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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갑오개혁)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갑오개혁)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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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시킨 1894531, 농민군에 못지 않게 이를 기뻐해 준 자들이 있었다. 바로 현해탄 건너편 메이지 정부의 지도부다. 같은 날 제국의회는 정부 불신임안을 제기했던 것이다(아무리 제국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어도 의회인 이상 정부와의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메이지 정부가 발족한 이래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였으나 그 지속 기간은 극히 짧았다. 전주성 함락의 소식을 들은 민비 정권이 청나라에 진압 병력을 요청하자마자 톈진조약이 발효되었고, 이제 메이지 정부는 내부의 위기를 바깥으로 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한양발 급전을 듣고 하늘이 도운 것이라며 기뻐했을 정도다(그는 바로 앞에 나온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다).

 

신속과 일사불란함을 강점으로 삼는 메이지 정부는 정말 전광석화처럼 대처했다. 이틀 만에 의회를 해산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는데, 정작 파병을 요청받은 청나라가 군대를 거느리고 충청도 아산에 상륙한 6월 초에 일본군은 남해와 황해를 빙 돌아 인천에 상륙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잽싸게 움직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사실 청나라 군대가 전주에 가까운 아산으로 온 반면 일본군은 한양에 가까운 인천으로 왔다는 사실이 이미 조선의 상황을 보는 양국의 시각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 나라 백성이 일으킨 반란에 남의 나라 군대를 스스럼없이 끌어들이는 민비(閔妃)의 작태는 새삼스럽게 비난할 가치도 없지만, 어쨌든 그 때문에 농민군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척외양의 기치를 높이 치켜든 마당에 외세를 끌어들인 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봉준은 즉각 정부와 화의를 맺고 전주성에서 철수해서 외세가 개입할 빌미를 없애 버린다(당시 그는 동학교도가 관장하는 집강소執綱所라는 민간 행정기관을 전라도 일대에 두기로 하는 요구 조건을 관철시켰는데, 이는 나중에 재차 봉기를 위한 용의주도한 배려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한 외세에 대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른 외세는 막지 못했다.

 

진압 대상이 없어지자 청나라와 일본의 태도는 확연히 갈라진다.요청받은 진압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구상이 없었던 청군은 머뭇거렸으나, 애초에 진압을 구실로 본국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더불어 조선 진출을 가시화할 작정이었던 일본군은 농민군이 일단 해산했음에도 잔당을 없앤다며 설치고 다녔다. 위안스카이는 놀기도 무엇해서 일본 측에 함께 철군하자고 제안했으나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에게 내려진 본국의 지령은 그 참에 조선을 주물러놓으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달 가까이 법석을 떨던 일본군은 급기야 7월 하순에 느닷없이 경복궁에 침입하더니 민비(閔妃) 정권을 해체하고 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였다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나라에서 사실상의 유배 생활을 하던 대원군은 3년 뒤인 1885년 조선에 통상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위안스카이와 함께 귀국했다. 이미 두 차례의 집권에서 실패를 맛본 데다 나이도 육순이 넘었으니 이제는 욕심을 버릴 법도 하지만, 대원군은 그렇지 않았다. 귀국한 뒤에도 그는 위안스카이와 결탁해서 집권을 노리는가 하면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나자 농민군과 접선을 시도하기도 했다(임오군란 당시에도 반군의 힘을 빌려 잠시 집권했던 경험이 생각났을 법하다). 아마 그가 일본 측에 스카우트된 이유는 그렇게 권력에 관해 활화산 같은 의욕과 정력을 보였기 때문일 터이다.

 

 

알현인가, 시위인가? 고종(高宗)을 알현하는 오토리 게이스케(맨 오른쪽 인물)의 자세가 사뭇 거만해 보인다. 육순 노인이었던 그는 전 해에 신병으로 귀국했다가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나자 즉각 조선으로 달려왔다.

 

 

동학 농민군이 해산한 뒤에도 일본이 자꾸 사태를 키운 이유는 어차피 본국의 사정상 조선에서 뭔가 한 판 크게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서 두 가지 과제를 설정한다. 하나는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조선의 발전을 지원한다는 목적이 아니라 장차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일단 더 먹기 좋은 떡으로 만들어야할 필요성에서다. 다른 과제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입김을 제거하는 것이다. 아무리 조선을 맛있는 떡으로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입이 둘이라면 별로 맛있게 먹지 못할 테니까.

 

대원군을 경복궁의 주인으로 들어앉힌 지 이틀 만에 일본의 해군과 육군은 황해상의 청나라 함대와 아산에 주둔 중인 청나라 육군을 기습한다. 이렇게 해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으나 정식 선전포고는 사흘 후에야 이루어졌다. 드디어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예고되었던 두 메이저 간의 조선 따먹기가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더 긴 호흡으로 보면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무려 300년 만에 재개된 중국과 일본의 대회전이라 할 수도 있다. 비록 당시에는 중화세계와 비중화세계의 대결이었으니까 지금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무승부로 끝났으니 이번만큼은 승부를 봐야 한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하필이면 또다시 무대가 한반도라는 게 불운이지만, 이번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초대받은 전쟁즉 조선 정부가 자초한 것이므로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전쟁 자체로 보면 흥미로울 수도 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이 대결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둘 다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을 모델로 한 개혁이지만 성격과 진행 방식에서는 사뭇 달랐기 때문에 성과를 비교평가하는 데 좋은 시금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전쟁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이홍장이 각별히 공을 들인 청나라의 육군과 해군은 일본의 기민한 공격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개전 후 두 달이 채 못 되어 일본군은 평양에서 청나라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청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냈으며, 황해 해전에서도 일본 함대는 청나라 주력 함대를 손쉽게 제압했다. 곧바로 랴오둥에 상륙한 일본군이 뤼순을 접수하고 산둥반도까지 밀고 내려가자 청나라는 항복하고 말았다. 이로써 300년 전 10년 가까이 끌었던 승부를 일본은 불과 몇 개월만에 끝장냈지만, 전쟁의 승리보다 더 반가운 것은 이제 조선을 독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일본은 조선을 먹기 좋은 떡으로 다듬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라면 몰라도 조선의 내정 자체에 일본이 앞장설 수는 없는 입장이므로 꼭두각시를 내세워야 한다. 그래서 발탁한 게 바로 대원군이었다. 대원군에게 일본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는 데 기둥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대원군을 잘 몰랐다. 권력욕의 화신 같은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대원군은 결코 권력을 남과 나눠 가지거나 남의 허수아비가 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런 점은 후배 독재자인 이승만이나 박정희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대통령이 되었지만 막상 권좌에 오른 뒤에는 미국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민족주의자로 존경할 수 없는 이유는 대원군을 현명한 지도자로 볼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그러나 착각한 것은 대원군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조선의 집권자는 이름만의 존재일 뿐 아무런 실권도 없다는 사실을 그는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주제를 모르고 주체성을 보였던 대원군은 한 달도 못 가 퇴출되고 만다. 일본이 다음 후보로 내세운 인물은 바로 김홍집(金弘集)이다. 온건 개화파였던 그는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수습한 뒤 10년 동안이나 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실로 오랜만에 화려하게 컴백했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일본이 짜준 개혁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뿐이다. 그 프로그램을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 부르는데, 실상 김옥균(金玉均)10년 전에 시도했던 개혁이 당시에는 그것을 반대했던 김홍집의 손에 의해 추진되는 격이니 공교로울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개혁의 주체는 김홍집이 이끄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인 듯하지만, 알고 보면 고문의 직함을 가진 오토리 공사이고, 더 알고 보면 그의 배후에 있는 일본의 메이지 정부다. 따라서 갑오개혁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축소판일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어쨌든 그 내용은 나무랄 데가 없다. 문벌과 신분의 차별을 철폐하고 노비문서를 소각한 것이라든가, 연좌제를 폐지하고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고 관권에 의한 인신 구속을 제한하는 등 인권 보장에 비중을 둔 것은, 비록 강요된 개혁일지라도 한반도 최초로 근대적 법과 제도가 자리잡은 기념비적 변화에 해당한다. 게다가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조선 고유의 개국기년을 사용하기로 한 것과 과거제(科擧制)를 폐지한 것은 중화세계의 굴레를 벗어던진 것이므로 500년 조선사, 아니 1천 년 한반도사를 완전히 뒤집는 획기적인 일이다(그래서 서기 1894년은 개국 503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화폐제도도 개혁되고, 조세제도도 은납제(銀納制)로 바뀌고, 은행과 회사의 설립이 시작되고, 도량형도 통일되었으니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못한 전반적인 개혁을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불과 며칠 만에 우지끈 뚝딱 해치운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측에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친일로 선회하게 된 조선 정부에서마저 지나치게 급진적인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였다면, 조선 백성들이 개혁을 바라보는 태도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새로 발행한 화폐를 사용하라고 해도, 조세를 화폐로 내라고 해도, ()이나 리()를 쓰지 말고 미터법을 쓰라고 해도 백성이 따르지 않으면 말짱 헛거다. 더욱이 조선백성들은 정부의 모든 조치를 불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외세가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자기들끼리 싸움박질을 벌이고 내정에 간섭하는 꼴을 더 이상 참지 않으려 한다. 전봉준이 2차 봉기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외세 간섭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한동안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던 전봉준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지자 다시 척왜의 기치를 치켜들고 봉기했다. 집강소를 통해 신속히 연락이 이루어진 결과 189410월 전라도 삼례역에는 무려 11만에 이르는 동학 농민군이 모이게 된다원래 동학(東學)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은 전봉준의 계획에 반대했다. 동학이라는 새 종교를 착근시키는 것에 목숨을 건 그는 오히려 전봉준을 역적이라 부르며 정부 측에 추파를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2차 봉기도 처음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 접주들(남접)이 시작했고 최시형이 관장하는 충청도 접주들(북접)은 참여하지 않았다. 오지영(吳知泳, ?~1950)이 항일에 매진하자고 최시형(崔時亨)을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남접과 북접이 함께 대규모 농민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봉기가 실패한 이후 남접의 지도부가 모두 죽음을 당한 것과는 달리 최시형, 오지영, 손병희(孫秉熙, 1861~1922) 등 북접의 지도부는 살아남았고 훗날 동학(東學)을 계승한 천도교에서 간부를 맡았다. 굵고 짧은 삶보다 가늘고 긴 삶을 선호하는 종교의 생리를 말해준다.

 

하지만 일본군이 정식으로 투입된 이상 농민군의 투쟁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1월 공주성 공략에서 실패한 농민군은 곧이어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의 조직력과 우세한 화력에 버티지 못하고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남접 삼총사가 체포되어 이듬해 참수당함으로써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최종적인 막을 내렸다.

 

 

관점의 차이 조선에서 내란이 터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청나라와 일본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청나라는 민비(閔妃)의 초청장을 받고서 아산으로 온 반면 일본은 톈진조약을 구실 삼아 인천항으로 들이닥쳤다. 사진은 그 일본군의 모습이다. 이렇듯 같은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었으니 청일전쟁의 승패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개혁 없는 개화의 결론

사흘간의 백일몽

내전의 국제화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어느 부부의 희비극

기묘한 제국

후보 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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