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 소라이(荻生徂徠)
측은지심의 발견으로 유학의 수양론을 만들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라는 유명한 현대 사상가는 일본 근대 정치사상의 기원을 어느 유학자로부터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는 바로 이토 진사이를 비판했던 오규 소라이라는 또 다른 고학파의 한 인물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오규 소라이를 중시했던 이유는, 그가 정치와 윤리의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규 소라이는 유학 사상의 핵심을 윤리가 아닌 정치에서 찾았던 사상가이다. 그는 성인을 윤리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문명 제도를 창조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일본 근대성의 문제를 규명한 학자들이, 오규 소라이의 생각에서부터 메이지 유신이라는 제도 개혁을 단행했던 메이지 천황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유학의 기원으로 올라간 유학자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5대 쇼군(將軍)은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였습니다. 쓰나요시의 총애하는 가신(家臣) 가운데 야나기자와 요시야스(柳澤吉保, 1658~1714)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가신 요시야스가 관할하던 영지에 해결하기 난감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떤 농민이 생활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집과 전답, 게다가 아내마저 버리고 도망친 것입니다. 그나마 그 농민은 어머니만은 버리지 않고 함께 동행했다고 합니다. 물론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걸해야 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곧 병이 깊이 들었고, 농민은 어쩔 수 없이 길가에 어머니를 버리고 혼자 에도(江戶), 즉 지금의 도쿄(東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버려진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요시야스의 영지로 이송되었고, 마침내 그 아들은 어버이를 유기한 죄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스는 수하에 있는 유학자들을 불러 그의 처벌에 대해 자문을 구했습니다. 과연 이 농민에 대해 부모 유기죄가 성립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유기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농민의 사적인 동기에 주목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주희의 유학 사상이나 이토 진사이의 유학 사상이 반영되어 있지요. 만약 그가 어머니를 유기하려 했더라면, 애초에 어머니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구걸을 하면서까지 어머니를 봉양해서 자식의 도리를 끝까지 지키려 했다는 점도 참작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를 길가에 버리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뿐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 농민은 결코 어머니를 버리려는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 유기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석에 앉아 있던 어느 젊은 유학자가 이 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증상사(增上寺)라는 절에서 젊은 스님들을 가르치다가 절 주지의 추천을 받아 최근에 요시야스의 휘하에 들어온 유학자였습니다.
젊은 유학자는 선배 유학자들과 다른 입장을 요시야스에게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기근이 밀어닥친다면 이런 일은 다른 영지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사건의 주된 책임은 영지를 책임지고 있는 모든 관료에게 있습니다. 결국 어머니를 유기한 농부의 책임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말석에 앉아 있던 젊은 유학자는 부모 유기죄에 대한 책임을 농민 한 사람의 마음, 즉 그의 사적인 동기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농민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유기하도록 만든 객관적인 정치 상황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요시야스는 젊은 유학자의 발언에 탄복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젊은 유학자가 우리가 곧 살펴보려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06~1728)입니다.
방금 살펴본 일화는 오규 소라이의 유학 사상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줍니다. 그의 철학적 입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라이가 이토 진사이를 포함한 유학의 도덕주의를 넘어서서 유학의 전통을 정치철학으로 다시 읽어내려 했다는 점입니다. 진사이는 주희가 완성했던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의 정신을 비판했지만, 공자와 맹자의 진정한 가르침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유학자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도 공맹의 도덕적 유학의 전제를 인정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진사이에 비해 소라이는 더 먼 과거로 나아갑니다. 그는 공자를 넘어서 요임금과 순임금으로 대표되는 고대의 선왕(先王)들의 정신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소라이에게 유학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정치철학, 즉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도(道)와 다름없었습니다.
보통 진사이와 소라이의 유학을 모두 고학(古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진사이가 개인의 도덕성에 주목하여 경전의 의미를 읽어냈다면, 소라이는 그보다 객관적인 정치철학적 입장에서 경전에 언급된 정치 제도를 읽어내려고 했습니다. 이로써 진사이의 고학을 흔히 고의학(古義學)이라고 부르고, 소라이의 고학을 고문사학(古文辭學)이라고 구별하여 부릅니다. 즉 진사이가 고대 유학 경전의 의미를 탐구한 반면, 소라이는 고증적ㆍ훈고적 입장에서 고대 경전의 내용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소라이는 경전의 글자 하나하나와 경전의 구성 시기 등을 엄밀하게 분석하는 고증학적 태도를 중시했습니다. 소라이가 이런 지루한 작업을 중시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방식을 거쳐야만 유학 경전에서 말하려는 당시의 정치적ㆍ사회적 논의들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한편 유학 경전에 대한 평가에서 주희와 진사이 그리고 소라이의 관점의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주희가 사서(四書) 중 『중용』과 『대학』을 중시했다면, 진사이는 사서 중 『논어』와 『맹자』를 특히 중시합니다. 이와 달리 소라이는 사서를 넘어서 오히려 육경(六經)의 가치를 더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소라이의 육경 중심주의와 그의 정치철학은 『변도(弁道)』와 『변명(弁名)』이라는 글에 압축되어 지금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희의 주장
주희는 인간은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모두 동일한 이(理), 즉 본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는 이런 주희의 생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은유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한 개의 달, 천 개의 강물, 그리고 천 개의 강물 속에 비친 달그림자. 이것들은 각각 초월적인 하나의 이와 다양한 개체들, 그리고 개체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를 상징합니다. 또한 천 개의 강물에 비유되는 다양한 개체들을 기(氣)라는 개념으로 불렀음을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주희는 이러한 초월적인 이를 ‘본연지성(本然之性)’이라고 부르고, 개체들에 내재되어 있는 이를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에 대한 주희의 입장을 들어보도록 하지요.
기질지성은 다만 본성이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이므로 기질을 따라 자연히 하나의 본성이 되니, 바로 주자께서 말씀하신 각기 그 본성을 하나로 한다는 것이다. 만약 원래 본연지성이 없다면, 기질지성 또한 어디로부터 올 수 있었겠는가? - 『주희집(朱熹集)』 (58: 25) 「답서자융(答徐子融)」
氣質之性, 只是此理墮在氣質之中, 故隨氣質而自爲一性, 正周子所謂各一其性者. 向使元無本然之性, 則此氣質之性又從何處得來耶?
기질지성, 지시차리타재기질지중, 고수기질이자위일성, 졍주자소위각일기성자. 향사원무본연지성, 즉차기질지성우종하처득래야?
주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는 동일한 본연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본연지성이 개체에 내재할 경우, 이것은 개체가 가진 고유성 때문에 제한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희는 개체가 가진 고유성이나 개별성을 기질(氣質)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본연지성이 기질의 제한에 따라 부분적으로 제각기 차이 나게 드러난 모습을 주희는 기질지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기질지성은 개체들의 기질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드러나는 본연지성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똑같은 달이라 할지라도 탁한 강물에 비칠 경우와 맑은 강물에 비칠 경우 전혀 다른 달그림자로 드러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탁한 강물이나 요동치는 강물에서는 달그림자의 빛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체의 기질이 탁하거나 불안정할수록 본연지성은 제대로 드러날 수 없게 되겠지요.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을 가장 잘 보존하려면 강물이 맑고 안정되어야 합니다. 결국 이것은 개체의 기질도 맑고 고요할수록 그만큼 본연지성을 잘 실현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요. 여기에서 주희의 유명한 주장, 즉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변화기질(變化氣質)의 주장이 도출됩니다. 누구나 노력을 통해 자신의 기질을 맑고 고요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지요.
인간의 개별성에 대한 긍정
그러나 소라이는 주희가 제안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도식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는 단지 개체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기질만을 긍정할 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 뒤에 논의를 진행하도록 하지요.
기질이란 하늘의 성(性)이다. 인력으로 하늘을 이겨서 타고난 것을 바꾸려고 해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할 수 없는 일을 사람들에게 하도록 강요한다면, 마침내 그 사람들이 하늘과 부모를 원망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성인의 도는 결코 이렇지 않았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매 경우마다 그들의 재질에 따라서 완성시켜주었다. 『변도』 14
氣質者, 天之性也. 欲以人力勝天而反之, 必不能焉. 强人以人之所不能, 其究必至於怨天尤其父母矣. 聖人之道必不爾矣. 孔門之敎弟子, 各因其材以成之.
기질자, 천지성야. 욕이인력승천이반지, 필불능언. 강인이인지소불능, 기구필지어원천우기부모의. 성인지도필불이의. 공문지교제자, 각인기재이성지.
소라이는 기질, 즉 개체들이 가진 개별성 자체는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태어난 그대로의 개체성이 바로 기질이라는 것이지요.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한 남자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의 기질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해력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말하자면 이 아이는 운동하거나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기질을 타고났지만, 복잡한 암산을 하거나 어려운 학문적 내용을 익히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재능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주희의 말을 듣고서 자신의 이해력을 높이려고 혼신을 다해 노력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질의 한계를 극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이 아이는 하늘을 원망하고 부모를 탓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했나요?”
소라이는 반문합니다. 오히려 이 남자아이가 운동 능력이 탁월했던 자신의 기질에 따라 삶을 영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마치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그들의 재주나 기질에 맞게 가르쳤던 것처럼 말이지요. 소라이에 따르면, 이것은 공자가 주희와는 달리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런 이유로 소라이는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희의 주장을 거부하게 됩니다. 주어진 삶 자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나아가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모든 아이가 정신활동에만 종사하고 육체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세상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소라이는 사람들 모두 제각기 자신의 고유한 기질에 걸맞게 교육받고 양육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지요.
신유학의 수양론을 해체하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는 주희가 제안한 성인이 되는 방법, 즉 그의 수양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지요. 외부 사물들에 내재하는 이(理)를 계속 탐구하다가 보면, 어느 순간 그것들이 단지 하나의 초월적인 이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통찰하게 됩니다. 주희는 이러한 과정을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 강물 속에 있는 달그림자를 보면, 강물이 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강물들을 계속 관찰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그러한 달그림자들이 결국은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희가 ‘활연관통(豁然貫通)’이라고 표현했던 정신 상태이지요.
그런데 주희를 포함한 신유학자들은 모두 인간만이 가장 빼어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마치 가장 잔잔하고 많은 강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러한 관점은 기질이 탁한 외부 사물들을 계속 탐구하기보다 기질이 맑은 인간 자신의 심성을 관찰하는 것이 가장 빨리 초월적 이(理)를 파악하는 방법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주희는 미발의 함양 공부를 그렇게 중시했던 것이지요.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고요하고 맑게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속의 달그림자를 언제든 환히 비출 수 있을 테니까요. 주희가 말한 미발의 함양 공부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내성(introspection)의 공부 방법이었지요. 그러나 이런 내성의 방법이야말로 소라이가 가장 비판했던 부분입니다. 그가 내성의 방법을 어떻게 비판했는지 들어보도록 하지요.
마음은 형체가 없으니 그것을 잡아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선왕의 도(道)는 예(禮)로써 마음을 통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예를 도외시하고서 마음을 다스리는 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사사로운 지혜의 망령된 수직일 뿐이다. 왜 그런가? 다스리는 주체도 마음이고, 다스려지는 대상도 마음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으로 내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미친 사람이 자신의 미친 상태를 스스로 고치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그것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후세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도를 모르는 것이다. - 『변도』 14
心無形也, 不可得而制之矣. 故先王之道, 以禮制心. 外乎禮而語治心之道, 皆私智妄作也. 何也? 治之者心也, 所治者心也. 以我心治我心, 譬如狂者自治其狂焉, 安能治之? 故後世治心之說, 皆不知道者也.
심무형야, 불가득이제지의. 고선왕지도, 이례제심. 외호예이어치심지도, 개사지망작야. 하야? 친지자심야, 소치자심야. 이아심치아심, 비여광자자치기광언, 안능치지? 고후세치심지설, 개부지도자야.
주희의 말대로 함양 공부를 하려면 우리는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잡으려고 할 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잡을 수 없는 또 다른 곳으로 도망간 것은 아닐까요?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나는 누군가를 미워했던 마음을 반성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성할 때 다른 사람을 미워했던 그 마음은 어디에 있나요? 이미 미워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것을 반성하는 마음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소라이가 보았을 때, 주희의 함양 공부는 바로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정작 마음을 함양하려고 할 때, 이미 우리 마음은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가는 중일 겁니다.
소라이의 말처럼 다스려지는 대상도 마음이고, 다스리는 주체도 마음이라면 우리는 자기 분열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여전히 다스리는 주체로서의 마음은 통제 영역 바깥으로 벗어나 있는 셈이지요. 만약 다스리는 마음 자체가 좋지 않다면, 이 마음이 다른 마음을 통제한다고 한들 무슨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소라이는 내성적인 공부란 “미친 사람이 자신의 미친 상태를 스스로 고치려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무릇 마음이란 것은 “잡아서 통제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차라리 그는 예(禮)라는 객관적 규범에 의해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내면에 잠재해 있는 본성을 응시하는 것보다 예라는 객관적 규범을 학습하는 것이 더 현명한 전략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내면에 갇히게 될 위험한 수양론 비판
소라이가 주희의 함양 공부만을 비판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주희가 제안한 모든 종류의 수양론은 불교의 이론과 다를 바 없는 주관적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태평책(太平策)』이라는 소라이의 유명한 글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구절씩 꼼꼼하게 읽어보도록 하지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논의만 번거롭게 되어버려, 마침내 성인의 도(道)가 세상에서 정치를 하는 도(道)와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 유학자 무리들은 성인의 도가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도라는 것을 제쳐두고, 천리, 인욕, 이기, 음양, 오행 등과 같은 신비한 주장들을 앞세웠으며, 지경, 주정, 격물, 치지, 성의, 성심 등과 같은 스님들에게 나 어울리는 것들을 성(誠)의 덕목으로 생각했다. 『태평책(太平策)』
천리(天理), 인욕(人欲), 이기(理氣), 음양(陰陽), 오행(五行) 등은 주희가 정초한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의 존재론적 범주들입니다. 반면 지경(持敬), 주정(主靜),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등은 신유학에서 강조해온 수양의 방법들이지요. 주희의 존재론적 범주들은 소라이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라는 논의를 비판하면서 이미 붕괴시켰던 것들입니다. 주희가 말한 음양, 오행, 인욕은 기나 기질의 범주에 속한다 할 수 있고, 천리는 본연지성, 즉 이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주희의 존재론을 부정하던 소라이가 주희가 제안했던 수양론 역시 거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지경은 ‘마음을 공경하게 유지하는 공부’이고, 주정은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공부’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만드는 함양 공부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지요. 격물과 치지가 어떤 공부인지는 이미 살펴보았지만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외부 사물에 나아가서 그 사물에 내재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 격물의 공부이고, 이 과정을 통해 내 자신의 앞을 완성하는 것이 치지의 공부입니다. 이때 결과적으로 달성되는 삶이란 내 마음속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외부의 이치를 연구하는 공부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본성의 이치를 밝히는 공부로 귀결되지요. 한편 성의 공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지향하려는 내 마음을 성실하게 만드는 공부’이고, 정심은 글자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는 공부’이지요. 이렇듯 주희가 제안한 모든 종류의 공부는 기본적으로 소라이가 비판했던 ‘미친 짓’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공부들은 ‘내 마음으로 내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법이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소라이는 주희의 수양론이 주체 자신의 내면에 갇혀 있는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희가 제안한 수양의 방법들을 ‘스님들에게나 어울리는 것들’이라고 혹평했던 것이지요. 사실 소라이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주희에게서 시작된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은 유학의 본령이 정치철학에 있음을 은폐했다고 말입니다. 정통 유학자들이 볼 때, 불교는 자신의 내면에 갇혀 가족이나 국가 등 사회 질서를 부정하는 사상입니다. 지금까지 소라이가 주희의 전체 사유 체계를 다각도로 집요하게 공격했던 것도 주희의 존재론과 수양론이 불교의 성격을 농후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는 유학자들이 불교 승려가 아니기에, 자신의 내면에 갇히게 될 위험한 수양론을 절대 익혀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도(道)란 고대 선왕이 창안한 것
『태평책』에서 소라이는 성인(聖人)의 도는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소라이가 여타의 신유학자들과 명확히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여러분, 유학자 정이를 기억하고 있겠지요? 그는 「안자소호하학론(顔子所好何學論)」을 쓰면서 신유학 이념을 정초했던 유학자입니다. 그는 누구나 배우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맹자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기도 합니다. 맹자는 우리의 내면에 선한 본성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본성을 확충하기만 하면 모두 성인이 된다고 보았지요. 그런데 만약 맹자나 정이의 이야기가 옳다면, 이론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성인들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달리, 소라이는 성인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를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소라이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 성인은 단 한 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인이 많다는 것은 결국 패권을 다투는 군주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물론 소라이가 모든 최고 통치자를 성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은 고대 중국의 요임금과 순임금 같은 문명 제도의 창조자입니다. 이로써 소라이는 신유학에서 마치 초인인 것처럼 신비화했던 성인을 역사 속에 살았던 문명의 창조자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자, 이제 소라이가 성인과 그들이 만든 문명 제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지요.
도(道)라는 것은 포괄적인 명칭으로 예악형정(禮樂刑政)을 가리키는 것이니 모두 선왕이 세워놓은 것을 합쳐서 이름 붙인 것이다. 예악형정을 떠나서, 이른바 도라는 것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선왕의 도는 선왕이 만든 것이지 천지자연의 도가 아니다. 대개 선왕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덕으로 천명을 받아천하를 다스렸다. 그의 마음은 한결같이 천하를 안정시키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그러므로 마음의 노력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이러한 도를 만들어서, 천하의 후세 사람들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아가도록 했던 것이다. 이것이 어찌 천지자연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겠는가! 『변도』 3~4
道者, 統名也, 擧禮樂刑政, 凡先王所建者, 合而命之也. 非離禮樂刑政別有所謂道者也. (…) 先王之道, 先王所造也. 非天地自然之道也. 蓋先王以聰明叡知之德, 受天命, 王天下. 其心一以安天下爲務. 是以盡其心力, 極其知巧, 作爲是道, 使天下後世之人由是而行之. 豈天地自然有之哉! -『弁道』 3~4
도자, 통명야, 거예악형정, 범선왕소건자, 합이명지야. 비리예악형정별유소위도자야. (…) 선왕지도, 선왕소조야. 비천지자연지도야. 개선왕이총명예지지덕, 수천명, 왕천하. 기심일이안천하위무. 시이진기심력, 극기지교, 작위시도, 사천하후세지인유시이행지. 기천지자연유지재!
소라이는 중국 고대의 선왕들이 만든 예악형정(禮樂刑政)을 도(道)라고 규정합니다. 여기서 예악이 문명이나 문화를 상징한다면, 형정은 정치적 제도를 대표합니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점은 다음에 이어지는 소라이의 이야기입니다. 그 대목에서 우리는 그가 순자의 유학 사상을 다시 회복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순자가 주장한 두 가지 명제가 떠오르나요? 첫째는 하늘[天]과 인간[人]의 역량을 구별했던 순자의 자연주의적 정신입니다. 여기서 하늘이 천지자연의 객관적 질서를 의미한다면, 인간은 인간 사회의 정치 질서를 의미하지요. 순자의 두 번째 명제는 본성[性]과 인위[僞]를 구별함으로써 예(禮)를 창안했던 성인의 역할을 설명한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거칠기 때문에 성인은 예를 창안하여 거친 상태의 인간들을 세련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지요. 물론 이 두 가지 명제는 구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측면이 본성을 의미한다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의 측면이란 곧 인위를 가리키니까요.
도와 성인에 대한 소라이의 견해는 구조적으로 순자의 정치철학적 통찰을 다시 한 번 부활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소라이는 선왕이 창안했던 도가 천지자연의 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의 영역, 즉 인간 사회와 정치 질서의 영역임을 명확히 합니다. 둘째로, 소라이는 선왕이 인간 사회의 정치적 안정을 지상의 목표로 삼았다고 강조합니다. 소라이에 따르면, 선왕은 사회의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도라는 문명 제도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소라이의 주장은 순자가 이해했던 성인과 거의 같은 맥락의 논지라고 할 수 있지요. 순자의 성인도 사회적 혼란을 싫어해서 예의를 제정했으니까요.
각자의 덕이 있다
그런데 소라이의 선왕은 도를 제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 도를 따르도록 강제할 수 있는 강제력, 다시 말해 정치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선왕은 문명의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최고 통치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백성들이 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라이가 사용한 덕(道)이라는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덕은 얻었다는 뜻이며, 사람마다 각각 도로부터 얻은 것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성으로부터 얻고 어떤 사람은 배움으로부터 얻으니, 모두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본성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덕 또한 사람마다 다르게 된다. 도는 위대한 것이니, 성인이 아니라면 어찌 위대한 도와 자신이 합치될 수 있겠는가! 『변명(弁名)』 「덕육칙(德六則)」
德者, 得也, 謂人各有所得於道也. 或得諸性, 或得諸學, 皆以性殊焉. 性人人殊, 故德亦人人殊焉. 夫道大矣, 自非聖人, 安能身合於道之大乎!
덕자, 득야, 위인각유소득어도야. 혹득제성, 혹득제학, 개이성수언. 성인인수, 고덕역인인수언. 부도대의, 자비성인, 안능신합어도지대호!
소라이는 모든 인간은 다양한 기질을 자신의 고유한 개체성으로 가지고 태어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선왕이 창안한 도는 인간의 다양한 기질을 각각의 고유성에 입각하여 실현시키는 제도가 되겠지요. 이제 사람들은 선왕이 창안한 도를 자신의 기질에 따라 내면화하게 됩니다. 소라이는 이렇게 도가 인간들 각자에게 내면화된 상태를 ‘덕’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덕은 사람들의 기질이 다른 것만큼 다양하게 드러나겠지요. 즉 쇼군(將軍)의 덕이 있고, 사무라이(士)의 덕이 있으며, 농민의 덕이 있고, 상인의 덕이 있습니다. 또 각 계급에서도 다양한 기질에 따라 수많은 덕이 실현 가능하다고 볼 수 있지요.
논의의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소라이가 ‘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논리 역시 여러 면에서 순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순자가 예를 정치철학적으로 정당화했던 대목이 떠오르지요? 순자에 따르면, 무한한 인간의 욕망과 유한한 재화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성인은 예의를 만듭니다. 그리고 예의에 따라 차별적인 신분 질서가 생겨나지요. 이 신분 질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적절한 수준을 결정합니다. 강제력을 가진 신분 질서를 통해 인간들의 욕망이 절제되고, 따라서 재화의 고갈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순자의 핵심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소라이 역시 타고난 기질의 정도에 따라 사람이 실현할 수 있는 덕의 모습이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순자가 신분 질서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의 욕망충족이 가능하다고 본 것처럼, 소라이 역시 서로 차이 나거나 차별적인 덕의 실현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오규 소라이는 공자까지도 넘어섰을까
모든 유학자들이 가장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며 동시에 성인(聖人)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은 바로 공자입니다. 이런 공자를 부정하는 순간, 그 누구도 더 이상 유학자라고 자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라이에 따르면, 공자는 자신이 내세우는 선왕(先王)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인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라이가 말한 선왕이란 공자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요임금과 순임금을 가리키지요. 소라이가 볼 때 공자는 문명 제도를 새롭게 창조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공자는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잘 살리려고 노력한 정도의 인물이지요. 더구나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문명 제도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군주의 자리나 대신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정치철학적이었던 순자는 공지를 최고의 성인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자를 좀 멀리한 소라이는 이제 공자까지도 넘어서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는 공자를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요?
공자의 도는 선왕의 도이다. 선왕의 도는 천하를 안정시키는 도이다. 공자는 평생 동방의 주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그는 제자를 가르칠 때 그들 각각의 재질을 완성하여 장차 그들을 등용하려고 했다. 마침내 제위를 얻지 못하자 그 뒤에 그는 육경(六經)을 편수하여 전하게 되었다. 육경은 선왕의 도이다. 그러므로 최근에 선왕과 공자의 가르침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은 자신을 수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지만, 반드시 천하를 안정시키는 일을 자신이 마음 써야 할 일로 삼아야 하니, 이것이 이른바 인(仁)이다. 『변도』 2
孔子之道, 先王之道也. 先王之道, 安天下之道也. 孔子平生欲爲東周, 其敎育弟子, 使各成其材, 將以用之也. 及其終不得位, 而後脩六經以傳之, 六經卽先王之道也. 故近世有謂先王孔子其敎殊者, 非也. 安天下以修身爲本, 然必以安天下爲心, 是所謂仁也.
공자지도, 선왕지도야. 선왕지도, 안천하지도야. 공자평생욕위동주, 기교육제자, 사각성기재, 장이용지야. 급기종부득위, 이종수육경이전지, 육경즉선왕지도야. 고근세유위선왕공자유교수자, 비야. 안천하이수신위본, 연필이안천하위심, 시위소인야.
소라이는 이제 공자의 도마저도 선왕의 도에서 유래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공자는 선왕의 도를 복사했던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셈이지요. 나아가 소라이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관계마저도 정치철학적으로 읽으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공자가 제자들을 키운 이유는, 자신이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을 관료로 등용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의 기대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공자가 여섯 가지 경전, 즉 육경(六經)을 편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정치적 기회를 잃은 공자는 이제 제자들의 교육과 관련된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소라이는 육경을 선왕의 정치철학적인 도를 정리해놓은 문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경(六經)은 『주역(周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춘추(春秋)』ㆍ『예기(禮記)』ㆍ『악기(樂記)』, 이 여섯 경전을 가리키지요.
자신의 기질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소라이는 공자를 윤리적인 완성자라기보다 좌절한 정치가에 가까운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의 『논어』 독해가 다분히 정치철학적인 색채를 띤 것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소라이는 『논어』 「양화(陽貨)」 편에 등장하는 공자의 이야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물론 그의 정치철학적 구미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지요. “본성은 서로 가깝지만, 습관은 서로 멀다. 오직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옮길 수 없다[唯上知與下愚不移].”라는 구절에서 상지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그리고 하우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지요. 이에 대한 소라이의 입장을 들어보겠습니다.
공자는 또 “상지(上知)와 하우(下愚)는 옮길 수 없다”고 했으니, 이것은 상지와 하우를 제외한 다른 자들은 모두 선으로 옮길 수 있음을 말한다. (…) 사람의 성(性)은 만 가지로 다르니, 강하게나 유약하거나 경박하거나 중후한 것, 게으르거나 부지런하거나 활동적이거나 조용한 것 등은 변화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모두 선으로 옮기는 것을 자신의 성(性)으로 여기니, 선을 익히면 선하게 되고 악을 익히면 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들의 본성을 이끌어 가르침을 세우고 배워서 익히도록 하여 그들이 덕을 이루도록 했다. 강하거나 유약하거나 경박하거나 중후한 것, 게으르거나 부지런하거나 활동적이거나 조용한 것 등도 각각 그 성에 따라 다르게 되었다. 오직 하우만은 옮길 수가 없다. 『변명(弁名)』 「성정재칠칙(性情才七則)」
孔子又曰上知與下愚不移, 亦言其他皆善移也. (…) 人之性萬品, 强柔輕重, 遲疾動靜, 不可得而變矣. 然皆以善移爲其性, 習善則善, 習惡則惡. 故聖人率人之性以建敎, 俾學以習之, 及其成德也. 强柔輕重, 遲疾動靜, 亦各隨其性殊, 唯下愚不移.
공자우왈상지여하우불이, 역언기타개선이야. (…) 인지성만품, 강유경중, 지질동정, 불가득이변의. 연개이선이위기성, 습선즉선, 습악즉악. 고성인솔인지성이건교, 비학이습지, 급기성덕야. 강유경중, 지질동정, 역각수기성수, 유하우불이.
소라이는 지금 일종의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상지가 있고 가장 어리석은 하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선으로 향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중간계층이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소라이의 입장은 사람의 성(性)을 세 종류로 나눈 성삼품설의 모양을 띠게 됩니다. 인성(人性)을 정치적으로 읽어냈던 소라이에게 상지란 최고 통치자를, 그리고 변화시킬 수 없는 하우란 일반 백성들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군주와 백성들을 제외한 중간계층만이 선(善)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본 그의 관점입니다. 다시 말해, 중간계층만이 성인이 만들어놓은 문명 제도인 도(道)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리고 이 도를 따라서 자신의 기질에 걸맞게 살게 되었을 때, 소라이는 이러한 상태를 바로 ‘덕을 이룬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소라이는 최고 통치자, 중간계층, 일반 백성이 선천적으로 규정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통치자의 기질, 중간계층의 기질, 일반 백성의 기질은 결과적으로 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점이 소라이의 성삼품설이 지닌 난제입니다. 비록 중간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을 선으로 향하도록 노력할 수는 있지만, 타고난 모습 그대로의 기질을 모두 바꿀 수 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변한다 해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던 것이지요.
정신적 스승 진사이를 비판하다
한편 성인이 만든 문명 제도를 따름으로써 덕의 개념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던 소라이는 이제 선배 고학자인 이토 진사이마저 공격합니다. 공자까지도 선왕의 아류라고 생각했던 그가 공자를 성인으로 생각했던 진사이를 비판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토 진사이 선생의 경우도 자신이 덕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주희와 진사이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본성과 덕이라는 개념의 명칭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진사이 선생은 『맹자』를 오독하여 사단을 확충하여 덕을 이룬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렇다면 진사이 선생과 주희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변명(弁名)』 「덕육칙(德六則)」
如仁齋先生知德自負, 乃爭性與德之名耳. 亦誤讀孟子而至謂擴充四端以成德, 則與朱子何別?
여인재선생지덕자부, 내쟁성여덕지명이. 역오독맹자이지위확충사단이성덕, 즉여주자하별?
한마디로 진사이는 덕이 가진 정치철학적 의미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소라이가 보기에, 진사이의 관점은 주희의 사유와 마찬가지로 내면에 침잠하는 불교적인 담론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소라이에게 덕이란 선왕이 창조한 문명 제도의 질서를 개체가 수용했을 때 붙일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던 진사이까지 공격할 정도로 소라이는 자신의 정치철학적 유학 사상의 가치를 확신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라이의 유학 사상이 공자에서 시작된 유학 사상 전체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는 파괴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지요.
흥미롭게도 이 점을 가장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던 사람 역시 정약용이었습니다. 그는 소라이의 『논어』에 대한 정치적 독해의 위험성을, 그의 제자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 1680~1747)가 지은 『논어고훈외전(論語古訓外傳)』을 통해 확인했던 것입니다. 진사이와 마찬가지로 정약용은 공자와 맹자로 상징되는 선진 유학의 정신을 다시 복원하려고 노력한 유학자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소라이의 유학 사상은 자신의 학문적 목표까지도 붕괴시킬 수 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았습니다. 정약용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라는 주석서에서 소라이와 슌다이의 정치적 유학 사상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입니다. 정약용이 일본 고문사학자들과 공들여 논쟁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지요.
더 읽을 것들
1. 『일본정치사상사연구』(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통나무, 1995)
불행히도 일본의 탁월한 유학자 오규 소라이의 저술이 번역된 것은 아직 국내에는 없습니다. 그만큼 일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아직까지는 매우 얕다는 것이지요. 그나마 간접적으로라도 소라이 유학 사상의 윤곽을 알려주는 책이 하나 있어 다행입니다. 그 책은 바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 입니다. 물론 이 책은 저자가 일본의 근대성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만 소라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라이의 저술이 우리말로 번역될 때까지 이 책은 소라이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 역할을 할 것입니다.
2. 『도와 덕: 다산과 오규 소라이의 「중용」 「대학 해석』(금장태, 이끌리오, 2004)
이 책은 정약용 유학 사상의 최고 권위자인 저자가 오규 소라이와 정약용의 사상을 비교철학적인 시선으로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물론 소라이의 유학 사상을 제대로 알려면 그의 주저인 『변도(弁道)』와 『변명(弁名)』 등에 대한 독해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이 책에서는 유교 경전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중심으로 소라이와 정약용이 어떤 해석을 하는지, 그리고 양자 간의 해석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소라이의 유학 사상의 특징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논쟁을 통해 본 일본사상』(이마이 쥰ㆍ오자와 도미오 편집, 한국일본사상학회 옮김,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1)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철학적 논쟁을 중심으로 일본 사상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이 책에 고지마 야스노리가 집필한 유교 내부의 논쟁」이라는 논문이 함께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문을 통해 독자들은 이토 진사이의 고학 사상뿐만 아니라, 왜 오규 소라이가 고문사학이라는 새로운 유학 기풍을 창시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소라이의 사상을 놓고 전개되는 그의 제자들의 분열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소라이 사상의 철학적 함축이 상당히 복잡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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