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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홍덕보 묘지명 - 6. 홍대용과 엄성의 국경을 넘나드는 우정 본문

책/한문(漢文)

홍덕보 묘지명 - 6. 홍대용과 엄성의 국경을 넘나드는 우정

건방진방랑자 2020. 4. 16.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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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홍대용과 엄성의 국경을 넘나드는 우정

 

 

그로부터 두어 해 뒤 엄성은 민중閩中에서 객사하였다. 반정균이 글을 써서 덕보에게 부음을 전하자 덕보는 애사[각주:1]를 짓고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쳤는데 그것이 전당에 전해진 그날 저녁이 마침 엄성의 대상大祥 [각주:2]이었다. 서호西湖[각주:3] 주변의 두어 고을에서 대상에 참예하러 왔던 사람들은 모두 경탄해 마지않으며 혼령이 감응한 결과라고들 하였다. 엄성의 형인 과, 덕보가 보내온 향을 피운 뒤 그 애사를 읽고 초헌初獻[각주:4]을 하였다.

後數歲, 客死閩中, 潘庭筠爲書赴德保. 德保作哀辭具香幣, 寄蓉洲, 轉入錢塘, 乃其夕將大祥也. 會祭者環西湖數郡, 莫不驚歎, 謂冥感所致 誠兄果, 焚香幣, 讀其辭, 爲初獻.

 

엄성의 아들 앙이 덕보를 백부伯父라 일컫는 편지를 써서 아버지의 글을 모은 철교유집鐵橋遺集[각주:5]을 덕보에게 부쳤는데, 이리저리 떠돈 지 9년 만에야 도착하였다. 그 책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초상이 있었다. 엄성은 민에서 병이 위독한 중에도 덕보가 선물한 우리나라 먹을 꺼내어 그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운명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 먹을 관에 넣어주었다. 오중에서는 이 일이 기이한 일로 널리 전파되었으며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시문을 지어 이 일을 기렸다. 주문조朱文藻[각주:6]라는 사람이 편지로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子昂, 書稱伯父, 寄其父鐵橋遺集, 轉傳九年始至. 集中有誠手畵德保小影. 誠之在閩, 病篤, 猶出德保所贈鄕墨嗅香, 置胷間而逝, 遂以墨殉于柩中. 吳下盛傳爲異事, 爭撰述詩文. 有朱文藻者, 寄書言狀.

엄성이 죽을 때 조선산 먹을 가슴에 얹고 죽었으며 그래서 그 먹을 관 속에 넣어주었다는 이야기, 홍대용이 엄성의 부고를 받고 써 보낸 애사가 2년 뒤 엄성의 대상 날에 도착했다는 이야기, 엄성의 아들이 엮어 보낸 아버지의 유집이 돌고 돌아 9년 만에 홍대용에게 도착했으며 그 유집 속에 홍대용의 작은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는 이야기 등은 그 자체로도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국경과 생사를 넘은 우정에 감동되어서다.

현재 서울대 도서관에 철교전집鐵橋全集이 소장되어 있는데 제5책에 홍대용의 작은 초상화가 들어 있다. 엄성은 이 책에서 홍대용을 고사高士라 칭하고 있으며, ‘호걸지사豪傑之士로 소개하고 있다. ‘호걸지사란 재능과 식견이 빼어나고 기개가 있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이 책의 한두 대목을 인용해 본다.

 

 

2월 초팔일 내가 묵는 여관으로 그(홍대용)가 찾아와 심성心性의 학문에 대해 토론했는데, 대략 수만 언이나 되었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선비였다. 재주란 정말 그가 어디에 사는가 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것 같다. 우리들의 구두선口頭禪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게 많았다.

 

12, 다시 내가 묵는 여관으로 그가 찾아왔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수만 언의 필담을 나눴는데,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테니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는 작은 일이니, 바라건대 각자 노력하여 피차 서로 벗으로 삼은 안목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이것이야말로 대사大事이니, 빈둥빈둥 지내면서 이 생을 잘못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훗날 각자 성취가 있다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어도 매일 조석朝夕으로 만나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우리나라 사신이 매년 중국에 들어가니 1년에 한 번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겠지요. 만약 내 편지가 오지 않는다면 이는 내가 두 형을 잊어버렸거나 내가 죽은 때문일 겁니다.”

 

 

연암은 이 단락의 끝에 홍대용과 엄성의 생사를 뛰어넘은 아름다운 우정이 중국 강남에 회자되었으며 사람들이 시문으로 이 일을 기렸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홍대용과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을 기리는 데 이 단락의 목적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홍대용과 강남 선비들 간의 이 감동적인 우정을 통해 연암이 정작 말하고 싶었던 것은, 홍대용이 국내에서와는 달리 중국에서는 대유大儒로 인정받았다는 점,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홍대용에 대한 경모敬慕의 염을 놓지 않은 중국인이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즉 중국인들과의 이 우정을 통해 연암은 홍대용의 어떤 면모에 대해, 다시 말해 홍대용의 출중한 학문과 그 빼어난 인품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2의 내용을 잇는 반면, 34과 대립하는 구성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할 터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단락에서 항주의 세 선비가 다 문장과 예술에 능한 선비였으며, 그 사귀는 이들도 모두 중국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皆文章藝術之士, 交遊皆海內知名)”라고 한 말이 잘 이해된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과정록 139

1. 왜 중국사람에게 부고를 알리는가?

2.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학자를 멸시하다

3. 뛰어난 경세적 능력을 지닌 홍대용

4. 뛰어난 경세적 능력을 꼭꼭 숨겨라

5. 중국 친구인 엄성에게 출처관에 대해 얘기한 이유

6. 홍대용과 엄성의 국경을 넘나드는 우정

7. 홍대용이 청의 위대한 학자인 대진을 만났다면

8. 중국의 벗들이여 천하지사인 홍대용을 알려라

9. 홍대용의 신원(身元)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

12. 반함하지 않은 홍대용의 일화를 끄집어내다

13. 총평

 

 

 

 

 

  1. 애사哀辭: 일찍 세상을 떠난 이를 애도하는 글이다. 엄성은 홍대용이 귀국한 2년 뒤인 1768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당시 홍대용은 부친상 중이었지만 엄성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몹시 애통해하였다. [본문으로]
  2. 대상 날: 죽은 지 2년 만에 지내는 제삿날로, 이날 삼년상이 끝난다. [본문으로]
  3. 서호西湖: 항주에 있는 유명한 호수 이름이다. [본문으로]
  4. 초헌初獻: 제사에서 첫 번째 술을 올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본문으로]
  5. 『철교유집鐵橋遺集』: 엄성의 유고집으로, 그 아들인 엄앙이 편집했다. [본문으로]
  6. 주문조朱文藻: 항주의 선비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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