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에의 초대
도덕성의 문제는 있지만 어쨌든 고려의 입장에서 국가적 위기를 외교로 넘긴 서희(徐熙)의 성과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실리외교’의 전형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명분이 실리보다 중요하던 시대에 실리외교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법이다. 과연 고려 조정의 대신들은 대부분이 서희의 외교를 폄하하거나 반대한다. 신라계 귀족들의 그런 태도는 사실 예견된 것이었다. 한족 왕조인 송나라를 저버리고 오랑캐인 거란에 굴복하다니, 그런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론을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서희가 ‘굴욕적인’ 외교를 강행한 데는 아마도 그가 지방 토호 출신이라는 배경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서희에게는 신라계가 장악한 중앙정부를 다른 색깔로 바꿔 보려는 야심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고려 조정은 시끄러웠지만 그 조약에서 요나라는 바라던 목적을 달성했다. 고려는 요나라를 섬기기로 했으니 장차 거란이 송 나라를 공략할 때 돕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중립은 유지할 것이다. 비록 고려에게 영토를 획득하기는커녕 오히려 빼앗긴 꼴이긴 하지만 그 대신 고려는 요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그다지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적어도 고려가 독자 노선을 걸을 경우 그것을 응징할 구실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기록에는 없지만 아마 소손녕은 요나라 조정에서 서희만큼 심한 비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후방 다지기에 성공한 요나라 성종은 이윽고 1004년에 송 나라를 침공해서 수도인 카이펑(開封)까지 점령하고 송의 황제 진종과 전연(澶淵)의 맹약을 맺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조약이 소손녕-서희(徐熙) 조약의 확대판이라는 점이다. 고려와의 조약에서 요나라는 명분을 얻 고 실리를 내주었지만, 전연의 맹약에서는 거꾸로 명분을 송나라에 내주고 실리를 얻는다. 조약의 결과로 송나라는 요나라의 상국이라는 명분을 얻었으나 그 대가로 요나라에게 매년 10만 냥의 은과 20만 필의 비단을 바치기로 했다. 게다가 송나라는 잃어버린 연운 16주를 영구히 포기하고 두 나라의 국경 부근에 군사 시설을 설치하는 권리를 잃었다. 송으로서는 굴욕적이기도 했지만, 그 후 요나라가 금나라에 망할 때까지 100년 이상이나 공물을 바쳤으니 그로 인한 재정적 피해도 막심하다.
▲ 완벽의 허점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유교제국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허약한 통일제국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점이 합쳐지면, 물리력이 강한 비중화세계가 침략할 경우에는 속수무책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과연 1004년 요나라 성종은 송나라를 침략해서 전연의 맹약을 맺고 송 나라를 사실상 복속시켰다. 그림은 조약을 맺는 광경이다.
이것으로 안개 정국은 끝났고, 동아시아 3국의 서열이 정해졌다. 고려에겐 요나라가 형님이고 요나라에겐 송나라가 형님이니까 공식 랭킹은 송-요-고려의 순서다. 그러나 국력으로 평가한 실제 랭킹 1위가 거란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랴오둥을 근거지로 삼고 중원과 한반도를 휘하에 거느리게 된 거란, 영토와 위세로 본다면 옛 전성기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다만 거란은 오늘날의 한국처럼 역사를 관리해줄 후손이 없었기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족이 아닌 민족으로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요 성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있다. 그것은 막내 격인 고려가 작은 형님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형님 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희(徐熙) 같은 실리파라면 몰라도 고려 조정에 득시글거리는 명분파 대신들은 오랑캐인 요나라의 연호를 쓴다는 사실이 오로지 창피할 따름이다. 그래서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계속 송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며, 1003년에 송나라에게 군사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삼형제에서 맏형과 막내가 손잡으면 대개 둘째는 왕따가 된다. 하지만 고려에게 불행한 일은 그 둘째가 실세라는 사실이다. 버릇없는 아우를 응징할 구실을 찾던 요 성종의 눈에 마침내 트집잡을 만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고려 왕실에서 일어난 정변이었다.
굴욕적인 조약 이외에 대내적으로는 거의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룬 고려의 성종은 딸만 두었을 뿐 후사가 없었다. 마침 사촌형인 경종이 남긴 아들이 있었으므로 성종은 그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997년에 19세가 된 그 조카가 목종(穆宗, 재위 997~1009)으로 즉위하는 과정은 일단 무난했다. 문제는 그의 어머니인 헌애다. 경종의 두 왕비인 헌애와 헌정은 친자매간이자 성종의 누이동생들이었다(고려 왕실에서 근친혼이 장려되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경종이 죽자 아직 십대의 나이에 과부가 된 두 왕비는 묘하게도 둘 다 친척 남자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는다. 헌애는 자신의 외척인 김치양(金致陽, ?~1009)과, 그리고 헌정은 왕건의 아들이자 경종의 숙부이자 그녀 자신에겐 삼촌이 되는 왕욱(王郁)과 놀아난 것이다. 아무리 근친혼의 관습이 허용된다 해도 성종의 눈에 그 자매가 노는 꼴이 보기 좋을 리 없다. 하지만 그에게 그 자매는 형수이자 친누이들이므로 내칠 수도 없고 놔둘 수도 없는 애매한 입장이다. 그래서 성종은 김치양을 멀리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지었으나 그가 죽고 목종이 즉위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오빠 왕이 죽고 아들을 왕위에 올린 헌애는 이제 거리낄 게 없으므로 즉각 김치양을 궁으로 불러들여 사실상의 남편으로 삼고 함께 국정을 주무른다. 목종이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은 그 내연의 부부에게 좋은 찬스다.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후사를 잇는다면 부부의 권세는 대를 이어 지속될 테니까. 하지만 목종의 생각은 다르다. 어머니 행각에 넌더리가 날 뿐 아니라 자칫하면 고려 왕실의 성씨가 김씨로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그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별도의 후보를 내세우는데, 공교롭게도 그 후보는 왕욱과 헌정의 아들인 대량원군이다【굳이 촌수를 따져보자면 목종은 씨다른(?) 동생에 대항해서 자신의 당숙이자 사촌동생을 후사로 삼으려 한 셈이 된다. 우선 김치양과 어머니 헌애의 아들은 목종에게 씨다른 동생이다. 또 대량원군의 어머니는 목종의 이모인 헌정이지만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아들인 왕욱이므로, 대량원군은 목종에게 이종사촌 동생인 동시에 당숙이 된다(목종의 아버지 경종은 왕건의 손자다). 물론 당시에는 촌수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이렇듯 어지럽게 촌수를 계산하지 않았겠으나, 어쨌든 고려 왕실의 근친혼이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주는 사실이다. 게다가 전직 왕비들이 그렇듯 마음대로 애정 행각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것, 헌애가 김씨 아들로 왕위를 잇는다는 발상까지 함부로 했다는 것은 당시 고려 왕실이 얼마나 ‘콩가루 집안’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 실리외교의 대가 서희(徐熙)의 외교는 비록 문제점은 있었으나 그런 대로 위기의 고려를 구하는 역할을 했다. 아마도 그는 이천 출신의 중부 귀족이었으므로 옛 신라계 귀족들이 판치는 고려 정부에 참신한 기운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그나마 고려 정부의 외교적 역량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사진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서희의 묘이다. 그의 고향인 이곳에는 그의 동상도 서 있다.
강력한 라이벌인 대량원군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김치양과 헌애 부부는 그를 절에 보내 승려로 만들어 놓고도 안심이 안 돼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한다. 위험을 감지한 목종은 서북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장수 강조(康兆, ?~1010)를 불러들였는데, 그것은 대량원군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었으나 목종 자신에게는 오히려 목숨을 앞당기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개경의 혼탁한 정세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강조는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와서 김치양 일당을 잡아 죽였다. 목종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는 거기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내친 김에 강조는 대량원군을 왕으로 옹립하고는 이내 목종마저 살해해 버린 것이다.
개국 초기의 내전 이후 오랜만에 재발한 킹메이커의 쿠데타다. 더구나 그 킹메이커는 예전처럼 여러 명이 아니라 강조 한 명이었으니, 우여곡절 끝에 1010년 팔자에 없던 왕위를 물려받은 대량원군 현종(顯宗, 재위 1010~31)에게 실권이 있을 리 없다.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데 일생을 바친 광종(光宗)과 성종(成宗)의 피땀 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왕권은 또 다시 지방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요의 성종이 그 사건을 응징의 빌미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 해 11월 성종은 강조의 쿠데타를 문죄한다며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온다. 요나라가 고려의 상국이라는 게 명분이었으니, 일찍이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구실 삼아 고구려를 쳐들어온 당 태종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실제로 강조가 호기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전쟁의 진행마저도 거의 그 복사판이 될 뻔했다.
개전 초기에 요의 성종은 10여 년 전 고려에게 강동 6주를 허용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거란이 고려를 침락한 근본 원인이 그것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당 태종도 랴오허를 건넌 다음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을 정복하는 데 애를 먹었듯이, 요 성종도 압록강을 넘는 데까지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으나 곧바로 강동 6주의 수비망에 걸려버린 것이다. 가만히만 있었어도 강조는 연개소문처럼 승리를 낚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연개소문보다는 고혜진(高惠眞)이나 고연수(高延壽)를 본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쿠데타의 책임자답게 강조는 30만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달려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검증을 받고자 했으나 그건 지나친 만용이었다. 병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으나 원래 공성(攻城)에는 약해도 전면전에는 강한 게 대륙의 군대다. 어쨌든 강조는 책임을 질 줄은 아는 인물이었다. 통주에서 패해 사로잡힌 그에게 성종은 자기의 신하가 될 것을 권했으나 강조는 그 권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그것을 계기로 고려의 수비망은 구멍이 뚫려 버렸다. 고려의 주력군을 격파했으니 이제 거란군은 굳이 강동 6주를 함락시키려 애쓸 필요 없이 그냥 우회해 버리면 된다. 심지어 그들은 서경마저도 그냥 지나쳐 곧장 개경을 향해 남진한다. 이 소식에 놀란 현종은 황급히 개경을 빠져나와 이듬해 1월에 멀리 나주까지 대피하는데, 왕이 백성을 버리고 가는 것이니 사실 대피라기보다는 도피다【나중에도 보겠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이렇게 최고 지도자가 자기 한 목숨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몽골의 침략 때 강화도로 도망친 고려의 고종,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식솔들만 거느리고 의주까지 야반도주한 조선의 선조(宣祖),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역시 강화도로 내뺀 조선의 인조(仁祖), 1895년 마누라가 일본 낭인들에게 죽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서 1년간이나 살았던 조선의 고종, 1950년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팽개치고 한강 다리를 건넌 다음 다리마저 끊어 버린 이승만 등등을 꼽을 수 있겠다】.
요 성종은 개경의 왕궁을 유린하는 것으로 분을 풀었으나 나주까지 추격할 힘과 의지는 없다. 그래서 그는 명분만 얻으면 철수하겠다고 결심하는데, 마침 현종이 그 명분을 준다. 군대를 돌린다면 곧 현종이 직접 요의 황궁으로 가서 입조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거창하게 시작된 전쟁 드라마는 두 달여 만에 싱겁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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