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반함하지 않은 홍대용의 일화를 끄집어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飯含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를 미워해서지.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
이 마지막 두 구에서 이 명의 풍자는 절정에 달한다. 평생 양심적 실학자로 살았던 홍대용이야 스스로에게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었지만, 선비들이라고 다 그런가? 주변을 돌아보면 위학과 허학虛學으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선비들이 수두룩하다. 그런 자들이 학자로 행세하고, 명성을 누리고, 권력에 빌붙어 출세하고, 부귀를 누리지 않던가? 이처럼 이 두 구는 홍대용의 삶과 극명히 대비되는 당대 사대부들의 위선적 삶에 대한 야유와 조소다.
『과정록』에 나오는 말이지만, 연암의 장인 이보천李輔天은 연암이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함을 늘 걱정했다고 한다. 이 두 구에서도 그런 연암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연암이 세상 물정을 알게 된 10대 후반 이래 전생全生에 걸쳐 가장 못 견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입으로는 온갖 그럴 듯한 말, 고상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뒤로는 추악하고 야비하며 위선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는 사대부들의 자기기만이 아니었던가 한다. 문제는 이런 자들이 학문으로 행세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도덕과 예禮의 수호자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일 터이다. 이에 대한 분노감을 담고 있는 연암의 작품은 아주 많지만 대표적인 것을 몇 개만 들어본다면 젊은 시절에 쓴 「마장전」과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중년기에 쓴 「호질」 같은 작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은 지금 비록 전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학문을 팔아 행세하는 위선적 선비의 행태를 ‘대도大盜’, 즉 ‘큰 도둑놈’이라고 풍자한 작품이다. 대학자로 명성이 높지만 뒤로는 과부와의 사통을 일삼는, 「호질」에 등장하는 썩은 선비 북곽선생 역시 ‘역학대도’, 즉 학문을 파는 큰 도둑놈이다. 이 명의 제5구에 보이는 “보리 읊조린 유자”란 바로 이런 위선적인 선비들에 대한 비아냥거림이다.
연암은 혹시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닐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이 점과 관련해, 홍대용이 중국에서 돌아온 직후 예학자禮學者 김종후金鍾厚와 격렬한 논쟁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논쟁 중에 김종후가 예학을 강조한 반면 홍대용은 예학이란 아무 쓸모가 없으며 이용후생에 도움이 되는 실학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는 사실, 그리고 김종후가 훗날 김귀주金龜柱에게 붙었다가 다시 홍국영에게 붙는 등 권력에 이리저리 빌붙는 행태를 보였다는 점 등은 일고一考할 만하다.
홍대용은 자신이 죽은 후에 반함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고 하는데 이는 위선적인 유자들을 미워해서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연암은 왜 이 명에서 그렇게 말했을까? 이는 하나의 문학적 책략으로 봐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연암은 홍대용이 반함하지 않은 사실에 착안하여 『장자』의 유명한 고사를 끌어와 현실의 어떤 문제를 풍자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제5, 6구는 구체적 맥락을 떠나서 읽는다면 유자儒者 일반에 대한 폄하와 조롱으로 읽힐 수 있다. 그 경우 그것은 곧 조선의 지배계급과 지배 이념과 사대부 문화의 정체성을 그 근간에서 부정하거나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왜냐하면 『장자』의 이 고사는 이른바 이단異端의 입장에서 유학을 공격하고 유학의 정당성을 전복하는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구절은 몹시 불온하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을 수 있다. 아마 이 때문에 이 명은 제거되는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 전문
인용
9. 홍대용의 신원(身元)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구
13.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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