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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통리기무아문, 신사유람단, 임오군란, 제물포조약)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통리기무아문, 신사유람단, 임오군란, 제물포조약)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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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

 

 

타의에 의한 개화였지만 개화를 주장한 것은 민씨 정권이었으므로 개항 이후 민씨 가문의 조정 진출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대원군의 축출을 주도했던 민비(閔妃)의 오빠 민승호(閔升鎬, 1830~74)를 비롯해서 민규호(閔奎鎬, 1836~78), 민겸호(閔謙鎬, 1838~82) 등 가문의 중핵들은 거의 대부분 개화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여기서 흥미로운 인물은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다. 그는 민비(閔妃)의 조카로 일찍부터 가문의 촉망받는 젊은이였는데, 아버지 민태호(閔台鎬, 1834~84)가 골수 위정척사파였던 것과는 반대로 개화파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지위가 지위인 만큼 스물도 되기 전부터 그의 집 사랑방에는 홍영식(洪英植, 1855~84), 서광범(徐光範, 1859~97), 박영효(朴泳孝, 1861~1939) 등 개화파의 젊은이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화에는 반대했던 그는 나중에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오히려 개화파 탄압으로 선회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민씨 일가가 개화파의 주력을 이루었으나 정작 개화파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 사람은 정통 관료 출신인 김홍집(金弘集, 1842~96)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씨 세력은 오로지 대원군을 반대하기 위해 개화를 주장한 것이지만, 김홍집은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된 소신 있는 개화파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修信使, 개항 이후 통신사가 수신사로 개칭되었다)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적절한 인사행정이었다. 개항하던 해인 1876년에도 수신사가 파견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두 나라의 수교를 기념하는 의전적인 것이었던 데 비해, 이번의 수신사는 추가 개항과 관세 문제라는 현안이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실력을 갖춘 인물이 가야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김홍집은 정작 업무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 대신 조선의 향후 노선에 관한 참고서를 한 권 가지고 온다. 청나라의 일본 공사관에 근무하던 황준헌(黃遵憲)을 만나 그가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이라는 책을 받아온 것이다(청나라의 일개 외교관이 그런 책을 썼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다. 원제명은 내가 본 조선책략이니까).

 

당시 청나라는 이미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서양 열강을 수용한 상태였으므로 청나라가 가장 우려하던 것은 북방의 러시아였다. 그래서 조선책략도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는 것을 가장 주요한 과제로 삼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 즉 중국, 일본, 미국과 동맹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실제로 이 방안에 따라 이후 개화파는 세 나라를 우호의 상대로 삼게 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홍집이 그 책을 개화의 참고서가 아니라 교과서처럼 삼고 전국의 유생들에게 배포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낳은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드디어 조선에도 개혁 이론이 생겼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직 조선 사회를 휘어잡고 있는 수구 세력을 결집시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도쿄의 양반들 싫든 좋든 강화도조약으로 수교가 이루어졌으므로 조선은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그 이름은 과거의 통신사에서 수신사로 바뀌었다. 사진은 1876년의 1차 수신사가 도쿄 시내를 행진하는 모습이다. 첫 수신사인 만큼 이들은 외교 업무보다 서양식으로 탈바꿈한 일본의 수도를 구경하는 게 주 목적이었다.

 

 

조선책략의 방침이 전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을 계기로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이 개화의 모델로 채택되었으며, 김홍집의 견해가 가장 권위 있는 개화론으로 인정되었다. 이제 개화의 과제는 민씨 가문에서 김홍집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그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부터 개화정책의 구체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청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종합 행정기관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됨으로써 향후의 개화를 주도할 제도적 중심이 생겼다. 이 길고 괴상한 이름의 기관이 맨처음 착수한 업무는 일본과 청나라의 개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홍집(金弘集)18811월 홍영식, 박정양(朴定陽, 1841~1904), 어윤중(魚允中, 1848~196) 등 소장파 개화론자들 열두 명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구성해서 일본으로 파견한다이름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신사유람단은 신사들이 유람하는 단체와는 전혀 무관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산업시찰단쯤 되는데, 이름이 그렇게 애매해진 이유는 당시 전국 유생들을 중심으로 개화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명의 신사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지인 부산까지 가야 했는데, 공식 직책도 그에 어울리게 동래부 암행어사였다(이들이 한양을 떠난 뒤에야 김홍집은 일본공사와 함께 유람단의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인사를 트는 게 주 목적인 수신사와는 달리 유람단원들은 각자 전문 분야를 맡고 있었고 일본에서도 실무자들과 접촉했으므로 유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성격에서 보듯이 신사유람단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정부가 유럽과 미국으로 보낸 서양 시찰단의 축소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개화 정부가 취하는 노선도 메이지 정부와 닮은꼴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과연 개화 정부는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군사적인 부문의 개혁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는다(부국강병의 대원칙이 있는 이상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예기치 못한 걸림돌이 등장한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돌아온 뒤 개화의 절차와 단계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동시에 조선에서는 기존의 유림 세력을 중심으로 개화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도 개시되었다. 대원군이 실각하고, 개화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개항이 이루어지는 등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태 속에서 한동안 망연자실했던 수구 세력은 개화가 대세로 자리잡아가는 시점에 이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절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이황의 후손으로 유림의 원로였던 이만손(李晩孫, 1811~91)조선책략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은 그 신호탄이다. 뒤이어 신사유람단이 일본으로 출발하자마자 그는 영남 지역유생들을 모아 개화를 비판하고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영남 만인소(萬人疏)만인소란 말 그대로 만 명이 상소장에 연명했다는 뜻이다. 1792년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탄원했던 게 최초의 만인소인데, 그때도 만 명이 넘었으니 이번 만인소는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차례의 만인소는 모두 영남 유생들의 집단창작이었다. 이황 이래 조선의 성리학계는 영남 유생들이 지배했으므로 중기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도 영남 출신의 발언권이 압도적이었던 것이다(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 정권은 사실상 내내 영남 정권이었다). 바꿔 말하면 이는 영남 지역이 그만큼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개화에 가장 앞장 서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록 도화선은 영남 지역이고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적 배경을 가진 수구적 운동이었지만, 그동안 외세의 집요한 공략으로 득보다 실이 많았다고 판단한 일반 백성들까지 지지를 보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개화 정부가 서양식 군제(실은 그것을 모방한 일본과 청나라식 군제)로의 개편을 서두르자 결국 문제는 터지고 만다. 18814월 정부에서는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을 맡겼다(그래서 왜별기倭別技라고도 불렀다). 이에 가장 불만이 큰 세력은 물론 이해 당사자인 구식 군대지만 그들은 일단 참았다. 그러나 정부는 무심하게도(?) 그 해 말에 5군영을 폐지하고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2영으로 축소 개편한다. 구조조정으로 동료들이 실업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도 구식 군대는 또 참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정부가 별기군에게는 대우를 잘해주면서도 구식 군대에게는 마냥 급료를 체불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8826월 오랜만에 선혜청에서 급료로 나누어 준 양곡에 모래가 섞인 것을 보는 순간 마침내 쌓이고 쌓였던 불만이 폭발했다. 이것이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선혜청 담당관인 민겸호를 살해한 것은 분노한 군인들의 성에 차지도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사건을 정식 반란으로 만들었다. 내친 걸음에 그들은 민씨 일파와 개화파 인물들을 잡아죽이기로 하는 한편 대원군에게 차기 정권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대원군은 짐짓 자제하라고 권하지만 속으로는 반갑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그 눈치를 알아차린 군인들은 대원군의 집권에 최대 걸림돌인 일본 공사관과 창덕궁을 기습했다. 두 기관의 책임자인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민비(閔妃)가 취할 길은 단 하나, 줄행랑뿐이다. 하나부사는 서둘러 인천으로 도망쳤고 민비는 황급히 궁성을 빠져나와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 1844~?)이라는 친척의 집으로 대피했다. 이렇게 재집권의 기반이 닦인 뒤에야 대원군은 궁에 입성했다이 과정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분노한 군인들의 타깃이 민씨 정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민비는 자신이 도망쳐도 추격해 올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교활한 꾀를 생각해낸다. 궁성을 떠나면서 남편 고종(高宗)에게 자기가 죽었다고 발표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뒤쫓지는 않을 테니 단수 높은 잔머리지만 일국의 국모에게 그런 코미디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녀가 장호원에 숨어 있는 동안 대원군은 아들 부부의 터무니없는 사기극을 그대로 믿고 며느리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민비를 숨겨준 민응식이 그 뒤 스타로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19세기의 사관학교 별기군이 훈련하는 모습이다. 처음에 모집된 인원은 지원자 80명이었는데, 당장 사용할 군대라기보다는 장교 육성을 위한 일종의 사관학교였을 것이다.

 

 

10년 만에 권좌에 컴백한 대원군은 당연히 모든 것을 10년 전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폐지하고, 맏아들인 이재면(李載冕, 1845~1912, 고종의 형)에게 병권과 재정권을 안긴 것은 어떻게든 옛 권력을 부활하려는 대원군의 안간힘이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한 그도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사실상 독립국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오랜 정적인 며느리를 물리쳐 후련했겠지만, 그 덕분에 조선에게는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시어머니가 둘씩이나 달라붙어 버렸다. 임오군란을 조선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로 파악한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은 때마침 미국과의 조미수호조약 체결을 위해 베이징에 가 있던 김윤식(金允植, 1835~1922)과 어윤중이 파병을 요청하자 부관인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에게 3천 명의 병력을 주어 조선으로 보낸다. 또 다른 시어머니인 일본은 공사관이 습격을 당하고 별기군 교관들이 살해당했으니 당연히 사태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

 

결국 대원군이 재집권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청군이 그를 납치함으로써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실패로 끝났다(이후 대원군은 3년 동안 톈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쓸모없는 대원군을 납치하느라 애쓴 청나라에 비해 정작으로 실익을 거둔 것은 일본이다. 인천에 정박한 일본 군함 위에서 하나부사는 김홍집(金弘集)과 제물포조약을 맺었는데, 조선 측의 잘못이 명백한 만큼 이번에는 강화도조약과 달리 명백한 불평등조약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배상금을 받기로 한 것은 오히려 잔돈에 속하고, 진짜 큰 이득은 공사관 수비 병력을 증강하기로 한 조항이다. 조선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게 된것도 소득이지만 더구나 그 유지비는 조선에서 물기로 했으니 일본으로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달아나는 일장기 국제무대에 데뷔한 조선은 당연히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구식 군대가 차별 대우에 분노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까지는 괜찮지만, 남의 나라 공사관을 때려부순 것은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일본공사 일행이 일장기를 들고 황급히 인천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인데, 이게 빌미가 되어 조선은 또 다른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했다.

 

 

사태가 진정되자 민비(閔妃)는 부활(?)해서 국모로 컴백했으며, 대원군의 수구적 조치도 모두 철폐되고 기존의 체제로 돌아갔다. 그럼 임오군란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우선 그동안 서로 암암리에 견제하느라 조선의 살림에 관해 별로 간섭하지 않았던 두시어머니가 대놓고 말을 함부로 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에 따라 조선의 꼬맹이들은 어느 할머니를 더 따르느냐에 따라 두 파로 나뉘었다. 김홍집(金弘集), 김윤식, 어윤중 등은 당연히 청나라 할머니가 더 좋다고 했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은 일본 할머니가 더 낫다고 우겼다. 의견이 엇갈리면 서로 대화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불행히도 조선이라는 집안의 가훈에는 도대체 대화라는 게 없었다. 그저 분쟁이 일어나면 서로 당파를 구성해서 드잡이질만 벌이는 게 전통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본의 똘마니들은 친청파를 사대당(事大黨)이라며 놀려댔고, 청나라의 똘마니들은 친일파에게 개화당(開化黨)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하지만 친일파는 독립당이라는 이름으로 자칭했다).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개화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 상태라 할 만큼 무지했다. 나라의 문을 처음 열었고, 더구나 그 개방을 자의로 한 게 아닐진대 개화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대대적인 개혁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개혁에는 커다란 아픔이 따르겠지만 그것은 생략할 수 없는 탄생의 진통이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 정부는 체제와 제도만 그럴듯하게 갖추려 했을 뿐 개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개혁을 동반하지 않은 개화, 아픔 없이 가지려는 욕심은 결국 개화의 최종적인 실패로 이어진다.

 

 

미국에 간 양반들 급변하는 정세에 조선 정부는 바빴다.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한 지 2년 뒤인 18837월에는 8명의 미국 시찰단이 출발했다. 앞줄 가운데가 단장인 민영익이고 홍영식과 서광범이 좌우로 앉아 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

사흘간의 백일몽

내전의 국제화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어느 부부의 희비극

기묘한 제국

후보 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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