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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제국주의의 길: 대외 진출은 늘 침략으로(요시다 쇼인, 수호통상조약, 강화도조약)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9장 도발로 수미일관한 일본, 제국주의의 길: 대외 진출은 늘 침략으로(요시다 쇼인, 수호통상조약, 강화도조약)

건방진방랑자 2021. 6. 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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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제국주의의 길

 

 

대외 진출은 늘 침략으로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대외로 진출하는 데는 커다란 걸림돌이다. 물론 하기에 따라서는 대외 진출에도 얼마든지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외부의 간섭 없이 완벽한 내부 준비를 갖추고 나서 내실 있게 대외 진출을 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핵심은 내부를 다지는 주체의 역량이 어느 정도냐에 있다. 주체가 무능하면 내정도 불안정하고 당연히 대외 진출도 무리수가 되지만, 주체가 유능하면 성공적인 내정이 그대로 대외로 연장될 수 있다.

 

지금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제외하면, 2000년에 걸친 일본 역사에서 국가적인 규모의 대외 진출은 두 차례 있었다(무역이나 문화 교류와 같은 민간 부문은 논외다). 그 두 차례의 대외 진출은 앞서 말한 주체의 역량으로 인해 서로 크게 달랐다.

첫 번째는 16세기 말의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최초로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무리한 대륙 침략을 꾀했다가 이웃에게는 비극을, 자신에게는 불운을 초래했다. 그로 인해 모처럼 전란이 종식되었던 일본은 또다시 최후의 내전에 휘말렸다.

그러나 두 번째 대외 진출을 시도하는 주체는 300년 전의 히데요시보다 훨씬 유능하고 용의주도하며 관료 체제를 갖춘 데다 바깥을 보는 안목과 대세 감각에도 밝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정부였다.

 

이러한 주체 역량의 차이가 그대로 반영되어 두 번째 대외 진출은 첫 번째와 달리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그런 평가는 일본 자체만을 기준으로 볼 때 가능하다. 일본이 진출하고자 하는 외부인 한반도와 중국은 첫 번째에서나 두 번째에서나 일본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 이유는 바로 일본의 두 차례 대외 진출이 모두 정상적인 대외 관계가 아닌 군사적 침략이었기 때문이다.

 

관료 체제가 권력을 장악했어도 바쿠후 정권의 오랜 군사적 지배에 길들여진 일본의 정치는 여느 관료제처럼 문치주의로 흐르지 않았다. 무능한 문민정부는 자국만을 구렁텅이에 빠뜨리지만 유능한 군사정부는 이웃마저 위험하게 한다. 메이지 정부가 바로 그랬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 채 시작되기도 전부터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었다. 번을 폐지하면서 넘쳐나는 번의 군사력을 조선 침략에 이용함으로써 내부 안정을 도모하는 동시에 대외 무력 진출을 이루자는 주장이었다. 16세기 말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뒤 무사들과 군수 상인들의 불만을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표출시킨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정한론에는 히데요시의 시대에 없었던 세계정세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었다. 바쿠후 시대의 말기에 반바쿠후파의 이론가였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러시아, 미국과 화의를 맺으면 우리로서는 비록 오랑캐와의 약속일지라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사이에 국력을 배양해 손쉬운 상대인 조선, 만주, 중국을 취함으로써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서 잃은 것을 보충해야 한다.”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입은 손해를 식민지에 전가하라! 그는 유신이 발발하기 전 바쿠후에게 처형되었으나, 서른도 되지 않은 젊은이의 영악하기 짝이 없는 그 제국주의적 가르침은 메이지 정부의 기본 노선이 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세태 유신 이후 일본 사회는 급속도로 근대화되어갔다. 왼쪽은 일본의 물질만능주의를 풍자한 그림이고, 오른쪽은 시곗바늘을 붙잡고 다닐 정도로 바쁜 일본인을 풍자한 그림이다. 자본주의가 도입되기가 무섭게 자본주의적 생활과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일본 특유의 적응력을 보여준다.

 

 

다만 아직 내치가 안정되지 못했으므로 시기상조라는 정부 내반대 여론이 비등한 탓에 정한론은 곧장 한반도 침략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한론의 기본 정신은 부정된 게 아니라 연기되었을 뿐이다일본의 제국주의 노선은 한반도를 겨냥하기 전에 소규모로 실천에 옮겨져 상당한 성과를 낳았다. 1874년의 대만 침략과 1879년의 오키나와 복속이 그 결과다. 오키나와는 원래 독립국으로, 청과 일본 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였으나 일본이 먼저 선수를 쳐 강제로 합병했다. 현재 오키나와보다 중국과 대만에 훨씬 더 가까운 센가쿠 열도(중국 명칭은 釣魚島)가 중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에 휘말린 것은 당시 일본이 오키나와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정한론은 이후부터 노골적인 측면을 떼어내고 외교라는 이름의 한층 세련된 외양을 취하게 된다.

 

그 첫걸음은 1871년에 청과 맺은 수호통상 조약이다. 그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이 조약은 유사 이래 최초로 일본과 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맺은 외교 관계라는 점에서 작지만 커다란 한 걸음이었다. 일본이 중국과 대등한 조건에서 조약을 체결한 직접적인 성과는 바로 조선에 진출하기에 유리해졌다는 점이다.

 

한반도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래 중국과 특수한 관계에 있었다. 왕이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고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중국의 속국이었고, 내정이 독자적이라는 점에서는 독립국이었다. 하지만 외교권이나 군사권 같은 근대 국가적 권리가 중국에 있었으므로 서구적 관점에서 보면 속국이었다.

 

이런 모호한 관계가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중국이 언제나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확고한 중심으로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몰락하고 국제 관계가 특히 중요하게 대두되는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와서 그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일본이 중국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곧 조선에 대해서 중국과 똑같은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었다(조선으로서는 중국과 조약같은 것을 맺을 수는 없는 위치였다). 일본은 바로 그렇게 해석했다. 조선을 개항시킨 1876년의 강화도조약은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일본은 20여 년 전 미국이 일본에 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인천 앞바다에 군함을 보내 함포로 시위 사격을 하고(운요호 사건), 미국과 맺은 조약을 거의 그대로 모방해 조선과 조약을 맺었다. 안타깝게도 조선으로서는 역사상 최초의 국제조약이자 이후 제국주의 열강과 여러 차례 맺게 되는 불평등조약의 출발이었다당시 일본은 이미 군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었다. 대만 원정과 운요호 사건은 일본 정부의 계획이라기보다 해군이 먼저 사건을 일으키고 나중에 정부가 그것을 추인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이렇게 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군은 1878년부터 아예 군 참모부를 천황에 직속시켜 공식적으로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대외 진출은 늘 침략으로

유신의 결론은 군국주의

300년 만의 재도전

제국주의의 명패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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