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외부에서 온 인도의 통일
1. 분열된 조국과 통일된 식민지
남의 집에서 벌인 힘겨루기
18세기 중반 이후 무굴 제국은 1차 부도가 난 상태에서도 100년이나 더 존속하다가 1858년에야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이 기간 동안 무굴은 제국의 지위가 아니라 한낱 지방정권에 불과한 위상으로 그저 명맥만 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굴이 남긴 정치적 공백은 누가 메웠을까?
중국과 달리 인도의 역사는 통일 제국이 아니라 늘 분권화된 상태가 중심이었다. 그렇다면 인도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 쇠락했을 때 그 찬란한 통일의 빛만큼 짙은 분열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번은 그 이전의 어떤 분열기와도 달랐다. 과거의 분열은 기본적으로 인도 토착 왕조들이나 인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이 세력 다툼을 벌인 결과였지만, 이번에는 서구열강이라는 ‘외세’가 활개를 쳤던 것이다(그렇게 보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는 중국보다 인도에 먼저 찾아왔다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인도의 역사를 세계사에 합류시키는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그 외세였다.
무굴 제국 시대에도 남인도에는 유럽의 상인들이 세운 무역도시들이 번영을 누렸으나, 그때는 무굴의 힘이 강성했으므로 외세는 별다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 이제 무굴은 쇠약해졌고, 그 대신 유럽에서는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가 출범했다.
16세기에 탐험의 시대를 주도한 국가들보다 훨씬 힘센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를 대하는 자세도 예전과 달랐다. 더욱이 두 나라는 인도 곳곳에 무역 거점을 마련하기보다 큰 뭉텅이를 떼어내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으므로 인도 내에서도 자기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8세기 중반까지 인도에 진출한 영국과 프랑스는 힘이 서로 엇비슷했다. 그러나 한 집의 호주가 둘일 수는 없는 법, 먼저 호적을 정리하자고 한 것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국내에서 통한 중상주의 정책을 해외로 연장하기 위해 1741년에 뒤플렉스(Joseph-François Dupleix, 1697~1763)를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인 퐁디셰리의 지사로 파견했다. 인도에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는 게 그가 받은 지시이자 그의 야망이었으므로 그는 지사 따위에 머물려 하지 않았다. 1746년에 그는 프랑스 함대를 동원해 영국 세력의 근거지인 남인도의 마드라스를 함락했다. 이로써 인도 경영을 놓고 두 나라의 한판 승부가 불가피해졌다.
무대는 남인도의 카르나타카였다.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는 10여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다. 초기에는 프랑스가 우위를 보였으나 1757년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서기 로버트 클라이브 (Robert Clive, 1725~1774)가 이끄는 영국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전황이 결정되었다. 제국주의 시대답게 실력으로 화끈하게 승리한 영국은 상품으로 인도의 단독 최대 주주라는 지위를 얻었다.
물론 인도에 강력한 정치적 중심이 있었더라면 카르나타카 전쟁 자체도 없었을 테지만, 승리한 영국이라 해도 함부로 인도를 지배하려는 욕심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영국은 인도를 정치적으로 복속하려는 의도보다는 무역을 독점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나아가 인도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려는 의도가 훨씬 강했다. 그런 영국의 소박한 의도를 더욱 키워준 것은 바로 인도인들이었다.
카르나타카 전쟁은 유럽의 두 강대국이 엉뚱한 동방의 나라에 와서 힘을 겨룬 것이지만,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자연히 인도인들도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 전쟁에는 수많은 인도인이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고용되어 용병으로 참전한 터였다. 특히 전장이 된 카르나타카의 태수가 전쟁의 향방에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몇 차례 직접 병력을 동원해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 과정에서 말로만 듣던 유럽 군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들의 무력을 빌려 지역의 맞수인 하이데라바드를 물리칠 수 있다면……. 그러나 이것은 카르나타카 태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당연히 하이데라바드도 그럴 속셈이었다.
전쟁 기간 중에 두 나라의 속셈은 현실로 옮겨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카르나타카와 하이데라바드를 돕는 것이 곧 자기 세력의 확장이었으므로 전쟁의 일환으로 두 나라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전쟁이 묘한 양상으로 변하자 점차 남인도 대부분의 나라들도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잖아도 인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서구 열강을 자기들끼리의 다툼에 끌어들였으니 결과는 뻔했다.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의 지원을 받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프랑스 측에 붙은 나라들도 전부 영국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해버렸다.
▲ 인도의 최대 주주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를 무찌른 뒤 동인도회사의 서기 클라이브가 무굴 황제에게서 징세권과 재정권을 상징하는 디와니를 받고 있다. 이로써 영국은 일개 기업을 통해 인도를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었다.
나라를 내주고 얻은 통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은 남인도가 무대였지만, 영국의 승리를 결정지은 전투가 벌어진 플라시는 인도 동북부 벵골의 한 지방이었다(영국은 이미 전쟁 전부터 벵골의 중심지인 캘커타[2000년 콜카타로 이름을 고침]에 진출해 있었다). 이는 곧 전후 영국의 지배가 남인도에만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사실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은 한낱 30대 초반의 병참장교에 불과한 클라이브의 공적만이 아니었다. 당시 벵골의 장군이었던 미르 자파르(Mir Jafar, 1691~1765)는 벵골의 태수 자리를 노리고 영국을 적극 지원했다. 현직 태수와 미르 자파르의 싸움은 곧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이 벵골 내부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았다.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자연히 미르 자파르는 현직 태수를 누르고 벵골의 새 태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르 자파르가 애초에 원한 태수 자리와 너무도 달랐다. 이미 벵골의 실제 새 주인은 영국이었던 것이다. 그는 영국군에 상당한 보상금을 지급해야 했고(실제로는 그가 영국의 용병인 셈인데, 명분상으로는 엉뚱하게도 그가 자신의 쿠데타를 위해 영국군을 고용한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동인도회사에 캘커타 인근의 영토를 양보해야 했다.
예상과 다른 현실에 좌절한 미르 자파르는 태수직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동인도회사는 후임으로 미르 카심(Mir Kasm)을 앉혔다. 하지만 그것은 회사 측의 판단 착오였다. 미르 카심은 취임한 초기에 동인도회사에 영토를 양도하는 등 고분고분하게 행동했으나 속셈은 따로 있었다. 그는 이내 관세 수입을 놓고 동인도회사와 엇각을 빚다가 1763년 동인도회사와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판단 착오였다. 그는 결국 패배하고 벵골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미르 카심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듬해 그는 벵골 서쪽의 오우드(oudh), 무굴과 손잡고 벵골을 탈환하기 위해 영국에 재차 도전했다. 이 북사르 전투는 북인도의 거의 모든 토착 세력이 힘을 합쳐 영국에 도전한 것이었으나 결과는 또다시 참패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영국은 벵골을 방어하는 수세적 입장에서 벗어나 북인도 전역을 제패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인도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는 마라타뿐이었다. 무굴 제국의 후예로 자처하던 마라타는 당시 인도의 여느 나라들과 달리 상당한 강국이었으나 영국의 상대가 되기는 어려웠다. 마라타의 수명이 연장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동인도회사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예상외로 너무 손쉽게 남인도에 이어 북부의 벵골까지 손에 넣은 동인도회사가 소화불량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벵골은 이제 영국의 괴뢰정권이 아니라 아예 식민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비록 벵골을 먹었다고 해도, 또 아무리 국책회사라고 해도 동인도회사는 어디까지나 회사일 뿐이었다.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동인도회사는 영국 최초의 주식회사였다)가 한 나라를 정치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으니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65년 벵골 지사로 취임한 클라이브는 이중 통치 제도를 시행했다. 겉으로는 기존의 통치 기구를 그대로 둔 채 안으로는 경제 관료들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이익을 빼내는 것이다. 대내외적으로 인도를 지배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최대한의 실익을 챙길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 외세와 결탁한 미르 자파르 플라시 전투가 끝난 직후 미르 자파르가 클라이브와 만나는 모습이다. 미르 자파르는 영국군을 끌어들여 자신이 권력을 잡는 데 이용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이용당한 것은 그였다. 민족의식과 통일 의지가 없었던 당시 인도 역사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처음 몇 년간은 만사가 순조로웠다. 영국에서는 인도에서 돈을 많이 벌어 귀국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상류층의 파티에서도 인도 이야기가 단골 화제로 올랐다. 그러나 회사 직원이나 인도에 파견된 회사 소속의 군인들이 그랬다는 것이고, 회사 자체는 사정이 달랐다. 동인도회사는 예전에는 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면, 이제는 세 수입을 더 노리게 되었다. 이것은 주식회사의 업무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수익을 낳는 분야가 늘었으니 회사의 재정은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동인도회사의 직원들은 온갖 불법과 탈법으로 개인적인 부만 쌓았으므로, 회사 전체의 이익은 예상만큼 크지 않았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경비만 늘어났다. 급기야 동인도회사는 큰 적자를 내게 되었고, 은행 융자로 적자폭을 메우는 전형적인 ‘부실기업’으로 변했다. 그렇잖아도 회사에서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영국 정부가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1773년 영국 의회는 노스 규제법(노스North는 당시 영국의 총리였다)을 제정해 동인도회사로부터 인도 통치권을 박탈했다. 이때부터 인도 통치권은 영국 정부로 귀속되었다. 아울러 동인도회사 소속의 ‘회사원’ 신분이던 벵골 지사는 총독이라는 ‘공무원’ 신분으로 바뀌면서 마드라스와 봄베이(지금의 뭄바이)까지 통필하게 되었다. 이제 영국은 이중 통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정식으로 식민지 지배에 나선 것이다.
어쨌든 동인도회사와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북인도는 통일을 이루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무굴 제국이 쇠약해진 18세기 중반 이후 분열 상태에 빠진 북인도를 영국이 다시 통일해준 셈이다. 그렇다면 당시 인도인들은 분열된 조국과 통일된 식민지 가운데 어느 쪽을 더 반겼을까?
▲ 캘커타의 인도 총독부 벵골을 정복한 영국은 캘커타에 식민지 총독부를 세우고 직접 지배에 나섰다. 이제 인도는 영국의 경제적 지배만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까지 받는 ‘정식’ 식민지로 전락했다.
최후의 보루가 무너지다
인도 전체를 통틀어 아직 영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 최후의 세력을 꼽자면 마라타가 있었다【실은 카르나타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남인도에는 영국에 당당히 맞선 나라가 있었다. 마이소르(Mysore)라는 왕국이었다. 마이소르는 특히 하이데르 알리와 그의 아들 티푸 술탄이 지배하던 18세기 후반에 남인도에서 영국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일찍부터 영국의 진출에 위협을 느낀 하이데르와 티푸는 군대를 근대화하고 내정을 개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들은 당시 인도인으로서는 드물게 국제적인 안목을 지니고 있어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인근의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으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특히 티푸는 유럽에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을 때 스스로 자코뱅당에 가입하는 등 특이하다 할 만큼 세계사의 흐름에 밝았다. 그러나 동맹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무래도 소국인 마이소르는 1799년 영국의 총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했다】. 마라타는 무굴 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한 시기부터 무굴의 뒤를 이어 인도의 통일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강력한 후보였다. 비록 파니파트 건강에서의 패배로 한때 주춤했으나 마라타는 거뜬히 세력을 회복하고, 북사르 건투에서 영국이 무굴 제국을 복속시키는 와중을 틈타 델리 지역까지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왕국에서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한 문턱은 상당히 높았다. 그냥 ‘큰 나라’와 통일 제국의 차이는 중심이 얼마나 강력한가에 달려 있다. 강력한 중심이 없었던 마라타는 영토가 늘어나면서 통일은커녕 오히려 분열되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정복 전쟁에 참여한 지휘관들이 새로이 병합한 지역에 아예 눌러앉아 거의 독립 군주처럼 행세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라타 본국에 반기를 들지 않고 적극 협조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마라타는 일종의 연합 형태가 되어 마라타 동맹이라 불리게 된다.
마라타 동맹이 강성해지자 영국과의 한판 승부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양측 사이에서 오우드가 완충 역할을 하고 있어 충돌은 다시 지연되었다. 영국은 북사르 전투 이후 오우드를 정치적으로 지배하려 하지 않고 영국의 영향력 아래 그냥 놔두었던 것이다. 당시 영국으로서는 오우드를 정복하는 것보다 벵골의 내정을 안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굳이 오우드를 병합해 대내외적으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었다【오우드를 이렇게 처리한 것은 영국이 해외 식민지들을 개척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식민지 통치의 노하우였다. 또한 영국은 그 전쟁의 또 다른 패전국인 무굴 제국의 황제도 최대한 예우했다. 영국은 무굴의 황제에게 영지를 알선하고 연금까지 주었다. 그러나 그 제국주의적 노하우는 한계가 있었다. 무굴 황제는 그렇잖아도 유명무실한 존재로서 과거의 영화만 꿈꾸며 살고 있었는데, 아예 서방 적국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으니 심기가 편할 수 없었다. 때마침 마라타의 초대를 받자 그는 그 기회에 마라타가 장악한 델리로 돌아갔다. 이 사건으로 마라타와 영국 간에 감돌고 있던 전운이 더욱 짙어졌다】.
▲ 친일과 ‘친영’ 식민지 시대에는 본국과 결탁한 자들이 득세하게 마련이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지방 유력가들은 집에 영국군 장교를 초청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애썼다. 우리의 식민지 시대에 친일파는 민중에게 배척당했지만, 단일 국가라는 의식이 약했던 인도에서는 ‘친영파’라 해서 특별히 비난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저울의 균형은 잠시뿐이고 결국은 한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마라타 동맹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균형이무너졌다. 1775년 마라타의 권력 다툼에서 밀린 세력이 봄베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에 도움을 청하면서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영국은 인도에 진출한 이후 첫 패배를 기록했다.
전쟁의 결과가 충격적인 탓에 여파도 컸다. 전쟁에서 발생한 재정적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초대 벵골 총독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 1732~1818)는 완충국인 오우드를 공격해 영토의 일부를 빼앗았는데, 그 때문에 그는 본국에 송환되어 탄핵 재판을 받았다. 본인에게는 불행이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벵골 총독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그 덕분에 헤이스팅스의 후임인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1738~1805) 총독은 벵골의 내정에 개입해 상당한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다.
3대 벵골 총독인 웰즐리(Richard Colley Welesley, 1760~1842) 때부터 영국은 본격적인 영토 확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관심의 초점은 역시 마라타였는데, 이번에도 또다시 마라타의 내분으로 실각한 세력이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시작이 1차전과 비슷했던 탓인지 이 2차전에서도 영국은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끝내 마라타를 정복하지는 못하고 흐지부지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오히려 이 전쟁으로 인해 인도 전역에서 반영(反英) 정서가 격화된 탓에 영국은 본전도 찾지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행운의 연속으로만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마라타가 지원하는 핀다리라는 도적 떼가 영국령까지 진출하자 1817년 영국은 이들을 소탕한다는 구실로 3차전을 일으켰다. 1ㆍ2차전 때처럼 우연한 계기로 전쟁을 시작한 게 아닌 만큼 이번 전쟁은 종전과는 양상이 크게 달랐다. 비록 반영 감정이 들끓고 반영 연합까지 수립되었지만 애초부터 무력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마라타로서는 영국의 전면전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전쟁이 재개된 지 몇 개월 만에 마라타 동맹은 해체되었다. 중부 인도 전역의 모든 왕국은 멸망하거나 영국의 군사 보호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했고 독립국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로써 아프가니스탄의 세력권인 인더스 강 유역을 제외한 인도 대륙 전체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었다. 인도에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지 200여 년 만에 영국은 드디어 인도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 합의된 내분 인도 제후들과 영국 측 인물들이 모여 협상을 벌이고 있다. 영국은 마라타 동맹을 내분시켜 정복하려 했으며, 마라타 동맹의 일부 세력은 기꺼이 ‘내분되고자’ 했다.
식민지적 발전?
영국의 ‘정식’ 식민지가 되었으니 이제 그에 걸맞은 통치 기구가 필요했다. 인도에 영국식 관료 행정 기구를 이식하는 작업은 벵골을 식민지화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나치게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부패와 착취만을 일삼은 동인도회사의 짧은 통치 경험은 영국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1772년 동인도회사의 벵골 지사로 파견되었다가 운 좋게도 정부의 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느닷없이 총독(벵골 총독)으로 신분이 상승한 헤이스팅스와 그 후임 총독인 콘월리스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두 총독이 지배하던 시기에 벵골의 식민지 행정은 확고한 골격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 전 인도 지배에도 관철된다.
벵골에서 영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관리들의 급료를 챙겨주는 것이었다. 동인도회사 시절에는 직원들이 ‘알아서’ 급료를 해결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부패와 불법 행위가 극심했다. 이제 인도를 지배하는 것은 회사가 아니라 정부였고, 그 우두머리부터 정부의 녹을 받는 공무원이 되었으니 부하들도 그래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관료제의 윤곽을 갖춘 뒤에는 치안 유지가 과제였다. 그전까지 인도에서는 각 지역에 자리 잡은 자민다르(zamindar)라는 지주들이 사병 조직을 운영하면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자민다르는 말 그대로 ‘토지(zamin) 소유자(dar)’라는 뜻이지만, 전통적으로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토지를 소작으로 내주고 지세를 받았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를 가리키기도 했다. 치안을 담당한 것도 여기서 유래된 역할이다. 그 역할이 중지된 이후에도 자민다르는 영국 정부로부터 특권층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1947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지위를 유지했다】. 식민지 총독부는 이 사병 조직들을 해체하고 그 대신 공적인 경찰 기구를 설치했다.
그러나 영국이 행정 기구를 개편한 것은 인도 진출의 동기였던 경제적 이익을 착취하는 데 기본적인 목적이 있었다. 동인도회사에서 정부로 관리 주체가 바뀌었다 해도 영국의 그 기본 의도는 항상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식민지 총독부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구는 세무국과 상무국이었다. 상무국이 예전의 동인도회사와 같은 역할을 대신했다면, 세무국은 식민지로 탈바꿈한 인도에서 얻어지는 새로운 이득, 즉 세 수입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다. 이제 영국은 경제적 이익만이 아니라 정치적 지배에서 얻는 이익도 거두기 시작했다.
근대적인 세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세 대상이 근대화되어야 했다(앞서 중국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양세법兩稅法이나 일조편법一條鞭法 같은 세제 개혁은 모두 과세 대상을 표준화한다는 게 기본 취지였다). 이를 위해 벵골의 식민지 총독부는 기존의 자민다르가 소유한 토지를 경매 입찰에 부쳤다. 말하자면 가장 많은 세금을 내겠다는 사람에게 토지를 넘겨주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차적으로 세수를 계산 가능하게 만든 다음에는 세제를 더욱 단순화시키는 수단으로 1793년부터 영구 정액제를 실시했다. 해당 토지에 한 번 정해진 세금은 이후 언제까지나 정액으로 고정된다는 의미다. 이 조치에 따르면 자민다르가 자신의 소유지 내의 토지를 개간해 새로 얻는 소득은 모두 그가 차지하게 되므로 기업가적 정신을 지닌 근대적인 지주상이 확립될 수 있었다(하지만 당시 식민지 총독부는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겠다고 나선 게 아니라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대단히 복잡해진 인도의 세금 제도를 단순화해 관리 가능한 것으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개혁을 실시한 것이었다. 결국 서구적 근대화의 요체는 단순화와 계량화에 있다).
벵골에서 정해진 행정의 기본 방침은 영국이 인도 전역을 통일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벵골 총독은 인도 총독으로 격상되었으며, 각 지방마다 영국식 입법부와 사법부가 설치되었다. 이리하여 인도는 식민지 지배를 받는 입장이기는 해도 서서히 근대 국가의 기틀을 갖추어갔다.
▲ 인도 총독들 인도가 우리의 식민지 역사와 다른 점은 영국에서 부임해온 인도 총독들이 일본의 조선 총독들에 비해 훨씬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해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한 데 비해, 영국은 인도에서 경제적 이득을 보는 데 만족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와 일반 제국주의의 차이다. 식민지적 지배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콘월리스(왼쪽)와 벤팅크(오른쪽)는 인도의 근대화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러나 근대화를 추진하는 주체가 영국이었으므로 ‘영국화’도 자연스럽게 추진되었다. 초대 인도 총독인 벤팅크(william Bentinck, 1774~1839)의 통치는 근대화와 영국화의 양면을 잘 보여준다. 그는 여러 가지 복지 정책을 실시했고, 인도인을 공무원으로 채용해 승진도 가능하게 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따라 죽는 사티(sati)와 같은 전근대적이고 불합리한 관습도 뜯어고쳤다. 여기까지가 근대화라면 영국화의 사례는 영어 교육 시행령이다. 인도에 영어 교육을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10년간 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끝에(이슬람 세력이 주로 반대했고, 힌두교 세력이 지지했다) 1835년에 벤팅크는 영어 교육을 채택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뒤부터 인도인들은 사고와 행동방식에서 영국인처럼 변했고,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영국은 자연스럽게 인도를 정신적으로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근대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된 분열기, 그리고 분열기마다 되풀이된 전란과 약탈은 사라졌고, 국내의 치안과 질서도 크게 안정되었다. 농민들은, 생활이 나아졌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근대적인 법 개념이 도입됨으로써 적어도 예전과 같은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지주들의 지배로부터는 벗어났다【이런 ‘문화 통치’가 연착륙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인도에서는 오늘날에도 영어를 사용하는 게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심지어 인도인들끼리 대화할 때 영어를 쓰지 않으면 교양인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도는 과거의 지배자인 영국에 대한 적대감이 크지 않을 뿐 아니라 현재도 영국연방에 속해 있다. 일본도 한반도를 지배할 때 일본어를 사용하게 했는데, 영국과 달리 일본은 일본어 교육을 도입하는 데 그친 게 아니라 아예 식민지의 말과 글을 금지했다】.
▲ 사티 사티는 인도인들이 따르던 고대의 『마누 법전』에도 명시되지 않은 악습이었다. 그림은 사티 관습에 따라 죽은 남편의 뒤를 따르려는 여인을 주변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있는 장면이다. 인도 총독 벤텅크는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사티를 법으로 금지했다.
그렇다면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함으로써 오히려 발전을 이룬 걸까? 이것을 이른바 식민지적 발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남의 나라에 주권을 넘겨주고 나서 달라진 것을 발전이라 부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인도는 애초부터 하나의 통일된 나라가 아니었다(지금까지 우리는 인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인도를 마치 하나의 나라인 것처럼 취급했지만, 사실 인도는 나라라기보다는 한 지역, 아대륙의 명칭이다).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인도는 역사적으로 통일기보다 분열기가 압도적으로 길고 많았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분열이 비정상적이었으나 인도의 역사에서는 통일이 오히려 비정상이었다. 인도는 ‘주권’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었으므로(나라가 아닌 대륙, 문명권에 주권이라는 말을 쓸 수는 없으니까) 영국에 주권을 넘겨준 게 아니었다.
3500여 년 전에 인도로 들어온 아리아인, 2000년 전의 쿠샨족,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인도를 장악한 델리 술탄, 아프가니스탄과 터키의 이슬람 세력, 그리고 무굴 제국에 이르기까지 인도를 지배했던 역대 왕조들은 대부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민족들이었다. 어떤 면에서 인도의 역사는 인도라는 넓은 지역을 무대로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민족이 번갈아 주인공으로 출연한 변화무쌍한 ‘이민족의 드라마’였다. 그 과정에서 일관된 인도의 모습은 힌두교라는 종교로만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희석되고 혼합되었다.
통일된 중심이 없으므로 인도에서는 분열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영국의 지배가 순조로이 먹혀든 것이었다. 사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을 영국 제국주의의 일관된 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이 점에서도 영국의 인도 정복은 일본의 한반도 정복과 크게 다르다). 영국은 프랑스, 인도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에 대해서 내내 소극적인 태도였으며, 오히려 인도가 평화로워져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기 좋은 환경이 되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벵골을 차지한 뒤부터 영국은 원하든 원치 않는 인도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가장 큰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인도는 오랫동안 이민족의 침탈을 겪었으나 서양 세력의 지배는 처음이었다. ‘서방의 이민족’은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어차피 인도의 역사는 이민족을 수용하는 역사였다. 강력한 중심을 향해 주변 세력이 결집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변 약소 왕국들이 동인도회사에 접근했고 자신들 간의 내분에도 영국을 끌어들인 것이다. 그것을 반민족 행위라든가 매국노의 짓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인도를 단일민족의 관점에서 잘못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국은 단지 과거에 인도 역사에 등장했던 큰 제국들이 수행한 역할을 했을 뿐이며, 당시 인도인들로서도 거의 그렇게 받아들였다고 보면 된다.
▲ 식민지의 흔적 이 건물은 19세기 초반에 세워져 1911년 인도의 수도가 델리로 옮겨갈 때까지 근 100년이나 총독 관저로 이용되었다. 현재의 수도 뉴델리는 델리로 수도를 옮긴 뒤 그 남쪽에 20년 동안 건설하여 완공한 신도시다. 서울의 조선총독부는 1995년에 헐렸지만 이 건물은 현재도 서벵골의 주지사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2. 간디와 인도 독립
민족의식에 눈뜨다
근대화에는 빛과 그늘이 있다. 식민지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영국의 산업혁명은 영국을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로 끌어올린 동시에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아동 노동으로 악명을 날리게 했다. 주체적 근대화를 이룬 서구세계에서도 그럴진대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을 거친 인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근대적인 지세 제도가 들어서면서 인도의 전통적 관계는 뿌리째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토지 소유자가 자기 재산에 해당하는 만큼의 세금을 낸다는 원칙은 영국에서 보면 지극히 간단하다. 그러나 근대적인 토지 소유 관계에 익숙하지 못한 전통의 지주들은 당혹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엇보다 사유지에 대한 관념이 미약하다. 그냥 ‘이 언덕에서부터 저 강변까지가 내 땅’인 것이지, 내 땅의 정확한 경계선 같은 것은 없다. 그래서 영국은 우선 토지 조사를 실시해 토지에 관한 제반 사항과 소유 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했다. 지주가 자신의 소유권을 서류로 제출하지 못하는 토지는 가차 없이 경매 입찰에 부쳤다【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 1910년대 일본도 한반도 토지 조사 사업에서 그랬다. 일본은 가혹한 식민지 수탈로 일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토지 소유 관계를 일체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왕조시대까지 한반도에는 왕토 사상에 따라 토지를 사유하는 제도가 없었는데, 일본은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전통적인 소유(이 언덕에서 저 강변까지)를 인정해도 정밀한 측량으로 거기서 누락되는 공지가 생기게 마련이므로, 일본은 그 땅을 국유화해 일본의 이주민들에게 값싸게 팔아넘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각 지방의 중소 지주들이 몰락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다고 자영농이 성장한 것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새로운 기생 지주들이 등장해 그 자리를 메워 버린 것이다. 그 조치 때문에 희생된 것은 오히려 인도의 전통적인 촌락 공동체와 향촌 지배 양식이었다. 때마침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공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한 상태였다. 이 무렵부터 인도는 식민지의 1단계 영국의 원료 공급지)와 2단계(세금 수탈지)를 거쳐 3단계인 자본주의적 시장으로서 역할하게 되며, 마침내 어느 지식인의 입에서 셰익스피어와 견줄 수 있는 국보로 간주된다(토머스 칼라일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 영국 상품의 주요 소비자들이 바로 신흥 지주들이다.
근대화의 그늘이 깊어지면서 비로소 인도에도 근대적인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영국이 인도에 베푼 가장 큰 공헌은 근대화의 빛이 아니라 바로 그늘에서 자란 민족의식일 것이다. 그로 인해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반란이 부쩍 잦아졌다. 그 정점은 1857년에 터진 세포이(sepoy)의 반란이다.
세포이란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고용한 인도인 용병을 가리키는 말인데, 벵골군의 절반가량이나 차지했다. 세포이들은 그전부터 군대 내에서도 통용되는 카스트 관습 때문에 영국 측과 마찰이 있었고, 대우에서도 불만이 많았다. 또한 그들은 영국이 오우드 문제를 처리한 방식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세포이의 3분의 1은 오우드 출신이었는데, 당시 영국은 오우드를 강제 병합하여 폭정을 펼쳤다).
▲ 용병들의 애국심 세포이의 반란에는 인도의 시민과 농민 들만이 아니라 봉건지주층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 사건은 인도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각시켰기 때문에 인도 역사상 최초의 독립 전쟁으로 간주된다. 독립운동의 첫 테이프를 하필 영국에 고용된 용병들이 끊었다는 점이 공교롭다.
반란의 계기는 사소한 데서 터져 나왔다. 바로 총기 소제용 헝겊이 문제였다. 병사들은 이것을 대개 입으로 물고 적당히 찢어내 총기를 닦았는데, 이 헝겊에 칠해진 기름이 쇠기름과 돼지기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동물이고, 이슬람교도는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다. 가뜩이나 영국이 카스트의 관습을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세포이들은 영국이 자신들을 모독하려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더구나 영국군 장교들은 그런 소문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그 헝겊을 사용하라고 강요했다. 때마침 영국이 인도를 아예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려 한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돌았다(세계 대다수 나라에서 종교는 단지 신앙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다).
1857년 5월, 참다못한 벵골의 세포이들이 먼저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봉기는 순식간에 벵골에서 오우드의 러크나우와 칸푸르 등지로 퍼졌으며, 이내 전국적인 반영운동으로 이어졌다. 세포이들은 그때까지 명맥이 붙어 있던 무굴 제국의 황제를 내세우고 제국의 부활을 선언했다. 그러나 상징에 불과한 무굴 황제가 세력 결집의 실제 우두머리가 될 수는 없었다. 반란이 일어난 후 1년간 세포이들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제법 세력을 떨쳤으나 그 뒤부터는 지리멸렬한 끝에 진압되고 말았다.
세포이의 반란으로 인해 인도에서는 두 가지가 사라졌다. 먼저 그동안 과소평가해온 인도인의 민족의식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게 된 영국은 인도인의 상징적 중심인 무굴 제국을 없애버렸다.
이로써 무굴 제국은 영국의 진출 이후 100년 간 굴욕에 찬 명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또한 동인도회사가 사라졌다. 벵골을 장악한 이후 동인도회사는 영국 정부의 명령과 간섭을 받으면서도 인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의회는 더 이상 회사 체제로 식민지를 지배할 수 없음을 통감하고, 동인도회사를 해체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동인도회사가 사라졌으니 이제 인도는 총독 정도로 통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국 정부는 내각에 인도 담당 장관을 두고, 인도에 총독이 아닌 부왕(副王)을 파견하게 되었다. 부왕이 있다면 그 상급의 왕, 즉 황제도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굴까? 바로 영국 국왕이다. 그리하여 1876년 영국 여왕 빅토리아(Victoria, 1819~1901)는 인도 황제를 겸하게 되었으며, 인도는 인도 제국으로 격상되었다(왕국이 제국을 거느린 격이지만 중세 신성 로마 제국과 여러 왕국의 관계에서 보듯이 원래 서양의 역사에서는 제국과 왕국이 수직적 질서를 맺지 않는다). 제국에 걸맞게 영국은 인도에 대해 유화정책으로 돌아서 인도의 관습과 전통적인 제도, 종교 등을 존중하고 인도인에게 차별 대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세포이의 반란으로 싹튼 민족의식의 불씨는 괴뢰 제국을 세운다고 해서, 혹은 유화책으로 조금 더 나은 대우를 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영국군의 대량 학살과 잔혹 행위는 인도인들의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증오의 씨앗을 남겼다.
▲ 초대 부왕 세포이의 반란을 계기로 영국은 그간 말썽이 많았던 동인도회사를 없애고 인도를 직접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총독 대신 부왕이 파견되었는데, 사진은 초대 부왕으로 임명된 캐닝(Charles Canning)이다. 그러나 부왕은 직책에 불과할 뿐 실제로 인도를 다스린 것은 여전히 총독이었다.
독립과 동시에 분열로
애초부터 인도인들의 반영 감정을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해 실시된 유화책은 오래가지 못했다. 1880년대 영국에서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의 자유당 정부가 집권하면서 정점에 달한 유화책은 그 이후부터 본격적인 반동으로 돌아섰다. 급기야 영국은 인도의 영토마저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03년 영국은 행정을 개선하다는 명목으로 벵골을 동과 서의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서벵골은 캘커타가 중심이고, 동벵골은 아삼 지방, 그러니까 지금의 방글라데시가 중심이었다. 인종도 벵골인으로 같고 언어도 벵골어로 같은 데다 특별한 지리적 경계선마저도 없는 지역을 왜 굳이 둘로 나누었을까? 서벵골은 힌두교권이었고 동벵골은 이슬람교권이었다는 점을 알면 영국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영국은 종교를 핑계로 벵골을 분리함으로써 인도인의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고 분쇄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제 인도에서도 민족의식이 싹튼 지 50여 년이나 지났으므로 인도인들도 예전처럼 녹록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인도국민회의라는 민족적 단체를 결성한 터였다. 국민회의는 1885년에 영국의 관변 단체로 출범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 운동을 이끄는 조직으로 변모했다.
벵골 분리 계획은 즉각 국민회의를 비롯해 인도인 전체의 국민적 반발을 샀다. 인도인들은 스와데시(Swadeshi) 운동으로 맞섰다. 인도 국산
품을 애용하고 영국 상품을 배격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절정에 달한 1905년에는 외제 옷을 입고서 감히 거리에 나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결국 영국은 국왕 조지 5세(George V, 1865~1936)가 인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벵골 분리 계획을 정식으로 취소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했다(그러나 벵골 분리 계획은 장차 방글라데시의 분리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뒤 한동안 영국과 인도는 그럭저럭 무난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바깥에서 그 관계를 재정립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사태가 터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전쟁이 터지자 영국은 인도에 지원과 지지를 요청했다. 도움을 받으면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 영국이 제시한 대가는 인도의 스와라지(Swaraj, 자치)였다.
▲ 세계대전에 참전한 인도군 유럽 전선에 투입된 인도군의 모습이다. 식민지 군대가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인도는 자치를 얻는 조건으로 영국의 요구에 따라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인도는 모두 14만 명의 병력을 유럽 전선에 파견했으나 영국은 자치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때마침 국제사회에서는 윌슨(Woodrwo Wilson, 1856~1924)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약소민족의 자결권 보장이라는 구호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를 비롯한 당시 지도자들은 영국의 약속을 믿고 130만 명의 용병을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에 자원군으로 보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17년 인도 장관 몬터규(Edwin Samuel Montagu, 1879~1924)의 성명이 발표되었을 때 인도인들은 이제야 진정한 자치가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인도인들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종전 직후인 1919년에 공포된 인도통치법에는 도저히 자치라고 부를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영국은 납세자만이 선거권을 가진다는 서구적 원리를 악용해 인도인(그것도 남성)의 10퍼센트에게만 참정권을 허용한 것이다. 더구나 약속한 언론 결사의 자유 등은 마치 없었던 일처럼 무시되었다. 영국은 전보다 더욱 강경한 방침으로 돌아섰다.
오로지 자치 하나만 믿고 막대한 전쟁 지원금까지 부담한 인도인들은 잠시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나 남이 내 나라를 독립시켜줄 수는 없는 일, 그들은 다시 반영운동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1920년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는 영국에 대해 대대적인 불복종운동을 선언했다. 흔히 비폭력운동이라 알려져 있어 마치 소극적인 저항처럼 여겨지지만, 실상 이 운동은 영국의 법률을 준수하지 말고 납세마저도 거부하자는 적극적인 운동이다.
당황한 영국은 전통적인 분리책을 추구하면서 이슬람 연맹을 회유하려 했으나, 이것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이미 인도인의 저항은 종교를 넘어선 거국적인 규모였던 것이다. 오히려 이슬람 세력과 간디는 그 일을 계기로 서로 협력을 취하기로 약속했는데, 이것이 힐라파트(Khilafat) 운동이다.
인도판 ‘국공합작’이라고 할 만한 힐라파트 운동이 끝까지 지속되었다면 오늘날의 파키스탄은 없었을 것이다. 인도의 전 역사를 통틀어 통일을 저해하는 고질병이던 종교상의 차이는 영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최소로 좁혀들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중국의 국공합작을 가로막은, 불리할 때는 쉽게 단결하지만 유리할 때는 쉽게 분열하는 현상은 인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합작을 깼다면 인도에서는 국민회의가 그 역할을 맡았다. 1937년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국민회의는 혼자 힘만으로도 단독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자 이슬람과의 합작을 거부해버렸다. 이슬람 측에서 보면 명백한 배신 행위였다. 이것을 계기로 힐라파트 운동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힐라파트 운동은 원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들이 패전한 오스만튀르크(터키)를 해체하려 했을 때 위기를 느낀 이슬람 교도들이 칼리프를 지키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간디가 이 운동을 지원하는 대신 이슬람 세력이 간디의 비폭력운동을 지원한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국민 회의가 배신하자 실망한 인도의 이슬람교도 수만 명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집단 이주했고, 또 힌두교도들은 그들의 과격한 행동에 분노하는 바람에 양측은 결국 갈라서고 말았다】.
갈라설 명분만 노리고 있던 이슬람 측에 구실을 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다시 영국은 인도의 협조가 필요해졌다. 그런데 지난번에 골치 아픈 일을 겪은 탓인지 이번에는 협조를 요청하기는커녕 아예 처음부터 인도를 연합국 측으로 등록시키고 인도의 이름으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약속 위반을 괘씸하게 여긴 인도인들은 격분했다. 국민회의는 즉각 협조를 거부하고 모든 각료가 사퇴해버렸다. 그런데 이 정치 공백이 엉뚱하게도 이슬람 연맹 측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힐라파트 운동에서 힌두 세력이 배신했다면 이번에는 이슬람 세력이 배신할 차례다. 이슬람 연맹의 지도자인 진나(Mohammed Ali Jinnah, 1876~1948)는 재빨리 파키스탄이라는 새 국가를 수립하고 영국에 파키스탄을 승인해준다면 협조하겠다고 제안했다【파키스탄(Pakistan)은 만들어진 과정도 그렇지만, 나라 이름도 전통적인 지역의 이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다분히 인위적이다. 즉 펀자브(p), 아프간(a), 카슈미르(k), 신드(S) -모두 지명이다-의 나라(stan)라는 뜻이다. 원래는 1933년 영국에 유학 중이던 인도의 이슬람교 학생들이 처음 만든 용어였다】. 때마침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이 인도를 위협하자, 간디는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난다면 자신들이 직접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본과 싸우겠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영국은 둘 중 협조하겠다고 나선 이슬람 연맹 측에 접근했다.
이제 두 가지 대세는 막을 수 없게 되었다. 영국으로서는 인도의 독립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로서는 파키스탄의 분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가 가시화될 무렵인 1944년 간디는 진나와 회담을 갖고 독립이 먼저라고 주장했으나 진나는 분리가 먼저라고 맞섰다(이것도 중국의 국공합작이 깨진 과정과 비슷하다), 협상이 결렬되면서 국민회의에서 간디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줄었고, 새 지도자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는 분리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200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종식시키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쪽의 승리였다. 독립과 동시에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한 몸이었던 파키스탄이 분리되어 나간 것이다. 인도에서는 네루가 초대 총리에 올랐고, 파키스탄에서는 진나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 인도 통일의 마지막 보루였던 간디가 암살됨으로써 인도와 파키스탄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 민족 지도자 간디 간디는 폭력보다도 강한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영국의 지배에 맞섰다. 하지만 그는 조국이 200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끝내고 해방되자마자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해방과 동시에 온 분열을 막으려 애쓴 점에서, 그리고 그 와중에 반대파의 총에 암살되었다는 점에서 간디는 우리의 민족 지도자 김구와 비슷하다.
인도에서 종교란
종교적 자유가 완전히 허용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종교를 편협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신을 모시거나, 특정한 내세관을 가지거나, 특정한 종교적 규율에 따르는 것, 요컨대 ‘신앙’을 종교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다른 나라에서 종교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이 첨단의 시대에 아직도 종교를 가지고 싸우느냐고 혀를 찬다. 종교를 첨단과 대비시킬 만큼 낡아빠진 것으로 보는 견해다.
하지만 종교가 단순한 신앙이라기보다 생활 방식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도 많다. 수천 년에 달하는 역사를 통해 그 점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나라가 바로 인도다. 고대에 인도는 아소카와 카니슈카 등 불교를 기반으로 통치한 군주들이 많았고, 중세에는 외래 종교인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았으며,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끝난 뒤에는 결국 종교 때문에 파키스탄이 분리되었다. 이쯤 되면 인도에서 종교는 정치나 경제보다 중요한 역사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인도의 종교는 힌두교로 알려져 있지만, 힌두교는 사실 하나의 종교가 아니다. 인도의 어원인 힌두(Hindu)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의 신두(Sindhu, 큰 강, 인더스 강을 가리킨다)에서 나왔는데, 인도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힌두교는 특정한 종교라기보다 그냥 ‘인도의 종교’라는 뜻이며, 인도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진 모든 종교를 가리키는 말이다. 불교, 자이나교 등이 힌두교에서 갈라져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힌두교는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강력한 교리도 없고, 위계적인 교회 조직도 없다. 수억 명이 가진 세계적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여타의 세계종교들처럼 포교적인 성격도 없으며,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관용한다. 그런 점에서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 관습이나 생활 방식, 인도의 모든 전통과 역사, 문화다. 그렇다면 힌두교는 ‘인도의 종교’를 넘어 ‘인도의 사고방식’이다.
힌두교만큼은 아니더라도 세계 대다수 종교는 신앙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원리로 기능한다. 그래서 종교 분쟁은 낡아빠진 게 아니라 첨단의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다툼이며, 갈수록 그런 성격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종교 때문에 분리되는 데 그치지 않고 독립 직후부터 다시 종교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접경지대에 위치한 카슈미르를 놓고 두 나라가 영토 분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종교와 문화, 관습을 놓고 싸우는 것이었다. 신생국 인도의 총리로 취임한 네루는 서구에서 교육을 받았고, 힌두교를 강조하기보다 인도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근대화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1964년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17년간 내내 파키스탄과의 갈등에 시달렸다.
종교가 인도의 정치에 영향을 미친 과정은 네루의 가문사가 잘 보여준다. 그의 딸인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1917~1984)는 아버지가 죽고 2년 뒤인 1966년부터 11년 동안 세 차례 총리를 지냈다. 1977년 총선에서 그녀가 속한 신국민회의당이 패배하는 바람에 정계에서 잠시 물러났지만, 이듬해 복귀에 성공해 1980년부터 네 번째 총리를 역임했다. 그러나 1984년 간디는 이슬람교의 한 종파인 시크교의 사원을 군대로 공격했다가 시크교도에 의해 암살되었다. 어머니에 이어 총리가 된 라지브 간디(Rajiv Gandhi, 1944~1991)는 1991년 선거 유세 도중에 폭탄 테러로 숨졌다.
인도에서 종교가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도는 몇 가지 요소로 환원할 수 없는 나라다. 국토의 면적이 한반도의 15배에 가깝고, 인구는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인 12억 명에 달한다. 그런 만큼 하나의 나라라기보다는 하나의 문명권이며, 극히 다양한 요소가 공존한다. 카스트와 같은 전근대적 관습이 남아 있는가 하면, 할리우드보다도 영화 생산량이 많아 발리우드(Bollywood)라는 별명까지 있다. 또한 고대부터 발달한 과학적 전통의 영향으로 지금도 세계 첨단의 과학 수준을 자랑한다(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인도인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정도다).
인도는 여전히 종교 분쟁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것은 인도가 낡은 체제에 묶여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이 무척 오랜 지역임을 나타낸다. 향후 인도가 나아갈 길은 그 역사와 전통이 ‘인도 문명권’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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