인(仁)의 비유로 제시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는 감실(龕室, 安宅)에서 이루어지는 開花의 생명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경련은 매화의 생명활동이야 홀로 신비스럽게 진행되는 것이지만 혹시나 싶어 새벽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물을 길어다 주고 향을 사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매화의 신비로운 생명활동에 경외를 표하고 정성을 다하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련에는 작가의 이러한 모습이 더욱 재미나게 그려져 있다. 숲 속의 일사(逸士)는 곧 작가 자신인 동시에 임처사(林處士) 임포(林逋)를 환기시킨다. 작가는 지금 눈을 맞으며 감실을 지킨 채 시를 읊고 있다. 눈을 뒤집어 쓴 채 꽁꽁 언 입으로 시를 읊조리는 모습은 어찌 보면 별나고, 측은하기도 하며,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 모습에 담긴 의미는 자못 심장하다.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지금 작가는 우주의 조화를 최초로 전하는 하늘과 지상 사이의 메신저로서 생명 태동의 현장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장난스러운 듯하면서도 천천히 음미해보면 깊은 의미가 우러나오는 이병연 시의 매력이 잘 드러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스무 번째 수는 지는 꽃을 보면서 매화시에 대한 자신의 단상을 밝힌 것이다. 매화와의 교감이 지극했던 이병연에게 매화가 생명을 발하는 조화의 순간은 대단히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병연은 그것을 ‘고처(高處)’라고 하였다. 그런데 매화를 두고 지어진 대부분의 시는 임포의 시구를 좇아 ‘암향(暗香)’이니 ‘소영(踈影)’이니 하는 상투어만 남발할 뿐 매화와 일체되어 그 높은 경지로 올라서지 못한다. 이병연의 판단에 이러한 고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학문이었다. 함련의 상구는 안자(顔子)의 호학(好學)이 삼천 제자 가운데 으뜸이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하구는 주자(周子)의 학문이 우주 운행의 비밀을 밝혔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병연은 이러한 깊은 학문을 바탕으로 매화가 배태(胚胎)되는 그 속에 지극한 우주의 묘리가 있음을 보아야 하지 섣부른 창작으로 우주 운행의 총체적 질서를 파편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병연에게 매화시 창작은 여타의 영물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매화시 창작의 어려움에 대해 이덕무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매화시는 진(陳)나라 음갱(陰鏗)과ㆍ남조(南朝) 하손(何遜) 이래로 대개 또한 짓기 어려웠다. 당나라는 시의 나라로 불리지만 두보, 제기 몇 사람뿐이다. 무릇 매화시는 송나라에서 넘쳐났지만 임포를 제외하고는 내가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하물며 우리들이겠는가? 지금 열 수의 시를 읊고 그 반을 깎아버렸는데도 역시 수준이 낮다. 노담씨가 ‘덜고 또 덜어 없는 지경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나의 시는 이 방법을 쓰는 것이 마땅하리라[梅花詩, 自陰、何以來, 盖亦難矣. 唐惟號稱詩國, 而杜甫、齊己數子而已. 夫梅詩濫觴於趙宋, 而林君復以外, 僕未知也. 况吾輩哉? 今旣咏十許首, 剗其半, 猶卑卑也. 老聃氏曰‘損之又損, 以至於無’, 僕之詩用此法宜哉. -李德懋, 『靑莊館全書』 권2「嬰處詩稿·2」「酬曾若梅花詩韻」의 幷序]】. 이병연의 이 시는 이병연의 매화벽이 단순한 완물의 차원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매화를 형상화함에 있어 성리학적 우주론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고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사변적 의론을 온축하기도 하였다. 작가의 특성에 따라 주된 형상화 양상이 조금씩 차이를 보였지만, 매화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정신으로 감수하는 입장은 모두 같았다. 아래 김시민의 작품은 이런 두 가지 형상화 방식이 병존했음을 보여준다.
於人默相契 靜室與同留 | 사람과 말없이도 마음이 맞아 고요한 방에서 함께 있구나. |
珠蕾春光蘊 苔楂古意幽 | 구슬 같은 꽃봉오리 봄빛 머금고 이끼 낀 등걸에는 고의(古意)가 그윽. |
窮陰都膜外 太極是枝頭 | 궁음(窮陰)에 모두 막을 뚫고 나왔으니 가지 끝에 달린 건 태극(太極)이구나. |
驗得先天妙 分明一氣流 | 선천(先天)의 오묘함을 증험하노니 일기(一氣)의 유행(流行)임이 분명하구나. |
「영매시(詠梅詩)【原韻이 된 시는 『東圃集』 권5 「詠梅. 梅是困巖兄得於李仲久者, 而今爲余所蓄」이다.】에 세 번째로 첩운하여 짓다[三疊]」, 金時敏, 『東圃集』 권5
肺病冬常苦 宵寒未御盃 | 폐병은 겨울이면 늘 심해지니 차가운 밤 술잔도 들지 못하네. |
已知盈尺雪 先念在龕梅 | 한 자 넘게 눈이 온 걸 알자마자 생각이 감실 매화로 먼저 간다네. |
櫪馬蹄頻鼓 窓童鼾卽雷 | 마구간의 말발굽 자주 또각거리고 창가 아이 코골이는 천둥 같은데 |
心明眼故闔 點檢一生來 | 심지 밝히고 낡은 문짝에 눈을 붙인 채 한 생명 예 왔는지 살펴본다네. |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夜半睡覺]」, 金時敏, 『東圃集』 권6
첫 번째 시는 사변성이 강한 작품으로, 방안에서 분매와 말없이 마주한 채 관조(觀照)와 묵계(黙契)의 정신적 경지를 보였다. 궁음(窮陰), 태극(太極), 선천(先天), 일기(一氣)라는 시어가 말해주듯, 이 시는 성리학적 우주론을 토대로 매화를 읊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앞서 본 김창흡의 인식과 같은 것이다. 다만, 고사의 사용을 줄이고 화려한 수식을 배제함으로써 순조롭고 질박한 미감을 준다. 두 번째 시는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사변적 의론을 온축한 작품이다. 작가는 기침 때문에 잠에서 깨었다. 술을 한 잔 마시려 했지만 기침 때문에 여의치 않다. 밖을 내다보니 한 자 넘게 눈이 내렸는데, 불현듯 감실의 매화 걱정이 든다. 날이 하도 추워 말도 발을 동동 구르는데, 천진한 아이는 세상모르고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다. 작가는 주섬주섬 등불을 찾아 불을 밝힌 뒤 감실 문짝에 눈을 대고서 매화가 폈는지 살펴본다. 실제 체험의 형상인 까닭에 시상이 순조로우면서 시적 생동감이 있다. 특히 경련의 다소 코믹한 묘사는 미련에서의 행위와 어우러지면서 시적 묘미를 준다. 이는 앞서 본 이병연의 형상화를 닮아 있다. 말은 또각거리고 아이는 드르렁거리는데 고요히 숨을 죽여 문틈으로 매화를 살피는 작가. 매화를 보는 작가의 내면은 첫 번째 시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작가의 행위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작가의 생명에 대한 외경감을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었다.
김시민의 시에 나타난 두 가지 형상화 양상은 김창흡 방식의 철리적 매화시가 이병연 방식의 문학적 매화시로 변화해 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하나를 배제하거나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철리적 매화시도 쓰면서 문학적 매화시도 쓰는 확대로서의 변화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는 자칫 후기 백악시단에 이르러 ‘진시’의 정신성이 약화되고 심미성만 강화된 것으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백악시단의 매화시는 전대의 매화시가 매화의 관습적 상징을 매화 외적 사건이나 상황을 드러내는 데 원용하는 것과는 달리 매화와 작가의 직접적 교감을 형상화하였다. 매화의 개화에서부터 낙화에 이르기까지 연작의 형식을 통해 매화의 다양한 면모를 형상화한 것은 매화를 시적 대상으로 한층 전면화하였음을 보여준다. 백악시단의 매화시가 보이는 이러한 특징은 ‘진시’의 이론인 천기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매화를 생명 조화의 표상으로 여기고 매화 자체에 집중한 것은 대상의 천기와 조우하여 천리를 체인하기 위해 대상 자체를 면밀하게 관조하던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관조를 통해 매화라는 생명체와 한층 깊어진 교감을 이루었고 그 결과 매화의 모양새로부터 존재론적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산생된 시편들은 매화시의 질적 수준을 고양시켰다.
한편, 대상의 의의를 중시했던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일상의 평범한 기물들도 운치 있는 시적 소재로 끌어들였다.
病眼能看細字文 | 병든 눈으론 작은 글자 볼 수가 없었는데 |
賴玆雙鏡度朝曛 | 두 알 안경 이것으로 아침저녁 보낸다네. |
竹床烏几渾閑物 | 대나무상 오피궤 죄다 한가한 물건인데 |
獨策衰年第一勳 | 홀로 면려(勉勵)하니 노년의 제일가는 공신이로다. |
「안경(眼鏡)」, 趙正萬, 『寤齋集』 권2
一本大如股 其種來燕市 | 한 포기가 넓적다리만큼 큰데 그 종자가 중국 시장에서 온 것. |
濯濯靑玉莖 經齒忽無滓 | 깨끗하게 푸른 옥 같은 줄기는 이로 씹으면 앙금도 없다네. |
「배추[菘]」, 金昌業, 『老稼齋集』 권2
첫 번째 시는 조정만이 안경을 읊은 것이다. 노안(老眼)으로 작은 글씨를 볼 수 없었던 조정만에게 안경은 아침저녁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물건이었다. 조정만은 그런 안경에 깊은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나이가 들면 대개 눈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공부도 안하면서 대나무 상을 놓고 오피궤에 기댄 채 학자연(學者然)한 외양만 갖추는데, 안경 덕분에 게으름과 허위를 물리치고 부지런히 독서할 수 있으니 안경은 노년의 제일가는 공신이라 하였다. 두 번째 시는 김창업의 작품이다. 농부처럼 살고자 했던 김창업은 손수 심은 수십 종의 나무에 하나하나 시를 지어 붙이고, 채마밭의 채소 25종에도 시를 지어 붙였는데【이종묵, 「김창업(金昌業)의 채소류 연작시와 조선후기 한시사(漢詩史)의 한 국면」, 『한국한시연구(韓國漢詩硏究)』 권 18, 2010, 30~32면 참조.】 인용한 작품은 배추를 형상화한 것이다. 김창업은 농사가 잘 되어 큼지막한 배추를 넓적다리만하다고 비유한 뒤, 그 종자가 중국에서 온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는 배춧잎의 신선한 맛을 입에 살살 녹는다며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두 작품은 모두 일상의 평범한 기물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편의 시에서 주목할 것은 이들이 평범한 사물을 그저 형태적으로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심미적 아취(雅趣)까지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정만의 시는 안경을 의인화하여 안경이 늘그막의 게으름을 홀로 채찍질한다(獨策衰年)고 표현하였는데, 표현의 재미에 더해 늘그막까지 안경을 끼고 독서에 열중하는 조정만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게 하였다. 김창업의 시도 그러하다. 시를 읽어보면 수확한 배추를 보며 흐뭇해하는 작가의 모습, 싱싱한 배춧잎 하나를 뚝 떼어 맛을 보는 작가의 모습이 떠오르게 되는데, 이러한 연상을 통해 독자는 심미적 흥취를 느끼게 된다. 9년을 산 닭【我有九年鷄, 盖亦鷄之長. 雖無宋窓談, 尙作秦關唱. 諸塒方寂寞, 一聲初引吭. 山月未半窓, 斷 續來枕上. 昏昏夢囈間, 灑然生虛曠. 那不珍惜渠, 每如良友况. 初從何處得, 族孫偶所養. 爾名靑藪皮, 風神亦可尙. 或言久則恠, 吾知此言妄. 中林一茅簷, 風雨無相忘. 丁寧守一信, 與人相無恙. -李秉淵, 『槎川詩抄』卷下 「九年鷄」】, 늙은 역마【背有瘡㾗鞭不辭, 牽夫說馬少年時. 燕行上駟曾能走, 十日龍灣五日馳.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老驛馬」】를 형상화한 이병연의 시도 대상과의 교감을 통해 얻은 정신적 깨달음이나 인생살이에 대한 깊은 성찰을 수준 높게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존재하는 것들은 저마다 의의를 지닌다고 여겼다. 그랬기에 심상하고 소소한 대상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지적이고 심미적인 형상화를 할 수 있었다. 대상[物]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작시에 있어 소재를 더욱 확대시키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상에서 백악시단이 일상 속의 다양한 대상들을 소재로 깊이 있는 교감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고요한 삶을 지향하였다. 그들이 고요함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본원적 이해가 고요함을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의 고요한 순간을 맞이하면 관조를 통해 일상의 여러 대상들과 교감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궁구하였다. 절서의 변화 속에서 천지운행의 묘리를 체인하고, 눈 내린 새벽의 한 장면에서 천기를 조우하며, 피라미·냇물소리·제비·개구리 등과 정신적 교감을 이루며 물아일체의 경지로 고양되었던 그들의 일상은 한 편의 시 속에 이지적이고도 심미적인 형상으로 아로새겨졌다. 또한 대상과의 교감을 중시하던 그들의 인식태도는 더욱 다양한 대상들을 형상화하면서 시적 소재의 확대를 불러왔다.
대상과의 교감을 형상화한 백악시단의 시편들은 그들의 시론인 천기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천기론은 대상을 천리 체인의 매개로 여긴다. 그렇기에 대상은 감각적 감수를 넘어 심오한 사유의 대상으로 고양된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의 여러 대상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의미 있는 존재로 여겼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 천기론은 학문과 수양을 통해 천부의 수준으로 고양된 주체를 상정한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처정(處靜)의 순간에 무언가를 관조하고 궁리하는 모습은 그 자체가 수양의 모습이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들의 천기론에 입각하여 자신과 대상을 하나의 경지로 고양시켜나갔다. 그래서 그들이 대상과의 교감을 형상화한 시편들은 대상을 형상화한 측면에서 보자면 감각적이고 심미적인 특징을 보이고, 대상을 감수하는 주체의 측면에서 보자면 대단히 이지적이고 정신적인 특징을 보인다. 이렇듯 백악시단의 ‘진시’는 주체와 대상간의 균형적 상호 지양을 통해 정(情)과 경(景)의 참됨[眞]을 확보하였고, 이를 통해 과잉된 감정을 앞세우고 대상과의 진지한 교감을 홀략(忽略)히 함으로써 정경(情景)이 부진(不眞)하여 허황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전대 시의 폐단을 극복해 갔다.
4. 소통의 깊이와 진정(眞情)의 울림
사람은 누구나 일상 속에서 허다한 사태에 직면하고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며 살아간다. 이번에 살필 작품들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에서 발생한 다양한 감정들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에서 촉발된 감정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그 특징적인 면모를 살펴보고 ‘진시’의 측면에서 그 의미를 탐색하고 한다. 앞서 본 시편들이 일상 속 경물들과의 교감에서 나온 시편이었다면, 이번 살필 작품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소통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먼저 살펴볼 작품은 가족이나 벗을 잃은 슬픔을 형상화한 시편들이다. 죽음은 인간의 유한한 숙명이 충격적으로 돌출되는 일상사의 비극이다. 인위적인 노력으로는 도무지 어찌 할 수 없는 시원적 단절을 경험하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숙연해진다. 더구나 그 대상이 자신의 지친인 경우에 그 슬픔은 더욱 지극한 것이 된다. 이 순간에 발생하는 슬픔은 진실과 허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따라서 지친의 죽음을 형상화한 백악시단의 시편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감정의 진실성 여부가 아니라 그 진실한 슬픔을 어떻게 형상화하였기에 문학적 감동을 줄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먼저 김창흡의 시를 보자.
再哭黔陽春 終疑若人去 | 봄날 검산에서 다시 곡하니 끝내 이 사람 정말 가버렸나! |
一往苟不返 三年便千古 | 한번 가서는 영영 오지 않으니 삼년이 곧 천년 같구나. |
纍纍母將子 春草生同土 | 수척해진【‘류류(纍纍)’는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수척하게 야윈 모습을 의미한다. 『禮記』 「玉藻」: “喪容纍纍.” 鄭玄注: “羸憊貌也.” 孔穎達疏: “‘喪容纍纍’者, 謂容貌瘦瘠纍纍然.”(『漢語大詞典』)】 어머니를 모시고 왔는데 봄풀은 늘 그렇듯 같은 땅에서 자라났구나. |
暝息依松栢 微月一何苦 | 저물녘 송백에 기대있자니 희미한 저 달은 어찌 그리 서글픈가! |
嬋媛存營魄 眄睞忽無覩 | 누이여! 혼백은 잘 있는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질 않네. |
每歸若相棄 胡寧不延佇 | 돌아갈 때마다 매번 버리고 가는 듯하니 어찌 우두커니 서있지 않겠느냐! |
上馬淚如綆 黔山正飛雨 | 말에 오르니 눈물은 두레박줄 같은데 때마침 검산엔 빗방울이 흩날린다. |
「검산(黔山)에서 곡하다[哭黔山]」, 金昌翕, 『三淵集』 권1
이 시는 김창흡이 29세 되던 1681년 어느 봄날 누이동생의 무덤을 찾아지은 시이다. 김창흡은 고인에게 아팠을 적 돌봐주지도 못하고 임종도 못한 각별한 미안함이 있었다. 김창흡은 누이의 제문에서 그 사실을 써두었다.
유독 나는 또 다른 형제보다 열 배도 넘는 정이 있었으니 아! 슬프다. 아버지께서 서울로 들어가셨음에도, 나는 철원 산골에 남아 장차 돌밭이나 일구려하여, 오고가며 부모님께 안부 여쭙기를 한 달에 한 번도 채 못했다. 너는 내가 오면 반드시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며 매번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라고 묻고 나는 “세밑에”라고 대답했었다. 그러면 너는 근심스럽게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마셔요”라고 했었다. 팔월에 왔을 때, 처음 네게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 이른 걸 의심하며서도 나도 모르게 걱정했단다. 그러나 이미 어찌 할 방도가 없어 속으로 몇 개월을 헤아리면서 섣달 말이나 올봄 초에는 올 수 있으니 섣달 열흘 전에는 반드시 와서 너를 간호하리라 마음먹었단다. 그리고 입산한 뒤에는 매번 손꼽아 그 날을 기다렸단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그 때를 못 미쳐 네가 결국 그 사이에 죽고 말 줄을.
獨吾則又有兼情於他兄弟不啻倍蓰. 嗚呼! 我家之大入於洛也, 余則滯在東峽, 盖將有事於石田, 往來省視, 率不過一月一過. 汝見我來, 必嘻笑而迎, 輒問‘其罷歸之期’, 余答以‘卒歲焉’, 則汝悒然不樂曰‘毋久淹也’. 八月之來, 始聞汝有身, 訝其早也, 不覺然有驚, 旣已不可奈何. 則默計彌月之期, 度可在臘月之末、今春之初, 於其前臘月旬間, 必來護汝. 入山之後, 每嘗屈指而待也. 豈知未及其期而汝遂奄忽於其間乎?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25 「祭亡妹文」
누이의 죽음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여긴 김창흡이었기에 인용된 시편에는 죽은 누이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절절이 배어난다. 이 시가 독자로 하여금 함께 눈물짓게 하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끝내 가고 말았냐’는 탄식을 시작으로 작품 곳곳에 드러나는 감정구들은 아직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김창흡의 상태를 여실히 전해준다. 특히 ‘돌아갈 때마다 매번 너만 버리고 가는 것 같다’는 시구에는 진실한 마음이 이끌어낸 끝없는 울림이 배어난다. 김창흡의 이 시는 가식 없는 슬픔의 토로가 독자를 함께 울게 하는 작품이다. 아래 홍세태의 시 또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소리를 형상화함으로써 시적 감동을 준다.
첫 번째(其一)
自我罹窮阨 生趣若枯木 | 나는 궁액(窮阨)에 빠진 뒤로 생의 흥취는 말라 죽은 나무 같았지만 |
賴爾得開口 聊以慰心曲 | 그래도 네가 있어 입을 열었고 늘 서글픈 마음을 위로 받았다. |
嗟汝今已矣 令我日幽獨 | 아! 네가 떠나간 지금 나의 하루하루는 더욱 고독해져 |
入室如有聞 出門如有矚 | 집에 들면 어디선가 네 목소리 들리는 듯 문 나서면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너를 찾게 된다. |
觸物每抽思 如繭絲在腹 | 무엇을 마주해도 늘 뽑혀 나오는 네 생각 마치 뱃속 가득 채워진 고치실 같은데 |
哀彼一抔土 魂骨寄山足 | 서글퍼라! 저 한 줌의 흙으로 네 넋과 뼈를 산발치에 묻었구나. |
平生不我遠 今夜與誰宿 | 평생에 나를 멀리 떠난 적 없었는데 오늘 밤은 누구랑 함께 자느냐? |
空留絶筆書 婉孌當面目 | 부질없이 절필(絶筆)의 글 남겼는데 예쁜 네 얼굴이며 눈동자가 아른거리네. |
開箱不忍視 但有淚相續 | 상자를 열어도 차마 볼 수가 없어 다만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지만 |
冥漠九原下 爾豈聞我哭 | 까마득한 저 구원(九原)의 아래에서 네 어찌 내 곡소리 들을 수 있으랴! |
「슬픔[述哀]」, 洪世泰, 『柳下集』 권2
昔與隣兒戲 隣兒今獨來 | 얼마 전엔 이웃 아이와 함께 놀았는데 오늘은 이웃 아이만 홀로 왔구나. |
東風芳草色 忽復滿池臺 | 봄바람이 곱디고운 풀빛으로 어느새 못가 누대 뒤덮었는데. |
「또 슬퍼져서[有感]」, 洪世泰, 『柳下集』 권2
첫 번째 시는 죽은 아이를 생각하며 목 놓아 슬픔을 토로한 시이다. 홍세태의 이 시는 김창흡의 시처럼 격한 탄식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이를 묻고 난 뒤 자꾸만 떠오르는 아이의 모습에 차곡차곡 차오르는 슬픔을 담았다. 궁액(窮厄)에 빠진 작가의 삶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자식. 그런 자식을 한 줌 차디찬 흙 속에 묻고 돌아온 아비는 아직 자식을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작가는 ‘어디선가 도란도란 아이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문을 열고 나가면 골목 어디선가 아이들과 뛰어놀고 있을 것만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수사적 형상화를 위한 어떤 의식도 개입되지 않은 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정만이 시행을 채우고 있다. 또한 ‘평생에 나를 멀리 떠난 적 없었는데, 오늘 밤은 누구랑 함께 자느냐?’와 ‘예쁜 네 얼굴과 눈동자가 아른 거린다’, 그리고 두 번째 수의 “집사람은 내 슬픔 알고서, 다독이려다 먼저 목이 메네. 서로 보며 소매로 눈물만 훔칠 뿐[家人知我戚, 將喩語先塞. 相顧但掩袂].”과 같은 표현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써낸 것인데 독자로 하여금 지극한 슬픔을 공감하게 한다. 진정(眞情)이야말로 가장 감동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예들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는 홍세태의 문집에 첫 번째 인용 시 다음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이 시 또한 죽은 아이를 떠올리며 그 슬픔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오언절구의 단형시로 장편 고시에 못지않은 절절한 비애감을 담아내고 있어 주목된다. 진정의 형상화의 측면에서 좋은 참고가 되는 작품이다. 이 시의 표면적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얼핏 보면 봄날의 한 장면을 그린 풍경시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시를 음미해보면 작품 안에 녹아있는 절절한 슬픔이 독자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작품이다. 작가가 목도한 장면은 지극히 간단하다. 집을 나서보니 연못에 봄풀이 싱그럽고 이웃집 아이가 나와서 놀고 있다. 홍세태는 그 장면을 있는 그대로 형상화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한없는 눈물이 읽히는 것은 그 연못에 우리 아이가 없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이웃집 아이와 그렇게 즐겁게 뛰놀던 연못에 지금은 이웃집 아이와 봄풀만 찾아왔다. 죽은 아이의 부재가 이웃 아이를 통해 더욱 크게 느껴지면서 이 시는 슬픔을 직접 토로한 앞의 시보다 더한 슬픔을 전해준다. 홍세태의 시재(詩才)를 논하기 앞서 꾸밈없는 감정[眞情]이 얼마나 큰 울림을 주는지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한편, 백악시단은 망자 생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반추하며 망자에 대한 슬픔을 극대화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其二)
作人如汝者 今世鮮其匹 | 사람이 되어 너 같은 이 금세엔 짝할 이 드물었단다. |
眉眸細如畵 肌肉瑩勝雪 | 얼굴은 그린 듯이 예쁘고 피부는 눈보다 더 뽀얬는데 |
學語又學步 婉孌戱我膝 | 말을 배우고 걸음을 배워서는 내 무릎에 앉아 얌전히 노니 |
見者無不愛 如睹瑞世物 | 보는 이마다 다들 사랑스럽다면서 이 세상 보물처럼 보았단다. |
珊珊步出來 手弄床頭筆 | 아장아장 걸어 나와 책상 위 붓들을 만지작거리다 |
時復散棊子 或又亂書帙 | 때로는 또 바둑돌을 흩어버리고 이따금 또 책들을 어지럽혀도 |
愛極任爾爲 不忍少嗔喝 | 얼마나 예쁘던지 네 하는 대로 둘 뿐 차마 성내며 꾸짖을 수 없었단다. |
今焉那復得 如寶手中失 | 이제 어찌하면 그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마치 손에 있던 보물을 잃은 것만 같아 |
勿使眼中物 依舊置我室 | 눈앞의 물건들마저 전처럼 두지 못하겠구나. |
「묵아(墨兒)를 곡하며[哭墨兒]」, 洪重聖, 『芸窩集』 권2
이 시는 홍중성이 세 살 난 어린 자식을 잃고 쓴 시이다. 눈처럼 뽀얀 피부를 가진 예쁜 아이는 둘도 없이 귀했다. 늘그막에 얻은 귀한 아이였기 때문이다【홍중성은 첫 번째 수에서 “네 형은 아우가 생겼다고, 네 어미는 아이가 생겼다고 기뻐했단다. 늘그막에 두 아들을 두어, 내게 위안이 되리라 생각했단다[爾兄謂有弟, 爾母謂有兒. 衰年有兩兒, 持以慰我思].”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죽고 말았다. 이 시의 첫 번째 수에서 홍중성은 자신의 슬픔을 가감 없이 토로하였다. “너를 이렇게 데려갈 것이었다면, 하늘은 어찌 너를 낳게 했던가[苟令汝至此, 天胡生汝爲]?”라며 하늘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용된 두 번째 수에 와서 홍중성은 생전 아이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홍중성에게 가장 슬프게 떠오른 모습은 말썽부리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아장아장 걸어 나와 책상 위의 붓을 만지작거리고, 때로는 바둑돌을 흩어버리기도 하고, 책을 어지럽게 쏟기도 하는 아이의 말썽을 보고도 홍중성은 차마 성낼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홍중성은 아이의 행위를 상세하게 그림으로써 이제는 그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비애감을 더욱 크게 하였다. 그래서 아이가 만지작거리고 가지고 놀던 물건들을 전처럼 두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 같은 진정이 토로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죽은 아이의 생전 모습을 눈에 선하게 그림으로써 아이를 잃은 슬픔을 한층 더 공감할 수 있게 한 작품이다. 다음 권섭의 작품은 손주를 잃은 슬픔을 그린 것이다.
是老終何命 奇孫箇箇埋 | 이 늙은이 끝내 무슨 운명인가? 기특한 자손들을 하나하나 묻었으니 |
寒風未死淚 揮酒夕陽階 | 찬바람 맞으며 죽지 못한 이 눈물을 노을 지는 섬돌에서 흩뿌린다네. |
병자년 12월 27일, 어린 손자 신응(信應)의 아들 구동(九同)이 병도 없이 죽었으니 참담하고 애통한지고. 아이가 태어남에 풍모(豊貌)는 준위(雋偉)하고 영재(英才)는 경절(警絶)하여 말도 하기 전에 글자를 알았고, 다박머리 늘어져선 독서를 좋아하여 손에서는 붓을 멈추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송독을 그치지 않았다. 엉엉 울다가도 부르면 곧 순응하고 밥상을 차릴 때면 물러나 앉아 내려주길 기다렸으며 이따금 시좌(侍坐)하는 곁으로 와서는 명이 없으면 물러가지 않았다. 나의 각별한 사랑이 여타 자손과는 달랐건만, 지금 그 아이가 죽었도다. 아! 나약한 뭇 손들로는 한 구석도 채울 수 없구나. 유독 네 명의 손이 있어 기대가 적지 않았는데 임신년에 시응(時應)이가 스물두 살로 죽었고 계유년엔 을경(乙慶)이가 열아홉 살로, 현남(玄男)이가 아홉 살로 죽었으며 지금 구동(九同)이가 다섯 살로 죽었다. 이 모두가 나의 액운이 아손(兒孫)들에 미쳐 이리 된 것 아니겠는가! 다만 이 몸뚱이 진즉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원통함을 멈출 수 없어 이에 시 한 수를 쓴다.
丙子臘月卄七日, 小孫信應之子九同不病而死, 慘矣痛惜. 兒之生, 豊貌雋偉, 英才警絶, 未語而知書字, 垂髫而喜讀書, 手不停筆, 口不離誦. 啼哭時, 呼之則卽應; 設飯時, 退坐而待賜. 時時出來侍坐傍側, 不命則不退. 我甚愛憐異於他孫, 今其死矣. 嗚呼! 衆孱不足以滿隅. 獨有四孫, 期待不少, 壬申時應二十二而死, 癸酉乙慶十九而死, 玄男初九而死, 今又九同初五而死. 此皆我厄運移及於兒孫如此耶! 只怨此身之未卽死. 寃呼不已, 題此一詩. -權燮, 『玉所稿』 「詩·13」
이 시는 86세의 권섭이 다섯 살 난 손자 구동(九同)이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지은 시이다. 긴 제목을 통해 시적 정황을 알 수 있다. 유난히 영특하고 자질이 빼어났던 손주의 죽음 앞에 86세의 권섭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자신을 원망하게 된다. 더구나 오래 산 탓에 손주 넷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은 권섭은 자신의 장수가 손주의 壽를 빼앗았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전구의 ‘죽지 못한 이 눈물[未死淚]’이라는 표현 속에 권섭의 애절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상에서 본 작품들은 형제와 자식 같은 혈육의 죽음을 슬퍼한 시들이었다. 이들 시편들은 하나같이 혈육을 잃은 슬픔을 느껴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토로하였는데, 그것은 진실한 마음 그 자체였다. 그래서 이들 시편에는 일체의 수사나 절묘한 시상 전개 등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감정을 그려냄으로써 더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혈육의 죽음이 아닌 경우에는 어떠했을까?
族厚家仍近 我冠君髮垂 | 친척이라 친했고 집도 가까웠는데 내 관례 할 때 자네는 소년이었지 |
初猶撫頂愛 終復比肩隨 | 처음에는 머리 쓰다듬으며 귀여워하다가 끝내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따르게 되었지 |
良驥方觀步 奇花易墮枝 | 천리마 같은 걸음을 보려 하였는데 기이한 꽃처럼 가지에서 떨어져 버렸구나. |
乃翁賢且屈 胡不保佳兒 | 자네 아버지는 어질고 겸손하였는데 어찌 착한 아들 지키지 못하였나! |
두 번째
如何三載內 哭弟又悲兄 | 어떠하겠나, 삼년 동안 동생을 곡하고 또 형을 슬퍼함이 |
詞翰大家子 銘旌太學生 | 문장에 뛰어난 명문의 자제가 태학의 학생으로 죽었다네 |
人應無夭相 天豈惜才名 | 사람은 본디 요절할 상이 없건마는 하늘은 어찌 재주와 명성을 아끼는가 |
舊贈華牋在 呑聲寫苦情 | 예전에 주었던 꽃무늬 종이 남아 있으니 울음을 삼키고 슬픈 심정을 쓴다. |
「심옥을 애도하며[悼沈鈺]」, 朴泰觀, 『凝齋遺稿』卷上
이 시는 박태관이 요절한 친척 심옥(沈鈺)의 죽음을 애도한 시이다. 이 시 뒤에는 『응재유고(凝齋遺稿)』를 초선(初選)했던 김창흡의 평이 붙어있다. 김창흡은 “글자마다 느꺼워 눈물을 흘리게 하니, 두 편이 모두 그러하다. 고금의 만시 중에 이러한 작품은 손꼽을 정도이다[字字情淚, 兩篇皆然, 古今挽詩中如此作, 指不多屈].”라고 하였다. 대단한 고평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김창흡을 감동시켰는지 살펴보자.
애도의 대상은 세상에 재능을 막 펴려다 요절하고만 인물이라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더구나 박태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친척이었다. 그래서 박태관은 심옥을 애도하면서 어린 시절의 모습과 성장해서의 모습을 그렸다. 처음에는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던 아이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장성하였다.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행간에는 심옥이 성장하면서 함께 했던 추억들을 반추하는 작가의 심정이 담겨있다. 그런 친밀함이 있었기에 작가는 그의 재능도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수의 경련은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요절하고만 고인에 대한 상실감이 잘 드러나 있다. 첫 번째 수의 백미는 미련이다. 내용은 하늘을 원망하는 일반적인 것이지만 여느 만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표현이다. 자네 아버지처럼 어진 사람도 자식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며 탄식하였는데, 이를 통해 박태관은 심옥을 애도하는 동시에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까지 담아냈다. 언급된 인물들의 관계, 사람됨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김창흡에게 박태관의 애도시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상화된 모습들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김창흡은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한 것이다. 두 번째 수 또한 가문의 연이은 상사(喪事)를 언급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고 고인의 요절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리고 미련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주었던 화전지에 애도시를 쓰는 작가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슬픔을 극대화하였다. 함께 시교를 나누자고 선물했을 화전지가 작가의 슬픔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구체적 소재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고인의 인품을 그리며 슬픔을 표현하는 만시 일반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생전 고인과의 친분을 구체적 모습과 소재를 통해 그려냄으로써 범상한 만시가 줄 수 없는 감동을 줄 수 있었다.
백악시단이 요절한 인물을 애도한 시들은 요절이 주는 안타까움 때문에 대체로 감성적 슬픔이 지배적 정조를 이룬다. 그러나 일정한 수(壽)를 누리다 고인이 된 경우에는 고인의 사람됨을 우선적으로 기리는 만시 일반의 전통을 따른다. 그러나 이들의 만시는 예의(禮義) 차원의 형식적 만시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병연의 만시를 살펴보자.
첫 번째
君得李一源 我得張弼文 | 그대는 이일원(李一源)을 얻고 나는 장필문(張弼文)을 얻었지. |
相得而相失 于玆三紀云 | 서로 얻고 서로 잃은 지 지금껏 삼십 육년 되었지. |
네 번째
詩成何所寄 顔面不復論 | 이제 시 지으면 어디로 부치지? 다시는 얼굴 보며 말을 할 수 없게 됐네. |
地下張弼文 地上李一源 | 장필문(張弼文)은 지하에 이일원(李一源)은 지상에 있으니. |
다섯 번째
載大之文學 道長之詩學 | 재대(載大)의 문장 도장(道長)의 시 |
呼汝參其間 弼文之字學 | 그대 불러 그 사이에 참여시키면 필문(弼文)의 자학(字學). |
일곱 번째
昔嘯蓬萊頂 鞭鵉君不慵 | 지난 날 봉래산 정상에서 읊었는데 그대는 난새 타고 채찍질을 게을리 않았지. |
海雲擎富士 嗟我未之從 | 바닷가 구름 위로 우뚝 솟은 부사산은 아! 나는 미처 따라가지 못한 곳. |
아홉 번째
冥漠焉知悲 朋親爲痛楚 | 저승에서 어찌 슬픔을 알리! 벗은 이렇게 아프고 쓰린데. |
堂上九十親 室中二十女 | 집에는 구십 세의 노친 방에는 스무 살의 딸. |
「장응두(張應斗)를 애도하는 만시[張弼文輓]」,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이병연의 이 시는 모두 10수로 되어있다. 이 시에서 우선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언절구 연작시라는 점이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오언절구로 지어진 만시는 편수가 많지 않은데 백악시단이 활동했던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면 연작 오언절구 만시들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고 한다【장유승, 「17세기 고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2, 72~73면 참조.】. 실제로 백악시단의 경우 위의 시를 비롯하여 김창흡의 「애족손건행(哀族孫健行)」 10수, 『삼연집(三淵集)』 권7, 「박사빈만(朴士賓挽)」 11수, 『삼연집(三淵集)』 권16, 홍세태의 「조교관녀만(趙敎官女挽)」 9수, 『유하집(柳下集)』 권14, 「박사빈만(朴士賓挽)」 4수, 『유하집(柳下集)』 권7, 김시민의 「박사빈만(朴士賓挽)」 11수, 『동포집(東圃集)』 권2, 「삼연선생만(三淵先生挽)」 4수, 『동포집(東圃集)』 권3 등 다수의 연작 만시들이 존재한다. 위의 작품은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만시를 창작하면서 왜 연작의 방식을 애호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전대 만시의 경우, 애도의 분량이 많을 경우 주로 애용했던 것은 장편 고시였다. 그런데 이병연은 가장 짧은 시형인 오언절구를 10수 연작하는 방식으로 고인을 애도하였다. 인용된 첫 번째 수는 서장의 성격으로 고인과의 우정이 오래되었음을 말하였고, 네 번째 수는 고인의 시재와 고인의 부재로 인한 슬픔을, 다섯 번째 수는 고인의 장처였던 자학(字學)을, 일곱 번째 수는 고인의 통신사행을, 아홉 번째 수는 유족을 보는 작가의 슬픔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각 수의 주제를 추려보면 이병연이 연작의 방식을 선택한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고인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기에 가장 용이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만시의 목적을 애도 대상인 고인의 생애를 기리는 데 두었기 때문에 그런 목적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형식을 택한 것이다. 또한 고인에 대한 기림을 최우선적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이병연은 자신의 비감을 누르고 일체의 수사를 배제한 채 사실에 입각하여 고인의 삶을 조명하였다. 장편의 만시가 작가의 슬픔 표출이 강하게 드러나는 주정적 성격을 보인다면, 이병연의 위 시는 작가의 감정이 극도로 제한된 이지적 면모가 강하다.
이 시에서 발견되는 또 한 가지 특징은 ‘이일원(李一源)’, ‘장필문(張弼文)’과 같은 인명이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병연이 자신과 망우의 이름을 빈번하게 교차시켜 구사한 것은 슬픔을 형용하는 시어를 통해 비애감을 드러내기 보다는 한 인간의 총체성을 담고 있는 이름을 가져다 두 사람의 깊은 사귐을 직접적이고 압축적으로 드려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작품에는 관습적 눈물이나 과잉된 비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작가가 눈물을 참고 있어서 더 큰 슬픔을 느끼게 한다. 특히 아홉 번째 수에서 여전히 고인의 보살핌이 필요한 노친과 어린 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속에는 언표 되지 않은 눈물이 맺혀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과잉된 비감 표출을 배제하고 고인의 삶을 담담한 듯 형상화하면서도 작품 전체를 읽다보면 고인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하는 작가의 진정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이병연의 높은 시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편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 시는 망우(亡友)와의 깊고도 진실한 사귐을 토대로 자기의 주관적 비애보다는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는 데 치중한 작품으로, 작품 표면에서 관습적 눈물을 거두고 단형시의 연작 방식을 통해 고인의 특징적 면모를 다각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만시의 의례성과 상투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풍의 만시를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이병연이 새롭게 개척한 만시는 후대 문인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인용된 이병연의 「장필문만(張弼文輓)」은 만시로는 특이한 오언절구 10수 연작시 형식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 감상적 비감을 배제한 채 고인의 특징적 면모를 다면적으로 부각하는 점, 그래서 만시의 의례성과 상투성을 참신하게 극복했다는 점 등에서 18세기 중후반 첨신한 시풍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용휴(1708~1782)의 「이우상만(李虞裳挽)」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이병연은 정치적으로는 노론이었지만 남인 문사들과의 교유가 일정하게 확인된다. 권만(權萬, 1688~1749)은 삼척부사였던 이병연을 찾아 함께 시교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이며(『江左集』 권2 「次陟伯李一源秉淵韻」) 5장에서 후술한 김이만(金履萬) 또한 이병연을 대시인으로 추앙하였다. 이병연의 만시가 이용휴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대 이병연의 시명과 남인 문사들과의 교유를 감안하면 이용휴가 남인 선배문인들을 통해 이병연의 작품을 보았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고찰이 요구된다.】.
이상에서 보았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지친(至親)이나 벗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편들은 기본적으로 망자와의 진실한 관계, 대상에 대한 깊은 인간애를 토대로 하고 있다. 이러한 진실한 인간애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이들의 만시는 의례적 만시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백악시단의 만시가 주는 감동은 바로 진실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소중함을 깊이 있게 인식하였다. 그런 까닭에 백악시단의 시편들 가운데는 가족들, 벗들과의 돈독한 사랑과 우정을 진솔하게 그린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먼저 돈독한 가족애를 진솔하게 그린 작품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此老從今至樂存 | “이 늙은이 이제부턴 지극한 즐거움만 남았구려.” |
回頭爲向室人言 | 고개 돌려 아내에게 말을 건넸네. |
家無甔石休愁歎 | 집안에 양식 없어도 시름겨운 한숨소리 그치게 된 건 |
膝右男孫左女孫 | 오른 무릎엔 손자가, 왼 무릎엔 손녀가 있어서라네. |
「늦게 본 손주들이 행주로부터 왔기에 앞의 운자를 써서 짓다[晩孫自幸州來用前韻]」, 金時敏, 『東圃集』 권4
詩書生活復琴樽 | 시서(詩書)로 사시면서 거문고와 술잔을 또 두어 |
一二親朋唱和言 | 두어 명 친한 벗과 수창하고 담론하시네. |
老境他無人事擾 | 노경에 별다른 인사(人事)의 동요 없으니 |
閒居是亦聖朝恩 | 한가로이 거처함도 성조의 은혜로다. |
春風洞外時騎馬 | 봄바람 불면 골짜기 밖으로 때로 말에 오르시고 |
雨雪墻東久閉門 | 눈비 내리면 담장 동쪽 오래도록 문을 닫으셨지. |
龜縮過冬還有味 | 거북처럼 움츠린 채 겨울 나면서도 특별한 맛이 있으신 게지 |
夜從燈下弄孩孫 | 밤 되면 등불 아래 어린 손자들의 재롱 받겠지. |
「사천의 운자를 따라 짓다[次韻槎川]」, 金時敏, 『東圃集』 권6
김시민의 작품 두 수를 보였다. 첫 번째 시는 노년의 삶 가운데 맞은 소소한 행복을 읊고 있다. 노년의 김시민에게 이런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은 느지막이 본 손주들의 방문이었다. 양 무릎에 손자 손녀를 앉히고서 곁에 있는 늙은 아내와 흐뭇하게 웃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구나 겪는 일상적인 장면이지만 시인은 이것을 의미 있다고 여겨 시적 형상화를 하였다. 김시민은 이러한 장면을 형상화하면서 특별한 수사나 기교를 동원하지 않았다. 대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질박하게 그려냄으로써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심미적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두 번째 시는 노년의 이병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시서와 거문고, 그리고 술. 늙은 이병연의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들이다. 무엇 하나 걸릴 것 없는 순조로운 노년의 삶. 그런데 한참 동안 소식이 없다. 이 시의 묘미는 미련에 있다. 김시민은 이병연으로부터 시 짓자는 소식이 통 없자 시와 술과 벗보다 좋은 게 있을 것이라 상상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 손자들의 재롱을 받는 것이었다.
두 편의 시 모두 일상의 소소한 장면에 의미를 부여한 작품들이다. 시 속에 그려진 김시민과 이병연은 친근하고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이다. 독자는 이 다감한 모습에 의해 시를 읽는 동안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가식 없는 진정(眞情)이 불러온 잔잔한 울림이라 할 수 있다.
不有田家雨 行人得久淹 | 농가에 비가 내리지 않았던들 갈 사람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었겠나. |
喜逢子孫醉 睡過卯時甘 | 자식 만나서 기뻐 취하고 묘시가 넘도록 달게 잤더니 |
川漾萍棲埭 風廻花撲簾 | 냇물 불어 개구리밥 보에까지 붙고 바람 불어 꽃잎은 주렴을 치는구나. |
吾詩殊未就 莫謾整歸驂 | 내 시가 아직 안 되었다 자꾸만 타고 갈 말 챙기지 말렴. |
「빗속에 큰 딸아이 가는 길을 만류하며[雨中挽長女行]」, 金時保, 『茅洲集』 권8
風急天將黑 山寒路自斜 | 바람 거세고 날도 어둑해지려는데 산은 춥고 길은 자꾸만 오르막이라. |
來時愁雪片 歸日對梅花 | 올 적엔 눈송이를 걱정했는데 돌아가면 매화를 마주하겠네. |
臘盡還爲客 年衰漸戀家 | 섣달이 다 되도록 아직도 나그네 신세인데 나이가 들어가니 점점 집 생각이 간절하네. |
遙憐少兒子 新學喚爺爺 | 저 멀리서 어여쁜 우리 꼬맹이 새로 배워 ‘아빠 아빠’ 불러대겠지. |
「집 생각[思家]」, 李夏坤, 『頭陀草』책8
첫 번째 시는 김시보의 작품이다. 비가 내렸다. 이 비는 김시보에겐 참 반가운 비다. 비가 내리는 통에 떠나려던 딸자식이 좀 더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뜻밖의 비로 딸을 더 볼 수 있게 된 김시보는 기쁜 마음에 술도 취할 만큼 마시고 늦도록 잠도 잤다. 그랬더니 비가 상당히 내려 보에 물이 가득 차고 바람도 거세져 꽃잎이 주렴을 친다. 그러자 딸아이는 가겠다고 서두른다. 아마도 챙겨야할 본댁 식구들 생각이 앞섰나보다. 그러나 김시보는 자꾸만 붙잡는다. 시가 아직 안 되었다며. 기실 김시보는 시를 못 짓는 것이 아니라 안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두고 보고 싶은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진솔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두 번째 시는 이하곤의 작품이다. 시의 내용을 볼 때 작가는 먼 길을 나섰던 듯하다. 이하곤은 수련에서 궂은 날씨와 험난한 여정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현재 상황을 대신하였다. 그런데 시인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계절이 바뀌도록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시인은 경련에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였다. 나이가 드니 오랜 출타에 집 생각이 간절해진다고. 그리고 미련에서는 어린 자식의 모습을 상상하였다. 집을 생각하면서 어린 아이를 먼저 떠올린 것 역시 이하곤의 진실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 아이는 지금쯤이면 아빠란 말을 배워서 내가 가면 ‘아빠 아빠’ 불러줄 텐데, 길은 아직도 멀다. 자식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험난한 여정을 달래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고도 진솔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다음은 이병연의 시이다.
不多蘭玉尙孫行 | “자식이 많진 않지만 그래도 손자는 행실이 있고 |
麤有官啣郞郡章 | 볼품없는 벼슬이지만 남편은 수령 인장 차고 있으니 |
把此足成今日醉 | 이것이면 족히 오늘 한번 취할 만하지 않겠소?“ |
一盃聊勸老糟糠 | 곡진하게 한 잔 술을 늙은 조강지처에게 권해보네. |
「집사람의 생일날 장난삼아 짓다[室人生朝戱賦]」, 李秉淵, 『槎川詩抄』卷下
官栢蒼蒼裏 伊誰上任新 | 관가의 잣나무 짙푸른 속에 저 누가 새로이 부임 하였나? |
吾家小娘子 今日縣夫人 | 우리 집 어린 낭자가 오늘은 현감부인(縣監夫人) 되었구나. |
兒女携來飽 屛筵左右陳 | 아녀자들 데리고 와 음식을 준비하고 좌우엔 병풍과 자리 펼쳐 두었네. |
見余言欵欵 多及昔年貧 | 나를 보며 곡진하게 말을 하는데 자주 지난날의 가난함을 언급하네. |
「누이동생을 만나[見舍妹]」,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첫 번째 시는 이병연이 삼척부사로 재임할 당시 지은 시이다【이병연이 삼척부사로 부임한 것은 1732년, 그의 나이 62세 때였다. 이병연은 65세 되던 1735년까지 삼척부사로 재임했는데, 아마도 이 시는 삼척부사로 재임할 당시 이병연보다 4살 어렸던 아내 조씨 부인의 회갑일에 지은 시로 보인다.】. 「집사람의 생일날 장난삼아 짓다」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제목에 붙인 ‘戱’자에는 수줍어하면서도 늙은 아내를 위해 시를 바치는 노시인의 다정다감함이 묻어있다. 시의 내용도 그러하다. 이병연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은 일찍이 청상(靑孀)이 되었고【이병연의 사위는 광산인(光山人) 김상덕(金相德)이었다. 김상덕은 영조 말년 14년간이나 정승을 지내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김상복(金相福)과 ‘직하체(稷下體)’로 이름을 날린 김상숙(金相肅)의 맏형이다. 안중관의 「서한산이공일원곡망서문후(書韓山李公一源哭亡婿文後)」, 『회와집(悔窩集)』 권4에 의하면 이병연은 김상덕의 재주를 아껴 배천군수 시절, 배천 관아에서 함께 강학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친손자가 하나 있었으나 1729년 세상을 떠나 아우 이병성의 맏손자 이현영(李顯永)을 양손으로 들였다. 자손들이 많았더라면 잔치자리가 북적대며 더욱 흥성해졌을 것이나 시 속 잔치자리는 대단히 조촐하다. 시의 첫 구는 이병의 가계를 염두에 두면 처연해지기까지 한다. 많은 자손들이 늘어서서 하례의 인사를 올리고, 수복(壽福)의 술잔을 올렸다면야 더없이 흥겨운 자리였겠지만, 그렇지 못한 까닭에 시인은 아내를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넨 뒤, ‘오늘은 좋은 날이니 슬픔은 다 잊고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하며 시상을 마무리하였다. 늙은 아내를 다독이는 늙은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두 번째 시는 누이동생을 만났던 일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수련부터 경련까지의 내용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어렸을 적 가난하게 자란 여동생이 오늘 현감부인이 되었다. 동생은 초대한 손님 대접하느라 분주하다. 음식도 차리고 자리도 마련하고. 이런 모습을 보는 작가의 마음은 참으로 흐뭇하고 대견했을 것이다. 이병연의 마음을 이렇게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은 미련 때문이다. 이 시의 백미는 미련이다. 여동생이 오빠를 보며 곡진히 하는 말, “오라버니, 그 땐 참 배고팠지요.”라는 말로 인해 앞의 시구들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동생의 진솔한 말 한마디가 시 한 편을 만든 셈인데, 이는 이병연의 시재이기도 하지만, 이런 소소한 말 한 마디를 참되다고 여길 줄 아는 이병연의 사람됨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돈독한 가족애를 형상화한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시편들이 ‘진시’일 수 있는 것은 김창협의 말대로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각 시편을 통해 작가들의 다정하고 따뜻한 인간상을 만날 수 있는데, 이는 관계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으로 거기서 발현된 감정을 진솔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사실 손주들의 방문, 딸아이의 친정 방문, 아내의 생일 등등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심상한 장면으로 쉽게 간과할 수도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상한 일들이 잔잔한 감동을 주는 따뜻한 시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의미 있게 볼 줄 알았던, 다시 말하면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던 그들의 진정어린 마음 때문이었다.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는 벗들과의 사귐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우정을 매개로 형상화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웃음을 형상화한 시편들이다. 웃음이란 감정 상태는 종래의 한시가 선호하던 미감이 아니었다. 설사 웃음이 묻어나는 형상화가 이루어졌더라도 그것은 대개 상대를 풍자하거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공격적이고 모난 감정이었다. 그러나 백악시단의 문인들, 특히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벗들과의 깊은 우정을 드러내는 데 이 웃음이란 감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들이 활용한 웃음은 상대를 배려하고 따뜻하게 끌어안는 온유(溫柔)한 감정으로 승화된 것이었다. 이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의 ‘사귐[友道]’에 대한 인식을 살필 필요가 있다.
마음은 하나의 리(理)이다. 사람은 모두 이 리(理)를 얻어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 어린 아이도 부모를 사랑하며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저 사물의 선악과 일의 시비에 대한 경중, 장단에 이르기까지 만수(萬殊)의 저울로 삼으니, 같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모두 같게 된다. 애초부터 귀천의 차이가 없으며, 중화(中華)라고 유독 밝혀지고, 이적(夷狄)이라고 유독 가려지지 않으며, 천만 리 먼 거리와 수천 명의 무리들이 같지 않음이 없다. …(中略)…
아! 지금 사람들이 그 마음을 쓰는 것 또한 비루하다. 수십 년 이래로 여항의 사대부들이 서로 보며 마음으로 삼은 것은 오직 과거에서 요행이 합격의 영광을 누리거나 벼슬아치가 되어 이익을 쟁탈하는 것에 급급할 따름이다. 이미 염치(廉恥)와 명검(名檢)이 땅을 쓸어버린 듯 사라졌어도 뻔뻔하게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다시는 조석으로 실천해야 할 이치에 대해 서로 난숙하게 강론하고 정밀하게 확정하여 고유(固有)한 상덕(常德)에 합치되도록 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안동(安東) 권조원(權調元, 權燮]과 오천(烏川) 정재문(鄭載文, 鄭龍河)라는 두 선비가 있다. 조원의 부친은 간신(諫臣)으로서 앞선 조정에서 현달하였고, 재문의 선조는 세상에서 송강 상국이라고 부르는 분이다. 두 군자는 오히려 그 고고하고 과합(寡合)한 자질이 비슷하고 또 모두 선생과 장자의 가문에서 나와서 세속의 병폐와 우도(友道)의 더러워짐을 깊이 알았다. 각자 이향(異鄕)에 살아서 열여섯이 되도록 서로 보지 못했고 서로 보지 못한 즉 두 사람 다 타인과는 계합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 서로를 얻게 되어서는 하루라도 서로 버릴 수 없다면서 경사에서 종유하고 또 마을에서 만나며 일상의 허다한 일들을 함께 하였다. 무릇 사친(事親)하고 봉양(奉養)하는 도리와 처신하고 남을 대하는 방법과 사위(事爲), 수응(酬應)의 작은 것과 어묵(語嘿), 동정(動靜)의 은미한 것에 이르기까지 가족이나 형제도 미칠 수 없는 것을 두 군자는 서로 미쳤다. 혹 떨어지게 되어 즉시 알리지 못하게 되면 그 둘은 반드시 “내 벗을 기다릴 따름이다”라고 하고 또 반드시 “내 벗의 마음도 반드시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훗날 서로 그 일을 알리면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요컨대 그들이 귀숙한 것은 고유(固有)한 상덕(常德)에 합치되기를 힘쓰는 것이었지 비루하게 과거나 벼슬을 쫓는 것이 아니었다.
또 그렇게 17년이 지나 재문이 죽었고, 재문이 죽자 조원은 또 처음처럼 벗이 없는 듯하였다. 의심나는 일이 있고 막히는 일이 있으면 전에 재문에게 물어본 것처럼 남에게 한번 물어봐도 그 마음에 합당한 바가 없었다. 그래서 평상시 묵묵히 생각하다 스스로 얻지 못하면 말을 타고 성문을 나갔다 쓸쓸하게 돌아오곤 하였고 이따금 재문의 남은 문장을 꺼내 읽다 통곡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서로 왕복하며 수응(酬應), 화답(和答)한 것들을 하나로 묶고는 ‘이인동심편(二人同心編)’이라 제목을 붙였다. 그 뜻은 대개 재문이 죽어 다시 재문은 없지만 이 마음의 밝음을 함께하는 것은 지상에는 조원이, 지하에는 재문뿐이라는 것이다.
心卽一理也. 人莫不得此理而爲心, 故孩提之童知愛親而敬長, 至夫輕重、長短於物之善惡、事之是非, 以爲萬殊之權度者不期同而皆同, 初無尊卑貴賤之別, 而不獨明於中華, 不獨蔽於夷狄, 千萬里之遠、千百人之衆無所往而不同也. …中略… 嗚呼! 今人之用其心亦卑矣. 自數十年來, 閭巷士大夫相視而爲心者, 唯汲汲乎科擧僥倖之榮、仕宦傾奪之利, 而已廉恥名檢蕩
然掃地, 恬不爲恠, 無復相熟講精確於朝夕蹈踐之理, 以合其固有之常德也. 有二士, 曰安東權調元、烏川鄭載文. 調元大父以諫臣顯先朝, 直聲聳士林, 載文先祖又世所稱松江相國也. 二子者尙類其孤介寡合之資, 而又皆出於先生長者之門, 深知世俗之病而友道之汚也. 各處異鄕, 共生十六年而不相見, 不相見則兩無所合於人. 旣而相得, 謂不可一日相捨, 旣從於京師, 又聚於里閈, 起居飮食之與同. 凡事親奉養之道、處己待人之方、事爲酬應之纖、語嘿動靜之微, 所不及於家人兄弟, 而二子交相及焉. 或會睽異, 未卽使知, 其必曰‘待我友而已’, 又必曰‘我友之心必若此’, 及後相告, 未嘗不然. 要其歸則務合乎其所固有之常德, 而不卑卑爲科擧仕宦之趨也. 盖又十七年而載文死, 載文死而調元又如其始之無友矣. 事之有疑也, 行之有窒也, 試以曾叩於載文者而叩於人, 無所當於其心. 平居黙黙不自得, 騎馬出門悒悒以歸, 時或出載文遺文章, 讀而哭之, 遂裹其相與往復酬答爲一集, 題曰二人同心編. 其意盖曰載文死而更無載文, 共此心之耿耿者, 地上而調元, 地下而載文而已也. -權燮, 『玉所稿』 「筆札錄·1」「書二人同心編」[李秉淵]
이 글은 이병연이 39세 되던 1709년에 쓴 글이다. 이 시점은 권섭을 비롯한 후기 백악시단의 심봉의, 김상리 등이 10년 동안의 시 학습을 통해 깊은 사귐을 이어가던 때였다【小只讀唐音五七言·李杜五七言而已, 又略看東方詩集而已. 與李一源·李子平·沈聖韶·金莘 老, 十年酬唱, 而隨興湧寫而已. -權燮, 『玉所集』 권1 「詩自序」】. 권섭은 이 해에 망우(亡友) 정룡하(鄭龍河)와 주고받은 시문들을 정리하여【『이인동심편(二人同心編)』에 실린 시문들은 의리의 득실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은 것, 의문이 나면 서로 질정하던 것, 산수 유람과 향후의 계획 등등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調元一日, 收得故紙中與載文往還文字, 爲一册子, 持示於余. 其書雖不甚多, 而多論義理得失, 遇事而輒叩質之, 有過差而相䂓誡之, 以至山水之觀、棲息之計, 父兄家人之所未及言者, 必披寫無餘, 情悃藹然. -李秉成, 『順菴集』 권5 「題二人同心篇後」”】 단촐하나마 『이인동심편(二人同心編)』이란 책으로 묶고, 이병연에게 그 서문을 부탁하였다. 정용하의 졸년이 1702년이니 『이인동심편(二人同心編)』은 8년 뒤에 책으로 묶인 것이다. 이병연은 이처럼 10년 가까운 세월에도 정용하를 잊지 못하는 권섭을 위해 두 사람의 우도(友道)가 얼마나 깊고 진실한 것인지를 밝히는 글을 써주었다.
이병연은 우도(友道)에 대한 입론을 마음[心]과 리(理)의 관계로부터 시작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천리(天理)의 소재처로서 천리의 주관을 받기 때문에 인륜은 물론 선악과 시비에 대한 지각이 가능하다면서 귀천과 화이를 가리지 않는 천리(天理)의 공평무사함에 대해 말하였다. 우도(友道)의 대전제로 天理와 마음을 논한 것이다. 생략한 부분에서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포초(鮑焦)와 화각(華角),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등 마음을 함께 나누었던 역대의 인물들을 예시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사람들이 용심(用心)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개진하였다. 이병연은 천리(天理)의 마음을 한낱 개인적인 영예나 이익을 구하는데 쓰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속사(俗士)와는 달랐던 권섭과 정용하의 사귐을 부각하였다. 권섭과 정용하의 사귐은 고유(固有)의 상덕(常德)을 추구한 것이었지 과거나 벼슬 등의 현실적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둘은 사친봉양(事親奉養)의 도리에서부터 어묵동정(語嘿動靜)의 은미한 것까지 마음을 함께 하였고, 그 결과 두 사람이지만 한 사람의 마음과 같은 상합(相合)을 이룰 수 있었다.
우도(友道)에 대한 각별한 의미부여는 백악시단의 문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김창흡은 사도(師道)와 우도(友道)가 사라진 시대를 말세라 개탄하면서 인(仁)을 구하는 사귐을 강조하였고【末世都無師友眞, 何曾授受在求仁. 仲尼顔子知何樂, 弄月吟風自有人. -金昌翕, 『三淵集』 권14 「葛驛雜詠」 27수】, 진정한 사귐은 사라지고 시정의 사귐만 남은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으며【詩亡谷風, 友道久圮. 及今衰末, 市交而已. -金昌翕, 『三淵集』 권32 「祭李子東文」】, 시정의 사귐을 대신하여 정주(程朱)의 학문하는 관계를 그 모범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無友無師此道孤, 從誰磋切躡程朱. 洪溟巨嶽吾函丈, 老矣今將負勝區. -金昌翕, 『三淵集』 권14 「葛驛雜詠」 102수】. 안중관 또한 “무릇 붕우의 도리는 진실로 하늘이 펼친 상도(常道)에서 나오는 것으로, 대개 서로 더불어 인(仁)을 도와주고, 과오를 물리치도록 하여 각기 그 덕을 이루도록 해주는 것이다[夫朋友之爲道, 固自於天叙之常, 而盖相與輔仁而攻過, 以成其德者也. -安重觀, 『悔窩集』 권7 「求友說」].”라며 사귐을 통한 보인(輔仁)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벗과의 사귐을 동심(同心), 회심(會心)의 동지적 측면과 보인(輔仁)의 학문적, 수양적 측면에서【이상주, 『담헌 이하곤 문학의 연구』, 이화문화출판사, 2003, 332~333면 참조.】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웃음을 형상화한 시편들은 바로 이와 같은 각별한 사귐에 기초해 있다.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벗에 대한 깊은 신뢰 위에 웃음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들은 벗 사이의 넉넉한 웃음을 하나의 풍류로 인식하였다. 이병연은 송준길(宋浚吉)을 전송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한 이단하(李端夏)가 김수항(金壽恒)의 자(字)를 부르려 하자, 김수항 또한 취하여 “공께서 능히 나의 자를 부를 수는 있지만 형양의 포구에 기러기 소리가 끊겨야만 가할 것이오.”라고 재치 있게 응수하여 송준길을 비롯한 사람들이 함께 웃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그 당시엔 사림의 기상이 볼 만하였는데 지금은 그 같은 기상을 다시 얻을 수 없다.”고 술회하였다【又言: ‘同春老爺嘗南還傾朝送之, 江上文谷相公已入閣, 畏齋醉後欲呼字, 文谷亦醉曰:「公能呼我字, 聲斷衡陽之浦可矣.」春爺爲之一笑.’ 其時士林氣像可觀, 而今不可復得矣. -金富賢, 『巷東稿』附錄 「巷東小傳[李秉淵]」” ‘포구에 기러기 소리가 끊긴다[聲斷衡陽之浦]’라는 표현은 절교를 의미한다. 김수항은 ‘너나들이 하는 건 좋은데 그러면 당신하곤 절교야!’라는 의미를 붙였기에 좌중을 웃길 수 있었다. 한없이 근엄할 것만 같은 노학자의 모습 대신 인간내음 나는 진솔한 모습을 소개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병연이 이러한 일화를 소개한 것은 바로 웃음이야말로 진솔하고도 깊은 사귐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웃음을 비근한 감정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풍류로 여긴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웃음기 넘치는 진솔한 사귐을 보였다. 일례만 들어보면, 권섭은 왼쪽 다리에 담이 들어 거동할 수 없다는 이병연의 편지에【詩去詩來, 此非百年吾輩耶? 聖莘殊無古意, 柰何? 憑審好好花枝間, 餘不必問. 弟痰入左脚, 今則全無運動, 海山如夢中. 兄讀和去者, 必大笑. -權燮, 『玉所稿』 「問答·2」이병연의 편지】 왼쪽 다리에 담이 들어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이가 없어 고기를 못 씹는 것에 비하면 더 낫다며【書辭簡當可喜 詩語何其太艱窘耶? 生日詩何不和來? 韶莘之無古意, 是本色. 韶則日昨有來詩矣. 弟好好花枝間, 餘不必言. 一夜凉颷洗滌, 一夏敲赩. 一源起居能適宜否? 左脚又痰入, 則一身將全動不得, 然視弟全不嚙肉, 差勝. 笑. -같은 글, 권섭의 답장】 가벼운 웃음으로 벗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웃음을 매개로 한 진솔한 사귐은 이병연이 소장했던 정선의 그림을 두고 난만하게 펼쳐졌다.
[1-1] 내가 이 첩을 살펴보니 그 용필(用筆)이 지극히 속되지 않으니 마침내 보장(寶藏)이 되기에 마땅하다. 일원이 그림을 모르는 것으로 보자면 이 첩을 갖기에 합당하지 않으나 다만 일원시(一源詩)의 절묘함은 이 그림과 짝할 만하다.
余觀此帖, 其用筆極不俗, 遂當爲寶藏. 以一源之不知畫, 不合有此帖, 特以其詩之妙, 堪配此畫耳. -申靖夏, 『恕菴集』 권12 「李一源所藏鄭生敾輞川十二景圖帖跋」
[1-2] 정보[신정하]의 발문 가운데 ‘일원이 그림을 모르면서 이 화권을 가지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한 말은 극히 절묘하다. 나와 정보는 그림을 잘 아는데도 그림을 모르는 자가 가지고 있으니 정말 어진 사람은 부유하지 않다는 말 그대로이다. 일원이 이 글을 보면 아마도 다시 포복절도할 것이다.
正甫跋中‘一源不知畫, 不合有此卷’, 一語極妙. 吾與正甫能知而不知有, 正類仁者不富也. 一源見此, 想更絶倒. -李夏坤, 『頭陀草』책12 「題李一源所藏鄭㪨元伯輞川渚啚後」
[2-1] 나는 재대[이하곤]의 ‘어진 자는 가난하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글씨와 그림에 있어 진실로 가난한 자이다. 만약 재대가 갈무리한 것처럼 했다면 어찌 일찍이 부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재대가 진천으로 물러날 때에 우마로 끄는 수레에 서화(書畵)를 실은 것이 길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이지 않았다. 도적들이 재화로 여겨 그것을 탈취할까 싶어 밤새도록 서로 지키느라 잠을 못 이루는 지경에 이르자, 집안사람들이 짜증을 내며 ‘이게 대체 무슨 물건이라고 아무 이익도 없는데 이처럼 나를 괴롭게 하는가?’하며 밥 짓는 불에 던지려 하자 재대가 고생고생 다투어 겨우 불쏘시개를 면하였으니 이 일은 성대하게 낙하(洛下)에 전해졌다. 그런데도 지금 이 화권에 대해 남몰래 얻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부자가 더욱 탐낸다는 것으로 스스로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일원이 언젠가 이 화권에 대해 애인(愛人)하는 마음을 낸다면 진실로 나처럼 가난한 자에게 주어야 하지 경솔히 재대에게 허여하여 그 부유함을 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이처럼 해야 바야흐로 어진 사람의 일이 될 것이다. 일원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정보가 다시 쓰다.
余於載大‘仁者不富’之語, 不覺捧腹. 余於書畫, 固貧儉者. 如載大所藏弆, 何嘗不富哉? 當其撤還常山也, 牛馬之輦載書畫者, 尾相續不絶於路, 盜以爲貨也, 而欲取之, 至相守連夜不得寐. 家人輩恚罵曰‘ 何物, 無益而怖我如此’, 欲投之爨火, 載大苦爭僅得免. 此事盛爲洛下所傳. 而今於斯卷, 闖然有欲得之意, 此眞富而益貪者, 不類於所自道矣. 一源它日於此卷愛衷, 固宜施與如我貧儉者, 不當輕許載大以繼其富, 如此方是仁者事. 未知一源以爲如何. 正甫又書 -이하곤, 같은 글에 붙은 신정하의 편지
[2-2] 나의 집 완위각(宛委閣)에는 다만 수십 점의 옛 그림이 있을 뿐이요, 가령 요사이 여러 사람들의 작품은 가진 것이 전혀 없으니 나의 그림 수집이 그다지 많지 않고 또한 그림을 취함에 욕심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정보는 지금 가진 그림이 많은데 더욱 탐을 내어 나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또한 일원의 애이(愛弛)함을 기대하며 어부처럼 싹쓸이 하고자 하지만 일원이 삼척동자도 아닌데 어찌 정보의 작전에 빠지겠는가? 정보는 묵은 병이 과연 도질 것이다. 하하! 재대가 다시 쓰다.
余家宛委閣, 只有數十幀古縑. 如近日諸人筆絶無存者, 可知余蓄畫無多, 且廉於取畫也. 正甫今以富而益貪啁我, 又冀一源愛弛, 欲全收漁人之. 一源非三尺童子, 焉能墮其雲霧中? 正甫則宿恙果發矣. 一笑. 載大又書 -이하곤, 같은 글
인용된 네 편의 글은 이병연이 소장했던 정선 작(作) 「망천십이경도첩(輞川十二景圖帖)」과 관련한 것들이다. [1-1]은 「망천십이경도첩(輞川十二景圖帖)」에 붙인 신정하의 발문이다. 신정하는 그림에 대한 고평을 간단히 붙인 후 그림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림을 잘 모르는 이병연보다는 그림을 잘 아는 자신이 갖은 게 더 합당하다고 했는데, 신정하의 이 발언이 사단이 되었다. [1-2]는 신정하의 발문을 보고 난 뒤에 이하곤의 쓴 발문이다. 이하곤은 신정하가 발문에서 이병연의 감식안을 언급한 부분에 대한 적극 동의를 표하고는 ‘어진 사람은 가난하다’라는 비유를 들며 자기와 신정하는 그림을 잘 아는데도 이런 명화(名畵)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하곤 역시 그림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2-1]은 신정하가 뒤이어 쓴 이하곤의 발문을 보고 다시 붙인 글이다. 신정하는 ‘어진 사람은 가난하다’는 이하곤의 말에 배를 잡고 웃었다며 동의를 표하면서도 이하곤이 진천으로 이사할 때의 모습을 재미나게 소개하며 진짜 어진[가난한] 사람은 자신이니 이병연에게 혹 누군가에게 그림을 준다면 자기에게 주어야 한다며 그림에 대한 욕심을 노골화하였다. [2-2]는 신정하의 진짜 어진 사람 논란에 이하곤이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하곤은 자신의 그림 소장이 별 것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은 그림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신정하가 그림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조롱하며 이병연이 신정하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며 다시 농담을 건넸다.
인용된 글들은 모두 이병연의 그림에 대한 욕심을 문면에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욕심이 물질에 대한 추악한 탐욕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바로 웃음 때문이다. 웃음 없이 이러한 글들을 주고받았다면 그야말로 큰 싸움으로 번졌을 것이다. 그러나 웃음을 매개하는 순간 신정하와 이하곤의 욕심은 맑은[淸] 욕심으로 변모하고 이들의 장난기 어린 탐욕은 하나의 풍류가 된다. 왜냐하면 당대 최고의 서화 감식안이었던 이하곤과 신정하가 장난스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림을 탐하면 탐할수록 이병연이 소장한 그림은 가치가 그만큼 상승하게 되기 때문이다. 신정하와 이하곤이 이런 글을 주고받은 것도 실제로 그림을 탐해서가 아니라 이병연이 소장한 그림이 그만큼 훌륭하다고 포장해주기 위한 것이다. 즉, 이병연과 각별한 우정을 맺었던 두 사람이 이처럼 장난기 가득한 농으로 자신들의 개인적 욕심을 문면에 드러낸 것은 바로 반어적 칭송의 효과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웃음을 풍류 넘치는 사귐으로 인식했던 후기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웃음이 묻어나는 시편들을 통해 사귐의 깊이를 드러내었다.
搖落山家逼歲寒 | 요락한 산집에 추위가 닥쳐와서 |
數叢盆菊半摧殘 | 몇 떨기 화분 국화 거반이 떨어졌네요. |
却將詩札煩相囑 | 장차 번거롭게 부탁하는 시찰을 물리치시려면 |
倘許親朋數日看 | 친붕이 며칠 간 보도록 허락해 주시지요? |
「일원에게 화분 국화 좀 빌려달라며[要借一源盆菊]」, 金令行, 『弼雲稿』책1
이 시는 김영행이 이병연에게 화분 국화를 빌려달라며 쓴 시이다. 시상의 전개는 매우 단출하다. 갑작스런 추위에 국화가 다 떨어져버렸으니 국화 좀 빌려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묘미는 그런 요구를 절묘하게 표현하여 웃음을 유발한다는 데 있다. 전구와 결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요구를 거부하면 계속 시찰을 보내 답장하게 만들 테니 번거롭기 싫으시면 얼른 빌려주세요. 협박 비슷하게 으른 것이지만, 원하는 대상이 국화이고, 그것을 재치 있게 표현함으로써 김영행의 국화 욕심은 웃음이 묻어나는 청한한 풍류로 거듭나게 되었다. 시를 받고 빙그레 웃었을 이병연의 모습이 함께 연상되면서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다음은 이병연의 시를 보자.
我是全癡君半癡 | 나는 완전 바보 그대는 반절 바보 |
五更呼喚句成時 | 오경에도 시를 지어 그댈 부르네. |
待君不至重尋夢 | 기다려도 오지 않아 꿈에까지 찾았건만 |
君到吟詩我不知 | 그대 와서 읊조릴 적 나는 알지 못했노라. |
「차운하여 반치옹에게 용서를 구하다[次謝半癡翁]」,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君到門時我已眠 | 그대가 문 앞에 왔을 때 나는 자고 있었는데 |
君呼我起二更天 | 그대는 이경(二更)에 나를 불러 깨우네. |
携來明月留牕外 | 데리고 온 밝은 달은 창밖에 남겨두고 |
自唱長歌坐燭前 | 스스로 긴 노래를 부르며 촛불 앞에 앉네. |
「이수초가 한밤에 찾아와서[李遂初夜訪]」, 李秉淵, 『槎川詩選批』卷下
첫 번째 시는 이태명(李台明)에게 보낸 시이다. ‘반치(半癡)’라는 호를 가졌던 이태명은 전주 이씨로 이병연의 부친인 이속(李涑)에게 수학하면서 이병연과 사귀게 되었다. 시도 잘 하고 노래도 잘 불렀던 인물로 이병성은 그의 사람됨을 ‘호상강개(豪爽慷慨)’하다 하였다【先君子嘗閒居好客, 不肖兄弟喜爲詩, 日侍傍招呼爲文會, 是以士之抱藝落拓者多歸之. 李君台明子三往來最久, 久而不懈, 及先君子之喪, 奔走勞苦, 不避風雨, 其氣義如此. 君於物無所嗜, 獨喜爲詩, 然不甚師古, 亦不肯自命作文人, 只其胸中磊塊崛峍, 詩故豪逸. 中歲自隴西鄕居, 來寓京口, 諸豪傑公子慕與之交. 君素善歌, 人或來要之, 亦不遴, 時時過我, 酒酣氣振, 誦其所爲詩, 聲調若出金石, 余輒驚之. …(中略)… 然君豈一詩人哉! 爲人豪爽慷慨, 顧嘗有馳騁四方之志, 今老矣, 世無愛才者, 如區區無力可以尉薦. -李秉成, 『順菴集』 권5 「題李子三西遊錄後」】. 이병연은 이태명의 독특한 호를 활용하여 웃음을 유발하였다. 1구에서 자기는 ‘완전 바보(全癡)’이고 이태명(李台明)은 ‘반절 바보(半癡)’라 한 뒤 그 이유를 나머지 부분에 보였다. 함께 시를 짓자고 사람을 보내 이태명(李台明)을 불렀는데 이태명(李台明)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병연(李秉淵)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고, 이태명(李台明)의 꿈까지 꾸었는데, 이병연이 쿨쿨 자는 사이에 이태명(李台明)이 찾아와 시를 읊은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는 이수초(李遂初)라는 사람이 밤에 느닷없이 찾아온 이야기를 담은 시이다. 밤중에 느닷없이 찾아와 곤히 잠든 이병연을 깨운뒤 홀로 긴 노래를 부르는 이수초의 모습은 분명 예술적 흥을 어쩌지 못하는 예술가의 광기, 그것이다.
두 시의 공통점은 예술가적 일탈을 보인 인물을 형상화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수에서 이태명이 사람까지 보냈는데도 안 오다가 이병연이 잘 때서야 찾은 것은 사람을 보냈을 적엔 시흥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태명은 갑자기 시흥이 일자 상식적 시간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쿨쿨 자는 이병연을 앞에 두고 시를 읊었다. 잠이 덜 깬 이병연은 안중에 없이 시를 읊조리며 자기의 흥취를 발산하는 이수초의 모습도 상식에 구애되지 않는 일탈적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런 예술가들 앞에 있는 이병연은 어떻게 그려졌는가? 하나는 온 줄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고, 하나는 촛불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병연은 왜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수록 벗들의 예술가적 청광(淸狂)이 더 빛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병연의 자기 형상화는 한층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그림으로써 상대방을 더욱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으로 인해 자신 또한 예술가적 일탈마저 포용하는 또 다른 예술가의 초상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예술혼을 중심으로 상식의 구속을 떨쳐낸 사귐의 깊이가 풍류 넘치게 형상화된 작품이다.
이병연이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백악시단의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김부현의 작품을 보자.
袒褐隨秋色 蕭然白髮長 | 웃통을 벗은 채 가을빛을 따라나서니 엉성한 백발이 흩날리는데 |
看雲歌且笑 行路謂余狂 | 구름 보고 노래하다 웃음 지으니 가던 사람 나를 보고 미쳤다 하네. |
「북촌 길거리에서[北村路上]」, 金富賢, 『巷東稿』
웃통을 벗고 백발을 휘날리며 하늘 보고 노래하다 배시시 웃는 모습은 작가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필경 미쳤다고 할 모습이다. 김부현의 노래와 웃음은 한편으론 예술가적 발산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여항인의 비애가 담긴 서글픈 웃음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형상화하였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독백처럼 그려진 이 시는 세상에서 소외된 자신의 처지와 시인으로서의 일흥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일종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상대방의 불우함을 웃음으로 넉넉하게 위로하는 시편도 백악시단의 문인들에게서 발견된다.
一宵淸興反爲災 | 하룻밤 청흥이 도리어 재앙이 되었으니 |
馬蹶前橋儘可咍 | 말에서 자빠져 다리 밑에 떨어진 건 우스워 죽겠구나. |
汚服先愁驕婦讁 | 옷 버리고 마나님의 꾸지람이 걱정되어 |
抱頭潛訪僻村來 | 머리를 감싸 안고 남몰래 후미진 마을로 왔구나. |
泥痕水暈猶霑袖 | 진흙 자국 번진 것은 그래도 빨면 되지만 |
石觜沙稜暗印腮 | 돌부리 모래 둔덕이 뺨에 도장을 찍었구나! |
爭似山翁沉醉後 | 그래도 낫구나! 산옹(山翁)이 술에 취해 |
接䍦欹着倒輿迴 | 모자를 거꾸로 쓰고 수레를 거꾸로 타고 온 것 보다는. |
「청류(淸流)의 모임에서 의중(毅仲)이 연거푸 다섯 잔을 기울이고는 흥을 내니 참으로 청광(淸狂)이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말이 빨리 달리자 진흙 구덩이에 빠져 옷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고 말아 앞길로는 감히 가지 못하고 몸을 숨긴 채 남몰래 돌아왔다. 내가 술을 얻어 그 일을 위로하였는데 지금 그것에 감사하는 시가 있어서 재빨리 차운하여 그것을 조롱하다[淸流之會, 毅仲連倒五盞, 發興甚淸狂. 而歸路馬逸, 墮於泥濘, 衣盡汚濕, 不敢由前路, 匿身竄歸. 余得酒慰之, 今有謝詩, 故走次嘲之].」 -李海朝, 『鳴巖集』 권2
이 시는 조유수(趙裕壽)와 있었던 사건을 재미나게 표현한 작품이다. 시적 정황은 긴 제목에 상세하다. 더러워진 옷이 부끄러워 남몰래 온 것을 부인의 꾸지람이 무서워서 그런 것으로 바꾸고, 옷이야 빨면 되지만 얼굴에 난 상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짓궂음이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리고 미련에서는 진(晉) 산간(山簡)의 일화를 이용하여 비화로 감춰져야할 일을 하나의 풍류로 전환시켰다. 산간(山簡)은 경치 좋은 곳에서 술에 흠뻑 취해 백접리(白接䍦)를 거꾸로 쓰고 말을 거꾸로 타고 오는 등 풍류 넘치는 기화(奇話)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시인은 풍류사로 인식되는 산간의 행위를 들며 조유수에게 재치 넘치는 위로를 건넸다. 인물과 시적 정황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으며, 웃음을 깊은 사귐을 드러내는 일종의 풍류로 여기는 의식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상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백악시단의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웃음이란 근엄한 사대부와 어울리지 않는 비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그 웃음을 시로 형상화하였다. 그들이 웃음을 시로 끌어들인 것은 진솔한 삶을 가식하지 않겠다는 의식의 소산이다. 그래서 이들이 웃음을 형상화한 시는 인간의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는 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백악시단이 형상화한 웃음의 성격이다. 앞서 본 작품들에서 확인하였듯, 백악시단의 웃음은 인간에 대한 배려와 온정어린 인간미, 다시 말하면 소통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들의 웃음은 대상을 희화화시켜 가면서 우월한 위치에 내려다보는 웃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신랄한 풍자를 통해 대상을 통쾌하게 파괴하는 그런 웃음도 아니다. 민중들의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웃음도 아니며 우매한 백성들을 교화하는 가르침의 웃음도 아니다. 그들의 웃음은 그간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는 이유로 소외되어 온 대상들을 따뜻하게 끌어 앉고 자신도 함께 하는 웃음이다. 바로 이 점에서 백악시단의 ‘웃기는’ 시는 주체의 진(眞)이 주체의 수양된 인격과 연결되는 백악시단의 ‘진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또한 평담(平淡)·한아(閒雅)한 일상을 추구하던 주체의 진정(眞情)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백악시단 ‘진시’의 폭을 넓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일상의 다양한 정감을 형상화한 작품들은 ‘관계’에 대한 원숙한 인식과 깊은 소통을 바탕으로 한다. ‘관계’란 자아의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이다. 로빈슨크로스처럼 무인도에서 고립되어 살아가지 않는 한 모든 현실 속 인간은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자신을 규정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관계’는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백악시단이 진정(眞情)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관계’에 대한 원숙한 통찰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관계’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관계’에서 발생하는 다단한 사건과 정감들을 사소하거나 평범하다고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관계’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관계’ 그 자체를 가식(假飾)하지 않았다. 지친의 죽음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늘 마주하기에 친소(親疎)의 감각마저도 무뎌질 수 있는 가족 간의 소소한 일들도 그들의 눈을 거치면 푸근한 사랑으로 거듭났다. 벗들과의 사귐에서도 ‘나’가 아니라 ‘너’를 중심에 두었기에 관계의 돈독함은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벗들 간에 웃음을 매개로한 시편들은 바로 이 돈독함의 정점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백악시단은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관계’ 속 타인들과의 깊은 소통을 바탕으로 사소하고 비근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일상의 장면과 정감들을 함께 울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진실한 공감의 시료(詩料)들로 재탄생시킬 수 있었다.
인용
Ⅰ. 서론
Ⅱ.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Ⅲ. 진시의 기저와 논리
1. 자득의 학문자세와 진 추구의 정신
2. 진시의 제창과 복고파·공안파의 비판적 수용
3. 성리학적 천기론의 문학적 변용
1. 형신을 통한 산수의 묘파
2. 민생에 대한 응시와 핍진한 사생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4. 소통의 깊이와 진정의 울림
Ⅴ. 진시의 시사적 의의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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