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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잘못 꿴 첫 단추(서원철폐, 운요호, 강화도조약)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잘못 꿴 첫 단추(서원철폐, 운요호, 강화도조약)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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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꿴 첫 단추

 

 

대원군과 위정척사파의 밀월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국란을 맞았을 때는 이해관계가 같으니까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다. 그러나 애초부터 중앙집권적 왕국을 꿈꾸는 대원군과 사대부 체제의 좋았던 옛날에 향수를 품고 있는 조정 대신들이 언제까지나 찰떡궁합이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과연 위기가 그런 대로 가라앉고 나서 갈등은 즉각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대원군이다.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끝나자마자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대원군으로서는 골수 성리학자들의 고리타분한 입장도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그보다도 전후 복구와 경복궁 재건축 등으로 돈 들 데가 많은 마당에 여전히 많은 토지를 지닌 데다 면세의 혜택까지 누리고 있는 서원들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독재에 자신감이 붙은 탓일까? 그는 반대 세력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서원 철폐는 조정 대신들만이 아니라 성균관 유림 세력의 반발까지 부를 만큼 과격한 조치였으니 분란이 빚어지지 않을 수 없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건 사람은 최익현이다. 이미 경복궁 중건 시업에도 반대한 바 있었던 그는 1873년 대원군이 명니라 신종의 사당인 만동묘마저 철폐하지 격렬한 비판을 담은 상소를 올린다. 물론 대원군이 예전처럼 아들을 꽉 잡고 있었다면 그의 상소는 별로 보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고종(高宗)의 나이도 스물이 넘은 데다가 그에게는 야망과 더불어 아이를 가진 아내가 있었다. 일단 과격한 상소를 올린 최익현은 유배형을 받았으나 집중 탄핵을 받은 대원군도 결국 그 해 11월에 실각하고 만다이후 대원군은 한양 인근의 양주로 낙향해서 은거하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자기 집인 운현궁(雲峴宮, 지금 서울의 운니동에 있었는데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다)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대원군을 퇴출시키는 절차다. 집권 기간 중에도 대원군은 특별한 관직을 맡지 않았으므로 고종(高宗)으로서는 아버지를 퇴출시킬 방법이 없었다(앞서 보았듯이 일찍이 세조(世祖)는 수양대군 시절에 영의정을 잠시 지낸 바 있으나 초기에나 가능했던 일이고 사대부(士大夫) 체제로 들어선 이후 조선에서는 왕실 종친에게 정식 관직을 제수한 경우가 없다). 그래서 고종(高宗)은 조대비가 대원군에게 만들어준 창덕궁 전용문을 잠가 버림으로써 해임 통보를 대신한다. 조선의 모호한 권력구조를 잘 보여주는 예다.

 

 

마지막 수구 중화 이념의 화신과 같았던 최익현이다. 그는 대원군의 쇄국도, 개화파의 개항도, 동학 농민군도 모조리 반대하고 오로지 옛 중화 세계만을 이상향으로 고집했다.

 

 

 

사실 고종(高宗)정조(正祖) 이후의 역대 왕들이 그렇듯이 그냥 하는 일 없이 왕위에 눌러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팔자 좋은(?) 왕인 데다 실제로 그런 팔자에 어울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종이 아버지를 퇴출시키는 과감한 조치를 내린 데는 그 자신의 의사보다 남편이 친정에 나설 것을 강력히 권유한 민비의 책동이 크게 작용했다. 그렇잖아도 그녀는 대원군의 정적이 된 조대비 세력은 물론이고 조정의 원로대신들과 안동 김씨, 성균관 유생들과 결탁하고 있었으니, 가히 ()대원군 연합전선을 구축했다고 할 수 있겠다(그것으로 미루어보면 아마 최익현의 상소도 예정된 코스였는지 모른다).

 

게다가 당시 민비(閔妃)는 임신중이었으므로 남편과 왕실에 대한 발언권이 더욱 컸다. 만약 그녀가 아들을 낳는다면 누대에 걸쳐 후사가 없던 왕실에서 일약 스타로 떠오를 것은 분명하다. 과연 민비에게는 아직 신데렐라의 마법이 발효중이었다. 18742월 그녀는 거뜬히 아들을 낳아, 1827헌종(憲宗)이 태어난 이래 50년 만에 왕실에서 처음으로 후사가 탄생하는 경사의 주인공이 된다. 대원군이 실각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정으로 몰려든 민씨 일가붙이들은 원자의 탄생으로 권력을 쥔 손에 더욱 힘이 실렸다.

 

 

자금 조달,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원군은 만동묘()를 철회하고 당백전(아래)을 발행했다. 왕권강화를 위한 조치였으나 그 결과는 유림의 반발로 들었다.

 

 

어쨌거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끝장난 것은 일단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잖아도 바깥 정세가 급박하면서도 어수선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의 핵심이 교체되었다는 것, 그것도 일인 독재에서 다수 독재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짐이 영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졸지에 세상이 바뀐 덕분에 정권을 쥔 풋내기 민씨들은 처음부터 대내외 정책에서 질척거린다. 대원군이 물러난 뒤에도 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상소 금지라는 엉뚱한 조치를 내리는가 하면, 일본에서 정한론이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푸느냐를 놓고도 갈팡질팡만 할 뿐 좀처럼 일관된 정책을 정하지 못한다.

 

일본이 노린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조선의 내부 혼란이다. 정한론(征韓論)을 실행할 조건은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 정한론이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던 일부 반대파의 목소리도 조선에서 대원군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진 이상 입을 닫을 수밖에 없다. 이제 노선은 정해졌고 다만 방법이 문젠데, 마침 일본에게는 좋은 벤치마킹의 대상이 있다. 20년 전 미국의 페리에게 당한 바 있었던 서양 제국주의의 단골 수법이 그것이다. 두 차례의 양요를 통해 조선도 이미 겪은 경험이지만 이번에는 연출자가 낯선 서양 열강에서 낯익은 일본으로 바뀐 데다 독불장군 대원군이 실각했으니 충분히 먹힐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도에서 1875년 가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자랑스런 산물인 일본의 근대식 증기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해상으로 온다.

 

앞서 프랑스와 미국은 침략의 구실이라도 있었으나 일본은 그것조차 없다. 그러나 구실이야 만들면 되는 게 아닌가? 어차피 바깥이라면 무조건 예민해지는 조선은 어떤 미끼를 던져도 덥석 물 테니까 구실을 만드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식수를 구한다는 이유로 함선에서 보트를 내려 선원 수십 명을 강화도에 상륙시킨 게 그 미끼다. 명백한 무단 침범이므로 조선의 수비대가 사격을 가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으로 조선은 일본의 덫에 걸려든다.

 

각본대로 운요 호는 함포 사격으로 응수하는 한편 수십 명의 전투 병력까지 풀어 정식 교전을 유도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 36명이 전사한 데 비해 일본 측의 손실은 경상자 두 명뿐이었으니 그것만도 조선 측으로서는 큰 손실이었지만, 정작 조선이 입게 될 손실과 일본이 노린 이득은 그 뒤에 가시화된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대사를 파견하면서 책임을 전가한 것이다. 이렇게 전쟁을 먼저 벌인 뒤 외교를 통해 유리한 협상 고지를 차지하는 솜씨는 과연 일본이 후발 제국주의 국가라는 게 사실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노련하고 교활한 것이었다사실 이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수법의 원조는 당시 프로이센의 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다. 1860년대에 그는 전쟁에 대하는 프로이센 의회의 출석을 미룬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덴마크를 공격했다. 그리고는 주변국들의 중립 약속을 받아내고 오스트리아마저 제압한 다음 의회에 나가 사후 승인을 얻어냄으로써 전쟁과 외교의 절묘한 조합을 선보였다. 곧이어 그는 프랑스에게 똑같은 수법을 구사해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유도한 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제국을 성립시켰다. 일본이 비스마르크의 특허에서 한 수 배웠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유신 정부는 나중에 독일의 흠정헌법을 모방해서 제국헌법을 만들 정도로, 같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던 독일을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생긴 배 위쪽은 미국의 제너럴 셔먼 호이고 아래쪽은 일본의 운요 호다. 둘 다 대포를 장착한 증기선인데, 조선인들은 19세기 초부터 이런 배를 이양선(異樣船), 즉 이상한 모습의 배라고 불렀다. 서양인들만 가진 줄 알았던 이 이양선을 일본인들이 몰고 왔으니 조선 정부가 겁을 집어먹은 것도 당연하다.

 

 

일본의 의도대로 이듬해인 18761월 강화도에서 양측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지난해에 있었던 불미스런 사건의 뒷처리를 하자는 것이었지만, 조선이나 일본이나 협상의 진정한 목적이 통상 여부의 결정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협상 반대의 목소리도 컸다. 아직 정부에 남아있는 대원군 세력과 성균관 유림은 모처럼 만에 다시 한 목소리를 냈고, 유배형을 마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최익현도 오랑캐와의 협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재야의 대원군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최익현은 또 다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 반면 베이징에 가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효과를 목격한 적이 있는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吳慶錫, 1831~79) 등은 협상만이 아니라 개항까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의견보다 중요했던 것은 청나라가 개항을 권유했을 뿐 아니라 민씨 정권이 대원군 정권과의 차별을 보이려면 어차피 개항의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이었다.

 

결국 얼마 간의 협상을 거친 뒤 187622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국제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인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얼핏 보면 조약의 내용은 그다지 불평등하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영국이 패전국 중국에게 강요한 난징조약에서처럼 전쟁 배상금 같은 것은 없으며, 조선의 항구를 할양하거나 조차한다는 조항도 없다. 우선 조선에 일본 영사를 두겠다는 조항은 모든 수교의 기본이니까 연하다. 또 부산을 포함해서 세 개의 항구를 개방다는 조항은 전통적으로 3포를 통해 일본과 교역왔으니 전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조약의 제1반갑기 그지없는 조항이다. 조선은 자주 국가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게 선의를 베푼 걸까?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문안보다 맥락이, 보다 콘텍스트가 더 중요한 게 바로 외교 분야다. 조선이 자주 국가라는 것을 명시한 이유는 바로 전까지 조선이 자주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며, 따라서 중국은 조선에 대해 종주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물론 문안 상으로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 문안의 맥락을 해석하면 앞으로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한다 해도 중국을 포함해서 어느 나라도 전혀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일본은 교묘하게 정한론(征韓論)의 근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일본의 의도를 더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조약의 제7, 즉 조선의 연해와 섬들을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이 조항 하나뿐이다. 동등한 관계라면서 남의 나라를 일방적으로 측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곧바로 한반도에 대한 면밀한 조사 작업에 들어간다고구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가 발견된 이 측량작업의 과정에서다. 조약에서는 한반도의 연해와 섬들만 측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인들은 이제 자유롭게 조선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일본 정부는 군인들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조선 전역의 지리와 문물을 조사하게 했다. 1882년 그런 밀정으로 활약하던 사카와 가게노부 중위는 만주를 돌아다니다가 압록강 중류 부근에서 높이 6미터의 거대한 비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무려 1500년 동안이나 그 비석은 그곳에 있었으나 그 전까지는 그게 광개토왕릉비인 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처럼 중요한 발견을 한 사카와는 그 비석에 중요한 조작을 한다.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그의 조작은 훗날 일본의 한반도 역사 조작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보겠지만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강점한 뒤 이 측량 작업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이어져서 한반도를 장차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강화도조약에서 일본은 조선 대표가 한성이라 부르던 한양을 굳이 경성京城이라는 용어로 불렀는데, 나중에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 용어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시아버지의 고집과 며느리의 야심 왼쪽은 대원군, 오른쪽은 민비(閔妃).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인 이 두 야심가로 인해 중요한 시기 조선의 대외 정책은 오락가락과 갈팡질팡을 거듭했다. 물론 그들 사이에 끼인 고종은 완벽한 바지저고리였다. 아마 고종은 나라의 걱정보다 아버지와 아내의 대립에서 더 마음의 고통을 느꼈을 터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다시 온 왕국의 꿈

한 가지 해법: 문 닫기

격변기의 비중화세계

잘못 꿴 첫 단추

또 하나의 해법: 문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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