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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태어남 - 1장 중국이 있기까지, 동양 사상의 뿌리: 유가사상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태어남 - 1장 중국이 있기까지, 동양 사상의 뿌리: 유가사상

건방진방랑자 2021. 6. 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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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 사상(儒家 思想)

 

유가를 창시한 공자(孔子)는 노나라 태생이었다. 춘추시대 말기에 유서 깊은 제후국에서 성장한 만큼 공자는 전통적 가치와 이념을 자연스레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유가 사상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 복고주의의 냄새가 풍긴다.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요순시대라는 말을 만들어 쓴 사람도 공자다. 그러나 그가 주로 염두에 둔 과거는 그의 시대보다도 1000년이나 더 전인 머나먼 요순시대가 아니라 그 바로 전대인 주나라, 서주(西周) 시대였다.

 

하지만 공자가 오로지 과거에 대한 동경만 품고 있었다면 학문의 일가를 구축하지는 못했을 테고 후대에 위대한 사상가로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주(西周) 시대의 전통적 가치는 주나라의 건국이념이라 할 예()개념으로 집약된다. 이 예의 사상이 종법 봉건제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음은 앞에서 본 바 있다. 공자는 이 예에다 인()의 사상을 덧붙인다. 이리하여 예와 인을 바탕으로 하는 유가의 기본 골격이 생겨났다.

 

굳이 인의 개념을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자(孔子)가 최고의 가치로 꼽는 사회체제는 서주(西周) 시대의 봉건제. 다만 그것은 좋았던 옛날이 되었고 이제는 시절이 변했다. 봉건제의 굳건한 현실적ㆍ정신적 토대이자 예의 중심이었던 천자(주나라 왕)서주(西周)가 끝나면서 사실상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그는 인의 이념에서 파생된 도덕 정치를 봉건제의 새로운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말하자면 유명무실해진 종법 봉건제를 도덕적 봉건제로 대체하자는 견해다. 종법 봉건제 시대에 통용된 혈연적 위계를 바탕으로 한 예의 이념이 무너졌으니, 이제는 도덕적 위계를 바탕으로 삼아 예의 이념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덕의 크고 작음을 기준으로 신분 간의 서열, 나아가 나라 간의 위계도 정하자는 주장인데, 말 그대로 이렇게 된다면 군자가 곧 군주가 될 테니 진정한 덕치(德治)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다분히 공상적인 그런 정치사상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 없다. 공자(孔子)는 자신의 뜻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10여 년간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각국의 지배자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다 실패하고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으나 그 대신 훌륭한 제자들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과 더불어 고전을 정리하고 자신의 사상을 저술하는 문헌 작업에 여생을 바치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수천 년 후까지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공자의 뜻을 받아준 나라가 있었다면 그는 정치가에 그쳤을 테고 사상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는 짧고 사상가는 길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대표적인 인물로 맹자(孟子)순자(荀子, 기원전 298년경~기원전 238년경)가 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인()ㆍ의()ㆍ예()ㆍ지()사단(四端)으로 확장하는 한편, 공자가 제시한 인의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중점적으로 모색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성선(性善)의 논리를 이용해 인을 토대로 한 어진 정치[仁政]가 가능하다고 보고, 이것이 곧 왕도(王道)의 실현이라고 주장했다. 맹자가 공자에게서 인의 이념을 강조했다면, 순자는 예의 이념을 계승했다. 그는 악과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성악(性惡)의 논리에서, 도덕적 품성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습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교육을 중시했으며, 군주의 임무는 예를 가르치는 교사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흔히 유학은 현실과 유리된 관념 철학으로 여기지만, 그 기원에서나 이후의 발달 과정에서 보듯 현실 정치에 대한 큰 관심으로부터 시작했고, 국가의 통치 철학으로 기능하려는 강렬한 지향성을 담고 있었다. 나중에 보겠지만 유학의 권력 지향성은 수백 년 뒤 한대에 구현되었고(기원전 2세기에 한 무제는 유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채택했다), 역대 중화 제국의 기본 이념이 되었으며, 15세기 이후에는 한반도 조선의 사상적 기틀이 되었다.

 

 

공자와 노자(老子)가 만났을 때. 청년 공자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받아줄 만한 나라를 찾아 10년간 여행하다가 노년에 접어들어 은둔 중인 노자와 만났다. 이 만남에서 현실 참여적인 공자와 현실 도피적인 노자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서로의 입장 차이만을 확인했다. 그러나 좋은 대조를 이룬 덕분에 그들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2000여 년 동안 동양 사상의 양대 뿌리를 이루고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신화와 역사의 경계

구름 속의 왕조를

중화 세계의 영원한 고향

기나긴 분열의 시대

최초의 통일을 향해

동양 사상의 뿌리(유가 / 묵가 / 법가 / 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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