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 11부 불모의 세기,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본문

카테고리 없음

종횡무진 한국사 - 11부 불모의 세기,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7:11
728x90
반응형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

 

 

타의에 의한 개화였지만 개화를 주장한 것은 민씨 정권이었으므로 개항 이후 민씨 가문의 조정 진출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대원군의 축출을 주도했던 민비(閔妃)의 오빠 민승호(閔升鎬, 1830~74)를 비롯해서 민규호(閔奎鎬, 1836~78), 민겸호(閔謙鎬, 1838~82) 등 가문의 중핵들은 거의 대부분 개화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여기서 흥미로운 인물은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다. 그는 민비(閔妃)의 조카로 일찍부터 가문의 촉망받는 젊은이였는데, 아버지 민태호(閔台鎬, 1834~84)가 골수 위정척사파였던 것과는 반대로 개화파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지위가 지위인 만큼 스물도 되기 전부터 그의 집 사랑방에는 홍영식(洪英植, 1855~84), 서광범(徐光範, 1859~97), 박영효(朴泳孝, 1861~1939) 등 개화파의 젊은이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화에는 반대했던 그는 나중에 개화파가 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오히려 개화파 탄압으로 선회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민씨 일가가 개화파의 주력을 이루었으나 정작 개화파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 사람은 정통 관료 출신인 김홍집(金弘集, 1842~96)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씨 세력은 오로지 대원군을 반대하기 위해 개화를 주장한 것이지만, 김홍집은 사상과 이론으로 무장된 소신 있는 개화파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880년 김홍집이 수신사(修信使, 개항 이후 통신사가 수신사로 개칭되었다)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적절한 인사행정이었다. 개항하던 해인 1876년에도 수신사가 파견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두 나라의 수교를 기념하는 의전적인 것이었던 데 비해, 이번의 수신사는 추가 개항과 관세 문제라는 현안이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실력을 갖춘 인물이 가야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김홍집은 정작 업무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그 대신 조선의 향후 노선에 관한 참고서를 한 권 가지고 온다. 청나라의 일본 공사관에 근무하던 황준헌(黃遵憲)을 만나 그가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이라는 책을 받아온 것이다(청나라의 일개 외교관이 그런 책을 썼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다. 원제명은 내가 본 조선책략이니까).

 

당시 청나라는 이미 양무운동(洋務運動)으로 서양 열강을 수용한 상태였으므로 청나라가 가장 우려하던 것은 북방의 러시아였다. 그래서 조선책략도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는 것을 가장 주요한 과제로 삼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 즉 중국, 일본, 미국과 동맹해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실제로 이 방안에 따라 이후 개화파는 세 나라를 우호의 상대로 삼게 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김홍집이 그 책을 개화의 참고서가 아니라 교과서처럼 삼고 전국의 유생들에게 배포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낳은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드디어 조선에도 개혁 이론이 생겼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직 조선 사회를 휘어잡고 있는 수구 세력을 결집시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도쿄의 양반들 싫든 좋든 강화도조약으로 수교가 이루어졌으므로 조선은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는데, 그 이름은 과거의 통신사에서 수신사로 바뀌었다. 사진은 1876년의 1차 수신사가 도쿄 시내를 행진하는 모습이다. 첫 수신사인 만큼 이들은 외교 업무보다 서양식으로 탈바꿈한 일본의 수도를 구경하는 게 주 목적이었다.

 

 

조선책략의 방침이 전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것을 계기로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이 개화의 모델로 채택되었으며, 김홍집의 견해가 가장 권위 있는 개화론으로 인정되었다. 이제 개화의 과제는 민씨 가문에서 김홍집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그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부터 개화정책의 구체적인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청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종합 행정기관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됨으로써 향후의 개화를 주도할 제도적 중심이 생겼다. 이 길고 괴상한 이름의 기관이 맨처음 착수한 업무는 일본과 청나라의 개화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상세히 알아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홍집(金弘集)18811월 홍영식, 박정양(朴定陽, 1841~1904), 어윤중(魚允中, 1848~196) 등 소장파 개화론자들 열두 명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구성해서 일본으로 파견한다이름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신사유람단은 신사들이 유람하는 단체와는 전혀 무관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산업시찰단쯤 되는데, 이름이 그렇게 애매해진 이유는 당시 전국 유생들을 중심으로 개화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명의 신사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지인 부산까지 가야 했는데, 공식 직책도 그에 어울리게 동래부 암행어사였다(이들이 한양을 떠난 뒤에야 김홍집은 일본공사와 함께 유람단의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인사를 트는 게 주 목적인 수신사와는 달리 유람단원들은 각자 전문 분야를 맡고 있었고 일본에서도 실무자들과 접촉했으므로 유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성격에서 보듯이 신사유람단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정부가 유럽과 미국으로 보낸 서양 시찰단의 축소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개화 정부가 취하는 노선도 메이지 정부와 닮은꼴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과연 개화 정부는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군사적인 부문의 개혁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삼는다(부국강병의 대원칙이 있는 이상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예기치 못한 걸림돌이 등장한 것은 바로 그 시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돌아온 뒤 개화의 절차와 단계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면서 동시에 조선에서는 기존의 유림 세력을 중심으로 개화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도 개시되었다. 대원군이 실각하고, 개화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개항이 이루어지는 등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태 속에서 한동안 망연자실했던 수구 세력은 개화가 대세로 자리잡아가는 시점에 이르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절박한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이황의 후손으로 유림의 원로였던 이만손(李晩孫, 1811~91)조선책략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은 그 신호탄이다. 뒤이어 신사유람단이 일본으로 출발하자마자 그는 영남 지역유생들을 모아 개화를 비판하고 김홍집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영남 만인소(萬人疏)만인소란 말 그대로 만 명이 상소장에 연명했다는 뜻이다. 1792년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을 탄원했던 게 최초의 만인소인데, 그때도 만 명이 넘었으니 이번 만인소는 그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차례의 만인소는 모두 영남 유생들의 집단창작이었다. 이황 이래 조선의 성리학계는 영남 유생들이 지배했으므로 중기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도 영남 출신의 발언권이 압도적이었던 것이다(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한반도 정권은 사실상 내내 영남 정권이었다). 바꿔 말하면 이는 영남 지역이 그만큼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개화에 가장 앞장 서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록 도화선은 영남 지역이고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적 배경을 가진 수구적 운동이었지만, 그동안 외세의 집요한 공략으로 득보다 실이 많았다고 판단한 일반 백성들까지 지지를 보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개화 정부가 서양식 군제(실은 그것을 모방한 일본과 청나라식 군제)로의 개편을 서두르자 결국 문제는 터지고 만다. 18814월 정부에서는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을 맡겼다(그래서 왜별기倭別技라고도 불렀다). 이에 가장 불만이 큰 세력은 물론 이해 당사자인 구식 군대지만 그들은 일단 참았다. 그러나 정부는 무심하게도(?) 그 해 말에 5군영을 폐지하고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2영으로 축소 개편한다. 구조조정으로 동료들이 실업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도 구식 군대는 또 참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정부가 별기군에게는 대우를 잘해주면서도 구식 군대에게는 마냥 급료를 체불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8826월 오랜만에 선혜청에서 급료로 나누어 준 양곡에 모래가 섞인 것을 보는 순간 마침내 쌓이고 쌓였던 불만이 폭발했다. 이것이 임오군란(壬午軍亂)이다.

 

선혜청 담당관인 민겸호를 살해한 것은 분노한 군인들의 성에 차지도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사건을 정식 반란으로 만들었다. 내친 걸음에 그들은 민씨 일파와 개화파 인물들을 잡아죽이기로 하는 한편 대원군에게 차기 정권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대원군은 짐짓 자제하라고 권하지만 속으로는 반갑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그 눈치를 알아차린 군인들은 대원군의 집권에 최대 걸림돌인 일본 공사관과 창덕궁을 기습했다. 두 기관의 책임자인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민비(閔妃)가 취할 길은 단 하나, 줄행랑뿐이다. 하나부사는 서둘러 인천으로 도망쳤고 민비는 황급히 궁성을 빠져나와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 1844~?)이라는 친척의 집으로 대피했다. 이렇게 재집권의 기반이 닦인 뒤에야 대원군은 궁에 입성했다이 과정에서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분노한 군인들의 타깃이 민씨 정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민비는 자신이 도망쳐도 추격해 올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교활한 꾀를 생각해낸다. 궁성을 떠나면서 남편 고종(高宗)에게 자기가 죽었다고 발표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을 더 이상 뒤쫓지는 않을 테니 단수 높은 잔머리지만 일국의 국모에게 그런 코미디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녀가 장호원에 숨어 있는 동안 대원군은 아들 부부의 터무니없는 사기극을 그대로 믿고 며느리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민비를 숨겨준 민응식이 그 뒤 스타로 떠올랐음은 물론이다.

 

 

19세기의 사관학교 별기군이 훈련하는 모습이다. 처음에 모집된 인원은 지원자 80명이었는데, 당장 사용할 군대라기보다는 장교 육성을 위한 일종의 사관학교였을 것이다.

 

 

10년 만에 권좌에 컴백한 대원군은 당연히 모든 것을 10년 전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폐지하고, 맏아들인 이재면(李載冕, 1845~1912, 고종의 형)에게 병권과 재정권을 안긴 것은 어떻게든 옛 권력을 부활하려는 대원군의 안간힘이다. 그러나 일세를 풍미한 그도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사실상 독립국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오랜 정적인 며느리를 물리쳐 후련했겠지만, 그 덕분에 조선에게는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시어머니가 둘씩이나 달라붙어 버렸다. 임오군란을 조선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로 파악한 청나라의 실권자 이홍장은 때마침 미국과의 조미수호조약 체결을 위해 베이징에 가 있던 김윤식(金允植, 1835~1922)과 어윤중이 파병을 요청하자 부관인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에게 3천 명의 병력을 주어 조선으로 보낸다. 또 다른 시어머니인 일본은 공사관이 습격을 당하고 별기군 교관들이 살해당했으니 당연히 사태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

 

결국 대원군이 재집권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청군이 그를 납치함으로써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실패로 끝났다(이후 대원군은 3년 동안 톈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쓸모없는 대원군을 납치하느라 애쓴 청나라에 비해 정작으로 실익을 거둔 것은 일본이다. 인천에 정박한 일본 군함 위에서 하나부사는 김홍집(金弘集)과 제물포조약을 맺었는데, 조선 측의 잘못이 명백한 만큼 이번에는 강화도조약과 달리 명백한 불평등조약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배상금을 받기로 한 것은 오히려 잔돈에 속하고, 진짜 큰 이득은 공사관 수비 병력을 증강하기로 한 조항이다. 조선에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게 된것도 소득이지만 더구나 그 유지비는 조선에서 물기로 했으니 일본으로서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달아나는 일장기 국제무대에 데뷔한 조선은 당연히 모든 면에서 미숙하다. 구식 군대가 차별 대우에 분노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까지는 괜찮지만, 남의 나라 공사관을 때려부순 것은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일본공사 일행이 일장기를 들고 황급히 인천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인데, 이게 빌미가 되어 조선은 또 다른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했다.

 

 

사태가 진정되자 민비(閔妃)는 부활(?)해서 국모로 컴백했으며, 대원군의 수구적 조치도 모두 철폐되고 기존의 체제로 돌아갔다. 그럼 임오군란은 그저 해프닝으로 끝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우선 그동안 서로 암암리에 견제하느라 조선의 살림에 관해 별로 간섭하지 않았던 두시어머니가 대놓고 말을 함부로 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에 따라 조선의 꼬맹이들은 어느 할머니를 더 따르느냐에 따라 두 파로 나뉘었다. 김홍집(金弘集), 김윤식, 어윤중 등은 당연히 청나라 할머니가 더 좋다고 했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은 일본 할머니가 더 낫다고 우겼다. 의견이 엇갈리면 서로 대화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불행히도 조선이라는 집안의 가훈에는 도대체 대화라는 게 없었다. 그저 분쟁이 일어나면 서로 당파를 구성해서 드잡이질만 벌이는 게 전통이었으니까. 그래서 일본의 똘마니들은 친청파를 사대당(事大黨)이라며 놀려댔고, 청나라의 똘마니들은 친일파에게 개화당(開化黨)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하지만 친일파는 독립당이라는 이름으로 자칭했다).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개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개화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 상태라 할 만큼 무지했다. 나라의 문을 처음 열었고, 더구나 그 개방을 자의로 한 게 아닐진대 개화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대대적인 개혁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물론 그 개혁에는 커다란 아픔이 따르겠지만 그것은 생략할 수 없는 탄생의 진통이다. 그러나 조선의 개화 정부는 체제와 제도만 그럴듯하게 갖추려 했을 뿐 개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개혁을 동반하지 않은 개화, 아픔 없이 가지려는 욕심은 결국 개화의 최종적인 실패로 이어진다.

 

 

미국에 간 양반들 급변하는 정세에 조선 정부는 바빴다.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한 지 2년 뒤인 18837월에는 8명의 미국 시찰단이 출발했다. 앞줄 가운데가 단장인 민영익이고 홍영식과 서광범이 좌우로 앉아 있다.

 

 

사흘간의 백일몽

 

 

건수만 있으면 싸우는 게 원래 조선 사대부(士大夫)들의 빛나는 전통이다. 조선이 왕국이었던 초기 100년을 제외하면 조선의 사대부들은 늘 두 파로 나뉘어 서로 싸워왔다. 때로는 각기 다른 왕위계승권자를 끼고서 다뤘는가 하면,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이념 논쟁으로 갈라서기도 했고, 대외의 변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싸우기도 했다. 이는 단일한 권력(국왕)가 아닌 집단적 권력체가 지배하는 체제의 생리 상 불가피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난에 처한 19세기 말에도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개화와 위정척사로 맞서던 형국이 이제 개화당과 사대당의 대립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애초에 개화를 주장하고 집권했던 민씨 정권이 노선을 선회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다. 전선이 달라지자 민씨 일파는 느닷없이 대원군을 물리쳐 준 청나라 측으로 붙어 사대당의 주력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처음에 민씨 정권이 개화를 주장했던 이유는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말하자면 대원군이 쇄국 이데올로기로 버텼으니까 그를 타도하고 들어선 민씨 정권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 개항과 개화를 내세워야 했던 것이다. 이렇듯 민씨 정권은 집권자의 기본적 자질이자 덕목인 정책의 일관성마저도 유지하지 못했다.

 

대원군이 역사를 거스르려 했던 것은 물론 잘못이지만 민씨 세력이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청나라를 끌어들인 것은 더 큰 잘못이었다. 집안의 개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바깥의 늑대를 불러들여 개를 잡아먹게 한 꼴이기 때문이다. 과연 대원군을 납치하고 반란을 진압한 청군은 임무가 끝났는데도 물러가기는커녕 아예 주둔군으로 탈바꿈한다. 게다가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병권을 틀어쥐고, 이홍장이 보낸 독일인 묄렌도르프(Möllendorf)는 조선의 외교권을 장악한다(청나라의 독일 영사관에 근무하던 그로서는 대단한 출세다)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외국인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화교(華僑)는 바로 이때 처음 들어왔다(그러니까 자장면의 역사도 이때 시작된 것이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으로 파견된 청군을 따라 청나라 상인 40여 명이 입국한 게 조선 최초의 화교다. 이후 양국 간에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으로 오는 중국인의 수는 크게 늘어났다. 세계 곳곳에 차이나 타운을 건설하고 자기 국적을 버리지 않으면서 집단 거주하는 습성에 따라 화교들은 주로 항구 도시, 특히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1899년 중국 산둥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면서 또 다시 대규모로 화교가 유입되었는데, 그래서 한국 화교 중에는 산둥 출신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남의 나라에서 웬 유세냐 싶겠지만 실상 당시 청 나라는 조선을 남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피를 나눈 혈맹으로 여긴다는 뜻일까? 물론 그건 아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을 진압하고 청나라는 조선에게 사무역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통상조약을 강요했는데, 그 조약문에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屬邦, 속국)이라고 정식으로 명문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의 의도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욕심이 점점 노골화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조선의 종주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수구로 돌아선 민씨 정권이 청의 그런 태도를 적극 환영한다는 사실이다. 이에 개화당은 당연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대당은 오로지 자파의 집권과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나라 전체를 중국에 넘기려 하고 있다. 나라와 당파가 모두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이윽고 그동안 숨어 있던 개화당의 실질적인 보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개화의 이념과 이론에서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등 소장파 개화론자들의 지도자이며 나이로도 그들의 형님뻘인 김옥균(金玉均, 1851~94)이다.

 

쇄국의 서슬이 시퍼렇던 1870년경부터 오경석과 박규수(朴珪壽)에게서 개화 사상을 배운 김옥균은 조선이 추구해야 할 개화의 모델은 청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점을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군사적 성격이 강한 발전 전략을 택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일본이 동양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장차 동양의 프랑스처럼 일면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회 전반적인 균형을 갖춘 강국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분이나 문벌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해야 하며, 각종 제도와 산업을 근대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그는 안동 김씨라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중인 신분인 오경석을 스승으로 삼을정도였으니 신분제 철폐의 주장은 결코 괜한 소리가 아니다). 이렇듯 권력만 주어지면 언제든 정책화할 수 있는 탄탄한 이론을 갖추었기에 김옥균(金玉均)은 일찍부터 개화파의 보스로 인정받고 있었다. 더구나 일본을 세 차례나 다녀오면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성과를 시찰한 것은 물론 일본의 정객들과 두루 교류를 맺어둔 그였으니, 말하자면 공부는 다 마쳤고 시험만 기다리고 있는 학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시험은 청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고시에만 일로매진해 왔는데 갑자기 고시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정책을 펴는 정권을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다. 물론 김옥균이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쿠데타를 구상한 건 아니지만, 청나라가 간섭하지 않고 민씨 정권이 개화 노선을 정상적으로 유지했다면 그런 극단적인 수단까지 강구하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다.

 

 

19세기의 방송국 지금 종로에 있는 우정국 건물이다. 1884101일부터 업무가 개시되었으나 2개월 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무대가 되었다. 정보ㆍ통신의 허브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방송국에 해당한다.

 

 

1883년부터 김옥균(金玉均)은 소장파 개화론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거사를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쿠데타의 지도부는 이미 구성되었으니 가장 필요한 것은 물리력인데, 이것은 박영효가 양성한 신식 군대와 김옥균이 사관학교의 설립을 위해 일본에 유학을 보낸 생도들이 담당한다(이 생도들 중에는 나중에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는 서재필(徐載弼)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김옥균은 개화당에 호의를 보이는 일본 측의 동의를 얻어 유사시에는 일본 공사관 수비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조처한다. 이것으로 약소하나마 쿠데타의 3대 조건(이념, 지도부, 물리력)이 갖추어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일정뿐이다. 원래 쿠데타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는 행위이므로 큰 것에서 뭔가 균열이 생겨야만 일정을 잡을 수 있다.

 

그 거사 일정을 정해준 것은 청나라다. 1884년 봄 청나라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와 마찰이 일어나자 조선 주둔군의 절반을 빼서 그곳에 투입한다. 일단 조선의 청군은 1500명으로 줄었다. 게다가 곧이어 여름에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청나라는 참패하고 만다인도차이나에서 중국이 전통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지역은 베트남이다. 일찍이 한나라 시절부터 안남(安南)으로 불리던 이곳은 한 무제9군을 설치하면서 중국의 속령으로 편입되었다(한반도에 한군이 설치된 시기다). 이후 약 1천 년 동안 그런 상태였다가 중국에 비중화세계의 이민족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베트남에도 독립 왕국이 성립되었다. 곧이어 명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베트남은 한반도의 조선과 달리 사대 대신 투쟁을 택해서 15세기에 립을 이룬다. 그러나 영국에게 인도를 빼앗긴 프랑스가 19세기부터 인도차이나에 손을 뻗치면서 베트남은 중국과 프랑스가 영향력을 다투는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여기서 프랑스가 승리한 것은 장차 베트남 전쟁의 불씨를 남기는 동시에, 인도차이나만이 아니라 극동 세계에도 큰 후유증을 남겼다. 조선의 개화 세력에게 기회를 주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렇듯 19세기에는 국지적인 사건이 일파만파를 부를 만큼 전세계가 이미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개화당으로서는 절호의 찬스가 아닐 수 없다. 드디어 D-데이가 잡혔다. 그 해 124(양력) 개화당은 홍영식이 주관하는 우정국(郵政局, 우체국) 낙성식을 계기로 사대당의 대신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쿠데타 자체는 실패였다. 연회식장에 투입된 쿠데타군은 현장에서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혔을 뿐 정부 요인들을 처단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꿩 대신 닭(?)이랄까? 반군은 고종(高宗)민비(閔妃)를 창덕궁 옆의 경우궁(景祐宮, 순조純祖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으로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즉각 왕의 이름으로 사대당의 보스들을 불러들였다. 민영익의 아버지인 민태호,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한 민영목(閔泳穆, 1826~84),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초청한 조영하(趙寧夏, 1845~84) 등이 당시에 영문도 모르고 경우궁에 갔다가 살해당한 자들이다(민태호 부자와 민영목은 민응식과 더불어 4四閔이라 불리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그 중 둘이 죽고 하나가 중상을 입었으니 사대당은 치명타를 당한 셈이다). 이것으로 일단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성공했다.

 

정권을 장악한 김옥균(金玉均) 일파는 곧바로 다음 단계, 즉 새 내각을 구성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총지휘자답게 김옥균은 배후로 물러나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은 입각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개화당만이 아니라 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원(李載元, 1831~91)과 아들 이재면 등 왕실 종친들을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구색을 맞추기 위한 인사지만 쿠데타 정권이라는 색채를 제거하는 데는 대단히 효과적인 조치다. 이튿날인 125일 새 내각이 발표되면서 드디어 새 정권은 쿠데타라는 딱지를 떼는 듯 보였다. 나아가 126일 아침 문벌과 신분을 폐지하고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혁신정강까지 발표함으로써 드디어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못한 개혁+개화라는 역사적 사명은 완수되는 듯 보였다. 김옥균(金玉均)의 꿈은 실현된 듯 보였다.

 

그것을 한낱 사흘간의 백일몽으로 만든 것은 민비와 일본이다. 우선 125일 민비는 개화당으로 위장한 위안스카이의 첩자를 만난 뒤 김옥균에게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아직 소수 병력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김옥균은 넓은 창덕궁을 수비할 자신이 없으므로 극구 만류했으나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국왕 부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종(高宗)이 혁신정강을 공식적으로 추인하는 절차가 약정되어 있던 126일 오후 세 시를 기해 1500명의 청군이 창덕궁으로 몰아닥쳤다. 겨우 50명의 병력과 사관생도로 이루어진 쿠데타군이 중과부적을 느끼고 후퇴할 때, 애초에 돕기로 했던 일본군은 재빨리 창덕궁에서 철병해 버렸다. 김옥균(金玉均)3일 천하, 아니 그보다도 조선 최후의 개혁 시도는 이것으로 싱겁게 끝나 버렸다.

 

 

잘린 개화의 목 김옥균(위쪽)의 쿠데타가 실패한 이유는 필요한 무력 기반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교활한 민비(閔妃)와 그녀에게 휘둘린 고종(高宗)의 책임도 크다. 민비는 아무런 이론도 없이 무작정 개화를 추진하다가 정작 개화가 필요할 때는 수구로 돌아서 버렸다. 아래 사진은 나중에 암살되어 귀국한 김옥균의 시신에서 머리를 잘라낸 장면이다.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쓴 휘장이 보인다.

 

 

내전의 국제화

 

 

애초부터 안 되는 싸움이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조선 역사상 변방의 반란, 민란, 사대부(士大夫)의 반란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갑신정변(甲申政變)처럼 물리적 기반이 취약한 쿠데타 세력은 없었다. 게다가 조선의 사정은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두 메이저가 간섭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도 내부 쿠데타가 어려운 조건이었다. 따라서 김옥균(金玉均)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면 두 나라 중 하나는 반드시 잡아야 했으나, 불행히도 그는 일본에 의존하기보다는 주체적으로 개혁과 개화를 이루고자 했고 일본 측도 그가 일본을 활용 대상으로만 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당시의 조선은 내부 개혁을 꾀하는 일체의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태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조선에서 개혁과 개화의 싹은 완전히 뿌리뽑혔다.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徐載弼)은 잽싸게 일본으로 도피했으나(홍영식은 끝까지 남아 고종 부부를 청군에게 넘겨주는 과정에서 살해당했다), 민비(閔妃) 정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참에 아예 국내의 개화파를 철저히 색출해서 모조리 처단해 버렸다. 게다가 청나라와 일본은 톈진조약을 맺어 앞으로 이런 사태가 다시 일어나 양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될 경우 사전에 통보한다는 자기들끼리의 약속을 정했다. 개혁의 시도가 오히려 안팎으로 화를 부른 셈이다.

 

이제 조선의 미래는 없다. 안은 온통 썩어 회생 불능이고 밖에서는 썩은 고깃덩이라도 먹겠다고 달려드는 하이에나들뿐이다. 남은 절차는 두 하이에나가 조선을 놓고 최후의 승부를 가리는 것뿐이다. 둘 중 조선을 먹는 측이 장차 동아시아 전체를 제패하게 되리라.

 

그러나 당연히 뒤따랐어야 할 결승전은 10년 가량 뒤로 늦춰진다(실제로 1885년 초부터 조선에서는 두 나라가 곧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 이유는 양측이 제 코가 석 자인 데다 각자 결전에 대비한 트레이닝 기간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다. 우선 청나라는 민비(閔妃) 정권을 꽉 잡고 있었으니까 먼저 일본 측에 시비를 걸 법도 하지만 그럴 사정이 못 되었다. 중국에 진출한 서양 열강이 각종 특혜와 이권으로 단물을 빨아먹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당장은 그 문제가 더 시급했고, 게다가 아직은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체력에 문제가 있었다. 한편 일본은 군국주의로 가는 길의 마지막 고비에서 맞닥뜨린 걸림돌을 뽑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국내의 자유주의 세력이 들고 일어나 일본의 제국주의화에 제동을 걸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메이지 정부는 일단 자유주의자들에게 근대적 헌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여기서도 유신정권의 잔꾀가 유감 없이 발휘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정부가 약속대로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표한 것에 만족했으나 이 헌법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천황 전제를 합법화하는 내용이었다대일본제국은 천황이 통치한다’ (1), ‘천황은 신성하여 침범받지 않는다’ (3) 등의 조항에서 보듯이 새 헌법은 민주주의는커녕 오히려 천황 독재의 확립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내각, 제국의회, 재판소가 신설되었으나 모든 기관은 사실상 천황(유신정부)의 통치를 돕는 일종의 분업적 기관에 불과했다. 그럼 일본의 자유주의 세력은 왜 더 이상의 것을 얻어내지 못했을까? 일본에는 서유럽 국가들과 같은 시민사회의 역사가 없기에 자유주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는 당시 일본이 모델로 삼았던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도 마찬가지였다. 독일도 시민사회의 힘이 약했기에 정부가 의회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농락할 수 있었는데, 이 점은 결국 20세기 들어 독일이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는 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착취의 테크닉 조병갑은 농민들을 동원해 만석보를 만들고 이 저수지를 이용해 농민들에게서 물세를 챙기는 고도의 테크닉을 선보였다. 사진은 지금의 만석보인데,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을 기념하기 위해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게 중국과 일본이 자국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 부심하고 있는 동안 조선은 상대적으로 안정기를 가질 수 있었다. 만약 이 시기에 김옥균(金玉均)의 개혁ㆍ개화 정권이 있었더라면, 아니 최소한 정상적인 행정이나마 꾸릴 수 있는 정권이었더라면, 혹시 조선은 다가올 암울한 미래에 대비한 체력을 어느 정도 비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리도, 정강도, 일관성도 없는 민비(閔妃) 정권은 그 소중한 시기를 기회로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1885년에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사건이 터졌는데도 주체적으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각국 공사관에 도움을 호소하면서 갈팡질팡할 뿐이다(그래서 거문도에는 1887년까지 무려 2년 동안이나 영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은 그 사건에서 국제관계를 다양화시켜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랄까? 이후 조선 정부는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무원칙한 개방은 무질서의 확대를 낳을 뿐이다. 조선 정부로서는 국제관계 이전에 나라 안을 먼저 걱정해야 했다.

 

1893년 봄 충청도 보은에서 2만 명의 농민이 모여 척왜양(斥倭洋,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라)의 요구를 내걸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범상치 않은 규모요, 범상치 않은 시위인데, 더 범상치 않은 것은 시위대의 구성이다. 그들은 바로 동학교도들이었던 것이다. 전 해부터 교주인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동학(東學)을 탄압하지 말라고 정부에 요구했던 그들은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정치문제까지 들고 나오기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시위가 폭동화할 것에 대비해서 진압을 준비하는 한편 시위대를 회유하는 양면책을 구사하지만,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과연 그 해 내내 간헐적으로 일어나던 시위는 이듬해 1월 봉기로 터져나왔다.

 

30년 전의 민란에서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역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부패한 관리다. 전라도 고부의 군수인 조병갑(趙秉甲)은 저수지를 고치는 데 농민들을 동원했으면서도 농민들에게서 가혹한 물세를 받아먹는가 하면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수선을 떨면서 그 기금을 농민들에게서 뜯어냈다. 참다 못한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全奉準, 1855~95)은 농민과 동학교도로 이루어진 1천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고부 관청을 습격해서 아전들을 옥에 가두고 곳간을 열어 농민들의 혈세를 돌려주니,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의 시작이다(1894년이 갑오년이기에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부르는데, 명칭은 중요하지 않다)지금도 그렇지만 전라도는 조선시대에도 최대의 곡창지대였다. 지방관들의 탐학이 특히 심했던 이유도 그 때문인데, 여기에는 아마도 조선시대 내내 전라도 지역이 소외되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라도만이 그런 것은 아니고, 이른바 새외(塞外)라고 불렸던 서북 지역은 소외를 넘어 공식적인 차별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지역차별이 심화된 이유는 중기로 접어들어 사대부(士大夫) 체제가 되면서 영남 출신들이 조선의 중앙 관직을 독점했기 때문이다(초기까지는 주로 중부 지방 출신이 중앙 관직에 포진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에는 거의 영남의 독무대였다).

 

 

농민군의 연판장 동학 농민군이 거사를 앞두고 전국의 접주들에게 알린 비밀 통신문이다. 오른쪽에 둥글게 이름을 연명한 게 사발 모양이라서 흔히 사발통문이라고 부르는데, 그 의도는 혹시 적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주모자가 누군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발의 아래쪽에 전봉준의 이름이 보인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사건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만큼 키운 것은 정부의 태도다.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李容泰, 1854~?)는 안핵(按覈)하기는커녕 봉기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아붙였다. 동학(東學)은 실정법상 금지되어 있으니까 일단 처벌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그것은 타오르는 농민들의 기세에 기름을 끼얹은 결과가 되고 만다(물론 농민들 중에 동학교도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봉기의 근본 원인은 종교 때문이 아니었으니 농민들이 격분한 것도 당연하다). 이제 분노의 화살은 지방의 탐관오리만이 아니라 중앙정부에게도 겨누어졌고, 농민 시위대는 농민군으로 탈바꿈했다. 농민군 지도자인 전봉준, 김개남(金開南, 1853~95), 손화중(孫華仲, 1861~95)동학(東學)의 전통적 이념인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을 보호하자)은 물론 축멸양왜(逐滅洋倭, 서양과 일본을 몰아내자)라는 정치적 슬로건까지 거리낌 없이 내세운다. 게다가 농민군은 531일에 전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그 슬로건을 실현할 주체적 역량이 있음을 과시했다.

 

그제야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막상 정부가 할 일은 별로 없다. 그저 본국이나 다름없는 청나라에 SOS를 쳐서 지원과 해결을 부탁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일본은 청나라와 톈진조약을 맺어두었다. 그래서 사태는 제2라운드로 접어든다. 이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조선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청나라와 일본의 현안이 되었다.

 

 

동학농민군의 상황도 톈진조약은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개입하기 위한 교묘한 장치였다. 민비(閔妃) 정권이 내란 진압을 위해 외국군을 끌어들이자 톈진조약이 발동해 일본도 참여하게 된다. 청군이 전장 부근인 충청도 아산으로 간 데 비해 일본군이 인천으로 곧장 들어온 것은 일본의 진의를 말해준다.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킨 1894531, 농민군에 못지 않게 이를 기뻐해 준 자들이 있었다. 바로 현해탄 건너편 메이지 정부의 지도부다. 같은 날 제국의회는 정부 불신임안을 제기했던 것이다(아무리 제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어도 의회인 이상 정부와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메이지 정부가 발족한 이래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으나 그 지속 기간은 극히 짧았다. 전주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민비 정권이 청나라에 진압 병력을 요청하자마자 톈진조약이 발효되었고, 이제 메이지 정부는 내부의 위기를 바깥으로 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한양발 급전을 듣고 하늘이 도운 것이라며 기뻐했을 정도다(그는 바로 앞에 나온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다).

 

신속과 일사불란함을 강점으로 삼는 메이지 정부는 정말 전광석화처럼 대처했다. 이틀 만에 의회를 해산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는데, 정작 파병을 요청받은 청나라가 군대를 거느리고 충청도 아산에 상륙한 6월 초에 일본군은 남해와 황해를 빙 돌아 인천에 상륙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잽싸게 움직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사실 청나라 군대가 전주에 가까운 아산으로 온 반면 일본군은 한양에 가까운 인천으로 왔다는 사실이 이미 조선의 상황을 보는 양국의 시각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 나라 백성이 일으킨 반란에 남의 나라 군대를 스스럼없이 끌어들이는 민비(閔妃)의 작태는 새삼스럽게 비난할 가치도 없지만, 어쨌든 그 때문에 농민군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척외양의 기치를 높이 치켜든 마당에 외세를 끌어들인 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봉준은 즉각 정부와 화의를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해서 외세가 개입할 빌미를 없애 버린다(당시 그는 동학교도가 관장하는 집강소執綱所라는 민간 행정기관을 전라도 일대에 두기로 하는 요구 조건을 관철시켰는데, 이는 나중에 재차 봉기를 위한 용의주도한 배려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한 외세에 대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른 외세는 막지 못했다.

 

진압 대상이 없어지자 청나라와 일본의 태도는 확연히 갈라진다.요청받은 진압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구상이 없었던 청군은 머뭇거렸으나, 애초에 진압을 구실로 본국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더불어 조선 진출을 가시화할 작정이었던 일본군은 농민군이 일단 해산했음에도 잔당을 없앤다며 설치고 다녔다. 위안스카이는 놀기도 무엇해서 일본 측에 함께 철군하자고 제안했으나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에게 내려진 본국의 지령은 그 참에 조선을 주물러놓으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달 가까이 법석을 떨던 일본군은 급기야 7월 하순에 느닷없이 경복궁에 침입하더니 민비(閔妃) 정권을 해체하고 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였다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나라에서 사실상의 유배 생활을 하던 대원군은 3년 뒤인 1885년 조선에 통상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위안스카이와 함께 귀국했다. 이미 두 차례의 집권에서 실패를 맛본 데다 나이도 육순이 넘었으니 이제는 욕심을 버릴 법도 하지만, 대원군은 그렇지 않았다. 귀국한 뒤에도 그는 위안스카이와 결탁해서 집권을 노리는가 하면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나자 농민군과 접선을 시도하기도 했다(임오군란 당시에도 반군의 힘을 빌려 잠시 집권했던 경험이 생각났을 법하다). 아마 그가 일본 측에 스카우트된 이유는 그렇게 권력에 관해 활화산 같은 의욕과 정력을 보였기 때문일 터이다.

 

 

알현인가, 시위인가? 고종(高宗)을 알현하는 오토리 게이스케(맨 오른쪽 인물)의 자세가 사뭇 거만해 보인다. 육순 노인이었던 그는 전 해에 신병으로 귀국했다가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나자 즉각 조선으로 달려왔다.

 

 

동학 농민군이 해산한 뒤에도 일본이 자꾸 사태를 키운 이유는 어차피 본국의 사정상 조선에서 뭔가 한 판 크게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서 두 가지 과제를 설정한다. 하나는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조선의 발전을 지원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장차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일단 더 먹기 좋은 떡으로 만들어야할 필요성에서다. 다른 과제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입김을 제거하는 것이다. 아무리 조선을 맛있는 떡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입이 둘이라면 별로 맛있게 먹지 못할 테니까.

 

대원군을 경복궁의 주인으로 들어앉힌 지 이틀 만에 일본의 해군과 육군은 황해상의 청나라 함대와 아산에 주둔 중인 청나라 육군을 기습한다. 이렇게 해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으나 정식 선전포고는 사흘 후에야 이루어졌다. 드디어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예고되었던 두 메이저 간의 조선 따먹기가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더 긴 호흡으로 보면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무려 300년 만에 재개된 중국과 일본의 대회전이라 할 수도 있다. 비록 당시에는 중화세계와 비중화세계의 대결이었으니까 지금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무승부로 끝났으니 이번만큼은 승부를 봐야 한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또다시 무대가 한반도라는 게 불운이지만, 이번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초대받은 전쟁즉 조선 정부가 자초한 것이므로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전쟁 자체로 보면 흥미로울 수도 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이 대결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둘 다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을 모델로 한 개혁이지만 성격과 진행 방식에서는 사뭇 달랐기 때문에 성과를 비교평가하는 데 좋은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전쟁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이홍장이 각별히 공을 들인 청나라의 육군과 해군은 일본의 기민한 공격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개전 후 두 달이 채 못 되어 일본군은 평양에서 청나라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청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으며, 황해 해전에서도 일본 함대는 청나라 주력 함대를 손쉽게 제압했다. 곧바로 랴오둥에 상륙한 일본군이 뤼순을 접수하고 산둥반도까지 밀고 내려가자 청나라는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300년 전 10년 가까이 끌었던 승부를 일본은 불과 몇 개월만에 끝장냈지만, 전쟁의 승리보다 더 반가운 것은 이제 조선을 독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일본은 조선을 먹기 좋은 떡으로 다듬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라면 몰라도 조선의 내정 자체에 일본이 앞장설 수는 없는 입장이므로 꼭두각시를 내세워야 한다. 그래서 발탁한 게 바로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에게 일본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는 데 기둥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대원군을 잘 몰랐다. 권력욕의 화신 같은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대원군은 결코 권력을 남과 나눠 가지거나 남의 허수아비가 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런 점은 후배 독재자인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막상 권좌에 오른 뒤에는 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민족주의자로 존경할 수 없는 이유는 대원군을 현명한 지도자로 볼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그러나 착각한 것은 대원군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조선의 집권자는 이름만의 존재일 뿐 아무런 실권도 없다는 사실을 그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주제를 모르고 주체성을 보였던 대원군은 한 달도 못 가 퇴출되고 만다. 일본이 다음 후보로 내세운 인물은 바로 김홍집(金弘集)이다. 온건 개화파였던 그는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수습한 뒤 10년 동안이나 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실로 오랜만에 화려하게 컴백했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일본이 짜준 개혁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뿐이다. 그 프로그램을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 부르는데, 실상 김옥균(金玉均)10년 전에 시도했던 개혁이 당시에는 그것을 반대했던 김홍집의 손에 의해 추진되는 격이니 공교로울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개혁의 주체는 김홍집이 이끄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인 듯하지만, 알고 보면 고문의 직함을 가진 오토리 공사이고, 더 알고 보면 그의 배후에 있는 일본의 메이지 정부다. 따라서 갑오개혁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축소판일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어쨌든 그 내용은 나무랄 데가 없다. 문벌과 신분의 차별을 철폐하고 노비문서를 소각한 것이라든가, 연좌제를 폐지하고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고 관권에 의한 인신 구속을 제한하는 등 인권 보장에 비중을 둔 것은, 비록 강요된 개혁일지라도 한반도 최초로 근대적 법과 제도가 자리잡은 기념비적 변화에 해당한다. 게다가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조선 고유의 개국기년을 사용하기로 한 것과 과거제(科擧制)를 폐지한 것은 중화세계의 굴레를 벗어던진 것이므로 500년 조선사, 아니 1천 년 한반도사를 완전히 뒤집는 획기적인 일이다(그래서 서기 1894년은 개국 503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화폐제도도 개혁되고, 조세제도도 은납제(銀納制)로 바뀌고, 은행과 회사의 설립이 시작되고, 도량형도 통일되었으니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못한 전반적인 개혁을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불과 며칠 만에 우지끈 뚝딱 해치운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측에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친일로 선회하게 된 조선 정부에서마저 지나치게 급진적인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였다면, 조선 백성들이 개혁을 바라보는 태도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새로 발행한 화폐를 사용하라고 해도, 조세를 화폐로 내라고 해도, ()이나 리()를 쓰지 말고 미터법을 쓰라고 해도 백성이 따르지 않으면 말짱 헛거다. 더욱이 조선백성들은 정부의 모든 조치를 불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외세가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자기들끼리 싸움박질을 벌이고 내정에 간섭하는 꼴을 더 이상 참지 않으려 한다. 전봉준이 2차 봉기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외세 간섭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한동안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던 전봉준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지자 다시 척왜의 기치를 치켜들고 봉기했다. 집강소를 통해 신속히 연락이 이루어진 결과 189410월 전라도 삼례역에는 무려 11만에 이르는 동학 농민군이 모이게 된다원래 동학(東學)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은 전봉준의 계획에 반대했다. 동학이라는 새 종교를 착근시키는 것에 목숨을 건 그는 오히려 전봉준을 역적이라 부르며 정부 측에 추파를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2차 봉기도 처음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 접주들(남접)이 시작했고 최시형이 관장하는 충청도 접주들(북접)은 참여하지 않았다. 오지영(吳知泳, ?~1950)이 항일에 매진하자고 최시형(崔時亨)을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남접과 북접이 함께 대규모 농민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봉기가 실패한 이후 남접의 지도부가 모두 죽음을 당한 것과는 달리 최시형, 오지영, 손병희(孫秉熙, 1861~1922) 등 북접의 지도부는 살아남았고 훗날 동학(東學)을 계승한 천도교에서 간부를 맡았다. 굵고 짧은 삶보다 가늘고 긴 삶을 선호하는 종교의 생리를 말해준다.

 

하지만 일본군이 정식으로 투입된 이상 농민군의 투쟁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1월 공주성 공략에서 실패한 농민군은 곧이어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의 조직력과 우세한 화력에 버티지 못하고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남접 삼총사가 체포되어 이듬해 참수당함으로써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최종적인 막을 내렸다.

 

 

관점의 차이 조선에서 내란이 터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청나라와 일본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청나라는 민비(閔妃)의 초청장을 받고서 아산으로 온 반면 일본은 톈진조약을 구실 삼아 인천항으로 들이닥쳤다. 사진은 그 일본군의 모습이다. 이렇듯 같은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었으니 청일전쟁의 승패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어느 부부의 희비극

 

 

1895년 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를 받았다.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에서 또 하나의 불평등조약을 맺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서양 열강이 아니라 일본이 상대방이었다는 점에서 무척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조약의 내용은 서양 열강이 중국과 체결했던 각종 불평등 조약을 망라하여 모방한 것이었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랴오둥 반도와 대만 등을 빼앗았고 막대한 배상금도 받아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제1항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조선 내에서도 그 조항을 증명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모화관이 문을 닫은 것이었다).

 

물론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킨 일본의 의도는 이제부터 청나라 대신 일본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과연 일본은 곧바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와 서광범을 귀국시켜 2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친일 성향으로 개편하고김옥균(金玉均)이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새 내각의 수반이 되었겠지만, 불행히도 그는 18943월 상하이에서 민비(閔妃) 정권이 보낸 홍종우라는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민비 정권은 여러 차례 일본 측에 김옥균 일당을 압송하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은 당연히 그 요구를 일축했다. 김옥균이 일본의 정객들과 교류하면서 컴백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자 초조해진 민비 정권은 그를 암살하기로 했다. 한 차례 섣부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일본은 김옥균(金玉均)을 빼돌려 보호하고자 했으나, 결국 김옥균은 자객의 계략에 빠져 상하이로 갔다가 피살당하고 만 것이다. 그 암살 사건으로 일본의 언론이 조선 정부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조선 침략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을 보면, 아마 김옥균은 일본의 정객들과 상당히 두터운 친분을 쌓았던 듯하다, 비현실적인 선언에 그쳤던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수정해서 홍범 14조라는 새로운 개혁안을 조선 정부에 강권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조선 정부가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었다.

 

우선 조선의 중앙 관제에서 언제나 으뜸이었던 의정부가 폐지된 데서 민비(閔妃) 정권은 큰 충격을 받았다(비록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에 모든 권한을 빼앗겨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지만 의정부가 지니는 상징성은 대단히 크다). 게다가 왕실과 국정을 분리시킨 것은 일종의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겠다는 구도였으니 이제 민비(閔妃) 정권은 발 딛고 설 곳조차 없어졌다. 궁지에 몰린 그들의 눈에는 1500년에 걸친 중국의 영향력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도 해방감을 주긴커녕 커다란 불안 요소로만 보일 뿐이다. 그런 불안감에다 오랫동안 교린의 대상이었던 일본의 지배를 받는 데 대한 거부감이 겹치면서 민비 정권은 청나라를 대신해줄 새로운 파트너를 섭외한다. 그 파트너는 바로 러시아다.

 

 

욕된 죽음 20년 동안 조선의 실권자로 군림했던 민비(閔妃)는 사진에 나오는 건천궁의 옥호루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 건천궁은 경복궁에서도 가장 북쪽의 후미진 곳이었으니 야밤에 거기까지 도망친 민비의 다급한 심정이 보이는 듯하다. 조선 민족에게 그녀는 치욕스런 국모였으나 그녀의 죽음은 다른 의미에서 국가적인 치욕이었다.

 

 

18957월 민비 정권은 마침내 박영효를 내쫓고 친러파인 박정양과 어윤중을 내세워 3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했다민비 정권의 친일 - 친청 - 친러로 이어지는 눈부신(?) 노선 변화에서 철저한 무원칙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정권이 노선을 바꾸었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민비 정권의 변신은 자체 이념에 따른 게 아니라 언제나 적에 대한 반대로 취해졌다는 데서 일관성이 없다. 처음에는 대원군을 반대했기에 친일이었고,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한 급진적 개화파를 반대했기에 친청으로 돌았으며, 일본이 청나라를 제압하자 친러를 택했으니, 그 변화는 어떻게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보겠다는 안간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 단독 주인이 된 마당에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일본이 아니다. 더욱이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얻은 랴오둥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 때문에 곧바로 토해내야 했던지라 러시아라면 원한이 깊을 수밖에 없다. 조선 정부를 친러로 선회하게 만드는 데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활약이 컸다면, 이번에는 일본 공사가 활약할 차례다. 그런 의도가 있었기에 그 무렵 일본이 조선에 새로 파견한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1846~1926)는 전의 공사들과 달리 무관 출신이었다.

 

부임한 직후 그는 승려의 신분이라고 자처하며 남산의 일본 공사관에 은거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그랬다뿐이고 비공식적인 활동은 무척 활발하다. 우선 그는 민비 정권에 반대하는 조선의 내부 세력과 접선해서 해고 직전에 있던 조선군 훈련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훈련대의 수준이 형편없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한양에 와 있던 일본의 양아치들과 상인, 기자, 통신원들까지 긁어모아 얼기설기 조폭 같은 군대를 편성했다. 그 용도는 바로 다음 달인 18958월에 드러난다. 느닷없이 경복궁을 기습한 것이다.

 

일개 깡패들을 당해내지 못할 정도라면 궁성 수비대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어쨌든 경복궁 수비대는 19791212일 새벽에 같은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처럼 별다른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깡패들의 입성을 허락했다. 왕의 침실로 들어간 깡패들은 고종(高宗)의 옷을 찢었고 세자의 목을 칼로 후려쳤다. 다행히 세자는 죽지 않고 기절한 덕분에 살아남아 나중에 왕위까지 이을 수 있었지만 그 행운은 그의 어머니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왕비의 침실로 간 깡패들은 앞을 막아서는 궁녀들을 죽인 다음 민비(閔妃)마저 살해했다. 더욱이 그들은 증거 인멸을 위해 민비의 시신을 불에 태우고 재마저 여기저기 흩뜨려 놓아 찾을 수 없게 했다. 허수아비 남편을 주무르면서 20여 년간 권세를 누리는 동시에 조선의 몰락을 재촉했던 민비는 결국 이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역사를 거스른 대가일까?

 

 

신데렐라의 최후 한미한 가문의 딸이었다가 일약 일국의 왕비가 된 민비(閔妃)의 삶은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황후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결국 그녀는 일본 하급 무사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위 사진은 민비의 국장 장면.

 

 

일본 정부는 사건 직후 미우라와 관련 인물들을 급히 소환하고, 우발적인 범행이라며 발뺌했지만 사전 승인 또는 적어도 묵인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처음에는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가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에서 알아차리는 바람에 관련 인물들을 재빨리 철수시켰기 때문이다(게다가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서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어쨌거나 숙적인 민비(閔妃)를 제거하고 뜻을 이루었다고 판단한 일본은 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김홍집(金弘集) 내각에게 갑오개혁(甲午改革)을 계속 추진하라고 지시한다.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국모였던 민비를 비참하게 잃은 조선 백성들이 그 개혁을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그런 분위기에서 11월에 시행된 단발령(斷髮令)은 조선 백성들의 반일 감정을 극에 달하도록 만들었다(단발령이 시행된 날짜는 18951117일이었는데, 하필 이 날짜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날을 기해 조선은 그때까지 쓰던 음력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양력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18951117일은 양력으로 189611일에 해당한다)단발령의 표면상 이유는 위생에 좋고 편리하다는 것이었으나 어쩌면 일본이 조선 백성의 저항적 분위기를 테스트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예상했던 대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손할 수 없다는 유교 예법에 따라 단발령에 대한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났는데, 주목할 것은 사대부(士大夫)들은 물론이지만 일반 백성들까지도 그랬다는 점이다. 반일 감정도 원인이겠으나 500년 동안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면서 조선사회가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으로 도배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래서 고종(高宗)과 정부 관료들이 이발을 해서 시범을 보였음에도 성리학의 골수 분자들은 문명을 야만으로 바꾸려는 조치라며 결사 반대했다. 특히 최익현은 머리를 잘릴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골수 분자답지 않게 재치있는 명언을 남겼다.

 

그 직후 조선 전역에서 일본에 반대하는 의병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조선 백성들은 아마도 전 해부터 전개된 조선의 일본화 작업보다 단발령(斷髮令)에 더 큰 자극을 받았던 모양이다.

 

 

단두 같은 단발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종과 세자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상투를 잘라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잘리는 것처럼 통곡했으며, 잘린 상투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백성들보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더 사무친 사람이 있다. 바로 일본에 의해 아내를 빼앗긴 고종(高宗)이다. 백성들은 일본을 혐오하지만 고종은 혐오를 넘어 일본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에게 민비(閔妃)는 사랑하는 아내라기보다 20년 동안이나 자신을 이끌어주던 정신적 스승이었다. 아내가 있었기에 그는 그 긴 세월 동안 국왕의 책무를 면제받고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아내의 넓은 치마폭에 숨어 있는 한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랬으니 이제 이 세상에 홀로(?) 남게 된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에게는 상처받은 자신을 만져주고 보듬어줄 새 보호자가 필요하다.

 

물론 아버지 대원군은 싫다. 평소에도 엄하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권력에 미친 노인네인 데다가 아내를 죽인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의지할 데 없는 마흔네 살짜리 아이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든 것은 친러파인 이범진(李範晉, 1852~1910)과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이다. 베베르 공사와 머리를 맞대고 짠 각본에 따라 그들은 18962월 고종(高宗)에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한다. 대원군과 친일파가 득시글거리는 궁중, 아니 그보다 아내의 치마폭이 사라진 썰렁한 궁중보다는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러시아 공사관이 훨씬 낫다는 논리다. 일국의 왕이 거처를 옮기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논리였으나 고종은 그것을 수락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왕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렇게 해서 시작한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의 피난 살림이 무려 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르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건에까지 이름을 붙일 가치가 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어쨌든 조선은 왕국인지라 왕이 피난한 효과는 있었다. 김홍집(金弘集) 친일내각은 즉각 김병시(金炳始, 1832~98)를 수반으로 하는 친러내각으로 바뀌었고, 대원군은 또 다시 정계에서 은퇴했다(칠전팔기의 뚝심을 지닌 그도 이번에는 마지막 은퇴였다). 김윤식은 체포되고 어윤중은 피살되었으며,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쓴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젊은 주역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견문을 준비해야 했다. 이것만도 볼 만한 코미디지만 진짜 코미디는 그 다음이다. 정권을 친러파가 완전히 장악했어도 고종(高宗)은 경복궁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부터 1년 동안 정부는 남의 나라 공사관에 가 있는 제 나라 국왕을 환궁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궁리하고 상소하지만 국왕은 악착같이 가지 않으려 버티는 희한한 쇼가 여러 차례 벌어진다. 아무리 일본의 위협이 남아 있다지만 일국의 왕으로서 그렇게 겁이 났을까?

 

그토록 무겁던 고종(高宗)의 궁둥이가 바닥에서 떨어진 것은 18972월이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일본을 충분히 견제할 만큼 튼튼해졌다고 판단한 그는 1년이나 남의 집 신세를 지고서야 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그가 주연을 맡은 코미디는 한편이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그동안 보인 추태에 어울리지 않게 황제를 자칭하게 되는 사건이다.

 

 

발코니의 국왕 정신적 지주였던 아내가 죽자 고종의 정신은 금세 산란해졌다. 그래설까? 그는 제 집을 놔두고 1년 동안이나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사진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고종(高宗)의 모습이다. 그 바깥에는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있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시위대는 조선인들이 아니라 일본군이었다.

 

 

기묘한 제국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는 동안 조선의 정세는 미묘하게 돌아갔다. 일본은 물러났으나 조선에서 발을 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조정을 손에 넣은 친러파도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사실 침략의 야욕이 아니더라도 그간 조선에 들인 정성을 생각한다면 일본은 조선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조선을 먹기 좋은 떡으로 만들기 위해 내정 개혁에 그토록 애쓴 것이나, 조선 민중의 거센 도전과 강호인 청나라마저 물리친 것을 생각하면 이제 와서 조선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런데 난데없이 러시아라는 놈이 오더니 다 잡아놓은 닭을 털도 뽑지 않고 삼키려 한다. 일본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삼국간섭만 해도 그렇다. 프랑스와 독일은 들러리만 섰을 뿐, 실제 일본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공작한 것은 러시아다. 그 사건으로 랴오둥을 뱉어낸 것만도 땅을 칠 일인데, 이제 러시아는 조선에서마저 물러나라고 강요한다. 일본은 러시아와 한 판 붙을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결승 상대로 여겼던 청나라는 준결승 상대에 불과했다.

 

문제는 청나라와 달리 러시아는 당당한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서 일본의 영원한 모델인 영국마저 두려워하는 상대라는 점이다러시아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정치적으로 제국이면서 경제적으로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나라였다. 당시 전세계를 통틀어 제국 체제를 취한 나라는 유럽의 러시아와 터키, 아시아의 청나라인데, 셋 중에서 제국주의 열강에 속한 것은 러시아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방식의 제국 체제는 세계적으로 힘을 잃어가는 추세였다. 청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한때 강성했던 터키 제국(오스만투르크)은 서유럽 열강에 위축되어 발칸과 소아시아에서 명맥만 유지하는 상태였으며, 러시아 제국은 덩치만 컸을 뿐 유럽의 후진국이라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제국은 1910년대에 한꺼번에 멸망하게 된다. 역시 제국이란 새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체제였던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가 중국과 조선에서 취하는 행동을 보면 일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따라서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거치지 않으면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 될 수도 있다.

 

친러파가 조선 정부를 장악할 때 일본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은 이런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조선은 다시 한 번 귀중한 시간과 기회를 벌었다. 두 메이저 간의 결승전이 예정되어 있는 이상 넉넉한 여유는 없겠지만 아마 한반도가 힘의 공백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앞서 일본과 청나라의 준결승이 벌어지기 전에도 조선에게는 폭풍전야와 같은 짧은 휴식기가 있었으나 날려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1896년 최초의 민간 정치조직인 독립협회(獨立協會)가 발족한 것은 좋은 타이밍이었다.

 

 

최초의 민간 신문 강고한 이념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서재필(徐載弼)독립신문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정부 지원금 이외에 사재까지도 털어넣었으니까. 가로 22센티미터, 세로 33센티미터의 이 한 뼘밖에 안 되는 4면짜리 신문이 한반도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창립자인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변신의 극치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사관생도로 일본에 망명했던 그는 이후 미국으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의 물결이 한창이던 1895년에는 귀국해서 언론인이 된다(실은 한 개인이 이런 편력을 걸을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조선 사회의 인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래도 급진적 개화론으로 출발했던 이념의 뿌리만큼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189647일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뒤이어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독립협회가 내세운 개혁 노선은 그때까지 나왔던 모든 개혁론의 집대성에 해당한다. 자주국권과 자유민권의 이념을 골간으로 삼고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 경제적으로는 근대적 공업 체제, 사회적으로는 서유럽식 시민사회를 주장했으니, 민간 단체의 이념과 주장으로서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급진적이고 호기롭다. 아마 불과 2년 전에만 독립협회가 생겼더라도 협회는 당장 폐쇄되고 서재필(徐載弼)은 처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수구의 기둥이었던 민비(閔妃)도 죽었고,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는 당시 여느 서유럽 국가들에 못지 않을 만큼 자유주의적이었다.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주된 활동은 일단 일반 민중에게 애국계몽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제도권 정치가 무능해진 마당에 정치적 야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오랜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한 것은 자주국권을 앞세운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정치적 이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고종(高宗)으로서는 종묘 사직을 때려부수는 듯한 씁쓸한 마음이었겠지만, 입헌군주제까지 운위되는 판에 그가 강력한 ‘NGO’의 주장을 거부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독립협회가 고종의 심기를 상하게 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협회는 고종을 역대 어느 왕보다 영예로운 지위로 격상시켜준다. 독립문의 완공을 한 달 앞둔 189710월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 제국의 황제가 되는데, 이것은 독립협회(獨立協會)와 친러파 정부의 완벽한 합작품이었다사실 이것은 원래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급진적 개화파의 구상이었다. 당시 혁신정강에서는 중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하고 조선의 국왕을 중국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끌어올린다고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변 세력은 고종(高宗)의 삼인칭을 군주가 아닌 대군주라고 불렀고, 이인칭도 전하가 아니라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폐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독립협회는 그런 급진적 개화파의 노선을 계승하고 있었으므로 발족 초기부터 조선의 제국화를 추진했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것도 18979월 말 독립협회 회원이자 농상공부협판이었던 권재형이 칭제(稱帝)’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데서 비롯되었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로서는 고종(高宗)이 왕이든 황제든 별 상관없었을 것이다.

 

 

제국의 기념사진 드디어 조선은 왕국에서 제국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하지만 왕국일 때도 정상이 아니었으니 제국은 말할 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국호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국가를 어떻게 이끌 것이냐는 문제였으나, 대한제국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해 여기 모인 고종과 대신들은 일단 뿌듯하기만 했다.

 

 

그에 앞서 18961월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甲午改革)의 마무리로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건양(建陽)이라는 새 연호를 제정한 바 있었다. 원래의 일정대로라면 대한제국도 그때 탄생했겠지만,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늦어졌으니 고종(高宗)은 스스로 황제 등극을 미룬 셈이다. 이렇게 황제 자리가 별로 매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면 대한제국도 과연 명실상부한 제국인지 의심할 여지가 충분하다. 좀 멀기는 하지만 건양의 바로 전에 한반도 왕조가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던 경우는 무려 900여 년 전인 고려 광종(光宗) 때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광종은 중국이 5대의 분열기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제스처로서 독자적 연호를 제정했을 뿐이었고 중국의 신흥 왕조인 송나라가 안정되자 곧 송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런 사정은 대한제국도 마찬가지다. 제국이라니까 상당히 자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주체적인 체제 전환이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가 한 발자국씩 물러서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다분히 선언적인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일본 추종의 성향이 강한 독립협회(獨立協會), 러시아에 줄을 대고 있는 친러파 정부가 사이좋게 제국화 작업을 추진한 데서도 대한제국의 괴뢰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그래서 앞으로도 대한제국이라는 어설픈 호칭보다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계속 쓰기로 하자).

 

이렇듯 알맹이 없는 무늬만 제국이었기에 막상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그 작업을 주도한 두 세력은 제국이라는 그릇에 채울 알맹이를 둘러싸고 곧 의견이 엇갈린다. 독립협회는 재야 세력인 만큼 입헌군주제라는 기존의 당론을 고수한 반면, 친러 수구파 정부는 집권 세력이므로 당연히 전제군주제를 주장한다(물론 고종은 황제가 되었어도 여전히 스스로 허수아비가 되고자 했으므로 아무런 발언권도 없다. 따라서 친러파가 말하는 전제군주제란 실상 자신들이 전제권을 가지는 체제를 말한다). 이렇게 근본적인 체제 문제에서부터 노선이 달라지자 두 세력은 다른 문제들을 놓고도 점차 서로 각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1898년 초 정부가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부산의 영도를 조차해주려 한 것은 독립협회(獨立協會)만이 아니라 조선 국민 전체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해 310일 독립협회는 서울 한복판의 종로에서 무려 1만 명이 넘는 군중을 모아 대규모 규탄대회를 열었는데, 이른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예전 같으면 유림이 만인소라는 항의 방식을 썼겠지만, 이번에는 일반 국민들이 참여한 정식 집회였으니 한층 진일보한 시민사회의 면모를 보여주는 사건이다(독립협회의 민중 계몽운동이 결실을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지방의 봉기나 반란이라면 몰라도 서울 도심에서 평민들이 대형 시위를 벌인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므로 아무리 수구에 물들고 외세에 의존적인 정부라도 겁을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정부는 급히 러시아와 연락을 취해 영도의 조차 계획을 취소했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때까지 일본이 사용하고 있던 월미도의 석탄창고도 반환받았다. 시민의 힘으로 정부와 외세를 굴복시킨 바로 이때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혹시 내친 김에 의회가 구성되고 헌법이 제정되었더라면, 이후의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독립협회(獨立協會)는 여세를 몰아 189810월 친러파 정권을 탄핵하고 박정양을 수반으로 하는 개화파 정권을 수립했다. 그리고는 애초부터의 목표였던 의회를 설립하기 위해 중추원을 개편하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친러파가 기회를 잡은 것은 바로 거기서였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무리가 의회를 구성한다면 왕이든 황제든 고종(高宗)은 바지저고리가 될 게 뻔하다. 친러파의 이런 꼬드김에 넘어간 고종(高宗)은 개혁 세력의 지원으로 얻은 황제로서의 권한을 개혁 세력의 탄압에 써먹었다. 그 해 11월 그는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간부들을 체포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무능한 위정자가 악한 위정자보다 낫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터이다. 평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오로지 수구적인 목적에만 왕권을 행사해서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린 고종(高宗)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러시아 공사관에 1년이나 머물렀던 고종이었으니, 그런 결정을 내린 데는 아마 입헌군주제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수구 친러파 인물들과의 두터운 친분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고종은 그것과 더불어 자신이 상징적 존재로나마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는 토대가 사라졌고 자신의 제국이 자주 노선을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무산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최초의 자발적 집회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주관하긴 했지만 만민공동회는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커다란 시위 효과를 발휘했다. 당시 서울 시민은 20만이 채 못 되었으나 무려 1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하지만 일부 불순 세력은 사진과 같은 투서로 만민공동회를 모략했다.

 

 

후보 단일화

 

 

고종(高宗)은 적어도 몇 년간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친러 수구파 정부로 복귀한 조선은 이후 한동안 별 탈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독립협회(獨立協會)를 무참히 짓밟았어도 큰 홍역을 겪은 만큼 나름대로 개화 정책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정부는 유럽 열강과 차례로 수교를 늘려가며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친러 노선을 취하는 이상 조선 정부는 러시아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러시아가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러시아가 동아시아에서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지역은 만주와 한반도였다. 친러 정권이 부활함에 따라 조선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여긴 러시아는 때마침 1899년 산둥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만주에 병력을 파견하고는 사태가 종결된 뒤에도 계속 늘러앉아 만주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그때 러시아의 전통적인 앙숙인 영국이 나섰다. 그러나 유럽의 정세도 심상치 않은 판에 극동에까지 직접 개입하기는 무리였으므로 영국은 파트너를 구하는데, 그게 바로 일본이다. 1902년 유럽과 아시아의 두 섬나라는 영일동맹을 맺어 각자 주어진 무대에서 패권을 잡자고 굳게 약속한다1870년대부터 유럽 각국이 활발하게 이리저리 동맹을 맺고 협상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당대의 세계 최강국인 영국은 19세기 말까지 어느 나라와도 동맹 관계를 맺지 않았다(당시 유럽의 외교전을 주도한 인물은 독일의 비스마르크였기에 그 시기의 유럽 질서를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영국의 이런 태도를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부르는데, 세계 최강이기에 가능했던 자세다. 그토록 오만했던 영국이 드디어 극동에서 러시아의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은 것이다.

 

영국으로서는 파트너에게 동아시아의 질서 유지를 맡겼으니 만족이지만, 일본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영국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영국과의 동맹으로 일본은 이제 러시아만 물리친다면 다른 유럽 열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동아시아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일본이 러시아와 자웅을 결정하고 나서 첫 번째 타깃으로 삼을 대상이 바로 조선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1903년까지도 만주의 러시아군은 여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게다가 러시아는 압록강 연안의 목재와 광산에 관련된 이권을 노리고 조선의 용암포를 조차했다. 만주라면 몰라도 한반도에 관계된 사건이라면 일본이 개입할 수 있는 빌미가 된다. 19042월 일본은 마침내 10년 동안 미뤄두었던 조선 쟁탈전의 결승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청일전쟁에서도 그랬듯이 일본은 먼저 조선의 인천과 만주의 뤼순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하고 나서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이 러일전쟁이다.

 

늙은 공룡을 상대로 했던 10년 전의 청일전쟁과 달리 이번 전쟁은 두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다. 그러나 일본에게 러시아는 청나라와는 급이 다른 강호였으므로 유럽 열강은 물론 파트너인 영국조차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 탓일까?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미국까지도 일본에게 전쟁비용을 지원하고 나섰다.

 

졸지에 유럽 열강을 대표해서 러시아와 맞싸우게 된 일본은 예상외로 선전한다. 우선 육군은 랴오둥의 러시아 요새를 함락시킨 뒤 남만주철도를 따라 북진해서 19053월에는 만주 봉천의 러시아 주력군을 격파한다. 해군 역시 유명을 떨치던 러시아의 극동함대를 격파하고 황해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한다. 하긴, 일본에게는 사활이 걸린 전쟁이고 러시아에게는 극동이 전체 전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니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바빠진 공사들 만주에서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서울의 각국 공사들도 바빠졌다. 사진은 미국 공사관에 모인 각국 공사들이다. 가운데 키가 가장 큰 공사와 가장 작은 청나라 공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그러나 초기에는 그런 배수진이 주효했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한계가 드러났다. 비록 유럽 열강의 지원을 받았지만 개전 후 1년이 지나자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전국민이 전시 체제에 동원된 데다 흉작까지 겹쳤고 더 이상의 전쟁 비용마저 고갈되었다. 일본은 사력을 다해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도 전쟁이 지속될 경우 전쟁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일본을 사지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준 것은 러시아의 내부 사정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러시아의 혁명운동은 러일전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청일전쟁으로 숨통을 텄듯이 러시아의 차리즘은 국내의 정정 불안을 러일전쟁으로 타개하려 했으나 전쟁은 혁명운동을 위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차르 정부의 무능함만 드러냈다. 급기야 1905122일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군대가 대규모 시위대에 발포하는 피의 일요일사태가 일어나 러시아 내부 정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종횡무진 서양사, 열매 24장 참조).

 

군국주의 일본의 성장보다는 러시아 내부의 혁명운동에 더 큰 위협을 느낀 서양 열강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두 나라의 강화를 유도했다.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회복하자는 데야 누가 반대할까? 다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그것으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사실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19059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 회담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권리를 일본에게 양도한 것이다아슬아슬했던 일본의 승리는 전세계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서양 열강은 물론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쑨원 같은 식민지ㆍ종속국의 민족운동가들도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을 자랑하는 러시아에게 승리했다는 소식에 커다란 자극을 받았다(심지어 청나라의 서태후 정권도 그 전쟁을 입헌군주제가 전제군주제에 승리한 것으로 해석하고 서둘러 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등 뒤늦게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간디와 쑨원은 착각하고 있었다. 일본은 피억압 민족의 선두주자가 아니라 제국주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신흥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새끼제국주의에서 성숙한제국주의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당당한 제국주의 국가의 자격을 획득한 일본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양도받은 권리를 행사하기로 한다. 러일전쟁의 최대 전리품, 그것은 바로 조선이다. 청일전쟁으로 수천 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해온 조선의 종주국을 물리치고, 러일전쟁으로 새로운 종주국을 물리친 다음 일본은 이게 조선의 단독 종주국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의 종주국들과는 달리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그치려 하지 않고 아예 조선을 통째로 소유하는 방법을 택한다.

 

 

북으로 북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일본은 극동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결승전에서 승리하여 조선을 전리품으로 얻게 되었다. 사진은 만주로 진격하기 위해 평양 부근을 지나고 있는 일본군의 행진 모습이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