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안정의 대가
전성기 코리아
1010년 요나라의 2차 침략을 받았을 때 현종은 대장경을 조판할 것을 명했다. 그 의도는 부처의 힘을 빌려 전란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거란도 역시 독실한 불교 국가였으니 부처라 해도 과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줘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이 대장경의 판은 나중에 몽골 침략 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 전하는 팔만대장경은 몽골 침략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새로 조판한 것이다). 차라리 현종으로서는 나주까지 도망치지 말고 개경에 남아 궁성과 수도의 백성들을 구하는 게 훨씬 당당한 태도가 아니었을까?
대장경의 조판 이외에도 현종은 성종(成宗)이 중단시켰던 거국적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켰으니 불교에 대한 신심이 상당히 깊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교 국가를 구현하고자 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앞서 본 최승로의 말처럼 불교는 어디까지나 도덕과 신앙의 차원에서 기능할 뿐이고, 국가 체제를 위해서는 뭐니뭐니해도 유학이 최고다(세상의 어느 군주가 유학처럼 지배자에게 매력적인 이데올로기를 거부할까?). 현종은 오히려 승려의 과대한 권한을 억제하고, 한림원(翰林院)을 두어 유교 국가 특유의 학자 관료 체제(하권 67쪽 참조)를 도모하는 한편 설총과 최치원(崔致遠) 등 유학의 위인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제시를 지냈는데, 이것이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시작이다(문묘란 공자의 사당을 뜻하니까 문묘종사란 유교 의례에 따른 제사를 말한다). 그러나 시대는 아직 완벽한 유학 국가가 도래하기에는 일렀고, 현종에게는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었다. 전란이 남긴 결과를 추슬러 고려의 지도를 다시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새로 얻은 북방의 영토를 포함하여 그는 전국을 5도 양계로 재편함으로써 지방행정구역을 확정했다【5도 양계란 양광도(경기도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교주도(강원도), 서해도(황해도)의 다섯 개 도(道)와 동계와 북계의 두 계(界)를 가리키는데, 양계는 물론 북변의 국방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편성된 단위다. 이렇게 지방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성종 대의 12목도 8목으로 줄었다. 그 과정에서 중앙집권화는 한층 진척되었으나 앞서 말했듯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보다 속현의 수가 많은 현상은 고려 말까지 계속된다. 그런 점에서 고려시대는 내내 조금씩 중앙집권화 작업이 이루어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5도 양계의 행정구역은 고려 말까지 유지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1413년 태종이 전국을 우리에게 익숙한 8도로 재편하게 된다】.
이제 모든 게 안정을 찾았다. 신라시대에도 그랬듯이 한반도의 안정과 번영은 역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자리를 잡아야만 가능하다. 현종 대에 이르러 대외적으로 국난이 극복되고 대내적으로 제도가 정비되면서 고려 사회는 비로소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게 된다. 그래서 뒤이은 덕종(德宗, 재위 1032~34)에서부터 문종(文宗, 재위 1046~83)까지의 약 50년간은 고려 역사상 최고 전성기다. 팍스 코레아나(Pax Koreana)라고나 할까?
전성기답게 이 시기의 고려는 정치ㆍ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다원화가 두드러졌다. 신앙으로서의 불교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가 가장 잘 조화를 이룬 것도 이 시기다. 또한 불교와 유교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도교도 융성기를 맞아 흔히 유ㆍ불ㆍ선이라 말하는 한반도 전통 사상(실은 그 중 어느 것도 순수한 전통은 못 되지만)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게다가 문화와 예술에서도 신라를 계승하는 전통적인 흐름과 더불어 송나라와 거란의 문화를 수용해서 고려 특유의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 시기는 아마 이후의 역사까지 포함해서 한반도 역사상 가장 문화적으로 다원화된 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좋게 말하면 다원화지만 나쁘게 말하면 고유한 정체성이 부족하다는 말도 된다. 전성기의 고려 사회에서 크로스오버와 퓨전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곧 당시에 그만큼 지배적인 이념이 없었다는 뜻이다. 문묘종사를 제도화했던 현종이 독실한 불교도이기도 했고 궁궐에서 도교 제사도 지냈다는 사실이 바로 그런 점을 말해준다(물론 그것 역시 왕건이 물려준 유산이다). 이후의 국왕들도 이념적으로 잡탕을 즐긴 점에서는 마찬가지인데, 대표적인 경우가 예종(睿宗, 재위 1105~22)이다. 그는 최초로 경연(經筵)을 도입했고, 팔관회에서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읊었으며, 최초의 도관(道觀)인 복원궁을 건립했으니 가히 퓨전의 정수라 할 만한 군주다【경연이란 신하가 임금에게 유학의 경서를 강의하는 걸 말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확고한 제도로 자리잡게 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조선 초기에 경연은 왕권을 제약하는 요소였으나 후기에는 왕권 강화의 한 수단으로 사용된다(특히 영조英祖가 전매특허처럼 써먹었다). 또한 「도이장가」는 1120년에 예종이 팔관회에 참가해서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과 김락의 두 장수[二將]를 추도하며 발표한 이 두 가요다(그들은 927년 왕건이 대구에서 후백제와 싸울 때 왕의 목숨을 구하고 전사했다). 마지막으로 도관이란 도교 사원을 가리킨다. 이렇게 예종은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에 심취하고 도교를 장려한 유ㆍ불ㆍ선의 삼위일체격인 군주였는데, 물론 의식적으로 통합을 추진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세 가지 이념 중에 가장 잠재력이 큰 것은 역시 유학이다. 이는 특히 문종의 국가 경영 구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최충(崔沖, 983~1068)을 문하시중(국무총리 격)으로 발탁하고 유교적 국가 체제의 마무리를 맡긴다. 과연 왕이 기대한 대로 최충은 기존의 율령을 정비해서 형법을 체계화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와 함께 공직 생활도 마무리하고 한반도 최초의 사립학교인 9재학당(九齋學堂)을 열어 유학 이념의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앞에서 말했듯이 전시과(田柴科)를 최종적으로 개정해서 고위직(5품 이상) 관료들에게 수조권이 세습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문종 때인데, 이것 역시 유학 이념에 입각한 체제 정비작업의 일환이다. 유교적 국가 체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료들의 재정적 안정이 긴요하니까.
그런데 경정된 전시과(田柴科)가 완벽하게 기능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사실 토지를 측량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면 전시과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물론 전통적인 토지 단위인 결(結)이 있지만 문제는 객관적인 단위가 못된다는 점이다. 원래 1결은 소 한 마리가 나흘간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이라고 정해져 있었으나, 이런 기준이라면 아무래도 주먹구구식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 국가 재정의 총체라 할 토지를 객관적으로 측량하는 단위가 없다면 전시과(田柴科)는커녕 조세 수입에도 차질이 생긴다. 이런 점을 시정하기 위해 문종은 1069년에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을 제정한다. 말 그대로 토지를 걸음[步]으로 측량한다는 뜻이다. 그에 따라 1결은 사방 33보의 토지로 확정되었는데, 자가 없었던 시절에는 그런 대로 최선의 토지 측량법이라 할 수 있겠지만 누구의 보폭으로 재느냐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겠다.
▲ 종교의 퓨전 신앙으로서는 불교를, 이념으로서는 유교를 권장한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 보듯이 고려는 종교적으로 퓨전 체제였다. 현종은 불교에 심취했고, 문묘종사를 시작했으며, 도교 제사도 올렸으니 말하자면 퓨전의 극치다. 그래도 가장 기본적인 종교를 꼽으라면 역시 불교다. 사진은 높이 18미터로 국내 최대의 석불인 관촉사 은진미륵불상인데, 광종(光宗) 때 건립됐다.
완성과 동시에 시작된 해체
고려 왕조는 왕건이 세웠으나 광종(光宗)과 성종(成宗)이 다듬었고 문종이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여 완성된 나라다. 국가 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 제도를 비롯하여 지방행정구역 재편, 법 체계 등 제반 국가 체제를 완비한 게 문종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나라꼴을 갖추게 되는 데는 무려 150년이나 걸린 셈이다. 어쨌든 그 결과로 그때까지의 한반도 역사상 가장 완벽한 왕국이 성립하게 되었다. 정복국가의 수준에 머물렀을 뿐 행정국가는 이루지 못했던 고대 삼국, 중국의 한 지방정권으로서 존재했던 통일신라와 달리 고려는 이제 명실상부한 왕국이 된 것이다. 또한 비록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는 처지이긴 하나 그래도 송, 요와 더불어 고려는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는 자격도 획득했다.
그러나 고려의 그런 도약이 순전히 자체의 힘만으로 가능했을까?? 만약 중국의 송나라가 당나라만큼 강력한 제국이었다면 고려가 그렇듯 독립적인 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까? 예전의 신라처럼 중국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다면 선진 문물을 수입해서 문화적 발전을 이루는 데는 유리했을지 몰라도 대외적 위상에서는 그런 지위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의 그 짧은 번영기는 중국의 한족 제국인 송나라가 힘의 약세를 보인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8세기 초반 신라의 번영기는 당나라가 힘의 구심점으로 역할한 데서 나온 반면 11세기 후반 고려의 번영기는 오히려 송나라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이 기묘한 불일치가 말해주는 것은 뭘까?
앞서 말했듯이 송나라는 중국식 제국의 완성태에 해당하는 나라다. 주나라 때 중화 이념이 생겼고, 이것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유학으로 체계화됐으며, 이어 한나라에서는 유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공인됐고, 남북조시대에는 유학에 기초한 관리 임용제도인 과거제(科擧制)와 그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경제 제도인 균전제(均田制)가 탄생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제도화에만 성공했을 뿐 귀족 체제의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데 비해 송나라는 그때까지의 모든 발전을 집대성해 유사 이래 처음으로 가장 완벽한 유교 제국을 이룬다. 그 결과물은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더불어 관료들이 황제를 보좌하는 사대부 체제로 요약된다【이렇듯 이념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 후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이념을 실현하는 제국이 형성된 중국에 비해 유럽의 경우는 정반대의 역사 발전을 거친다. 유럽에서는 중국에서 중화 이념이 생겨난 시기보다 1천 년 이상이나 늦게 통일을 위한 이념(그리스도교)이 생겨났으며, 다시 수백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이념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공인했다(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이념에 관한 한 동양은 서양보다 크게 앞서는 셈이지만, 이는 동양의 역사가 처음부터 인위적인 경로를 걸어왔다는 뜻이 된다. 통일적 이념이 부재했기에 자연스럽게 분권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서양과는 달리 동양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통일을 겨냥한 이념을 가지고 시작함으로써 이후 내내 부자연스러운 정치적 통일을 지향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근대에 접어들면서 서양 문명이 동양 문명을 정복하고 흡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가 열심히 본받으려 한 것도 바로 그런 체제였다.
그 자체로만 보면 그것도 나쁘다고 할 것은 없다. 사실 유교적 국가 체제는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에 대단히 유리하고 편리하다. 북극성[천자] 주변을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제후들]가 하루에 한 바퀴 씩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그런 우주적 조화를 인간 세상에 옮겨다 놓은 것이 바로 유교적 질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다만 문제는 우물 안의 개구리만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바깥이 없다면 유교적 질서는 더없이 훌륭하다. 다시 말해 중국과 중국을 받드는 오랑캐들로 이루어진 세계인 중화세계만 지구상에 존재한다면 그 아름다운 질서는 영구히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중화세계는 송나라와 고려로만 이루어진 좁은 세계였으니 그 질서의 매력도 애초부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정상에 올랐으면 내려가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중국식 제국의 완성태인 송나라는 정상에 오른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일찌감치 하산을 서둘러야 했다. 요나라에게 치욕을 당한 것은 그 예고편에 불과하다. 자칫하면 예정보다 훨씬 이르게 제국의 문을 닫을 뻔했던 송나라가 명패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행히도 이후 요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현종이 죽은 해(1031년)에 요의 성종이 죽으면서 요나라는 더 이상의 대외적 팽창을 포기하고 그간에 얻은 성과를 토대로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데, 그 덕분에 송과 고려에 대한 북방의 압력은 한층 느슨해졌다(그러나 요나라는 번영을 얼마 누리지 못하고 곧 쇠퇴한다). 이 공백을 이용해서 고려도 짧은 번영기를 맞았고 서둘러 체제 정비에 나설 수 있었지만, 이 시기에 고려보다 더 다급한 처지에 놓인 것은 송나라였다. 고려는 그나마 영토 확장이라는 실익이라도 얻었지만 송나라는 오랑캐에게 수도를 짓밟히는 치욕을 당한 데다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처지로 전락했다. 지금 송나라에게 필요한 것은 고려처럼 체제 정비의 수준이 아니라 전면 개혁이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이다.
조공으로 인한 재정난은 부국책으로 막고, 부족한 군사력은 강병책으로 키운다. 이름하여 부국강병책이다. 이를 위해 왕안석(王安石)은 농민 생활을 안정시키는 청묘법, 물가 안정을 위한 균수법, 토지 조사를 위한 방전균세법 등의 부국책과, 병농일치를 꾀하는 보갑법과 보마법 등의 강병책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거는데, 이런 급진적인 정책에 반발이 없을 리 없다. 특히 지주들과 더불어 송대에 크게 성장한 대상인 세력은 왕안석의 조치에 반대하는 기존의 정치권과 결탁해서 거세게 저항한다. 개혁파(신법당)에 맞서서 보수파(구법당)를 이룬 그들의 주장은 ‘정치란 사대부들을 위한 것이지 서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지금의 가치관으로 보면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그게 오히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입장이었다).
왕안석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황제 신종이 죽자 그 갈등은 부국강병과는 거리가 먼 정쟁으로 발달한다. 이것이 송대에 극성을 떨치게 되는 당쟁의 시작이었으니, 개혁의 부작용치고는 심각하다 하겠다【사실 당쟁은 당나라 때도 심했고, 그 생리상 어느 시대든 있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송대에 당쟁이 특히 치열한 데에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제(科擧制) 때문이다. 과거제는 전통적인 귀족 집단의 혈연대신 ‘학연(學線)’이라는 새로운 ‘연줄’을 만들어냈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임용된 자는 자신을 길러준 스승보다 뽑아준 과거 시험의 감독관을 존경했고, 합격 동기와 선ㆍ후배 등을 통해 부지런히 연고를 맺었다. 관료의 임용이나 승진에는 고관의 보증이 필요했는데, 이 과정도 연줄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왕안석의 신법이 출현했으니 당쟁으로 이어진 것도 당연하다. 당시 고려에서는 물론 그런 개혁도 없었지만, 아직 과거제가 자리잡지 못한 탓으로 분명한 당파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래서 한반도의 경우 당쟁의 시대는 조선으로 넘겨진다】. 이렇게 해서 야기된 당쟁은 결국 유학의 근본 이념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주희(朱熹, 1130~1200)의 성리학을 낳게 된다.
▲ 중화의 두 영웅 송나라는 가장 완벽한 유교제국이었지만 동시에 유교제국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래서 위기에 처한 중화세계를 구하기 위해 두 명의 영웅이 등장했는데, 위쪽은 11세기에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도모한 왕안석(王安石)이고, 아래쪽은 그게 실패하자 12세기에 이데올로기적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한 주희(朱熹)다(주희의 아버지는 왕안석의 팬이었다고 한다).
북방의 새 주인
성공하지 못한 개혁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이 용의 머리로 시작했다가 뱀의 꼬리로 끝나자 그렇잖아도 좌초할 지경인 송나라 호는 더욱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더구나 송 나라가 낭비해 버린 ‘찬스 카드’는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힘의 공백 상태였던 북방에서 새 주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란을 대체한 여진이 바로 그들이다.
거란과 고려가 압록강 일대를 두고 흥정을 벌일 무렵 여진은 두 강대국의 손아귀에 운명을 맡긴 약소 민족의 처지였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북풍이 거세어지는 시대인 데다 더구나 그들은 거란과 고려보다 더 풍부한 잠재력을 지닌 민족이었다. 쇠가 달궈졌을 때 두드리지 못하면 좋은 연장을 얻을 수 없는 법, 카이펑을 함락시키고도 그냥 물러나 버린 거란과는 달리 여진은 랴오둥이나 만주에 안주하기보다는 중원 정복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실제로 북방 민족이 장기적으로 생존하려면 그래야만 했다. 이 점은 앞서 고구려의 전성기 때도 실감했던 사실이다). 송-요-고려의 3국이 정립을 이루고 있는 동안 여진은 서서히 결집되고 성장하면서 세대 교체의 조짐을 점차 가시화하고 있었다.
사실 고려도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에 이미 여진에 대비해서 여러 차례 북방의 방어를 강화한 바 있다. 하지만 거란과 접경한 한반도 서북변에는 압록강이라는 분명한 국경선이 있는 데 반해 그 동쪽의 여진에 대해서는 강역마저 명확치 않을 정도였으므로 딱히 방어라 할 만한 태세를 구축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적의 형체가 명확해야 대비든 뭐든 할 게 아닌가? 그래서 고려가 본격적으로 여진과의 경계선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때는 여진의 여러 부족이 서서히 국지적인 통일을 이루며 군소 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는 11세기 후반부터다.
문종 때까지만 해도 여진은 고려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11세기 말부터 만주의 하얼빈을 근거지로 삼은 완안부족이 통일의 구심점으로 떠오르면서 여진은 점차 한반도의 동북부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2세기부터는 지금의 함흥까지 진출했다. 그러자 고려의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은 더 이상 그 사태를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렇잖아도 어린 조카 헌종(獻宗, 재위 1094~95)의 왕위를 빼앗아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던 그로서는 없던 구실이라도 만들고 싶은 판이었으니 이 참에 여진 정벌을 시도해서 성공한다면 꿩 먹고 알 먹기가 따로 없다【숙종은 1097년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고 5년 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유통 화폐인 해동통보(海東通寶)와 동국통보(東國通寶) 등을 만들었다. 여기에도 아마 비정상적인 집권을 새 제도로써 만회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화폐를 주조하자는 제안을 한 사람은 송에 유학을 다녀온 숙종의 친동생이었는데, 그는 바로 고려에 천태종을 부활시킨 것으로 더 유명한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다. 왕실에서도 스스럼없이 승려가 배출될 만큼 고려 왕실은 유학을 국가 운영의 골간으로 삼으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대부분 불교를 숭상했다. 좋게 보면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고나 할까?】.
하지만 유목민족답게 기병 전술에 능한 여진은 오히려 엉성하게 편제된 고려 정벌군을 크게 무찌르며 기세를 올린다. 이때 숙종에게 발탁된 인물이 비운의 스타 윤관(尹瓘, ?~1111)이다. 기병 없이는 여진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별무반(別武班)이라는 군대를 편성하는데, 이름 그대로 여진 정벌을 위해 별도로 창설한 임시 군대다. 비록 숙종은 별무반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1107년에 윤관은 드디어 별무반을 선봉으로 삼아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동북 원정에 나선다. 아무리 여진이 날랜 기병대를 가지고 있고 한창 끗발이 오르는 시기라 해도 변변한 국가조차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고려의 대군을 맞아 이길 수는 없다. 결국 이 전쟁은 윤관과 척준경(拓俊京, ?~1144)을 스타로 만들면서 고려의 압승으로 마무리 된다. 윤관은 함흥에서 길주에 이르는 지역에 성을 쌓고 개선했다.
내친 김에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갔다면 삼국시대 이래 처음으로 한반도 전역이 한반도 왕조의 손아귀에 들어왔으리라. 하지만 불행히도 고려는 어렵게 얻은 9성마저 오래 보유하지 못한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이 강력히 반발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든게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줘도 못 먹나’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개국 초부터 외쳐왔던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진취적 기상은 이미 체제 안정기에 접어든 고려 조정에서 슬로건으로도 사용되지 않게 된 지 오래다. 대신들은 오히려 새로 개척한 땅이 너무 넓지 않느냐며 아우성이다. 대다수 대신들이 9성의 반환을 주장하는 판에 학문을 사랑하는 문화군주인 예종이 굳이 반대할 리 없다.
결국 여진에게서 평화 유지를 약속받는다는 조건으로 9성은 여진에게 반환되었고, 윤관(尹瓘)은 졸지에 개선장군에서 비운의 스타로 전락했다. 영토 개척의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관직까지 삭탈당한 윤관, 그나마 예종이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주장을 끝내 물리치고 보호해준 게 다행이었다 할까?
사실 당시 욱일승천하는 여진의 기세를 감안하면 고려 조정의 비겁한 태도가 오히려 현실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9성을 둘러싸고 벌인 그 해프닝은 여진의 세력 확장에 엔진을 달아준 격이 되었다. 한 때 여진을 놓고 거란과 핑퐁 게임을 벌이던 거란과 고려는 어느새 서산에 지는 해가 되어 버렸고(하기야 고려는 별로 높이 떠본 적도 없긴 하지만) 이제 여진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9성을 돌려받은 지 불과 몇 년 뒤인 1115년에 여진은 드디어 나라를 이루고 금(金)이라는 국호를 채택하기에 이른다(거란과 달리 처음부터 중국식 국호를 정한 데서도 여진의 포부를 읽을 수 있다).
적에게서 배운다는 말은 바로 금나라로 변신한 여진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오랜 기간 거란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던 여진은 나라를 세우자마자 일찍이 거란이 보여준 행보를 답습하는데, 그 속도가 훨씬 빠르고 규모도 훨씬 크다. 요나라가 그랬듯이 금나라도 맨먼저 착수한 사업은 고려 길들이기였다. 언제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던가 싶게 금나라는 건국 직후인 1119년에 고려에게 형제의 맹약을 강요한다. 9성의 자진 반납으로 기가 꺾인 예종은 여진이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거란이 그랬듯이 여진의 목적은 한반도 정복에 있지 않았으니 그것은 후방 다지기에 불과하다. 이후 그들의 스피드는 더욱 빨라진다. 1125년에 그들은 마침내 랴오둥의 요나라를 멸망시켜 해방을 이루는가 싶더니 2년 뒤에는 송나라로 곧장 쳐들어가 현직 황제인 흠종과 전 황제인 휘종을 비롯하여 황족과 중앙 관료 3천 명을 잡아간다. 이것이 정강(靖康, 흠종 대의 연호)의 변(變)이라 불리는 사건인데, 이로써 송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어떤 점에서 송나라는 멸망을 자초한 감이 있다. 100년이 넘도록 요나라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 있던 송나라는 여진의 등장을 반겼다. 이이제이일까, 원교근공일까? 그러나 주체의 힘이 약하면 그 어떤 전략도 공염불일 뿐이다. 송나라는 금나라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긋지긋한 요나라를 물리치려 했는데, 그 전략은 당장의 현실에 눈이 어두워 장기적인 판단력을 잃은 결과였다. 금나라의 도움으로 요나라를 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늑대를 물리치느라 호랑이를 집안에 불러들인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금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송나라는 다시 고려를 부추겨 연려제금(聯麗制金)을 시도하지만, 이번에는 고려의 내부 사정으로 좌절된다. 당시 고려는 이자겸(李資謙) 사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간신히 피랍을 면한 흠종의 동생이 남은 대신들과 함께 곧바로 남쪽으로 도망쳐 임안(지금의 항저우)을 도읍으로 삼고 송나라를 재건국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망명정부일 뿐이다. 어쨌든 이후의 역사가들은 이 새로운 송나라를 남송(南宋)이라 부르고 이전까지의 오리지널 송나라를 북송(北宋)이라 부른다. 역대 한족 제국의 완성태면서도 역사상 가장 허약한 제국이었던 송나라가 남송으로 명맥만 유지하게 되면서, 그렇잖아도 구심점이 없던 동아시아는 더욱 ‘무정부 상태’로 빠져든다. 일찍이 신라시대에도 당나라가 약화되면서 한반도에 심각한 후유증을 전달한 바 있었으니, 아마 이번에도 예외가 아닐 터이다. 과연 그럭저럭 안정을 유지해오던 고려 정부는 동아시아의 격변기를 맞아 심한 몸살을 앓게 된다.
▲ 욕만 먹은 영토 개척 한창 기세가 뻗어나는 여진을 상대로 완승을 거둔 윤관은 귀환길에 오르면서 내심 포상을 기대했으리라.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왜 쓸데없이(?) 영토를 개척했느냐는 개경 귀족들의 핀잔이었다. 그림은 윤관이 9성을 쌓고 기념비를 세우는 장면을 담은 기록화인데, 아마 성 쌓기에 동원된 고려 백성들도 나중에 반환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왕의 쿠데타
금나라의 전광석화 같은 팽창 정책으로 한때 동아시아의 삼각 정립을 이루었던 3국의 신세는 처량해졌다. 요나라는 완전히 멸망했고 송나라는 망명정권으로 전락했다. 홀로 남은 고려는 이미 여진과 형제 관계를 약속한 바 있지만 동아시아의 새 주인이 그 정도의 계약에 만족할지는 의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송을 멸망시킨 뒤 여진은 그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강요한다. 고려 조정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유독 한 사람 당대 최고의 실력자만 홀로 금을 섬기자는 사금책(事金策)을 주장해서 마침내 관철시켰는데, 그는 바로 이자겸(李資謙, ?~1126)이라는 자였다. 당시 그는 지군국사(知軍國事, 앞서 ‘권지국사權知國事’의 경우처럼 ‘知’란 ‘맡는다’는 뜻이니, 군대와 국가의 총책임자라고 보면 되겠다)를 자칭하며 ‘왕 위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니, 그의 결정은 곧 국가의 정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지니게 되었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왕건 이후 고려 왕실은 처음부터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근친혼으로써 왕족의 수를 늘리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래서 왕족이 결혼하는 상대방의 집안도 충주 유씨, 황주 황보씨, 경주 김씨 등 몇 개의 가문으로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경향을 처음으로 깬 사람이 바로 현종이다. 황보씨인 어머니와 두 이모(헌정과 헌애)의 난잡한 사생활에 넌더리를 낸 탓일까? 그는 열세 명의 아내들 중 무려 열 명을 ‘고정된 처가’ 이외의 가문에서 받아들인다. 이것을 계기로 이후의 왕들은 관례상 첫 아내만 왕족 내에서 근친혼으로 얻었고 나머지는 다른 성씨인 지방 토호 가문의 딸들을 맞아들였다. 다시 왕건의 ‘육탄적인’ 통혼 정책으로 돌아간 셈인데, 이는 왕실이 그만큼 안정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왕건처럼 외척 가문의 수를 늘려 왕권 강화를 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강화되는 건 왕권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왕실 내에서 근친혼이 행해질 때는 외척이라는 세력이 없었는데(외척 역시 왕족이었으니까), 다른 성씨의 왕비들을 맞아들이면서 새롭게 외척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자겸(李資謙)의 집안인 인주(지금의 인천) 이씨가 바로 그렇게 해서 성장한 세력이다. 하기야 건국 초기인 150년 전의 마구잡이 통혼 정책을 다시 썼으니 부작용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다.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은 11남매를 두었는데, 집안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아들들보다 딸들이었다. 그의 세 딸이 모두 문종에게 시집을 가서 그 중 인예태후가 낳은 세 아들은 12대 왕인 순종(順宗, 1083년 즉위 3개월 뒤 병사)과 13대 선종(宣宗, 재위 1084~94), 15대 숙종이 됐으니 이보다 더 부러울 게 없다【그 사이에 재위한 14대 헌종은 선종의 아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삼촌인 숙종에게 곧 왕위를 넘겼는데, 이 과정에도 인주 이씨 가문이 연관되어 있다. 이자연의 손자 이자의는 겨우 열 살에 즉위한 헌종이 병약한 것을 기회로 여기고 자신의 조카를 즉위시키려 한다. 이것을 눈치챈 계림공이 먼저 선수를 쳐 이자의를 죽이고 조카인 헌종에게 왕위를 이양받아 숙종이 된다(숙종은 그 때문에 인주 이씨가 아닌 정주 유씨 가문에서 왕비로 택했다). 선종의 왕비 셋이 모두 인주 이씨였음에도 이자의가 친조카를 즉위시키기 위해 모반을 꾀했다는 사실은 이미 가문 내부에서 권력 다툼을 벌일 정도로 인주 이씨의 세력이 거대해졌다는 걸 말해준다】. 이렇게 인주 이씨가 단연 고려 최대의 가문으로 떠오른 데 힘입어 이자겸(李資謙)은 일찍부터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서 초고속으로 승진한다. 1108년 둘째 딸을 예종의 비로 집어넣으면서 그는 날개를 달았고, 1122년 예종이 죽고 외손주가 왕위에 올라 인종(仁宗, 재위 1122~46)이 되자 그는 비상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작업은 그동안 그를 시기해 온 정적들을 제거하는 일, 그는 조정 대신 50여 명을 싹쓸이하고 마침내 무소불위의 권좌에 올랐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그는 안전장치로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집어넣는다. 인종으로서는 이모들을 아내로 맞아들인 격이지만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된 이자겸에게 찍소리도 할 수 없는 처지다. 이자겸이 지군국사로 자처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 시기부터다.
직함이 지군국사일 뿐 그는 사실상의 왕이었다. 죽은 자기 조상들에게 작위를 수여한다든가, 자기 생일을 인수절(仁壽節, 고려 왕의 생일을 가리키는 말)이라 부른다든가, 왕에게 자기 집에 와서 칙령을 내리게 한다든가 하는 행위는 왕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그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 즉 李씨가 왕이 된다는 설인데, 한문에서 흔히 구사하는 파자破字를 이용한 개그다)마저 믿었으니 실제로 왕이 되려는 욕심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만약 그의 의도대로 되었더라면 실제보다 3세기쯤 앞서 한반도에 ‘이씨 왕조’가 들어섰으리라(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는 전주 이씨니까 관계는 없지만).
아무리 장인이자 외할아버지라 해도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이 노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때마침 1126년 이자겸의 전횡에 반대하는 대신들은 이제 열일곱 살이 된 인종에게 이자겸 일파를 제거하자고 부추긴다. 인종은 즉각 동의하고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는데, 말하자면 국왕이 반란을 획책하는 셈이니 왕의 체면도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자겸은 국왕의 반란을 진압할 만한 물리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자겸의 동업자이자 군사력을 담당한 그 인물은 바로 윤관(尹瓘)의 부관으로 9성을 개척하는 데 공을 세운 바 있는 척준경이다.
김찬(金粲), 안보린(安甫鱗), 지녹연(智祿延) 등 왕당파는 문벌 세력이 나라를 주무르는 데 반대하는 하급 무관들을 조직해서 착실히 반란을 준비한다. 이윽고 거사일을 맞아 그들은 궁성에서 봉기했는데, 태산을 울릴 듯하다가 정작으로 잡은 건 쥐꼬리뿐이다. 겨우 척준경의 동생을 살해한 성과 밖에 올리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화가 난 척준경이 군사를 일으켜 국왕의 반란을 진압하고 관련자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낸다. 이 과정에서 궁성마저 불타 없어졌으니 인종은 이제 권력만이 아니라 집마저 잃은 비참한 국왕이다. 자포자기로 그는 그 참에 왕위를 이자겸(李資謙)에게 넘기려 했으나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이자겸은 일단 왕을 연금해 버린다. 기회를 봐서 왕을 독살하고 자신이 즉위한다는 게 그의 시나리오다(실제로 그는 독살을 시도했으나 자신의 딸이 조카이자 남편인 인종에게 알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꽉 막힌 사태를 푸는 열쇠는 물리력을 지닌 척준경에게 있었다. 그 점을 알아차린 최사전이라는 자가 다시 비밀리에 인종을 접촉해서 척준경을 이자겸(李資謙)에게서 떼어내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장으로선 뛰어나지만 단순무식했던 척준경, 인종이 지난 일을 잊겠다고 말하면서 다독거리니 그만 넘어가 버린다. 결국 왕의 사주를 받은 척준경이 선수를 쳐서 이자겸 일당을 잡아들이는 것으로 기묘한 반란은 끝났다. 이자겸은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어 곧 죽었고, 7대 80여 년에 걸쳐 고려 왕실의 외척으로 떵떵거리던 인주 이씨가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척준경의 운명이다. 이자겸과 왕당파 양측에게 모두 일등공신인 척준경은 이듬해인 1127년 탄핵을 당해 유배되면서 토끼를 잡은 뒤 사냥개가 어떻게 되는지 온몸으로 체험해야 했다.
비록 쿠데타를 성공시켜서 왕정복고를 이루기는 했으나 고려 왕실의 권위는 이제 땅에 떨어졌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된 이유는 물론 왕실의 외척 세력이 지나치게 커진 탓이지만, 여기에는 단순히 고려의 내부 사정만 연관되어 있지는 않다. 개국 초부터 사대의 대상이었던 한족 왕조 송나라가 힘을 잃고, 현종 이래 고려의 상국으로 군림했던 요나라가 멸망하는 일련의 국제적 격변은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질서를 무너뜨렸고 고려의 권력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가 혼란 상태에 있는 한 고려의 진통은 이자겸(李資謙) 사태 하나로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고려 왕실에는 곧이어 또 다시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닥친다.
▲ 여진의 실력 개국 초부터 북방의 야만족이라고 얕보았던 여진은 고려가 질척거리고 있는 동안 어느새 통일을 이루고 금 나라를 세울 만큼 성장해 있었다. 물론 이자겸이 사금책을 들고 나온 것은 여진의 성장을 경계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였다. 그림은 여진 병사와 여진문자다(한자를 본떠 만든 티가 역력한데, 거란문자도 이와 비슷하다).
북벌의 망상
척준경을 탄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자겸(李資謙)이 제기되고 나서 잠시 척준경은 이자겸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했다. 비록 그는 이자겸의 파트너였다는 전과가 있기는 하지만 그가 신발을 거꾸로 신지 않았다면 왕정복고는 불가능했으므로 누구도 그의 전력을 문제삼기 어려웠다. 하긴, 인종 스스로가 애초에 그의 과거를 용서하겠노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성공한 쿠데타라고 해서 처벌할 수 없다면 쿠데타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셈이다. 언제든 정권이 바뀔 수 있는 나라는 나라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람을 반쯤 죽여놓고도 치료만 해주는 것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면 폭력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척준경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제거되어야 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그 용감한 쥐의 이름은 정지상(鄭知常, ?~1135)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시인과 문장가로서는 꽤나 이름을 날리는 인물이었으나 정치적 위상은 별로 대단치 않았다. 그런 그가 자칫하면 역공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히 척준경의 탄핵안을 올린 것은 아마 나름대로 정치 이력을 건 승부수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 승부수는 통했다. 아직 열여덟 살의 청소년에 불과한 인종으로서는 외척 세력마저 잃은 터에 앓던 이를 빼준 그가 고맙고 미더울 수밖에 없다. 왕의 후의에 힘입어 정지상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데, 중요한 사실은 그가 고향인 서경에서는 삼성(三聖)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유명세를 떨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삼성이란 세 성자(聖者)라는 뜻일 테니 나머지 두 명의 성자는 누굴까? 일관(日官, 점술 관원)【지금 관점으로 보면 관직에 점술을 맡은 직책이 있다는 게 우습지만, 일관은 제법 요직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경우 일관부라는 관청이 있을 만큼 중요했다가 그나마 고려시대에 들어 위상이 다소 낮아진 것이다. 일관은 천체의 변화를 통해 점을 쳤으므로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실제로 고대 천문학의 발달에 기여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관상소(觀象所)라는 이름의 관청이 있어 소속 일관들이 점술만이 아니라 기상예보도 담당했다】을 맡고 있는 백수한(白壽翰, ?~1135)과 승려인 묘청(妙淸, ?~1135)이 그들이다. 비록 별명은 동등한 성자라도 삼총사의 지휘자는 묘청이다.
이들의 나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정지상(鄭知常)과 묘청은 연배와 위상이 비슷했던 듯하고, 백수한은 묘청을 스승처럼 받드는 위치였던 듯하다(묘청은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으니 백수한은 그에게서 배운 것을 자신의 직무에 요긴하게 써먹기도 했을 것이다), 정지상(鄭知常)이 백수한을 천거하고, 두 사람이 다시 묘청을 적극적으로 천거함으로써 묘청은 드디어 인종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들 서경 삼총사의 목적은 인종을 움직여 서경으로 천도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개경은 기가 쇠하고 궁궐마저 불탔으나 서경은 왕기(王氣)가 있으니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마침 이자겸(李資謙)의 반란이 있었던 데다 집도 잃어 개경에 신물이 난 인종은 그들의 설득에 솔깃한 반응을 보인다.
▲ 해동지도 평양부 지도(1750년대 초 제작)
왕의 태도에서 가능성을 읽은 묘청(妙淸)은 1128년 말에 석 달 동안 토목공사를 벌여 서경의 명당자리에 대화궁을 짓고 천도 준비를 완료했다. 혹한기를 무릅쓴 강행군이라서 백성들의 원성을 좀 샀지만, 어차피 고려의 수도가 서경으로 옮겨 온다면 그 원성은 곧 갈채로 바뀔 터이다. 대내적으로는 추락할 대로 추락한 왕권, 대외적으로는 오랑캐인 금나라에게 사대하는 치욕, 점차 인종의 마음은 그런 사태의 해결책이 천도에 있다는 쪽으로 기운다. 묘청은 지덕(地德)이 강한 서경으로 천도하면 왕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은 물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하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오늘날 같으면 미신으로 일축해 버리겠지만 풍수지리와 도참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으니 그런 묘청의 주장이 먹혀든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에도 초보적인 형식논리학은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과학적 근거와 무관한 풍수지리설이라 해도 자체 근거에 모순이 생기면 유지될 수 없다. 우선 대화궁을 준공했는데도 금나라는 항복하지 않고 천하는 전혀 통일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완공된 대화궁에 벼락마저 떨어지는 불미스런 사태가 일어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종이 대화궁을 보러 서경으로 행차하던 중 폭풍우가 몰아닥쳐 인마가 쓰러져 죽는 천재지변이 잇따른다. 풍수지리를 전공으로 삼은 묘청(妙淸)이 풍수지리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형식논리적인 모순이다.
그렇잖아도 천도에 반대하는 기색이 역력하던 개경 귀족들은 찬스를 잡았다. 그들의 리더는 정지상과 학문과 명성에서 필생의 라이벌을 이루며 사사건건 대립하던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다【김부식(金富軾)과 정지상(鄭知常)은 여러모로 대비되는 인물이다. 정지상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른 만큼 기본적으로는 유학자였으나 불교와 역학, 풍수지리에도 통달한 팔방미인형의 지식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뛰어난 시를 지어 세인들을 놀라게 했고 그림에도 능한 천재형의 인물이었다. 이에 반해 김부식은 세력 가문인 경주 김씨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학을 중심으로 한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학자였다. 아마도 김부식은 정지상을 비정통적인 잡학의 대가라고 비난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그에 대해 콤플렉스를 품었음 직하다. 마침 이자겸(李資謙)이 숙청되면서 왕실의 외척 세력이 힘을 잃은 때였으니, 정지상과 김부식(金富軾)이 각각 서경 세력과 개경 세력을 대표하면서 차세대 정치를 이끌 리더로서 대립하기에 알맞은 상황이었다】.
그동안 분위기에 눌려 입을 열지 못했던 그들은 오히려 그들을 돕는 풍수지리 현상을 이용해서 일제히 천도를 성토하고 나섰고, 결국 그들의 서슬에 눌린 인종은 천도를 포기하고 만다. 하긴,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그에게 확고부동한 정치적 결단력을 요구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어차피 고려의 국왕은 상징일 뿐 실세는 아니다. 따라서 그 상징을 서경으로 옮길 수 없다면 새로운 상징을 만들면 된다. 이제 서경은 천도의 자리가 아니라 새 도읍의 자리다. 길이 있어 다니는 게 아니라 다니면 길이 된다. 1135년 묘청(妙淸)은 아예 서경에서 딴 살림을 차리기로 결심한다. 개경에서 파견된 서경의 관리들을 잡아가두고 자비령 이북의 길목을 차단한 다음 북부의 전군을 서경으로 불러모으니 제법 나라꼴이 난다. 그렇다면 나라 이름이 없을 수 없다. 묘청은 대위(大爲)라는 국호와 천개(天開)라는 연호를 정한다. ‘크게 된다’는 국호에 ‘하늘이 열린다’는 연호를 정했으니 그의 포부가 얼마나 거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고려 왕조도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이제 대위는 왕국의 수준이 아니라 어엿한 제국이다. 과연 그는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정함)을 넘어 자신의 군대를 ‘하늘이 내린 충성스런 군대’, 즉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부르면서 마음껏 호기를 부린다.
▲ 없는 건 국왕뿐 묘청은 서경에 대화궁을 지어놓고 인종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금나라가 저절로 망하리라던 예언도 들어맞지 않은 데다 그의 장기인 풍수지리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사진은 평양 부근에 남아 있는 대화궁터인데, 이곳에 궁궐이 서 있었을 때에도 대화궁의 주인은 끝내 오지 않았다.
묘청(妙淸)은 새 나라를 세운 것이었으니 반란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고려 왕조로 볼 때는 명백한 반란이다(사실 그는 기사 소식을 당당하게 고려 조정에 전했으며,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고 칭제까지 했으면서도 직접 황제나 왕을 자칭하지도 않았고 별도로 왕을 옹립하지도 않았다). 개경의 리더인 김부식(金富軾)은 즉각 인종에게서 평서원수(平西元帥), 즉 서경을 평정하기 위한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받고 토벌군을 조직한다. 맨먼저 그가 한 일은 묘청(妙淸)이 서경에서 그랬듯이 개경에 있는 서경의 스파이들을 잡아죽이는 일이다. 묘청이 급작스럽게 거사한 탓에 미처 서경으로 도피하지 못한 정지상(鄭知常)과 백수한은 김부식에게 잡혀서 처형당하고 만다. 이제 삼성은 ‘일성(一聖)’으로 줄었다.
묘청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김부식이 이끄는 ‘성자 토벌군’은 서경으로 북상하면서 오히려 주변의 호응을 얻었다. 역시 묘청의 거사는 건국이 아닌 반란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서경이 포위되자 묘청의 세력 내부에도 이반이 일어난다. 묘청의 심복이었던 조광(趙匡)이라는 자가 항복해서 자신의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묘청을 비롯한 수뇌부를 살해한 다음 그들의 머리를 관군 진영에 보낸 것이다. 건국한 지 몇 개월밖에 안 된 신생국에서 반란이 일어난 격이다. 그러나 조광의 기대와는 달리 ‘선물’을 들려 보낸 그의 사신은 토벌군에게 잡혀 투옥되어 버린다. 뒤늦게 판단미스를 후회한 조광은 그때부터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하는데, 그래도 1년이 넘도록 항전했으니 아마 수뇌부가 건재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결국 1136년 2월 서경이 토벌군에게 함락되면서 사태는 막을 내렸다.
대위를 건국하면서 묘청(妙淸)은 칭제건원만이 아니라 북벌까지 주장했다. 이 점에서는, 고려 왕실보다 오히려 묘청이 서경을 중시하고 북방 이민족을 배척하라고 가르친 훈요 10조에 더 충실했던 셈이다. 아울러 그것은 옛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건국 이념에도 부합된다. 이런 사실 때문에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가리켜 ‘조선 역사 1천년 동안 최대의 사건’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과연 그럴까【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대단히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사건으로 본 듯하다. 그는 이 사건을 낭불양가(郞佛兩家, 낭가郞家란 한반도의 토착 사상을 가리킨다) 대 유학 세력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 진보파 대 보수파의 대결이라고 규정하면서 묘청의 실패를 무척 아쉬워했다. 여기서 민족주의 세력이 패배하고 사대주의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이후 한반도는 기나긴 사대주의의 터널에 빠져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처음부터 사대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한반도의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짧게 잡아 648년 ‘사대주의 원년’부터 시작되며, 길게 잡으면 단군 이래, 즉 유사 이래로 지속되어온 현상이다. 그렇다면 사대주의 자체를 우리 역사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한 입장일 것이다】? 물론 묘청의 일정에 북벌이 올라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걸 어느 정도까지 진실로 볼 수 있을까? 의도가 있고 그 의도를 표방한다고 해서 무조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묘청(妙淸)은 서경마저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으니 북벌을 추진할 능력이 전혀 없다. 따라서 북벌은 다분히 그의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하다고 봐야 한다.
그런 사실은 북벌론 자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를 억압하는 금나라와 싸우겠다는 자세는 일단 민족적이고 애국적이며 진취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금나라가 동아시아의 주인이 아니었다면 묘청이 그런 슬로건을 내걸 수 있었을까? 바꿔 말해서 중국의 한족 왕조인 송나라가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었다면 그가 그렇듯 ‘자주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었을까? 묘청이 북벌의 망상을 품은 데는 필경 송나라(북송)가 멸망하고 동아시아 지역이 ‘오랑캐’ 세상으로 바뀌었다는 현실 인식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묘청의 입장은 결코 사대주의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중국 한족 왕조에 대한 변함없는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하권에서 보겠지만 이런 허망한 북벌론은 17세기에 여진의 후예인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정복한 뒤 조선 조정에서도 제기된다).
▲ 대화궁 터의 기와 조각 대화궁은 정전과 사당으로 이루어졌다. 정전의 명칭은 호방하게도 건룡전이었고, 사당은 불교와 도교가 결합된 팔성당이었다.
『삼국사기』 미스터리
묘청(妙淸)이 자랑스런 독립당이 아니라 ‘위장된 사대당’이었다는 사실은 신채호 같은 민족사학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실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 사대주의의 핵심 인물은 물론 묘청이 아니라 김부식(金富軾)이다. 묘청의 난을 평정한 김부식은 그야말로 팔자가 늘어졌다. 이자겸(李資謙)의 몰락으로 외척 세력이 제거되었고, 묘청(妙淸)의 몰락으로 서경의 라이벌이 뿌리 뽑히면서 이제 세상은 개경 귀족들의 것이 되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김부식은 정지상(鄭知常)이라는 학문적 라이벌이자 최대의 정적도 제거했고 반란 진압의 공로로 최고위직인 문하시중 자리까지 따냈다【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정지상(鄭知常)을 즉각 살해한 데서도 보듯이 김부식(金富軾)은 ‘점잖은 유학자’ 답지 않게 정적을 제거하는 데도 능한 인물이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할 당시 자신의 부관이었던 윤언이(尹彦頤, ?~1149)를 제거한 것에서도 그의 교활함을 볼 수 있다. 윤관(尹瓘)의 아들인 윤언이는 평소에 자기 아버지가 쓴 의천의 비문을 김부식이 마음대로 뜯어고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인종 앞에서 『주역』을 놓고 벌인 논쟁에서 김부식을 능가하는 논리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랬으니 김부식에게 미운 털이 박힌 건 당연한 일,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은 그가 정지상과 내통했다고 몰아붙여 지방 관직으로 몰아냈다. 고려와 조선 양대에 걸쳐 권문세가를 이룬 파평 윤씨가 경주 김씨에 밀려 잠시 수난을 겪은 시기다】. 당대의 그는 시중으로서 더 이름을 떨쳤겠지만, 후대에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1145년 인종의 명을 받아 10명의 학자들을 거느리고 편찬한 『삼국사기』라는 역사서다.
알다시피 『삼국사기』는 고대 삼국에 관한 정사(正史)로서는 유일한 책이다. 그런 만큼 귀중한 문헌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유교적 세계관과 사대주의 사관(史觀)에 바탕을 둔 탓으로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비판도 어지간히 받았다. 그 비판의 논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데,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사대주의적 색채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은 데 비해 오늘날에는 지나치다는 게 정설인 걸 보면 당대의 평가와 역사적 평가는 아무래도 다르게 마련인 모양이다. 어쨌든 사관을 둘러싼 평가에 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으니 새로울 게 없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삼국사기』의 편찬 과정에 관련된 두 가지 미스터리다.
첫째는 『삼국사기」의 편찬 시기다. 왜 하필 삼국이 멸망한 지 무려 500년이 지났고 통일신라가 멸망한 지도 2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삼국에 관한 역사서가 편찬된 걸까?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 경우 새 왕조가 들어서면 50~100년 이내에 전 왕조에 관한 역사서를 편찬하는 게 관례다. 그런 중국적 전통을 익히 알고 있었을 고려 왕실에서 『삼국사기』를 그렇듯 뒤늦게 편찬하게 된 이유는 뭘까? 나라의 기틀을 만드느라 바빴던 탓일까? 그러나 그렇게 바쁜 중에도 새 왕이 즉위했을 때 전 왕의 치세에 관한 실록은 꼬박꼬박 챙겼을뿐더러 현종 때에는 태조에서부터 목종까지 일곱 왕의 치세를 정리한 『7대실록(七代實錄)』까지 편찬했던 것을 보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정확한 사유는 기록에 전하지 않지만 가능한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삼국사기』가 수백 년이나 늦어진 이유는 일찍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다음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은 이유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앞서 보았듯이 당시 신라는 중국의 군현이라는 처지였으므로 멸망한 두 나라의 역사를 정리할 권리도, 의지도 없었다. 초기의 고려 역시 중국을 섬기는 입장이었으니 삼국의 역사를 정리할 권리도 의지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건국한 지 200년이나 지나서 새삼스럽게 삼국의 역사서를 편찬할 마음을 먹게 된 이유도 분명해진다. 우선 중국의 송나라가 멸망했으니 이제 고려는 사대의 대상을 잃었다. 더구나 중국의 중심인 중원을 오랑캐인 금나라가 차지하면서 고려 정부에게는 이제부터 모든 일을 독자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 전까지 몰랐던 삼국에 관한 역사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을 것이다(인종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도록 압력을 가한 인물이 당시 금의 황제인 희종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금의 입장에서도 고려가 송에 대한 사대관계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게 유리했을 테니까). 하권에서 보겠지만 17세기 청나라가 중국을 정복한 뒤 조선에서 실학이 발달하게 되는 배경과 마찬가지다.
둘째 미스터리는 『삼국사기』의 편찬에 사용된 사료(史料)들이다. 소설을 쓰려 한 게 아니라면 당연히 편찬자들은 당대의 사료들을 참고했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의 건국 시기는 김부식(金富軾)에게도 무려 1천년 이상의 까마득한 옛날이었으니 사료가 없다면 편찬할 엄두도 낼 수 없다. 당시 그는 가장 주요한 사료로서 중국 측 사서들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서만으로 삼국의 역사를 구성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의 역대 제국들은 예외없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주변의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중국의 변방’으로서만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 변방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다【그런 중화적 관점의 역사 서술 방식에도 이름이 있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부른다. 『춘추』란 공자(孔子)가 춘추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인데, 객관적인 관점에서 기록된 역사서가 아니라 공자가 유교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비판한 내용이 핵심을 이룬다. 여기서 비롯되어 이후의 중국 역사서들은 대부분 공자의 서술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이 다른 ‘오랑캐’ 나라들과 맺은 외교 관계를 모두 중국에 조공했다고 기록하는 게 그런 예다. 춘추필법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보다도 유교적 대의명분이므로, 중화세계에 치욕적인 사실들은 마음대로 왜곡하고 변경해서 서술하는 게 허용되며, 오히려 그게 올바른 역사 서술 방식이라고 권장될 정도였다】. 따라서 중국 측 사서만 참고서로 이용했다면, ‘대무신왕(大武神王) 4년 12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부여를 쳤다’든가 ‘고이왕(古爾王) 3년 10월에 왕이 사냥을 나가 사슴 40마리를 잡았다’는 식의 상세한 연대적 기록이나, 삼국의 인물들을 다룬 열전(列傳) 부분은 도저히 서술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데는 중국 측 사서보다도 그때까지 전해 내려오는 고유의 기록들이 더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의 곳곳에서 『해동고기(海東古記)』, 『삼한고기(三韓古記)』, 『신라고기(新羅古記)』, 『신라고서(新羅古書)』 등의 옛 기록[古記]에서 인용한 부분을 싣고 있다. 하지만 삼국의 왕계에 관해 연도까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물론 앞서 2세기에 관한 기록에서 보았듯이 연도가 틀린 경우도 많지만), 그는 아마 그런 고기들 이외에도 삼국에 관한 어느 정도 체계적인 역사서들도 참조했을 가능성이 짙다(아마 그것들은 삼국이 직접 편찬한 고구려의 『신집』, 백제의 『서기』, 신라의 국사 같은 문헌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록들이 모두 후대에는 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뒤 그 기록들은 얼마 안 가서 폐기처분되어 버린 듯하다. 그렇다면 혹시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하고 나서 그 옛 기록들을 공식적으로 없애 버린 것은 아닐까? 김부식에게 혐의를 두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범인은 조선왕조로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가 간행된 뒤에도 일부 기록들은 남아 있었고, 이규보(李奎報, 1168~1241)나 일연 같은 고려 말의 문인들은 그것들을 참조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개국 초에 옛 기록들에 대한 대대적인 폐기 작업이 실행된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만약 그런 역사적 범행 이 실제로 있었다면 두 용의자(김부식과 조선 왕조) 모두 동기는 똑같다. 유교적 사관과 사대주의 성향에서는 한반도의 독자적인 역사서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테니까.
▲ 라이벌 역사서 유교사관과 사대주의, 신라중심주의로 왜곡된 역사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정사(正史)? 『삼국사기』의 이 두 가지 측면 중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언론인이자 민족사학자인 신채호는 첫 번째 측면에 관해 통렬하게 공박했다. 신채호가 연재를 시작한 「조선사』다. 신채호의 글은 해방 후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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