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죽고 당쟁은 살고
명대에는 농업과 공업, 상업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황제와 무능한 정부, 무능한 정치에 발목이 잡혀 사회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총체적 무능으로 일찌감치 쇠락의 길을 걸었던 명이 그나마 300년 가까운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따금씩 운 좋게도 수명을 늘리는 특효약을 처방 받은 덕분인데, 그중 하나가 장거정(張巨正, 1525~1582)의 개혁이다.
송에 왕안석(王安石)이 있었다면 명에는 장거정이 있다. 장거정은 1572년 신종(神宗, 1563~1620)이 열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 전대 수십 년간의 정치 문란을 목격하면서 개혁의 뜻을 품고 있었던 장거정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강력한 혁신 정치를 폈다. 먼저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을 축출해 관료제의 기강을 확립한 다음, 황허 일대에서 대규모 수리 사업을 전개했다. 그의 가장 탁월한 업적은 토지 장량(丈量)을 실시한 것이다.
위기를 타개하려면 개혁이 필요하고, 개혁은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 또한 정부가 제 구실을 하려면 무엇보다 재정이 튼튼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러자면 토지조사가 급선무였다. 1578년에 장거정은 전국적인 토지조사 사업을 벌여 세수에서 누락된 대지주들의 토지를 적발하고 전국 토지의 실제 면적을 정확히 조사했다. 그리고 이 성과를 바탕으로 그전까지 산발적으로 적용되어오던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대외적으로도 그는 북방과 남방의 이민족들을 토벌하고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등 적극적인 국방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장거정의 개혁은 결실을 충분히 맺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 개혁 정치 10년 만에 안타깝게도 장거정이 죽었다. 더구나 신종은 ‘신(神)’이라는 묘호에 걸맞지 않게 무능한 군주였다. 공교롭게도 명 제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관료와 가장 무능한 황제가 한 시대에 공존한 셈이다. 만력(萬曆, 신종의 연호) 연간은 명의 사직에서 가장 긴 48년 동안이지만 개혁의 초기 10년이 지나고나서부터는 언제 그런 개혁이 있었느냐는 듯 또다시 기나긴 정치 부패의 터널이 이어졌다【북송 시대 왕안석(王安石)의 개혁(4장 참조)과 명 시대 장거정의 개혁은 배경이나 결과가 비슷하다. 둘 다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정치가 부패했을 때 등장했고, 지나친 급진성으로 수구 세력의 배척을 받아 실패했다. 게다가 두 경우 모두 개혁의 실패가 곧장 격심한 당쟁을 낳았다. 북송의 당쟁은 신법당과 구법당으로 갈라졌고, 명의 당쟁은 동림당과 비동림당이 맞섰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까지 닮았다는 점이다. 왕안석(王安石)과 장거정의 개혁은 모두 ‘신종(神宗)’이라는 묘호를 가진 황제가 밀어주었다. 다만 묘호는 같았어도 북송의 신종은 개혁 의지가 투철한 군주였는데 아쉽게도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로 죽은 반면, 명의 신종은 철저히 무능한 군주였는데 쉰일곱까지 살았다는 점이 다르다】.
▲ 황제의 교과서 송의 신종 때는 왕안석이 개혁 정치를 펼쳤는데, 명의 신종 때는 장거정이 그 일을 맡았다. 묘호는 같지만, 송의 신종은 스무 살의 청년 황제인 데 비해 명의 신종은 열 살의 어린이였다. 그래서 장거정은 왕안석처럼 황제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그 대신 황제를 먼저 교육해야 했다. 사진은 당시 장거정이 황제의 교과서로 썼던 『제감도설(帝鑑圖說)』로, 역대 황제들의 선행을 기록한 책이다.
게다가 이 시기부터는 예의 환관 정치에다 당쟁까지 겹쳐 정치의 실종에 한몫을 거들었다. 정치에 관해 무능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한 신종의 치하에서 본격적인 붕당이 형성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정의 관료들은 이미 다섯 개의 붕당을 만들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된 계기가 생겨났다. 일찍이 당쟁이 극성을 부렸던 송대의 유학자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붕당론(朋黨論)』에서 대도(大道)를 논하는 군자의 붕당과 눈앞의 이익을 따지는 소인배의 붕당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소인배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을 이루어 다투다가도 군자의 붕당이 출현하면 이에 대항하여 약삭빠르게 일치단결하는 생존의 본능을 보여준다. 그 다섯 개의 붕당이 공동의 적으로 삼은 ‘군자의 붕당’은 동림당(東林黨)이었다.
1594년 신종은 멀쩡한 맏아들이 있는데도 애첩의 소생을 마음에 두고 태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었다【못난 아비와 잘난 아들은 어울리지 않지만 신종의 맏아들은 훌륭한 군주가 될 자질을 갖춘 잘난 아들이었다. 그러나 인물을 살리고 죽이는 것도 시대다. 그는 어렵사리 제위에 올랐다가 한 달도 못 되어 설사약을 잘못 먹고 죽었는데, 독살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그는 태창(泰昌)이라는 연호와 광종(光宗)이라는 묘호만 역사에 남겼다. 그가 그렇게 급사한 탓에 그의 아들은 허겁지겁 제위를 계승해야 했다. 그런데 광종이 맏이이면서도 태자 책봉이 여의치 않았던 사정은 엉뚱하게도 조선 왕실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광해군(光海君)은 차남으로서 세자 책봉을 받으려 했다가 태자 책봉을 놓고 당쟁을 벌이던 명 조정의 분위기 때문에 늦어졌다】. 강직한 관료였던 고헌성(顧憲成)은 이에 항의하다가 파직된 뒤 낙향해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세우고 학문과 시국에 관한 토론을 벌였는데, 여기에 기원을 둔 게 동림당이다. 재야의 동림당이 조정의 양식 있는 관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자 기존의 붕당들은 한데 뭉쳐 ‘비동림당’을 이루었다. 동림당과 비동림당은 이후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사사건건 대립했다.
당쟁 자체도 나빴지만 이 당쟁이 종식된 과정은 더 나빴다. 시정잡배 출신의 위충현(魏忠賢)은 “출세하려면 환관이 되어 황제의 눈에 들라.”는 원칙에 따라 환관이 된 인물이다. 광종의 아들인 ‘까막눈’ 황제 희종(熹宗, 1605~1627)의 신뢰를 얻어 권력을 장악한 그는 1626년 비동림파와 내통해 동림당의 여섯 거물을 처형하고 당쟁을 종식시켰다. 다음 황제이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1611~1644)은 즉위하자마자 위충현을 처형하고 동림당의 인물들을 등용해 꺼져가는 제국의 불씨를 되살리려 애썼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정치조직으로 변질된 서원 말뜻 그대로라면 서원(書院)은 공부하는 장소, 즉 학교여야 한다. 그러나 유학 이념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공부란 곧 정치였다. 그래서 조선 역사에는 학자 관료라는 독특한 계층이 있었으며, 중국에서나 한반도에서나 원은 당쟁의 진원지였다. 사진은 당시 군자의 붕당이라 불렸던 동림당의 동림서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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