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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건방진방랑자 2021. 6. 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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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전국시대를 거치며 초()ㆍ오()ㆍ월() 등 남중국의 이민족들도 중화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고, 때마침 통일 제국이 들어서면서 중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 세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중원과 북중국에서 보기에는 오와 월보다 지리적으로 멀지 않은 북방 민족들은 여전히 오랑캐로 배척을 받았다. 왜 그랬을까?

 

물론 그들의 강성함을 두려워한 중원 세력이 일찌감치 그들을 배척한 탓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북방 민족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국시대 남중국 민족들은 중원의 질서를 동경하고 거기에 속하고자 애썼지만, 북방 민족들은 유목민족 특유의 생활 방식과 자주적이고 강인한 기질로 인해서 남에게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그들 역시 중원의 선진 문화를 높이 평가했지만,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고 자신들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훼손하지 않으려 했다.

 

중국 대륙이 분열기에 있을 무렵에는 북방 민족에 대한 견제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 제국이 들어서자 그들은 갑자기 중원 문화에 최대의 적으로 변했다이때부터 생겨난 전통으로,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들은 예외 없이 개국 초 북변을 정리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때로는 그 여파가 한반도에까지 미쳤다. 7세기에 수와 당이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며, 14세기 말 신생국 명이 당시 한반도의 신생국인 조선을 경계한 것도, 17세기 초 후금()이 대륙 정복을 눈앞에 두고 후방 다지기의 일환으로 조선을 정벌한 것도 맥락을 같이하는 사건들이다. 이때부터 중국과 북방 민족 간에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고, 북방 민족들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늘 경계하고 경원(敬遠)하는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한대에 중화세계가 완성되면서 남방의 이민족들은 모두 한족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중화의 외부, 즉 비중화 세계의 오랑캐된 것이다.

 

당시 북방 민족들 가운데 최대의 세력을 떨친 민족은 흉노(匈奴)()은 오랑캐이고 노()는 종이라는 뜻이니 결코 좋은 이름은 아니다. 물론 중국의 고대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다였다. 바야흐로 중원 세력과 북방 세력, 중화와 비중화가 본격적인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신흥제국 한이 안정을 찾아갈 즈음, 흉노 역시 묵돌선우(冒頓單于)라는 걸출한 영웅의 영도 아래 크게 발흥하는 중이었다중국 역사서를 참고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한자 표기의 문제다. 예를 들어 묵돌선우(冒頓單于)라는 이름은 고대의 중국 역사가들이 한자로 표기한 것일 뿐 한자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그 한자명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모돈단우가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의 명칭을 표기할 때는 훈역보다는 음역, 즉 뜻보다는 발음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smith가 대장장이라는 뜻이라고 해서 Smith라는 서양 이름을 대장장이라고 옮기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冒頓單于라는 이름의 실제 발음은 당시 한자어의 발음이 어떠했는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농경 사회의 수호자인 중원의 통일 제국과 유목 사회의 대표자인 북방의 흉노의 대치는 갈수록 첨예해졌다. 사실 개국 초기만 해도 한은 흉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 고조 유방(劉邦)은 흉노 정벌을 위해 대규모 부대를 동원했다가 묵돌선우의 책략에 빠져 하마터면 자신마저 포로가 될 뻔한 적도 있었다. 호되게 쓴맛을 본 고조는 어쩔 수 없이 외교 노선으로 전환해 흉노와 화친을 맺고 매년 흉노에게 대량의 조공을 보냈다. 명분상으로는 천하의 주인을 자처했으면서도 사실상 흉노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화친을 위해 시집가는 왕소군 흉노와의 오랜 싸움으로 불안정했던 한나라는 평화와 안정이 필요했다. 이에 한은 흉노에 조공과 더불어 미녀도 바쳤는데, 대표적인 이가 왕소군이다. 그의 설화는 흉노와의 화친 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인으로 윤색되어 중국 고전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했지만,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과연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 후 60여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관계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걸출한 황제 한 무제(武帝) 때였다. 고조가 신생 제국 한의 명패를 올렸다면, 무제는 오랜 통치 기간(기원전 141 ~ 기원전 87) 동안 제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완비해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업그레이드한 군주였다.

 

우선 무제는 즉위하자마자 연호부터 제정했다. 역사상 첫 연호답게 그것은 기원을 세우다라는 뜻의 건원(建元)이었다. 그전까지는 제후국마다 각기 나름대로 해를 셈했으므로 혼란이 많았다.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된 이상 공동의 연호를 쓰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무제의 의도는 그보다 깊은 데 있었다. 그는 나중에 주변국들을 차례차례 복속시키면서 중국의 연호를 쓰도록 강요했다. 연호는 단일한 중국 문화권의 상징이었으며, 다른 문화권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중화적 자부심의 발로였다우리나라에서도 고대에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류로 중국 문화권에 합류하면서 중국의 연호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역사서나 심지어 판소리에서도 해를 셈할 때는 중국 황제의 연호를 썼다.

 

연호가 통일되니 자연히 역법(曆法)도 통일될 수밖에 없다. 무제는 태음력과 태양력을 합쳐 태초력(太初曆)을 만들었다. 원래 역법은 농경 사회에서 필수적인 것이었으므로 어느 나라에나 있었지만, 이것도 무제는 연호처럼 주변국들에 중국의 것을 쓰도록 강요했다. 무제 이후로 역대 황제는 매년 달력을 만들어 주변국들에 하사하는 것을 전통으로 확립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따르면 하늘의 뜻, 천리를 받은 천자는 중국의 황제 한 명뿐이므로 아무나 함부로 달력을 만들 수는 없었다. 연호와 마찬가지로 역법도 중국 황제의 종주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는 기준은 군주ㆍ영토ㆍ백성 등 몇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흔히 경시되는 중요한 요소는 달력이다. 군대를 소집하고, 관료 회의를 열고, 심지어 왕의 생일이나 국가 기념일을 정하는 데도 달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지금이야 누구나 달력을 쉽게 가질 수 있고 전 사회, 나아가 지구촌 대부분이 같은 달력을 쓰고 있지만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까다로운 역법을 알아야 만들 수 있는 데다 달력은 주권 국가의 상징이었으므로 독자적으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피와 땀을 흘리는 말 한 무게는 당시 서역에 제비를 밟고 달린다는 한혈마(汗血馬: 겨드랑이에서 피가 섞인 땀을 흘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나왔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 말을 구하기 위해 원정대와 상인들을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동기들이 모여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건은 간쑤성에서 출토된 청동 한혈마다.

 

 

또한 무제는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공식 선포했다. 제국이 탄생하고 60여 년이라는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국가에 걸맞은 사상이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진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에 싫증을 느낀 지식인들이 법가에 도가 사상을 결합해 만든 황노(黃老, 말 그대로 황제와 노자의 사상을 결합했다는 뜻이다)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진의 경험에서 보듯이 법가 사상이 중앙집권적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법가는 지나치게 독선적인 탓에 사회를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데는 문제가 많았다. 자동차는 배터리 전력의 힘으로 시동이 걸리지만 달릴 때는 다른 동력, 즉 휘발유의 힘을 사용한다. 시작할 때는 순간적인 에너지의 집중이 필요하므로 법가가 좋았으나 새 왕조가 출범한 뒤 정상 궤도로 돌입하면서부터는 법가처럼 인위적인 제도보다 뭔가 주나라 시대의 봉건 질서처럼 아름답고 몸에 맞는 자연스런 질서가 필요했다. 어디 그런 게 없을까?

 

답은 바로 유학이었다. 유학이라면 충과 효를 기본으로 하는 사상이다. 주나라의 전통을 계승하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사회 질서를 대변하면서도 (당시로서는) 낡고 케케묵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지 않은 신흥 학문, 바로 유학이 새 질서를 만들어줄 수 있는 사상적 무기였다. 더구나 유학은, 공자(孔子)의 생애에서 보듯이, 원래 생겨날 때부터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사용되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는 학문이 아니던가? 그래서 무제는 당시의 대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 공자가 유학을 정치사상으로 확립하고 구매자를 찾아 나선 지 350여 년 만에 그의 꿈은 결실을 본 것이다. 이때부터 유학은 2000여 년 동안이나 동아시아 사회와 국제 질서의 이념적 뿌리로서 역할하게 된다.

 

 

제국의 건설자 한 무제 우리 역사에서는 4을 설치한 인물로 악명이 높지만 중국역사에서 한 무제는 진시황(秦始皇)이나 한 고조 유방(劉邦)보다도 중요한 인물이다. 미약한 통일 제국 한을 일거에 강대국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흉노를 물리치고 서역에까지 진출하는 등 탁월한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진시황과 유방이 통일 제국의 뼈대를 만들었다면, 한 무제는 거기에 살을 붙인 인물이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죽 쒸서 개 준 통일

촌놈이 세운 대제국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흉노 정벌의 도미노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외척과 환괸의 악순환

또 다시 분열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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