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Ⅵ. 꿈과 깨어남
Ⅵ. 꿈과 깨어남
안연이 공자에게 물었다. “맹손재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소리내어 울었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마음속으로도 슬퍼하지 않았고, 장례를 집행할 때도 애통해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 가지를 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나라 전역에 걸쳐 가장 애도를 잘한 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 내용이 없는 데도 그런 이름을 얻는 경우가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정말로 그것이 이상합니다.”
顔回問仲尼曰: “孟孫才, 其母死, 哭泣無涕, 中心不戚, 居喪不哀. 無是三者, 以善處喪蓋魯國, 固有無其實而得其名者乎? 回壹怪之.”
공자가 말했다. “그 맹손재는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상례에 대한 앎[知]을 넘어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비록 상례를 간소히 치르려 하다가 뜻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간소히 한 바가 있었다. 맹손은 삶과 죽음의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생동하는 현재가 아닌) 관념적으로 기억된 과거의식[先]과 관념적으로 예기된 미래의식[後]을 알지 못했다. 변화를 따라서 그 변화에 맞추어 개별자가 되어서 그가 알 수 없는 변화에 의존할 뿐이다. 게다가 변화할 때 어떻게 그가 그것과 대립하는 변화되지 않음을 사유하겠는가? 변하지 않을 때 어떻게 그가 변화를 사유하겠는가? 단지 너와 나만이 꿈으로부터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仲尼曰: “夫孟孫氏盡之矣, 進於知矣, 唯簡之而不得, 夫已有所簡矣. 孟孫氏不知所以生, 不知所以死. 不知就先, 不知就後. 若化爲物, 以待其所不知之化已乎. 且方將化, 惡知不化哉? 方將不化, 惡知已化哉? 吾特與汝, 其夢未始覺者邪!
게다가 그는 몸을 놀라게 했지만 마음을 해치지는 않았고, 마음을 새롭게 해서 자신의 삶을 해치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소리내어 울 때 그도 또한 소리내어 울었다. 이것은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서로 각자 나라고 여기고 있을 뿐인데, 어떻게 우리 자신이 나라고 여기는 것이 실제로 나가 아님을 알겠는가? 너는 너 자신이 새이고 그래서 하늘을 날고 있다고 꿈꾸고 있고, 너 자신이 물고기이고 그래서 깊은 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고 꿈꾸고 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꿈꾸고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없다.”
且彼有駭形而無損心, 有旦宅而無情死. 孟孫氏特覺, 人哭亦哭, 是自其所以乃. 且也相與 ‘吾之’ 耳矣, 庸詎知吾所謂 ‘吾之’ 乎? 且汝夢爲鳥而厲乎天, 夢爲魚而沒於淵. 不識今之言者, 其覺者乎? 其夢者乎?”
1. 공자 사상의 의의
1. 공자를 심각하게 생각한 장자
보통 장자는 노자와 함께 도가(道家)의 중심인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흔히 도가 사상이나 그 사유방법을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관례는 한대(漢代)에 들어오면서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한대 이전의 선진(先秦) 사상계에서는 노자와 장자는 결코 노장으로 병칭된 적이 없었다. 이것은 우리가 『장자』 제일 마지막 33번째 편인 「천하(天下)」편을 살펴보아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천하(天下)」 편에서 노자와 장자는 상이한 전통을 계승한 학자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자』에서 노자는 보통 노담(老聃)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내편」과 「외ㆍ잡편」이 각각 이 노담이라는 인물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외ㆍ잡편」에서 인용되는 노담은 분명 『노자』에 나오는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고 동시에 공자도 가르치고 있는 권위자로 등장하고 있다. 반면 「내편」에 등장하는 노담은 『노자』의 사상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노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우화는 「내편」에 나오는 「양생주(養生主)」편에 등장한다. 이 우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노담(=노자)이 죽었을 때 조문객이 끊이지 않자, 그를 조문했던 진일(秦失)이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노자를 평가한다. “노담을 처음에는 지인(至人)으로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구나[始也吾以爲至人也, 而今非也].”
그렇다면 「내편」에서 등장하는 최고의 권위자는 노자가 아니라면 누구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공자다. 「우언(寓言)」편과 「천하(天下)」편을 보면 장자의 후학들은 장자의 문체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우언(寓言)인데, 이것에는 허구적 인물들이나 사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구성한 재미있는 우화적 이야기들이 속한다. 둘째는 중언(重言)인데, 이것에는 당시 사람들이 권위자로 인정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만든 이야기들이 속한다. 마지막 셋째는 치언(巵言)인데, 이것에는 대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혹은 주제에 따라 자유롭게 진행되는 이야기들이 속한다. 이런 분류에 따르면 「외ㆍ잡편」에서의 중언의 대상이 노자였다면 「내편」에서 중언의 대상은 공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노장이라고 병칭되는 장자와는 다른 장자, 공자라는 인물을 권위자로 진지하게 고려하는 장자를 확인하게 된다. 공자와 장자! 우리는 여기서 어떤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유가와 도가는 사마천의 말대로 차가운 얼음과 활활 타오르는 석탄의 관계처럼 양립할 수 없는 상이한 사유체계라고 생각되어 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장자는 공자를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히 자신이 살던 시대에 공자의 권위가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확보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장자와 동시대 사람인 맹자(孟子)의 이야기를 들으면 당시는 공자는커녕 유학사상도 죽은 개 취급을 받던 시대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장자가 공자를 심각하게 고려한 이유는 당시의 지적인 유행에 편승한 것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가 공자를 심각하게 고려했던 이유는 그가 공자 사상에서 철학적 가능성과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서양 철학을 시작한 사람으로 소크라테스를 들고 있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그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을 통해서 반성적인 성찰의 작업을 열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모든 논의는 독단적인 맹신에 불과한 것이다. 공자가 중국 철학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가 소크라테스와 비견되는 반성적 성찰의 작업을 중국 철학에 최초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공자의 철학에서 어떤 가능성과 한계를 파악했던 것일까?
2. 서(恕)란 폭력
공자가 의미가 있는 지점은 그가 바로 내면을 발견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공자는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의식했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공자 철학의 정수는 서(恕)라는 한 글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자는 서를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거나 ‘자신이 서고자 하면 타자를 세워 주어라[己欲立而立人]’고 정의한다. 결국 서의 원리에는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우리가 자신을 대상화해서 반성한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내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서라는 윤리적 원리의 이면에는 더 큰 공자의 문제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의식이 없었다면 공자는 이런 서라는 원리는 제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는 관계에 대한 의지를 함축하고 나아가 이 의지는 타자와의 충돌을 전제로 해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공자는 타자와의 갈등이나 다툼[爭]의 상황 속에서 이것을 해소하고 조화(和)를 도모하기 위해서 서의 원칙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의 원리가 타자와 올바른 관계 맺음의 원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그것은 나와 타자가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나와 타자가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의 욕망을 통해 매개된 실천 원리로서의 서는 오히려 타자와의 갈등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나는 음악을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타인에게 음악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타자가 음악을 듣고 싶어한다면? 혹은 나는 아침에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내 아들을 아침에 깨워서 산에 오르도록 한다. 그러나 만약 내 아들이 산에 오르는 것을 싫어한다면? 여기에 바로 서의 이율배반(antinomy)이 존재한다.
타자가 나와 동일한 욕망 구조를 갖고 있는 경우에만 서는 갈등을 해소하는 관계 맺음의 원리로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타자가 나와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갖고 있다면 애초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갈등이 생겨야만 서라는 실천 원칙을 사용할 수 있는데, 갈등이 생겼다는 것은 이미 나와 타자가 상이한 욕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나와 동일한 욕망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진정한 타자일 수 있을까? 타자는 오히려 나와 상이한 욕망 구조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타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공자의 서의 원리는 타자에 대한 관계 맺음의 원리인 듯이 보이지만, 이 원리에서 사실 진정한 타자는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서의 원리는 단지 동일한 욕망 구조를 공유한 특수한 공동체 내에서만 적용 가능한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날씨가 춥다고 애완견에게 옷을 입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은 분명 공자의 서의 원리를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그 개는 정말 타자일 수 있는가? 오히려 이 경우 애완견에게 적용된 서의 원리는 이 말 못하는 개에게 가해진 폭력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 개는 자신의 복슬복슬한 털만으로도 충분히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경우를 기준으로 개에게 갑갑한 옷을 사 입히고 예쁘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공자의 서가 애초의 그의 의도와는 달리 타자와의 갈등을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타자와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나아가 자신과 관계 맺어야만 하는 타자에게 폭력적일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장자가 자신의 사유를 시작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3. 주체에게 가해지는 폭력
가장 평화적이고 우호적이어 보이는 서의 원리에 잠재하고 있는 폭력성은 단지 타자에게만 가해지는 것이겠는가? 어쩌면 공자 사상의 핵심에는 폭력이라는 테마가 구조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공자는 우리가 바람직하게 살려면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공자의 말대로 산다면, 우리의 내면에 예는 행동과 판단의 기준으로,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superego)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홀로 있어도 이 초자아의 검열을 받게 된다. 예에 맞는 행동을 한 나 자신을 대상화하면서 우리는 기뻐하고, 예에 어긋나게 행동한 나 자신을 대상화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부끄러워한다. 공자는 이런 메커니즘을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또는 실천)하는(克己復禮)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나는 그 잘못을 보고 내면에서 스스로 재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여기서 잘못 또는 허물[過]과 재판하다[訟]라는 개념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공자의 반성은 기본적으로 법적인 구조로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피고ㆍ검사ㆍ변호인ㆍ재판관ㆍ법조문 등이 필요하다. 이것은 공자가 권고하는 자기반성에도 통용되는 구조다. 결국 스스로 벌이는 재판 놀이로서 자기반성은 자아를 이중삼중으로 분열시키게 된다. 이제 반성하는 나는 피고로서의 나, 검사로서의 나, 변호인으로서의 나,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재판관으로서의 나로 산산이 부서진다. 그러나 이런 재판으로서의 반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재판과 판단의 최종 근거로서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그리고 행동하지도 않는다’는 공자의 이야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이 예는 보편타당한 올바른 법조문일 수 있을까? 공자의 보수성은 바로 진정으로 되물었어야 하는 이런 질문을 결코 제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표면적으로 공자는 인간의 자기반성적 역량을 긍정하는 것 같지만, 인간의 반성적 역랑은 단지 내면화된 예라는 법조문에 따라 자신을 심판하는 역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면화된 예는 결국 주체에게 가해진 폭력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내면화된 예는 결국 삶의 다른 지평들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폭력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의 내면화의 과정이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예를 내면화한 사람에게는, 이제 다른 사람들도 이 예의 기준에 따라 심판할 수 있는 심판권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능숙하게 자신을 재판하는 사람만이 “타자를 좋아할 수도 미워할 수도 있다[能好人, 能惡人]”고 말한다.
이제 나 자신을 재판하던 사람이 타자도 재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나를 수양하고 남을 다스린다[修己治人]’는 유학사상의 메커니즘이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내면화된 예를 타자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것은 자신에게 가했던 폭력을 어느 사이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내면화된 규범(= 초자아)은 타자에 대한 폭력의 원인으로 작동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내면화의 메커니즘이 주체 자신의 삶을 부정한다는 데 있다.
결국 타자의 삶을 부정하기 위해서 주체는 우선 자신의 삶을 부정해야만 한다. 역으로 주체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기 위해서 타자의 삶을 긍정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내면화된 규범으로서 초자아는 이런 삶의 긍정 속에서는 존속할 수 없다는 점이다.
2. 꿈 은유의 중요성
1. 예(禮)가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다
타자와 조화롭게[和] 관계하겠다는 공자의 서의 정신은 자신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나 자신과 타자에게 동시에 폭력적일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왜 이런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공자가 예에 대해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데 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도 하지 않는다’는 서의 정신은 오직 조우한 타자가 나와 동일한 욕망 구조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적절한 관계 맺음의 원리로서 기능할 수 있다. 나아가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이란 사실 예가 원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을 때, 결국 공자의 서는 나뿐만 아니라 타자도 예라는 동일한 심판자 밑에 두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양화(陽貨)」편을 보면 공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친하게 대하면 불손하게 되고, 멀리하면 원망을 한다.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이런 공자의 술회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로부터 우리는 공자의 서의 원리가 단지 여자가 아닌 사람들(=남자들)과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지식인층)에만 적용되었던 것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서의 원리가 보편적 의의를 갖는 것이라면 여자와 소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동일한 삶의 규칙을 공유하고 있는 남자 지식인들에만 적용되는 원칙, 즉 예라는 법조문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통용되는 원칙은 결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보편적 원칙일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이제 장자가 공자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았으며 또 무엇을 문제 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공자로부터 주체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관계 맺음, 소통이라는 문제를 떠맡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소통을 하기 위해 예라는 매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공자의 확신을 문제 삼고 있다. 장자에 따르면 예라는 매개가 소통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는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계속 예를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매개라고 주장하고 나아가 이런 주장을 타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자는 자기만의 꿈속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자신의 꿈을 모든 타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정의되는 서는 타자와 적절히 관계 맺게 해주는 원칙으로서는 부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진정한 관계 원칙은 ‘타자가 원하지 않는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人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표현되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다음과 같은 의문이 발생한다. 우리는 어떻게 타자가 원하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그 고유한 타자의 내면을 읽을 수 있을까?
2. 판단중지의 한계
꿈 은유는 장자철학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더군다나 꿈 은유는 「내편」에만 나온다는 점에서 장자 본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꿈 은유가 가진 철학적 함축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진실로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그 여자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는 ‘그건 나만의 꿈이었어’라고 말하곤 한다. 이 경우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된다. 하나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과거의 상태라면, 다른 하나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는 현재의 상태다. 결국 우리가 ‘그건 꿈이야’라고 했을 때, 우리는 과거의 생각이 단지 상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우선 무엇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건 나만의 꿈이었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꿈으로부터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을 할 때 우리는 마치 꿈으로부터 깨어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녀가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꿈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는 옛날 판단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현재의 판단도 모두 꿈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결코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 또는 사랑하지 않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깨어남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깨어났다는 것은 단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가 꿈 은유로 말하려는 것이 결국 이런 회의주의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많은 학자들은, 특히 서양의 학자들은 꿈 은유를 회의주의와 상대주의로 독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장자의 꿈 은유가 전해주는 회의주의가 인식론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편견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론적 주장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사태나 타인에 대해 판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서 장자는 꿈 은유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치료적 회의주의라고 장자의 꿈 은유를 독해하는 견해는 어느 점에서는 옳지만 또 다른 점에서는 전적으로 장자를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다. 분명 장자가 자신의 생각을 독단적으로 묵수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치료적 회의주의라는 주장은 옳다. 그러나 장자는 깨어남을 일종의 새로운 꿈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히 꿈으로부터 깨어난 상태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치료적 회의주의는 장자가 옹호하고 있었던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반면 치료적 회의주의에 따르면 깨어났다고 하는 상태도 일종의 새로운 꿈이기 때문에, 깨어난 상태도 일종의 꿈에 지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일체의 모든 판단들에 대해 판단중지(epoche)함으로써 마음의 평정(ataraxia)을 도모해야 한다. 앞의 예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는 판단이나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판단도 모두 중지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취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판단중지가 진정으로 마음의 평정을 가져오는가?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모를 때 우리는 마음의 불안을 경험하지 않는가? 나아가 우리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사랑하지 않은지에 대해 철저하게 판단중지할 때, 진실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또는 사랑할 수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 둘 모두 결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판단중지할 때, 우리는 그녀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고독한 독신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치료적 회의주의라는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자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오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장자는 타자와의 소통을 포기하고 선택할 수 있는 고귀한 유아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치료적 회의주의가 권고하는 마음의 평정은 타자와 소통하지 않으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언제든지 타자가 도래하기만 하면 부서질 성질의 것일 수밖에 없다.
3. 사유중심적 진리관과 존재중심적 진리관
따라서 장자의 꿈 은유는 단순히 치료적 효과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꿈 은유는 장자가 생각하고 있던 진리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진리는 고전적으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고 정의된다. 그러나 존재와 사유의 일치로서의 진리는 내용적으로 두 가지 상이한 견해를 낳게 된다. 하나는 사유를 중심으로 이해된 존재와 사유의 일치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를 중심으로 이해된 존재와 사유의 일치다. 이 두 가지 상이한 진리관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 대해 상이한 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유 중심적 진리관이 주체의 역량을 강조한다면, 존재 중심적 진리관은 타자의 고유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장자가 존재 중심적 진리관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타자에 대한 예민한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유 중심적인 진리관이 주체 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유란 기본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어제 본 나무를 오늘 보고 ‘이것은 바로 어제 본 그 나무다’라고 판단하기 위해서, 어제 나무에 직면했던 자신과 오늘 나무를 보고 있는 자신은 같은 나일 수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A=A이기 위한 조건은 나=나라는 것이다. 결국 사유와 판단은 ‘나는 나다’라는 자기동일성, 즉 인칭성(personality)을 전제로 한다. 반면 존재 중심적인 진리관은 타자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타자 중심적이라는 말로 우리는 주체의 고유한 위상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주체나 주체의 사유가 기본적으로 조우한 타자에 맞추어 자기 조절하는 역량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데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나로 하여금 사유를 강제한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가?’라는 고민과 사유는 모두 내가 사랑하는 그녀로부터 강제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타자가 내게 주는 정보에 따라 주체는 사유뿐만 아니라 주체의 실존 형태마저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만약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매사에 행복하고 긍정적이며 자신감에 차 있는 나로 변화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와는 달리 불행하고 소극적이며 무기력한 나로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존재와 타자 중심의 진리관에서 주체는 기본적으로 비인칭성(impersonality), 즉 유동성(mobility)을 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공자의 서의 원리는 ‘타자가 원하지 않는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人所不欲, 勿施於人].’로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과 타자가 원하지 않는 것은 얼른 보면 모두 사유에 의해 정립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적으로 사유에 의해 정립된 타자가 원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타자와는 무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타자가 원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의 사유에 의해서 생각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권고했던 타자가 원하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사유에 의해 자발적으로 정립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조우하고 있는 타자로부터 강제된 것이어야만 한다. 이런 강제로부터 나의 사유는 비자발적으로 출현되는 것이다. 마치 달팽이가 촉수를 휘두르며 길을 가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촉수를 조심스럽게 휘두르면서 장애물의 정보를 읽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접촉한 타자로부터 그 타자와 관계하기 위해서 그 타자의 고유성을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공자의 서의 원리에 사유 중심적, 주체 중심적 진리관이 전제되어 있다면, 우리가 제안한 원칙에는 존재 중심적, 타자 중심적인 진리관이 전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장자에게 전자의 진리관이 꿈에 비유될 수 있다면, 후자의 것은 깨어남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사유중심적 진리관 | 존재중심적 진리관 |
주체의 역량 강조 | 타자의 고유성 강조 |
사유란 자기동일성을 전제함 | 유동성 |
인칭성 | 비인칭성 |
夢 | 覺 |
3. 꿈[夢]으로부터의 깨어남[覺]
1. 사유현재와 존재현재
장자는 공자 사상의 가능성과 한계에서 자신의 사유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그 핵심은 “자신이 원하지 않은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공자의 서(恕)의 원리를 더 급진화하는 데 있다. 즉 “타자가 원하지 않는 것을 타자에게 하지 마라[人所不欲, 勿施於人]!” 예를 들어 보자. 나는 마늘을 싫어하기 때문에 남에게 마늘이 들어간 음식을 주지 않는다. 이런 원칙은 기본적으로 남도 나와 마찬가지로 마늘을 싫어했을 때에만 적용가능한 원칙에 불과하다고 이미 말했다.
여기에는 타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빠져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원칙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나 타자의 소리에 대한 귀 기울임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내가 마늘이 들어간 음식을 주지 않았던 것은 타자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애정의 결과가 타자에 대한 폭력일 수도 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己所不欲]의 존재론적 위상을 생각해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결국 사유를 통해서 정립된 것, 성심에 근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신이 특정한 공동체에 살면서 내면화된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타자와 조우한 현재라는 시점에 비추어보면 사유를 통해서 정립된 과거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칸트(I. Kant)가 시간을 우리의 감성 형식으로 규정한 후, 현상학을 거쳐서 시간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유의 조건으로 변했다. 다시 말해 과거ㆍ현재ㆍ미래는 모두 인간의 사유를 통해서만 가능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는 이 세계 속에 현존하지 않고 단지 우리 사유의 기억(retention)이라는 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또한 미래는 이 세계 속에 현존하지 않고 단지 우리 사유의 예기(protention)라는 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또한 현재도 우리 사유의 지각(perception)이라는 작용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 존립되는 현재와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열리는 현재를 구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편의상 전자의 현재를 사유 현재라고 부르고, 후자의 현재를 존재 현재라고 부르도록 하자. 사유 현재와 존재 현재는 구분하기가 무척 어렵다. 내가 어떤 관심을 가지고 타자를 지각하고 있을 때가 있다. 이 경우를 우리는 사유 현재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내가 타자와의 강렬한 조우를 통해서 나의 관심을 그 타자에게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를 우리는 존재 현재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사유 현재의 예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기 위해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고 해보자. 두리번두리번 시계를 보면서 나는 내가 타려는 버스를 기다린다(=버스에 관심을 갖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버스를 나는 보게 된다(=지각한다). 이 경우 내가 지각한 버스는 나의 관심 또는 나의 사유를 떠나서는 존립하지 않는다. 내가 타려던 버스는 내가 어제 탔었던 같은 종류의 버스라는 것을 나는 안다(=기억한다). 또 나는 그 버스가 정류장에 곧 도착할 것임을 안다(=예기한다). 이런 기억과 기대 속에서 현재의 버스는 내가 어제 탔었고 또 내일도 탈 바로 그 버스로 지각된다.
결국 현재 지각하고 있는 버스의 현재성은 나의 사유 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사유 현재의 최종적 근거는 사유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존재 현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존재 현재는 사유의 기억ㆍ예기ㆍ지각의 연속성을 파괴하면서 도래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든가 혹은 갑자기 전쟁이 일어난다든가 혹은 갑자기 애인의 결별 선언이 있다든가 하는 것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존재 현재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또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사건(event)을 통해서 도래한다. 따라서 존재 현재의 최종 근거는 사건과 타자의 도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자아의 상이한 형태
얼마 전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하자.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내가 죽었다는 것을 최소 6개월 이상은 가끔 잊는다고 한다. 아내를 사고로 잃은 어떤 남자를 생각해보자. 그는 회사에서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면 안방 문을 열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아내를 찾곤 한다. 그러다가 방에 걸린 아내의 영정을 보고서야 그는 아내가 죽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아내에 대한 지고한 사랑 때문인가? 아니다. 이것은 이 남자가 자신의 자기의식을 동일하게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의지 때문이다. 아내의 죽음은 사유의 연속성, 인칭적 자아의 동일성을 부수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사유는 계속 관성(기억ㆍ지각ㆍ예기)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착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 안방 문을 열 때 이 사람은 두 가지 현재에 살게 된다. 하나는 사유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현재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은 당분간 아내가 자신을 안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또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존재 현실 속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다.
예기치 못한 타자와 사건의 도래는 기억ㆍ지각 예기라는 사유의 연속성을 파괴해버린다. 그래서 기억은 기억대로, 지각은 지각대로, 예기는 예기대로 산산이 흩어져 이 남자 주변에 머물게 된다. 어떤 때는 문득 아내와 차를 마시던 기억이 떠오르고, 어느 때는 문득 길을 걷다가 옆에 아내가 있는 듯이 지각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내와 여행을 가려던 약속을 떠올리고 즐거워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이 남자는 존재 현재로 내던져진다. 희미한 미소와 한 줄기의 눈물이 교차한다. 이런 분열과 그로부터 생기는 감정의 동요는 결국 자아의 인칭적 동일성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아의 인칭적 동일성, 즉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적 동일성은 사유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압도하는 사건과 타자의 도래는 사람을 일순간 멍하게 만드는 것이다. 전쟁으로 자신의 일가족을 잃게 된 이라크의 어느 가장의 멍한 얼굴을 기억해 보라. 우리는 이 이라크 남자의 얼굴에서 인칭적 동일성이 와해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유 현재와 존재 현재가 함축하는 더 중요한 점은 두 경우에 자아가 상이한 형태를 띠게 된다는 데 있다. 사유 현재에서는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 유지된다면, 존재 현재에서는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 파괴되고 비인칭성이 도래한다는 점이다. 물론 언젠가 아내를 잃은 그 남자도, 일가족을 잃은 이라크의 그 가장도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동일성을 또 다시 구성하게 될 것이다. 만약 다시 인칭적 동일성을 구성하지 못한다면, 이 두 사람은 앞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심하게는 자살에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롭게 구성된 이들의 인칭적 동일성은 아내나 자신의 가족의 죽음 이전과 더 이상 같을 수는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을 것이다. 즉 아내의 죽음으로 그 남자도 죽은 것이고, 자신의 일가족의 몰살로 그 이라크 가장도 죽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이 계속 살아간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자신으로, 전혀 다른 인칭적 동일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들은 결국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3. 맹손재가 상례를 가장 잘 치르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장자에 따르면 사유 현재가 꿈과 같은 것이라면, 존재 현재는 깨어남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자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전언은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비관적이고 나아가 잔인하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다. 불교에는 여실(如實)이라는 말이 있다. 한 마디로 현실과 같이 사태와 자신을 바로 보라는 말이다.
어느 날 어느 여인이 울면서 부처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녀는 울면서 말했다. “제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는데, 죽었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보고 싶고 또 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이 너무 슬픕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는 말했다. “네가 어느 집이나 가서 그 집 중 만약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이 있다면 그 집에서 곡식 한 알을 구해와라. 그러면 내가 너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
그녀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여러 집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어떤 집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은 없었다.
놀랍게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녀의 고통은 서서히 치유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이 집 저 집 곡식알을 구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면서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죽는다.’ 장자가 우리에게 사유 현재로부터 깨어나서 존재 현재에 살라고 한 이유도 바로 이런 불교의 여실의 정신과 마찬가지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발제 원문을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다. 발제 원문의 내용은 맹손재(孟孫才)라는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노나라에서 가장 상례를 잘 치른 사람으로 유명해졌다는 역설에 관한 것이다. 발제 원문은 공자와 그의 수제자 안연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자연스럽게 눈물이 나고 마음이 슬프다는 정감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유학의 논리다. 아니 유학을 떠나서 이런 정감은 현대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공자의 입을 빌려서 장자는 맹손재는 진실로 죽음과 죽은 자를 보내는 상례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맹손재는 지금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맹손재는 사유 현재를 부정하고 있지, 결코 존재 현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맹손재는 ‘관념적으로 기억된 과거의식[先]과 관념적으로 예기된 미래의식[後]을 알지 못하며, 변화를 따라서 그 변화에 맞추어 개별자가 된[不如孰先, 不知孰後, 若化爲物]’ 사람이었다.
공자의 입을 빌려 장자는 자신이나 안연은 모두 꿈을 꾸고 있는 자이고, 단지 맹손재만이 홀로 깨어 있는 자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장자는 자신이 꿈으로 의미하려고 했던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공자는 자신과 안연은 모두 서로를 나라고 여기는[吾之] 인칭적 자의식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자신이 꿈으로 의미하고 있던 것이 이런 인칭적 동일성에 사로잡혀 있는 사태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맹손재가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을 상징한다면, 지적인 판단과 평가를 수행하고 있던 공자나 안연은 인칭적이고 고착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장자의 논의에 따르면 꿈으로 비유되는 실존 양태와 깨어남으로 비유되는 실존양태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들이 있다. 첫째, 전자가 주체 중심적이고 사유 중심적인 실존형태라면, 후자는 타자 중심적이고 존재 중심적인 실존형태라는 점이다. 둘째, 사유 현재 속에 작동하고 있는 전자가 ‘나는 나라’는 인칭적 자의식에 근거해서 타자를 삶의 짝이 아니라 사변적인 관조나 평가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음이라면, 존재 현재 속에 작동하고 있는 후자는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마음으로 도래하는 타자에 맞게 임시적 자의식을 구성할 수 있는 마음이라는 점이다.
사유중심적 진리관 | 존재중심적 진리관 |
주체의 역량 강조 | 타자의 고유성 강조 |
사유란 자기동일성을 전제함 | 유동성 |
인칭성 | 비인칭성 |
夢 | 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