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당수에 내리던 비를 상상하며②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에 대해 철학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우발성’을 주장하는 입장인 반면 뱃사람들은 ‘필연성’을 주장하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필연성을 믿는 것이 초래할 수도 있는 일종의 완고함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비와 심청 사이에는 ‘우발성’이 있을 뿐이라고 충고하더라도, ‘필연성’을 믿고 따르는 뱃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확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심청을 인당수에 던졌는데 비가 전혀 그치지 않았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는 즉각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인당수의 비와 심청의 희생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잖아요.” 그러나 뱃사람들은 양자 사이의 관계가 우발적이라는 우리의 생각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인당수에 던져 넣을 또 다른 처녀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될 것입니다. 용왕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다른 희생물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언제까지 인당수에 불쌍한 처녀들을 던져 넣으려는 것일까요? 아마 인당수에 비가 그칠 바로 그 순간까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들은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말할 것입니다. “이것 봐. 역시 인당수에 희생물을 바쳐야 폭풍우가 그친다니까.”
아마 ‘필연성‘을 확신하는 뱃사람들과 같은 이들은 지금도 인당수에 불쌍한 처녀들을 계속 던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인간에 대해 가혹한 폭력을 자행했던 모든 미신과 종교의 뿌리에는 바로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필연성‘에 대한 맹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맹신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은, 어찌 보면 인간의 나약함으로부터 연유하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인당수의 폭풍우에 직면했던 뱃사람들은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죠.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는 강력한 자연의 힘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죽는 것을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할 만큼의 당당함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인가를 해야 했겠죠. 비록 그것이 심리적 안도감만을 가져다주는 기만적인 희생 의례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폭력에 대한 동물의 반응은 나약한 인간의 자기기만적인 행동과는 사뭇 다릅니다. 가뭄이 계속되어 먹을 것이 없더라도 짐승들은 그냥 묵묵히 버틸 뿐입니다. 그들은 결코 울부짖거나 두려워서 소동을 벌이지도 않습니다. 언젠가 비가 오기만을 말없이 기다릴 뿐이지요. 인간은 스스로 자신이 이룬 문화나 문명을 자랑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인간이 이루어놓은 문화나 문명이란 인간이 가진 이런 원초적 나약함 그리고 정신의 자기기만 행위로부터 출현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순자(荀子, BC 313?~238?)【순자는 보통 맹자가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사상가라고 이해되고 있으며, 중국을 지배하던 맹자 전통의 유학사상에서 거의 이단적인 인물이거나 이류 철학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 즉 제자백가 중 가장 포괄적인 철학 체계를 구성했던 위대한 자연주의 철학자로서, 중국의 아리스토텔레스로 불릴 만한 인물이다. 그의 사상은 『순자』라는 책에 정리되어 있다】라는 중국의 자연주의 사상가도 이 점을 일찌감치 눈치 챘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는 온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면 그 재난을 막는 의식을 행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며, 점을 쳐본 뒤에야 큰일을 결정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바라는 것이 얻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형식을 갖추어 위안을 얻는 것일 뿐이다. 『순자(荀子)』 「천론(天論)」
雩而雨, 何也? 曰: 無何也. 猶不雩而雨也. 日月食而救之, 天旱而雩, 卜筮然後決大事, 非以爲得求也以文之也.
순자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시대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가 살았던 시대는 모든 사건 속에 반드시 숨겨진 필연성이 있다고 맹신하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순자라는 사상가가 탁월했던 이유는 그가 이런 맹신의 분위기에 결코 젖어 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고 믿고 있을 때, 그는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비가 오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점에서 순자는 ‘우발성’의 의미를 발견했던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기우제라는 필연성의 논리 이면에서, 인간의 자기기만이나 자기 위로라는 정신의 메커니즘을 발견하게 됩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비가 절대적이지 않았습니까? 비가 안 온다고 마냥 하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겠죠. 뭐 그렇다고 해서 뾰족하게 달리 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바로 이런 불안감과 무기력감 속에서 기우제란 의례를 거행하면서, 인간은 스스로를 위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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