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뛰어난 경세적 능력을 꼭꼭 숨겨라
하지만 덕보는 자신의 재주가 남에게 드러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한두 고을의 수령으로 지낼 때 1에도 그저 관아의 장부를 잘 정리하고, 일을 미리미리 처리하며, 아전들을 공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잘 따르게 함이 고작이었다. 獨不喜赫赫耀人, 故其莅數郡, 謹簿書, 先期會, 不過使吏拱民馴而已. |
연암은 홍대용이 일국을 경영할 만한 재상의 자질을 지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실제 홍대용의 삶은 어떠했는가? 이 점은 이 단락의 끝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바, 한두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관아의 장부나 정리하고, 아전들을 공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잘 따르게 함이 고작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이 있는가. 그런 학문과 재주와 식견으로 고작 작은 고을 수령을 하면서 장부나 정리했다니!
연암은 홍대용이 “자신의 재주가 남에게 드러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不喜赫赫耀人)”기에 그랬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홍대용이 지닌 인간적 미덕 중 겸손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기실 연암이 드러내고자 한 바는 당대의 조선 사대부 사회에서 홍대용처럼 걸출한 선비가 맞닥뜨려야 했던 지독한 ‘역설’이었을 터이다. 천리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하면 노둔한 말보다도 못한 법이다. 조정에 우뚝 서서 일국을 경영할 책략을 갖춘 제갈량과 같은 선비에게 5천 호나 만 호의 조그만 고을을 다스리게 한다면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겠는가. 홍대용이 “스스로 과거를 단념한 채 명리에의 생각을 끊고서 조용히 집에 들어앉아 좋은 향을 피우거나 거문고를 타며(其早自廢擧, 絶意名利, 閒居爇名香皷琴瑟)” 지낸 것도 그런 생활 자체를 좋아해서라기보다 현실에 분만憤懣을 느낀 나머지 하릴없음에서 그랬던 게 아닐까. 연암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부분을 기술한 게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이 단락은 역설로 가득 차 있고, 비록 숨겨져 있어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그리고 당대의 집권층에 대한 연암의 분노랄까 비분강개랄까 그런 감정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노감은 직접적으로는 홍대용으로부터 촉발된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연암 자신의 처지, 연암 자신이 직면해야 했던 역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단락의 구성을 보면 두 부분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부분은 중국인들이 보내온 서화와 편지 등을 빈소에 벌려 놓았다는 내용이고, 뒷부분은 우리가 조금 전에 검토한 내용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두 부분이 묘한 대비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홍대용을 몹시도 알아주어 서화를 보내고 편지를 보내고 한 것이라면, 조선의 위정자와 사대부는 홍대용을 통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이러한 대비의 골자다. 이 단락의 취하고 있는 이러한 대비적 구성 때문에 역설은 더욱 커지고 비분은 더욱 깊어진다.
▲ 전문
인용
9. 홍대용의 신원(身元)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구
13. 총평
- 한두 고을의 수령으로 지낼 때: 태인 현감과 영천 군수를 지낸 것을 말한다. 연암은 이 글의 마지막 단락에서 이 점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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