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5부, 3장 인간을 넘어, 주체를 넘어
3장 인간을 넘어 주체를 넘어
만물의 근원은 ‘먼지’
연암은 연행이 시작되자, 말 위에서 중원의 선비들과 만나면 어떻게 논변을 펼칠까를 궁리한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지전설, 지동설로 한판 붙어보는 것.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이미 일반적인 상식이 되었지만, 지구가 돈다는 것은 아직 서양에서도 밝히지 못한 논변이다. 물론 그건 연암이 독자적으로 밝힌 이론이 아니라, 친구 정철조(鄭喆祚)와 홍대용(洪大容)에게서 귀동냥한 것이다.
「곡정필담(鵠汀筆談)」에서 드디어 실전이 벌어진다. 곡정이 묻는다.
우리 유학자들도 근래에는 땅이 둥글다는 설[地球之說]을 자못 믿습니다. 대저 땅은 모나고 정지되어 있고, 하늘은 둥글고 움직인다고 하는 설은 우리 유학자의 명맥이지요. 한데, 서양 사람들이 그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선생은 어떤 학설을 지지하시는지요?
吾儒近世頗信地球之說 夫方圓動靜 吾儒命脈 而泰西人亂之 先生何從也
연암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한다.
하늘이 만든 것치고 모가 난 것은 없습니다. 모기 다리, 누에 궁둥이, 빗방울, 눈물, 침 등속이라 해도 둥글지 않은 건 없습니다. 저 산하와 대지, 일월성신도 모두 하늘이 만든 것이지만 그중에 모난 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天造無有方物 雖蚊腿蚕尻雨點涕唾 未甞不圓 今夫山河大地 日月星宿 皆天所造 未見方宿楞星則可徵地球無疑 鄙人雖未見西人著說 甞謂地球無疑
언뜻 보기에도 이런 전제와 논증은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의 방식과는 좀 성격이 다르다.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그는 서양서적을 하나도 접하지 않았지만 지동설을 확신했다. 둥근 것은 반드시 움직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변증을 좀더 따라가보면,
대저 그 형태는 둥글지만 그 덕은 반듯하며, 그의 사공(事功)은 움직이지만 그 성정은 고요합니다. 만일 저 허공이 이 땅덩이를 편안히 놓아둔 상태에서 움직이거나 구르지 못하게 우두커니 공중에 매달려 있게만 한다면 이는 곧 썩은 물과 죽은 흙에 지나지 않으니, 즉시 썩어서 사라져버렸을 겁니다. 어찌 저토록 오랫동안 한곳에 멈춘 채 수많은 사물을 지고 실을 수 있으며, 황하와 한수처럼 큰 물들을 담고서도 쏟아지지 않도록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大抵其形則圓 其德則方 事功則動 性情則靜 若使太空 安厝此地 不動不轉 塊然懸空 則乃腐水死土 立見其朽爛潰散 亦安能久久停住 許多負載 振河漢而不洩哉
즉 ‘움직이지도 않고, 돌지도 않고, 생명도 없는 덩어리가 어떻게 써지도 부서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그의 지전설의 기본전제이다. 그러니 “서양인들이 땅덩어리가 둥글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구른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둥근 것은 반드시 굴러간다는 이치를 모르는” 격인 셈이다.
연암의 논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서양인들이 지전설을 말하지 않은 건 만일 땅덩어리가 돈다면 모든 전도(躔度, 천체운행의 도수가 예측 불가능해질 것이므로, 이 땅덩어리를 붙들어서 말뚝을 꽂듯이 한곳에다 안정시켜놓아야 측량하기에 편리하리라는 생각이었을 겁니다[大約西人不言地轉者 妄意以爲若一轉地則凡諸躔度 尤難推測 所以把定此地 妥置一處 如揷木橛 然後便於推測也].” 예리한 반격! 의도했건 안했건 서구의 사고방식을 말뚝에 빗대고 있는 것은 정말 통렬한 바가 있다. 뉴턴 물리학을 비롯해 20세기 이후 서구에서 도래한 근대적 사고의 핵심은 그야말로 모든 사물과 사건들을 단선적 인과관계 안에 묶어놓는 것이 아니었던가. 정체성이나 자의식 혹은 민족, 인종 같은 인식론적 틀은 말할 것도 없고.
흔히 지전설이나 지동설은 서양서적을 통해 수입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처럼 서구적 경로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도출되었다. 그 이치에 관한 한, 연암은 서구사상의 한계까지 지적할 정도로 자신의 논리에 강한 자신감을 표명한다. 물론 그의 변증은 과학적 원리의 습득을 통해 획득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철학적 입장, 즉 만물의 근원은 먼지라고 보는 ‘만물진성설(萬物塵成說)’에 젖줄이 닿아 있다.
티끌과 티끌이 서로 결합하여, 그 엉기는 것은 흙이 되고, 거친 것은 모래가 되며, 단단한 것은 돌이 되고, 축축한 것은 물이 되며, 따스한 것은 불이 되고, 단단히 맺힌 것은 쇠가 되고, 매끄러운 것은 나무가 되지요. 움직이면 바람이 되고, 찌는 듯 무더워 기운이 빽빽하면 여러 가지 벌레로 변화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이란 바로 그 여러 벌레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곡정필담(鵠汀筆談)」
塵塵相依 塵凝爲土 塵麤爲沙 塵堅爲石 塵津爲水 塵煖爲火 塵結爲金 塵榮爲木 塵動爲風 塵蒸氣鬱 乃化諸蟲 今夫吾人者 乃諸蟲之一種族也
만물의 기원은 먼지다. 먼지에서 물, 불, 나무, 바람이 만들어지고, 벌레가 만들어진다. 사람 또한 벌레 중의 한 부류이니 결국은 먼지에 속할 따름이다. 그리고 지구는 이 먼지들의 입자가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구(球)’인 것이다. 사실 지전설이나 지동설보다 훨씬 문제적인 테제가 바로 이 ‘만물진성설’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기본적으로는 먼지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기꺼이 인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암에게 천주교의 창조론 혹은 인격신 따위가 ‘어필’하기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도무지 마주칠 접점이 없는 것이다. 나란히 달리는 평행선처럼.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연상시키는 이런 논리는 일종의 ‘연암식 유물론’이다. ‘인성론(人性論)’ 역시 ‘만물진성설’이라는 유물론이 뻗어나가는 또 하나의 방향이다.
▲ 혼천의
홍대용이 나경적에게 의뢰해서 제작한 우주모형이다. 나경적은 나주 출신의 과학자로 1759년부터 1762년까지 3년에 걸쳐 이 모형을 만들었다. 홍대용(洪大容)과 그의 친구들, 곧 북학파 지식인들의 우주에 대한 꿈과 상상이 담겨 있는 기구이기도 하다.
인성 물성은 같다!
18세기 철학사의 주요한 이슈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 될 것이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같은가? 다른가? 이것을 둘러싸고 연임이 속한 노론 경화사족들 내부에서 한바탕 논란이 벌어진다. 기본적으로 동양의 사유는 인성과 물성을 연속성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인간과 외부 사이에 확연한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 인식의 근본전제이기 때문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 혹은 천인합일(天人合一) 이 도의 궁극적 지향점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전제를 공유하면서도 그 내부에서는 인성/물성의 차이 및 상대적인 위계를 강조하는 쪽과 그 둘의 연속성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입장이 갈라졌던 것이다. 후자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담헌 홍대용(洪大容)이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理)가 있고, 물(物)에는 물의 이가 있다. (중략) 초목의 이는 곧 금수의 이이고, 금수의 이는 곧 사람의 이이며, 사람의 이는 곧 하늘의 이이다. 이라는 것은 인과 의(義)일 따름이다. 『담헌서』, 「심성문(心性問)」
오륜과 오사(五事)가 인간의 예의라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함께 먹이를 먹는 것은 금수의 예의고, 군락을 지어 가지를 뻗는 건 초목의 예의다. 인간의 입장에서 물을 보면 인간이 귀하고 물이 천하지만, 물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면 물이 귀하고 인간이 천하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물은 균등하다. 「의산문답(醫山問答)」
五倫五事 人之禮義也 羣行呴哺 禽獸之禮義也 叢苞條暢 草木之禮義也 以人視物 人貴而物賤 以物視人 物貴而人賤 自天而視之 人與物均也
이를테면 홍대용(洪大容)은 인성과 물성이 균등하다는 ‘인물균(人物均)’을 펼친 것이다. 이를 이어받아 연암은 ‘인물막변(人物莫辯)’, 곧 인성과 물성은 구별할 수 없다는 입장을 펼친다.
「호질(虎叱)」이 그 대표적인 텍스트다. 흔히 「호질(虎叱)」은 타락하고 위선적인 사대부에 대한 풍자가 핵심이라고 간주되지만, 더 중요한 포커스는 범의 시점으로 인간 일반을 바라보는 데에 있다. 범은 말한다. “대체 천하의 이치야말로 하나인 만큼 범이 진정 몹쓸진대 사람의 성품도 역시 몹쓸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할진대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지니[夫天下之理一也. 虎誠惡也, 人性亦惡也, 人性善則虎之性亦善也]”, 그런즉 인간의 도(道)보다 범의 도가 더 광명정대하다고.
말과 소가 수고를 다하여 짐을 싣고 또 복종하며 성심껏 네놈들의 뜻을 받드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푸줏간이 쉴 새도 없이 이들을 도살해서는 그 뿔과 털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것도 모자라 노루와 사슴까지도 잡아먹어버려, 산과 들에는 우리가 먹을 게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하늘이 이 문제를 공평하게 처리한다면 네놈을 잡아먹는 것이 마땅하겠느냐, 놓아주는 것이 마땅하겠느냐.
然而不有其乘服之勞, 戀效之誠, 日充庖廚, 角鬣不遺. 而乃復侵我之麕鹿, 使我乏食於山, 缺餉於野. 使天而平其政, 汝在所食乎所捨乎?
대개 남의 것을 취하는 것을 도(盜)라 하고, 생명을 해치고 남에게 못된 짓 하는 것을 적(敵)이라 한다. 너희들은 불철주야 팔을 걷어 붙이고 눈을 부라리며,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심지어는 돈을 형(옛날 돈은 구멍이 났으므로 공방형孔方兄이라 불렀음)이라 부르질 않나, 장수가 되려고 제 아내를 죽이질 않나,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자격이 있느냐. (중략)
夫非其有而取之, 謂之‘盜’ 殘生而害物者, 謂之‘賊’ 汝之所以日夜遑遑, 揚臂努目, 挐攫而不恥. 甚者, 呼錢爲兄, 求將殺妻, 則不可復論於倫常之道矣. (中略)
춘추시대에는 덕치를 행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일으킨 전쟁이 열일곱 번이었고, 보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싸움이 서른 번이었다. 흘린 피는 천리에 이어지고 쓰러진 시체는 백만 구나 되었다. 그렇지만 범의 세상에서는 홍수나 가뭄을 알지 못하기에 하늘을 원망하는 법도 없으며, 원수가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므로 다른 존재들에게 미움을 살 일도 없다. 천명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므로 무당이나 의원의 간사한 속임수에 넘어가지도 않고, 타고난 바탕 그대로 천성을 온전히 실현하므로 세상 잇속에 병들지 않는다. 범을 착하고도 성스럽다[睿聖]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春秋之世, 樹德之兵十七; 報仇之兵三十, 流血千里; 伏屍百萬. 而虎之家水旱不識, 故無怨乎天; 讐德兩忘, 故無忤於物, 知命而處順, 故不惑於巫醫之姦; 踐形而盡性, 故不疚乎世俗之利, 此虎之所以睿聖也.
사실 자연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만큼 포악하고 잔인하며 비굴한 종(種)도 없다. 남의 것을 무단으로 착취하고 돈을 숭배하며 어설픈 명분으로 전쟁을 일삼는다. 그에 비해 포악한 것처럼 보이는 범은 오히려 천명에 따라 사는 성스러운 존재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온갖 허위의식으로 치장해 자신을 으뜸으로 삼으면서 다른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차별한다. ‘인간 외부’의 시선으로 인간 보기 —— 「호질(虎叱)」의 진짜 문제설정은 이것이다. 북곽선생(北郭先生, 「호질」에 등장하는 고매한 척하는 선비)과 동리자(東里子, 「호질」에 등장하는 수절을 잘한다고 알려진 젊은 과부)의 위선을 과격하게 풍자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인간과 사회를 넘어서는 ‘에콜로지컬(ecological)한 비전’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의 입을 빌려, 연암은 단호하게 말한다.
네놈들은 이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때, 걸핏하면 하늘을 끌어들이지만, 하늘이 명한 바로써 본다면 범이든 사람이든 다 같은 존재이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인의 견지에서 논하자면, 범과 메뚜기ㆍ누에ㆍ벌ㆍ개미와 사람이 함께 길러져서 서로 거스르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汝談理論性, 動輒稱天, 自天所命而視之, 則虎與人, 乃物之一也. 自天地生物之仁而論之, 則虎與蝗蚕蜂蟻與人並畜, 而不可相悖也.
▲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동물은 표(豹)이다. 호랑이와 표범 사이쯤에 있는 종류인 듯했다. 예리한 눈빛, 순식간에 180도 회전을 할 수 있는 날렵함에서 야생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창살 너머로 보는 그 모습에 어딘가 우울함이 묻어 있다. 인성과 물성은 구별할 수 없다 했던 연암이 순전히 인간의 오락거리로 만들어진 오늘날의 동물원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태주의
연암은 윤리적인 차원에서도 이런 태도를 실천하려고 했다. 사사로이 도살한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개는 주인을 따르는 동물이다. 하지만 기르면 잡아먹지 않을 수 없으니, 처음부터 기르지 않는 게 낫다”며 집에서 개를 기르지 못하게 했다.
또 한번은 타고 다니던 말이 죽자 하인에게 묻어주게 했는데, 하인들이 공모하여 말고기를 나누어 먹은 일이 있었다. 연암은 살과 뼈라도 잘 수습하여 묻어주게 한 다음 하인의 볼기를 치며, “사람과 짐승이 비록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이 말은 너와 함께 수고하지 않았느냐? 어찌 차마 그럴 수가 있느냐?”며 내쫓았고, 그 하인은 문 밖에서 몇 달이나 죄를 빈 다음에야 비로소 집에 들어올 수가 있었다 한다.
열하에서 종마법에 대해 웅변을 토할 때도 그의 관점은 단지 실용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무릇 동물의 성질이란 것도 사람이나 다름없어 힘들면 쉬고 싶고, 답답하면 풀고 싶고, 굽으면 펴고 싶고, 가려우면 긁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비록 사람들이 여물을 줘야 먹는 처지이지만, 때로는 제 마음대로 편하게 늘어지고도 싶을 것이다.
즉 모든 ‘지각 있는’ 존재는 행복을 추구한다. 그 점에서 인간과 다른 동물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전제에 입각해볼 때, 조선의 말 먹이는 법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 편안하게 해주기는커녕 “북띠와 굴레가 느슨해질까 염려하여 될수록 단단히 졸라맨다. 그리하여 빨리 달릴 때엔 견마 잡히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쉴 때에 몸을 긁거나 땅에 뒹구는 재미를 맛보지 못한다.” 이러니 사람과 말 사이가 언제나 뜻이 통하지 않아, “사람은 툭하면 욕질이 일쑤요, 말은 언제나 사납게 노기를” 띠는 실정이다. 즉 연암의 종마법은 종자를 잘 개량하여 부국강병의 기틀로 삼자는 식이 아니라, 말의 본성을 자상하게 배려하여 인간과 말 사이가 서로 소통하게 되면, 그 속에서 말의 종자는 저절로 업그레이드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이용후생’에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평면에서 파악하는 ‘생태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네 이름을 돌아보라!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것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먼지’로 이루어졌을 뿐인데,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가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이렇게 되는 순간, 인간 내부의 경계 또한 무의미해진다. 즉 개별인간들에게 부과된 고유한 정체성 역시 불변의 위치를 고수할 이유가 없다. 인연조건에 따라, 배치에 따라 일시적인 주체로 호명될 따름이지, 근원적으로는 모두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인간은 자아의 영원성을 지키기 위해 안달한다. 무엇보다 이름이 그러하다. 이름이란 대체 무엇인가? 한번 자신의 이름을 돌아보라!
卽此汝名 匪在汝身 | 그것이 네 이름이기는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
在他人口 隨口呼謂 | 남의 입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
卽有善惡 卽有榮辱 |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
卽有貴賤 妄生悅惡 |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
以悅惡故 從而誘之 |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
從而悅之 從而懼之 |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
又從恐動寄身 |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
齒吻茹吐 在人不知 |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
汝身何時可還 |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선귤당기(蟬橘堂記)」 |
이 글은 연암의 직접화법이 아니다. 연암은 종종 제 삼자의 입으로, 즉 삼인칭으로 말하곤 한다. 여기서 언표주체는 매월당의 스승인 ‘큰스님’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을 버리고 법호를 따를 것을 원하니[懺悔佛前 發大證誓 願棄俗名而從法號]”, 큰스님이 손바닥을 치며 웃고는 위와 같이 일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언표는 발화주체에게로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표의 배후에 있는 또 다른 주어, 곧 연암의 목소리와 겹쳐진다.
이름이란 기본적으로 타자의 호명이다. 타자의 호명에 따라 영욕, 귀천, 애증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보자. 바람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무에 부딪침으로써 소리를 내게 되고 도리어 나무를 흔들어댄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譬彼風聲 聲本是虗 着樹爲聲 反搖動樹 汝起視樹 樹之靜時 風在何處]?” 이름 또한 마찬가지다.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름이 생겨서 네 몸을 칭칭 감아 너를 겁박하고 억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不知汝身 本無有是 卽有是事 廼有是名 而纏縛身刦守把留 ].”
身之旣多 臃腫闒茸 | 몸이 이미 여럿이다 보니 거추장스럽게 되어 |
重不可行 雖有名山 | 무거워 다닐 수가 없게 된다. 비록 명산이 있어 |
欲遊佳水 爲此艮兌 | 좋은 물에서 놀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움이 그치고 |
生悲憐憂 有好友朋 | 슬퍼하고 근심하게 되며, 사이좋은 친구들이 |
選酒相邀 樂彼名辰 | 술상을 차려 부르면서 이 좋은 날을 즐기자고 말을 해도 |
持扇出門 還復入室 | 부채를 들고 문을 나서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
念此卦身 不能去赴 | 이 몸에 딸린 것을 생각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
그러니 이름이 지닌바 그 무거움을 몸뚱아리가 어찌 견딘단 말인가.
타자의 호명, 가족, 정체성 등 이름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및 그것이 만들어내는 중력의 법칙을 이보다 더 첨예하게 제기한 텍스트가 있을까. 이런 이슈들은 1990년대 이후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제기된 사안들이라는 점을 환기하면, 이 글이 던지는 물음은 더 한층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남는 문제는 ‘이름의 중력을 어떻게 떨칠 것인가’로 귀착된다. 연암 윤리학의 정점인 탈주체화의 여정은 여기서 비롯한다.
이름의 중력에서 벗어나
我服地黃湯 | 내가 지황탕을 마시려는데 |
泡騰沫漲 印我顴顙 | 거품은 솟아나고 방울도 부글부글 그 속에 내 얼굴을 찍어놓았네 |
一泡一我 一沫一吾 | 거품 하나마다 한 사람의 내가 있고 방울 하나에도 한 사람의 내가 있네 |
大泡大我 小沫小吾 | 거품이 크고 보니 내 모습도 커다랗고 방울이 작아지자 내 모습도 조그맣다. |
(中略) | |
我試嚬焉 一齊蹙眉 | 시험 삼아 얼굴을 찡그려보니 일제히 눈썹을 찌푸리누나 |
我試笑焉 一齊解頤 | 어쩌나 보려고 웃어봤더니 모두들 웃음을 터뜨려댄다. |
(中略) | |
斯須器淸 香歇光定 | 이윽고 그릇이 깨끗해지자 향기도 사라지고 빛도 스러져 |
百我千吾 了無聲影 | 백명의 나와 천 명의 나는 마침내 어디에도 자취가 없네 |
咦彼麈公 過去泡沫 | 아아! 저 주공은 지나간 과거의 포말인 게고 |
爲此碑者 現在泡沫 | 이 비석을 만들어 세우는 자는 현재의 포말에 불과한 거라 |
伊今以往 百千歲月 | 이제부터 아마득한 후세에까지 백천의 기나긴 세월의 뒤에 |
讀此文者 未來泡沫 | 이 글을 읽게 될 모든 사람은 오지 않은 미래의 포말인 것을 |
匪我映泡 以泡照泡 | 내가 거품에 비친 것이 아니요 거품이 거품에 비친 것이며 |
匪我映沫 以沫照沫 | 내가 방울에 비친 것이 아니라 방울 위에 방울이 비친 것일세 |
泡沫映滅 何歡何怛 | 포말은 적멸을 비춘 것이니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슬퍼하랴 「주공탑명(麈公塔銘)」 |
이것은 주공스님이 입적한 뒤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쓴 탑명이다. 내용이 워낙 파격적이라 가상의 고승을 설정하여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라는 설이 있긴 하나, 일단 그 문제는 접어두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기로 하자. 연암답게 주공도 탑명도 없는 기이한 형식의 글이 되었다. 모든 자취가 포말일진대, 주공의 실체를 찾아 무엇하며 또 무엇을 기린단 말인가? 주공이 포말이듯, 이 글을 쓰는 자신 역시 포말이다. 그리고 후세에 이 글을 읽을 모든 사람 역시 미래의 포말인 것을 선승을 무색케 하는 설법 아닌가.
하지만 이걸 단순히 연암의 뛰어난 테크닉의 소산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삶의 무상성, 이름의 허망함에 대해 연암만큼 깊이 체득한 인물도 드물다. 권력의 포획장치를 계속 무력화시키는 한편, 끊임없이 새로운 경계를 펼치는 삶과 사유의 궤적들,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과 소통하는 강렬도는 ‘무상한 연기(緣起)의 장’ 속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열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연암 또한 일종의 구도자였다. 다만 그의 도량(道場)은 깊은 산정이 아니라, 암투가 그치지 않는 중앙정계의 언저리와 왁자지껄한 ‘저잣거리’였다는 점이 달랐을 뿐.
일생 동안 하나의 고정점을 갖지 않은 채, 때론 떠돌면서 때론 고요히 앉은 채로 유목을 했던 연암은 이처럼 이름은 무상한 것이라고, 이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거듭 말한다. 그의 사유의 핵심범주인 ‘명심(冥心)’은 그러한 탈주체화의 극한이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冥心, 깊고 지극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밟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 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吾乃今知夫道矣. 冥心者, 耳目不爲之累; 信耳目者, 視聽彌審而彌爲之病焉. 今吾控夫足爲馬所踐則, 載之後車, 遂縱鞚浮河, 攣膝聚足於鞍上, 一墜則河也. 以河爲地, 以河爲衣, 以河爲身, 以河爲性情, 於是心判一墮, 吾耳中遂無河聲. 凡九渡無虞, 如坐臥起居於几席之上.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의 절정이자 대단원이다.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내 몸이라 생각하고, 내 마음이라 생각한다?’ 이 경지는 대체 어떤 것일까?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이렇게 ‘태평’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의 내공(!)이 필요할까? ‘박차도 없이, 고삐도 없이, 말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 광야를 질주하는 ‘인디언의 말 달리기(카프카)’ 같은 것일까? 나로서는 실로 가늠하기 어렵다. 연암에게서 구도의 흔적을 느끼게 되는 건 이런 연유에서다.
아무튼 ‘강물과 하나되어 마침내 강물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은 마음을 청정하게 비움으로써 생사심(生死心)을 벗어나 우주와 내가 하나되는 경지를 뜻한다. 귀와 눈, 곧 감각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분별심을 벗어나면 집착해야 할 ‘아상(我相)’이 사라지는데, 그러면 대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그가 여행의 초입구에서 던진 화두, ‘여래의 평등안’과 ‘소경의 눈’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열하일기』가 발산하는 강렬도는 바로 ‘이름’의 중력에서 벗어나 무상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생성할 수 있는 ‘노마드’적 여정의 산물일 터, 이제 그 ‘천의 고원’을 나오면서 나는 다시 묻는다. 대체 연암은 누구인가? 물론 나는 아직도 그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미래의 포말(泡沫)’인 나에게 그의 묘지명을 쓸 자격이 주어진다면, 나는 다만 이렇게 쓰리라.
“살았노라. 그리고 『열하일기』를 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