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제국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는 동안 조선의 정세는 미묘하게 돌아갔다. 일본은 물러났으나 조선에서 발을 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조정을 손에 넣은 친러파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사실 침략의 야욕이 아니더라도 그간 조선에 들인 정성을 생각한다면 일본은 조선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조선을 먹기 좋은 떡으로 만들기 위해 내정 개혁에 그토록 애쓴 것이나, 조선 민중의 거센 도전과 강호인 청나라마저 물리친 것을 생각하면 이제 와서 조선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런데 난데없이 러시아라는 놈이 오더니 다 잡아놓은 닭을 털도 뽑지 않고 삼키려 한다. 일본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삼국간섭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와 독일은 들러리만 섰을 뿐, 실제 일본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공작한 것은 러시아다. 그 사건으로 랴오둥을 뱉어낸 것만도 땅을 칠 일인데, 이제 러시아는 조선에서마저 물러나라고 강요한다. 일본은 러시아와 한 판 붙을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결승 상대로 여겼던 청나라는 준결승 상대에 불과했다.
문제는 청나라와 달리 러시아는 당당한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서 일본의 영원한 모델인 영국마저 두려워하는 상대라는 점이다【러시아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정치적으로 제국이면서 경제적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였다. 당시 전세계를 통틀어 제국 체제를 취한 나라는 유럽의 러시아와 터키, 아시아의 청나라인데, 셋 중에서 제국주의 열강에 속한 것은 러시아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방식의 제국 체제는 세계적으로 힘을 잃어가는 추세였다. 청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한때 강성했던 터키 제국(오스만투르크)은 서유럽 열강에 위축되어 발칸과 소아시아에서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였으며, 러시아 제국은 덩치만 컸을 뿐 유럽의 후진국이라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제국은 1910년대에 한꺼번에 멸망하게 된다. 역시 제국이란 새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체제였던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가 중국과 조선에서 취하는 행동을 보면 일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따라서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거치지 않으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 될 수도 있다.
친러파가 조선 정부를 장악할 때 일본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은 이런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조선은 다시 한 번 귀중한 시간과 기회를 벌었다. 두 메이저 간의 결승전이 예정되어 있는 이상 넉넉한 여유는 없겠지만 아마 한반도가 힘의 공백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앞서 일본과 청나라의 준결승이 벌어지기 전에도 조선에게는 폭풍전야와 같은 짧은 휴식기가 있었으나 날려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1896년 최초의 민간 정치조직인 독립협회(獨立協會)가 발족한 것은 좋은 타이밍이었다.
▲ 최초의 민간 신문 강고한 이념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서재필(徐載弼)은 『독립신문』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정부 지원금 이외에 사재까지도 털어넣었으니까. 가로 22센티미터, 세로 33센티미터의 이 한 뼘밖에 안 되는 4면짜리 신문이 한반도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창립자인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변신의 극치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사관생도로 일본에 망명했던 그는 이후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의 물결이 한창이던 1895년에는 귀국해서 언론인이 된다(실은 한 개인이 이런 편력을 걸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조선 사회의 인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래도 급진적 개화론으로 출발했던 이념의 뿌리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1896년 4월 7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뒤이어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독립협회가 내세운 개혁 노선은 그때까지 나왔던 모든 개혁론의 집대성에 해당한다. 자주국권과 자유민권의 이념을 골간으로 삼고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 경제적으로는 근대적 공업 체제, 사회적으로는 서유럽식 시민사회를 주장했으니, 민간 단체의 이념과 주장으로서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급진적이고 호기롭다. 아마 불과 2년 전에만 독립협회가 생겼더라도 협회는 당장 폐쇄되고 서재필(徐載弼)은 처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수구의 기둥이었던 민비(閔妃)도 죽었고,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는 당시 여느 서유럽 국가들에 못지 않을 만큼 자유주의적이었다.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주된 활동은 일단 일반 민중에게 애국계몽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제도권 정치가 무능해진 마당에 정치적 야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오랜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한 것은 자주국권을 앞세운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정치적 이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고종(高宗)으로서는 종묘 사직을 때려부수는 듯한 씁쓸한 마음이었겠지만, 입헌군주제까지 운위되는 판에 그가 강력한 ‘NGO’의 주장을 거부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독립협회가 고종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협회는 고종을 역대 어느 왕보다 영예로운 지위로 격상시켜준다. 독립문의 완공을 한 달 앞둔 1897년 10월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 제국의 황제가 되는데, 이것은 독립협회(獨立協會)와 친러파 정부의 완벽한 합작품이었다【사실 이것은 원래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급진적 개화파의 구상이었다. 당시 혁신정강에서는 중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하고 조선의 국왕을 중국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끌어올린다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변 세력은 고종(高宗)의 삼인칭을 군주가 아닌 ‘대군주’라고 불렀고, 이인칭도 ‘전하’가 아니라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폐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독립협회는 그런 급진적 개화파의 노선을 계승하고 있었으므로 발족 초기부터 조선의 제국화를 추진했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것도 1897년 9월 말 독립협회 회원이자 농상공부협판이었던 권재형이 ‘칭제(稱帝)’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데서 비롯되었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로서는 고종(高宗)이 왕이든 황제든 별 상관없었을 것이다】.
▲ 제국의 기념사진 드디어 조선은 왕국에서 제국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왕국일 때도 정상이 아니었으니 제국은 말할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국호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국가를 어떻게 이끌 것이냐는 문제였으나, 대한제국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여기 모인 고종과 대신들은 일단 뿌듯하기만 했다.
그에 앞서 1896년 1월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의 마무리로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이라는 새 연호를 제정한 바 있었다.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대한제국도 그때 탄생했겠지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늦어졌으니 고종(高宗)은 스스로 황제 등극을 미룬 셈이다. 이렇게 황제 자리가 별로 매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면 대한제국도 과연 명실상부한 제국인지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좀 멀기는 하지만 건양의 ‘바로 전’에 한반도 왕조가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던 경우는 무려 900여 년 전인 고려 광종(光宗) 때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광종은 중국이 5대의 분열기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제스처로서 독자적 연호를 제정했을 뿐이었고 중국의 신흥 왕조인 송나라가 안정되자 곧 송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런 사정은 대한제국도 마찬가지다. 제국이라니까 상당히 자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주체적인 체제 전환이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가 한 발자국씩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다분히 선언적인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일본 추종의 성향이 강한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러시아에 줄을 대고 있는 친러파 정부가 사이좋게 제국화 작업을 추진한 데서도 대한제국의 괴뢰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그래서 앞으로도 대한제국이라는 어설픈 호칭보다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계속 쓰기로 하자).
이렇듯 알맹이 없는 ‘무늬만 제국’이었기에 막상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그 작업을 주도한 두 세력은 제국이라는 그릇에 채울 알맹이를 둘러싸고 곧 의견이 엇갈린다. 독립협회는 재야 세력인 만큼 입헌군주제라는 기존의 당론을 고수한 반면, 친러 수구파 정부는 집권 세력이므로 당연히 전제군주제를 주장한다(물론 고종은 황제가 되었어도 여전히 스스로 허수아비가 되고자 했으므로 아무런 발언권도 없다. 따라서 친러파가 말하는 전제군주제란 실상 자신들이 전제권을 가지는 체제를 말한다). 이렇게 근본적인 체제 문제에서부터 노선이 달라지자 두 세력은 다른 문제들을 놓고도 점차 서로 각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1898년 초 정부가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부산의 영도를 조차해주려 한 것은 독립협회(獨立協會)만이 아니라 조선 국민 전체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해 3월 10일 독립협회는 서울 한복판의 종로에서 무려 1만 명이 넘는 군중을 모아 대규모 규탄대회를 열었는데, 이른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다. 예전 같으면 유림이 만인소라는 항의 방식을 썼겠지만, 이번에는 일반 국민들이 참여한 정식 집회였으니 한층 진일보한 시민사회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이다(독립협회의 민중 계몽운동이 결실을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방의 봉기나 반란이라면 몰라도 서울 도심에서 평민들이 대형 시위를 벌인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므로 아무리 수구에 물들고 외세에 의존적인 정부라도 겁을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부는 급히 러시아와 연락을 취해 영도의 조차 계획을 취소했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때까지 일본이 사용하고 있던 월미도의 석탄창고도 반환받았다. 시민의 힘으로 정부와 외세를 굴복시킨 바로 이때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혹시 내친 김에 의회가 구성되고 헌법이 제정되었더라면, 이후의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독립협회(獨立協會)는 여세를 몰아 1898년 10월 친러파 정권을 탄핵하고 박정양을 수반으로 하는 개화파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고는 애초부터의 목표였던 의회를 설립하기 위해 중추원을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친러파가 기회를 잡은 것은 바로 거기서였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무리가 의회를 구성한다면 왕이든 황제든 고종(高宗)은 바지저고리가 될 게 뻔하다. 친러파의 이런 꼬드김에 넘어간 고종(高宗)은 개혁 세력의 지원으로 얻은 황제로서의 권한을 개혁 세력의 탄압에 써먹었다. 그 해 11월 그는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간부들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무능한 위정자가 악한 위정자보다 낫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터이다. 평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오로지 수구적인 목적에만 왕권을 행사해서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린 고종(高宗)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러시아 공사관에 1년이나 머물렀던 고종이었으니, 그런 결정을 내린 데는 아마 입헌군주제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수구 친러파 인물들과의 두터운 친분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고종은 그것과 더불어 자신이 상징적 존재로나마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는 토대가 사라졌고 자신의 제국이 자주 노선을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무산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 최초의 자발적 집회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주관하긴 했지만 만민공동회는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커다란 시위 효과를 발휘했다. 당시 서울 시민은 20만이 채 못 되었으나 무려 1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일부 불순 세력은 사진과 같은 투서로 만민공동회를 모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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