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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Ⅳ. 말과 길 - 3.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 대화란 타자와의 상호조율 과정이다 본문

고전/장자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Ⅳ. 말과 길 - 3.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 대화란 타자와의 상호조율 과정이다

건방진방랑자 2021. 7. 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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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대화란 타자와의 상호조율 과정이다

 

 

그렇다면 장자 본인의 언어 사용은 어떠한가? 당연히 그의 언어는 화려한 수사들로 은폐된, 다시 말해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성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흔히 도가사상은 언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자가 비판했던 언어가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합리적 철학의 언어였을 뿐이라는 점을 망각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그는 결코 모든 언어를 부정했던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후학들은 그의 자유로운 언어 사용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언(寓言), 중언(重言), 그리고 치언(巵言)이다. 그런데 이런 세 종류의 문체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왜 장자가 이처럼 다양한 문체들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이유다. 이것은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그는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삶과 그것의 진실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다시 말해 그는 고독한 유아론자, 또는 홀로 삶을 즐기려는 은둔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의 언어 사용이 다양해진 이유는 바로 그가 대화를 추구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장자는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전언을 전할 수 있는 문체를 선택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문체를 새로 창조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어떤 때는 세상 사람들이 권위를 부여하는 성인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하기[重言]도 하고, 어떤 때는 재미있는 우화형식으로 이야기하기[寓言]도 하고, 어떤 때는 대화 상대방의 의식상태와 삶의 상황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기[巵言]도 한 것이다. 장자의 다양한 문체들은 그가 경전의 권위에 입각해서 일방적인 학설을 설파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대화 상대방을 고려하는 진정한 대화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장자의 세 가지 문체를 단지 문학적 수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강조해야 할 것은 그가 동시대 사람들이나 아니면 후세 사람들과 대화하려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체는 아마도 치언일 것이다. 치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곽상의 주석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곽상은 치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라는 잔은 꽉 채우면 기울어지고, 비우면 (잔의 주둥이가) 위를 향하게 된다. 이것은 옛 것에 집착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그것을 언어에 비유하면, 타자에 따르고 사태의 변화를 따라서 오직 그것들을 따르기에 나날이 나온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날이 나온다는 것은 나날이 새로워짐을 말한다. 나날이 새로워지면 자연스러운 나누어짐을 다할 수 있고, 자연스런 나누어짐을 다하면 조화롭게 된다.

王云: “卮器滿卽傾, 空則仰, 隨物而變, 非執一守故者也. 施之於言, 故隨人從變, 己無常主也.” 郭云: “日出, 謂日新.” 和以天倪.

 

 

곽상에 따르면 치는 술을 가득 부으면 넘어져서 술을 쏟아내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잔이다. 여기서 치라는 잔이 장자 본인이라면, 여기에 담기는 술은 대화 상대방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 대화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대화란 기본적으로 나와 타자 사이의 부단한 상호조율의 과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 상대방이 분노에 가득 차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맞추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만약 우리가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한다면 대화가 과연 이루어지겠는가? 또 상대방이 농담을 했을 때 우리가 정색을 하는 경우도 대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용

목차

장자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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