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구절로 압축되는 왕수인의 가르침
왕수인에게 마음(心), 의(意), 지(知), 물(物)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연결고리를 구성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이 네 가지 개념들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유학 사상을 포괄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마침내 왕수인의 시도는 하나의 정리된 형태로 확정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그의 제자들이 ‘사구교(四句敎)’라고 일컫는 명제였습니다. 사구교란 글자 그대로 ‘네 구절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왕수인의 유학 사상을 정리하려는 사람들은 “마음과 무관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통찰, 그리고 이로부터 유래하는 ‘사구교’만을 기억해도 무방합니다. 그 정도로 ‘사구교’는 왕수인의 사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것이 마음의 본모습이고,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의의 움직임이다. 선을 알고 악을 아는 것이 양지이고, 선을 실천하고 악을 제거하는 것이 격물이다. - 『전습록』 315
無善無惡是心之體, 有善有惡是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傳習錄』 315
무선무악시심지체, 유선유악시의지동, 지선지악시양지, 위선거악시격물.
왕수인은 마음의 본모습에는 선이나 악이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의 본모습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이 어렵게 들리나요?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전망이 탁 트인 전경을 보고 있습니다. 나무, 꽃, 풀, 구름, 개울이 한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마음, 다시 말해 훤히 열려 있는 마음이 바로 마음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본모습은 어느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흐리멍덩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의 본래 모습은 마치 비가 온 뒤 맑게 개인 풍광처럼 그렇게 탁 트이고 청량합니다. 왕수인은 바로 이런 마음의 본래 모습이 선악의 구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마음은 아직 어떤 구체적 대상에게로 움직이지 않은 마음, 그래서 오히려 모든 존재에 대해 열려 있는 근본적 마음이라고 볼 수 있지요.
나머지 세 구절의 가르침은 첫 번째 구절만큼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지요. 탁 트인 마음이 어떤 특별한 한 가지만을 지향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상태가 의(意)입니다. 그런데 의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의는 땅에 떨어진 지갑을 지향할 수도 있고, 심지어 그것을 몰래 가지는 행동을 지향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악한 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는 반대로, 의는 부모님, 나아가 부모님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행동을 지향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선한 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럼, 이제 양지(良知)에 대해 살펴볼까요? 왕수인은 자신의 의가 선한지 악한 지를 자각하는 능력을 양지라고 부릅니다. 이로부터 왕수인의 간결한 수양론이 등장합니다. 양지가 선하다고 자각한 것은 실천하고, 양지가 악하다고 자각한 것은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왕수인은 이것을 곧 격물(格物)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깊은 독자라면 ‘사구교’의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이 주희의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음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주희의 격물치지 공부는 외부 사물의 이(理)를 탐구하다가 어느 사이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앎을 달성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지요. 주희는 외부 사물에도, 그리고 내 마음에도 동일한 이가 내재되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외부 사물의 이를 제대로 탐구하기만 하면 그것이 내 마음의 이와 같다는 통찰을 얻게 됩니다. 주희는 외부 사물의 이를 탐구하는 것이 격물(格物)이고, 내 마음의 이를 자각하는 것이 곧 치지(致知)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주희에게는 격물이 먼저이고 치지는 그 다음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왕수인의 ‘사구교’는 격물과 치지에 대해 주희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희가 격물과 치지의 단계를 나눈 것과 달리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보았지요. 물론 왕수인이 생각한 의(意)가 어떤 사물(物)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의는 선한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악한 경우도 있을 수 있지요.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양지입니다. 양지란 곧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이니까요. 왕수인은 양지가 자각한 것을 관철시키는 것이 바로 치지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치지를 ‘치양지(致良知)’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좀더 설명해보도록 하지요. 의가 악한 행동을 지향할 때, 양지는 이것이 악하다는 것을 곧바로 자각합니다. 그렇다면 양지의 이런 판단을 관철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치지 또는 치양지이자 동시에 격물이라는 것이지요. 의가 지향하는 악한 행동을 거부하는 것이 바로 격물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왕수인은 격물과 치지가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구교(四句敎) | 체(體) | 선악의 구분에서 벗어난 탁 트인 마음 |
동(動) | 어떤 한 가지만을 지향할 때 | |
양지(良知) | 자신의 의가 선한지 악한 지를 자각하는 능력 | |
격물(格物) | 의가 지향하는 악한 행동을 거부하는 것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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