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9. 홍대용의 신원(身元)
이 단락은 홍대용의 가계와 벼슬, 그 자녀들, 그리고 장례일과 산소의 소재지가 서술된다.
보통의 묘지명에서는 이런 사항은 대체로 묘지명의 앞부분에 서술되며, 묘지명의 핵심적 내용을 이룬다. 하지만 연암의 묘지명에서는 끝 부분에서 이런 사실이 서술되고 있다. 이 점, 파격적 구성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연암은, 1편에 제시된 부고 중에서 언급한 사항은 되도록 이 대목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중복을 피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가령 홍대용의 본관이 남양이라는 점, 그 자호字號, 운명한 일시, 향년, 아들 이름 등은 여기서는 일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런 데서 연암 글쓰기의 용의주도함이 확인된다. 그리하여 부고 내용과 대목에서의 서술을 합쳐 놓아야 비로소 망자亡者에 대한 신원이 온전하게 파악된다.
▲ 전문
인용
9. 홍대용의 신원(身元)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구
13. 총평
- 음보蔭補: 조상의 음덕으로 벼슬함을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시직侍直: 벼슬은 세손世孫을 시위侍衛하는 직책이다. 당시 세손은 훗날의 정조正祖다. 홍대용은 이 벼슬에 있으면서 학문적으로 정조를 가르치며 정조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홍대용은 당시 정조와 주고받았던 말을 일기로 자세히 기록해두었는데, 그것이 지금 전하는 『계방일기桂坊日記(계방은 세손익위사의 별칭)』이다. [본문으로]
- 영천 군수로 승진하여 두어 해 재임하다: 홍대용은 1780년 영천 군수가 되었다가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내관內官 3년, 고을 원으로 6년, 도합 9년의 벼슬살이를 했다. 김태준 교수가 작성한 홍대용 연보에 의하면 홍대용은 이해 10월 22일 중풍으로 상반신에 마비가 왔고 이튿날 별세하였다. [본문으로]
- 모좌某坐: 무슨 방향이라는 뜻인데, 무덤이 향하는 위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홍대용은 향리인 충남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촉칭 구미들 기슭에 묻혔다. [본문으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책 > 한문(漢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덕보 묘지명 -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구 (0) | 2020.04.16 |
---|---|
홍덕보 묘지명 -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0) | 2020.04.16 |
홍덕보 묘지명 - 8. 중국의 벗들이여 천하지사인 홍대용을 알려라 (0) | 2020.04.16 |
홍덕보 묘지명 - 7. 홍대용이 청의 위대한 학자인 대진을 만났다면 (0) | 2020.04.16 |
홍덕보 묘지명 - 6. 홍대용과 엄성의 국경을 넘나드는 우정 (0) | 2020.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