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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우물 안의 제국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섞임 -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우물 안의 제국

건방진방랑자 2021. 6. 8.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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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 안의 제국

 

정확한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서양에 비해 경제와 문물에서 앞섰던 동양이 서양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명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몽골족의 원 제국은 처음부터 동양과 서양의 교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세계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뒤이은 명대에는 원대에 발달한 해외 무역과 교역이 거의 단절되었으며, 송대에 비해서도 상업과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여기에는 몽골이라는 이민족의 지배가 100여 년간 지속된 탓도 있다. 명은 오랜만에 복귀한 한족 왕조였으므로(내내 북방 민족에 억눌려 지낸 송대까지 합치면 당 제국 이후 무려 400년 만의 제대로 된 한족 통일 왕조다) 초창기부터 제국 운영에서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 논리를 앞세웠다. 정화의 원정이 서양에서와 같은 대항해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나 감합 무역이라는 비정상적인 무역 형태로 일관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나마 정치 논리라도 제대로 세웠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도 못했다. 정치에서도 독창적인 감각을 보였던 태조 시절을 제외하고는 다분히 예전의 강성했던 한족 왕조인 당 제국을 모방하고 답습하려는 복고적인 경향이 짙었다.

 

중국이 깊은 복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가운데 시대는 과거와 크게 달라졌고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 세계에서는 오랜 중세가 끝나고 대항해, 르네상스, 종교개혁, 자본주의의 발생 등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장차 세계의 중심으로 성장할 싹을 보이고 있었다동양의 질서는 수천 년 동안 기본적으로 중국이라는 고정된 축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지만, 서양의 질서는 서서히 중심이 이동하면서 다원적인 중심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오리엔트에서 발생한 문명은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 소아시아로 전달 되었고, 소아시아의 문명은 다시 서진해 크레타를 거치고 그리스 반도에서 에게 문명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스가 몰락한 뒤 역사의 중심은 서쪽의 로마로 이동해 지중해 시대를 열었으며, 로마가 멸망한 뒤에는 서유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동양의 역사에서 는 그와 같은 중심 이동이 없었고, 중국 대륙이라는 불변의 중심을 한족과 북방 이민족들이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방식으로 역사가 전개되었다.

 

게다가 동양 세계에서도 중국 중심의 고정된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변방에서부터 대규모 변화의 조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랜 내전을 끝내고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전국이 통일된 일본은 16세기 말 중국을 상대로 국제 무대에 등장하고자 했다.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일단 패배의 쓴잔을 마셨으나, 이것은 일본의 성장을 알리는 예고탄이었다(일본은 19세기 중반에 다시 국제 무대에 복귀한다).

 

 

흥청거리는 베이징 명대 말기 베이징의 광경. 명 제국은 이렇게 상업이 번성하고 문물이 발달했으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를 맞아 세계적 대세관이 어두웠던 탓에 끝내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 내부 역시 느리지만 변화의 움직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윗물(정치)에서는 침체와 정체를 면하지 못했어도 아랫물(민간 영역)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끓고 있었다. 사무역이 금지되고 해금령이 내려졌어도 민간의 욕구는 활발한 밀무역으로 분출되었고, 국가가 은의 통용을 금지했어도 민간에서는 은 본위의 화폐경제를 밀고 나가 결국 은납제(銀納制)를 시행하도록 만들었다.

 

농민들이 주도한 변화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명대 초기부터 성장한 자영농과 신흥 지주 들은 부패한 정치 상황에서도 대주주들을 견제해 대토지 겸병을 늦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명대의 대토지 겸병이 다른 왕조에 비해 더디게 진행된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의 덕분이다). 전호(소작인)들의 힘과 의식도 크게 성장해 지주와 근대적인 의미의 계약관계를 맺게 되었다.

 

명대 후기에 생겨난 일전양주제(一田兩主制)는 토지의 소유권과 경작권을 분리해 경작권도 하나의 권리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소유권은 땅 밑의 권리[田底權]’, 경작권은 땅 위의 권리[地面權]’라고 불렀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물권이 소유권과 점유권으로 분화되는 것에 해당한다. 경작자는 토지 소유자의 동의 없이 자신의 땅 위 권리를 매매 양도하거나 저당을 잡힐 수 있었으니 오늘날의 집 주인과 세입자 관계나 다름없다.

 

이렇게 신분이 높아지고 의식이 깨인 농민들은 이제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주가 가혹한 소작료나 불합리한 신분적 예속을 강요할 경우에는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맞서 싸웠다. 1448년에 소작료와 요역의 감면을 내걸고 최초의 항조(抗租)운동이 벌어진 이래 전호들은 여러 차례 조세 저항 운동으로 지주와 국가 권력에 맞섰다. 농민들은 단지 가뭄이나 홍수, 전염병 등의 재해를 당해 소작료 감면을 요구한 게 아니라 제도 자체의 불합리를 시정하지 않으면 조세를 납부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내외적, 세계사적 변화에 눈감고 있었던 것은 지배층 뿐이다. 이들은 환관 정치와 당쟁이라는 수구와 복고로만 일관했을 뿐 대내외적 변화를 정치에 반영하기는커녕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를 맞아 중국으로 밀려오는 서구 열강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가도 알지 못했고, 서양의 선교사들이 왜 그리스도교를 포교하기 전에 중국의 습속부터 먼저 익히는지도 알지 못했다(16세기부터 중국으로 오는 선교사들은 곧이어 밀어닥칠 서양 제국주의 침탈의 앞잡이와 같은 역할을 했다)그 시기에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온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16세기 초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에서는 신교가 우세해졌다. 그때 가톨릭 측을 지원한 것은 아라비아의 지배에서 막 벗어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다. 마침 이 지역은 대항해시대의 주역이었으므로 구교 선교사들은 자국의 상선을 타고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갔다. 중국은 말하자면 구교의 종교 마케팅을 위한 좋은 시장이었던 것이다.

 

원대에 싹튼 주체적 대외 교류의 움직임이 완전히 단절된 데다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는 허풍 섞인 오만으로 명의 지배층은 스스로 우물 안의 개구리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주체적으로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으며, 그들이 지배하는 나라를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 왕조로 만드는 선택이었다.

 

 

동서양의 원정 대항해를 출범하는 포르투갈의 함대, 정화의 남방 원정은 시기적으로 서양 국가들이 앞다투어 지리상의 발견에 뛰어들기 이전이었으나 이 탐험의 함대에 비하면 진취적이지 못했고, 결국 후대에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황제가 된 거지

영락제의 세계화

환관의 전성시대

사람 잡는 은납제

조공인가, 무역인가

기회는 죽고 당쟁은 살고

우물 안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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