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홍대용이 청의 위대한 학자인 대진을 만났다면
사실 항주의 세 선비는 문장과 예술에서 그리 빼어난 인물들이 아니었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鄰(1879~1948)는 당시 홍대용이 대진戴震(1724~1777)과 같은 청나라의 석학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한 바 있다.
대진은 고증학자로서 기철학氣哲學을 토대로 다양한 학문 세계를 펼쳐 나갔다. 20세기 전반기 중국의 걸출한 교육가인 채원배蔡元培는 청대淸代의 가장 위대한 세 사상가로 황종희黃宗羲(1610~1695), 대진, 유정섭兪正燮(1775~1840)을 꼽은 바 있다. 홍대용 역시 기철학 위에 자신의 사상을 구축해갔던 만큼 만일 두 사람이 만났더라면 서로 도움이 되었을 터이다. 하지만 대진의 사상은 크게 보아 구래舊來의 중국 철학의 틀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에게는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은 기존의 틀을 허무는, 인간학적이자 정치학적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이 발견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대진의 상상력은 홍대용의 그것보다 훨씬 작으며, 그 문제의식은 홍대용의 그것과 달리 퍽 진부하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대진의 대표 저작인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과 홍대용의 대표 저작인 『의산문답』을 읽고 직접 한번 비교해 보라. 그러므로 홍대용이 대진을 만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후지츠카처럼 홍대용이 이 때문에 구투를 벗지 못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후지츠카가 보여주는 사고방식은 조선은 늘 중국의 아류이고 그 영향 아래 있었다는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본제本題로 돌아가자. 항주의 세 선비의 실상이 이러했으므로, “그 사귀는 이들도 모두 중국의 저명한 인사들(交遊皆海內知名)”이라는 연암의 말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연암 스스로도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연암은 왜 굳이 이렇게 말했을까? 아마도 홍대용이 조선에서와 달리 중국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보니 이런 과장이 나타나게 된 것이리라.
▲ 전문
인용
9. 홍대용의 신원(身元)
10. 홍대용의 묘지명을 복원하다
11. 불온하고 과격한 묘지명의 1구
13.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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