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
뛰어난 능력에도 조선에선 인정받지 못하고 중국에서 인정받던 내 친구 홍대용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
박지원(朴趾源)
대용의 친구 용주에게 부고를 전하려 중국 가는 사람에게 전하다
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路當過三河.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曩歲, 余自燕還, 爲訪蓉洲不遇, 留書俱道德保作官南土, 且留土物數事, 寄意而歸. 蓉洲發書, 當知吾德保友也. 乃屬客赴之曰: “乾隆癸卯月日, 朝鮮朴趾源頓首白蓉洲足下, 敝邦前任榮川郡守南陽洪湛軒諱大容字德保, 以本年十月廿三日酉時不起. 平昔無恙, 忽風喎噤瘖, 須臾至此. 得年五十三, 孤子薳, 哭擗未可手書自赴, 且大江以南, 便信無階. 並祈替此轉赴吳中, 使天下知己, 得其亡日, 幽明之間, 足以不恨.”
권력에 욕심도 없이 창의적으로 과학기구를 만든 대용
旣送客, 手自檢其杭人書畵尺牘諸詩文共十卷. 陳設殯側, 撫柩而慟曰: “嗟乎德保, 通敏謙雅, 識遠解精.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積慮, 刱出機智.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德保甞論地一轉爲一日, 其說渺微玄奧, 顧未及著書, 然其晩歲益自信地轉無疑. 世之慕德保者, 見其早自廢擧, 絶意名利, 閒居爇名香皷琴瑟, 謂將泊然自喜, 玩心世外.
而殊不識德保綜理庶物, 剸棼劊錯, 可使掌邦賦使絶域, 有統禦奇略. 獨不喜赫赫耀人, 故其莅數郡, 謹簿書, 先期會, 不過使吏拱民馴而已
연행에서 만난 세 명의 중국친구
甞隨其叔父書狀之行, 遇陸飛ㆍ嚴誠ㆍ潘庭筠於琉璃廠.
三人者俱家錢塘, 皆文章藝術之士, 交遊皆海內知名, 然咸推服德保爲大儒. 所與筆談累萬言, 皆辨析經旨ㆍ天人性命ㆍ古今出處大義, 宏肆儁傑, 樂不可勝.
及將訣去, 相視泣下曰: ‘一別千古矣, 泉下相逢, 誓無愧色.’ 與誠尤相契可, 則微諷君子顯晦隨時, 誠大悟, 决意南歸.
엄성과의 심금을 터놓던 우정
後數歲, 客死閩中, 潘庭筠爲書赴德保. 德保作哀辭具香幣, 寄蓉洲, 轉入錢塘, 乃其夕將大祥也. 會祭者環西湖數郡, 莫不驚歎, 謂冥感所致 誠兄果, 焚香幣, 讀其辭, 爲初獻.
子昂, 書稱伯父, 寄其父『鐵橋遺集』, 轉傳九年始至. 集中有誠手畵德保小影. 誠之在閩, 病篤, 猶出德保所贈鄕墨嗅香, 置胷間而逝, 遂以墨殉于柩中.
吳下盛傳爲異事, 爭撰述詩文. 有朱文藻者, 寄書言狀.
덕보의 내역
噫! 其在世時, 已落落如往古奇蹟, 有友朋至性者, 必將廣其傳, 非獨名遍江南, 則不待誌其墓, 以不朽德保也.”
考諱櫟牧使, 祖諱龍祚大司諫, 曾祖諱潚參判, 母淸風金氏, 郡守枋之女. 德保以英宗辛亥生, 得蔭除繕工監監役, 尋移敦寧府參奉, 改授世孫翊衛司侍直, 叙陞司憲府監察 轉宗親府典簿. 出爲泰仁縣監, 陞榮川郡守, 數年以母老辭歸. 配韓山李弘重女, 生一男三女, 婿曰趙宇喆ㆍ閔致謙ㆍ兪春柱. 以其年十二月八日, 葬于淸州某坐之原.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燕巖集』 卷之二
해석
대용의 친구 용주에게 부고를 전하려 중국 가는 사람에게 전하다
德保歿越三日, 客有從年使入中國者,
덕보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 객 중에 동지사【연사(年使): 해마다 가는 동지사(冬至使)를 말함】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자가 있는데,
路當過三河.
그 길은 마땅히 삼하【삼하(三河): 직예성(直隸省) 순천부(順天府)의 현(縣) 이름이다. 당시 중국 북경에 간 우리나라 외교 사절단은 이곳을 거쳐 귀국하였다】를 지나게 되다.
三河有德保之友曰: “孫有義號蓉洲.”
삼하에는 덕보의 벗이 있는데 손유의(孫有義)【삼하현(三河縣)에 살고 있던 한족(漢族)의 선비로, 자는 심재(心栽)이고, 호는 용주(蓉州)다. 일찍이 북경을 방문한 홍대용이 귀국길에 올라 삼하를 지났는데, 이때 손유의가 홍대용을 찾아와 서로 알게 됐으며, 이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유하였다】로 호는 용주다.
曩歲, 余自燕還, 爲訪蓉洲不遇,
지난해 나는 북경으로부터 돌아올 적에 용주(蓉洲)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留書俱道德保作官南土,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땅에서 벼슬한 것【당시 홍대용이 경상도 영천에서 고을 수령을 한 것을 이른다】을 갖추어 말하고
且留土物數事, 寄意而歸.
또 토산물 몇 개를 남겨두고 뜻을 붙인 채 돌아왔다.
蓉洲發書, 當知吾德保友也.
용주(蓉洲)가 편지를 펴본다면 마땅히 내가 덕보의 친구인 걸 알리라.
乃屬客赴之曰:
그래서 손님을 위촉하여 그에게 부고했다.
“乾隆癸卯月日, 朝鮮朴趾源頓首白蓉洲足下.
“건륭 계묘(1783)【정조 7년인 1783년을 말한다. 이해에 홍대용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건륭(乾隆)’은 청나라 제6대 황제인 순황제(純皇帝)의 연호다】년 모월 모일에, 조선인 박지원은 머리를 조아려 용주(蓉洲) 족하께 사룁니다.
敝邦前任榮川郡守南陽洪湛軒諱大容字德保,
우리나라 전직 영천군수 남양의 홍담헌의 이름【휘(諱): 이름을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남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큰 실례로 여겼기에 ‘꺼린다’는 뜻의 ‘휘’ 자를 ‘이름’을 뜻하는 말로 쓰게 되었다】은 대용, 자는 덕보가
以本年十月廿三日酉時不起.
올해 시월 23일 유시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平昔無恙, 忽風喎噤瘖,
평소에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아무 말을 못하다가
須臾至此.
잠깐 사이에 이런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得年五十三, 孤子薳, 哭擗未可手書自赴,
쉰 다섯 해를 살았고 아들【고자(孤子): 아버지를 잃은 자식을 이르는 말이다. 어머니를 잃은 자식은 ‘애자(哀子)’라고 한다】 원(薳)은 통곡하며 슬퍼하느라 손수 써서 스스로 부고치 못하고
且大江以南, 便信無階.
또 양자강 이남엔 곧 말할 계제(階梯)【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당한 형편이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並祈替此轉赴吳中,
아울러 비니 이를 대신하여 오중(吳中)【중국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는 연암의 착각이다. 홍대용의 중국인 벗들은 소주가 아니라 항주 사람들이기에 ‘오중(吳中)’이 아니라 ‘월중(越中)’이라고 해야 옳다. 예전에 중국 절강성 항주를 ‘월(越)’이라고 했다】에 전하여 부고하여
使天下知己, 得其亡日,
천하의 지기들에게 사망한 날을 알도록 하고
幽明之間, 足以不恨.”
죽은 이와 산 이 사이에 한스럽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권력에 욕심도 없이 창의적으로 과학기구를 만든 대용
旣送客, 手自檢其杭人書畵尺牘諸詩文共十卷.
이윽고 손님을 보내고 손수 스스로 항주 사람들의 서화와 편지와 모든 시문을 점검하니 10권이었다.
陳設殯側, 撫柩而慟曰:
이것을 빈소 곁에 진설하고 널판을 어루만지며 통곡했다.
“嗟乎德保, 通敏謙雅, 識遠解精.
“아 덕보는 통달했고 민첩했으며 겸손했고 우아했으며 식견이 원대하고 이해가 정밀했다.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더욱 천문학【율력(律曆): 원래 악률(樂律, 음률에 관한 이론)과 역법(曆法)을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요즘의 천문학을 가리키는 말로 썼다. 담헌은 수학과 천문학에서 당대 제1인자였다】에 장점이 있어 혼천의(渾天儀)【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 시계의 구실을 한 기구인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제작되어 왔다. 홍대용은 전라도 동복(同福, 전남 화순 지역의 옛 지명)에 살고 있던 선배 과학자 나경적(羅景績)의 도움을 받아 두 대의 혼천의를 제작하여 충청도 천원군의 향리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사설 천문대를 짓고 거기에 비치하였다. 조선 초기와 중기에 만들어진 혼천의들이 수력으로 작동된 데 반해,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는 톱니바퀴로 자명종과 연결되어 그 힘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등 여러 기구를 만들었고
湛思積慮, 刱出機智.
골똘히 생각하고 누적하듯 사려하여 창조적으로 기지를 내었다.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처음 유럽인이 지구를 이야기할 때 지구가 돈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德保甞論地一轉爲一日,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자전하면 하루가 된다고 논했으니
其說渺微玄奧,
그 학설이 미묘하고도 현묘하고도 오묘했었다.
顧未及著書, 然其晩歲益自信地轉無疑.
다만 책을 쓰진 못했지만 만년에 더욱 스스로 지전설을 믿으며 의심치 않았다.
世之慕德保者, 見其早自廢擧,
세상에서 덕보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일찍이 스스로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絶意名利, 閒居爇名香皷琴瑟,
뜻에서 명성이나 이익을 끊고 한가롭게 살며 이름난 향을 사르고 비파를 타는 걸 보고
謂將泊然自喜, 玩心世外.
‘장차 골똘히 절로 기뻐하며 마음을 세상 밖에서 놀게 하겠구나’라고 생각하리라.
而殊不識德保綜理庶物, 剸棼劊錯,
특수하게 덕보가 뭇 사물을 종합하여 정리하여 어지러운 걸 베어내고 섞인 것을 잘라내며
可使掌邦賦使絶域,
나라의 재정을 맡기고 먼 지역에 사신을 보낼 만하며
有統禦奇略.
군대 통제의 기이한 책략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한다.
獨不喜赫赫耀人, 故其莅數郡,
홀로 밝디 밝게 남에게 드러나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몇 지방의 군수를 지내며【태인 현감과 영천 군수를 지낸 것을 말한다. 연암은 이 글의 마지막 단락에서 이 점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謹簿書, 先期會,
문서를 잘 정리해 기회에 앞서 처리하여
不過使吏拱民馴而已.
아전이 공손해지고 백성이 순해지게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연행에서 만난 세 명의 중국친구
甞隨其叔父書狀之行,
일찍이 숙부가 서장관으로 연행 갈 때 따라가
遇陸飛ㆍ嚴誠ㆍ潘庭筠於琉璃廠.
육비(陸飛)【자가 기잠(起潛)이고 호는 소음(篠飮)이며 1719년생이다】ㆍ엄성(嚴誠)【자가 역암(力闇)이고 호는 철교(鐵橋)임 1732년생이다】ㆍ반정균(潘庭筠)【자가 난공(蘭公)이고 호는 추루(秋𢈢)이며 1742년생이다】을 유리창(琉璃廠)【현재 중국 북경시北京市에 있는 문화의 거리다. 화평문 남쪽과 호방교虎坊橋 북쪽에 위치하며, 행정구역상 선무구宣武區에 속한다. 원元ㆍ명明 때 이곳에 유리가마 공장이 있었기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북경 외성外城의 상업이 날로 번창하여 한족 관리들이 선무문宣武門 밖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이로써 외지고 쓸쓸했던 유리 공장 일대가 점차 번성하여 고서적ㆍ골동품ㆍ그림ㆍ탁본ㆍ문방사구 등을 판매하는 상점 거리가 형성되었으며, 상인ㆍ관리ㆍ학자ㆍ서생 등이 끊이지 않는 문화의 거리가 되었다】에서 만났다.
三人者俱家錢塘, 皆文章藝術之士,
세 사람은 모두 전당(錢塘)【지금의 절강성 항주시(杭州市)의 옛 이름이다. ‘민(閩)’은 지금의 복건성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에 집에 있었고 모두 문장과 예술이 있는 선비였으며
交遊皆海內知名,
그들이 교유한 이들도 모두 중국 내의 알려진 명사들이었지만
然咸推服德保爲大儒.
다 덕보를 높이 받들어 섬기며 대유(大儒)라 여겼다.
所與筆談累萬言,
함께 필담했던 여러 말들은
皆辨析經旨ㆍ天人性命ㆍ古今出處大義,
모두 경전의 뜻과 천인이나 성명에 대한 것 고금 출처의 큰 뜻에 대한 판별과 분석으로
宏肆儁傑, 樂不可勝.
굉징하고 거리낌이 없으며 탁월하여 즐거움이 끝이 없었다.
及將訣去, 相視泣下曰:
장차 헤어지려 할 때가 되어 서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고 말했다.
‘一別千古矣,
‘한 번 헤어지면 천고토록 지날 테니,
泉下相逢, 誓無愧色.’
황천에서 서로 만난다면 부끄럽지 않도록 맹세합시다.’
與誠尤相契可, 則微諷君子顯晦隨時,
엄성과는 더욱 서로 잘 맞아 은밀히 ‘군자는 드러내고 감춤은 때에 따라야 한다’고 알려주었고
誠大悟, 决意南歸.
엄성은 크게 깨달아 남쪽으로 돌아갈 뜻을 결정했다.
엄성과의 심금을 터놓던 우정
後數歲, 客死閩中,
수년 후에 민(閩)이란 땅에서 객사하자
潘庭筠爲書赴德保.
반정균(潘庭筠)은 편지를 써서 덕보(德保)에게 부고했다.
德保作哀辭具香幣, 寄蓉洲,
덕보는 애사(哀辭)【일찍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는 글이다. 엄성은 홍대용이 귀국한 2년 뒤인 1768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당시 홍대용은 부친상 중이었지만 엄성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몹시 애통해하였다】를 짓고 향과 지폐를 갖추어 용주(蓉洲)에게 부쳐
轉入錢塘, 乃其夕將大祥也.
전하여 전당으로 들어오니, 곧 그날 저녁이 대상(大祥)날【죽은 지 2년 만에 지내는 제삿날로, 이날 삼년상이 끝난다】이었다.
會祭者環西湖數郡, 莫不驚歎,
제사에 모인 사람들은 서호(西湖)【항주에 있는 유명한 호수 이름이다】 여러 군의 사람들로 경탄해마지 않으며
謂冥感所致.
‘유명의 감응이 지극해서이다’라고 말했다.
誠兄果, 焚香幣,
엄성의 형인 엄과(嚴果)가 향과 지폐를 사르고
讀其辭, 爲初獻.
애사를 읽으며 초헌(初獻)【제사에서 첫 번째 술을 올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을 지냈다.
子昂, 書稱伯父, 寄其父『鐵橋遺集』,
엄성의 아들 엄앙(嚴昂)은 글로 덕보를 백부라 말하고 아버지의 『철교유집(鐵橋遺集)』을 부쳐왔는데
轉傳九年始至.
우여곡절 끝에 9년 만에 도착했다.
集中有誠手畵德保小影.
문집 속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영정(影幀)이 있었다.
誠之在閩, 病篤,
엄성이 민땅(閩)에 있을 적에 병이 위독해지자
猶出德保所贈鄕墨嗅香, 置胷間而逝,
오히려 덕보가 보내온 조선의 먹과 향기로운 향을 꺼내 가슴 사이에 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遂以墨殉于柩中.
마침내 먹은 관 속에 넣었다.
吳下盛傳爲異事, 爭撰述詩文.
오중에선 성대하게 전해져 기이한 일로 여겨졌으며 다투어 시문으로 지어졌다.
有朱文藻者, 寄書言狀.
주문조(朱文藻)라는 사람이 편지를 보내 상황을 말해줬다.
덕보의 내역
噫! 其在世時, 已落落如往古奇蹟,
아! 덕보가 살아있을 때 이미 대범하여【락락(落落): ① 대범하고 솔직하다 ②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다 ③ 많은 모양】 지난 옛날의 기이한 자취가 있는 듯했으니,
有友朋至性者, 必將廣其傳,
벗 중에 지극한 성품을 지닌 이가 반드시 장차 널리 전한다면,
非獨名遍江南, 則不待誌其墓,
이름이 강남에만 알려질 뿐만 아니리니, 묘지명을 기록하길 기다리지 않아도
以不朽德保也.”
덕보의 명성은 썩어 없어지지 않으리라.”
考諱櫟牧使, 祖諱龍祚大司諫,
돌아가신 아버지 성함은 역(櫟)이고 목사였으며, 돌아가신 할아버지 성함은 용조(龍祚)이고 대사관이었으며
曾祖諱潚參判, 母淸風金氏, 郡守枋之女.
증조부의 성함은 숙(潚)으로 참판이었으며, 어머님은 청풍김씨로 군수 방(枋)의 딸이다.
德保以英宗辛亥生, 得蔭除繕工監監役,
덕보는 영종 신해(1731)에 태어나 음직【음보(蔭補):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함을 이르는 말이다】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고
尋移敦寧府參奉, 改授世孫翊衛司侍直,
이윽고 돈녕부(敦寧府) 참봉에 전직되었다가 고쳐 세손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 侍直)【세손(世孫)을 시위(侍衛)하는 직책이다. 당시 세손은 훗날의 정조(正祖)다. 홍대용은 이 벼슬에 있으면서 학문적으로 정조를 가르치며 정조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홍대용은 당시 정조와 주고받았던 말을 일기로 자세히 기록해두었는데, 그것이 지금 전하는 『계방일기(桂坊日記, 계방은 세손익위사의 별칭)』이다】에 제수되었고
叙陞司憲府監察, 轉宗親府典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차례로 올랐으며 종친부 전부에 전직되었다.
出爲泰仁縣監, 陞榮川郡守,
외직으론 태인현감이 되었다가 영천 군수로 승진했으며
數年以母老辭歸.
몇 해 지나 어머니의 늙으심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영천 군수로 승진하여 두어 해 재임하다: 홍대용은 1780년 영천 군수가 되었다가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내관(內官) 3년, 고을 원으로 6년, 도합 9년의 벼슬살이를 했다. 김태준 교수가 작성한 홍대용 연보에 의하면 홍대용은 이해 10월 22일 중풍으로 상반신에 마비가 왔고 이튿날 별세하였다】.
配韓山李弘重女, 生一男三女,
배필은 한산 이홍중(李弘重)의 딸로 1남 3녀를 낳았으니
婿曰趙宇喆ㆍ閔致謙ㆍ兪春柱.
사위의 이름은 조우철ㆍ민치겸ㆍ유춘주이다.
以其年十二月八日, 葬于淸州某坐之原.
그 해 12월 8일에 청주의 아무개 자리【모좌(某坐): 무슨 방향이라는 뜻인데, 무덤이 향하는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홍대용은 향리인 충남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촉칭 구미들 기슭에 묻혔다】 언덕에 장례 지냈다.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燕巖集』 卷之二
명은 다음과 같다.
宜笑舞歌呼 | 마땅히 웃고 춤추며 노래하고 환호하리. |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 서로 서쪽 호수에서 만나리니 그대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줄 안다네. |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 입속에 구슬을 머금지 않은 건【반함(飯含): 옛날에 염습(殮襲,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긴 뒤 옷을 입히고 염포로 묶는 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이나 쌀을 물리는 일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에 이런 말이 보인다. “담헌공(홍대용)은 평소 주장하기를, 장례 때 반함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으며, 또한 아버지(연암)에게 자신의 장례를 돌봐 달라고 당부하셨다. 급기야 공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이 사실을 그 아들 원薳에게 일러 주었다. 원 또한 부친의 유지遺旨를 들은 터라, 부친이 쓰시던 물건들을 무덤에 묻었을 뿐 반함하지는 않았으니 그 뜻에 따른 것이다.” 연암 역시 담헌이 한 것처럼 자신의 장례 때 반함을 하지 말라는 말을 죽기 전에 자식에게 남겼다】 부질없이 보리 읊조린 유학자【『장자』 「외물(外物)」편에 보면, 유자(儒者)란 입만 열면 시(詩)와 예(禮)를 거론하지만 실제로는 남의 무덤을 몰래 파헤쳐 시체의 입안에 있는 구슬을 빼내는 도둑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유자는 가증스럽게도 이런 시를 읊고 있다. “푸릇푸릇한 보리 / 무덤가 언덕에 무성하네. / 생전에 남에게 보시한 적 없으면서 / 죽어서 어찌 구슬을 머금고 있나?” 이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점잖은 체하면서 실제로는 더없이 위선적인 유자를 야유하고 있다. 연암은 『장자』의 이 고사를 끌어들여 양심적인 실학자 홍대용을 당시 조선의 위선적인 유자들과 대비하고 있다】 슬퍼해서지. |
인용
9. 홍대용의 신원(身元)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구
13. 총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