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금문효경과 고문효경
진시황 분서령의 역사적 정황
금ㆍ고문의 문제는 중국고전을 대할 때 가장 골치아픈 문제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금ㆍ고문에 얽힌 문제가 역사적으로 많은 과제상황들을 파생시켰기 때문에 일반독자들은 매우 답답하고 난삽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금ㆍ고문의 문제 그 자체는 결코 복잡한 문제는 아니다. 금ㆍ고문에 대하여 학자들이 지어낸 담설들이 복잡할 뿐이다.
진시황이 여불위(呂不韋)와 같은 비젼 있고 포용적인 인물의 충고를 계속 들었더라면 금ㆍ고문 문제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극좌(법가의 좌파)에서 극우(새 체제의 승상)로 전향한 이사(李斯) 같은 쫌팽이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제국을 운영하는 바람에 분서(焚書)와 같은 비극적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옛말이 참으로 실감난다.
진시황 34년(BC 213) 조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기사를 보면 순우월(淳于越)과 같은 충신이 고인(古人)들의 지혜를 본받지 아니 하고는 제국을 장구(長久)하게 지킬 방도가 없다는 것을 논구하는데 대한 이사(李斯)의 논박이 나온다. 승상 이사의 주장인즉, 이미 통일제국이 완성되었고(BC 221), 체제가 하나로 정비되었는데 지식분자들은 제각기 사학(私學: 사사로운 학문)만을 고집하고, 변화된 현재를 인정치 아니 하고 옛것만을 배우려 하며, 당세를 비난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옛날 제후시대가 아니니, 고(古)를 말하여 금(今)을 해하고, 허언(虛言)을 수식하여 실(實)을 어지럽히는 일체의 사상경향을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흑백을 가리어[別黑白] 하나의 지존을 정립하였으니[定一尊], 기발한 주장을 내세워 붕당을 조성하고 황제의 위세를 떨어뜨리게 하는 일체의 다양한 논의를 싹쓸이 해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한다. 진(秦)나라에서 만들어진 관학 이외의 시(詩)ㆍ서(書), 제자백가 전적을 모두 불태우고, 시ㆍ서를 운운하는 자들은 처형하여 시신을 저잣거리에 걸어놓고, 옛것을 가지고 지금을 비난하는 놈들은[以古非今者] 모조리 일족을 멸하는 형벌을 내려야 한다. 령(令)을 내린 지 30일 내로 전적을 불사르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만리장성 축조노역에 내몰아야 한다고 건의한다. 그러자 어리석은 진시황은 그 자리에서 오케이[可] 하고 분서의 령을 내린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장성은 진시황 때의 것이 아니다. 진시황이 쌓은 것은 주로 토벽이며 1억 8천만 평방미터의 흙이 투입되었다고 하는데 죽은 일꾼들의 시체도 건축자재로 쓰였다고 전한다.
성벽이 오로지 방어목적이라는 우리의 상념도 황당한 것이다. 보초병들은 쉽게 매수될 수도 있다. 성벽의 힘은 오직 그것을 방어하는 병사들의 정신에 있는 것이다. 장성은 주로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해서 사람이나 물자를 산악지역을 통해 신속하게 이동시키는데 쓰였다.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성벽은 대부분 명나라 때 축조된 것이다.
이사의 분노에도 현금(現今)을 인정치 아니 하고 고석(古昔)에만 집착하는 지식인들의 보수성향에 대한 답답함이 서려있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자신이 생각하는 금(今)만이 옳다하고 그 이외의 고(古)에 대한 생각은 싹쓸이 해버려야 한다는 발상은 집체주의ㆍ전체주의의 독선(a totalitarian dogma)에 불과하다.
대운하나 극단적 반공이념 같은 터무니없는 발상을 지고의 선으로 추앙하고 그 외의 모든 생각을 수용치 아니 하려는 발상과 대차가 없다. 이사의 ‘이고비금(以古非今)’에 대한 분노 때문에, 천하의 전적을 다 불사르는 분서의 불상사가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매스컴이 존재하지 않는 시절에 진시황의 하령(下令)이라 한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책들을 부지런히 불태웠을까? 함양(咸陽: 진나라 제도帝都) 주변의 몇몇 부자들은 태웠을지 몰라도 수만 리 떨어진 노나라ㆍ제나라 지역에서 귀한 책들을 불태웠을까? 뿐만 아니라, 분서라 하지만 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종수(種樹) 등등에 관한 책들은 제외시켰다고 하니, 다시 말해서, 말썽 많은 문과계 불온서적은 다 태우고 이과계 서적은 제외시킨 것이다. 재미있게도 『주역』은 이과계로 분류되는 바람에 분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무자비하게 무작위로 태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진시황은 분서의 령을 내린 지 불과 3년 만에 죽는다(BC 210). 그리고 서한 혜제(惠帝) 4년(BC 191)에 공식적으로 협서(挾書)의 율(律)이 해제된다(협서율: 민간의 장서를 금지하는 법률). 그러니 공식적으로 협서율이 적용된 기간은 12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진시황의 분서령으로 인해 많은 고대전적이 유실된 것은, 정신적인 위축감과 더불어, 의문의 여지가 없겠지만, 사실 협서율이 적용된 그 기간은 유례없는 격랑의 세월이었고 거대한 제국의 흥망이 엇갈리는 전환기였다. 따라서 무지막지한 전란의 풍화 속에서 사라진 전적이 더 많았을 것이다. 우직하기만 한 항우가 함양을 함락했을 때 투항한 진나라 왕 자영(子嬰)을 죽이고 인민을 도륙하고 진나라의 궁실을 불태웠는데 3개월 동안을 타고도 꺼지지 않았다[燒秦宮室, 火三月不滅]고 했으니 그때 무엇이 얼마큼 탔는지 알 수가 없다. 강유위(康有爲, 캉 여우웨이, Kang You-wei, 1858~1927)의 말대로 이사가 분서령을 내렸을지언정 자기가 보는 책들은 모두 진궁(秦宮)에 보관했을 것이고, 경서들의 관본(官本)은 다 궁안에 보존되어 있었을 것이다.
금문경과 고문경 출현과 정본 논란
하여튼 이러한 전란의 시기에 협서율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오히려 불탄 서적들을 복귀시켜야 한다는 반작용을 확실하게 의식화시켰을 수도 있다. 혜제(惠帝) 이후, 문제(文帝)ㆍ경제(景帝)의 시기에 이러한 복구사업은 열심히 진행되었고 무제(武帝) 때 이르러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가 확립되기에 이른다(BC 136).
복구작업 중 가장 먼저 이루어진 방식은 고경들을 외우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암송한 내용을 다시 옮겨 쓰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새로 만들어진 경전은 당대의 문자로 기록되게 된다. 당대의 문자란 이미 진나라에서 노예(하급관리)들도 읽을 수 있도록 단순화되고 규격화된 예서(隸書)를 말하는 것이다. 한나라 당대의 문자로 쓰여진 경서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새로 구술을 통해 복원된 경전을 ‘금문경(今文經)’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금문경은 아무래도 사람의 두뇌의 기억작용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성격에서 좀 멀어질 수는 있으나, 의미론적으로 군더더기가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며, 분량이 축소되어 보다 정돈된 체제를 갖춘 느낌을 줄 수가 있다. 그래서 금문경은 일단 서한(西漢: 전한) 시대의 대세로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민간에 불타지 않고 옛 문서로 남아있던 것이 발견되며, 산의 동굴이나 집의 흙벽이나, 특별한 비부(秘府)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진나라 이전의 육국문자(六國文字)로 쓰여진 것이며 올챙이[蝌蚪] 같이 생긴 꼬부랑 글씨, 즉 과두문자(蝌蚪文字) 등등의 고대자형으로 쓰여진 문헌이라 하여 ‘고문경(古文經)’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고문경이 출현할 때마다, 이미 금문경으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박사(博士)들은 그것이 위서(僞書)라고 주장하게 되고, 또 고문경으로 새로운 권위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금문경이야말로 인간의 가냘픈 기억에 의존한 불확실한 문헌이며, 일차자료가 아닌 이차자료라고 논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금고문논쟁’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경전마다 개별적으로 논의되어야 하지만, 고문경은 금문경에 의존하던 박사들이 보지 못했던 금시초문의 새 자료가 많으며 따라서 금문경보다 대체적으로 분량이 더 많다. 그리고 아무래도 문장이 껄끄럽고 고졸하며 허사 같은 것이 더 많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생겨난 문제가 금고문논쟁이라는 것만 알아두면 족하다.
그런데 금고문논쟁이 외면상으로는 경전의 오리지날한 정본에 누가 더 가깝냐는 테스트의 싸움 같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경전의 오리지날리티와 무관한 권력싸움일 때가 많다. 서울대학교에 과(科)가 하나 생겨나면 새로운 교수자리가 생겨나 신나는 사람이 있게 되고, 있던 과가 통폐합되거나 축소되면 기존 교수들이 반발하는 것과 비슷한 사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지금 말하는 5경이라는 것이 과연 정본(定本)이라는 것이 있는 문헌이었냐고 하는 문제이다. 확고한 정본이 있고 나서 금ㆍ고문 문제가 있다면 정밀한 논의가 가능할 수 있지만 정본 자체가 당초에 없는 것이라면 금ㆍ고문 문제는 웃기는 말장난이 되고 만다. 이런 말은 진실로 학문의 자유가 보장된 21세기에나 와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선진시대에 ‘정경(正經)’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당시는 종이도 없었고 인쇄라는 획일적 유통체계가 없었다. 간(簡) 아니면 백(帛) 밖에 없었는데 간(簡)은 무지하게 분량이 많았고, 백(帛)은 무지하게 비쌌다. 따라서 문서란 아주 소수가 베껴서 보관하는 것인데 베끼는 사람마다 전승계통과 인식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엄밀하게 같은 문헌은 선진시대에 단 하나도 없었다.
▲ 아시카가본(足利本) 『효경직해(孝經直解)』. 토찌기현(栃木縣) 아시카가시(足利市) 아시카가학교(足利學敎) 유적도서관(遺蹟圖書館) 소장. 일본 국보, 공안국(孔安國)의 고문효경서(古文孝經序)에 주(注)가 달려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효경직해』가 과연 누구의 작인지에 관해 이견이 있었다. 그것이 유현(劉炫)의 작이라는 설이 유력했으나, 결국 유현의 『효경술의(孝經述議)』를 저본으로 하고 형병(邢昺)의 『효경정의(孝經正義)』를 참고하여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분서(焚書)는 소실의 계기가 아니라 복원의 명분
기본적으로 금고문논쟁은 하나의 환상일 수가 있다. 어차피 진한지제(秦漢之際)의 막대한 전란을 거치면서 막중한 문헌이 소실되었다.
그런데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문헌을 소실시킨 것이 아니라, 문헌을 복귀시키는 데 더 큰 명분을 제공한 역사적 사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제각기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문헌들을 한제국이 성립하면서 통일된 문헌으로서 정립되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환상이 금고문논쟁일 수가 있다. 그 판타지를 제공한 것이 진시황의 분서령이었을 뿐이다. 금고문논쟁이란 비통일문헌이 통일 문헌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특수한 문제라고 생각하면 아주 정통한 견해를 획득하게 된다.
한번 생각해보자! 아타나시우스의 27서 정경이 발표된 이후 아타나시우스파의 실각으로 27서 정경들이 모두 불태워졌다고 해보자! 그리고 얼마 후에 복원작업이 다시 이루어졌다! 물론 암기왕들이 나타나서 27서를 복원하여 금문신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27서 정경에서 제외되었던 고대 사경자료들을 가지고 와서 본래 27서 정경의 모습은 이러한 것이었다고 우기게 되면 고문신약은 보다 분량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정경과 외경의 구분은 없었던 것이다.
하여튼 금고문논쟁으로 인하여 중국은 한대에 치밀한 텍스트 의식을 개발했고 주석이라는 해석방법론을 확립했다.
양한(兩漢)의 금고문논쟁으로 유발된 경전해석학은 인류사에 유례를 보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것이며, 그 경전해석학의 틀에 의하여 인도에서 들어온 불전들이 해석되고 주석되어 해인사에 있는 8만대장경의 장관을 연출시켰다고 한다면 진시황의 우행도 인간역사에서는 참으로 중요한 일을 담당한 것이다. 금고문에 관해서는 개별경전에 따라서 세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더 이상 논급할 여지가 없다.
▲ 『효경정주(孝經鄭註)』, 1791년(寬政三年) 일본에서 간행된 판본의 모습. 카와무라 마스네(河村益根, 1756~1819) 가각(家刻). 다자이 쥰(太宰純)의 고문효경 출판이 중국에 알려져 공전의 히트를 치자 일본에서 정주판본을 찾아내는 노력이 일어났다. 중국에서 사라진 당나라의 군서치요(群書治要) 전집이 일본에 보존되었는데 그 군서치요에 들어있는 효경정주를 카와무라가 펴낸 것이다.
금문효경과 고문효경의 차이
『효경』의 경우 금문효경은 18장으로 되어 있고, 고문효경은 22장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금문효경에 없는 것이 고문효경에 첨가된 것은 「규문장(閨門章)」 단 한 장일 뿐이고, 나머지는 금문효경의 한 장이 세분화된 것이다. 금문의 「서인장(庶人章)」이 고문에서는 「서인장(庶人章)」과 「효평장(孝平章)」 두 장으로 나뉘었고, 그리고 금문의 「성치장(聖治章)」이 고문에서는 「성치장」 「부모생적장(父母生績章)」 「효우열장(孝優劣章)」 세 장으로 나뉘었다. 그러니까 18장에 3장이 늘어났고, 거기에 「규문장(閨門章)」을 합치면 22장이 된다.
그런데 「규문장」이라고 해봐야 24 글자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금문효경과 고문효경은 내용상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독자들이 세밀하게 대조해보면 알겠지만 그래도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여러가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의(大義)를 운운한다면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우선 금ㆍ고문의 차이를 표로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금문효경(今文孝經) | 고문효경(古文孝經) | |||||
1 | 開宗明義章 | 第一 | 1 | 開宗明義章 | 第一 | 125字 |
2 | 天子章 | 第二 | 2 | 天子章 | 第二 | 53字 |
3 | 諸侯章 | 第三 | 3 | 諸侯章 | 第三 | 76字 |
4 | 卿大夫章 | 第四 | 4 | 卿大夫章 | 第四 | 94字 |
5 | 士章 | 第五 | 5 | 士章 | 第五 | 86字 |
6 | 庶人章 | 第六 | 6 | 庶人章 | 第六 | 24字 |
7 | 孝平章 | 第七 | 25字 | |||
7 | 三才章 | 第七 | 8 | 三才章 | 第八 | 129字 |
8 | 孝治章 | 第八 | 9 | 孝治章 | 第九 | 144字 |
9 | 聖治章 | 第九 | 10 | 聖治章 | 第十 | 140字 |
11 | 父母生績章 | 第十一 | 30字 | |||
12 | 孝優劣章 | 第十二 | 120字 | |||
10 | 紀孝行章 | 第十 | 13 | 紀孝行章 | 第十三 | 93字 |
11 | 五刑章 | 第十一 | 14 | 五刑章 | 第十四 | 37字 |
12 | 廣要道章 | 第十二 | 15 | 廣要道章 | 第十五 | 81字 |
13 | 廣至德章 | 第十三 | 16 | 廣至德章 | 第十六 | 82字 |
14 | 廣揚名章 | 第十四 | →제18로 간다 | |||
제16으로 간다← | 17 | 應感章 | 第十七 | 113字 | ||
15 | 諫爭章 | 第十五 | →제20으로 간다 | |||
16 | 感應章 | 第十六 | →제17로 간다 | |||
제14로 간다← | 18 | 廣揚名章 | 第十八 | 44字 | ||
금문에 없음 | 19 | 閨門章 | 第十九 | 24字 | ||
제15로 간다← | 20 | 諫爭章 | 第二十 | 148字 | ||
17 | 事君章 | 第十七 | 21 | 事君章 | 第二十一 | 49字 |
18 | 喪親章 | 22 | 喪親章 | 第二十二 | 142字 | |
고문효경 기준 경문의 합계(본서 기준) | 1,859字 |
금ㆍ고문 효경의 유래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진시황의 분서령이 내려졌을 때 하간(河間)의 사람, 안지(顔芝)가 『효경』을 숨겨두어 연멸(煙滅)의 액(厄)을 면했다. 협서율이 해제되고 한(漢) 문제(文帝) 때에 안지의 아들 안정(顔貞)이 『효경』을 조정에 헌상하였다.
이 『효경』」이 18장으로 되어 있는 금문텍스트이다. 이 18장 금문텍스트는 이미 문제(文帝) 기(期)에 학관(學官)에 정립된 것으로 사료된다【「공서」에는 안정의 『효경』을 발견하여 헌상한 사람은 하간왕이며, 하간왕이 헌상한 연도는 무제 건원 원년, BC 140년이라 한다. 그러므로 학관에 세워진 것은 무제 이후로 봐야 옳다. 혹설에 의하면 안정이 예서체로 쓰여진 『효경』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혜제(惠帝) 때 BC 190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간왕 유덕(劉德)은 50년 후에나 발견한 것이다】.
후에 이 금문 『효경』은 선제(宣帝)ㆍ원제(元帝)의 시기에 장손씨(長孫氏)ㆍ박사(博士) 강옹(江翁)ㆍ소부(少府) 후창(后蒼)ㆍ간의대부(諫議大夫) 익봉(翼奉)ㆍ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 등이 그 학통을 이어 권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전한 무제(武帝)의 시기에 노나라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구택(舊宅)을 헐었는데, 그 벽 속에서 『효경(孝經)』이 나왔는데, 이것이 과두문자로 쓰여진 것이고 22장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고문효경이다. 이 고문효경에 공안국(孔安國: 한 무제 때의 사람)이 전(傳: 이 경우 주注와 같은 개념이다)을 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금문효경은 후한 때에 정현(鄭玄, 127~200)이 주(注)를 달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공안국전’이라고 하면 고문효경을 가리키는 것이고, ‘정현주’라고 하면 금문효경을 가리키는 것이다.
고문효경(古文孝經) | 금문효경(今文孝經) |
공안국전(孔安國傳) | 정현주(鄭玄注) |
『공안국전(孔安國傳)』과 『정현주(鄭玄注)』의 진위논쟁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공안국전과 정현주가 모두 역사적 실존인물이었던 공안국과 정현의 작품인지에 관해서는 상고(詳考)의 여지가 많다. 그리고 『수서』 「경적지(經籍志)」에 의하면 유향(劉向)이 비부(秘府)에서 전적을 정리하였는데, 금문과 고문을 대교(對校)하여 새롭게 18장으로 정(定) 했다고 했는데, ‘안본(顔本)을 가지고써 고문(古文)과 비교하여 그 번혹(繁惑)함을 제거하고 18장으로 정하였다[以顏本比古文, 除其繁惑, 以十八章爲定].’이라고 한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유향은 고문텍스트를 금문체제에 합하도록 정리한 것이다. 유향(劉向, BC 79 ~ BC 8)은 기본적으로 고문경학의 대가이므로 그가 만든 『효경』이 18장체제였다 할지라도 그의 텍스트는 고문효경이었다고 사료된다. 이 유향텍스트에다가 정중(鄭衆)과 마융(馬融) 두 사람이 주(注)를 지었다고 했는데, 마융의 주 또한 고문텍스트에 대한 주였다고 볼 수 있다. 마융의 주는 후세에 전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고문 『효경』에 대한 한대의 주는 공안국(孔安國)의 전(傳)이 유일한 것이다.
우리나라 다산 정약용에게 충격을 준 오규우 소라이의 제자 다자이 쥰(太宰純, 1680~1747)이 중국에서는 사라진 공전(孔傳) 고문효경이 일본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래로부터 일본에 존재하는 다양한 판본을 참고, 교정(校定)하여 향보(享保) 17년(1732)에 『효경공전(孝經孔傳)』을 가각(家刻)했는데, 이 판본이 중국에 알려져 포정박(鮑廷博. 1728~1814)【청나라 안휘성 사람으로 절우제일(浙右第一)의 장서가. 교간校刊의 대가】의 권위있는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의 제1집으로 들어갔다. 노문초(盧文弨)의 서문에 잃어버린 고경을 천년만에 얻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천하의 학사들이 한목소리로 쾌재를 불러야할 사건[此豈非天下所同聲稱快者哉]!이라고 찬탄해마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학계의 위상이 높아졌고, 나머지 정주(鄭注)도 반드시 일본에 보존되어 있으리라는 기대가 중국학자들에게 생겨나자, 정주 발굴작업이 일본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자이 쥰의 『효경공전』은 여러 판본을 종합한다 하면서 그 본래 면모를 상실시켰으며, 실제로 준거하기 어려운 무가치한 판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다자이의 판본에 의거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고문효경』에 관한 한 다자이의 공과는 반반이다.
그 뒤로 동진(東晋)의 목제(穆帝) 영화(永和) 11년(AD 355), 그리고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원년(AD 376)에 군신(群臣)을 집결시켜 『효경』의 경의(經義)를 의론케 한 결과, 박사 순창(荀昶)이 제설(諸說)을 찬집(撰集)하여 『정주효경(鄭注孝經)』을 종(宗)으로 하였다【『당회요(唐會要)』 권77, 「논경의(論經義)」】. 이 사건을 계기로 『정주효경』을 존신(尊信)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양(梁)나라에 들어서면서 『정주(鄭注)』와 『공전(孔傳)』은 다같이 학관(學官)에 세워지게 되었는데【그러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금ㆍ고문경이 다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6세기 중엽 양말(梁末)의 전란을 거치면서 『공전(孔傳)』이 망일(亡佚)되고 말았다. 따라서 남북조시대의 진(陳, 557~589) 나라, 북제(北齊, 550~577), 북주(北周, 556~581)의 시기에는 오직 『정주(鄭注)』만이 세상에 행하여졌다(「수지隋志」).
하여튼 박사 순창이 『정주』를 종(宗)으로 삼아 『정주(鄭注)』가 독주하게 되자, 『정주』에 대한 의혹이 깊어지게 된다. 남제(南齊)의 국자감 박사였던 육징(陸澄, 425 ~ 494, 자 언연彦淵)은 상서령(尙書令) 왕검(王儉)에게 『정주』를 주면서 이것이 분명 정현 자신의 주가 아닌 듯하니 잘 검토하여 보고 비부(秘府)에 간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을 제출한다【『남제서(南齊書)』 열전 제20, 「육징전」을 참고할 것】. 그러나 왕검은 설사 그것이 정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효경』의 가치는 사라질 수 없으므로 관행대로 학관(學官)에 존치하는 것이 옳겠다고 대답하여 그대로 존속시켰다. 따라서 『정주(鄭注)』는 격동의 시기에도 살아남게 된다.
그런데 한편 『공전(孔傳)』은 양말(梁末)의 난에 망일되었으나,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4년(AD 594)에 비서감(秘書監) 왕소(王劭)가 경사(京師)에서 우연히 『공전(孔傳)』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방득(訪得)하자마자 하간(河間)의 유현(劉炫, 자는 광백光伯, 당대의 석학)에게 보내었다. 유현은 새로 발견된 『공전』에 서(序)를 쓰고, 『공전』을 교정하여 소(疏)라고 말할 수 있는 『효경술의(孝經述議)』 5권을 짓고, 민간에서 『공전(孔傳)』을 강의하면서 유포시켰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자, 학령(學令)에 저록(著錄)하고, 『정주』와 더불어 학관(學官)에 세웠다.
그렇지만 당대의 유자들은 유현이 강술한 『공전』은 “유현의 위작(僞作)이며 공안국 자신의 구본(舊本)이 아니다”라고 박격(駁擊)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고문효경공안국전』은 옛부터 수나라 유현의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효경술의』 자체가 유실되어 지금 그 위작설을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일본의 학자 하야시 히데이찌(林秀一)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공전』 관계 문헌들 중에서 『효경술의』를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위작자는 위나라의 왕숙(王肅) 일파의 한 사람이며 유현은 교정자에 불과하다는 신설을 발표했다. 하여튼 유현의 『술의(述議)』사건 이후로 공(孔)ㆍ정(鄭) 이주(二注)의 진위에 관한 논쟁이 격화되었다.
당현종의 절충부터 석대효경까지
당현종은 이러한 사태를 염려하여 개원(開元) 7년(719), 제유(諸儒)에게 조(詔)를 내려 『공전』과 『정주』의 시비를 질정(質正)케 하였다.
이때에 『사통(史通)』의 저자인 대 역사가 유지기(劉知幾, 리우 즈지, Liu Zhi-ji, 661~721, 자는 자현子玄)는 고문을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12가지 증험을 세워 현존하는 『정주(鄭注)』가 역사적 정현의 주가 아님을 입증하고, 유현이 교(校)한 『공전(孔傳)』이 정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맞서 사마정(司馬貞, 쓰마 전, Si-ma Zhen)【당 하내(河內)의 사람. 홍문관 학자. 자는 자정(子正), 사마천에 대하여 자신을 소사마(小司馬)라고 불렀다】은 금문을 종주로 하고 『공전』도 유현의 위작이며 공안국의 구본(舊本)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양의(兩議)가 결착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당현종은 조(詔)를 내려 잠시 양주(兩注)를 병행시킬 것을 명하였다【『당회요(唐會要)』 권77, 「논경의(論經義)」】.
다음 개원(開元) 10년(722) 6월, 현종은 본인 스스로 금문을 주(主)로 하여 공안국(孔安國)ㆍ정현(鄭玄)ㆍ위소(韋昭)ㆍ왕숙(王肅)ㆍ위극기(魏克己), 다섯 사람의 제주(諸注)를 채용하여 『어주효경(御注孝經)』 1권을 지어 천하에 반행(行)하였다【현종의 「『효경서(孝經序)」에 보이는 ‘육가(六家)’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윗 다섯 사람에 한정된다】.
이것을 세칭 ‘개원시주(開元始注)’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개원시주의 간행과 동시에 현종은 어주의 취지를 부연케 할 목적으로 원행충(元行沖)에게 명하여 개원시주의 「소(疏)」 3권을 작성케 하였다.
천보(天寶) 2년(743) 5월에 이르러, 현종은 개원시주의 불비(不備)함을 보완하여 새롭게 『효경』을 주하여 다시 이것을 천하에 반행(領行)하였다. 이것이 세칭 ‘천보중주(天寶重注)’이다. 그리고 다음해 천보 3년에는 천하에 조령(詔令)을 내려 집집마다 『효경(孝經)』 한 책을 소장케 하였다.
그리고 천보 4년(745) 9월, 현종은 친히 팔분(八分)의 서체로서 ‘천보중주’ 1권을 붓으로 써서 거대한 돌에 각하여 장안(長安)의 태학(大學) 앞에 건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그 유명한 『석대효경(石臺孝經)』이다. 현재 서안(西安) 비림(碑林)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당현종의 어주(御注)라는 것은 개원 10년에 작성되어, 천보 2년에 중수(重修)된 것이다. 그런데 원행충의 소가 ‘개원시주’에 의거하여 작성된 것이므로, 그 「소(疏)」 3권을 중수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천보 5년(746) 2월에 ‘천보중주’에 일치되도록 부분 수정을 가하였다. 그런데 이미 원행충은 개원 17년(729)에 향년 77세로 세상을 떴기 때문에【원행충은 낙양의 사람으로, 이름은 담(澹), 박학하고 훈고에 통달하였다】, 그가 죽은 지 17년 후에 이루어진 소(疏)의 중수(重修) 작업은 그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 서안(西安) 비림박물관(碑林博物館)의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 탁본, 2008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됨. 620x132cm, 경대부장(卿大夫章)부터 성치장(聖治章)까지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자료제공
형병의 『효경정의』부터 주희 『간오』, 동정 『대의』까지
그래서 원행충의 「소(疏)」 3권이 불비한 점이 있다고 판단되어, 송나라에 들어서서 진종(眞宗) 함평(咸平) 3년(1000) 3월에 그 유명한 소(疏)의 대가 형병(邢昺)이 조(詔)를 받들어, 두호(杜鎬)ㆍ서아(舒雅)ㆍ손석(孫奭)과 더불어 교정(校定) 증손(增損)하였다. 이것이 바로 형병의 『효경정의(孝經正義)』 3권이다.
이리하여 현종의 『천보중주(天寶重注)』 1권과 형병의 『효경정의(孝經正義)』 3권을 합본하고, 그 앞에 형병 찬(撰)의 「효경주소서(孝經注疏序)」 75자와【孝經者, 百行之宗, 五敎之要.自昔孔子述作, 垂範將來, 奧旨微言, 已備解乎注疏. 尙以辭高旨遠, 後學難盡討論. 今特翦截元疏, 旁引諸書, 分義錯經, 會合歸趣, 一依講說, 次第解釋, 號之爲講義也. 이상 75字】 성도부학주향공(成都府學主鄕貢) 부주봉우찬(傅注奉右撰)의 「서(序)」 454자【‘夫孝經者, 孔子之所述作也’로 시작되는 문장】를 첨가하여 성립시킨 것이 현재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효경주소(孝經注疏)』 9권이다.
보통 ‘어주(御注)’라고 하면 ‘천보중주(天寶重注)’를 가리키며 ‘개원시주(開元始注)’는 중국에서도 망일(亡逸)되었다. ‘개원시주’는 다행히 일본에 보존되어 오늘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개원시주와 천보중주의 차이는 「서문」의 이동(異同)과 주문(注文)의 증감뿐이며, 경문(經文)의 변화는 없다. 하여튼 어주가 세상에서 통용되게 되자 공(孔)ㆍ정(鄭) 이주(二)는 모두 빛이 바래버렸고, 안타깝게도 오대(五代)의 난(亂)을 거치면서 모두 사라졌다.
그 후, 북송의 옹희(雍熙) 원년(984)에 일본의 승려 쵸오넨(奝然, ?~1016)【헤이안(平安) 중기의 토오다이지(東大寺)의 학승, 코오토(京都)의 사람. 983년에 입송(入宋), 송태종을 알현】이 태종에게 『정주(鄭注)』한 책을 헌상하였고, 태종은 이 책을 비부(秘府)에 장(藏)하였다. 이 비부에 소장된 『정주』본을 사마광이 참고하였다는 것은 앞서 이미 논하였다.
그리고 고문효경은 공전(孔傳)이 사라진 본문만 남아있는 좀 기묘한 판본이 송나라 비각(秘閣)에 보존되어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본문에 의거하여 『고문효경지해(古文孝經指解)』를 짓게 된 경위는 전술한 바와 같다. 사마광은 『지해』의 본문을 고문에 의거했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금문인 정주(鄭注)와 어주(御注)의 본문을 대폭 수용하였으므로 『지해』의 본문은 고문인 듯하면서도 고문이 아닌 좀 엉터리 잡탕이다. 도저히 고문효경이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에서는 이 사마광의 『지해』 본문을 ‘송본효경(宋本孝經)’이라고 부른다. 이 아리까리한 송본효경을 가지고 주자가 고문경의 모범이라 착각하고, 『효경간오(孝經刊誤)』라는 불행한 책을 지었고, 그 책의 체제에 따라 원나라의 동정(董鼎)이 『효경대의(孝經大義)』를 지었고, 바로 『효경대의』가 조선왕조의 『효경』의 대세를 장악하게 된 경위는 이미 상술한 바와 같다. 『효경』은 13경 중에서도 가장 주석의 종류가 많은 경전이기 때문에 『효경대의』 이후의 명ㆍ청대의 상황도 매우 복잡하지만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다. 『효경』 판본에 관한 대강의 틀은 다음의 사실만 머리속에 넣어두고 있으면 된다.
금문 今文 |
정주효경 鄭注孝經 |
당말(唐末)에 사라졌는데 송나라 태종 때 일본승 쵸오넨에 의하여 헌상되었다가 다시 사라짐.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판본들과 돈황자료로써 복원됨 |
어주효경 御注孝經 |
가장 확실하게 살아남음 | |
고문 古文 |
공전효경 孔傳孝經 |
당말에 사라졌는데 일본에 고판본이 남아 그 정체를 알 수 있다. 최고본은 『인치본고문효경(仁治本古文孝經)』(1241)이다. 인치 2년(1241) 키요하라노 노리타카(淸原敎隆, 1199~1265) 교점(校点), 나이토오 코난(內藤湖南) 박사 소장. 일본 국보 |
판본학에 바탕하지 않은 고전학은 구름누각
이상이 나 도올이 『효경』을 주해하기 위하여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하는 사전정보이다. 나 도올은 본시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사소한 고증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고증학의 실증이 없는 고전학은 사상누각이요, 판본학의 바탕이 없는 고전해독은 구름누각이요, 필로로지(philology, 문언학)의 공독이 없는 필로소피(philosophy, 철학)는 위선누각이다. 우리나라에서 나오고 있는 중국고전이나 한국고전에 관한 논문들을 보면 너무도 터무니없이 빈곤하고 부정확한 정보들이 횡행하고 있다. 나 도올의 문학(問學)이 아직도 미숙한데 그를 일일이 다 지적할 바가 아니나, 우리나라에 제대로된 국사사전 하나가 없다고 말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기초 공구서적이 부실하여 역사적 인물의 생몰연대 하나를 확실하게 인용키 힘들다. 더구나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고전의 문구해석의 임의성에만 치중하고 그 판본을 연구하거나 박학(樸學: 기초학문)적 분석을 가하는 치열한 노력들이 없다. 한마디로 ‘개구라’만 판을 치고, 엄밀한 과학적 학문방법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학문에 있어서 주관적 상상이나 이데올로기적 주장은 최후적ㆍ말엽적 사태이며 선행되어야 할 근본적 과제가 아니다. 그런데 기초학문이란 문자 그대로 고혈을 짜내는 노동이요. 시간싸움이다. 우리나라에는 웬일인지 이러한 기초학문에 뜻을 두는 자가 너무 없다. 꼼꼼한 바느질을 배우려는 자는 없고 허울좋은 디자인만 배우려는 세상이니, 학문 또한 그런 허울을 쓰고 구름 위를 활보할 뿐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명고(明皐) 서형수(徐瀅修, 1749~1824, 풍석 서유구의 작은 아버지)가 북학 사대가의 한 사람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에게 보내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조선왕조 400년간의 문치의 융성함을 통해 인재는 왕성하게 배출하였고 찬란하게 기록할 건덕지는 좀 있겠으나 유독 선비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竊嘗以爲我東四百年文治之隆, 人才之盛, 非不郁郁可述, 而獨無一箇儒耳. 『명고전집(明皐全集)』 「답이검서덕무(答李檢書德懋)」
거침없이 내뿜은 독설의 소이연을 지금도 절실하게 한번 생각해볼 만하다. 「유림전(儒林傳)」의 서문을 써달라는 이덕무의 부탁을 거절하면서 한 이야기인데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리기설은 시골 서당 훈장의 서탁까지도 휘덮고 있지만 『시경』이나 『서경』, 『춘추』를 펼쳐 놓으면 연륜이 쌓인 선비나 명망이 높은 대석학이라 하는 자들도 모두 꿀벙어리가 되고 만다[天人性命之理, 塗在鄕塾講案, 而詩書春秋之說, 偏寂於老成宿德].’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나라에는 선비라고 부를 수 있는 자가 너무도 료료(寥寥: 빈 허공에 샛별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희소)하다면서 편지를 끝맺고 있다. 그 절규를 지금도 한번 되새겨 볼 만하지 아니 한가?
나는 동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치열한 고증학의 방법을 배웠다. 나를 가르치신 선생님들의 대석학적 학식과 그 인품을 생각하면 항상 옷깃을 여미게 되고, 나도 후학들을 그렇게 가르쳐 주어야 할 텐데 하는 사명감이 가슴에 서리지만 이미 은퇴를 한 구각(軀殼)으로 어찌 할 바가 없다. 일본 근세석학들의 책을 보면 나는 내가 직접 배운 선생님들이거나, 그들의 사우관계에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 향기를 직접 느낄 수 있다. 그들이 기여한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존숭의 염은 우리가 지닐 필요가 없겠지만, 그들의 학문의 정직성과 엄밀성은 우리가 본받고 또 본받아야 한다.
나는 중국고전에 있어서 금문과 고문의 전통을 편견없이 수용하려고 노력하지만 대체적으로 고문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효경』을 기준으로 삼는 데 있어서도 당연히 고문효경이 그 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문『효경』이 『효경』의 본래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나는 『인치본고문효경(仁治本古文孝經)』을 본서의 텍스트로 삼았다. 인치본에 관한 해설은 하야시 히데이찌(林秀一)의 『효경학논집(孝經學論集)』 제3편을 참고해주면 한다. 그것도 엄청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논의하지 않는 것이 독자들의 피곤을 덜어줄 것이다. 인치본(닌지혼)을 수중에 구할 수가 없어, 인치본을 경문으로 사용한 다음의 두 책을 기준으로 하였다.
1. 하야시 히데이찌(林秀一), 『孝經』. 東京: 明德出版社, 1981.
2. 쿠리하라 케이스케(栗原圭介). 『孝經』. 東京: 明治書院, 2004.
그런데 우리나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텐메이(天明) 신축(辛丑, 1781)년 일본목판본(淸原宣條 校)이 키요하라 가문의 정본(淸家正本)이며, 인치본과는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그 대강의 틀을 계승하고 있다. ‘청가정본’이라고는 하나 후대의 교정을 거친 매우 세련된 판본으로 인치본의 모습과는 많이 멀어져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중에 조선총독부고서 청구기호 ‘古古1-29-72’로 되어있는 공안국전 『고문효경(古文孝經)』이 서지정보 미상이지만 인치본(仁治本)에 가장 가깝게 가는 정본이다【일본연활자본(日本鉛活字本)으로 간행연도는 에도 후기일 것이나 인치본을 옮긴 고본이다】. 관심있는 독자는 누구든지 국립중앙도서관의 인터넷 서비스를 활용하여 이 두 자료를 직접 열람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우수한 서비스 시스템에 나는 감복하였다. 관계자들의 노력을 치하한다.
▲ 이것이 내가 준거로 삼은 고문효경이다. 고문효경으로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고본일 뿐 아니라 가장 정밀한 본래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판본에는 「공서(孔序)」는 들어있지 않다. 인치(仁治) 2년(1241), 키오하라노 노리타카(淸原敎隆, 1199~1265)의 교점본인데 동양사학자 나이토오 코난(內藤湖南, 1866~1934)의 소장이 되었다가 1934년 일본국보로 지정되었다. 키요하라노 노리타카는 카마쿠라 학문 융성에 크게 기여한 대학자로서 본명은 중광(仲光), 쇼오군(將軍)의 시강(侍講) 노릇을 했다.
카마쿠라 중기의 무장 호오죠오 사네토키(北條實時, 1224~76)를 가르쳤는데, 사네토키는 키요하라의 도움을 입어 카네사와문고(金澤文庫)를 건립하였다. 키요하라는 대대로 박사 집안으로서 누대에 비전되어 내려오는 비본(秘本)에 의거하여 교점(校点)을 단행하였는데, 키요하라 판본이야말로 전사의 오류가 없이 원본에 충실하게 교감을 보아 가장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최고(最古)의 선본(善本)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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