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단일화
고종(高宗)은 적어도 몇 년간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친러 수구파 정부로 복귀한 조선은 이후 한동안 별 탈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무참히 짓밟았어도 큰 홍역을 겪은 만큼 나름대로 개화 정책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정부는 유럽 열강과 차례로 수교를 늘려가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친러 노선을 취하는 이상 조선 정부는 러시아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지역은 만주와 한반도였다. 친러 정권이 부활함에 따라 조선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여긴 러시아는 때마침 1899년 산둥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만주에 병력을 파견하고는 사태가 종결된 뒤에도 계속 늘러앉아 만주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그때 러시아의 전통적인 앙숙인 영국이 나섰다. 그러나 유럽의 정세도 심상치 않은 판에 극동에까지 직접 개입하기는 무리였으므로 영국은 파트너를 구하는데, 그게 바로 일본이다. 1902년 유럽과 아시아의 두 섬나라는 영일동맹을 맺어 각자 주어진 무대에서 패권을 잡자고 굳게 약속한다【1870년대부터 유럽 각국이 활발하게 이리저리 동맹을 맺고 협상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당대의 세계 최강국인 영국은 19세기 말까지 어느 나라와도 동맹 관계를 맺지 않았다(당시 유럽의 외교전을 주도한 인물은 독일의 비스마르크였기에 그 시기의 유럽 질서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영국의 이런 태도를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부르는데, 세계 최강이기에 가능했던 자세다. 그토록 오만했던 영국이 드디어 극동에서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영국으로서는 파트너에게 동아시아의 질서 유지를 맡겼으니 만족이지만, 일본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영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영국과의 동맹으로 일본은 이제 러시아만 물리친다면 다른 유럽 열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동아시아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일본이 러시아와 자웅을 결정하고 나서 첫 번째 타깃으로 삼을 대상이 바로 조선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1903년까지도 만주의 러시아군은 여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의 목재와 광산에 관련된 이권을 노리고 조선의 용암포를 조차했다. 만주라면 몰라도 한반도에 관계된 사건이라면 일본이 개입할 수 있는 빌미가 된다. 1904년 2월 일본은 마침내 10년 동안 미뤄두었던 조선 쟁탈전의 결승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청일전쟁에서도 그랬듯이 일본은 먼저 조선의 인천과 만주의 뤼순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나서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이 러일전쟁이다.
늙은 공룡을 상대로 했던 10년 전의 청일전쟁과 달리 이번 전쟁은 두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다. 그러나 일본에게 러시아는 청나라와는 급이 다른 강호였으므로 유럽 열강은 물론 파트너인 영국조차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 탓일까?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미국까지도 일본에게 전쟁비용을 지원하고 나섰다.
졸지에 유럽 열강을 대표해서 러시아와 맞싸우게 된 일본은 예상외로 선전한다. 우선 육군은 랴오둥의 러시아 요새를 함락시킨 뒤 남만주철도를 따라 북진해서 1905년 3월에는 만주 봉천의 러시아 주력군을 격파한다. 해군 역시 유명을 떨치던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격파하고 황해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한다. 하긴, 일본에게는 사활이 걸린 전쟁이고 러시아에게는 극동이 전체 전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니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 바빠진 공사들 만주에서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서울의 각국 공사들도 바빠졌다. 사진은 미국 공사관에 모인 각국 공사들이다. 가운데 키가 가장 큰 공사와 가장 작은 청나라 공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그런 배수진이 주효했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한계가 드러났다. 비록 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았지만 개전 후 1년이 지나자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전국민이 전시 체제에 동원된 데다 흉작까지 겹쳤고 더 이상의 전쟁 비용마저 고갈되었다. 일본은 사력을 다해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도 전쟁이 지속될 경우 전쟁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일본을 사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것은 러시아의 내부 사정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러일전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청일전쟁으로 숨통을 텄듯이 러시아의 차리즘은 국내의 정정 불안을 러일전쟁으로 타개하려 했으나 전쟁은 혁명운동을 위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차르 정부의 무능함만 드러냈다. 급기야 1905년 1월 22일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군대가 대규모 시위대에 발포하는 ‘피의 일요일’ 사태가 일어나 러시아 내부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 4장 참조).
군국주의 일본의 성장보다는 러시아 내부의 혁명운동에 더 큰 위협을 느낀 서양 열강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두 나라의 강화를 유도했다.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회복하자는 데야 누가 반대할까? 다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것으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1905년 9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 회담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권리를 일본에게 양도한 것이다【아슬아슬했던 일본의 승리는 전세계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서양 열강은 물론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쑨원 같은 식민지ㆍ종속국의 민족운동가들도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을 자랑하는 러시아에게 승리했다는 소식에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심지어 청나라의 서태후 정권도 그 전쟁을 입헌군주제가 전제군주제에 승리한 것으로 해석하고 서둘러 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등 뒤늦게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간디와 쑨원은 착각하고 있었다. 일본은 피억압 민족의 선두주자가 아니라 제국주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신흥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새끼’ 제국주의에서 ‘성숙한’ 제국주의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당당한 제국주의 국가의 자격을 획득한 일본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양도받은 권리를 행사하기로 한다. 러일전쟁의 최대 전리품, 그것은 바로 조선이다. 청일전쟁으로 수천 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해온 조선의 종주국을 물리치고, 러일전쟁으로 새로운 종주국을 물리친 다음 일본은 이게 조선의 단독 종주국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의 종주국들과는 달리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그치려 하지 않고 아예 조선을 통째로 소유하는 방법을 택한다.
▲ 북으로 북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일본은 극동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조선을 전리품으로 얻게 되었다. 사진은 만주로 진격하기 위해 평양 부근을 지나고 있는 일본군의 행진 모습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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