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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 순자

건방진방랑자 2022. 3. 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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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荀子)

욕망의 발견과 유학의 정치화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은 육체적으로 별로 뛰어난 점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인간이 위대한 존재인 것은 자연을 이용할 줄 알기 때문이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은 자연에 순응할 뿐, 적극적으로 개조하거나 변형하지는 못한다.

 

맹자와 다른 맥락에서 공자를 계승했던 순자가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인간이 가진 이러한 적극적 실천 능력이었다. 순자는 이것을 인위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부정했던 것 역시 이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부터 선하다면,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자는 인간의 선함이 노력에 의해서 후천적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성악설을 주장한 인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제자백가를 통솔했던 위대한 유학자, 순자

 

 

제사를 지낼 때 제사에 참여한 여러 사람을 대표하여 고인에게 술을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좨주(祭酒)라고 부릅니다. 가장 연장자이거나 가장 신망이 높은 사람만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순자(荀子, BC 298년경~BC 238년경)전국시대의 모든 지식인들을 대표하던 좨주의 자리에 무려 세 번이나 올랐던 대단한 인물입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흔히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립니다. 글자 그대로 제자백가는 여러 명의 선생들과 수많은 학파라는 뜻이지요. 중국 동방의 큰 나라였던 제()나라는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 수도 근처에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는 일종의 거대한 인문사회 연구소를 세웁니다. 그래서 이곳을 보통 직하학사(稷下學舍)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나라는 이곳에 참여한 지식인들에게 그 대가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펼치려던 지식인들이 일마 지나지 않아 제나라의 직하학궁으로 몰려들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직하학궁에서 거의 모든 쟁점이 논의되고 토론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국가에서 세운 연구소이긴 했지만, 국가를 부정하는 아나키즘(anarchism)을 신봉하던 사상가들이 여기로 모여들 정도였으니까요. 앞에서 다뤘던 맹자도 이곳을 거쳐갔던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맹자를 읽어보면 맹자가 제나라 군주 선왕(宣王)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이 선왕이 직하학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제나라의 막강한 군주였습니다. 선왕을 만났을 때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옹호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별다른 효과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던 선왕이 보았을 때, 맹자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꿈과 같은 주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선왕은 맹자를 매우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물론 맹자를 존경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왕은 맹자처럼 이상적인 주장을 하는 사상가도 포용한다는 인상을 다른 지식인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많은 지식인들이 안심하고 직하학사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자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는 직하학사의 모든 지식인이 인정하던 당대의 저명한 사상가였습니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했던 것과 달리,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던 사상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주장만큼 인간의 허영심을 쉽게 충족시켜주는 관념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고상한 종족이라는 인상을 주니까요. 이 때문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노골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던 순자의 생각은 그가 죽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강하게 거부됩니다. 특히 후대 사람들이 맹자를 공자와 묶어서 공맹(孔孟)’이라 부르면서부터 순자는 아예 이단적인 유학자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향을 가속화시킨 사람들은 바로 중국 송대의 주희를 대표로 하는 성리학자들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한번도 공자와 공자의 사상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위대한 사상가 중 최고의 자리를 항상 공자를 위해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순자는 맹자와 다른 방식으로 공자의 사상을 이해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순자의 비극은 맹자 식의 공자 이해가 그 이후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맹자와 순자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순자가 맹자보다 여러 면에서 탁월했음을 인정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순자를 동양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라고 이야기하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철학의 위대한 종합자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순자도 제자백가의 모든 사유 경향들을 정합적(整合的)으로 체계화한 종합자였습니다. 이는 그가 직하학사를 대표하던 일종의 대학 총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직하학사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면 그가 나서서 그 논쟁을 조율하고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순자의 사상은 모든 사상가가 납득할 정도의 정합성과 체계성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직하학사의 좨주를 세 차례나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순자는 모함 때문에 화려했던 제나라의 생활을 뒤로하고 초()나라로 정치적인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사상을 정리합니다. 순자의 체계적인 사상은 지금 순자(荀子)를 통해 전해지고 있지요.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순자 역시 맹자와 마찬가지로 공자의 사상을 새롭게 체계화함으로써 다시 살리려는 의지를 가졌던 유학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자연 질서와 인간 문명을 구별하다

 

 

순자는 무엇보다도 자연주의자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자연주의란 일체의 종교적 관점을 버리고 인간과 자연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통치자가 정치를 잘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간혹 듣곤 합니다. 그러나 홍수나 지진이 발생하는 것과 통치자의 정치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순자가 살았던 시절에는 자연재해와 통치자의 정치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매번 하늘과 땅에 규칙적으로 제사를 지내 하늘의 복을 구하는 것이 통치자의 중요한 임무이기도 했지요. 중국의 최고 통치자를 지칭하는 개념인 천자(天子)라는 말도 이런 종교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고 통치자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지요. 따라서 그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는 아들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이런 종교적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순자는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 사이에 필연적 연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고 과감하게 주장합니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하늘의 운행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이것은 성군으로 유명한 요임금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폭군이었던 걸임금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는다. 다스림으로 대응하면 길하지만, 혼란으로 대응하면 흉하다. 근본인 농사에 힘쓰고 비용을 절약하면 하늘도 사람을 가난하게 할 수 없고, 식량을 비축하고 때에 맞춰 활동하면 하늘도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없다. 도를 닦아 두 마음을 갖지 않으면 하늘도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수 없다. 그러므로 홍수나 가뭄도 사람을 굶주리게 할 수 없고, 추위와 더위도 사람을 병들게 할 수 없으며, 요상하거나 괴이한 것도 사람에게 재앙을 끼칠 수 없다. 근본인 농사를 도외시하고 비용을 사치스럽게 쓰면 하늘도 사람을 부유하게 할 수 없고, 식량을 축내고 움직임을 적게 하면 하늘도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 수 없고, 도를 위반하고 함부로 행동하면 하늘도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天行有常, 不爲堯存, 不爲桀亡. 應之以治則吉, 應之以亂則凶. 彊本而節用, 則天不能貧. 養備而動時, 則天不能病. 脩道而不貳, 則天不能禍.

천행유상, 불위요존, 불위걸망. 응지이치즉길, 응지이난즉흉. 강본이절용, 즉천불능빈. 양비이동시, 즉천불능병. 수도이불이, 즉천불능화.

 

그러므로 홍수나 가뭄이 일어나지 않는데도 굶주리게 되고, 추위와 더위가 혹독하지 않은데도 병들게 되며, 요상하거나 괴이한 일이 나타나지 않는데도 흉하게 된다.

故水旱不能使之飢渴, 寒暑不能使之疾, 祅怪不能使之凶.

고수한불능사지기갈, 한서불능사지질, 요괴불능사지흉.

 

(난세의 경우도) 때는 태평한 때와 같지만 재앙을 당하는 것이 태평한 때와는 다른데, (재앙을 당했다고 해서) 하늘을 원망할 수 없으니 그 원리가 그런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인간 사이의 구별에 밝으면 이런 사람을 지인(至人)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순자』 「천론

受時與治世同, 而殃禍與治世異, 不可以怨天, 其道然也. 故明於天人之分, 則可謂至人矣.

수시여치세동, 이앙화여치세이, 불가이원천, 기도연야. 고명어천인지분, 즉가위지인의.

 

 

유학 전통에는 천명(天命)’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주례를 만든 사람으로서 공자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주공이라는 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옛날 선대의 하()나라를 살펴보면, 하늘이 그들을 아끼고 보존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을 어기자 이제 그들은 천명을 잃었습니다. 지금 은나라를 살펴보면 하늘의 신령이 내리어 그들을 보존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어기자 이제 그들도 천명을 잃었습니다.”

 

이 구절은 서경(書經)』 「소고(召誥)편에 실려 있습니다. 상당히 종교적인 느낌이 들지요? 이것이 바로 유학의 유명한 천명론(天命論)의 시작입니다. 주공의 말에 따르면, 결국 통치자는 모두 하늘에 잘 보여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은 통치자가 다스리는 국가를 붕괴시켜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유학자인 순자는 천명론을 철저하게 거부합니다. 그에게 하늘은 초월적인 인격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순자에게 하늘은 단지 자연을 상징할 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순자는 성군으로 유명한 요임금이 통치를 하든지, 아니면 폭군으로 유명한 걸임금이 통치를 하든지 관계없이, 하늘이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물리적 대상일 뿐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지면, 이것은 하늘 탓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당시의 정치 관념에 비추어본다면, 백성들이 살기 어렵게 된 것은 당연히 통치자가 정치를 잘못하여 하늘이 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이해했겠지요.

 

그러나 순자는 인간이 행하는 정치적 일과 자연의 운행 과정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연 질서와 정치 질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과 인간은 확연히 구별되는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자연계해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순자는 인간의 능동적인 정치적 행위를 보다 더 중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순자의 입장이 당시의 관념과 비교해볼 때 얼마나 진보적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겠지요? 순자의 자연주의적 사유가 유학사상의 역사에서 곧바로 단절되었다는 점은 좀 아쉬운 일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한나라 초기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 BC 179BC 104)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는 순자의 자연주의적 입장을 버리고, 다시 전통적인 천명론으로 회귀했던 인물입니다. 동중서의 천명론은 흔히 천인감응(天人感應)’재이(災異)’라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천인감응은 하늘과 인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보는 입장이며, ‘재이는 자연재해가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벌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이 점에서 동중서는 합리적으로 구성된 순자의 유학 사상을 몇백 년 뒤로 다시 후퇴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중심적, 이성중심적 사유

 

 

순자는 하늘과 인간, 그러니까 자연 질서와 인간 문명을 명확히 구별하려고 애썼습니다. 나아가 그는 인간 문명의 힘이 자연 질서를 압도한다는 점을 보다 명확히 밝히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연 질서의 법칙을 이해하게 되면, 인간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는 순자의 이성주의적 발상입니다.

 

다음 글은 순자가 자신의 이런 정신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늘을 위대하게 여기고 그것을 사모하는 것과 사물을 길러서 그것을 통제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하늘을 추종하여 그것을 기리는 것과 하늘이 낳은 것을 통제하여 이용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계절을 바라보며 그것을 기다리는 것과 계절에 대응하여 그것을 활용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大天而思之, 孰與物畜而制之; 從天而頌之, 孰與制天命而用之; 望時而待之, 孰與應時而使之;

대천이사지, 숙여물축이제지; 종천이송지, 숙여제천명이용지; 망시이대지, 숙여응시이사지;

 

사물을 그대로 방치하고 그것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과 능력을 다해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사물을 사모하여 그대로 방치하는 것과 사물을 통제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사물이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바라는 것과 사물을 완성하는 능력을 갖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낫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을 버리고 하늘을 사모하게 되면, 만물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순자』 「천륜

因物而多之, 孰與理物而勿失之; 願於物之所以生, 孰與有物之所以成. 故錯人而思天, 則失萬物之情.

인물이다지, 숙여리물이물실지; 원어물지소이생, 숙여유물지소이성. 고착인이사천, 즉실만물지정.

 

 

분명 자연[]은 계절의 변화를 낳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러저러한 사물들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순자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자연이 계절과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그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능동적으로 계절에 대응하고 사물을 통제하라고 말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서양의 인간 중심적인 전통에 상당히 근접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성의 힘으로 자연의 법칙을 장악하여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키라는 주장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인간 중심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순자의 사유는 오히려 동양 사상의 전통에서 쉽게 오해받았고 무시되었다는 점입니다. 동양 사상의 전통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일종의 유기체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조화로운 전체로 사유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동양의 전통에서 자연을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파악하여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순자의 생각은 당연히 낯선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했던 이유

 

 

맹자성선설을 비판했던 고자의 주장이 아직도 생생한지요? 아마 여러분은 버드나무와 나무술잔의 비유를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고자는 인간의 본성을 살아 있는 버드나무에, 맹자가 말한 유학적 덕목들은 버드나무를 죽여서 만든 나무술잔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했지요. 나무술잔을 만들려면 반드시 버드나무에 인위적인 노력을 가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고자의 논점은 인위적인 노력을 강조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유학의 덕목들이 사람의 생명력을 죽이고 말 것이라는 점을 경고했습니다. 고자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다시 꺼낸 이유는, 이야기의 논점은 다르지만 순자의 성악설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주기 때문입니다. 순자가 고자와 갈라지는 지점은 그들이 인위적인 노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에 있습니다. 그럼 순자의 이야기를 읽고 분석해보도록 하지요.

 

 

굽은 나무는 반드시 도지개를 대고 쪄서 바로잡은 뒤에야 곧아지며, 무딘 쇠는 반드시 숫돌에 간 뒤에야 날카로워진다. 지금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한 것은 반드시 스승과 법도가 있은 뒤에야 바르게 되고 예의를 얻은 뒤에야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枸木必將待檃括烝矯然後直. 鈍金必將待礱厲然後利. 今人之性惡, 必將待師法然後正, 得禮義然後治.

구목필장대은괄증교연후직. 둔금필장대롱려연후리. 금인지성악, 필장대사법연후정, 득례의연후치.

 

지금 사람들에게 스승과 법도가 없다면 치우치고 음험해서 바르지 않게 될 것이고, 예의가 없다면 이치에 어긋나는 어지러운 짓을 해서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다. 옛날 성왕께서는 사람들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치우치고 음험하며 바르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는 어지러운 짓을 해서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今人無師法則偏險而不正, 無禮義則悖亂而不治. 古者聖王以人之性惡, 以爲偏險而不正, 悖亂而不治,

금인무사법즉편험이부정, 무예의즉패난이불치. 고자성왕이인지성악, 이위편험이부정, 패난이불치.

 

그러므로 이를 위해 예의를 만들고 법도를 제정해서 사람들의 감정과 본성을 가꾸고 변화시킴으로써 이를 올바르게 인도했다. 비로소 사람들은 모두 잘 다스려지게 되었고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

是以爲之起禮義制法度, 以矯飾人之情性而正之, 以擾化人之情性而導之也, 使皆出於治, 合於道者也.

시이위지기예의제법도, 이교식인지정성이정지, 이요화인지정성이도지야, 사개출어치, 합어도자야.

 

지금 사람들은 스승과 법도에 교화되어 학문을 쌓으며 예의를 실천하는 사람을 군자라고 하고, 본성과 감정을 멋대로 버려두고 멋대로 행동하는 데 안주하며 예의를 어기는 자를 소인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살펴보자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선하게 되는 것은 인위적인 결과이다. 순자』 「성악

今之人, 化師法, 積文學, 道禮義者謂之君子. 縱性情, 安恣睢而違禮義者爲小人. 用此觀之, 然則人之性惡明矣, 其善者僞也.

금지인, 화사법, 적문학, 도례의자위지군자. 종성정, 안자휴이위례의자위소인. 용차관지, 연즉인지성악명의, 기선자위야.

 

 

굽은 나무를 바르게 만들려면, 또는 무딘 쇠를 날카롭게 만들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순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져야만 곧은 나무나 날카로운 쇠가 만들어지겠지요.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란 굽은 나무나 무딘 쇠처럼 천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본성이란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자연물과도 같다고 말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인간에게도 숫돌과 같은 인위적인 조작이 필요할 것입니다. 순자는 그것이 바로 스승, 법도, 예의와 같은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자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가 말한 이란 단어에는 윤리적인 의미가 별로 담겨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순자는 악하다는 표현을 단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리키려고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악(性惡)’이란 표현도 인간의 본성은 거칠다는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여기서 순자의 자연주의적 정신이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순자가 말한 본성은 문명 상태와 대조되는 자연 상태를 의미했기 때문이지요. 그는 거친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공동체 생활에 많은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점을 해결하고자 성왕(聖王)이 등장하여 예의와 법도를 제정했다고 보는 것이 순자의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분은 이제 성왕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당히 정치적 색채가 짙은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순자에게 성왕은 단순한 윤리적 인격자가 아닙니다. 성왕은 무엇보다도 규범과 제도의 창조자로 인식된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는 문명과 문화의 절대적 창조자였던 셈이지요. 이제 성왕을 제외한 인간들에게 남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종류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하나는 성왕이 만든 규범과 제도에 따라서 자신의 거친 본성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순자는 이런 사람을 군자라고 이야기하지요. 다른 하나는 규범과 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거친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순자는 이런 사람을 바로 소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순자의 생각에 따르면, 군자는 문명인이고 소인은 야만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자(君子) 성왕이 만든 규범과 제도에 따라서 자신의 거친 본성을 바로잡는 것
소인(小人) 규범과 제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거친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

 

 

, 이제 순자 성악설의 마지막 결론을 음미해보도록 하지요.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선하게 되는 것은 인위적인 결과이다라고 순자는 말합니다. 순자의 결론에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중요한 개념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라는 개념입니다. 그는 인간이 선해질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인위적인 노력, 에 있다고 말합니다. 인위적 노력을 나타내는 ''라는 글자는 지금 거짓이나 허위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지만, 이 글자의 구성을 한번 살펴볼까요? ‘사람을 뜻하는 ()’과 행동을 뜻하는 ()’가 합해져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따라서 라는 개념은 글자 그대로 사람의 적극적인 행동이나 인위적인 노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순자의 논의는 결국 본성과 인위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데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전자는 인간에게 주어진 거친 삶의 모습 자체를 가리킵니다. 반면 후자는 그 거친 자연 상태의 모습을 세련된 문명 상태의 모습으로 바꾸려는 인위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무딘 쇠가 숫돌로 가는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날카로운 쇠가 되듯이 말이지요. 순자는 이런 입장에 근거해서 맹자성선설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과 규범의 강제력을 받아들이다

 

 

이제 그가 어떻게 맹자를 공격했는지 살펴보도록 할까요?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무릇 예로부터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이 선이라고 말한 것은 올바르고 질서 있고 공평하고 다스려진 것이었고, 악이라고 말한 것은 치우치고 음험하고 어긋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은 선함과 악함의 구분일 따름이다.

孟子曰: “人之性善.” : “是不然.” 凡古今天下之所謂善者, 正理平治也. 所謂惡者, 偏險悖亂也. 是善惡之分也已.

맹자왈: “인지성선.” : “시불연.” 범고금천하지소위선자, 정리평치야. 소위악자, 편험패난야. 시선악지분야이.

 

지금 진실로 사람의 본성을 올바르고 질서 있고 공평하고 다스려진 것으로 생각한다면, 성왕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예의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록 성왕과 예의가 있다 할지라도 올바르고 질서 있고 공평하고 다스려진 것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지금 보면 그렇지 않으니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성인들은 사람들의 본성을 악하다고 여겼고, 그들이 치우치고 음험해서 바르지 않으며 어긋나고 혼란스러워 다스려지지 않았다고 여겼다.

今誠以人之性固正理平治邪? 則惡用聖王? 惡用禮義矣哉? 雖有聖王禮義, 將曷加於正理平治也哉? 今不然, 人之性惡. 故古者聖人以人之性惡, 以爲偏險而不正, 悖亂而不治,

금성이인지성고정리평치야? 즉악용성왕? 악용예의의재? 수유성왕예의, 장갈가어정리평치야재? 금불연, 인지성악. 고고자성인이인지성악, 이위편험이부정, 패난이불치,

 

그 때문에 군주의 권세를 세워 그들 위에 군림하도록 했고, 예의를 밝혀서 그들을 교화했으며, 올바른 법도를 만들어 그들을 다스렸고, 형벌을 무겁게 해서 그들의 악한 행동을 금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잘 다스려졌고 선함에 부합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왕의 다스림이고 예의의 교화이다.

故爲之立君上之埶以臨之, 明禮義以化之, 起法正以治之, 重刑罰以禁之, 使天下皆出於治, 合於善也. 是聖王之治而禮義之化也.

고위지립군상지예이임지, 명예의이화지, 기법정이치지, 중형벌이금지, 사천하개출어치, 합어선야. 시성왕지치이예의지화야.

 

지금 시험 삼아 군주의 권세를 없애고 예의를 통한 교화를 없애며, 올바른 법도의 다스림을 없애고 형벌에 의한 금지를 없애고서, 세상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만약 이와 같다면 곧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해치며 그들의 것을 빼앗을 것이고, 수가 많은 자들이 적은 자들에게 난폭하게 굴면서 그들을 짓밟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긋나고 혼란스러워져 한참을 기다릴 것도 없이 망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선하게 되는 것은 인위적인 결과이다. 순자』 「성악

今當試去君上之埶, 無禮義之化; 去法正之治, 無刑罰之禁; 倚而觀天下民人之相與也; 若是, 則夫彊者害弱而奪之, 衆者暴寡而譁之, 天下之悖亂而相亡不待頃矣. 用此觀之, 然則人之性惡明矣, 其善者僞也.

금당시거군상지예, 무례의지화; 거법정지치, 무형벌지금; 의이관천하민인지상여야; 약시, 즉부강자해약이탈지, 중자폭과이화지. 천하지패난이상망부대경의. 용차관지, 연즉인지성악명의, 기선자위야.

 

 

선과 악에 대한 맹자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윤리학적 의미를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맹자의 성선설이 기억나지요? 맹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대표되는 선한 감정 또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이 선한 감정을 따르면 누구나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이런 선한 감정을 거부하고 멋대로 행동할 때 우리는 결국 악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맹자의 성선설은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선한 본성과 그 본성에 대한 인간 주체의 윤리적인 결단과 밀접하게 관련된 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맹자의 주장에는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차원의 논의가 불필요했던 것이지요.

 

이와는 달리, 선악에 대한 순자의 생각은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인 의미를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그에게 이란, 기본적으로 성왕이 창조한 사회적 제도나 규범을 주체가 학습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선함이란 일종의 사회화의 결과라는 뜻이지요. 한편 순자가 말한 은 사회적 무질서의 상태, 일종의 자연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성왕이 창조한 문명을 학습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순자의 성악설이 불가피하게 외적인 강제력을 긍정하는 논의로 귀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순자는 결국 국가의 공권력과 규범의 강제력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공격하면서, 그에게 핵심적인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만약 맹자의 말대로 인간이 스스로 선해질 수 있다면, 군주로 대표되는 국가 질서와 예의로 대표되는 사회 규범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사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이 스스로 완전한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논의였지요. 순자가 맹자의 성선설을 집요하게 문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점 때문입니다. 맹자의 성선설을 따르면 국가 질서와 사회 질서를 정당화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정치적 권력과 규범적 질서를 정당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권력과 권위가 스스로 선해질 수 있는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겠지요.

 

() 성왕이 창조한 사회적 제도나 규범을 주체가 학습한 상태
() 사회적 무질서의 상태, 일종의 자연 상태

 

 

 

 

()를 새롭게 정당화하다

 

 

공자는 인자(仁者)가 되기 위해 주나라에서 내려온 예를 배워야만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맹자에 이르러 공자가 말했던 외재적인 예는 이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본성으로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사양지심이라는 마음으로 말이지요. 이에 반해, 순자는 내면에 사로잡힌 예를 다시 외부로 꺼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성악설을 주장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는 사양지심(辭讓之心)과 같은 도덕적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이 선해지기 위해서는 외재적인 예의 학습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지요. 순자에 이르러 예는 다시 성왕(聖王)이 창조한 문명 제도라는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숙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외적인 제도로서의 예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먼저 순자는 예를 정치ㆍ경제학적 입장에서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보도록 하지요.

 

 

예는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대답하기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을 가지고 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욕망을 추구하는 데 일정한 분수와 한계가 없으면 서로 다투지 않을 수 없다. 서로 다투면 사회는 혼란하게 되며, 혼란해지면 재화가 부족하게 되니, 선왕(先王)은 이러한 혼란을 싫어했다.

禮起於何也? , 人生而有欲, 欲而不得, 則不能無求, 求而無度量分界, 則不能不爭. 爭則亂, 亂則窮, 先王惡其亂也,

예기어하야? , 인생이유욕, 욕이부득, 즉불능무구, 구이무도량분계, 즉불능부쟁. 쟁즉란, 란즉궁, 선왕악기란야.

 

그러므로 그는 예의를 제정하여 사람마다 분수를 나누고 이 분수에 따라 사람의 욕망을 길러주고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었다. 선왕은 사람의 욕망이 결코 재화를 바닥내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했고, 재화가 욕망 때문에 바닥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욕망과 재화가 서로를 유지하며 발전하도록 했다. 이것이 예가 생겨난 까닭이다. 순자』 「예론

故制禮義以分之, 以養人之欲, 給人之求, 使欲必不窮乎物, 物必不屈於欲, 兩者相持而長, 是禮之所起也.

고제례의이분지, 이양인지욕, 급인지구, 사욕필불궁호물, 물필불구어욕, 양자상지이장, 시례지소기야.

 

 

순자가 예를 정당화하는 기본 전제는 매우 단순하지만 또 그만큼 설득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만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재화는 부족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질서가 초래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재화를 얻기 위해 인간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하게 될 테니까요. 완전한 야만의 상태, 철저한 아노미(anomie)의 상태가 초래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결국 인간들 상호 간의 살육과 파괴로 이어질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초인처럼 성왕이 등장하게 됩니다. 물론 성왕의 해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예의라는 차별적인 규범을 제정하여, 각자의 신분에 맞게 욕망을 절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군주가 열 개를 먹으면, 신하는 다섯 개를 먹고, 백성들은 세 개를 먹도록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재화가 떨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통치계층 중심적인 발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식의 집단심리학적 특성

 

 

그러나 예를 정당화하려는 순자의 노력은 아주 현실주의적입니다. 그는 정치ㆍ경제학적인 입장에서 예를 정당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집단심리학적인 측면에서도 정당화하려고 시도합니다. 매우 흥미로운 논증이므로 함께 살펴보도록 하지요.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대답하기를, 아무런 이유도 없으니 기우제를 지내지 않아도 비가 내리는 것과 같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면 재앙을 제거하려 하고, 하늘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고, 점을 친 뒤에야 국가 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것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예를 통해 꾸미려는 것뿐이다.

雩而雨, 何也? : 無何也. 猶不雩而雨也. 日月食而救之, 天旱而雩, 卜筮然後決大事, 非以爲得求也以文之也.

우이우, 하야? : 무하야. 유불우이우야. 일월식이구지, 천한이우, 복서연후결대사, 비이위득구야이문지야.

 

그러므로 군자는 예식을 꾸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백성들은 예식에 신묘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꾸미는 것으로 생각하면 길하지만, 신묘하다고 생각하면 흉하다. - 순자』 「천륜

故君子以爲文, 而百姓以爲神. 以爲文則吉, 以爲神則凶也.

고군자이위문, 이백성이위신. 이위문즉길, 이위신즉흉야.

 

 

기우제란 무엇인가요? 농경사회에서 비가 오지 않는 것처럼 비극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이때 제사를 지내 비가 오도록 하는 예식이 바로 기우제이지요. 과연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릴까요? 분명 말도 안 되는 미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순자도 이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우제라는 예식을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아가 전쟁 같은 큰 일을 앞두고 군주도 점을 친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점괘가 좋다 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분명 미신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순자는 군주의 점치는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먼저 기우제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연재해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 지금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언젠가 올 거라고 묵묵히 기다리지도 못합니다. 바로 이럴 때 기우제를 지내면, 모종의 착각과 위안을 얻게 됩니다. 만약 기우제를 지냈을 때 요행히 비가 내린다면, 인간은 자신이 비가 오도록 하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했다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인간은 완전히 절망하기보다 자신의 정성이 부족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 될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비가 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마치 자신의 노력과 정성 때문이라는 전도된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고 있으면, 인간의 절망은 나름대로 위로받을 수 있겠지요. 순자가 주목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기우제가 미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는 정신적 위로의 힘 때문에 기우제 지내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다음으로, 전쟁의 결과에 대해 점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지요. 만약 군주가 점을 쳐서 전쟁에서 길하다는 점괘를 받는다면, 백성들은 아마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 군주는 점을 반대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군주가 보았을 때 승리할 가능성이 없는 전쟁도 분명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대부분의 신하들과 백성들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때 군주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점을 쳐본 뒤 점괘가 흉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쟁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을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겠지요.

 

지금 순자는 예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집단심리학적 기제로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군자는 예식을 꾸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백성들은 예식에 신묘한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故君子以爲文, 而百姓以爲神]”고 말했던 것입니다. 비록 통치자 입장에서 예의 효용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순자의 생각은 지금의 입장에서 보아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점이나 미신을 믿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까요. 이렇듯 동양의 철학자들 가운데 순자처럼 예식이 가진 집단심리학적 특성을 엄밀하게 통찰했던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저주받은 유학자의 운명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했습니다. 순자는 공자가 강조했던 예의 외재성과 객관성을 회복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순자가 본성과 인위를 나눠서 본 관점이지요. 인간의 본성은 자연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에,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문명 상태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 이후 유학의 역사에서 맹자가 주류 유학자로 등장하면서, 순자의 철학적 통찰력은 어둠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신의 내면에 선한 본성이 있어서 언제든지 노력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맹자의 낙관적 주장이 지식인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지요.

 

반면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을 혐오하는 자기 파괴적인 주장으로 이해되었고, 심지어 저주받게 되었습니다. 순자 인성론의 핵심적인 개념이었던 ()’라는 글자의 운명이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능동적 실천을 뜻하던 글자가 이제 와서는 거짓이나 허위를 뜻하는 글자로 변질되었으니까요. 맹자는 공자의 유학 사상을 변호하려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맹자의 성선설은 공자에게는 매우 낯선 요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히려 극기복례(克己復禮)해야만 인자가 된다는 것이 공자의 핵심 견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공자는 인간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점에서 순자는 분명 공자를 충실하게 따랐던 유학자라고 말할 수 있지요. 나아가 그는 공자가 하지 못했던 것, 다시 말해 예를 정당화하려고 다각도로 모색했습니다. 정치ㆍ경제학적인 입장에서 정당화하기도 하고, 심지어 집단심리학적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예를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순자의 성악설은 예라는 규범적 질서뿐만 아니라 국가라는 정치적 질서마저도 정당화하는 이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외적인 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 성악설의 핵심 주제였으니까요. 이것은 결국 예()나 국가와 같은 외적인 강제력을 긍정하는 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사(李斯, ?~BC 208)한비자(韓非子, BC 280년경~BC 233)와 같은 법가(法家) 사상가들이 그의 제자였다는 사실이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지요. 이사나 한비자가 자신의 스승 순자와 다른 지점은 단지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은 두 제자가 결코 공자의 유학 사상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지요. 이는 물론, 그들이 공자나 순자가 강조했던 예를 타당한 사회적 규범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의 자리를 강력한 실정법, 즉 법으로 대치했습니다. 아마 순자의 유학 사상이 빛을 보지 못한 이유가, 두 제자의 악명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나라는 진나라를 대신하여 제국이 된 왕조입니다. 알다시피 진나라의 이념적 토대는 이사나 한비자가 주창한 법가 사상이었지요. 진나라를 붕괴시킨 한나라는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법가 사상에서 찾았습니다. 나아가 한나라는 통치의 이념적 토대를 유학 사상으로 결정합니다. 결국 이런 분위기에서 순자는 그의 두 제자와 함께 한 묶음으로 분류되어 저주받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맹자를 높이고 순자를 누르던 관례는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물론 과거 역사에서 순자의 가치를 알아주던 유학자가 한 명도 출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순자를 재발견한 유학자는 중국의 유학자도 조선의 유학자도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에서 순자가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순자를 복원시킨 사람은 바로 오규 소라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도 잠시일 뿐, 여전히 순자는 대개의 경우 오해와 망각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더 읽을 것들

 

 

1. 순자(김학주, 을유문화사, 2001)

이 책은 순자에 대한 번역서 중에 가장 신뢰할 만합니다. 한문학의 전문가답게 김학주는 순자원문 특유의 뉘앙스와 논리까지도 번역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순자에 담겨 있는 사상을 가장 쉽고 편안하게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번역서는 각 절마다 원문을 싣고, 아울러 상세한 해제와 해설을 붙여놓았습니다. 이 부분은 순자의 체계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됩니다.

 

 

 

2. 순자(장현근, 책세상, 2002)

장현근의 책은 순자32편 가운데 순자의 유학 사상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일곱 편을 발췌하여 옮긴 책입니다. 순자전체를 직접 읽기가 버거운 독자들에게 좋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 발췌한 일곱 편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육에 대한 순자의 생각을 알려주는 권학, 다른 학파에 대한 순자의 비판을 기록한 비십이자, 순자의 정치철학을 다룬 왕제, 순자의 경제학을 보여주는 부국, 순자의 자연주의적 정신이 잘 드러난 천론, 예를 정당화하는 순자의 논리를 보여주는 예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순자의 논리가 전개된 성악편이 실려 있습니다.

 

 

 

3. 순자: 통일제국을 위한 비판철학자(윤무학, 성균관대출판부, 2004)

이 책은 유학의 입장에서 선진철학을 비판적으로 집대성했던 순자의 생애를 개괄하고, 나아가 순자의 유학 사상이 가진 고유성을 연구한 책입니다. 순자의 유학 사상을 철저한 분석과 비판을 토대로 구성한 체계이지요.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순자가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토대로 양자 사이의 통일을 지향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장에는 순자 유학 사상의 특징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어 일반인이나 전문가들이 참고하기 편리합니다.

 

 

 

인용

지도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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