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6부, 3장 2012년 여름, 다시 열하로!
다시 열하로!(2012년 여름)
인트로: 문득, 망망대해
2012년(임진) 7월(정미) 20일(임오) 오후 5시, 인천항 연안부두 제1 터미널에서 나는 대형선박에 몸을 실었다. 난생 처음하는 항해였다. 강원도 산간 지역 출신이라 그런지 그간 바다와는 통 인연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바다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었다는 편이 맞겠다. 내게 있어 바다는 그저 막막하고 심심한 곳이었다. 게다가 뱃멀미에 대한 공포도 적지 않았다. 『열하일기』의 시발점이 단동이고 거기에 가기 위해선 배를 타야 한다는 걸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늘 비행기를 타고 심양으로 간 다음 거꾸로 요양 쪽을 되짚는 방식으로 여행을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연유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마침내 바다여행을 하기로 한 것이다. 우째 이런 일이?
인생만사 다 그러하듯 시작은 정말 미미했다. 2010년 봄 우연한 기회에 경인TV(OBS)의 한 프로그램에서 『열하일기』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담당한 한성환 PD가 “『열하일기』에 ‘꽂힌’ 것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해서 그 다음 해(2011년), 『열하일기』 다큐멘터리를 위한 프로젝트를 발주한 것이다. 그거야 참 좋은 일인데, 그 프로그램의 해설자를 나로 설정한 것이다. 헉!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여행만으로도 벅찬데 다큐멘터리를 찍어야 하다니. 『열하일기』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방송체질이 아닌 데다 당시 나의 스케줄상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런 마음이 통했던지 다행히 프로젝트가 불발이 되었다. 한PD는 몹시 서운해했지만 나는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지나가나보다 했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한PD의 열정은 전혀 식지 않았던 것이다. 2012년에 다시 시도를 했고 결국은 성사가 되고 말았다. 완전 방심하고 있다가 한방 먹은 셈이다. 그 전해에 대충 허락을 한 셈이라 빼도 박도 못할 처지였다. 결국 나는 반쯤 끌려가는 상태로 여행에 동참했고, 7월 20일 여름의 막바지에 단동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싣게 된 것이다.
나에게 할당된 일정은 7월 20일에서 8월 6일까지! 방송을 찍기에는 빠듯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긴 시간을 비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원고며 강의 기타 등등을 미리 해두느라 파김치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야말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망망대해인 형국이었다. 그런데 갑판 위에서 헤아려보니 『열하일기』를 ‘리라이팅’한 해로부터 딱 10년째 되는 때였다. 오! 그렇다면 시절인연이 나로 하여금 이 망망대해를 건너게 했다는 뜻인가?
다큐팀이라 일행들이 만만치 않다. 총감독인 한PD를 비롯하여 촬영을 맡은 베테랑 장PD와 김PD, 그리고 젊은 피 양PD, 마지막으로 나의 동반출연자이자 미술학도인 사랑이(양PD와 사랑이는 28살로 동갑내기다). 나를 포함하여 6명이다. 약간의 어색함과 설렘을 지닌 채 일행들은 갑판 위에서 제각각의 상념에 젖어 있었다. 인천대교를 지날 즈음이었다. 바다와 인천대교, 그리고 갈매기떼가 연출하는 장관을 음미하면서 한창 무드를 잡고 있는데 갈매기 한 마리가 나한테 똥을 뿌리고 지나갔다. 이런! 버럭 화가 났지만 혹시 행운의 조짐이 아닐까 싶어서 꾹 참았다(갈매기들한테는 똥이 선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다른 일행은 일반여객실에 묵고 나와 사랑이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vip룸을 쓰는 특권을 누렸다. 실컷 자고 일어났는데 사방이 오직 물이다. 갑판에 나오니 운무(雲霧)가 자욱하다. 그야말로 망망대해다. 비행기는 구름과 땅의 변화무쌍한 흐름을 음미할 수 있고, 기차여행은 차창 밖의 풍경이 무상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바다에는 정거장도 표지판도 신호등도 없다. 간간히 부표와 고기잡이 배만 떠다닐 뿐, 어디가 물이고 어디가 하늘인지조차 구별되지 않는다. 대체 이 텅빈 곳에서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 거지? 문득 「호곡장론(好哭場論)」의 한 대목이 스쳐 지나간다. 열흘이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요동벌판에 들어서자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디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吾今日始知人生本無依附, 只得頂天踏地而行矣]”을 대체 여기에 처음 길을 낸 이는 누구일까.
하긴 지금 나의 여행도 마찬가지 아닌가, 길이 있어 나섰다기보다 문득 나서고 보니 길 위에 서있는 셈이다. 그런데 마침 10년째라고? 누군가는 생각하리라.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출간 10주년 기념으로 이 여행을 계획했을 것이라고 물론, 전적으로 오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시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시절이 나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10여 년 전 처음 『열하일기』를 만날때 그랬던 것처럼
국경과 자본, 그 사이에서
16시간 향해 끝에 마침내 단동에 도착했다. 제일착으로 나오긴 했지만 촬영장비 때문에 발이 묶였다. 중국정부의 허가를 받은 비자를 보여줘도 막무가내였다. 우리를 담당할 중국관리와 현지 코디(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빠져나간 대합실에 덩그러니 우리 일행만 남을 즈음. 중국관리와 현지코디가 도착했다. 그들 덕분에 간신히 통과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또 실랑이가 시작되었다. 나와 사랑이가 단동 관문을 통과하는 장면을 찍으려 하자 현지 관리들은 무조건 안 된단다. 담당관리가 가지고 온 중앙정부의 신임장도 현지에선 통하지 않는다. 공산당 일당체제인데 중앙정부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아주 ‘이상한 제국’이다.
다들 열을 받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북한식당에 가서 만찬을 즐긴 뒤 압록강으로 향했다. 두 개의 철교가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고 있었다. 하나는 6ㆍ25때 미군이 폭파해서 중간에 잘렸고 다른 하나는 이어지 있긴 하나 일반인은 갈 수가 없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 다리를 이용해 중국을 오갔다고 한다), 말 그대로 동아시아 현대사, 그 비극의 현장이었다. 그 기념비들이 이젠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상품이 되어 있었다. 기념비에서 상품으로! 세월의 무상함일까 아니면 인간 역사의 비정함일까?
작은 쪽배를 타고 북한 지역 근처로 접근을 시도했다. 난생처음 북한을 접하는 순간이었다. 소와 양이 풀을 뜯고 있는 풍경 사이로 간간이 마을 주민들과 아이들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 언덕배기에 연암이 강을 건넜던 통관정이 보인다. 그 아래에 있는 구룡정 근처가 촬영의 포인트, 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대면 중국가이드들이 거세게 말린다. 말리는 틈새로 찍고 또 싸우고 싸우면서 틈틈이 찍고……. 나야 그저 구룡정 부근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만이지만 촬영감독의 처지에선 보통 곤혹스런 일이 아니다. 마침내 장PD가 폭발했다. “시끄러워, 그만해!”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230년 전 연암은 이 길을 가면서 중원땅을 밟는 설레임으로 가득했다. 지금 나는 거꾸로 중국땅에서 구룡정으로 다가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아닌가. 연암 같은 예지력으로도 이런 장면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그럼 대체 중국가이드들은 왜 그토록 북한으로의 접근을 금지하는 것일까? 국경의 장벽이 아직도 그렇게 높단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만약 국경 문제라면 아예 배를 띄우는 일 자체를 금지했어야 한다. 더구나 배 위에서 보이는 북한의 시골풍경은 뉴스나 사진으로 수없이 알려진 장면들이다.
근데 왜?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이다. 이후에도 중국의 현지촬영엔 언제나 거액이 필요했다. 단 1분을 찍는 데 100만 원, 200만 원을 요구하기도 한다. 북한에 대한 촬영 역시 그렇다. 이렇게 과격한 리액션을 해야 값이 올라가는 법이리라. 북한 쪽도 그렇고 중국가이드 편에서도 그렇다. 결국 핵심은 국경 자체가 아니라 자본이다.
강을 건너며 연암은 묻는다. “그대 길을 아는가[君知道乎]?” 그리고 이렇게 답한다. “길은 저 강과 언덕 사이에 있다[道不他求 卽在其際]”고,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길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국경과 자본, 그 사이에 있다. 21세기 들어 세계 곳곳에서 국경의 경계들은 여지없이 해체되고 있다. 디지털 자본의 가열찬 진군을 감히 누가 막을 수 있으랴. 하지만 자본은 국경이라는 기호도 적극 활용한다. 때론 묵살하고 때론 설설 기면서. 압록강은 중국과 북한, 그리고 대한민국, 이 세 개의 국경이 교차하는 현장이다. 앞으로도 이 압록강에선 국경과 자본 사이의 은밀한 밀당이 쉬임없이 벌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통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디지털의 유동성 속에서 민족과 혈통을 위한 통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설령 통일이 된다 해도 그건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통일이 되는 순간 통일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시대가 도래하는 건 아닐까? 기타 등등. 압록강의 푸른 물결과 더불어 온갖 상념들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 동안에도 장PD는 가이드의 눈을 피해 한 장면이라도 더 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역시 프로다!
카메라 : 권력과 은총의 화신
압록강을 건넌 후 연암 일행은 책문에 도착한다. 책문은 조선과 중국 사이의 경계, 곧 국경이다. 검문검색을 통과하느라 연암 일행은 온갖 곤혹을 치른다. 하지만 정작 그건 워밍업에 불과했다. 책문을 넘자 진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름 아닌 폭우다. 한창 장마철에 떠난지라 폭우로 강이 범람하면 말도 사람도 꼼짝할 수가 없다. 노숙을 하면서 하염없이 머무르는 수밖에. 그러다가 홀연 날이 맑으면 정신없이 달려야 한다. 만수절 행사 전에 연경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건만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의 피서산장에 가 있었던 것. 게다가 만수절 행사에 조선 사신단을 꼭 참여시키라고 특별명령까지 내렸다. 이런! 일행은 다시 짐을 챙겨 연경에서 열하로 달려가야 했다. 무박나흘의 강행군이었다. 야삼경에 고북구 장성을 통과하거나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대모험이 벌어진 것도 이때였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여행은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다. 두 대의 자동차를 전세냈으니 날씨와 상관없이 수시로,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고 시설 좋은 호텔에서 끼니마다 만찬을 즐겼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여행도 도처에서 모험과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연암에 비하면 택도 없겠지만, 나름 체력과 정신력이 엄청 소모되는 강행군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카메라 때문이었다. 우리의 모든 스케줄을 지배하고 우리의 기분과 체력까지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 카메라! 카메라는 태양토템을 섬기는 족속이다. 빛, 곧 햇빛과 조명이 유일한 척도다. 그러니까 카메라의 권력은 햇빛과의 오묘한 관계에서 나온다고 하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단동항이나 압록강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곳에서는 중국공안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지만 그 모든 것이 다 허용된 곳에서는 이제 카메라와 빛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시작되었다. 내가 참여한 일정은 전체 2주 정도였는데, 그 가운데 3분지 1이 비가 내리거나 혹은 흐렸다. 그런 날은 꼼짝없이 호텔방에서 뒹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일정 또한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다. 처음엔 최고의 조명을 위해 기다리지만 시간이 임박하면 가차없이 타협을 할 수밖에 없다. 빗속이고 뭐고 간에 무조건 찍어야 한다. 구련성의 장터에서 인터뷰 장면을 찍는데 비가 계속 쏟아졌다. 근처 슈퍼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잠시 소강 상태가 됐기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인터뷰를 시작하자 바로 폭우가 쏟아진다. 장비를 걷으면 그치고, 다시 찍으려 하면 쏟아지고…… 마치 비와 카메라가 ‘밀당’을 하는 격이었다. 하기사 비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저 자신의 길을 갔을 뿐인데 우리가 눈치코치 없이 카메라를 들이댄 꼴일 테지만.
한편 카메라는 끊임없이 우리의 인내력을 테스트한다. 4시간을 기다려 1분을 찍기도 하고, 하루 종일 이동하고 또 높은 산 정상에 오르는 수고를 거친 뒤에 겨우 30초를 찍기도 한다. 헐~ 이런 식의 알바는 처음이다. 그런가 하면 열하에선 간만에 날씨가 맑자 피서산장, 포탈라궁, 찰십륜포, 보녕사에 고북구 장성까지 모든 장면을 하루에 다 찍어버렸다. 이런 식이다 보니 기획은 수시로 변경된다. 다음날 촬영할 대목이라 해서 인터뷰 대사를 밤새 암기했는데, 다음날 현장에 가보면 대본은 이미 바뀌어 있다. 그러면 느닷없이 전혀 다른 장면이 추가되기도 한다.
그래서 다큐의 중심은 출연자가 아니라 촬영감독이다. 그래서 한PD는 늘 장PD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온 신경을 집중한다. 또 장PD 뒤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인물이 바로 현지코디 쭌이다. 쭌은 베이징에 사는 한국인인 데다 모두가 인정하는 명코디다. 의무려산 꼭대기에서 요동벌판의 광할한 스케일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을 찍는데, 장PD 말로는 다 좋은데 2%가 부족하단다. 그런데 그 사이에 쭌이 잽싸게 산 곳곳을 뒤져 기막힌 뷰포인트를 찾아냈다. 그곳에 서자 장PD의 얼굴이 햇살처럼 밝아진다. 그러면 덩달아 팀 전체의 분위기가 업된다. 이 모든 흐름의 배후조종자가 바로 카메라다. 모두를 웃겼다 울렸다 하는 요~물 아니 ‘권력의 화신’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 권력에는 보이지 않는 은총도 함께 존재한다. 카메라는 세상을 카메라로 절단하지만 전혀 예기치 않은 장면을 우리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봉황산 장면이 그랬다. 연암도 먼발치에서 보고 지나친 곳인데, 연암이 간 그 길을 부감으로 잡기 위해선 봉황산에 오를 수밖에 없다. 오, 그 장쾌함이란! 한편, 청석령 고갯마루를 찍을 때였다. 이 또한 카메라가 아니었으면 결코 밟아볼 수 없는 땅이었다. 그때의 촬영 콘셉트는 해가 지는 장면이었다. 한 시간 이상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그 다음에 그걸 초고속으로 돌리면 고갯마루에 해가 지는 장면을 근사하게 담을 수 있다(2초에 1장씩). 이런 기법을 ‘인터벌’이라고 한단다. 그때는 카메라 혼자 노동을 하고 일행들은 그 근처에서 한참을 웃고 떠들고 놀았다.
물론 카메라로 인해 겪는 모험도 적지 않다. 심양고궁에선 중국 공안을 따돌리기 위해 작은 카메라(DSLR)를 몸에 숨기고 들어가 기습촬영을 했고, 천안문 광장에선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로 몰려드는 와중에 역시 공안들과 실랑이를 하느라 안 찍는 척하면서 인터뷰 멘트를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내가 또 번번이 NG를 냈다. 한PD는 공안들의 감시를 따돌리고 장PD와 김PD는 카메라의 상태를 점검하고, 양PD는 주변 인파의 동선을 살피고……. 정말이지 첩보영화가 따로 없다. 체력소모가 엄청나긴 했지만, 내 인생에 언제 이런 일을 경험해본단 말인가. 이 또한 카메라가 준 은총이라면 은총이다.
이로써 보건대 카메라는 또 하나의 판타지다. 빛과 조명이 어우러져 탄생한 판타지! 하여, 결코 카메라를 믿지 마시라. 다큐조차 철저히 연출의 산물이다. 어떤 프레임으로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암은 열하의 한 광장에서 화려한 요술의 퍼레이드를 목격한다. 그리고 말한다. “눈이란 그 밝음을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한 것이 아니라 실은 구경꾼들이 스스로 속은[目之不可恃其明也如此. 今日觀幻, 非幻者能眩之, 實觀者自眩爾]] 「환희기(幻戱記)」 후지(後識)”것일 따름이다. 이 환희(幻戱)의 절정이 카메라일 터, 이 현란한 스펙터클 속에서 과연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아니, 대체 어디가 카메라의 안이고, 어디가 바깥이란 말인가?
‘서프라이즈’ 사랑
여행은 만남이다. 길 위에 나서면 누군가를 만난다. 낯선 이든 혹은 이국인이든, 이번 여행도 그랬다. 다큐팀과의 만남은 아주 생소하고 신선했다. 정규직과 함께 일을 해본 적이 없는 데다 다큐를 찍는 프로들이라 더더욱 그랬다. 평소엔 여유있고 유연하지만 일에 대한 긴장감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작업이 끝나면 반드시 회식을 하는 것도 역시 정규직답다!^^ 하지만 나는 잠이 많은 데다 회식체질이 아니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대신 나의 룸메이트이자 동반 출연자였던 사랑이와의 만남은 아주 특별했다.
처음 사랑이를 봤을 때 두 번 놀랐다. 얼굴이 꼭 인형같이 생겼다. 무슨 연예인을 데려온 줄 알았다. 동갑내기인 양PD와 비교해도 완전 ‘애송이’처럼 보였다. 또 하나 이름이 ‘사랑’이라니? 아이디나 예명인 줄 알았는데 진짜란다. 풀네임은 부모님의 성을 모두 써서 한유사랑인데, 언뜻 들으면 ‘한우사랑’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매로 어떻게 이 험한 여정에 참여하게 되었을까(체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외모순으로 뽑은 게 틀림없다, 고 놀렸을 정도다). 아무튼 이래저래 ‘내 스타일’이 아니라 처음엔 몹시 어색했다. 또 반대로 사랑이 입장에서 보면 나라는 캐릭터가 얼마나 이상했겠는가. 다행히 술을 좋아하지 않고 잠이 많아서 우리는 차츰 일상의 리듬을 맞출 수 있었다. 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매지만 봉황산 꼭대기 바위 위에서 그림을 그릴 때나 이제묘가 있는 마을에서 2시간 이상을 쭈그린 자세로 탁본을 뜰 때는 끈기와 집념으로 사람들을 감탄케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점차 서로에게 익숙해질 즈음, 아주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 비 때문에 차 안에서 갇혀 있을 때 내가 소일삼아 장PD의 사주를 봐준 일이 있었다. 여행 오기 직전 사주명리학을 인문학적으로 풀어쓴 『나의 운명사용설명서』를 탈고한 터인 데다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팔자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 장PD는 일간(日干)이 경금(庚金)인데 불이 아주 많은 사주였다. 경금은 굳고 단단한 바위를 의미하니 카메라를 정교하게 다루는 작업과 잘 어울렸고, 불이 많다는 건 화려한 표현력과 활발한 인간관계, 그리고 술에 대한 욕망 등을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아주 기본적인 개념 몇 가지만 설명을 해주었는데도 다들 재밌어했다. 내친 김에 사랑이 사주도 잠깐 봤더니 역시 간/심/신장이 다 약하다. 자신의 말로도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을뿐더러 밤에는 종종 몽유병 증세까지 겪는단다. 쯔쯔, 역시 미모에는 대가가 따르나보다. 그때부터 사주를 빌미로 건강을 유지하려면 일상의 리듬을 바꾸어야 한다고 조언을 해주곤 했는데, 어느 날 문득 자기도 이 원리를 배우고 싶다는 거다. ‘엥? 정말이야? 그럼 매일 숙제를 내줄 테니 외워 보아라~’하고 음양오행, 상생상극, 십신, 육친 등을 간략하게 일러주었다. 솔직히 한두 번 배우다 말려니 했다. 그런데 웬 걸? 호텔에서건 차 안에서건 길거리에서 건 틈만 나면 낑낑거리며 외우는 게 아닌가. 솔직히 사랑이는 한자에 너무 무식하다. 육십갑자 한자를 제대로 읽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처음 붙여준 명칭은 ‘스투피드 사랑’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무식함을 절대 개의치 않는다. ‘어메이징 스투피드’라고 놀려도 재밌어 죽는다. 자기의 무식함을 놀이로 삼다니 뭐 이런 애가 다 있담? 그러니 절대로 포기를 모른다. 그래서 나도 구박을 하면서도 뭔가를 계속 가르쳐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되니 벌써 초식을 읽는다. 친구는 또 어찌나 많은지 온갖 친구들의 사주를 알아내서는 그 얕은 지식으로 이리저리 짜맞추기 바쁘다. 와우, 서프라이즈! 역시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뚝심이다.
명리학을 배우게 되면 대화의 수준이 달라진다. 고상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온갖 숨겨둔 이야기를 다 꺼내놓게 된다는 뜻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불과 열흘 만에 서로에 대해 깊이 아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병력이며 남친들의 신상, 가족의 내력까지. 명실상부한 ‘커플’이 된 것이다(그래서 사랑이는 한동안 나의 ‘동거녀’라고 떠들고 다녔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친구가 합류했다. 다름 아닌 명코디 쭌이다. 알고보니 쭌은 중의사 출신이었다. 20대에 중국으로 건너와 중의대를 졸업할 즈음 우연히 알바로 방송코디를 했다가 너무 잘해낸 나머지 그 길로 들어서버리고 만 것이다. 팔자가 핀 건지 꼬인 건지 모르겠다. 그러니 동양의학과 역학에 대한 공부가 나보다 깊은 수준이었다. 초짜인 사랑이, 고전평론가인 나 곰숙씨, 그리고 중의사 출신의 코디 쭌, 나이도 출신도 체질도 다 다르지만 함께 이야기하고 탐구할 수 있는 공통의 지반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평소엔 개그콘서트식 개그로 친분을 다지고 일이 끝나면 호텔방에서 사주명리학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놀았다. 세 사람의 사주를 맞춰 보니 ‘해묘미(亥卯未)’ 삼합이다. 내친 김에 ‘삼합회’라는 이름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세상을 연결하는 건 공부밖에 없다는 걸. 좋은 음식을 먹고 서로에게 친절한 말을 하고 좋은 풍경을 보고, 이런 여행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건 돌아서면 물거품이다. 이 허망을 벗어나려면 반드시 앎 혹은 지성이 필요하다. 함께 공부하고 함께 탐구할 때 삶은 굳건히 이어진다. 이번에도 과연 그랬다. 귀국하고 나서 사랑이는 많이 아팠다. 툭하면 쓰러지고 입원을 하고 잠수를 타고……. 그런데도 사랑이와 나의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사랑이가 계속 감이당으로 공부를 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에 들어가는 그림을 맡게 되었고, 이후 북드라망의 전담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쭌과의 인연은 말할 것도 없다. 명코디에 중의사라니, 인문의역학을 지향하는 감이당으로선 이보다 더 유용할 순 없다!
연암 박지원은 정말 우정의 달인이다. 『열하일기』로 끊임없이 나를 길 위에 나서게 하고 그 길 위에서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니 말이다. 이 인연을 바탕 삼아 감이당의 비전이기도 한 ‘소수민족 의학기행(Healing on the road)’도 조만간 시도할 생각이다. 쭌이 현지코디를 맡고 나와 감이당 친구들은 글을 쓰고 사랑이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이래서 사람팔자 알 수 없다고 하는 건가 보다. 인생도처유반전(人生到處有反轉)! 서프라이즈 사랑!
중국의 장관은 ‘상의실종’과 ‘슬리퍼’에 있다?!
“청문명의 장관은 버려진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壯觀在瓦礫 曰壯觀在糞壤]!” 『열하일기』 「일신수필(馹汛隨筆)」에 나오는 명문징이다. 기왓조각과 똥부스러기 하나도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재활용하는 하는 걸 보고 연암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거기에는 자기 삶에 대한 존중감이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변방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이렇게 자기 삶을 배려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태평천하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연암의 생각이었다.
그럼 지금 중국은 어떤가? 연암이 갔던 그 중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 무지하게 먹고 가차 없이 버린다. 한마디로 쓰레기 천국이다. 이번엔 더 심했다. 단동과 책문 근처의 작은 마을들은 폭격을 맞은 듯 황폐했다. 자본주의하에서 가난과 더러움은 동의어다. 돈이 되지 않으면 그대로 방치해버린다. 반면 도시의 호텔과 빌딩은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다. 하지만 그것은 자발적 청결과는 거리가 멀다. 엄청난 자본이 투여되었다는 뜻일 뿐이다. 이렇듯 중국을 지배하는 건 오직 돈이다. 그래서 중국 곳곳은 ‘공사중’이다. 백탑에 갔을 때도, 또 공자묘를 갔을 때도, 또 산속의 사찰에도 공사가 한창이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20세기 내내 역사적 실험의 현장이었다. 대장정에 항일전선, 그리고 사회주의의 건설, 문화혁명과 실용주의, 천안문 사태, 티벳과 위구르에 대한 침략 등등, 국가와 혁명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본 셈이다. 그럼 지금 중국의 구호는? 이성평화(理性平和) 문명규범(文明規范)! 단동시를 비롯하여 북경의 곳곳에서 발견한 구호다. 온갖 실험을 다 거치고 도달한 결론이 결국은 ‘근대화’다. 제 20세기 초 근대화의 모토가 이성과 문명 아니었던가. 게다가 지금의 이성과 문명은 자본의 논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혁명에서 문명으로? 이건 어떤 역사발전의 법칙일까? 아니 그 이전에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혹은 더 나아가 진보는 과연 좋은 것인가? 아, 정말 헷갈린다. 이제 정말 루쉰을 만나야할 때가 된 것 같다. 루쉰이야말로 이 모든 가치들이 각축하는 시대의 어둠을 정면으로 돌파한 인물이 아닌가.
연암은 청문명의 실체를 파악하느라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우리의 여행은 그 점에서는 별로였다. 중국의 빌딩들은 우리에겐 너무 익숙했고 각종 럭셔리한 상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여, 시선은 아주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거리 곳곳에 남성들이 훌러덩 벗고 다니는 모습이 그것이다. 헉!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불법으로 규정해서 많이 사라졌는데, 그래도 습관은 어쩔 수 없단다. 한국에선 여성들의 ‘하의실종’이 있다면, 중국의 남성들은 ‘상의실종’ 중이다. 물론 둘이 의미하는 바는 전혀 다르다. 한국 여성들의 하의실종은 지극히 부자연스럽다. 아이돌을 흉내내는 패션이다보니 획일적일뿐더러 그로 인해 여성들의 하체는 날로 빈약해진다. 반면, 중국의 상의실종은 패션이나 인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벗고 있는 남성들의 몸매도 각양각색인데, 대개는 배불뚝이가 대세다. 그야말로 벗어야 편하니까 벗는 것이다.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점차 익숙해지니 혐오스럽기보다는 절로 웃음이 나온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 지독한 더위에 얼마나 거추장스러울 것인가. 국가와 자본은 외국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문화재들을 리모델링하고 있지만, 인민들의 몸은 외국인이고 뭐고, 돈이고 나발이고 일단 벗고 보자는 것. 쉽게 말하면 자본에 포획되지 않은 신체인 것이다.
한편 두 대의 차를 전세냈기 때문에 기사님도 두 분이었다. 둘다. 호인형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특히 우리 여행의 ‘진맛’을 더해 주었다. 우리는 그를 ‘한따꺼’라 불렀다. 처음 그의 존재성이 드러나게 된 건 다름아닌 슬리퍼 때문이었다. 여행 초반, 배불뚝이 몸매를 가진 그가 편안한 반바지 차림에 짝짝이 신발을 신고 있지 않은가. 사연인즉, 꽤 비싼 샌들을 샀는데 하필 그때 한쪽 발을 다치는 바람에 두짝을 다 신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러면 보통 발이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정상이나 한따꺼는 일단 한쪽만 신고 다른 한쪽은 발가락이 노출되는 싸구려 슬리퍼를 신기로 한 것이다. 그 모습만으로도 웃긴 데 사연을 듣고 나선 모두가 ‘빵’ 터졌다. 이건 서곡에 불과했다. 이후 그는 가는 곳마다 웃음을 전파하는 유머의 달인이었다. 촬영이 시작되면 하염없이 차를 대기해야 하는데, 그럴 때면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과 친교를 나눈다.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특히 여성들에겐 인기 짱이어서 한두마디만 나누면 벌써 오랜 친구가 되어 있다. 와우~ 연암의 친화력이 저런 것이었을까?
더 놀랍게도 그는 운전기사가 직업이 아니라 농업대학 관리직이라는 꽤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으며 북경에 집이 세 채나 된다고 한다. 아니, 그런 부자가 왜 이런 알바를? 나이차가 꽤 되는데도 쭌과는 오랜 친구지간이었는데, 그 인연으로 방학 때면 이렇게 차를 운전하면서 쭌과 함께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는 게 낙이란다. 오호, 참으로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어떤 권위와 관습에도 기대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다니는 야생적 신체!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생기발랄함! 유머와 친화력의 원천도 거기에 있으리라.
이제 디지털은 제국의 경계와 그 제국을 떠받쳐온 거대담론들을 여지없이 격파할 것이다. 남는 건 시작도 끝도 없이,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흘러가는 유동적 흐름만 존재할 뿐! 국가 혹은 자본은 그 유동성을 포획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자본과 신체 사이의 생극(상생과 상극)의 파노라마가 펼쳐질 터, 그러므로 연암을 어설프게 흉내내어 나는 이렇게 말하리라. —— 21세기 중국의 장관은 ‘상의실종’과 ‘슬리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