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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 왕수인

건방진방랑자 2022. 3. 7.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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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인(王守仁)

세계는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산길을 걷다 지쳐서 어느 작은 바위에 걸터앉는다. 땀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이름 모를 들꽃 하나를 발견한다. 한참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당혹스러운 느낌이 스친다.

 

내가 만약 이 작은 바위에서 쉬지 않고 그대로 산길을 갔더라면, 이 꽃이 과연 나에게 발견되기나 했을까? 나에게도, 그리고 이 세상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 꽃이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이곳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꽃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내게 전해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도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곳에 없었다면, 꽃은 아무런 의미를 발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수인은 바로 이 점을 발견했던 독특한 유학자였다. 마음 바깥에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7일 동안 대나무를 탐구한 젊은 유학자

 

 

어떤 소년에게 스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란다.”

 

그러자 소년은 당돌하게도 스승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아닙니다. 선생님,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소년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의 정신을 알고 있었던 셈이지요. 앞에서 정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안연이 즐겨 그러했듯이 성인이 되고자 함이라고 말입니다. 성인이 되는 꿈을 가진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되었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갓집에서 신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청년은 어느 유학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 유학자는 성인이 되려면 격물(格物) 공부를 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다시 말해, 내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 그리고 나에게 발생하는 사건들에는 이치, 즉 이()가 있으니 그것을 찾아야만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었지요. 아마 그 유학자는 주희의 유학 사상을 신봉했나 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고 싶었던 청년은 주희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성인이 될 수 있다는데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려는 열망에 불타 있던 이 청년은 후에 양명학(陽明學)을 창시한 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1528)입니다. 주희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이치가 내재되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사물의 이치를 하나 둘 파악하게 되면, 마침내 세상 만물의 이치, 즉 태극(太極)을 파악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성인이 되는 것이지요. 21세의 청년 왕수인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관청에서 격물 공부를 시작하겠노라 결심했고,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당장 공부에 착수했습니다. 때마침 그가 근무하는 관청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그는 대나무를 직시하면서 대나무의 이치를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 어느덧 7일이 되었습니다. 청년 왕수인은 대나무의 이()를 찾지 못하고, 심신이 피폐해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대나무의 이치를 찾은 뒤에 다른 사물의 이치도 찾으려는 청년의 희망은 이제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대나무의 이치를 찾으려는 노력이 자신을 성인으로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몸을 병들게 만들었기 때문이지요.

 

시간이 흘러 청년 왕수인은 어느덧 35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불행한 사건이, 아니 지나고 보면 행운이었던 사건이 벌어집니다. 환관의 농단이 심해지자 그는 천자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그러나 도리어 모함을 받아 형벌로 40대의 매를 맞은 뒤, 귀주(貴州)의 용장(龍場)에서 말을 관리하는 역승(驛丞) 관직으로 좌천되고 맙니다. 이런 조처는 곧 왕수인을 죽음으로 모는 명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예전에 죄인을 외딴 곳에 귀양 보내는 것은 적응하기 어려운 곳에서 풍토병에 걸려 고생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 의미였지요. 왕수인이 도착한 용장은 기후가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온갖 벌레와 뱀들이 우글거리는 지역이었습니다. 극한적인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사유를 고독하게 다듬어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후세 사람들이 용장의 큰 깨달음[龍場大悟]’이라고 부르는 철학적 통찰을 얻게 됩니다. “마음이야말로 모든 이치의 근원이다!” 절대적인 악조건 속에 홀로 남겨진 그는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마침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그가 믿었던 것은 오직 자신의 마음뿐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왕수인의 깨달음은 심즉리(心卽理)’라는 명제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심즉리마음이 곧 이()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명제에서 왕수인은 이란 마음을 떠나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는 예전에 대나무에서 이치를 찾으려는 노력 자체가 잘못이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주희가 제안했던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왕수인이 거부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지요. 그렇다고 그가 객관적인 세계 자체를 거부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마음이 작용하고 나서야 객관적인 세계도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타당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내 마음이 어제 만났던 사람에게 향해 있다면, 그 음식은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니까요. 왕수인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치라는 것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는 경우란, 그것이 마음을 움직여서 내게 사물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경우에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왕수인의 생각은 그의 서신과 문답을 기록한 전습록(傳習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제 전습록을 넘기면서 그의 속내를 좀더 알아보도록 할까요?

 

 

 

 

마음과 무관한 사물은 없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매우 당혹스런 질문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의 마음은 머리 안의 뇌에 있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가슴속에 있다고 보아야 하나요? 사실 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여러분이 보고 있는 책에 쏠려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향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대학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마음이 있지 않으면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보통 우리는 어떤 것을 눈으로 보고 그 다음에 그것을 마음으로 생각한다고 이해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오락영화이지요. 그러나 그는 어제 이별했던 애인에게로 온통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애인과 행복하게 보냈던 기억으로 마음이 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과연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마음이 가지 않으면 눈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여러분이 멍한 표정을 지으면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고 말이지요. 이처럼 마음은 내 안에 고요히 있는 것이라기보다 어떤 것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왕수인의 유학 사상을 다루기 전에 지루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의 역동적 흐름에 초점을 맞추어 유학 사상을 전개한 것이 바로 왕수인 사유의 특징이기 때문이지요. , 이제 왕수인과 그의 제자의 문답을 통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께서 남진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다. 어떤 벗이 바위틈의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세상에 마음과 무관한 사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꽃과 같은 경우는 깊은 산 속에서 저절로 피어나서 저절로 지곤 하니 그것이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先生遊南鎭, 一友指岩中花樹問曰: “天下無心對之物. 如此花樹, 在深山中自開自落, 於我心亦有相關?”

선생유남진, 일우지암중화수문왈: “천하무심대지물. 여차화수, 재심산중자개자락, 어아심역유상관?”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 꽃은 그대의 마음과 함께 고요한 상태에 있었네.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는 순간 꽃의 모습이 일시에 분명해졌지. 그러니 이 꽃은 그대의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네.” 전습록275

先生曰: “你未看此花時, 此與汝心同歸於寂. 你來看此花時, 則此花顔色時明白起來. 便知此花不在你的心外.”

선생왈: “니미간차화시, 차여여심동귀어적. 니래간차화시, 즉차화안색일시명백기래. 편지차화부재니적심외.”

 

 

남진(南鎭)은 현재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회계산(會稽山)을 가리킵니다. 왕수인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놀러갔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바위틈에 자라나는 아름다운 꽃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회계산으로 놀러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산길로 산행 방향을 잡지 않았다면 그 아름다운 꽃은 결코 그들에게 발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득 제자는 스승이 평소에 강조했던 가르침을 떠올리게 됩니다. 마음과 무관한 사물은 없다는 가르침이지요. 제자는 스승에게 이렇게 반문합니다. 만약 스승과 자신이 이곳으로 올라와서 꽃을 보지 않았어도 꽃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피고 지고 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내 마음과 무관한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스승에게 물었던 것이지요.

 

 

 

 

보지 않을 때 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아마 여러분도 제자의 생각에 상당히 공감할 것입니다. 내가 아직 보지 못했고 또한 생각도 할 수 없지만, 무수히 많은 것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나요? 결국 여러분도 그 제자처럼 내 마음과 관계없는 다양한 사물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자의 질문에 대해 왕수인은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 꽃은 그대의 마음과 함께 고요한 상태에 있었네.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는 순간 꽃의 모습이 일시에 분명해졌지. 그러니 이 꽃은 그대의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네.”

 

이 또한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답입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왕수인의 대답을 음미해보지요.

 

왕수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마음은 무엇인가를 향해 움직인다는 통찰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꽃을 보기 전에 꽃과 마음이 모두 고요한 상태에 있었다는 왕수인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이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고요한 상태이니까요. 왕수인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도, 그리고 꽃도 고요하게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회계산 어느 산길 바위틈에 이르자, 우리의 마음이 그 꽃을 향해 일순간 움직이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의 마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꽃도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꽃을 보지 않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아직 흘러갈 곳이 없어서 고요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꽃을 보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폭포수처럼 그 꽃으로 흘러들어 가면서 고요한 적막을 깨뜨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해해선 안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 꽃을 보지 않았을 경우나 꽃을 보았을 경우를 마치 감각적인 경험의 유무에 따른 구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꽃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경우와 마음이 이미 움직인 경우를 의미할 뿐입니다. 회계산을 거닐다가 아름다운 꽃을 눈으로 보았다 할지라도, 마음이 고향의 애인에게 가 있다면 그 아름다운 꽃은 여전히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어쩌면 그 꽃은 거의 존재감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한참 뒤 누군가가 아까 아름다운 꽃을 보았냐고 묻는다면, 마음이 고향의 애인에게 가 있던 사람은 그 꽃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물래이순응(物來而順應)’이라는 학설을 주장한 유학자 정호의 가르침이 떠오르지 않나요? 꽃이 다가오면 그것에 마음을 두고, 애인을 보면 그것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지요. 책을 볼 때는 마음이 그 책에 가 있어야 합니다. 영화를 볼 때는 마음이 그 영화에 가 있어야 하지요. 이것이 바로 물래이순응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마음이 어제 만난 애인에게 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자신이 만난 사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정호가 말한 것처럼 물래이순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특별하게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우주의 마음인 것처럼 크게 만들어야 합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새롭게 생기는 다양한 사태에 마음을 둘 수 있을 테니까요. 작은 것 하나에만 마음이 계속 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것에도 마음을 둘 수 없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어떤 것을 향해가는 마음

 

 

왕수인의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무관한 사물은 없다는 독특한 생각이지요. 이것은 마음이 가지 않으면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길을 걸을 때 우리의 마음이 크게 열려 있지 않은 경우, 다시 말해 어떤 일을 염려해서 그 일에 온통 마음이 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산길에서 수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산길에서 만나는 이름 모를 꽃과 새들에게 마음이 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품을 정도로 넓게 확장될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가야만 외부 사물도 존재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수인의 근본적인 통찰이었지요. 그렇다면 사물의 이()는 어떻게 될까요? 주희는 외부 사물의 이를 탐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이지요. 주희를 존경했던 왕수인이 젊었을 때 대나무의 이치를 찾으려고 몰두했던 공부 방법이었습니다. 외부 사물을 마음이 그것으로 향해야만 존재하는 것이라 하면, 당연히 사물의 이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왕수인이 척박했던 용장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지요. 마침내 그는 주희의 문제점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통찰을 얻고 나자 왕수인은 주희의 격물치지 공부를 비판하려고 합니다. 주희의 격물치지는 왕수인의 관점과는 달리, 마음 바깥에 마음과 무관한 사물이 있다는 일상적인 이해를 대변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지요.

 

 

주자가 말한 격물이라는 것은 사물에 나아가 그 이()를 연구하는 데 있다. 사물에 나아가 이를 연구한다는 것은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른바 정해진 이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마음을 사용하여 각각의 개별적인 사물 가운데서 이를 구하는 것이니, 마음과 이치를 둘로 나눈 것이다.

朱子所謂格物云者 在卽物而窮其理也 卽物窮理 是就事事物物上求其所謂定理者也 是以吾心而求理於事事物物十中 忻心與理爲二矣

주자소위격물운자 재즉물이궁기리야 즉물궁리 시취사사물물상구기소위정리자야 시이오심이구리어사사물물십중 흔심여리위이의

 

무릇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를 구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는 말과 같다.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면 효의 이는 과연 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부모의 몸에 있는가? 가령 부모의 몸에 있다면 부모가 돌아가신 뒤 내 마음에는 곧 어떤 효의 이도 없게 되는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측은하게 여기는 이가 생긴다. 이 측은하게 여기는 이는 과연 어린아이의 몸에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의 양지(良知)에 있는가? 전습록135

夫求理於事事物物者 如求孝之理於其親之謂也 求孝之理於其親 則孝之理其果在於吾之心邪 抑果在於親之身邪 假而果在於親之身 則親沒之後 吾心遂無孝之理歟 見孺子之入井 必有惻隱之理 是惻隱之理果在於孺子之身歟 抑在於吾心之良知歟 其或不可以從之於井歟 其或可以手而援之歟 是皆所謂理也 是果在於孺子之身歟 抑果出於吾心之良知歟

부구리어사사물물자 여구효지리어기친지위야 구효지리어기친 즉효지리기과재어오지심야 억과재어친지신야 가이과재어친지신 즉친몰지후 오심수무효지리여 견유자지입정 필유측은지리 시축은지리과재어유자지신여 억재어오심지량지여 기혹불가이종지어정여 기혹가이수이원지여 시개소위리야 시과재어유자지신여 억과출어오심지량지여

 

 

왕수인은 주희의 격물 공부의 큰 문제점은 바로 마음[]과 이[]를 둘로 나누었다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주희의 격물 공부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음을 가진 나는 여기에 존재하고, 이를 가진 사물은 저기에 존재합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가지고 저기에 있는 사물을 연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물이 가진 이를 내 마음을 이용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에 왕수인은 과연 사물이 우리의 마음과 무관한지, 나아가 사물이 가지고 있다는 이가 우리의 마음과 무관한 것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그는 효()라는 이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주희의 격물 공부의 관점을 따른다면, 효의 이는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를 탐구함으로써 효의 이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주희가 왕수인의 생각처럼 그렇게 주장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주희 역시 사물들의 이치란 곧 내 마음의 본성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왕수인은 주희가 자기 마음 자체를 공부하기보다 외재적인 사물의 이치에 많은 관심을 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는 주희가 마음과 이치를 둘로 나누어버렸다고 혹평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어지는 글에서 왕수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효라는 이()는 과연 부모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내 마음에 있습니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효라는 이()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내 마음이라는 표현에 주의해야 합니다. 앞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그것은 이미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향해 있는 마음이니까요. 물론 이 경우는 부모님에게로 향해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왕수인은 맹자에 등장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사례를 다시 끌어옵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 때 우리에게는 측은지심이라는 동정심이 일어나게 되지요. 여기서 또 다시 왕수인은 우리에게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안합니다. 측은지심이라는 이()는 우물에 빠지는 아이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내 마음에 있습니까? 이 경우에도 측은지심이라는 이는 내 마음에 있겠지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우물에 빠지는 아이에게로 향했기 때문에 측은지심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지요. 만약 다른 것에 마음이 팔렸다면, 우리의 마음은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사태로 다가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마치 우리의 마음이 부모님에게로 가 있을 때에만 효를 행하는 마음이 출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음과 무관한 사물과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왕수인을 이해하려면 마음이 무엇인가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보는 통찰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점만 잊지 않으면 왕수인의 나머지 통찰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했습니다.

 

 

몸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드러난 것이 바로 의()이며, 의의 본체가 바로 지()이고, 의가 지향하는 것이 바로 물()이다. 만약 의가 부모를 섬기는 데 있다면, 부모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다. 만약 의가 군주를 섬기는 데 있다면, 군주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다.

身之主宰便是心, 心之所發便是意, 意之本體便是知, 意之所在便是物. 如意在於事親, 卽事親便是一物, 意在於事君, 卽事君便是一物,

신지주재편시심, 심지소발편시의, 의지본체편시지, 의지소재편시물. 여의재어사친, 즉사친편시일물, 의재어사군, 즉사군편시일물,

 

의가 백성들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끼는 데 있다면, 백성들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끼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다. 의가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데 있다면,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바로 하나의 물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과 무관한 이치가 없고 마음과 무관한 사물도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전습록6

意在於仁民愛物, 卽仁民愛物便是一物, 意在於視聽言動, 卽視聽言動便是一物. 所以某說無心外之理, 無心外之物.

의재어인민애물, 즉인민애물편시일물, 의재어시청언동, 즉시청언동편시일물. 소이모설무심외지리, 무심외지물.

 

 

왕수인은 몸을 다스리는 것이 마음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물에 빠지는 아이에게로 마음이 움직이면 곧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생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측은지심이 들자마자 우리는 몸을 이끌고 위기에 처한 아이를 구하려고 달려갈 것입니다. 마음이 몸을 다스린다고 이야기했을 때, 왕수인이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위험을 꺼리는 몸을 통솔해서 아이에게로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마음은 움직일 때도 있고 고요하게 있을 때도 있습니다. 왕수인은 전자의 경우를 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것은 이미 어떤 구체적 사물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는 항상 어떤 것에 대한 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이 경우 왕수인은 의가 향해 있는 그 대상을 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우리 마음이 향해 있는 대상을 사물이라고 정의 내린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이 곧 왕수인이 그토록 강조했던 양지(良知)입니다. 양지는 윤리적 앎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내 마음이 부모에게로 향해 있습니다. 이 경우 섬겨야 할 부모가 물()이라면 부모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곧 의()입니다. 그렇다면 양지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의가 부모에게로 향해 있을 때 효를 실천해야 하는 것을 자각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물론 내 마음의 의는 부모가 아닌 다른 것으로 향할 수도 있고, 부모에게 향해 있으면서도 효도가 아닌 다른 것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를 향해 원망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 경우 윤리적 앎으로서의 양지는 바로 어떤 의가 선한 것이지 악한 것인지를 자각할 수 있습니다.

 

왕수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가 사용한 물()이라는 개념도 단순히 사물만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물은 부모를 섬기는 것’ ‘군주를 섬기는 것’ ‘백성들을 사랑하고 사물을 아끼는 것에서부터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마음, 즉 의()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지향한다는 것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었지요. 지향의 대상은 단지 사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꽃과 풀과 같은 사물을 지향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꽃향기를 맡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지향할 수도 있습니다.

 

 

 

 

네 구절로 압축되는 왕수인의 가르침

 

 

왕수인에게 마음(), (), (), ()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연결고리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네 가지 개념들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유학 사상을 포괄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마침내 왕수인의 시도는 하나의 정리된 형태로 확정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 사구교(四句敎)’라고 일컫는 명제였습니다. 사구교란 글자 그대로 네 구절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왕수인의 유학 사상을 정리하려는 사람들은 마음과 무관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통찰, 그리고 이로부터 유래하는 사구교만을 기억해도 무방합니다. 그 정도로 사구교는 왕수인의 사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모습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의의 움직임이다.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고, 선을 실천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격물이다. - 전습록315

無善無惡是心之體, 有善有惡是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傳習錄315

무선무악시심지체, 유선유악시의지동, 지선지악시양지, 위선거악시격물.

 

 

왕수인은 마음의 본모습에는 선이나 악이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의 본모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이 어렵게 들리나요?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전망이 탁 트인 전경을 보고 있습니다. 나무, , , 구름, 개울이 한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마음, 다시 말해 훤히 열려 있는 마음이 바로 마음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본모습은 어느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흐리멍덩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마치 비가 온 뒤 맑게 개인 풍광처럼 그렇게 탁 트이고 청량합니다. 왕수인은 바로 이런 마음의 본래 모습이 선악의 구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마음은 아직 어떤 구체적 대상에게로 움직이지 않은 마음, 그래서 오히려 모든 존재에 대해 열려 있는 근본적 마음이라고 볼 수 있지요.

 

나머지 세 구절의 가르침은 첫 번째 구절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지요. 탁 트인 마음이 어떤 특별한 한 가지만을 지향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의()입니다. 그런데 의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의는 땅에 떨어진 지갑을 지향할 수도 있고, 심지어 그것을 몰래 가지는 행동을 지향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악한 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는 반대로, 의는 부모님, 나아가 부모님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행동을 지향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선한 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럼, 이제 양지(良知)에 대해 살펴볼까요? 왕수인은 자신의 의가 선한지 악한 지를 자각하는 능력을 양지라고 부릅니다. 이로부터 왕수인의 간결한 수양론이 등장합니다. 양지가 선하다고 자각한 것은 실천하고, 양지가 악하다고 자각한 것은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왕수인은 이것을 곧 격물(格物)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사구교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이 주희의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음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주희의 격물치지 공부는 외부 사물의 이()를 탐구하다가 어느 사이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앎을 달성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지요. 주희는 외부 사물에도, 그리고 내 마음에도 동일한 이가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외부 사물의 이를 제대로 탐구하기만 하면 그것이 내 마음의 이와 같다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주희는 외부 사물의 이를 탐구하는 것이 격물(格物)이고, 내 마음의 이를 자각하는 것이 곧 치지(致知)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주희에게는 격물이 먼저이고 치지는 그 다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왕수인의 사구교는 격물과 치지에 대해 주희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희가 격물과 치지의 단계를 나눈 것과 달리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았지요. 물론 왕수인이 생각한 의()가 어떤 사물()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의는 선한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악한 경우도 있을 수 있지요.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양지입니다. 양지란 곧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이니까요. 왕수인은 양지가 자각한 것을 관철시키는 것이 바로 치지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치지를 치양지(致良知)’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좀더 설명해보도록 하지요. 의가 악한 행동을 지향할 때, 양지는 이것이 악하다는 것을 곧바로 자각합니다. 그렇다면 양지의 이런 판단을 관철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치지 또는 치양지이자 동시에 격물이라는 것이지요. 의가 지향하는 악한 행동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격물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왕수인은 격물과 치지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구교(四句敎) () 선악의 구분에서 벗어난 탁 트인 마음
() 어떤 한 가지만을 지향할 때
양지(良知) 자신의 의가 선한지 악한 지를 자각하는 능력
격물(格物) 의가 지향하는 악한 행동을 거부하는 것

 

 

 

 

자신의 내면을 집요하게 검열하다

 

 

사실 사구교(四句敎)’의 핵심은 양지(良知)의 개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양지라는 반성적 자각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조그마한 선도 제대로 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지 때문에 치지나 격물도 가능한 것이지요. 여기에서 잠시 왕수인이 양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 좀더 살펴보도록 하지요.

 

 

양지(良知), 맹자가 시비지심(是非之心)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시비지심은 생각하지 않고도 알고 배우지 않고도 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양지라고 하니, 이것은 천명지성(天命之性)인 내 마음의 본모습이 밝고 분명하게 자기를 자각하는 것이다. 무릇 하나의 생각이 발동할 때에 내 마음의 양지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것이 선한지에 대해 내 마음의 양지는 저절로 알고, 그것이 선하지 않은지에 대해서도 내마음의 양지는 저절로 안다. 대학문

孟子所謂是非之心, 人皆有之者也. 是非之心, 不待慮而知, 不待學而能, 是故謂之良知. 是乃天命之性, 吾心之本體, 自然良知明覺者也. 凡意念之發, 吾心之良知無有不自知者. 其善歟, 惟吾心之良知自知之; 其不善歟, 亦惟吾心之良知自知之,

맹자소위시비지심, 인개유지자야. 시비지심, 부대려이지, 부대학이능, 시고위지양지. 시내천명지성, 오심지본체, 자연양지명각자야. 범의념지발, 오심지양지무유불자지자. 기선여, 유오심지양지자지지; 기불선여, 역유오심지양지자지지.

 

 

왕수인은 양지라는 것이 맹자가 말한 시비지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맹자의 사단(四端)이 기억나지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이 네 가지 마음이 맹자가 말한 사단의 마음입니다. 맹자는 이런 감정이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맹자가 생각한 본성이란 인간이 하늘로부터 선천적으로 부여 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왕수인도 시비지심을 하늘이 명령해서 갖게 된 본성, 즉 천명지성(天命之性)이라고 규정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시비지심 또는 천명지성은 인간의 인위적인 생각이나 학습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이지요.

 

그런데 주희가 사단의 마음 가운데 가장 중시한 것은 바로 측은지심이었습니다. 주희가 인설(仁說)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경우 그 덕에는 인의예지 네 가지가 있지만 인이 네 가지에 모두 작용하고 있다. 그 마음이 드러날 때에는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네 가지 감정이 있지만 측은지심이 네 가지를 모두 관통하고 있다.”

 

반면 선과 악을 즉각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양지를 강조했던 왕수인에게는 시비지심'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대두됩니다. 양지는 자신의 의가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를 자각할 수 있는 마음이니까요.

 

이렇게 볼 때 측은지심과 시비지심의 마음은 각각 주희와 왕수인의 사유 경향을 상징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측은지심이란 기본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인 것처럼 느끼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점에서 측은지심은 기본적으로 외부로 확장되는 마음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이와는 달리 시비지심은 상당히 내성적인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생각을 검열하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시비지심은 기본적으로 내면으로 수렴되는 마음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이 매우 흥미로워 보입니다. 보통 주희는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리고 왕수인은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닐까요? 주희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려고 했던 반면, 왕수인은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집요하게 검열하고 반성했으니까요.

 

 

 

 

호방한 정신과 섬세한 정신 사이에서

 

 

주희장재, 정호, 정이 등의 선배 유학자들의 뒤를 이어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라는 학풍에 주춧돌을 놓았던 위대한 유학 사상가입니다. 그는 월인천강(月印千江)으로 비유되는 거대한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했고, 이에 걸맞은 수양론도 체계화했습니다. 그의 수양론 가운데 한 축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였습니다. 젊은 시절 왕수인은 주희가 권고한 격물치지 방법을 맹신했던 적이 있지요. 그의 일화에서 보았듯이,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려던 그의 계획7일 만에 좌절되고 맙니다.

 

성인이 되려는 왕수인의 이런 치열한 노력과 자기 검증 자세는 마침내 그를 주희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유학의 창시자로 우뚝 서게 해주었습니다. 왕수인의 새로운 유학을 흔히 심학(心學)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의 유학 사상이 마음이 가야만 외부의 사물은 사물로서의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 마음과 무관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통찰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왕수인의 유학 사상은 심학’, 주희의 유학 사상은 이학(理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주희는 천 개의 강을 비추는 하나의 달 즉 이()를 직관하려고 했던 사상가였기 때문이지요.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았듯이, 왕수인의 유학 사상은 유명한 사구교(四句敎)의 네 가지 가르침 속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구교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던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왕수인의 사구교에는 어떤 균열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구절과 나머지 세 구절 사이에 놓여 있지요. 첫 번째 구절의 가르침은 마음의 본모습에는 선이나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탁 트인 마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음의 본모습이 어떤 특수한 사물이나 사태에 매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흐리멍덩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지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왕수인의 호방한 유학 정신을 느끼게 됩니다. 높은 산 위에서 탁 트인 전경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영혼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러나 사구교의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가르침에는 왕수인의 호방한 정신, 또는 대인(大人)의 기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두 번째 가르침에서부터 선과 악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내면의 세계가 열리니까요. 이 점에서 양지(良知)라는 개념이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악을 행할 수도 있다는 검열 의식을 반영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부단히 검열하는 고독한 내면의 세계는 왕수인의 호방한 마음과 사뭇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흥미로운 것은 사구교의 후반부 가르침, 즉 내면의 고독한 검열의 세계는 뒤에 정약용의 유학 사상에서 다시 출현한다는 점입니다. 정약용은 마치 왕수인이 양지에 대해 말한 것과 유사하게 천명지성의 힘에 대해 강조합니다.

 

 

오직 이 천명지성(天命之性)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데, 매번 하나의 일을 만날 때마다 그 선과 악이 앞에 있으니 성()이 향하고자 하는 바를 한결같이 따르면 어긋나거나 그릇됨이 없게 될 것이다. 매씨서평』 「염씨고문소증초4: 25~6

唯是天命之性, 樂善而恥惡, 每遇一事, 其善惡在前, 一循此性之所欲向, 則可無差誤. 梅氏書平』 「閻氏古文疏證抄4: 25~6

유시천명지성, 낙선이치악, 매우일사, 기선악재전, 일순차성지소욕향, 즉가무차오.

 

 

정약용에게 천명지성이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내면의 선천적 반성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왕수인이 사구교(四句敎)의 세 번째 구절에서 이야기했던 양지와 매우 유사하지요. 더구나 왕수인도 양지를 곧 천명지성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점이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것을 단지 우연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정약용은 천명지성이라는 선천적 반성 능력을 따르면 우리가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왕수인이라면 이런 공부를 바로 치양지(致良知)’의 개념으로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치양지는, 양지가 선이라고 판단한 것을 실천하고, 악이라고 판단한 것을 거부하는 공부를 의미했으니까요.

 

왕수인의 유학 사상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면, 그의 사유 안에 잠재되어 있는 균열을 숙고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그는 우주가족의 이념을 연상시키는 정호의 호방한 정신을 분명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왕수인은 치열하게 자기 내면을 검열하려는 정약용의 섬세한 정신도 아울러 갖고 있었지요. 어떻게 서로 이질적인 듯한 두 가지 사유가 그의 사상에서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에게 호방한 정신과 섬세한 정신은 어떻게 통일되어 있었던 것일까요? 이 문제는 아마 왕수인의 전습록을 꼼꼼히 넘겨보면 이해 가능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작업이기에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고, 이제 조선의 유학자들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더 읽을 것들

 

 

1. 전습록1·2(왕수인, 정인재 · 한정길 옮김, 청계, 2007)

왕수인의 유학 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책은 바로 전습록입니다. 전습록(12)은 국내 두 양명학(陽明學) 연구자들의 열정이 반영되어 있는 중요한 번역서입니다. 번역문과 함께 전체 원문이 실려 있어 일반인과 전문가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전습록에 대한 기존 유학자들의 이해 방법을 주석으로 친절하게 달아놓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 번역서가 다른 것들과 차별되는 부분이지요.

 

 

 

2. 한 젊은 유학자의 초상: 청년 왕양명(뚜웨이밍, 권미숙 옮김, 통나무, 1994)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왕수인의 사상적 편력을 소개한 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전기는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드라마틱하게 구성된 왕수인의 새로운 유학 사상에 대한 연구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청년 왕수인이 어떻게 해서 새로운 철학적 통찰을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희의 유학 사상과 어떤 의미에서 달라지는지를 생생하게 재구성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3. 양명철학(천라이, 전병욱 옮김, 예문서원, 2003)

중국에서 출간된 이 책의 원제목은 유무지경(有無之境)입니다 저자가 왕수인의 사상을 있음없음의 경지, 또는 경계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제목이 붙었지요. 물론 여기서의 있음과 없음의 실제 주어는 선과 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수인의 유학 사상을 본격적으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전문 연구서입니다. 처음에 소개한 번역서 전습록(12)과 함께 읽으면 여러분도 어렵지 않게 왕수인 사상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용

지도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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