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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중용장구서 - 2. 도통의 전해지지 않을까봐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중용장구서 - 2. 도통의 전해지지 않을까봐

건방진방랑자 2021. 9. 1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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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장구서 2. 도통의 전해지지 않을까봐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이것은 중용(中庸)‘preface’, ‘introduction’이 되겠죠.

 

 

 

中庸, 何爲而作也? 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
중용은 어떠한 목적으로 지었는가? 자사자가 도학이 그 전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지었다.

 

하위(何爲)’는 말 그대로 무엇을 위하여이며, 따라서 이 글은 분명한 질문의 센텐스입니다. ()은 새롭게 만든다. , 없던 걸 새로 지어낼 때 쓰는 말이죠.

 

자사자(子思子), 이 말은 좀 이상한 표현입니다. 공자의 손자가 자사(子思)인데 그러면 성()은 역시 공씨(孔氏)겠죠. 성에다 자()를 붙이려니 공자(孔子)’가 되어서 원래 공자와 중복되기 때문에 안 되겠고, 부득이하게 이름에다 자사자(子思子)라고 붙였는데 좀 어색하지요. 예를 들어 오항녕(吳恒寧)이란 사람을 오자(吳子)라 하지 않고 항녕자(恒寧子)라고 한 셈입니다. 그렇지만 주자는 지금 자사를 높여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자가 말하는 도통론(道統論)에서 빠져서는 아니 될 사람이니까 역시 자(, master)라는 최고의 존칭을 붙여 부르고 있는 거에요.

 

()염려하다’, ‘우려하다라는 뜻으로서 지금도 우환(憂患), 우국충정(憂國衷情)이란 말에서 잘 쓰입니다. 아마도 동양인들의 심성에 깊이 녹아 들어가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앙그스트(Angst, 불안, 공포, 고뇌)보다 깊이가 있는 말이지요.

 

자사자가 도학(道學)이 그 전()을 잃어버릴까 봐 중용(中庸)을 지었다[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

 

, 이것은 앞의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변입니다. 중용(中庸)이라는 책의 저작 동기, 그 목적을 밝히고 있어요. 그런데 도학(道學)이 실기전(失其傳)할까 염려하여란 말은 완전히 넌센스입니다. 왜냐하면 도학이라는 말은 원시(原始) 유가(儒家)에 도저히 해당될 수가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도학은 한참 뒤의 송나라 유학자들의 말(Neo-confucian phrase)이지 춘추 제자백가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사가 도학을 운운한다는 건 넌센스가 아닐 수 없어요.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아내고 확인하느냐? 여러분, 모로하시 테쯔지(諸橋轍次, 1883~1982)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알죠? 한학(漢學)을 하려면 반드시 봐야 할 사전입니다. 모두 13권인데 놀랍게도 모로하시 일인(一人)의 저작입니다. 서양의 지식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브리태니커에 필적할 거의 유일한 동양학 사전이지요. 일본 문명이 인류에 공헌한 위대한 업적중의 하나로서, 이걸 보지 않고는 한문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한자(漢字) 한 글자, 한 글자가 중국 고전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깡그리 보여주는 사전인데 이 사전에서 도학 조를 찾아보면 공자나, 자사 당시에는 이런 말이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사가 도학이 실기전(失其傳)’할까봐 중용(中庸)을 지었다는 주자의 말은 넌센스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도학(道學)이 실기전(失其傳)할까봐.” 하는 주자의 말이 주자가 중용(中庸)을 바라보는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도학지전(道學之傳)’은 불교에서 나온 말입니다. 불교에는 의발전수식이라는 전통이 강력한데요, 종교조직은 어디나 최고 권위자의 법통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전해 내려가는 길에 따라 정통과 이단이 갈리게 되고, 거기서 종파가 생겨나죠. 최근 우리나라 원불교의 종법사가 바뀌었죠. 불교 조계종에도 성철스님 다음에도 또 누가 종정이 되고 하잖아요.

 

여러분, ()ㆍ당()시대는 한마디로 불교 문명기였습니다. 송대(宋代)에 내려와서 불교에 대한 안티테제로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 일어났죠. 그런데 송대(宋代)에 이르른 시기의 어휘체계(vocabulary)는 어쩔 수 없이 불교 용어였습니다. 불교의 멘탈리티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거에요. 이런 측면 때문에 일본의 다산 정약용이라고 할 수 있는, 오규소라이(荻生徂徠)는 주자학을 불교의 아류라고 깠습니다만, 사실 송대 당시의 전체 분위기가 불교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건 오히려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자는 불교로부터 유교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호교론(Apologetics)으로서 중용(中庸)을 채택했던 것이죠. 헤겔식으로 보면, 중용(中庸)의 중()은 합(, synthesis)일 텐데 이 중()은 정(, thesis)과 반(, antithesis)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자가 이미 이단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중용장구(中庸章句)를 지었다는 뜻이에요. 사실 중용(中庸)을 지었다고 하는 자사도 제자백가 시대에 유교와 경쟁하고 있었던 많은 논적(이단)에 대한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자사 시대에만 하더라도 공자로부터 멀어졌으므로 순수한 유교에서 더 나아가 제자백가의 각 이론에 대한 논변(apologetics)이 생겼는데 그것이 중용(中庸)이란 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시대가 흘러 송대의 주자는 당시의 지배적 사상이던 노불(老佛)에 대한 아폴로지(apology)로서 중용(中庸)이 가장 유효하다는 시대의식을 갖고서 사서운동(四書運動)을 벌인 겁니다. 그래서 주자는 불교보다 더욱 강력한 도통론(道統論)을 간판으로 내걸었던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주자학의 근본적인 역사적 성격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蓋自上古聖神, 繼天立極, 而道統之傳有自來矣.
대저 상고로부터 성인(聖人)이 하늘을 이어 인간세의 기준을 세웠는데 그 도통(道統)의 전함이 유래가 있게 되었다.

 

상고(上古)는 하((() 이전의 고대를 일컫는 말로서 한대로부터 잘 쓰던 말이고, 이것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개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 이전의 복희·신농씨 때를 가리킵니다. 성신(聖神)맹자(孟子)』 「진심(盡心)에 용례를 보이고 있는 말입니다. ‘성인성인보다 한 차원 높은 신인이라는 말로서 이들은 도덕적 완성자가 아니라 고대에서는 천자(天子)를 가리키며 문명의 제작자들입니다. ()이나 신()이나 모두 하일리게(heilige, 경건한 사람)한 맛이 나는데 이는 제정일치시대의 성(()의 구분이 없는 상황을 반영합니다. 맹자(孟子)텍스트에 있어서도 신()은 성()보다도 개념적으로 한 단계 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천입극(繼天立極)하늘을 이어 극을 세운다는 말인데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서 나왔듯이 천()은 대자연의 천리(天理)를 말합니다. 극을 세운다는 것은 남극ㆍ북극과 같이 최고의 기준(ultimate standard)’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도통지전유자래의(道統之傳有自來矣)’는 말은 아까 말했듯이 주자 시대의 인식 관심이 깊숙이 개입된 거짓말이며 이것은 불교의 제도사적 관점에서나 가능한 말입니다. ‘도통(道統)’이라는 개념은 유교의 정통을 다시 세우려는 송유(宋儒)들이 만들어 놓은 특수한 시대적 개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말은 한유(韓愈)원도(原道)라는 책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나 도올이 서양의학과 싸운다고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이제마를 존경하고 있는 상황이라면(그렇지는 않겠지만) “이제마를 계승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많지 않겠습니까? 당시 주자도 노불(老佛)에 빠져있는 식자층에다 공자 이후로 내려오는 유학의 정통을 다시 부르짖으려는(to reclaim) 의도에서 그런 식의 도통론을 구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자는 그 도통(道統)의 유래를 자기들 유교의 경전 어디에서 찾아냈을까요? 그것은 서경(書經)입니다. 다음을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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