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Desire
이성적 사유를 중심으로 했던 고대 철학에서도, 신학이 철학과 거의 동일시된 중세에도,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뉘어 인식론적 논쟁이 활발했던 근대에도 욕망은 항상 철학의 초점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쾌락주의로 유명한 그리스의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270)가 말하는 쾌락도 욕망과는 거리가 먼 정신적 행복이며 고통을 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극적인 쾌락이었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같은 유물론자는 인간의 행동이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했지만, 욕망을 그렇게 솔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예외적이었고 대개는 욕망은커녕 감정도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특히 합리론자들은 욕망을 부정적으로 여겼으며,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마땅한 인간의 속성으로 보았다. 인간의 자유를 크게 신장시킨 사회계약론에서도 사회가 존속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개인들의 욕망이 합리적으로 제어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합리론을 완성한 칸트(Immanuel Kant,1724~1804) 역시 욕망에서 나온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고 오로지 이성에서 비롯된 행동만이 자유를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온 욕망이 철학의 주요한 테마로 떠오른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다. 욕망이 이성과 대립각을 빚었다면 이성의 시대가 지나야 욕망을 바라보는 시각이 새로워질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이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20세기에 욕망은 철학의 범주로 수용된다. 욕망을 다루는 현대 철학은 실존철학과 구조주의의 두 갈래로 나뉜다.
실존철학은 욕망을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이 제시한 지향성의 개념과 관련시킨다. 후설은 인간의 의식을 독립적인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 늘 의식 외부의 대상을 지향하는 속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이 관점을 이어받아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욕망을 관심으로 규정한다. 인간은 의식하기 이전에 행위하고 성찰하기 이전에 실천한다. 내가 먼저 존재하고 무엇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 나는 ‘무엇을 의식하는 것으로서’ 존재한다. 인간은 세계와 지적인 관계를 맺기 이전에 평가적 관계를 맺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세계를 대하는 방식은 이성에 앞서 욕망이며,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관심이다. 인간이 접하는 세계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인간의 관심에 의해 물들어 있는 영역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인간의 의식이 자체 근거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욕망의 개념을 도입한다. 의식은 안이 텅 빈 무(無)의 상태, 즉 결핍으로 존재하므로 항상 뭔가를 채워 넣고자 한다【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것은 플라톤(Platon, BC 427~347) 이래 전통 철학의 맥락과 통한다】. 인간의 의식은 늘 욕망으로서 존재한다. 목이 마를 때는 갈증으로서, 연인이 그리울 때는 그리움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것으로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대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의식의 기도는 결국 실패한다. 실패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욕망해야 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숙명이다.
반이성주의를 기치로 내건 구조주의에서는 욕망을 의식의 속성이 아닌 무의식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욕망은 갈증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와 다르며, 욕망의 의식적 표현인 ‘요구’와도 다르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전통을 수용하지만 그냥 결핍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존재의 결핍으로 본다. 이 결핍을 메우기 위해 욕망은 기표들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기호) 적절한 대상을 찾지만 늘 일시적인 충족만 얻을 뿐 근본적인 결핍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결국 그 과정은 끊임없는 치환의 연속이기에 “욕망은 환유 –라캉, 『에크리』”일 수밖에 없다. 그 공허한 방랑이 계속되면 “욕망은 궁극적으로 그 자체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즉 욕망은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욕망은 곧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 『에크리』”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인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는 욕망을 결핍으로 보지 않고 생산적인 개념으로 보는 획기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욕망은 부족한 것을 메우려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생산하고 창조하려는 무의식적 의지다. 일찍이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 1632~1677)는 자연을 생산하는 자연과 생산되는 자연으로 구분하고, 자연이 수동적이 아니라 생산적임을 강조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구분을 욕망에 적용해 생산하는 욕망의 개념을 정립한다.
그들이 말하는 생산이란 무의식적인 의미이긴 하지만 비유적인 표현은 아니다. 욕망하는 생산은 관념적인 생산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과 관련된다. 사회적 장(場)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욕망의 생산물이다. 욕망은 특정한 개인의 속성이나 의지도 아니고 심리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사회적 관계 전체에 투영되어 기존의 정치경제적 과정을 대체한다. 이런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에 따라 역사적 사회 단계들을 구분한다(→ 인터넷).
욕망을 결핍으로 보든 무의식적인 생산의 힘으로 보든 20세기 철학에서는 더 이상 욕망을 방치하거나 백안시(白眼視)하지 않는다. 욕망은 부도덕한 것도 아니고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욕망은 그저 물처럼 흐를 뿐이다. 물길을 막으면 홍수가 나듯이 욕망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차단하려 하면 갇힌 욕망은 결국 한꺼번에 터져버린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흐름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포획하려는 자본주의적 장치로부터의 탈주하는 것을 참된 의미의 혁명이라고 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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