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그룹’②
먼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연암보다 여섯 살 위지만 평생 누구보다 도타운 우정을 나누었다. 그 또한 과거를 폐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갔는데, 특히 과학과 철학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다. 연암은 「홍덕보(홍대용의 자字) 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율력에 조예가 깊어 혼천의(渾天儀) 같은 여러 기구를 만들었으며, 사려가 깊고 생각을 거듭하여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가 있었다. 서양 사람이 처음 지구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하니, 그 학설이 오묘하고 자세하여 깊은 이치에 닿아 있었다.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積慮, 刱出機智.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其說渺微玄奧.
홍대용 또한 연암에 앞서 연행(燕行)의 행운을 누렸다. 특히 북경에서 엄성(嚴誠), 육비(陸飛), 반정균(潘庭筠) 등 절강성 출신 선비들과 만나 ‘뜨거운 우정’을 나눈다. 이른바 ‘천애(天涯)의 지기’들을 만난 것. 그의 연행록을 보면, 이들 사이의 뜨거운 사귐과 홍대용의 단아하면서도 명석한 품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한문판이 『담헌연기』, 한글판 버전이 『을병연행록』이다). 아울러 홍대용은 음률의 천재였기 때문에 ‘구라철사금(歐羅鐵絲琴, 양금洋琴)’을 해독하여 사방에 퍼뜨리거나, 풍금의 원리에 대해 명쾌하게 변론하는 등 음악사적으로도 탁월한 자료를 많이 남겼다. 홍대용(洪大容)이 죽은 뒤 연암이 집에 있는 악기들을 버리고 한동안 음악을 듣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홍대용이 영천군수로 있을 무렵, 연암협에 은거하고 있던 연암에게 ‘얼룩소 두 마리, 농기구 다섯 가지, 줄 친 공책 스무 권, 돈 2백 냥’을 보내며, “산중에 계시니 밭을 사서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을 테지요. 그리고 의당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외다”라고 했다. 친구에 대한 자상한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는 담헌에 비하면 지명도가 아주 낮지만, 그 또한 뛰어난 재야 과학자였다. 기계로 움직이는 여러 기구,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인중기, 물건을 높은 데로 나르는 승고기, 회전장치를 한 방아, 물을 퍼올리는 취수기 등을 손수 제작했으나 지금은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열하일기』 「알성퇴술(謁聖退述)」 편에 보면 북경의 관상대에 올라 혼천의를 비롯한 천문기구들을 보면서 정철조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뜰 한복판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내 친구 정석치의 집에서 본 것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이튿날 가보면, 기계들을 모두 부서뜨려 더볼 수가 없었다.
而庭中所置, 亦有似吾友鄭石癡家所見者. 石癡甞削竹手造諸器, 明日索之, 已毁矣.
언젠가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두 친구가 서로 황(黃)ㆍ적도(赤道)와 남(南)ㆍ북극(北極) 이야기를 하다가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나한테는 그 이야기들이 아득하기만 하여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자느라고 듣지 못하였지만, 두 친구는 새벽까지 어두운 등잔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甞與洪德保共詣鄭, 兩相論黃赤道南北極, 或擺頭, 或頤可. 其說皆渺茫難稽, 余睡不聽, 及曉, 兩人猶暗燈相對也.
홍대용과 정철조(鄭喆祚), 두 친구는 머리를 맞대고 황도, 적도, 남극, 북극 등 지구과학’에 대해 열나게 토론하고 있는데,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 잠을 청하는 연암의 모습이 한 편의 ‘시트콤’이다. 하지만 이때 주워들은 이야기로 뒷날 열하에서 중국 선비들한테 온갖 ‘장광설’을 늘어 놓으며 우쭐댔으니 참, 연암처럼 친구복을 톡톡히 누린 경우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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