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잡는 은납제
역대 한족 왕조들이 그렇듯이, 명 제국도 전성기는 짧았고 퇴조기는 길었다. 294년의 사직 중 처음 100년도 채 못 되는 시점에서부터 벌써 정치가 부패하기 시작했다【중국 역대 통일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300년이 채 못 되는데, 세계사적으로 보면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한반도에 들어선 역대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무려 600년이 넘는다. 중국에 비해 한반도 왕조들이 정치를 잘했기 때문일까? 물론 아니다. 우선 한반도는 중국만큼 넓지 않기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가 지방에까지 쉽게 전해졌다. 또 한반도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외교와 군사 측면에서 중국의 지휘를 받았다. 중국 역대 왕조들은 한반도의 군대 징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반도의 국제 관계도 거의 중국이 관장하는 식이었다. 왕조가 교체되려면 ‘반란’이 필요한데,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는 지방이 없고 군사권이 중국에 있었으므로 우리 역사에서는 그런 반란이 드물었으며(그런 탓에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는 중국의 분열기와 일치한다), 왕조의 수명도 더 길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경제가 흔들리는 데 있었다.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생산력도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명대에는 특히 농업과 산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했다. 태조 시절부터 국가적으로 자영농 육성책이 실시된 결과 경지 면적이 크게 늘어났고, 품종 개량과 시비법의 발달 등 생산 기술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공업도 처음에는 농가의 부업으로 시작했다가 점차 대규모 공장들로 발달했다. 특히 송대에 수입되어 원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면화로 인해 명대에 들어 방직 공업이 크게 발달했다(이에 따라 임금노동자 계급도 급속히 성장했는데, 예를 들어 쑤저우에서는 중국 최초의 노동운동이라 할 방직공들의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상업 역시 농업과 산업에 못지않았다. 산업과 도시가 발달하면서 원거리 상품의 유통을 담당한 객상들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진 대규모 객상들이 출현했다. 당시 화북을 무대로 활약한 산시 상인들은 군대에 군량미를 조달한 대가로 정부에서 소금의 판매권을 양도받아 급속히 성장했다. 또 안후이의 신안 상인들은 산시 상인과 쌍벽을 이루는 객상으로 강남의 상권을 장악했다.
▲ 난징의 번영 강남에 기원을 둔 최초의 통일 제국답게 명대에는 강남이 크게 발달했다. 항저우는 이미 남송 시대에 발달했으나 명대에는 난징과 쑤저우 같은 다른 강남 도시들도 큰 번영을 누렸다. 그림은 당시 난징 시가지의 광경인데, 많은 사람이 모인 도심을 보여준다.
경제성장이 지속되면 그에 따라 경제구조도 변해야 한다. 몸은 커졌는데 작은 옷을 그대로 입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뜩이나 정치 불안에 시달리던 정부는 민간에서부터 급성장하는 경제를 감당하지 못했다.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 화폐를 더 많이 사용할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당시 정부가 발행하는 화폐로는 주화인 대명통보(大明通寶)와 지폐인 대명보초(大明寶鈔)가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은을 아끼려는 얄팍한 생각에서 주화보다 지폐의 사용을 적극 권장했고, 민간에서 널리 쓰이던 은의 유통을 법으로 금지했다. 경제 규모의 성장으로 화폐 사용량이 급증하자 정부에서는 지폐만 마구 찍어댔으니 이게 온전할 리 없다. 지폐 가치는 급락을 거듭하다 나중에는 종잇조각과 다를 바 없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정부는 은의 유통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허가하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따로 없다【이 점이 중국 명 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생겨난 절대왕정 체제의 차이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절대 권력의 외양은 같지만, 그전까지 중국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의 전통이 있었던 데 비해, 유럽에는 분권적인 봉건제의 역사가 있었다. 봉건제의 유럽에서는 민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산업과 상업의 성장에 대해 정치권력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모든 게 관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민간 영역이라는 게 애초에 없었다. 이 차이는 서양에서 시민사회가 역사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장한 데 반해 동양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세력이 생겨나지 못한 이유를 말해준다】.
급기야 1436년에는 관리들마저 녹봉을 곡식 대신 은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의 급료는 국가 재정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관리들의 녹봉을 은으로 주기 시작하자 정부는 많은 양의 은이 필요해졌다. 부족한 은은 세금으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부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은으로 내라는 은납제(銀納制)를 시행하게 된다.
▲ 쓰촨 지역에서 유통된 은화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여건에서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라는 것은 일종의 이중과세였다. 농민들은 현물을 그림과 같은 화폐로 바꿔 조세를 내야했다.
절대 권력의 시대에 정부의 방침은 전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정부의 명이 떨어지자 모든 백성은 세금을 내기 위해 은을 구해야만 했다.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들에게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예전에는 수확한 곡식을 그냥 조세(‘租稅’라는 한자어에 곡식을 뜻하는 ‘禾’자가 들어 있는 것은 현물을 세금으로 냈던 흔적이다)로 납부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곡식을 팔아 은을 구입해서 내야하니 결과적으로는 세금이 더 무거워진 셈이 되었다(일찍이 당의 양세법(兩稅法)으로 현물 납부를 금납제로 바꾸었을 때도 농민들은 똑같은 피해를 겪었는데, 수백 년이 지났어도 화폐경제가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 농민들은 은을 구입하기 위해 쌀이나 보리 같은 일반 작물만이 아니라 돈이 될 만한 작물을 널리 재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작을 해야만 하는 지역에서도 특용 작물을 재배한 탓에 미곡이 부족해지는 경우마저 있었다.
이렇게 은 구입이 어려웠던 이유는 애초에 중국의 은 생산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족하면 수입해야 한다. 그게 정부의 의무다. 하지만 정부가 그 점을 깨달은 것은 은납제가 시행된 지 무려 150년이나 지나서였다. 16세기 말에 정부가 대외 무역을 활성화하는 조치를 취해 멕시코산 은이 유입되면서 비로소 은이 부족한 현상이 해소되었다. 급변하는 현실에 한참이나 뒤늦은 행정은 경제 혼란과 백성들의 고통으로 직결되었다.
은납제로 인해 세금을 현물 대신 은으로 납부하게 되자 세금 제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물론 은납제가 시행되었다고 해도 현물로 내는 세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은으로 대체된 것은 주로 요역에 관한 세금
이었고 토지에 매기는 세금, 즉 전부田賦는 현물이 위주였다). 원래 중국의 세금 제도는 당대 이후 양세법(兩稅法)을 기본으로 했다. 4장에서 보았듯이 양세법의 원래 취지는 조용조(租庸調)로 나누어진 징세 체계를 하나로 단일화해 조용조의 폐단을 없애고 국가 세수를 늘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시대를 거치면서 양세법의 기본 취지는 점차 약화되고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세금을 납부한다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원대에는 강남 지역에만 양세법을 실시했는데, 여름에는 특산물을 징수하고 가을에는 곡물세를 징수한다는 내용이었으니 명칭만 양세법이지 과거의 조용조나 다를 바 없었다.
당 제국 시대에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지고 양세법이 생겨난 원인은 농
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명대 중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당대의 균전제가 몰락한 것처럼 명대에도 붕괴한 게 있을 터이다. 그것은 바로 제국 초기부터 통치의 근간이었던 이갑제(里甲制)다.
▲ 수력의 이용 명대의 농서에 나오는 수전번차(水轉翻車)의 모습이다. 이미 기어의 원리가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갑제(里甲制)의 주요한 취지는 향촌 사회의 질서를 이용해 조세 징수와 요역 부담을 제대로 처리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마을에 균등하게 조세와 요역을 부담시킨 데서 생겨난다. 같은 110호의 마을이라 해도 마을마다 경제 사정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이 점이 무시된 것이다(세금의 용도를 사회적인 측면이 아니라 지배층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기는 동양식 왕조의 한계다). 조세까지는 그런대로 견딘다 해도 요역은 큰 문제였다.
그렇잖아도 농민들의 부담이 큰 데다 향사(鄕士)라고 불리는 관료나 생원 등 마을의 지식인층은 요역이 면제되었고, 유력 지주들도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요역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생긴 요역의 공백은 일반 농민들이 메워야 했다.
예로부터 조세보다 무거운 게 요역이었다. 가혹한 부담에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농민들이 늘어갔다. 남은 농민들은 향촌 지배층의 면제된 요역분에다 마을에서 도망친 농민들의 요역분까지 부담해야 했으니 죽을 맛이었다.
똑같은 범인이 균전제(均田制)를 죽이고 수백 년 뒤에 이갑제(里甲制)도 죽였다. 그렇다면 사건 해결도 똑같은 형사가 맡을 수밖에 없다. 다만 예전에 이름이 양세법(兩稅法)이었던 형사는 이번에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는 이름으로 변장하고 현장에 출동한다. 1513년에 시행된 일조편법의 기본 내용은 본래의 양세법과 같다. 곡물세와 요역의 여러 항목을 단일화해 은납하게 하고, 이갑제(里甲制) 하에서 마을마다 부과하던 세금의 양을 다시 옛날처럼 토지와 사람을 기준으로 부과한다는 내용이다. 일조편법이 양세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세금을 연 중 두 차례로 나누어 내지 않게 됨으로써 ‘양세’라는 이름을 떨구었다는 것과 당 제국 시대와 달리 은납제가 제법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다는 배경의 차이밖에 없다.
양세법과 마찬가지로 일조편법도 초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사실상 같은 내용인데도 양세법과 일조편법은 중국의 세금 제도 역사상 양대 개혁으로 불린다). 과세의 기준이 명확해지면서 세금을 둘러싼 관리들의 농간도 사라지고, 탈세의 여지가 적어져 국가의 수입도 늘어났다. 게다가 농민이나 정부나 세금을 납부하고 징수하기가 수월해졌다. 그러나 농민들의 세금이 경감된 측면은 사실상 없었고, 앞에서 본 것처럼 완전치 못한 은납제 때문에 농민들이 겪는 이중고(곡물을 팔아서 은을 사야 하는 고통)를 오히려 증폭시킨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한시적일 따름이었다.
▲ 철의 제련 노동자들이 용광로를 이용해 철을 제련하는 모습이다. 당시 공업 노동자는 첨단의 기술자로 취급받았으므로 일하는 표정이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명의 백성들은 세금 제도의 폐해에 몹시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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