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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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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보는 지혜

 

 

모든 것은 나의 마음이나 의식이다라고 말하면서 스님이 의도했던 것은 사실 없음이란 단지 우리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는 베르그손의 생각과 공명하는 것입니다. 물이 시원하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한 것이고, 썩은 물이라서 토할 것 같다는 느낌도 단지 내 마음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이죠. 이런 두 가지 느낌은 단지 내 마음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너무 목이 마를 때 우리는 이전에 마셨던 시원한 물을 마음에 담아둡니다. 즉 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덤 속의 물을 찾아서 마셨을 때 원효 스님은 시원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효 스님이 토할 것 같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님은 어젯밤 시원하게 마신 물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시원한 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체가 썩어서 생긴 물이라는 것을 알고 토할 것 같았던 것입니다. 시원함과 토할 것 같음. 이 두 가지 경우는 모두 마음의 집착으로부터 유래했고 마음 바깥의 사태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는 점, 바로 이런 통찰이 원효 스님이 얻었던 깨달음의 핵심인 셈입니다.

 

보통 불교에서는 원효 스님이 느꼈던 두 가지 감정, 물이 시원하다는 감정과 토할 것 같다는 감정을 ()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원래 공공이란 개념불교에서 문제되는 X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영혼과 같은 실체가 없다고 할 때 불교는 사람은 공하다’, 인공(人空)’이라고 표현한다이란 말은 순야타(Śūnyatā)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옮긴 것인데, 이 말은 무의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감정은 마음이 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이죠. 실제 마음 바깥의 사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공이란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마음 바깥으로 투사하였다는 것을 자각하는 체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불교에는 진여(眞如)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도 타타타(tathatā)’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것인데,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힘든 말이죠. 어떤 집착도 없이, 마음 속에 어떤 선입견도 가지지 않고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본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흔히 타타타라는 말을 여실(如實)’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실답다’. 실제와 같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아이는 죽었지만, 그 아이를 가슴속에 담고 있는 젊은 엄마는 고통으로 눈물의 나날을 보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그녀를 고통으로부터 건져줄 수 있을까요?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위로하면 그녀는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이 엄마, 아이는 지금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미소 짓고 있을 거예요.” 그러나 이런 말로도 쉽게 그녀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려고 했다면, 도대체 왜 그 아이를 제게 주셨나요?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하느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예전에 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어느 불교 경전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이를 잃은 어느 여인의 고통을 씻어주기 위해 싯다르타가 사용했던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밧티(Sāvatthī) 성에 키사 고타미(Kisā Gotamī)라는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결혼 후 심한 학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들을 하나 낳은 후 사람들은 그녀를 칭찬하며 더 이상 학대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뛰어놀 수 있을 만큼 자란 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비탄에 잠긴 여인은 죽은 아들을 등에 업고 약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부처님을 찾아오게 되었다. 그러고는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죽은 사람이 없는 집안에서 겨자씨를 얻어오면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여인은 온종일 돌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하려고 했지만 단 한 톨의 겨자씨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비로소 여인은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장로니게(長老尼偈, Therīgāthā)

 

 

겨자씨 이야기로도 유명한 이 이야기는 흔히 법구경에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장로니게라는 남방 불교의 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경전 본문도 아니고, 이 경전을 해석했던 다르마팔라(Dharmapāla)라는 스님의 주석에 등장하는 이야기이죠. 이 스님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호법(護法)이라고 알려져 있는 유명한 불교 이론가입니다. 여기서 호법이란 이름은 다르마팔라를 의역한 말이지요. 아쉽게도 고대 스리랑카 언어인 팔리어로 쓰인 장로니게라는 경전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어로 된 번역본만 있을 뿐이지요. 겨자씨 이야기는 키사 고타미라는 여인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키사(Kissa)’라는 말이 말라깽이를 뜻하니까. 이 여인은 말라깽이 고타미(gotami)’라고 불렸던 여인이었을 겁니다. 말라깽이 여인은 너무나 많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게 되자, 그녀는 더 이상 학대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녀를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게 해준 아들은 그녀에게 이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문제는 바로 이 소중한 아들이 어린 나이에 결국 병들어 죽었다는 데 있습니다.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말라깽이 고타미는 아들의 시신을 업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이 불쌍한 여인은 다르타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아마 싯다르타가 고통의 기원과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얻었다는 소문을 그녀도 들었겠지요. 그런데 그는 이 여인에게 어떤 가르침도 주질 않습니다. 가르침을 주기는커녕 불가능한 요구를 할 뿐입니다. 죽음을 전혀 경험하지 않은 집안이 있다면, 그 집에서 겨자씨를 구해오라고 했으니까요.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고통을 없애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이 세상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집안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결국 싯다르타는 잔인하게도 불쌍한 여인으로 하여금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도록 만들어주었을 뿐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방법과는 대조적으로 싯다르타의 방법에는 잔인한 데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싯다르타의 방법은 잔인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바로 그녀가 이미 죽은 아이를 마음속에 품고서 떠나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아이를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집착을 하고 있는 것도, 그래서 고통에 빠진 것도 그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집착 때문에 생긴 고통이기에, 그녀 스스로 집착을 끊을 수 있어야만 고통이 해소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임종할 때 싯다르타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 가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어쨌든 그녀는 이제 있는 그대로 죽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 슬프게도 그 누구도 죽음을 벗어날 수는 없구나.’ 이런 과정을, 그것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체험하면서 그녀는 서서히, 아주 천천히 마음속에 붙잡아두었던 그녀의 사랑스런 아이와 작별을 고하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고통이 아이가 죽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죽은 아이에 집착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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