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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 왕국의 시대 - 1장 왕권의 승리, 사육신의 허와 실(계유정난, 한명회, 세조)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8부 왕국의 시대 - 1장 왕권의 승리, 사육신의 허와 실(계유정난, 한명회, 세조)

건방진방랑자 2021. 6. 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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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육신의 허와 실

 

 

단종(端宗)이 즉위하면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알력이 노골화되자 조정 대신들도 앞다투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어느 줄이 더 길까? 말할 것도 없이 안평의 줄이다. 황보인과 김종서 같은 원로들만이 아니라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관료여기서 학자-관료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조선의 경우 학자와 관료의 구분이 없거나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본성 자체가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 데다가 조선은 처음부터 유교왕국을 표방하고 나섰으므로 학자와 관료는 이념적으로나 신분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물론 관직에 진출하지 않은 학자들도 있었고, 또 거꾸로 학문적 소양이 깊지 못해 학자라고 불릴 자격에 미달하는 관료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소수였고 정치 엘리트가 되지 못했기에 큰 의미가 없다. 이후 조선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조선사회의 지배층은 줄곧 학자 관료 집단이 담당하게 되는데, 통상 사대부(士大夫)라고 지칭되는 세력이 그들이다들도 대부분 안평대군을 택했는데, 그가 실세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수양은 비록 소수파지만 승리를 꿈꾸고 낙관한다. 다수파와 소수파의 대결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소수가 다수를 상대하려면 조직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수양은 한명회(韓明澮, 1415~87), 권남(權擥, 1416~65), 홍윤성(洪允成, 1425~75) 등 측근들을 심복으로 만들고 홍달손(洪達孫, 1415~72)을 비롯한 무신들까지 적극 끌어들여 잔뜩 세를 불린다(이런 방식은 안평대군이 관료들을 파트너로 삼은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즉 안평이 사랑방 놀음을 벌였다면 수양은 조폭들까지 끌어들인 격이니, 여기서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마 수양으로서는 베이징에 갈 때 서장관으로 거느렸던 신숙주를 회유한 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신숙주야말로 집현전 출신의 정통 학자 관료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그의 진영으로 들어온 인물이었으니까(두 사람은 동갑내기였으니 몇 개월이나 걸리는 중국 여행에서 충분히 의기투합하지 않았을까?).

 

기질에서도 비교되듯이 두 대군의 차이는 명백하다. 수양은 대권을 노리지만 안평의 목표는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대신해서 사대부(士大夫)들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다나중에 왕위에 오른 뒤 수양대군은 자신이 거사하지 않았다면 김종서와 황보인이 먼저 안평대군을 움직여 선수를 쳤을 거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왕위 찬탈자가 아니라는 논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궤변일 뿐이다. 더욱이 그 자신도 안평에게 대권 욕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수양이 사은사로 가려 했을 때 권남은 그 시기를 틈타 안평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킬까 두려워 만류했는데, 당시 수양은 김종서와 황보인에게는 그만한 호기가 없다면서 껄껄 웃었던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것은 곧 안평의 세력이 수양의 의도를 몰랐거나 얕보았다는 말도 된다. 그랬기에 황표정사가 폐지됨으로써 안평은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었다. 간단히 사태를 역전시키고 동생을 코너로 몰아넣은 뒤 수양은 드디어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14531010일 그는 심복들을 불러모아 거사를 확정했다. 왕에게 먼저 아뢰어야 한다는 일부 무신들의 주장에 수양은 잠시 멈칫했으나 모사꾼 한명회(韓明澮)는 어차피 거사가 성공하면 그들은 자연히 따를 것이라며 부추긴다. 그 날 저녁 수양은 김종서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를 죽이고 황보인과 그의 일파를 마저 죽여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뒤이어 김종서와 황보인을 따르던 조정 대신들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유배보내는데, 이것이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사실 김종서와 황보인은 사대부(士大夫), 특히 소장파에게는 그다지 평판이 좋지 못했으며, 심지어 정인지 같은 일부 원로들에게서도 별로 점수를 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우선 김종서 일파가 지나치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던 데 대한 반발감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것은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들이 국왕을 바지저고리로 만들면서까지 자신들의 권력을 늘리려 하지는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꿔 말해 그들은 비록 어린 국왕이긴 하지만, 세종의 치세를 통해 사대부의 본분이 국왕에 대한 충성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나중에 보겠지만 사대부들은 점차 권력이 증대하고 파벌을 이루면서 자신들이 국왕마저도 교체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실권을 손에 쥔 수양대군의 다음 조치는 누가 봐도 편파적이라 할 만큼 분명하고 단호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은 현장에서 제거했으나 동생마저 그렇게 다루면 남 보기에 좋지 않다. 그래서 그는 안평대군에게 각종 죄목을 붙여 강화도로 유배 보낸다. 당시의 유배 조치란 곧 분위기를 봐서 죽이겠다는 뜻, 과연 안평은 얼마 못 가서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그러나 사약을 받은 안평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국정을 제 마음대로 주물렀다는 죄목까지는 각오했지만, 그가 숙모를 비롯하여 여염집 여자들과 간통 행각을 벌이고 다녔다는 대목에서는 그저 아연실색할 따름이다(안평의 삼촌, 즉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은 열네 살 때 홍역으로 죽었는데, 수양의 고발에 따르면 안평은 과부가 된 성녕의 아내와 놀아났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안평의 분방한 기질과 아직 유교 도덕이 일상생활의 영역에까지 뿌리내리지 못한 사정을 감안하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

 

그 다음에 진행된 논공행상은 조정을 모조리 수양의 인맥으로 채우는 절차에 불과하다. 수양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 43명이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고(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반란 진압 공신이 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인지, 한명회(韓明澮), 권남, 신숙주, 정창손(鄭昌孫, 1402~87), 윤사로(尹師路, 1423~63) 등이 정부의 핵심 요직에 포진했다. 수양과 안평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이때부터다.

 

실권자의 지위에 만족했던 동생과는 달리 수양의 목표는 왕위에 있었다. 안평에게 왕위를 노렸다는 죄목을 덮어씌운 것과는 명백히 모순되는 의도였지만 원래 진리나 모순이라는 것은 힘있는 자가 규정하기 나름이 아니던가? 일단 수양은 최고 정승인 영의정이 되었으나(왕실 종친이 정승을 맡은 경우는 그가 유일무이하다) 그가 국왕을 보필하는 정승 본연의 위치에 만족하리라고는 그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믿지 않았다. 기다리던 그에게 드디어 때가 왔다. 안평대군의 사후 안평의 역할을 대신하려 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수양 세력의 덫에 걸려 좌초하고 만 것이 수양에게는 좋은 계기가 된다앞서 말했듯이 세종의 아들은 무려 열여덟 명이었으니 그 중에 수양의 처사에 반대하는 형제들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비록 수양은 살아남은 형제들 중 맏이였으나 평소에도 안평을 따르는 동생들이 많았으므로 동생들의 지지는 별로 받지 못했다. 그래서 형제들 중 수양을 따르는 소수와 반대하는 다수 간에 알력이 빚어지고 각종 음모가 전개된다. 특히 금성대군과 세종의 넷째 아내인 혜빈 양씨가 반대파를 이끌었는데, 암암리에 군사력을 준비하던 그들이 14556월 발각되어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초기 왕자의 난과는 달리 이 시기에는 친형제와 이복형제의 구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금성대군은 수양과 친형제였지만 오히려 반대파였고 당시 수양의 편에 선 계양군(桂陽君)은 수양의 배다른 형제였다. 아버지가 왕이면 어머니는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것, 이는 이미 조선 왕실의 혈통이 국왕 중심으로 확고히 안정되었음을 말해준다. 중기에 들어 사대부(士大夫) 세력이 왕을 발탁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게 된 것은 이런 변화 덕분이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편으로 있던 삼촌이 유배되자 어린 단종(端宗)도 더 이상 왕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결국 14556월 국왕이 영의정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면서 수양은 꿈에도 그리던 왕위를 차지하여 조선의 7대 왕인 세조(世祖, 1417~68, 재위 1455~68)가 된다(단종은 일단 상왕上王이 되었지만 사실상 폐위된거나 마찬가지였다).

 

 

왕권에 도전한 학자들 경복궁에 있는 이 건물의 이름은 수정전(修政殿)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 지은 건물인데, 과거에는 이 자리에 집현전이 있었다. 세종 때 학자들은 바로 이곳에서 책을 짓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머리가 큰학자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왕권에 도전했는데, 그 지도부가 바로 집현전 학자들이다.

 

 

그것으로 수양은 모든 게 끝났다고 믿었다. 비록 삼촌이 조카의 왕위를 물려받은 격이라서 적법한 왕위 승계는 아니지만, 어차피 개국 초부터 장자 승계로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더구나 얼마 전에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선례도 있었으니 그리 허물이 되지는 않으리라고 여겼을 법하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지도 않은 데서 터진다. 집현전 학자 출신의 소장파 관료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2년 전 계유정난으로 수양이 실권을 차지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중립을 취했다. 왕의 삼촌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한명회(韓明澮)처럼 출신도 모르는 모리배가 권세를 휘두르는 꼴이 결코 보기 좋을 리는 없지만(한명회는 과거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 문음, 즉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그래도 그들은 안평대군과 김종서 일당이 다른 세력으로 대체되었다는 정도로 여기고 꾹 참았다. 그러나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그들의 태도는 급변한다. 비록 어지럽고 혼돈스런 정국이지만 그래도 국왕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중심을 유지하는 축이자 마음 한 구석의 자부심이 아니었던가? 세조의 즉위는 그 축과 자부심을 송두리째 뒤집어놓는 것이었다.

 

특히 성삼문과 박팽년은 박탈감이 심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삼문은 예법을 관장하는 예조에 재직하다가 단종(端宗)의 승지(承旨, 비서)로서 예법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박팽년은 충청도 관찰사지만 사법을 관장하는 형조에 몸담은 경력이 있었던 것이다. 단종의 폐위에 흥분해서 자살하려 했던 박팽년은 성삼문의 설득으로 마음을 돌려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세조가 즉위했으니 엄밀히 말하면 쿠데타지만 단종 복위라는 대의명분에 비추어 보면 불의를 응징하는 것이니 양심상 거리낄 게 전혀 없다. 이들은 점차 이개, 유성원, 하위지 등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유응부 등 소장파 무신들을 끌어들여 비밀리에 공작을 전개한다이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는 말로 지칭하게 된 것은 나중에 남효온(南孝溫, 1454~92)이 쓴 추강집(秋江集)때문이다. 이 책에 육신전(六臣傳)이라는 글이 실려 있어 마치 단종 복위를 꾀한 세력이 이들 여섯 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추후 세조가 직접 행한 국문(鞠問)에 의하면 적어도 13~17명이 사건에 관련된 게 확실하다. 따라서 그냥 주동자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는 정도만 알면 된다.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피살된 김문기(金文起, 1399~1456)의 후손들은 1970년대까지도 자기들 조상을 포함시켜야 한다며 법석을 떨기도 했는데, 사육신이든 사칠신이든 뭐가 그리 대단할까? 참고로, 남효온은 김시습(金時習, 1435~93), 원호(元昊, ?~?), 이맹전(李孟專. 1392~1480), 조여(趙旅, 1420~80), 성담수(成聃壽, ?~1456) 등과 함께 새 정권에 소극적으로 저항한 것으로 이른바 생육신(生六臣)이라 불리지만, 이 사실도 퀴즈쇼 같은 데 나갈 게 아니라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명분에만 집착하고 정열에만 호소할 뿐 현실적이고 조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그들이 꾀하는 쿠데타란 어설프기 짝이 없다. 기회는 좋았다. 마침 145661일 명나라 사신을 맞는 연회 자리에 별운검(別雲劍, 어전 행사시에 경비 역할로 참석하는 무관)으로 임명된 무장 세 명이 유응부를 포함하여 모두 그들 일파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기회에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端宗)을 복위하려 한다. 연회장에는 세조와 폐위된 단종이 동석하게 되므로 여러 모로 유리하다. 그러나 하늘이 세조의 편이었는지 불행히도 세조는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들이지 말라고 명한다. 이렇게 해서 쿠데타는 불발되었는데,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반역 or 충절 세조의 즉위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엄연히 왕실 내부의 일이다. 그럼에도 왕권에 도전한 학자들이 왜 후대에 반역자로 남지 않고 충절의 대명사가 된 걸까? 그 이유는 나중에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체제로 형질이 변경되기 때문이다. 사진은 서울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死六臣)묘인데, 이들이 품은 사대부 국가의 꿈은 50년 뒤에 실현된다.

 

 

애초부터 조직력이 부족했던 쿠데타 세력은 좋은 기회가 무산되자 급속히 무너진다. 게다가 성삼문은 조급했거나, 아니면 지휘자감이 못 되는 인물이었던 듯하다. 결국 그의 경솔한 행동으로 그들 세력이 세조에게 노출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거사가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실패로 끝난 것은 오히려 기회주의자들에게 노선을 정해준 셈이 된다. 그 중 하나가 정창손의 사위인 김질(金礩, 1422~78)이다. 62일 그는 장인과 함께 세조에게 달려가서 전에 들은 성삼문의 음모를 털어놓는다. 원래 성삼문은 세조의 인맥인 정창손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으로 김질을 회유하려 했으나, 무릇 정치 세력의 리더라면 확실히 자기 편으로 만들지 못할 인물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짓은 피했어야 하지 않을까?

 

세조의 고문을 받은 성삼문은 결국 다른 사람들을 불었고 그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오면서 사태는 쉽게 종결된다. 사실 세조로서는 비록 그들이 반역을 꾀했다고는 하나 용서할 여지가 충분했다. 우선 그들의 쿠데타는 불발로 끝났다. 또한 그들은 고문과 추궁을 받으면서도 의연한 기개를 보일 만큼 나름대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세조는 그들과 군신관계에 앞서 젊은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세조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신숙주 등 집현전의 소장학자들과 같은 연배다). 그러나 그로서는 무엇보다 갓 잡은 왕권에 대한 도전을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 게 중요했을 것이다. 체포된 지 겨우 7일 만에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그 때문이다(박팽년은 고문을 받아 옥중에서 죽었고 유성원은 집에서 자결했다)성삼문이 죽은 뒤 그의 집을 조사해보니 가재도구도 변변한 게 없고 방바닥에는 거적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청렴하고 기개 있는 선비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청렴과 기개는 정치적 자질과 무관한 요소인 모양이다. 그는 김질과 이야기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조직과 계획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오히려 침착했던 것은 교활한 기회주의자인 김질이다. 그는 성삼문이 평소에 과장된 말투를 자주 구사한다는 것을 알고 짐짓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물어 다른 사람들의 명단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성삼문이 세조의 추궁에 끝내 함구하지 못한 이유도 실은 김질에게 이미 다 말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쨌든 김질은 이후 장인과 함께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 영화를 누렸는데, 약삭빠른 자가 출세하는 것은 특히 우리 역사에서 흔히 보는 일이다.

 

 

 

 

하지만 세조는 후환의 뿌리를 근절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런 일이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뿌리란 말할 것도 없이 단종(端宗)이다. 그래서 세조는 이듬해인 14576월 무늬만의 상왕이었던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키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낸다. 유배 생활 몇 개월이면 사약이 내려지는 게 관례, 아마 각오하고 있었을 단종의 명을 더욱 짧게 만든 것은 그의 삼촌이었다. 그가 영월로 출발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그러니까 유배지로 가고 있을 무렵, 2년 전부터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모반을 준비하다가 발각되는 사태가 일어난다. 결국 그 해 10월 세조는 동생에게 사약을 내리고 조카도 죽여 피비린내 나는 가족사의 한 장을 마감했다.

 

 

소년 왕의 마지막 안식처 단종은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긴 이후에도 몇 년 동안 궁궐 안에서 상왕의 신분으로 살았다. 말이 상왕이지 그런 가시방석도 없었을 것이다. 1457년 결국 그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사진에서 보는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아마 마음만은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금성대군의 반란이 탄로나자 단종은 서인으로 더 강등되었고 끝내 이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3차 왕자의 난

사육신의 허와 실

3차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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