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어느 부부의 희비극(홍범14조, 을미사변, 단발령, 아관파천)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어느 부부의 희비극(홍범14조, 을미사변, 단발령, 아관파천)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9:52
728x90
반응형

 어느 부부의 희비극

 

 

1895년 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를 받았다.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에서 또 하나의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서양 열강이 아니라 일본이 상대방이었다는 점에서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서양 열강이 중국과 체결했던 각종 불평등 조약을 망라하여 모방한 것이었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대만 등을 빼앗았고 막대한 배상금도 받아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제1항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조선 내에서도 그 조항을 증명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모화관이 문을 닫은 것이었다).

 

물론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킨 일본의 의도는 이제부터 청나라 대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과연 일본은 곧바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와 서광범을 귀국시켜 2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친일 성향으로 개편하고김옥균(金玉均)이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새 내각의 수반이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18943월 상하이에서 민비(閔妃) 정권이 보낸 홍종우라는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민비 정권은 여러 차례 일본 측에 김옥균 일당을 압송하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은 당연히 그 요구를 일축했다. 김옥균이 일본의 정객들과 교류하면서 컴백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자 초조해진 민비 정권은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한 차례 섣부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일본은 김옥균(金玉均)을 빼돌려 보호하고자 했으나, 결국 김옥균은 자객의 계략에 빠져 상하이로 갔다가 피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 암살 사건으로 일본의 언론이 조선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조선 침략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을 보면, 아마 김옥균은 일본의 정객들과 상당히 두터운 친분을 쌓았던 듯하다, 비현실적인 선언에 그쳤던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수정해서 홍범 14조라는 새로운 개혁안을 조선 정부에 강권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조선 정부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

 

우선 조선의 중앙 관제에서 언제나 으뜸이었던 의정부가 폐지된 데서 민비(閔妃) 정권은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에 모든 권한을 빼앗겨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지만 의정부가 지니는 상징성은 대단히 크다). 게다가 왕실과 국정을 분리시킨 것은 일종의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겠다는 구도였으니 이제 민비(閔妃) 정권은 발 딛고 설 곳조차 없어졌다. 궁지에 몰린 그들의 눈에는 1500년에 걸친 중국의 영향력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도 해방감을 주긴커녕 커다란 불안 요소로만 보일 뿐이다. 그런 불안감에다 오랫동안 교린의 대상이었던 일본의 지배를 받는 데 대한 거부감이 겹치면서 민비 정권은 청나라를 대신해줄 새로운 파트너를 섭외한다. 그 파트너는 바로 러시아다.

 

 

욕된 죽음 20년 동안 조선의 실권자로 군림했던 민비(閔妃)는 사진에 나오는 건천궁의 옥호루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 건천궁은 경복궁에서도 가장 북쪽의 후미진 곳이었으니 야밤에 거기까지 도망친 민비의 다급한 심정이 보이는 듯하다. 조선 민족에게 그녀는 치욕스런 국모였으나 그녀의 죽음은 다른 의미에서 국가적인 치욕이었다.

 

 

18957월 민비 정권은 마침내 박영효를 내쫓고 친러파인 박정양과 어윤중을 내세워 3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했다민비 정권의 친일 - 친청 - 친러로 이어지는 눈부신(?) 노선 변화에서 철저한 무원칙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정권이 노선을 바꾸었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민비 정권의 변신은 자체 이념에 따른 게 아니라 언제나 적에 대한 반대로 취해졌다는 데서 일관성이 없다. 처음에는 대원군을 반대했기에 친일이었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한 급진적 개화파를 반대했기에 친청으로 돌았으며, 일본이 청나라를 제압하자 친러를 택했으니, 그 변화는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보겠다는 안간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 단독 주인이 된 마당에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일본이 아니다. 더욱이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얻은 랴오둥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 때문에 곧바로 토해내야 했던지라 러시아라면 원한이 깊을 수밖에 없다. 조선 정부를 친러로 선회하게 만드는 데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활약이 컸다면, 이번에는 일본 공사가 활약할 차례다. 그런 의도가 있었기에 그 무렵 일본이 조선에 새로 파견한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1846~1926)는 전의 공사들과 달리 무관 출신이었다.

 

부임한 직후 그는 승려의 신분이라고 자처하며 남산의 일본 공사관에 은거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그랬다뿐이고 비공식적인 활동은 무척 활발하다. 우선 그는 민비 정권에 반대하는 조선의 내부 세력과 접선해서 해고 직전에 있던 조선군 훈련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훈련대의 수준이 형편없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한양에 와 있던 일본의 양아치들과 상인, 기자, 통신원들까지 긁어모아 얼기설기 조폭 같은 군대를 편성했다. 그 용도는 바로 다음 달인 18958월에 드러난다. 느닷없이 경복궁을 기습한 것이다.

 

일개 깡패들을 당해내지 못할 정도라면 궁성 수비대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어쨌든 경복궁 수비대는 19791212일 새벽에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처럼 별다른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깡패들의 입성을 허락했다. 왕의 침실로 들어간 깡패들은 고종(高宗)의 옷을 찢었고 세자의 목을 칼로 후려쳤다. 다행히 세자는 죽지 않고 기절한 덕분에 살아남아 나중에 왕위까지 이을 수 있었지만 그 행운은 그의 어머니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왕비의 침실로 간 깡패들은 앞을 막아서는 궁녀들을 죽인 다음 민비(閔妃)마저 살해했다. 더욱이 그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민비의 시신을 불에 태우고 재마저 여기저기 흩뜨려 놓아 찾을 수 없게 했다. 허수아비 남편을 주무르면서 20여 년간 권세를 누리는 동시에 조선의 몰락을 재촉했던 민비는 결국 이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역사를 거스른 대가일까?

 

 

신데렐라의 최후 한미한 가문의 딸이었다가 일약 일국의 왕비가 된 민비(閔妃)의 삶은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황후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결국 그녀는 일본 하급 무사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위 사진은 민비의 국장 장면.

 

 

일본 정부는 사건 직후 미우라와 관련 인물들을 급히 소환하고, 우발적인 범행이라며 발뺌했지만 사전 승인 또는 적어도 묵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가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에서 알아차리는 바람에 관련 인물들을 재빨리 철수시켰기 때문이다(게다가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어쨌거나 숙적인 민비(閔妃)를 제거하고 뜻을 이루었다고 판단한 일본은 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김홍집(金弘集) 내각에게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속 추진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국모였던 민비를 비참하게 잃은 조선 백성들이 그 개혁을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그런 분위기에서 11월에 시행된 단발령(斷髮令)은 조선 백성들의 반일 감정을 극에 달하도록 만들었다(단발령이 시행된 날짜는 18951117일이었는데, 하필 이 날짜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날을 기해 조선은 그때까지 쓰던 음력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양력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18951117일은 양력으로 189611일에 해당한다)단발령의 표면상 이유는 위생에 좋고 편리하다는 것이었으나 어쩌면 일본이 조선 백성의 저항적 분위기를 테스트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상했던 대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손할 수 없다는 유교 예법에 따라 단발령에 대한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났는데, 주목할 것은 사대부(士大夫)들은 물론이지만 일반 백성들까지도 그랬다는 점이다. 반일 감정도 원인이겠으나 500년 동안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면서 조선사회가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으로 도배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래서 고종(高宗)과 정부 관료들이 이발을 해서 시범을 보였음에도 성리학의 골수 분자들은 문명을 야만으로 바꾸려는 조치라며 결사 반대했다. 특히 최익현은 머리를 잘릴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골수 분자답지 않게 재치있는 명언을 남겼다.

 

그 직후 조선 전역에서 일본에 반대하는 의병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조선 백성들은 아마도 전 해부터 전개된 조선의 일본화 작업보다 단발령(斷髮令)에 더 큰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다.

 

 

단두 같은 단발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종과 세자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상투를 잘라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잘리는 것처럼 통곡했으며, 잘린 상투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백성들보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더 사무친 사람이 있다. 바로 일본에 의해 아내를 빼앗긴 고종(高宗)이다. 백성들은 일본을 혐오하지만 고종은 혐오를 넘어 일본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에게 민비(閔妃)는 사랑하는 아내라기보다 20년 동안이나 자신을 이끌어주던 정신적 스승이었다. 아내가 있었기에 그는 그 긴 세월 동안 국왕의 책무를 면제받고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아내의 넓은 치마폭에 숨어 있는 한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랬으니 이제 이 세상에 홀로(?) 남게 된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에게는 상처받은 자신을 만져주고 보듬어줄 새 보호자가 필요하다.

 

물론 아버지 대원군은 싫다. 평소에도 엄하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권력에 미친 노인네인 데다가 아내를 죽인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의지할 데 없는 마흔네 살짜리 아이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든 것은 친러파인 이범진(李範晉, 1852~1910)과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다. 베베르 공사와 머리를 맞대고 짠 각본에 따라 그들은 18962월 고종(高宗)에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한다. 대원군과 친일파가 득시글거리는 궁중, 아니 그보다 아내의 치마폭이 사라진 썰렁한 궁중보다는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러시아 공사관이 훨씬 낫다는 논리다. 일국의 왕이 거처를 옮기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논리였으나 고종은 그것을 수락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왕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렇게 해서 시작한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의 피난 살림이 무려 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르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건에까지 이름을 붙일 가치가 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어쨌든 조선은 왕국인지라 왕이 피난한 효과는 있었다. 김홍집(金弘集) 친일내각은 즉각 김병시(金炳始, 1832~98)를 수반으로 하는 친러내각으로 바뀌었고, 대원군은 또 다시 정계에서 은퇴했다(칠전팔기의 뚝심을 지닌 그도 이번에는 마지막 은퇴였다). 김윤식은 체포되고 어윤중은 피살되었으며,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쓴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젊은 주역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견문을 준비해야 했다. 이것만도 볼 만한 코미디지만 진짜 코미디는 그 다음이다. 정권을 친러파가 완전히 장악했어도 고종(高宗)은 경복궁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부터 1년 동안 정부는 남의 나라 공사관에 가 있는 제 나라 국왕을 환궁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궁리하고 상소하지만 국왕은 악착같이 가지 않으려 버티는 희한한 쇼가 여러 차례 벌어진다. 아무리 일본의 위협이 남아 있다지만 일국의 왕으로서 그렇게 겁이 났을까?

 

그토록 무겁던 고종(高宗)의 궁둥이가 바닥에서 떨어진 것은 18972월이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일본을 충분히 견제할 만큼 튼튼해졌다고 판단한 그는 1년이나 남의 집 신세를 지고서야 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그가 주연을 맡은 코미디는 한편이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그동안 보인 추태에 어울리지 않게 황제를 자칭하게 되는 사건이다.

 

 

발코니의 국왕 정신적 지주였던 아내가 죽자 고종의 정신은 금세 산란해졌다. 그래설까? 그는 제 집을 놔두고 1년 동안이나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사진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고종(高宗)의 모습이다. 그 바깥에는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있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시위대는 조선인들이 아니라 일본군이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

사흘간의 백일몽

내전의 국제화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어느 부부의 희비극

기묘한 제국

후보 단일화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