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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4부 범람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 - 2장 시선의 전복 봉상스의 해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4부 범람하는 유머 열정의 패러독스 - 2장 시선의 전복 봉상스의 해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건방진방랑자 2021. 7. 1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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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봉상스(bon sens)해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에 의한 알음알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울음을 단지 슬픔에만 귀속하는 것이 울음의 잠재력을 위축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인간의 지식은 한없이 비루해진다. 이목에 좌우되어 대상의 본래 면목을 보지 못하는 사유의 한계, 그것을 격파하고자 하는 것이 연암의 진정한 의도이다.

 

여행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문의 번화함을 마주한 연암은 기가 팍 꺾여 그만 돌아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치민다. 순간, 온몸이 화끈해진다.

 

 

이것도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지. 난 본래 천성이 담박해서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다른 나라에 한 발을 들여놓았을 뿐, 아직 이 나라의 만분의 일도 못 보았는데 벌써 이런 그릇된 마음이 일다니. 대체 왜? 아마도 내 견문이 좁은 탓일 게다. 만일 부처님의 밝은 눈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두루 살핀다면 무엇이든 다 평등해 보일 테지. 모든 게 평등하면 시기와 부러움이란 절로 없어질 테고. 도강록(渡江錄)

此妒心也. 余素性淡泊, 慕羡猜妒, 本絶于中. 今一涉他境, 所見不過萬分之一, 乃復浮妄若是, 何也? 此直所見者小故耳. 若以如來慧眼, 遍觀十方世界, 無非平等, 萬事平等, 自無妒羡

 

 

여래의 평등안(平等眼). 시방세계를 두루 살필 수 있는 그 눈이 있어야 편협한 시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옆에 있는 장복이를 보고, “네가 만일 중국에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使汝往生中國何如]?” 하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중국은 되놈의 나라[中國胡也]’라 싫다고 대답한다. 어쩜 이렇게 사상이 투철할 수가. 물어본 연암만 머쓱해졌다.

 

그때 마침 한 소경이 손으로 월금을 뜯으며 지나간다. 순간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이렇게 말한다. “저이야말로 평등안을 가진 것이 아니겠느냐[彼豈非平等眼耶].” 근거는? 소경은 눈에 끄달려 시기하고 집착하는 마음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여래의 눈이 천지만물을 두루 비출 수 있는 것이라면, 소경의 눈은 빛이 완전 차단된 암흑이다. 하지만 둘은 모두 편협한 분별과 집착에서 자유롭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여래의 평등안소경의 눈이 곧바로 연결되는 이 돌연한 비약. 연암 특유의 역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이런 식의 돌출과 비약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열하를 앞에 두고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너던, 창대는 다쳐서 뒤에 처지고, 홀로 말에 의지해 물을 건너게 되었을 때, 동행자가 위태로움에 대해 말한다. “옛사람이 위태로운 것을 말할 때 소경이 애꾸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물가에 선 것[盲人騎瞎馬, 夜半臨深池]’이라 했는데, “오늘밤 우리가 실로 그 같은 꼴이 되었다고. 그러나 연암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소경을 보는 자는 눈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이 여기는 것이지, 결코 소경 자신이 위태로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오. 소경의 눈에는 위태로운 바가 보이지 않는데, 대체 뭐가 위태롭단 말이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視盲者有目者也. 視盲者而自危於其心, 非盲者知危也, 盲者不見所危, 何危之有?

 

 

보는 것의 위태로움. 그것은 결국 자신의 눈을 앎의 유일한 창으로 믿는 데서 오는 것이다. 감각을 앎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을 때 삶은 얼마나 위태롭고 천박해질 것인가. 이때의 체험을 담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연암은 그 점을 거듭 환기한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다. 외물은 언제나 귀와 눈에 누가 되어 사람들이 보고 듣는 바른 길을 잃어버리도록 한다.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험난하고 위험하기가 강물보다 더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병통이 됨에 있어서랴[聲與色外物也, 外物常爲累於耳目, 令人失其視聽之正, 如此. 而況人生涉世, 其險且危, 有甚於河, 而視與聽, 輒爲之病乎].”

 

화담 서경덕(徐敬德)에 얽힌 유명한 에피소드가 인용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한 소경이 어느날 문득 눈을 떴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는 몸 전체의 감각을 동원해서 길을 찾았는데, 이제 눈에 들어오는 온갖 사물의 현란함에 사로잡히자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소경에게 화담이 말한다.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還閉爾眼].” 이걸 소경으로 평생 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정말 넌센스다. 정민 교수한테 들은 바에 따르면, 개화기 때 정말 그렇게 해석하고는 이래서 나라가 망했다며 흥분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근대적 지식은 단선적, 표피적이었던 것이다. 화담의 요지는 현란함에 눈 빼앗기지 말고,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연암의 의도 역시 마찬가지다.

 

연암은 요술대행진을 기록한 환희기(幻戱記)의 뒤에 붙인 후지(後識)’에서 이 삽화를 활용한 뒤, 이렇게 덧붙인다. “눈이란 그 밝음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 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한 것이 아니라 실은 구경꾼들이 스스로 속은 것일 뿐입니다[目之不可恃其明也如此. 今日觀幻, 非幻者能眩之, 實觀者自眩爾].”라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게 된다. 혹은 자신보다 더 큰 적은 없다. 자신이 보는 것이 곧 자신의 우주다. 등등, 곱씹을수록 삶에 대한 다양한 지혜가 산포되어 간다.

 

 

 

 

인용

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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