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구책Ⅱ
캉유웨이(康有爲)가 서양의 정신적 힘이 그리스도교에 있다고 본 것은 옳았다. 오랫동안의 중세를 거치며 종교적 통합을 이룬 유럽은 비록 국가는 여럿이었으나 정신적ㆍ종교적으로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오늘날 유럽연합이 결성된 것도 그런 배경 덕분이다. 반면 한ㆍ중ㆍ일 3국은 수천 년 동안 동질적인 한자 유교 문화권을 이루어왔어도 지역적 블록을 이루기는 어렵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구 전체의 이익이 문제시될 때는 즉각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그러나 캉유웨이가 보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정신적 힘’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중국에 온 서양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포교하려는 의도만 가진 게 아니었다. 16세기 명대에 온 선교사들은 유럽에서 신교가 세력을 장악한 탓에 교세 확장을 위해 멀리 동방까지 온 구교 성직자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비교적 순수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으나, 19세기의 선교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오랜 기간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내정과 관습, 지리 등에 밝은 ‘중국통’이 되었다. 중국에 진출하려는 제국주의 열강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매우 중요한 안내자‘였다. 중국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조약을 맺을 경우에도 중국어를 아는 서양인이 필요했다.
선교사들 스스로가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1857년 톈진조약으로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선교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 자기 모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이들은 각종 이권 다툼에 개입했고, 심지어 간첩 행위나 다름없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중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파괴하는 데다 중국인이 보기에 선교사들의 그런 행위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양 귀신의 침략을 물리치고 유교적 전통과 질서를 지키자!” 중국 민중은 이렇게 외쳤지만 무능한 정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비밀결사의 경험이 풍부한 중국 민중은 그리스도교 세력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대도회(大刀會), 가로회(哥老會), 의화권(義和券) 등의 비밀 단체들은 서서히 반그리스도교 운동을 전개해갔으며, 때로는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점점 반외세적, 반제국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그 절정이 1899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이다.
▲ 철도를 파괴하는 의화단 개혁이 실패하면 보수로 기우는 법이다. 양무운동과 무술변법이 모두 실패하자 이제 중국은 오로지 반외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화단운동은 중국 민중이 들고일어났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들은 서양의 철도와 그리스도교가 재앙을 불러왔다고 여기고 곳곳에서 철도와 교회를 파괴했다. 그림은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엔」에 실린 것이다.
의화권은 산둥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단체였다. 당시 산둥은 중국의 분할을 주장한 독일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후발 제국주의의 조급함으로 독일이 그악스럽게 나오자 의화권도 조직을 더욱 확대하고 명칭도 의화단으로 고쳤다. 급기야 그들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독일보다 먼저 급해진 것은 청 조정이었다. 서태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정부의 실권자로 군림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의화단은 그것을 계기로 톈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제는 의화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철도를 파괴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관청을 습격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화북 일대로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제 서구 열강도 수수방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버려두었다가는 공들인 탑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몰랐다. 열강은 일단 청 조정에 하루빨리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지 못하면 자기들이 직접 군대를 보내 해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40년 전의 태평천국운동이라면 반란을 공공연히 표방했으니 당연히 진압 대상이었으나 의화단은 민간 단체였으니 사정이 달랐다. 더구나 조정의 일각에서는 의화단을 이용해 외세를 물리치자는 주장도 나왔다. 고민하던 서태후는 서구 열강이 광서제에게 친정(親政)을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자 즉각 결단을 내렸다. 서태후는 각국 공사관에 당장 중국을 떠나라고 통보하고 각 지방에 의화단을 도우라는 명을 내렸다.
2차 아편전쟁 이래 40년 만에 다시 중국과 서구 열강의 대결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물심양면에 걸쳐 중국 민중의 지원까지 등에 업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과는 마찬가지,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번의 상대는 유럽 8개국 연합군으로 전보다 더욱 막강했던 것이다. 유럽 연합군은 톈진과 베이징을 손쉽게 점령하고 쯔진청(紫禁城)을 약탈했다(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문화재들은 대부분 이때 탈취되었다). 결국 청 조정은 또다시 백기를 들었다. 연패의 기록이 경신되면서 중국은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고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서구 열강은 중국을 정치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하게 되었다. 통째로 집어삼키기에는 입이 너무 많아진 데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문화와 강력한 민중의 항쟁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 베이징의 유럽 군대 태평천국운동에서도 보았듯이, 서구 열강은 평소에 서로 이해를 다투다가도 중국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데는 한 데 뭉쳤다. 사진은 의화단 진압을 위해 파견된 8개국 연합군이 자금성에 입성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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