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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사흘간의 백일몽(김옥균, 갑신정변)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사흘간의 백일몽(김옥균, 갑신정변)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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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흘간의 백일몽

 

 

건수만 있으면 싸우는 게 원래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빛나는 전통이다. 조선이 왕국이었던 초기 100년을 제외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늘 두 파로 나뉘어 서로 싸워왔다. 때로는 각기 다른 왕위계승권자를 끼고서 다뤘는가 하면,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이념 논쟁으로 갈라서기도 했고, 대외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싸우기도 했다. 이는 단일한 권력(국왕)가 아닌 집단적 권력체가 지배하는 체제의 생리 상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난에 처한 19세기 말에도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개화와 위정척사로 맞서던 형국이 이제 개화당과 사대당의 대립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애초에 개화를 주장하고 집권했던 민씨 정권이 노선을 선회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다. 전선이 달라지자 민씨 일파는 느닷없이 대원군을 물리쳐 준 청나라 측으로 붙어 사대당의 주력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처음에 민씨 정권이 개화를 주장했던 이유는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말하자면 대원군이 쇄국 이데올로기로 버텼으니까 그를 타도하고 들어선 민씨 정권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 개항과 개화를 내세워야 했던 것이다. 이렇듯 민씨 정권은 집권자의 기본적 자질이자 덕목인 정책의 일관성마저도 유지하지 못했다.

 

대원군이 역사를 거스르려 했던 것은 물론 잘못이지만 민씨 세력이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나라를 끌어들인 것은 더 큰 잘못이었다. 집안의 개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바깥의 늑대를 불러들여 개를 잡아먹게 한 꼴이기 때문이다. 과연 대원군을 납치하고 반란을 진압한 청군은 임무가 끝났는데도 물러가기는커녕 아예 주둔군으로 탈바꿈한다. 게다가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병권을 틀어쥐고, 이홍장이 보낸 독일인 묄렌도르프(Möllendorf)는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한다(청나라의 독일 영사관에 근무하던 그로서는 대단한 출세다)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외국인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화교(華僑)는 바로 이때 처음 들어왔다(그러니까 자장면의 역사도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으로 파견된 청군을 따라 청나라 상인 40여 명이 입국한 게 조선 최초의 화교다. 이후 양국 간에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으로 오는 중국인의 수는 크게 늘어났다. 세계 곳곳에 차이나 타운을 건설하고 자기 국적을 버리지 않으면서 집단 거주하는 습성에 따라 화교들은 주로 항구 도시, 특히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1899년 중국 산둥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면서 또 다시 대규모로 화교가 유입되었는데, 그래서 한국 화교 중에는 산둥 출신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남의 나라에서 웬 유세냐 싶겠지만 실상 당시 청 나라는 조선을 남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피를 나눈 혈맹으로 여긴다는 뜻일까? 물론 그건 아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진압하고 청나라는 조선에게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통상조약을 강요했는데, 그 조약문에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屬邦, 속국)이라고 정식으로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의도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욕심이 점점 노골화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조선의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수구로 돌아선 민씨 정권이 청의 그런 태도를 적극 환영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개화당은 당연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대당은 오로지 자파의 집권과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나라 전체를 중국에 넘기려 하고 있다. 나라와 당파가 모두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윽고 그동안 숨어 있던 개화당의 실질적인 보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개화의 이념과 이론에서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 소장파 개화론자들의 지도자이며 나이로도 그들의 형님뻘인 김옥균(金玉均, 1851~94)이다.

 

쇄국의 서슬이 시퍼렇던 1870년경부터 오경석과 박규수(朴珪壽)에게서 개화 사상을 배운 김옥균은 조선이 추구해야 할 개화의 모델은 청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군사적 성격이 강한 발전 전략을 택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장차 동양의 프랑스처럼 일면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회 전반적인 균형을 갖춘 강국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분이나 문벌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해야 하며, 각종 제도와 산업을 근대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그는 안동 김씨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중인 신분인 오경석을 스승으로 삼을정도였으니 신분제 철폐의 주장은 결코 괜한 소리가 아니다). 이렇듯 권력만 주어지면 언제든 정책화할 수 있는 탄탄한 이론을 갖추었기에 김옥균(金玉均)은 일찍부터 개화파의 보스로 인정받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세 차례나 다녀오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성과를 시찰한 것은 물론 일본의 정객들과 두루 교류를 맺어둔 그였으니, 말하자면 공부는 다 마쳤고 시험만 기다리고 있는 학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시험은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고시에만 일로매진해 왔는데 갑자기 고시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정책을 펴는 정권을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다. 물론 김옥균이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쿠데타를 구상한 건 아니지만, 청나라가 간섭하지 않고 민씨 정권이 개화 노선을 정상적으로 유지했다면 그런 극단적인 수단까지 강구하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다.

 

 

19세기의 방송국 지금 종로에 있는 우정국 건물이다. 1884101일부터 업무가 개시되었으나 2개월 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무대가 되었다. 정보ㆍ통신의 허브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방송국에 해당한다.

 

 

1883년부터 김옥균(金玉均)은 소장파 개화론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거사를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쿠데타의 지도부는 이미 구성되었으니 가장 필요한 것은 물리력인데, 이것은 박영효가 양성한 신식 군대와 김옥균이 사관학교의 설립을 위해 일본에 유학을 보낸 생도들이 담당한다(이 생도들 중에는 나중에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는 서재필(徐載弼)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김옥균은 개화당에 호의를 보이는 일본 측의 동의를 얻어 유사시에는 일본 공사관 수비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조처한다. 이것으로 약소하나마 쿠데타의 3대 조건(이념, 지도부, 물리력)이 갖추어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일정뿐이다. 원래 쿠데타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는 행위이므로 큰 것에서 뭔가 균열이 생겨야만 일정을 잡을 수 있다.

 

그 거사 일정을 정해준 것은 청나라다. 1884년 봄 청나라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와 마찰이 일어나자 조선 주둔군의 절반을 빼서 그곳에 투입한다. 일단 조선의 청군은 1500명으로 줄었다. 게다가 곧이어 여름에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청나라는 참패하고 만다인도차이나에서 중국이 전통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지역은 베트남이다. 일찍이 한나라 시절부터 안남(安南)으로 불리던 이곳은 한 무제9군을 설치하면서 중국의 속령으로 편입되었다(한반도에 한군이 설치된 시기다). 이후 약 1천 년 동안 그런 상태였다가 중국에 비중화세계의 이민족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베트남에도 독립 왕국이 성립되었다. 곧이어 명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베트남은 한반도의 조선과 달리 사대 대신 투쟁을 택해서 15세기에 립을 이룬다. 그러나 영국에게 인도를 빼앗긴 프랑스가 19세기부터 인도차이나에 손을 뻗치면서 베트남은 중국과 프랑스가 영향력을 다투는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여기서 프랑스가 승리한 것은 장차 베트남 전쟁의 불씨를 남기는 동시에, 인도차이나만이 아니라 극동 세계에도 큰 후유증을 남겼다. 조선의 개화 세력에게 기회를 주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렇듯 19세기에는 국지적인 사건이 일파만파를 부를 만큼 전세계가 이미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개화당으로서는 절호의 찬스가 아닐 수 없다. 드디어 D-데이가 잡혔다. 그 해 124(양력) 개화당은 홍영식이 주관하는 우정국(郵政局, 우체국) 낙성식을 계기로 사대당의 대신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쿠데타 자체는 실패였다. 연회식장에 투입된 쿠데타군은 현장에서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혔을 뿐 정부 요인들을 처단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꿩 대신 닭(?)이랄까? 반군은 고종(高宗)민비(閔妃)를 창덕궁 옆의 경우궁(景祐宮, 순조純祖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으로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즉각 왕의 이름으로 사대당의 보스들을 불러들였다. 민영익의 아버지인 민태호,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한 민영목(閔泳穆, 1826~84),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초청한 조영하(趙寧夏, 1845~84) 등이 당시에 영문도 모르고 경우궁에 갔다가 살해당한 자들이다(민태호 부자와 민영목은 민응식과 더불어 4四閔이라 불리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그 중 둘이 죽고 하나가 중상을 입었으니 사대당은 치명타를 당한 셈이다). 이것으로 일단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성공했다.

 

정권을 장악한 김옥균(金玉均) 일파는 곧바로 다음 단계, 즉 새 내각을 구성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총지휘자답게 김옥균은 배후로 물러나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은 입각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개화당만이 아니라 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원(李載元, 1831~91)과 아들 이재면 등 왕실 종친들을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구색을 맞추기 위한 인사지만 쿠데타 정권이라는 색채를 제거하는 데는 대단히 효과적인 조치다. 이튿날인 125일 새 내각이 발표되면서 드디어 새 정권은 쿠데타라는 딱지를 떼는 듯 보였다. 나아가 126일 아침 문벌과 신분을 폐지하고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혁신정강까지 발표함으로써 드디어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못한 개혁+개화라는 역사적 사명은 완수되는 듯 보였다. 김옥균(金玉均)의 꿈은 실현된 듯 보였다.

 

그것을 한낱 사흘간의 백일몽으로 만든 것은 민비와 일본이다. 우선 125일 민비는 개화당으로 위장한 위안스카이의 첩자를 만난 뒤 김옥균에게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아직 소수 병력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김옥균은 넓은 창덕궁을 수비할 자신이 없으므로 극구 만류했으나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국왕 부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종(高宗)이 혁신정강을 공식적으로 추인하는 절차가 약정되어 있던 126일 오후 세 시를 기해 1500명의 청군이 창덕궁으로 몰아닥쳤다. 겨우 50명의 병력과 사관생도로 이루어진 쿠데타군이 중과부적을 느끼고 후퇴할 때, 애초에 돕기로 했던 일본군은 재빨리 창덕궁에서 철병해 버렸다. 김옥균(金玉均)3일 천하, 아니 그보다도 조선 최후의 개혁 시도는 이것으로 싱겁게 끝나 버렸다.

 

 

잘린 개화의 목 김옥균(위쪽)의 쿠데타가 실패한 이유는 필요한 무력 기반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교활한 민비(閔妃)와 그녀에게 휘둘린 고종(高宗)의 책임도 크다. 민비는 아무런 이론도 없이 무작정 개화를 추진하다가 정작 개화가 필요할 때는 수구로 돌아서 버렸다. 아래 사진은 나중에 암살되어 귀국한 김옥균의 시신에서 머리를 잘라낸 장면이다.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쓴 휘장이 보인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

사흘간의 백일몽

내전의 국제화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어느 부부의 희비극

기묘한 제국

후보 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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