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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한 지붕 두 가족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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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동양사, 3부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새 나라로 가는 길: 한 지붕 두 가족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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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붕 두 가족

 

 

1930년 공산당 지도부는 대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도시 혁명론을 방침으로 정하고 홍군에게 창사(長沙)를 총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국부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미국의 군수 지원을 받아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무모한 전투는 무참한 패배를 낳았다. 마오쩌둥도 이 작전에 참여했으나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지도부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휘하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 사태로 리리싼(李立三)은 실각하고 당권은 소련 유학파의 손으로 넘어갔다. 현명한 판단으로 병력의 손실을 막은 마오쩌둥은 한껏 입지를 굳혔다. 1931년에 개최된 제1차 전국공농병(工農兵) 대표대회에서 그는 공산당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당을 조직한 지 11년 만에 드디어 당권을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홍군이 대도시 총공격에 나설 정도로 성장한 데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탄압을 넘어 본격적인 토벌로 방침을 변경했다. 그에 따라 1930년 말부터 1933년까지 4차에 걸쳐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장제스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공격이 계속될수록 홍군은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병력과 무기가 증가했다.

 

국부군은 정부의 군대인 데 반해 홍군은 인민의 군대였다. 무기에서만 뒤질 뿐 사기에서 크게 앞섰고 전략과 전술에서도 앞섰다. 홍군은 화력이 우세한 국부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전으로 맞서는 한편 작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적의 무기를 노획하고 투항자를 홍군에 받아들였다. 마오쩌둥의 유명한 유격전과 지구전 전술이 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에게서 한 수 배운 장제스는 1933년 말의 5차 토벌 작전에서 마오쩌둥의 전술을 모방했다. 지구전이라면 우리가 적보다 못할 게 없잖은가? 그는 단숨에 홍군을 섬멸해버리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한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경제를 봉쇄하는 조치를 내렸다. 수복 지구에서는 농민들에 대한 선무 공작과 더불어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이 전술로 홍군을 고립시키고 유격전을 무력화시키는 데 큰 효험을 보았다. 홍군은 점점 세력권을 잃으면서 근거지인 장시 소비에트로 밀려났다. 급기야 1934년에는 이곳마저 국부군의 포위망에 갇혔다.

 

 

농촌을 지나는 대장정 1934년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할 때는 그것이 역사적인 대장정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1년에 걸친 혹독한 대장정은 홍군에게 두 가지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는 자칫하면 전멸할 뻔한 홍군의 주력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진에서 보듯이 중국의 드넓은 농촌 지대를 지나면서 민중에게 홍군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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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십팔사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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