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인(同人)들의 문학 활동
백악시단의 본격적 출범을 알린 것은 낙송루시사(洛誦樓詩社)였다. 낙송루시사는 1682년에 결성되어 1689년에 해체되었는데, 그 결성과 해체 과정은 홍세태의 다음 글에 자세하다.
나는 젊은 시절에 묘헌(妙軒) 이공(李公, 李奎明)을 종유하였는데 공의 집은 북산 아래에 있어 삼연 김공의 거처와 서로 가까웠다. 그때 삼연께서 고시를 창도하여 낙송루를 열고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공은 같은 마을에서 나란히 우뚝하여 삼연과 더불어 겨루며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두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한마디로 도가 합치되는 것이 마치 돌을 물에 던져 넣는 것 같아 망형지교(忘形之交)를 허락한 까닭에 두 공 사이에서 마음껏 종유할 수 있었다. … (중략)… 당시에 우리 세 사람은 나이는 어렸지만 의기는 높아 세간의 일체의 사물에 대해서는 애호하는 바가 없고 오직 시만 좋아함이 대단히 심했는데 하루라도 만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서로 만나면 반드시 시를 남겼다. 성기(聲氣)의 소감(所感)이 김석(金石)이 번갈아 연주되듯 화락하면서도 조화로워 천지간에 어떤 즐거움이 또 이것과 바꿀 수 있을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공께서 세상을 떠났고, 또 몇 년 되지 않아 삼연께서는 깊은 골짜기로 물러나서는 다시는 나오지 않으셨다. 이로부터 시사에서 종유하던 즐거움은 마침내 끝나고 말았다.
余少時從妙軒李公遊, 公家北山之下, 與三淵金公居相近. 時三淵倡爲古詩, 開洛誦樓, 以招諸子, 而公同里並峙, 與之頡頑, 不相讓焉. 余於兩公, 卽同年生, 而一言道合, 如石投水, 許以忘形之交, 故得遨遊兩間. …(中略)… 當此之時, 吾三人年少氣高, 於世間一切事物, 無所愛好, 而唯嗜詩特甚, 無日不相見, 相見則必有詩. 聲氣所感, 金石迭奏, 融融乎渢渢乎, 不知天壤間, 復有何樂可以易此也. 曾未幾何, 而公下世矣; 又未數年, 而三淵遯居窮峽不復出矣. 自是而詩社從遊之樂遂廢. -洪世泰, 『柳下集』권10 「妙軒詩集跋」
『삼연연보』에 따르면, 김창흡이 낙송루를 지은 것은 1682년, 곧 김창흡, 이규명, 홍세태가 30세 되던 해였다. 낙송루시사를 연 목적은 고시를 창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창흡의 제자였던 유척기는 「題沛筑散響後」라는 글에 서 부친 유명악이 1682년 김창흡에게 나아가 배웠는데, 그 때 김창흡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장차 풍아(風雅)를 고취하고 한위(漢魏)의 시를 뒤쫓아 후대 시의 얕고 비루한 것을 단번에 씻어버리고 곧바로 삼백편의 뒤로 말달려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我先君 子之就學于三淵先生, 實在壬戌. 先生哭先君詩所云‘北山重澤齋, 奇哉欝詞林. 晨昏 洛誦樓, 揚扢子長書’者是也. 重澤ㆍ洛誦, 俱先生齋樓名. 是時先生之所設敎, 盖將以皷發風雅, 追蹤漢魏, 一洗後世之膚陋, 而掉鞅直造于 三百篇之後也. -兪拓基, 『知守齋集』권15 「題沛筑散響後」].’라고 하였으니 이들의 목표는 『시경』의 정신을 되살려 후대의 재주나 자랑하는 창작 풍토를 쇄신하겠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민멸(泯滅)된 시도(詩道)를 다시 진작하겠다는 것이 낙송루시사의 목적이었다. 김창흡의 초기 시에 자주 보이는 악부가행체(樂府歌行體)의 고시와 사언(四言) 시경체(詩經體) 시는 낙송루시사의 목표의식이 실천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김남기, 「삼연 김창흡의 시문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25면 참조】.
낙송루시사에는 김창흡, 이규명, 홍세태 외에 약간 후배였던 조정만, 김창업, 김시보 등이 참여하였으며 10여세의 나이차를 보이는 막내아우 김창립, 유명악, 홍유인, 홍중성, 정용하, 여항인 최동표(崔東標) 등도 함께 하였다. 이는 낙송루시사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시사의 동인이 점차 확대된 결과였다【김남기, 「洛誦樓詩社의 활동과 詩社의 의의」, 『漢文學報』 제25집, 2011, 145면 참조.】.
이들은 독서와 강론, 창작과 품평을 주된 활동으로 삼아 시사를 운영해 나갔다. 홍세태의 기록처럼, 이들은 세상 명리를 모두 잊고 오로지 시작(詩作)에만 매달렸고 지은 시를 서로 읊조릴 때면 세상 어떤 즐거움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창작에의 열정이 대단하였다. 낙송루시사는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 모여 시를 지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운영되었으나 1686년 시사의 핵심인물인 이규명이 세상을 떠나고 1689년 김창흡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영평(永平)에 은거하면서 활동이 종료되었다.
낙송루시사와 관련하여 주목할 모임은 중택재시사(重澤齋詩社)이다. 중택재는 김창흡의 막내 동생이었던 김창립이 세운 집으로, 김창흡의 기록에 따르면 김창립 또한 이곳에서 시사를 운영하였다고 한다. 아래 김창흡의 「김수재전(金秀才傳)」을 살펴보자.
창립은 나면서부터 영특했고 큰일을 하는데 과감하여 나이 15세에 고문에 뜻을 두자 머리를 숙이고 잠심하여 말의 발이 몇 개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형 창흡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시경』을 주면서 대아(大雅)로 인도하였는데 창립 또한 그 형이 악착같지 않음을 좋아하여 사모하며 기쁘게 본받는 것이 대단히 심했으니 저절로 형제간에 지기(知己)를 얻었다고 할 만하였다. 창흡의 집은 백악산 아래의 영경전(永慶殿) 동남쪽에 있었는데 그곳에 누각을 지어 낙송루라 이름 짓고 그 위에 올라가 책을 읽었다. 창립 또한 그 왼편에 집을 지어 마주하고는 중택재라고 이름 짓고 들어가면 연구하고 송독하며, 나오면 누각 아래에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차츰 마을 사람들을 데려다 더불어 일삼으니 비로소 마을 사람들 가운데 방탕하여 배우지 않던 자들도 그 성망(聲望)을 사모하여 다투어 모여들었고 이에 중택재가 더욱 가득하게 되었다. 창립은 이에 소리 높여 말하기를, “사람이 부질없이 죽어 문채로 세상에 드러나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요, 글을 지음에 고(古)를 본받지 않는다면 또한 이른바 글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풍아(風雅)의 원류 및 고금 시의 정(正)과 사(邪)가 다르게 된 원인에 대해 극론하고는 말하기를, “시가 시답지 못한 것이 오래되었다. 고려조의 비루함을 우리 왕조가 잉습하여 아득한 천백년 사이에 정시(正始)의 길은 막히고 말았다. 홀로 고시(古詩)가 있음을 조금 안 자는 근래에 정두경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한갓 진부한 자취에 빠져 진벌(津筏)을 넘어 언덕 위로 오르지 못하였다. 대저 시라는 것은 투철(透徹)하고 영롱(玲瓏)해야 한다. 우리들이 의당 힘써야 할 바가 생각을 정밀하게 하고 운용을 절묘하게 하는 데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듣는 자가 모두 깨우치게 되었으니 古를 따름에 신속하고 사람들을 잘 개유(開諭)함이 이와 같았다. … (중략)… 유독 좋아한 것은 그의 벗 홍유인, 유명악, 그리고 여항인 최동표 등과 더불어 시사에서 노니는 것이었는데 대단히 자적(自適)하였다.
昌立生而英特, 敢於有爲, 年十五則志于古文, 屈首浸淫, 殆不知馬之幾足. 其兄昌翕奇其志, 授以詩, 引之大雅, 昌立亦竊好其兄不齷齪, 其慕悅倣效特甚, 自以得弟兄間知己. 昌翕家白岳 山下永慶殿東南, 作樓而名之曰‘洛誦’, 登其上讀書; 昌立亦於其左, 作室而對之, 名‘重澤齋’, 入而硏誦, 出則考業於樓下. 稍引里中子, 與共事, 始里中子猖披不學者慕其聲爭麇至, 於是齋中 益充斥. 昌立乃抗言曰: ‘人而徒死, 不能文彩表章於世, 非人也; 爲文而不稟於古, 亦非所謂文也.’ 因極論風雅源流及古今雅鄭之所以別, 曰: ‘詩之不爲詩久矣. 高麗之陋, 我朝仍之, 莽莽千百年, 正始之路堙焉. 獨稍知有古者, 近鄭斗卿一人耳. 惜乎! 其徒泥陳迹, 不能超津筏而上之. 夫所謂詩, 正欲其透徹玲瓏也. 我輩之所宜勉, 其不在精思而妙運乎!’ 聞者莫不醒然, 其銳於追古而善開人如此 …中略… 獨喜與其友洪有人ㆍ兪命岳及市人崔東標等遊於詩社甚適也. -金昌翕, 『三淵集』권26 「金秀才傳」
이 글은 김창흡이 18세의 나이로 요절한 막내아우 김창립을 위해 쓴 전의 일부이다. 김창립은 김창흡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김창흡을 대단히 존모하여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김창흡을 따라 중택재시사를 열자 유명악, 홍유인, 홍중성, 정용하, 최동표 등이 시사의 동인으로 함께 했는데 이들이 김창립과 함께 낙송루시사에도 출입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중택재시사는 낙송루시사에 참여했던 나이 어린 동인들이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 강학하고 창작했던, 일종의 낙송루시사 내의 소모임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택재시사는 김창립이 이듬해인 1684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와해되었고 중택재시사의 동인들은 낙송루시사로 다시 편입되었다【김남기, 앞의 논문, 145~146면 참조.】.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중택재시사는 백악시단 초기의 시론과 시적 지향이 후배문인들에게 전파되는 데 매개 역할을 한 의의가 있다.
위 글에 인용된 김창립의 발언에는 백악시단의 시적 지향이보다 구체화 되어 있다. 김창립 또한 시도(詩道)가 막힌 현실을 비판하며 고시의 학습을 주장하였는데【홍중성은 「兪淸州君四命岳挽」 『芸窩集』 권2에서 “중택재 가운데서 시사가 열리자, 일찍이 젊은이들 함께 어울렸었지. 깊은 사귐 맺은 건 종병(宗炳), 뇌차종(雷次宗)보다 가까웠고, 걸구(傑句)의 근원은 한위(漢魏)에서 나왔지[重澤齋中詩社開, 憶曾年少共徘徊. 深交契比宗雷密, 傑句源從漢魏來.]”라며 중택재시사에서의 교유를 회억했는데, 여기서도 그들의 시가 한위(漢魏) 고시(古詩)를 전범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고시를 통해 섭취하려 한 것은 전범에 녹아있는 정신이었다. 정두경에 대한 지적은 그의 복고가 고(古)의 정신을 체득하지 못한 채 모의에 그치고 만점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서 김창립은 시가 지녀야할 바람직한 모습으로 ‘투철영롱(透徹玲瓏)’을 제시하였다. ‘투철영롱’은 송나라 엄우(嚴羽)가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성당의 시인들은 오직 흥취에 주력하여 영양(羚羊)이 뿔을 나무에 걸은 것과 같아서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절묘한 부분은 투철하고 영롱하니 근접할 수 없다. 마치 공(空) 속의 음(音), 상(相) 속의 색(色), 물속의 달, 거울 속의 상(象)과 같아 말은 다함이 있지만 뜻은 무궁하다[盛唐諸人, 惟在興趣, 羚羊掛角, 無跡可求, 故其妙處透徹玲瓏, 不可湊泊, 如空中之音ㆍ相中之色ㆍ水中之月ㆍ鏡中之象, 言有盡而意無窮. -嚴羽, 『滄浪詩話)』 「詩變」].”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영양이 뿔을 건 듯 자취를 찾을 수 없다[羚羊掛角, 無跡可求]’는 말은 작가의 흥취가 자연스럽게 시 속에 발현되어 모의와 같은 인위적 수사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요, ‘투철하고 영롱하다[透徹玲瓏]’는 말은 작품 안에 담긴 작가의 높은 정신적 정수(精髓)를 의미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창립의 발언은 전범 학습을 통해 전범에 담긴 작가의 정신적 경지를 자득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김창립의 주장은 아래 김창흡의 견해와 흡사하여 주목된다.
송나라 시대 이정(二程), 주자(朱子)의 의리와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의 문장은 모두 정미하고 지극한 데에 들어가 남은 아쉬움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독 시학(詩學)만은 적막해서 수백 년 동안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온 것은 모두 하등한 시마(詩魔)였으니 이른바 물속의 달과 거울 속의 꽃처럼 영롱하고 투철한 절묘함이 더 이상 없었다.
宋時程·朱之義理ㆍ歐·蘇之文章, 皆能入微造極, 殆無餘憾. 而獨其詩學寥寥, 數百年間入人 肝脾者皆下劣詩魔, 所謂水月鏡花玲瓏透徹之妙, 無復存者. -金昌翕, 『三淵集』 권36 「漫錄 庚子」
김창흡은 이 글에서 송나라의 도학과 문장은 지극한 수준에 도달했지만 시학만은 허술한 채로 방치되어 송시 이후로는 성당시(盛唐詩)처럼 영롱하고 투철한 절묘함이 없다고 하였다. 김창흡 또한 시학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진단하면서 엄우의 ‘영롱투철’을 절묘한 시적 경지로 원용하였는데 이 점이 김창립의 발언과 거의 같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바로 이 글이 쓰인 시점이다. 이 글은 1720년에 쓰인 것으로 김창흡의 생애를 고려하면 가장 만년에 속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김창흡이 김창립의 전을 쓴 시점은 1684년이다. 시간의 편차가 37년이나 되는데도 두 글이 주장하는 바가 거의 같다【물론 「김수재전」 속의 발언은 김창립의 것이다. 그러나 김창립이 김창흡을 스승으로 삼았던 점을 염두에 두면, 김창립의 발언은 기실 김창흡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는 허술한 시학을 제대로 궁구하여 시도를 진작하자는 의식이 김창흡의 초년에서 만년에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전기 백악시단은 시사 활동을 통해 창작의 지향점을 분명히 하며 자신들의 시론을 정비하였고, 이들의 시에 대한 원대하고 확고한 목표의식은 다른 문인들을 강하게 견인하는 힘이 되었다.
후기 백악시단의 시사 운영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홍양호(洪良浩)가 자신의 조부였던 홍중성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최창대(崔昌大), 이병연, 조유수, 홍세태 등과 시사를 결성한 사실을 언급하고【當世名流如崔昆侖昌大ㆍ李槎川秉淵ㆍ趙后溪裕壽ㆍ洪滄浪世泰爭與定交, 結爲詩社, 風流翰 墨, 照暎一世. -洪良浩, 『耳溪集』권32 「祖考郡守贈吏曹參判府君墓誌」】, 조유수의 생애를 서술하면서는 송석헌(松石軒) 송성명(宋成明)의 집에서 조유수, 홍중성, 이병연, 최주악(崔柱岳), 조하기(曹夏奇), 정선이 시사를 결성 한 사실을 언급한 바【松石軒宋公成明退居東湖, 輕舟小驢, 聯翩來往, 與芸窩公曁李槎川秉淵ㆍ崔溪西柱岳ㆍ曹橋 西夏奇ㆍ鄭謙齋敾約成詩社. -洪良浩, 『耳溪集』권30 「后溪趙公墓碣銘」】 있으나, 관련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실체를 상고할 수 없다. 다만, 이들의 시사는 낙송루시사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운영되었다기보다는 시회의 성격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아래 김영행의 시는 이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强參詩社會 深荷故人憐 | 시사의 모임에 억지로라도 참여한 건 벗의 어여삐 여기심을 후히 입어서라네. |
飯畢胡無酒 囊空愧乏錢 | 밥을 다 먹었으니 어찌 술이 없으랴만 부끄럽게도 시주머니 비었고 돈도 없구나. |
艾宜雪裡採 梅吐臘前姸 | 쑥은 눈 속에서 캐온 것일 테요 매화는 섣달 전 고운 자태 토하고 있으니 |
多少諸公詠 淋漓滿彩牋 | 여러 공들 허다한 시편 빛깔 고운 시전지에 흥건하게 채워지네. |
「11월에 사천의 집에서 쑥탕을 차렸기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짓다[復月設艾湯於槎川家, 會話同賦]」, 金令行, 『弼雲詩稿』책2
이 시는 1736년, 이병연이 66세, 김영행이 64세 되던 11월 어느 날에 지어진 작품이다. 아마 이병연이 자신의 취록헌(翠麓軒)에 벗들을 불러 모았던 듯한데, 벗을 부른 건 매화가 피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행은 자신을 불러 준 후의에 감사를 표하고 매화 아래서 시를 짓는 모습을 그렸다. 백발의 시인들이 매화시를 읊조리면 그것을 시전지에 받아 적는데 모두들 빼어난 시인들이라 붓 고를 틈이 없을 정도로 난만하다고 하였다. 김영행은 시의 첫 구에서 ‘시사(詩社)’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때의 시사는 시회와 크게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후기 백악시단은 전기 백악시단이 마련한 창작의 방향을 실제 창작을 통해 작품으로 구현해내는 데 활동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낙송루 시사처럼 목적의식이 뚜렷한 시사를 운영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부정기적이었던 시회를 통해 창작의 장을 공유하며 작품의 질적 제고를 도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회는 시사 못지않게 백악시단 문인들의 중요한 동인활동 중의 하나였다. 이들은 시회를 통해 동인으로서의 결속을 다졌는데, 아래 조정만의 시에는 그러한 자부가 나타나 있다.
西林詞客爛如雲 | 서림(西林)의 문인들 구름처럼 난만하지만 |
幽淡爲詩孰似君 | 유담(幽淡)하게 시 짓는 건 누가 그대와 같으랴? |
蘭蕙含風帶微馥 | 바람 맞은 난초 혜초 은은한 향 띠는 듯 |
芙蓉挹露吐奇芬 | 이슬 맺힌 연꽃이 기이한 향 토하는 듯 |
人言諸作皆超古 | 남들은 작품들이 모두 고금에 으뜸이라 칭찬하지만 |
我愛高才獨出羣 | 나는 높은 재주가 홀로 무리에서 우뚝한 것을 좋아했으니 |
大抵吾儕盛文會 | 대저 우리들 성대한 시회는 |
雪樓之後未曾聞 | 백설루의 시회 뒤로 일찍이 듣지 못한 것이었지. |
「가재 김대유가 죽은 뒤 시사의 대변을 만나 애도하는 글 을 다듬어 곡하지 못했고 또 무덤 앞에서 영결하지 못하였다. 이에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의 사귐과 잊을 수 없는 유상(遊賞)의 모임을 떠올리며 운자의 순서를 따라 나누어 20편의 칠언율시를 지어 길이 떠난 혼을 위로하고 또한 지기를 잃은 슬픔을 토로하노라[稼齋金大有之歿, 値時事大變, 旣未操 文而哭, 又失臨壙而訣. 玆就其交契之自幼至老ㆍ遊賞之會心難 忘者, 隨其韻序, 分占二十章長律, 用慰長逝之魂, 且洩斷絃之悲]」, 趙正萬, 『寤齋集』권2
김대유(金大有)는 김창업을 가리킨다. 김창업이 죽은 뒤에 만난 시사(時事)의 대변(大變)은 신임사화(辛壬士禍)를 가리킨다. 신임사화로 노론 사대신이 사사되는 정국의 동요 속에서 조정만은 지기의 죽음조차 영결하지 못하였다. 이에 조정만은 두 사람의 사귐을 회억하며 20편의 칠율(七律) 만시를 지어 추도하였는데, 이 시는 그 가운데 열두 번 째 수로 ‘풍계시회(楓溪詩會)’를 읊은 것이다. 청풍계가 있던 인왕산에는 구름이 변화하듯 솜씨가 빼어난 시인들이 많지만 깊고도 담박한 맛의 시를 쓰는 사람이 없다며 김창업의 시풍을 언급한 뒤, 김창업 시의 성취를 난혜(蘭蕙)와 부용(芙蓉)을 들어 비유적으로 밝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시적 성취만을 고평하지만 자신은 뭇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높은 재주를 아낀다고 하였다. 그리고 미련에서 조정만은 자신들의 시회가 이반룡이 중심이 되었던 백설루(白雪樓)의 시회만큼이나 성대한 것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백설루는 후칠자(後七子)【후칠자(後七子): 이반룡(李擊龍), 왕세정(王世貞), 사진(謝秦), 종신(宗臣), 양유예(梁有譽), 서중행(徐中行), 오국륜(吳國倫)】의 영수였던 이반룡(李攀龍)의 누각으로 이반룡은 이곳을 거점으로 복고운동을 펼쳐나갔다. 조정만이 청풍계의 시회를 이반룡의 백설루 시 회와 비교한 것은 자신들의 시회가 한갓 여흥이나 사교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피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이반룡이 백설루 시회를 중심으로 복고운동을 펼쳤듯 자신들도 후칠자에 버금가는 시 운동을 펼쳤다는 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청풍계시회를 통해 펼친 시 운동은 곧 ‘진시운동’을 가리킨다. 수련의 ‘유담(幽淡)’한 창작이나 함련의 은은한 향기로 비유된 작품의 성취는 곧 형식적 수사보다는 작품 속에 진실한 시적 주체의 내면을 담아야 한다는 백악 시단의 ‘진시’론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들의 시회를 일종의 유파 운동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백악시단 문인들의 작품에 보이는 열정적인 시회활동의 모습은 이들이 시회를 단순한 사교가 아니라 시풍 쇄신의 실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모인 시회 장소로 가장 애호된 곳은 김시보의 집이 있던 청풍계(淸風溪)였다. 청풍계는 본래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별업이 있던 곳으로 북쪽으로는 백악산, 서쪽으로는 인왕산이 솟아있고 사이로는 청계(淸溪)가 흐르는 도성의 명승지였다. 그런데 김상용이 이은(吏隱)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곳은 김상용의 순절 뒤로는 수려한 경관에 충절(忠節)의 이미지까지 더해진 도성의 명소가 되었다. 기사환국 등을 거치며 일시적으로 쇠락하기도 하였지만, 노론이 다시 정권을 차지하고 1682년 김시보가 청풍계를 다시 수리한 이후로, 청풍계는 백악시단 의 문사들이 왕성한 시회를 통해 ‘진시’ 창작을 실천해가는 ‘진시운동’의 근거지로 부활하였다【강혜선, 「인왕산 청풍계의 문학적 전통」, 『漢文學報』 제25집, 2011, 53~68면 참조. 청 풍계의 역사와 문학 공간으로서의 의의에 대해서는 이 논문을 참조할 것.】. 청풍계에서 이루어진 백악시단의 시회 기록은 대단히 풍부한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을 통해 당시 시회의 분위기를 가늠해보기로 한다.
一尊佳會古名亭 | 한 잔 술 좋은 모임 이름난 옛 정자에서 열리니 |
亭下百年雙檜靑 | 정자 아래엔 수백 년 된 두 그루 회나무 푸르네. |
秋色淺深紅樹岸 | 가을 빛 얕고 깊은, 붉은 나무 솟은 언덕 |
水聲高下碧苔庭 | 물소리 높고 낮은, 푸른 이끼 돋은 정원. |
霜淸苦竹元同操 | 맑은 서리와 참대는 본래부터 지조를 함께하니 |
風入踈松不厭聽 | 성긴 솔에 부는 바람 실컷 듣노라. |
珍重主人留後約 | 진중하신 주인께서 훗날 기약 남기시니 |
豈辭閑日更携甁 | 한가한 날 술병 들고 다시 올 일 마다하겠소. |
「태고정에서 김사경(金士敬) 등 여러 문인들과 함께 운자를 불러 짓다[太古亭同金士敬諸人呼韻賦之]」, 趙正萬, 『寤齋集』권1
청풍계의 맑고 빼어난 경치 속에서 조정만은 맑고 곧은 정신을 노래하였다. 수련의 두 그루 회나무는 청풍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실제의 고목이면서 충절과 지조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그 밖에도 맑은 서리, 참대, 솔바람 등의 소재들이 모두 맑고 곧은 절조의 이미지로 시적 정조를 구현하고 있는데, 이 시는 백악시단의 문인들이 시회를 단순하게 시흥(詩興)이나 푸는 모임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시회에서 시를 짓기도 하고, 서화를 감상하기도 하였다. 특히 시회에서 서화를 감상하는 것은 시회의 청흥(淸興)을 더욱 고조시키는 아취 넘치는 행위였다. 그런 데 다음 김시민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병연과 김시민이 시사를 개탄하며 조속(趙涑)의 그림을 펼쳐보고 송시열의 품평을 음미하는 모습은 이들의 서화 감상이 단순히 흥취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山月虛明, 荷花送香’, 此華陽翁題品滄老語也. 書畫夫豈足以論人? 而今見此老三絶, 其意致ㆍ韻格疎散澹蕩, 烱炯楮墨間, 亦可以得其人髣髴也. 公卽丙 子後高士, 華陽之褒, 盖亦有意. 噫! 今之世, 其可復得哉? 北報一來, 都下鼎沸. 適到槎川李兄座, 相與語, 及時事, 俯仰憂歎, 主人出示此帖. 余重爲之慨然與感, 而書于帖尾. -金時敏, 『東圃集』권7 「題槎川趙滄江三絶帖後」”】.
청풍계 외에 이들이 시회를 즐긴 장소는 백운동【金時敏, 『東圃集』권5 「白雲洞與一源ㆍ莘老諸人作會有杯盤絲竹醉中口呼」; 金令行, 『弼雲稿』권1 「白雲洞與尹伯勖ㆍ李一源會話憶主人」 등.】, 삼청동【權燮, 『玉所稿』「詩·1」「季秋月夜與聖韶ㆍ莘老ㆍ一源ㆍ子平會于三淸洞中翌日乃還唱酬得 六律用東坡韻」; 李秉成, 『順菴集』권1 「三淸洞同伯氏ㆍ調元及沈聖韶ㆍ金莘老ㆍ金聖期正 魯次樊川韻」 등.】, 경복궁【洪世泰, 『柳下集』권3 「同李一源ㆍ彝叔兄弟ㆍ金若虛遊景福宮」; 金時敏, 『東圃集』권1 「故宮與李一源ㆍ李載大夏坤ㆍ道長諸益抽老杜韻共賦」; 金時敏, 『東圃集』권2 「故宮煮艾與 一源ㆍ道長作會次道長韻」; 李夏坤, 『頭陀草』책3 「同道長ㆍ一源ㆍ金道以時佐ㆍ金士修時 敏諸人遊景福宮次杜子美韵各賦」 등.】, 옥류동【權燮, 『玉所稿』「詩·1」「玉流洞呼韻韶源ㆍ莘ㆍ平共賦」; 李秉成, 『順菴集』권1 「玉流洞 雨後次唐人韻」 등.】 등 도성 안 명승이었다. 이 장소들은 모두 자신들의 거처인 백악과 근밀했던 곳으로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도성 안 명승을 지척에서 즐길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백악 인근의 동인들의 집에서 시회를 열기도 하고, 자신들이 근무하던 서울 관아에서【權燮, 『玉所稿』「詩·1」「閏三月初吉李一源携其弟子平ㆍ我姨叔金公希魯ㆍ任君玉璟ㆍ李季 通潗ㆍ李汝五秉常ㆍ李汝受秉鼎ㆍ吳明仲晉周ㆍ金仲禮在魯ㆍ李幼久ㆍ李君賓上北營童子李秉 大ㆍ金演萬ㆍ金演昌ㆍ金福錫ㆍ老人李涵ㆍ詩吏任璜從余乘夕追往攀次諸公韻」[훈련도감]; 洪世泰, 『柳下集』권6 「太僕李主簿遣騎邀余與金莘老ㆍ安國賓ㆍ朴士賓ㆍ金士修ㆍ鄭惠卿ㆍ鄭潤卿登君子亭呼韻共賦.」[사복시의 군자정]; 洪重聖, 『芸窩集』권4 「社壇齋舍與曺雅仲趙麟 之趾彬諸人分韻共賦」[사직단] 등.】 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동인들의 활동 가운데 시회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비평 교유이다.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시회를 통해서나 아니면 시찰(詩札)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을 알리고 동인들로부터 품평을 구하였는데, 이런 비평 교유를 통해 이들은 창작의 수준을 제고하는 기회로 삼았다. 동인간의 비평 교유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예는 이해조의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에 대한 김창흡의 화운(和韻)에서 보인다. 양양부사로 나간 이해조는 양양의 명승 30곳을 정하여 각각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거론된 30경은 다음과 같다. 雪岳晴光, 漢水春波, 洛伽觀日, 天吼聞風, 義相異蹟, 觀音神像, 繼祖舊窟, 飛仙層潭, 權金殘堞, 河趙空㙜, 峴首待月, 春巖賞花, 巫山雲雨, 鹿門烟樹, 芝山靈草, 蓴池嫩莖, 太平歌管, 海廟香火, 竹島仙臼, 草湖龍耕, 祥雲松林, 大堤楊柳, 鳳頂孤塔, 沙林斷碑, 西嶺采蕨, 北津觀漁, 冷泉故居, 黔洞荒墟, 灝堂望海, 靈穴尋僧.】, 시를 지을 당시부터 김창흡과의 수창을 염두에 두었다. 그리하여 완성된 초고를 김창흡에게 보냈고 김창흡은 자신의 비평을 담은 편지와 화운시로 답하였다. 이들 시편은 각각의 문집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해조 의 문집에는 이해조의 시와 김창흡의 시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시교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먼저 이해조는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의 서론격인 글에서 명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지고 골골에 명승이 있는 양양이야말로 글로 포장되어야 할 곳인데도 단편적인 제영밖에 없다고 한 뒤, 자신이 양양의 명승 30곳을 전체적으로 제영하겠다면서 김창흡에게 매 수마다 화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시와 김창흡의 시를 한데 묶어 독립적인 감상물로 사용했다고 하였다【山水之難於兼備, 猶人才之不能通該. 雖一丘一壑一水一石, 尙難兼有而幷觀, 而况於江山之大, 而况巨海名嶽之相値而具美者乎? 我邦嶺東八景, 惟高ㆍ襄二境, 背嶽臨海. 襄之雪岳, 世稱小金剛, 而洛伽之天造神創, 望海宏豁, 又可與高城之海山亭, 爭其甲乙. 此眞山海之具美者, 而且其邑號適符於中華勝區, 峴山漢水, 雖倣古立名, 山翁叔子之風流餘韻, 顧名興懷, 想像而不可忘. 其粧點湖山, 賁飾物態者, 可謂增價百倍矣, 邑舊無誌, 樓館寺刹, 間有寂寥篇詠, 而只記一時一區之景而已, 曾無搜剔一州之勝觀著錄而表章者, 余甚惜焉. 迺攷勝覽所載, 且訪邑中 耆舊, 編爲峴山三十景, 各附短章, 略記其勝, 仍要百淵金子益和之. 噫! 永州溪山, 特是窮荒絶徼, 黃茆苦竹間, 尋常一淙崢, 而自經子厚題品, 得與名山大湖幷傳而齊美, 至今讀其記者, 不覺窅然神遊. 而今此溟岳仙區, 瓌覽異蹟, 無人發揮, 山水之亦有遇不遇者, 豈不信哉! 顧余無文, 不可謂山水遇其人, 而余之遇山水則幸矣. 姑以拙詠及和章, 揭諸屛間, 以俟後來者之因此闡發焉. -李海朝, 鳴巖集 권4 「峴山三十詠」】. 이에 김창흡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삼십영(三十詠)을 물러나 누워 느긋하게 화운하였습니다. 화운을 마친 후에 원편(原篇)과 함께 읽어보니 원편과 화운한 것의 공졸(工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원본에는 극명(極命)한 도가 경치를 따라 꾸며졌으니 (현산이) 지우를 만나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제목을 상세하게 하고 제목에 맞추어 엮은 곳이 가지런하게 견주어져 곡절하게 의미가 있으니 비로소 형의 마음이 퇴고를 등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격을 논한다면 갱장준려(鏗鏘俊麗)함은 미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또한 얕고 깊은 가운데 법도에 어긋나지 않아 더욱 귀히 여길 만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은 것은 모두 빛나지 않고 설명적인 것에 관계되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회남왕의 도통한 닭과 개요, 하나는 산동 농사꾼의 말이니 각 기 하나의 체격이 되어도 무방할 듯합니다. 성편(盛篇)에 망령되이 평점을 찍었으니 기왕에 주시고자 하신다면 또한 이 예로써 거친 시편을 점말(點抹)하려 합니다. “죽도선구(竹島僊臼)”는 사적이 기이하고 환상적인 것이라 그것으로 “초호유주(草湖游舟)”의 짝으로 삼는 것은 그다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연히 초호(草湖)를 기록한 것에 용경(龍耕)으로 점년(占年)한다는 일이 있어 그것을 취해 엮었더니 자못 공교롭고 절묘합니다. 그래서 문득 한 편을 지어 보냅니다. 노형의 뜻에도 맞는다면 고쳐서 삽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三十詠, 戱於頹卧中趁趁和了. 旣和之後, 幷原篇通讀, 則毋論彼此工拙, 在峴山原本, 極命之道逐境粧點, 不可謂不遭遇也. 且詳其題目, 對屬整比, 曲有意味, 始見兄用意推敲, 不是等 閒. 而若論詩格, 則不惟鏗鏘俊麗之難及, 而亦覺淺深得中, 不失矩度, 尤爲可貴. 弟作全未玲 瓏, 多涉言詮爲可愧. 然一則劉安雞犬, 一則山東農談, 不害爲各一體格耶. 盛篇妄有評點, 旣 欲博粲, 亦欲以此例點抹蕪篇也. ‘竹島僊臼’, 事迹奇幻, 以之配‘草湖游舟’, 太不相倫. 偶記草 湖, 有龍耕占年之事, 取爲對屬, 頗爲巧妙, 故輒作一篇以呈. 兄意相叶, 則改賦以揷入如何? -金昌翕, 『三淵集』권19 「與李子東」
삼십영(三十詠)을 거듭 읽으며 자세하게 풀어내보니 편편이 모두 가작입니다. 그러나 비평을 허용할 곳도 있으니 모름지기 얼굴을 마주하고 토론하여 생각을 다 펼쳤으면 합니다. “봉정유각(鳳頂遺刻)”을 “봉정고탑(鳳頂孤塔)”으로 고쳐야 어그러지는 오류를 면할 것 같아 아울러 맞추어 엮었습니다.
三十咏申讀細繹, 篇篇皆佳. 而猶有可容評者, 要須面討可盡意也. ‘鳳頂遺刻’, 改作‘孤塔’, 可免乖謬, 而兼叶對屬矣. -金昌翕, 『三淵集拾遺』 권16 「答李子東」
두 자료 모두 김창흡이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에 대해 비평한 편지이다. 첫 번째 편지에서 김창흡은 제목을 상세하게 하여 충분한 정보를 주는 것, 제목과 시의 긴밀함, 시격이 법도에 맞는 것 등을 들어 이해조의 원본 시를 높게 평가하였다. 그리고 나서 김창흡은 원본에 30경으로 명명한 것 가운데 ‘초호유주(草湖游舟)’를 ‘초호용경(草湖龍耕)’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김창흡의 생각에, ‘죽도선구(竹島僊臼)’ 다음의 ‘초호유주(草湖游舟)’는 너무 밋밋하여 앞의 시와 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창흡은 초호유주(草湖游舟)의 ‘유주(游舟)’ 대신 제목에 부기된 설명 가운데 나오는 ‘용경(龍耕)’이라는 말로 제목을 바꿀 것을 제안하였다. 실제로 이 해조의 문집에 실린 최종본은 김창흡의 견해를 받아들여 ‘초호용경(草湖龍耕)’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편지에도 비슷한 내용의 제안이 실려 있다. 편지 내용으로 볼 때 이해조가 애초에 붙인 제목은 ‘봉정유각(鳳頂遺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문집에는 김창흡의 견해대로 ‘봉정고탑(鳳頂孤塔)’으로 바뀌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초호용경’이라는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청초호의 용갈이(草湖龍耕)
쌍성호(雙成湖)는 일명 청초호(靑草湖)라고도 한다. 부(府)의 북서쪽 10리 간성 경계에 있는데 주위가 수십 리이다. 매번 겨울철에 물이 얼고 나면 얼음이 홀연 비늘처럼 일어나는데 북쪽 가에서 남쪽 가까지 쟁기로 판 것 같은 형상이 있으니 시골 사람들이 용갈이[龍耕]라 부르고 이것으로 풍흉을 점친다고 한다.76)
草湖龍耕: 雙成湖, 一名靑草湖, 在府北四十里杆城界, 周數十里. 每冬月合凍後, 氷忽鱗起, 自北岸至南岸, 有若犂破狀. 村人謂之龍耕, 以此占年云. -李海朝, 『鳴巖集』권4
雪裏種瑤草 知有呼龍仙 | 눈 속에 요초(瑤草)를 경작하니 용선(龍仙)을 부르는 줄 알겠네. |
長湖爲十畒 耕氷如耕烟 | 너른 호수 10무나 되는데 얼음을 간 것이 마치 안개를 갈아놓은 듯. |
霜鱗乍閃暎 雲耜何蹁躚 | 서리 비늘 언뜻언뜻 반짝이는데 구름 쟁기는 어찌 그리 너울대는지. |
自耕又自雨 何憂不豊年 | 제 스스로 갈고 제 스스로 내리는 비인데 어찌 흉년들까 걱정하는가? |
「초호(草湖)의 용갈이[草湖龍耕]」, 李海朝, 『鳴巖集』 권4
潛龍變化熟 在淵若在田 | 잠룡(潛龍)의 변화가 난숙해서 못에 있어도 밭에 있는 것 같네. |
存身有餘力 耕罷氷腹堅 | 몸을 보존하면서도 여력이 남았는지 갈기를 마쳤어도 얼음 복판 견고하네. |
犂痕隨闊狹 湖岸占來年 | 쟁기 자국 넓고 좁음에 따라 호숫가에서 내년 농사 점친다네. |
炎天又行雨 龍兮幾時眠 | 찌는 듯한 날씨엔 또 비를 내려야 하리니 용이여 어느 때나 잠들 수 있으려나? |
「김창흡의 和韻」
용갈이 풍습을 제재로 한 시이다. 용갈이는 겨울철 얼음이 깨지는 방향을 보고 한 해의 풍흉을 점치는 것을 말한다. 편지에서 확인했듯 이해조의 원 제목은 ‘초호유주(草湖游舟)’였다. 그런데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부분도 유주(游舟)를 연상할 수 있는 곳이 없다. 즉, 이 작품은 제목만 바꾼 것이 아니라 김창흡의 권유대로 바뀐 제목을 따라 시를 다시 지은 것이다. 「현산삼십영(峴山三十詠)」의 완성에 김창흡의 의사가 전면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을 미루어 볼 때 「현산삼십영」은 이해조와 김창흡이 서로 의견을 교류해가며 완성해간 공동작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현산삼십영」은 이해조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창흡의 편지에 이해조가 퇴고를 등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 것이나 국문시가(國文詩歌)인 「현산별곡(峴山別曲)」도 지었다는 정황에서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현산별곡」의 모습을 확인할 순 없지만 그와 관련한 김창흡의 편지가 남아 있어 현산별곡의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현산별곡(峴山別曲) 이것은 또한 곡보(曲譜)를 잘 알지 못한다면 어찌 그 사이에 품평을 허용하겠습니까? 정철 노인의 별곡에 비교하자면 부화한 소리가 많은 듯하고 깊은 맛이 자못 부족합니다. ‘백동제(白銅鞮)’와 ‘백접라(白接罹)’는 마땅히 본색에 맞는 말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방식으로 밋밋하게 배치하여 번신(翻身)하는 기세가 없으니 점환(點換)하여 착락(錯落)한 것을 요랑(寥朗)하게 바꾸어야 절묘할 듯합니다. 마지막에 고사를 인용한 것은 또한 지나치게 번잡하니 혹 잘라내고 간략하게 할 수 있는지요? ‘척촉(躑躅)’ 구절은 정철 노인의 말을 답습한 것이니 다른 사람의 점검을 받을까 걱정입니다. 나머지는 직접 만나 토론하길 기다리며 우선 돌려보냅니다[峴山別曲, 此亦不閒於曲譜, 豈容評隲於其間哉? 窃嘗較諸鄭老, 則浮響似多, 而幽衷頗乏. ‘銅鞮’ㆍ‘接罹’, 固當用本色語. 而一串平排, 無翻身之勢, 似宜點換, 使錯落寥朗爲妙. 末端引古事, 亦太繁猥, 或可裁削就簡否? ‘躑躅’句襲鄭老語, 恐被人點檢也. 餘俟面討, 姑且還之. -金昌翕, 『三淵集拾遺』권16 「答李子東」]】. 김창흡은 편지에서 「현산별곡」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그 가운데 고사를 인용한 것이 너무 번잡하다는 지적은 이해조의 시 전반을 비평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이해조는 위에 예시된 시처럼 산문과 시를 결합하여 작품을 창작했기 때문에 시의 의미를 깊게 하는 방법으로 전고 사용을 즐겨하였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전고 사용 이 그 적실함을 잃게 되면 질박함과 진실함이 훼손되고 마는 단점도 안고 있다. 그래서 김창흡은 다른 편지에서 “새기고 지운 흠이 있으니 꾸미고 곱게 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의 잡다한 것에 빠진 것이 왕왕 있습니다. 모름지기 질박한 뜻을 붙여 그것을 바로 잡아야 비로소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往往刻畫塗抹之過, 却不免脂粉纖嫰, 而墮於詩餘者, 須著蒼朴意思而矯之, 始可高蹈矣.]”【金昌翕, 『三淵集拾遺』권16 「答李子東」】라고 비평하기도 하였다.
김창흡과 이해조의 예에서 확인되듯,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자신의 창작을 동 인에게 보내어 적극적인 비평을 요구하였고 타당한 비평일 경우에는 또한 동인의 평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러한 예는 백악시단의 다른 구성원들 간에도 빈번하게 확인된다. 김창협은 아우 김창흡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행시 수 십 편을 써서 보내네. 이 시들은 대부분 대상과 감정을 서술하고 형상하는 데 주력하느라 태반이 조급히 지어 미처 다듬지도 못한 것이네. 의치(意致)는 혹 볼 만 할지 몰라도 격조(格調)는 매우 형편없는 것 같으니 이래도 괜찮은지 모르겠네. 이 모든 편에 비평을 해주되, 뜻대로 비점을 찍고 수정을 하여 잘되고 못된 점을 보여주어도 괜찮네.”【紀行詩數十篇錄去. 大抵主於抒寫事情, 太半潦草, 不暇鍊琢, 意致雖或可觀, 而格調殊似猥下, 不知似此固無妨否. 試爲評來諸篇, 隨意點抹, 使見瑕瑜亦可. -金昌協, 『農巖集』권11 「與子益-丙子」】라며 수정까지 허용하는 비평을 구한 바 있다. 그리고 신정하는 홍세태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의 장단을 논하고, 구체적인 시어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으며, 창작 수준을 제고하기 위한 조언을 하기도 하였고,【然鄙意亦不無一二可疑者, 如燕行贈別中長城煤山二絶, 能不失滄浪本色, 又結句儘佳. 而其外數作, 筆勢未免衰颯. ‘貧招’‘懶失’等語, 則又似甚俚俗. 鄙意去此一絶, 但用上三作寄去爲好. 未知如何. 此必是滄浪牽率之作, 不大段着力而致然, 此自古人之間所不免者. 但恐老氣日以低垂, 詩鋒日以摧頹, 信筆寫去, 亦自謂無復難事, 則雖欲時自刻力以發警意, 有未可得. 鄙意欲 令滄浪別更尋看少年時所覽文字, 亦漸收藏筆頭, 待其不得不發而後發之, 則所得要必是奇語. 未知如何. -申靖夏, 『恕菴集』권9 「與洪世泰」】 권섭과 이병연 또한 서로의 시와 시어에 대해 구체적인 비평을 가하고 시어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來詩上篇, ‘留燈’不如作‘懸燈’, ‘葑葅’不如作‘菁葅’. 結梢無力又未稳. 下篇還空署, 未分曉, 而此外無病. 兩篇押霜字, 皆佳耳. 弟今日又有關心事, 晩始屬思, 聊用仰塞. 未知高評又何如也. 曉出難更奉可歎. -戊子抄秋一源書- -權燮, 『玉所稿』「朋遊唱酬錄·2」”; “洞深春起晏, 朝日 明柴扉. 朋至席猶靜, 馬鳴寒更微. 登■看氣候, 嘯咏玩-動字如何-心機. 相過隔林麓, 不堪還 獨歸. -莘-” “送客欲出-此字以平看之, 至望至望-洞, 相携還入扉. 高行腰散病, 遙坐意傳微. 登臨爭地勢, 去住各天機. 不須嫌春早, 猶堪踏雪歸. -韶- -權燮, 『玉所稿』「朋遊唱酬錄·2」 「無題」”】. 특히 권섭의 경우에는 벗들과 주고받은 시편들을 따로 모아「붕유창수록(朋遊唱酬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백악시단의 구성원들이 보인 왕성한 비평 교유의 모습은 이들이 동인으로서의 신뢰를 바탕으로 작품의 질적 제고를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노력했음을 실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동인의 작품을 공동으로 포장(襃獎)해주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병연이 소장했던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이다. 이병연은 김화(金化)에 부임한 지 두 해가 지난 1712년 8월, 아버지 이속(李涑), 동생 이병성, 그리고 벗 장응두(張應斗), 정선과 함께 두 번째 금강산 유람을 하게 되었다. 이병성의 기록에 따르면 이병성은 부친 이속(李涑)을 모시고 장응두, 정선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김화(金化)에서 이병연을 만난 뒤, 내금강을 유람하고 동해를 따라 16숙부인 이집(李潗)의 흡곡(歙谷) 임소(任所)까지 유람하였다【起壬辰八月○陪家大人自京發行, 會家兄金化任所, 入楓岳遵東海, 止於十六叔潗歙谷任所. 鄭元伯敾張弼文同. -李秉成, 『順菴集』권2 「東遊錄」】. 이렇게 두 차례의 금강산 유람을 마친 이병연은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쓴 자신의 시와 정선의 그림을 합하여 『해악전신첩』이라는 시화첩을 만들고, 이 시화첩을 백악시단의 동인들에게 선보였다. 먼저 스승인 김창흡에게 보여 제사(題詞)를 받았고 1713년 흡곡현령(歙谷縣令)으로 부임하던 길에 김화(金化)에 들른 조유수에게 제사를 받았으며【趙裕壽, 『后溪集』권8, 「李一源海山一覽帖跋」】 1714년 금강산 유람을 위해 이곳에 들른 이하곤에게도 제사를 받았다【李夏坤, 『頭陀草』책14, 「題一源所藏海岳傳神帖」】. 이들은 이병연의 시와 정선 그림의 한 편 한 편을 따라 제사를 남겼는데, 한 예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삼부연(三釜淵)]
거대한 절벽 시커먼 못에 삼단으로 폭포가 이루어져
용은 그 아래 칩거하고 선비는 그 위에 깃들어 살며
그 덕이 같기를 바랐으나 끝내 그 이름만 훔치고 말았던가!
巨壁玄潭, 三級成瀑, 龍蟄于下, 士棲于上, 庶同其德, 而終竊其號而已耶!” -金昌翕, 『三淵集』권25 「題李一源海嶽圖後」
삼연자께서 백담에 복거하면서 이곳은 버려진 곳이 되었다. 허자(許子)는 한 개의 표주박 소리도 번거롭게 여겼거늘, 삼단 폭포가 이미 시끄러운데 또 어찌 백 굽이 물가로 옮기셨던가? 시험 삼아 삼연자께 보인다.
三淵子旣卜百潭, 此爲前魚矣. 許子尙以一瓢爲煩, 三瀑之已閙, 而又何百曲爲哉? 試擧似三 淵子. 右三釜淵 -趙裕壽, 『后溪集』권8 「李一源海山一覽帖跋」 中 ‘三釜淵’
삼부연은 기이함이 대단한데 일원의 이 시는 삼부연보다 더욱 기이하다. 시는 다음과 같다.
위 가마 물은 가운데 가마로 떨어지고
물이 넘쳐 아래 가마에 걸려있네.
올려다보면 모두 하나의 절벽일 뿐인데
그 누가 세 못이 뚫린 줄 알겠는가?
태곳적 용이 움켰다 생각했는데
천년 세월 물방울만 뚫려있음을 보겠네.
조화를 물을 길 없어
지팡이에 기댄 채 홀로 망연해지네.
반복하여 읊조려보면 절벽이 하늘에 매달린 채 흩날리는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 늠름하게 눈에 선하니 문득 그림은 또한 하나의 군더더기임을 알겠다.
三釜淵奇甚, 一源此詩更奇於三釜淵矣. 詩曰: ‘上釜落中釜, 波濤下釜懸. 仰看全一壁, 誰得 竅三淵. 太始思龍攫, 千年驗溜穿. 無由問造化, 倚杖獨茫然.’ 反復諷詠, 則絶壁天懸ㆍ飛流噴 薄之狀凜然在目, 便覺丹靑絹素, 又一贅疣也. -李夏坤, 『頭陀草』책14 「題一源所藏海岳傳神 帖」 中 ‘三釜淵’
위에 제시한 세 자료는 『해악전신첩』의 「삼부연」 시와 그림에 붙인 제사들이다. 첫 번째 자료는 김창흡의 제사로, 삼부연에 복거했던 자신의 과거 행적을 떠올리며 쓴 것이다. 김창흡은 27세 되던 1679년 겨울, 가족들을 이끌고 삼부연 상류의 용화촌에 복거한 바 있다. 생애 첫 은거지였던 삼부연은 평생 은일의 삶을 살았던 김창흡에게 마치 정신적 고향 같은 곳이었다【이승수, 「三淵 金昌翕 硏究」, 한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60~62면 참조.】. ‘삼연(三淵)’이라는 자호(自號)가 이를 보여준다. 김창흡의 제사는 객관적인 자기 체험을 서술하면서도 마지막에 절묘한 뜻을 붙였다. 김창흡은 폭포 아래 칩거한 용이 자신을 감춘 채 우주의 조화에 참여하듯, 은거지에서 부단한 학문과 수양을 통해 삶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과연 현재의 자신은 어떠한가? 스스로 ‘삼연이란 호를 취한 것 외에 아무 이룬 것이 없다’며 겸손의 뜻을 붙였으나, 이는 은거의 초심을 떠올리며 자신을 부단히 경계하는 것이자 제자 이병연을 위한 가르침의 뜻을 붙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유수는 김창흡의 제사가 담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창흡을 이어 은거의 의미에 대해 말하였다. 조유수가 제사를 붙일 무렵, 김창흡은 설악산 영시암(永矢庵)에 은거하고 있었다. 인용문의 첫 부분은 이것을 말한다. 조유수는 이어 삼부연 복거와 백담(百潭) 복거의 의미에 대해 오묘한 뜻을 붙였다. ‘허자’는 요(堯)임금이 구주(九州)를 맡기자 기산(箕山) 영수(穎水)에 귀를 씻었던 허유(許由)를 가리킨다. 허유는 물 마실 그릇이 없어 손으로 물을 움켜 마셨는데 어떤 사람이 표주박 하나를 보내주자 물을 떠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물을 마신 뒤 나무에 걸 어둔 표주박이 바람에 달그락거리자 시끄럽다며 마침내 표주박을 버렸다고 한다【許由隱箕山, 無盃器, 以手捧水飮之. 人遺一瓢, 得以操飮, 飮訖, 挂于木上, 風吹瀝瀝有聲. 由以爲煩, 遂去之. -『蒙求集註』卷上】. 조유수는 은자의 표상인 허유를 들며 김창흡의 백담으로의 이거(移居)에 의문을 표하였는데, 그것은 김창흡이 삼부연을 버리고 백담으로 간 이유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김창흡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창흡의 설악산 은거는 기사환국으로 부친이 사사되는 참혹한 가화를 겪으면서 절속(絶俗)의 의지를 실현한 것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조유수는 치세(治世)의 은자인 허유와 난세(亂世)의 은자인 김창흡을 대비하였다. 즉, 허유는 표주박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시끄럽다고 여겼지만, 김창흡은 시비성(是非聲)을 차단하기 위해 삼부연 폭포로도 모자라 백 굽이 물소리가 울리는 백담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조유수는 의문의 형식을 통해 자신의 이해를 행간에 붙였다. 이하곤의 제사는 이병연의 시적 성취에 초점을 맞추었다. 시적 대상인 삼부연도 기이하지만 그것을 형상화한 이병연의 시는 더욱 기이하다고 평가한 뒤, 그림이 필요 없을 정도로 형사를 통한 전신의 묘를 이루었다며 이병연의 시를 부각시켰다.
『해악전신첩』과 그에 붙인 제사들은 백악시단의 동인적 면모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해악전신첩』 자체가 시와 그림이라는 두 종의 예술이 만나 이루어진 공동작의 특성을 보인다는 점【『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 속 이병연의 시와 정선의 그림은 교섭 양상이 일반적인 제화시(題畵詩)나 시의도(詩意圖)와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이병연과 정선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한쪽에서는 시로, 한 쪽에서는 그림으로 금강산을 형상화한 뒤, 이 둘을 묶어 『해악전신첩』을 완성하였다. 이런 까닭에 『해악전신첩』에 실린 이병연의 시는 엄밀히 말하면, 제화시가 아니라 산수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졸고,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에 나타난 시화(詩畵) 교섭의 새 양상」, 『한국한문학연구』제45집, 2010을 참조할 것.】이 그러하고, 이러한 예술적 성취를 둘러싼 사우들의 평가 또한 그러하다. 앞서 보았듯『해악전신첩』에 붙은 제사들은 시 화첩에서 얻은 각자의 감회가 개별적,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자(題詞者)와 작가, 그리고 제사자들간의 관계가 섬세하게 고려되어 대단히 유기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이처럼 이병연의 『해악전신첩』은 시명이 자자했던 이병연과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정선의 그림을 한데 모은 데다 김창흡, 조유수, 이하곤의 제사가 더해지면서 명실공히 최고의 걸작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적 성취는 다른 동인들에게는 일종의 쾌사(快事)로 여겨졌다. 그래서 김창업은 신정하에게 보낸 시에서 “정선의 그림과 일원(一源)의 시, 금강산이 있은 뒤로 이런 기품(奇品)은 없었지. 정보가 이제 좋은 솜씨를 가지고 떠나니, 어찌 승사(勝事)를 그들에게만 양보하겠소?”【鄭生之畵一源詩, 自有金剛無此奇. 正甫今携好手去, 寧將勝事讓他爲. -金昌業, 『老稼齋集』 권5 「送申正甫赴北幕」】라는 말로 이들의 예술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면서 북평사로 가는 길에 금강산을 들를 예정이었던 신정하에게 이병연과 정선이 이룬 예술적 성취를 다시 기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백악시단의 문인들은 동인의 예술적 성취를 공동으로 포장하면서 시단의 위상을 제고시켜 나가는 한편, 창작의 자극제로 삼아 창작의 질적 수준을 높여 나갔다.
이상에서 백악시단의 동인적 면모가 잘 드러나는 문학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은 낙송루시사의 경우처럼 민멸된 시도(詩道)를 진작시키겠다는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시사를 운영하였으며, 자신들의 ‘진시운동’을 실제 창작을 통해 심화시키고 확산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시회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작품에 대한 적극적 비평과 소통을 통해 창작의 질적 수준을 제고시켜 나갔으며, 동인들이 이룬 예술적 성취에는 집단적인 포장을 통해 시단의 위상을 높여갔다. 백악시단은 이러한 동인 활동을 통해 내적으로는 자신들의 ‘진시운동’을 정비하고 외적으로는 ‘진시’ 창작의 확산을 추동해 갔다. 18세기 한시가 보인 다양한 변화가 백악시단에 의해 선도될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개별 작가 몇몇의 영향력보다 동인들의 시단 활동에 힘입은 바 크다 할 것이다. 백악시단은 자신들의 창작 운동에 공감하는 문인들을 지속적으로 끌어안았고, 시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진시운동’은 더 넓게 확산될 수 있었다.
인용
Ⅰ. 서론
Ⅱ. 백악시단의 형성과 문학 활동
1. 백악시단의 주요 구성원
2. 동인들의 문학 활동
Ⅲ. 진시의 기저와 논리
Ⅳ. 진시의 정신적 깊이와 미학
3. 물아교감의 이지적 흥취
Ⅴ. 진시의 시사적 의의
Ⅵ.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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