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 주희
주희(朱熹)
하나의 달과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수많은 달빛
하늘에 달이 하나 떠 있다. 지상에 있는 호수에 하늘의 달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달그림자는 분명 달에 따라다니는 그림자이지만, 달을 닮아서 자기 나름대로의 밝은 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런데 하늘 위의 달은 이 호수에만 비추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바위 하나하나에도 달 그림자가 맺혀 있는 것은 아닐까? 바위들은 호수의 물처럼 맑지 않아 희미한 빛만 발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로 유학자 주희가 생각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천 개의 강에 달그림자 천 개가 비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대나무나 꽃과 같은 사물은 어떤 달그림자를 품고 있을까? 아니,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어떤 달그림자를 품고 있을까? 그 그림자가 밝게 빛을 드러내도록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수양을 해야 할까?
꼬마 형이상학자
1133년 바람이 선선한 어느 날, 아버지와 나이 어린 아들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애정이 가득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가르쳐줍니다.
“보아라! 저것이 바로 하늘[天]이란다.”
아마 아버지는 한자의 가장 기초가 되는 글자인 하늘, 즉 천(天)이라는 글자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당돌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아버지를 놀라게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버님,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어린 아들은 눈에 보이는 푸른 하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 비범했던 아이가 훗날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 즉 새로운 유학 운동의 완성자로 성장하게 되지요. 그는 바로 주희(朱熹, 1130~1200)입니다. 방금 살펴본 이야기는 단순히 주희의 어린 시절 일화로만 여길 수 없습니다. 주희라는 사상가가 어떤 사유 경향을 가졌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유 경향은 어떤 거대한 체계의 시선으로 구체적인 삶을 바라보려는 형이상학적 경향입니다.
높은 산에 오르면 우리는 방금 전까지 거쳐온 곳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됩니다. ‘아, 내가 지나온 곳이 저 위치에 있었구나.’ 하물며 하늘에 올라가서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높은 산보다 자신이 있던 곳을 더욱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계(視界)가 열리겠지요. 그런데 어린 시절 주희는 하늘 너머에서 하늘까지도 내려다볼 수 있는 어떤 곳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그가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예화이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주희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청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런 방황 속에서 그는 불교에 빠지게 됩니다. 과거시험을 보러갈 때 주희의 책보에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禪師)의 책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157년 28세의 청년 주희는 65세의 늙은 유학자 이통(李侗, 1093~1163)과 숙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주희는 이 노년의 유학자를 통해서 자신의 형이상학적 감수성을 다시 살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삶의 문제는 단지 마음의 문제로만 환원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을 벗어난 다양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자(有限者)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희는 유한한 자신을 내려다볼 수 있는 형이상학적 지평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어린 시절의 감수성을 되찾게 됩니다. 그는 세계의 질서를 무척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야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이것이 바로 주희의 근본적인 물음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온 마음을 사로잡았던 불교 공부를 넘어서 새로운 유학을 꿈꾸던 선배 신유학자들의 사유에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스승 이통의 조언이 커다란 역할을 했지요. 주희의 스승 이통은 나종언(羅從彦, 1072~1135)의 제자였으며, 나종언의 스승 양시(楊時, 1053~1135)는 정호ㆍ정이 형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인물입니다. 이런 계보를 통해 주희는 북송시대의 신유학자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선배 신유학자들에 대한 공부는 1175년, 그의 나이 46세 되던 해에 완성됩니다. 그는 친구 여조겸(呂祖謙, 1137~1181)과 함께 선배 신유학자들의 철학을 『근사록(近思錄)』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점은 주희가 장재, 정호, 정이 등 쟁쟁한 선배 신유학자들의 철학을 정리하는 데 겨우 10일 가량 소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선배 신유학자들의 철학을 종합적으로 체계화한 뒤, 주희는 더 거슬러 올라가 공자와 맹자의 유학 사상까지 새롭게 정리하려는 야심찬 계획에 착수합니다. 주희의 그 계획은 드디어 결실을 맺어 『사서집주(四書集注)』로 완성됩니다. 『사서집주』는 『논어』ㆍ『맹자』ㆍ『중용(中庸)』ㆍ『대학(大學)』이 네 권의 책에 대한 주희 본인의 주석서입니다.
그런데 이 네 권의 책은 같은 시대에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논어』와 『맹자』는 진 제국 시대 이전의 문헌이고,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은 한 제국 시대의 문헌입니다. 시대적 배경이 달라서일까요? 『논어』와 『맹자』가 수양하는 주체의 차원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반면, 『중용』과 『대학』은 사회나 세계의 관점에서 개인의 입장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주희가 『사서집주』를 통해 말한 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윤리적 행동을 통일적으로 사유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까지 『사서집주』를 수정하는 작업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렇듯 주희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근사록』과 『사서집주』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참고해야 할 자료가 두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직접 쓴 글들이 모두 수록되어 있는 『주자문집(朱子文集)』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기록한 『주자어류(朱子語類)』입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주희가 구성했던 형이상학적 세계로 들어가볼까요?
이(理)와 기(氣)
모든 형이상학자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다루려는 사상가들입니다. 그래서 형이상학은 구성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설명하기도 힘든 학문입니다. 장재가 얼음과 물의 비유로 자신의 형이상학, 즉 기론(氣論)을 사유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지요. 이렇듯 형이상학자의 사유를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형이상학자가 사용하는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그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부터 형이상학적 감수성이 남달랐던 주희는 어떤 비유로 자신의 형이상학을 구성하고, 설명했을까요? 먼저, 그가 사용했던 수많은 형이상학적 비유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보여주는 구절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기(氣)가 있기에 도리가 바로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 기가 없다면 도리는 있을 곳이 없게 된다. 이것은 마치 물속에 달이 있는 것과 같다. 반드시 물이 있기에 비로소 하늘 위의 달을 비출 수 있으니, 만약 물이 없다면 결국 물에 비친 달도 없게 될 것이다. 『주자어류』 60 : 45
有這氣, 道理便隨在裏面, 無此氣, 則道理無安頓處. 如水中月, 須是有此水, 方映得那天上月, 若無此水, 終無此月也.
유저기, 도리편수재리면, 무차기, 즉도리무안돈처. 여수중월, 수지유차수, 방영득나천상월, 약무차수, 종무차월야.
주희의 유명한 존재론은 이기론(理氣論)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희에게 이(理)라는 개념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만들어낸 최고의 원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주희는 이가 만물 위에 있지만 또한 모든 만물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理)는 반드시 기(氣) 가운데 있다고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초월적으로 있는 기 속에 내재되어 있든 관계없이 이는 모든 만물 가운데 항상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반면 주희가 말한 기는 개별성의 원리를 의미합니다. 장재의 기론을 한번 생각해볼까요? 장재에 따르면, 기는 흩어지고 모이면서 다양한 객형을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특성이 기가 개별성의 원리임을 보여주는 측면이지요. 다시 정리하면, 이는 동일성(identity)의 원리라고 할 수 있고, 이와 달리 기는 구별(distinction)이나 차이(difference)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를 부여받아 태어난 인간이 그것을 자신의 본성으로 삼게 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주희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별자가 이를 받아서 자신의 본성으로 삼고, 기를 받아서 자신의 고유한 형체를 갖추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어떤 개별자라도 반드시 이와 기를 동시에 갖춰야만 존재할 수 있겠지요.
불교를 비판하며 신유학의 정초를 세우다
이 세상에는 이(理)도 있고 기(氣)도 있다. 이라는 것은 감각적으로 확인될 수 없는 도(道)이자 만물을 낳는 근본이다. 기라는 것은 감각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형기[器]이자 만물을 낳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 이들은 반드시 이를 받은 후에 본성[性]을 갖게 된다. 그리고 반드시 기를 부여받은 후에 형체(形)를 갖게 된다. 『주희집』 「답황도부서」
天地之間, 有理有氣. 理也者, 形而上之道也, 生物之本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 生物之具也. 是以人物之生, 必稟此理然後有性. 必稟此氣然後有形.
천지지간, 유리유기. 리야자, 형이상지도야, 생물지본야; 기야자, 형이하지기야, 생물지구야. 시이인물지생, 필품차리연후유성. 필품차기연후유형.
공통적인 이(理)와 개별자마다 다양한 기(氣)에 대한 주희의 입장은 철학적으로 ‘이일분수(理一分殊)’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치[理]는 근본적으로 하나[一]이지만, 그것은 다양한 만물[氣]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것이지요. 주희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똑같이 이를 부여받아 태어났습니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초월적 이의 자식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부여받아 본성으로 삼게 된 이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세상의 만물과 더불어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주희 역시 장재와 정호 이래 신유학자들의 우주가족 이념을 나름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신유학자들은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존재,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이 하나의 가족이라는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희의 ‘이일분수’라는 입장은 그가 자주 사용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여러분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세종대왕이 1447년에 지어서 1449년에 간행한 악곡이지요.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시형식으로 읊은 『월인천강지곡」에서 ‘달(月)’은 석가모니를 상징하고, ‘천 개의 강[千江]’은 중생을 상징합니다. 여러분은 불교를 비판하면서 신유학의 정초(定礎)를 세우겠다는 포부를 지닌 주희가 불교의 대표적인 비유인 월인천강을 즐겨 사용했다는 점이 꽤 흥미로울 겁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뒷날 주회를 비판했던 많은 유학자들, 가령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정약용 등 모두가 주희의 신유학에는 불교 사상이 녹아 있다고 비판하게 되니까요.
주희가 사용했던 월인천강의 비유를 한번 분석해볼까요? 월인천강이란 글자 그대로 하늘에 떠 있는 달 하나가 천 개의 강에 동시에 비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번 머릿속에 떠올려보세요. 밤하늘에 달이 하나 밝게 빛나고 있고, 천 개의 강에 그 달의 그림자가 똑같이 비치고 있는 풍경을 말이지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인용문에서도 주희는 달이 비치기 위해서는 달빛을 받을 강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요. 주희가 말한 하나의 달과 여러 강물의 비유는 곧바로 하나인 이(理)와 다양한 기(氣)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희는 이와 기의 관계를 제자들에게 설명할 때 이 비유를 자주 애용했습니다. 그러면 주희가 좋아했던 달의 비유에서 달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다시 말해, 세상을 만들고 변화시키는 원리인 이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초중기의 주희 | |
리(理) | 기(氣) |
모든 존재를 만들어낸 최고 원리 | 리가 깃든 형체로 개별성의 원리 |
인간이 본성으로 삼음 | 고유한 형체를 갖춤 |
月 / 天地之心 | 江 |
천 개의 강에 달이 비치다
이어지는 글에서 주희의 설명을 들어보도록 하지요.
이 세계는 ‘만물을 낳는 것[生物]’을 마음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사람과 사물들은 각각 ‘세계의 마음[天地之心]’을 얻어서 그것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덕을 말하면, 비록 그것이 모든 것을 포괄해서 모두 다 갖추고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인(仁)일 따름이다. (…) 세계의 마음이 운행될 때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순서가 있지만, 봄의 생성하는 기(氣)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사람 마음의 경우, 덕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가 있지만, 인이 네 가지에 모두 작용하고 있고, 마음이 드러날 때에는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네 가지 감정이 있지만 측은지심이 네 가지를 모두 관통하고 있다. 『주희집』 「인설」
天地以生物爲心者也. 而人物之生又各得夫天地之心以爲心者也. 故語心之德, 雖其總攝貫通, 無所不備, 然一言以蔽之, 則曰仁而已矣. (…) 其運行焉則爲春夏秋冬之序而春生之氣無所不通. 故人之爲心, 其德亦有四曰仁義禮智而仁無不包, 其發用焉則爲愛恭宜別之情, 而惻隱之心無所不貫.
천지이생물위심자야. 이인물지생우각득부천지지심이위심자야. 고어심지덕, 수기총섭관통, 무소불비, 연일언이폐지, 즉왈인이이의. (…) 기운행언즉위춘하추동지서이춘생지기무소불통. 고인지위심, 기덕역유사왈인의예지이인무불포, 기발용언즉위애공의별지정, 이측은지심무소불관.
주희는 세계가 생겨나기 전에 이미 하나의 절대적인 세계정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세계의 마음, 즉 천지지심(天地之心)이라는 것이지요. 이 천지지심이 주희가 말한 초월적인 이(理)와 같은 것입니다. 주희는 천지지심의 목적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에 따르면 천지지심에 있었기에 만물이 세상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태어난 만물은 모두 천지지심을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역시 주희가 말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개별자들 모두 천지지심을 자기 것으로 삼아 그와 똑같은 마음을 갖게 되니까요. 뿐만 아니라 개별자의 마음도 천지지심과 마찬가지로 만물을 ‘생성[生]’하는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게 되지요. 다양한 만물이 서로 짝을 이루어 끊임없이 후손을 낳는 과정을 주희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개체 속에 만물을 낳으려는 천지지심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이렇듯 주희는 초월적으로 있든 개체에 내재해 있는 관계없이 천지지심으로서의 이(理)의 성격을 ‘인(仁)’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자나 맹자와는 달리 주희에게서 ‘인’이란 단순한 인간의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우주적인 차원의 이치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 거대한 형이상학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지요. 천지지심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실현됩니다. 이 네 계절 중 봄은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지심이 기본적으로 생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봄에 온갖 생물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장면을 연상해보세요. 주희는 봄이 하나의 계절이지만 동시에 나머지 세 계절들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사계절의 변화에 대한 관찰에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봄이 지닌 이미지, 즉 ‘따뜻함’ ‘태어남’ 등의 이미지와 가장 먼 계절은 바로 겨울입니다. 그러나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겨울 안에도 봄의 계기가 이미 존재한다고 주희가 생각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지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유사한 구조로 주희는 인간의 본성을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네 가지 요소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주희에 따르면, 세계의 구조는 인간의 구조 속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의예지’ 중 ‘인’은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 가지 요소, 즉 ‘의예지’를 기초하는 것으로 사유됩니다. 그리고 이런 구성은 ‘인의예지’라는 인간 본성의 네 가지 요소가 실현된 감정[情]인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측은지심은 하나의 마음으로 드러나지만 동시에 다른 세 가지 마음에 기초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시비지심을 예로 들어볼까요? 이 마음은 측은지심의 동정심과는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음입니다. 시비지심은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갖는 것과는 달리 타인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엄격한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주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옳음과 그름을 따지는 마음 안에는 그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이 전제되어 있다고 본 것이지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자식이나 제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측은지심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가, 이제 거꾸로 올라가 봅시다. 측은지심에서 인으로, 그리고 인에서 봄으로,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생성하는 천지지심으로까지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음 사례에 이 구조적 관계를 적용해보기로 할까요? 아이가 우물에 빠질 때 그 상황을 본 순간 우리 마음에는 측은지심이 발생합니다. 이 측은지심에서 주희는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본성, 즉 내재적 이(理)가 존재한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재적 이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로써 주희는 바로 천 개의 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가능하게 했던 하나의 달, 즉 초월적 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서 주희가 하나의 절대적인 이를 믿어 의심치 않았는지 조금 이해가 되지요? 주희는 이 절대적인 하나의 이를 다른 말로 ‘태극(太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 주희가 어떻게 이 또는 태극을 찾아나갔는지 그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면에서 달빛을 찾으려는 노력
주희가 좋아하던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는 성인이 되는 방법 또한 결정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방법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내 자신이라는 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통해서 달을 찾아나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이라는 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통해서 달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전자가 인간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본성을 통해서 초월적 이(理)를 자각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사물 속에 내재하는 이를 통해서 초월적 이를 자각하는 과정입니다. 주희는 전자의 공부를 ‘미발(未發) 함양(涵養)’ 공부라고 부르고, 후자의 공부를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라고 부릅니다. 먼저 미발 함양 공부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지요.
생각이 아직 싹트지 않고 사물이 아직 마음에 이르지 않은 때가 희로애락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未發]’ 상태이다. 이러한 때에는 마음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채로 있지만 여기에는 하늘이 부여한 ‘본성’이 갖추어져 있다. 이 마음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고, 치우치거나 기울어지는 일이 없으므로 그 상태를 일러 중(中)이라고 한다. 이 마음이 느끼게 되어 천하의 온갖 사물과 소통하면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동하게 되니 거기에서 마음의 작용을 엿볼 수 있다. 발동한 감정이 절도에 맞지 않거나 어긋남이 없는 까닭에 그것을 일러 화(和)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 마음의 올바름과 본성과 감정의 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思慮未萌, 事物未至之時爲喜怒哀樂之未發. 當此之時, 卽是此心寂然不動之體, 而天命之性當體具焉. 以其無過不及不偏不倚, 故謂之中. 及其感而遂通天下之故, 則喜怒哀樂之性發焉, 而心之用可見. 以其無不中節, 無所乖戾, 故謂之和. 此則人心之正而情性之德然也.
사려미맹, 사물미지지시위희노애락지미발. 당차지시, 즉시차심적연부동지체, 이천명지성당체구언. 이기무과불급불편부의, 고위지중. 급기감이수통천하지고, 즉희노애락지성발언, 이심지용가견. 이기무불중절, 무소괴려, 고위지화. 차즉인심지정이정성지덕연야.
그러나 미발(未發)의 상태에서는 찾을 수가 없고, 이미 깨달은 뒤에는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다. 다만 평소에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함양(涵養)’하는 공부를 지극히 하여 욕망의 사사로움이 그것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미발의 상태에서는 거울에 먼지가 끼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고 물이 그쳐서 고요한 것과도 같으며, 그것이 발동했을 때에는 절도에 맞지 않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 『주희집』 「여호남제공론중화제일서(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
然未發之前, 不可尋覓, 已覺之後, 不容安排. 但平日莊敬涵養之功至而無人欲之私以亂之, 則其未發也鏡明水止, 而其發也無不中節矣.
연미발지전, 불가심멱, 각지후, 불용안배. 단평일장경함양지공지이무인욕지사이란지, 즉기미발야경명수지, 이기발야무불중절의.
주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중’과 ‘화’의 개념은 원래 『중용(中庸)』에 실려 있습니다. 『중용(中庸)』 1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지요.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중이라 하고, 이런 감정들이 드러나 모두 절도에 맞는 상태를 화라고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우리는 사물과 사태를 접하기 전에는 대부분 특정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일반적인 중(中)의 상태라고 볼 수 있지요. 반면 어떤 사태에 처했을 때 우리는 기뻐하거나 노여워할 수도, 또는 슬퍼하거나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감정이 드러났을 때 모든 감정을 절도에 맞게 조절하기가 무척 힘들다는 데 있지요. 보통 우리는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또는 부족하게 슬퍼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몸을 해칠 정도로 지나치게 슬퍼할 수도 있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달리, 아버지의 죽음에 걸맞게 적절히 슬퍼하는 것이 바로 주희가 말한 화(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논의가 좀 어렵게 느껴지나요? 조금만 더 주목해서 살펴보도록 하지요. 주희는 감정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즉 미발의 상태에서 함양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로 한번 해석해보겠습니다. 그 실마리는 미발의 함양 공부를 하면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된다는 표현에 있습니다. 명경지수란 글자 그대로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을 말합니다. 두 가지 모두 무엇인가를 밝게 비출 수 있는 상태를 상징하지요. 달이 환하게 빛날 때 만약 거울이 탁하거나 물이 요동을 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달그림자가 온전히 비춰질 수 없을 것입니다. 달그림자가 흐릿하거나 찌그러져 보일 테니까요. 만약 거울을 깨끗이 닦고 물을 고요하게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달그림자가 온전히 비춰질 수 있겠지요. 이것이 바로 미발의 함양 공부 내용입니다. 마음에 존재하는 내재적 이(理)인 본성이 원래 모습 그대로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함양의 공부입니다. 물론 주희는 희로애락 같은 감정이 아직 없을 때 이런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희로애락 미발 상태의 함양 공부라고 표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주희의 이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의 내면에 본성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본성을 사태에 접하기 전에 미리 함양할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맹자가 마음의 ‘사단(四端)’을 확충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본성을 함양 공부를 통해 잘 드러낼 수만 있다면 주희는 누구라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희로애락의 마음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즉 미발의 때에 주체가 자신의 본성을 기르는 함양 공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성인이 되는 두 번째 방법, 즉 외부 사물과 사태에 내재해 있는 본성 또는 이(理)를 파악하는 외향적인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지요.
주희가 생각한 성인이 되는 두 가지 방법 | |
내 자신에게 있는 달그림자로 달을 찾는 방법 | 사물에 있는 달그림자로 달을 찾는 방법 |
未發涵養 | 格物致知 |
외면에서 달빛을 찾으려는 노력
주희는 이 외향적 공부 방법을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라고 말합니다. 격물치지란 ‘사물의 이치[理]를 파악해서 내 마음의 앎을 완성하는’ 공부를 의미하지요. 흔히 주희의 격물치지 공부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탐구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오해를 일으키는 견해입니다. 그에게는 나 자신과 무관한 외재적인 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주희의 초월적 이는 인간이나 사물에게 동일한 상태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과정은 나와 관계 없는 외부 대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과정이 아니라, 나와 동일하게 공유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그럼 격물치지 공부의 의미와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주희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앎을 이루는 것[致知]이 사물을 연구함[格物]에 달려 있다고 말한 것은, 나의 앞을 이루고자 한다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理]를 연구해야 한다는 뜻에서이다. 사람 마음의 영특함에는 앎이 없을 수가 없고, 이 세상의 사물에는 이치가 없을 수가 없다. 단지 이치에 대해 아직 연구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앎에도 다 실현되지 못한 것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대학에서 처음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이치에 근거하여 연구해서 지극한 곳에 이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하면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비약적으로 이치를 깨닫게 될 것[豁然貫通]이니, 그렇게 되면 만물들의 ‘겉과 내면[表裏]’, ‘정밀한 것’과 ‘거친 것[精粗]’을 모두 파악하게 되고, 동시에 우리 마음의 ‘완전한 본래 모습[全體]’과 ‘커다란 작용[大用]’도 모두 밝혀지게 될 것이다. 『대학장구』
所謂致知在格物者, 言欲致吾之知, 在卽物而窮其理也. 蓋人心之靈, 莫不有知; 而天下之物, 莫不有理. 惟於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也. 是以大學始敎, 必使學者, 卽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 無不明矣.
소위치지재격물자, 언욕치오지지, 재즉물이궁기리야. 개인심지령, 막불유지; 이천하지물, 막불유리. 유어리유미궁, 고기지유부진야. 시이대학시교, 필사학자, 즉범천하지물, 막불인기이지지리이익궁지, 이구지호기극. 지어용력지구이일단활연관통언, 즉중물지표리정조, 무불도; 이오심지전체대용, 무불명의.
만약 격물치지 공부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연구 방법이라면, 어떻게 사물의 이(理)를 파악한 것으로 내 마음의 본래 모습이 모두 밝혀질 수 있겠습니까? 주희의 말대로 사물의 이에 대한 연구가 내 마음의 본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면, 이미 사물의 이와 내 마음의 본성이 같아야만 합니다. 주희가 말한 마음의 ‘완전한 본래 모습(全)’이란 우리가 내면에 가지고 있는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만물 속의 내면[裏]과 정밀한 것[精]이란 만물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이를 말하지요. 주희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다 보면 어느 날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말한 활연관통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물에 내재한 이를 연구해나가면 어느 날 모든 사물을 초월해 있는 이 자체를 파악하게 되는 비약적인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하지요.
지금이 달 밝은 밤이라고 상상해보십시오. 이때 달은 볼 수 없고, 단지 여러 모양의 물그릇들에 비친 달그림자만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둥근 물그릇 안에 비친 달그림자를 보기로 하지요. 이 경우, 우리는 달그림자가 마치 둥근 물그릇에만 있는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네모난 물그릇을 들여다보지요. 여기에도 환하게 달그림자가 비추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우리는 달그림자가 네모난 물그릇 속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지요. 이렇게 계속 여러 모양의 물그릇들 속에 비친 달그림자들을 보다 보면, 문득 모두가 밝은 달 하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달그림자가 물그릇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 위의 달 자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희가 말한 활연관통(豁然貫通)의 경험이지요. 이때 하늘 위의 달은 내가 보고 있는 물그릇에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비추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사물에 비친 달과 내 마음속에 비친 달은 결국 똑같이 하늘 위의 달이기 때문이지요. 주희는 이런 시선으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다 보면, 어느덧 내 자신의 마음속 본성과 그 본성의 작용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점이 주희가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통해 의도했던 것이지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유학자 황종희(黃宗羲, 1610~1695) 이래로 수많은 학자들은 주희의 최종적 가르침이 ‘월인천강(月印千江)’으로 상징되는 이기론과 그에 입각해서 세워진 수양론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한 수양론은 주희의 미발 함양 공부와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말하는 것이지요. 과연 이런 견해가 타당할까요? 놀랍게도 주희의 사유는 결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희는 1189년, 그의 나이 60세 무렵 『중용』에 대해 새로운 서문을 짓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라고 알려진 짧은 글이지요. 이 짧은 서문에서 주희는 함양 공부를 통해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만들려고 했던 시도를 한 발짝 넘어서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리의 마음을 두 가지 마음이 서로 다투는 전쟁터인 것처럼 그리려고 합니다. ‘월인천강’이라는 아름다운 풍경은 이제 서로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이 난 ‘전쟁터’의 살풍경으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이로써 마침내 그의 유명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 등장하게 됩니다. 우선 「중용장구서」의 앞부분을 읽어보도록 하지요.
형체는 없지만 신기하게 지각할 수 있는 마음은 하나일 뿐인데 인심과 도심의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은, 혹은 마음이 육체[形氣]의 사사로움[私]에서 나오고, 혹은 마음이 본성[性命]의 올바름[正]에 근원을 두고 지각하는 방식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은 위태로워 편안하지 못하고, 혹은 미묘하여 보기가 어렵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으므로 비록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심이 없을 수가 없고, 또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으므로 비록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심이 없을 수가 없다. 「중용장구서」
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 是以或危殆而不安, 或微妙而難見耳. 然人莫不有是形, 故雖上智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雖下愚不能無道心.
심지허령지각, 일이이의. 이이위유인심도심지이자, 즉이기혹생어형기지사, 혹원어성명지정, 이소이위지각자부동. 시이혹위태이불안, 혹미묘이난현이. 연인막불유시형, 고수상지불능무인심; 역막불유시성, 고수하우불능무도심.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희가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그는 존재론적으로 ‘본성의 올바름[性命之正]’과 ‘육체의 사사로움[形氣之私]’이라는 두 가지 근원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분법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성 또는 육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규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하늘에서 부여받은 본성이 실현되는 곳과 육체에서 일어나는 욕망이 실현되는 곳이 모두 마음이라는 하나의 장소라는 데 있습니다. 이기적인 육체의 욕망이 마음이라는 장소에서 실현될 때, 주희는 이런 마음의 양태를 ‘인심(人心)’이라고 부릅니다. 반면 우리의 본성이 마음에서 실현될 때, 주희는 이런 마음의 양태를 ‘도심(道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너무나 배가 고픈 어떤 사람이 아버지와 식사를 하려던 참입니다. 그는 상에 차려 있는 음식을 당장 먹고 싶은 마음도 있고, 동시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버지가 수저를 들기 전에 먼저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전자가 인심이라면, 후자는 도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심과 도심이 심하게 갈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마음의 양태 중 어느 것이 더 강렬할까요? 먹어서는 안 된다는 도심이 마음에 떠오르면 떠오를수록 음식을 먹고 싶다는 인심의 욕구 역시 더욱 강렬하게 솟아오를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는 내면에서 스스로와 타협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무나 배가 고파 힘들어하는 것을 아버지도 원하지 않으실 거야. 그래, 먼저 먹도록 하자.”
이때 인심의 유혹은 강렬하게 그를 휘감아버리고, 어느 틈엔가 도심의 목소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희미해집니다. 주희가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다”고 지적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전쟁터와 같다
주희는 성인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 인간이므로 누구나 육체와 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인도 육체적 욕망에서 기원하는 인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성인이 아닌 일반인도 본성에서 유래하는 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주희가 말하는 성인이란 도심을 인심의 지배자로 만든 사람이며, 성인이 아닌 일반인은 거꾸로 인심을 도심의 지배자로 만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인이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삶의 모든 지평에서 출현하는 두 가지 마음의 양태, 즉 도심과 인심을 명확히 구별하고, 나아가 도심으로 하여금 인심의 주인이 되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그런 까닭에 「중용장구서」 후반부에서 주희는 ‘정일(精一)’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두 가지가 마음속에 섞여 있는데도 다스릴 줄을 모른다면, 위태로운 것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미묘한 것은 더욱 미묘해져서 천리의 공정함이 끝내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정(精)은 두 가지 사이를 살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고, 일(一)은 본심의 올바름을 지켜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에 힘써서 조금도 단절됨이 없도록 하여, 반드시 도심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인이 되도록 하고 인심이 매번 도심의 명령을 듣도록 한다면, 위태로운 것은 편안해지고 미묘한 것은 드러나게 되어,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경우나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경우에 모자라거나 지나치는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중용장구서」
二者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 精, 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一, 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 從事於斯, 無少間斷, 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 而人心每聽命焉, 則危者安, 微者著,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
이자잡어방촌지간이부지소이치지, 즉위자유위, 미자유미, 이천리지공, 졸무이승부인욕지사의. 정, 즉찰부이자지간이부잡야; 일, 즉수기본심지정이불리야. 종사어사, 무소간단, 필사도심상위일신지주, 이인심매청명언, 즉위자안, 미자저, 이동정운위, 자무과불급지차의.
주희의 정일(精一) 공부는 정(精) 공부와 일(一) 공부가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 공부는 내 마음에 동시에 출현한 도심과 인심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 공부는 도심으로 하여금 인심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정 공부가 먼저 이루어져야 일의 공부도 가능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제사 음식이 앞에 놓여 있는데 몹시 배가 고픕니다. 이때 어른들 몰래 그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과 동시에 누가 보지 않더라도 제사 전에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먹고 싶은 마음’이 인심이라면,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바로 도심에 해당되지요. ‘먹고 싶은 마음’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명확히 구별하는 것이 바로 주희가 말한 정 공부이며, 도심의 마음이 인심의 마음을 이거 통제하도록 만드는 공부가 바로 일의 공부입니다. 만약 정과 일 공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다시 말해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보다 강해진다면 ‘먹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통제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주희는 정일 공부를 하면 “위태로운 것[人心]은 편안해지고 미묘한 것[道心]은 드러난다”고 설명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왜 주희는 「중용장구서(中庸章句序)」를 통해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강조했을까요? 앞에서 미발의 함양 공부를 강조했을 때 주희는 미발의 상태에서 인간의 본성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고 긍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육체적 욕망의 계기, 즉 형기지사(形氣之私)의 계기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지요. 다시 말해, 수양 과정에서 육체적 욕망의 개입과 갈등이 문제가 되리란 것을 신중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반면 ‘인심도심설’에서 주희는,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본성의 계기와 아울러 육체의 계기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존재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인에게도 육체적 욕망에서 일어나는 인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주희의 단호한 지적, 그리고 성인도 단 한순간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면 곧 광인(狂人)이 될 수 있다는 그의 경계심은, 미발의 함양 공부에서 보여준 낙관적 견해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을 표출한 것입니다. 아마 만년의 주희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이런 심각한 갈등과 자기 번민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자각했던 것 같습니다.
말기의 주희 | |
도심(道心) | 인심(人心) |
性命之正 | 形氣之私 |
微妙而難見 | 危殆而不安 |
마음의 두 양태로 표현하며 精ㆍ一 공부를 해야한다고 봄 |
내 마음이 외부 사물의 이치와 같다
정이는 주희가 평생 동안 가장 흠모했던 선배 신유학자였습니다. 정이는 불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불교 이론은 이치에 가깝기 때문에 양주(楊朱)와 묵자(墨子)보다 그 해가 더 심하다. 『하남정씨유서』 13:2.”
정이의 평가가 타당하다면 불교 이론 중 어느 부분이 유학 사상과 가장 근접했던 것일까요? 유학과 불교의 공통점은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밀한 이론을 가졌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맹자의 성선설이 유학 사상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가 곧 유학 사상에 본성 이론을 도입했기 때문이지요. 불교는 모든 외부적인 사태를 마음으로, 나아가 불성(佛性)으로 수렴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맹자 역시 유학의 다양한 가치 덕목들을 인의예지라는 마음의 본성으로 수렴하고 있습니다.
불교나 맹자의 유학 사상에서 인간의 본성으로 이해했던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불교가 ‘맑고 깨끗한 마음[淸淨心]’을 인간이 가진 마음의 본성이라고 보았다면, 맹자는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이라는 도덕 감정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았지요. 그러나 이런 차이점이 있음에도, 이 둘의 수양론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맹자가 자신의 마음이 지닌 본성을 내성적으로 직관하여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면, 불교 역시 수양을 하기 위해서 일체의 외적 관심을 끊고 벽을 바라보듯이 자기 내면의 불성, 곧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직관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점에서 맹자와 마찬가지로 주희도 불교의 수양론과 유사한 내용을 주장했던 것은 아닐까요? 주희가 제안했던 미발의 함양 공부는 자기 내면을 고요하게 만들면서 그 속에 깃든 본성을 밝히려는 것이었으니까요.
“어떻게 하면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에서 불교의 수양론과 다른 공부 방법을 새롭게 제안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평생 동안 주희를 사로잡았던 하나의 문제였습니다. 정이가 “불교 이론은 이치에 가깝다”고 했던 말은 주희가 반드시 풀어야 할 화두(話頭)였던 셈이지요. 그래서 주희는 죽을 때까지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그토록 강조했던 것입니다. 격물치지 공부는 분명 내면적인 공부가 아니라 외향적인 공부였기 때문입니다. 주희는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이(理)를 계속 탐구하면 언젠가 초월적인 이 자체를 직관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격물치지 공부의 마지막 귀결점이 내 마음의 본성을 직관하는 데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격물치지 공부가 표면적으로는 외부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공부처럼 보이지만, 결국 미발함양 공부와 비슷한 귀결점을 갖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이런 문제가 계속 주희의 유학 사상에서 일어나는 것일까요? 함양 공부가 불교적이라서 격물치지 공부를 강조했는데, 왜 자꾸 인간 내면의 본성으로 논의가 끌려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희가 불교에서 유래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비유로 자신의 형이상학 구조를 구성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나에게 비친 달그림자나 사물에 비친 달그림자는 결국 모두 하나의 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달 때문에, 이제 나와 사물은 서로 환원 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격물치지의 공부가 처음에 의도했던 사물의 이가 인간의 본성[性]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흔히 주희의 이런 입장을 ‘성즉리(性卽理)’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곧 내 마음의 본성이 외부 사물의 이치와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월인천강’의 비유가 가진 난점
그러나 주희의 이런 관점은 후세에 숱한 비판을 일으킵니다. 그 가운데 주희의 유학 사상에 대한 정약용(丁若鏞)의 비판을 살짝 음미해보기로 하겠습니다.
후세의 학문은 형체가 없는 것, 형체가 있는 것, 영명한 것, 어리석은 것 등 모든 만물을 하나의 이(理)에 귀속시켜, 다시는 크고 작고 중심적이고 부수적인 차이를 없게 만들었다. 이른바 “하나의 이로부터 시작되어 만 가지로 흩어져 다르게 생성되지만 끝내는 다시 하나의 이로 합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주선사(趙州禪師)가 말한 “모든 존재들은 하나로 귀속된다”는 불교 이론과 조금의 차이도 없다. 『맹자요의』
後世之學, 都把天地萬物無形者有形者靈明者頑蠢者, 竝歸之於一理, 無復大小主客. 所謂始於一理, 中散爲萬殊, 末復合於一理也. 此與趙州萬法歸一之說, 毫髮不差.
후세지학, 도파천지만물무형자유형자영명자완준자, 병귀지어일리, 무부대소주객, 소위시어일리, 중산위만수, 말복합어일리야. 차여조주만법귀일지설, 호발불차.
물론 주희는 정약용의 비판을 들을 기회가 전혀 없었지요. 두 학자 사이에는 6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가로이 있었으니까요. 정약용의 비판 논점은 공맹 이후의 학문, 주자학이 불교 선사들의 세계관을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시들이 만법(萬法)은 하나로 귀결된다고 말했듯이, 주자학자들도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개념을 통해 다양한 만물과 하나의 이치라는 형이상학을 구성했다고 본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다양한 개체들은 겉으로만 차이가 날 뿐, 결국 하나의 초월적 이(理)에 의해 모두 동일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정약용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물의 차이를 없애고 하나로 귀속시켜버린 주자학의 시선이 관념적이라고 비판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이(理) 중심의 관념적 세계관에서 개체 중심의 경험적 세계관으로 서서히 변화되어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의 집대성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희는 불교의 본성 이론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사유를 계속 모색했습니다. 마침내 그 노력은 부족하나마 그가 말년에 「중용장구서」에서 정리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로 꽃을 피우게 되지요. 그는 내면에 잠재된 본성에 침잠하기보다 인간의 마음에서 출현하는 상반된 두 가지 마음의 충돌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월인천강(月印千江)’이란 형이상학적 비유가 이제 ‘전쟁터’라는 윤리학적 비유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물론 인심도심설에서 주희가 기존의 자기 본성 이론 자체를 모두 폐기 처분한 것은 아닙니다. 도심이란 것은 바로 본성이 실현되어 나온 마음을 의미한 것이니까요. 그러나 인심도심설을 통해 주희가 어느 정도 고독한 자기 내면으로부터 탈출한 것은 사실입니다. 인심이나 도심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 갈등하고 대립하는 마음들이기 때문이지요. 주희의 인심도심설이 완전히 개화하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했습니다. 조선의 남쪽 땅 강진이란 곳에서 18년 넘게 유배 생활을 했던 정약용에 이르러서야 주희의 이런 가능성이 가장 분명한 형태로 만개하게 되었으니까요.
더 읽을 것들
1. 『주서백선』(주자사상연구회 옮김, 혜안, 2000)
이 책은 1794년 조선의 국왕 정조가 편찬한 『어정주서백선(御定朱書百選)』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군주가 직접 주희의 방대한 서신들 가운데 100통을 선별하여 편찬한 것입니다. 여기에 실려 있는 100통의 편지는 주희의 유학 사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자사상연구회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간단한 해제와 함께 주희의 서신을 읽는 데 도움을 주는 많은 주석을 달아놓았습니다. 주희의 사유를 좀더 깊이 살펴보려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2. 『인간 주자』(미우라 쿠니오, 김영식 · 이승연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6)
공자와 더불어 유학 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주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 사상사를 주희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별할 정도이니까요. 이처럼 주희는 유학 사상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했던 인물이지요. 미우라 쿠니오의 책은 인간 주희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일종의 평전입니다. 주희가 위대한 유학자로 거듭날 때까지의 과정과 주희만의 사상적 매력을 실증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간명하게 잘 정리한 책입니다.
3. 『주희 : 중국철학의 중심』(조남호, 태학사, 2004)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주희의 철학을 한국 연구자의 독특한 시선을 통해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 조남호는 주희와 동시대의 다른 유학자들, 예를 들면 육구연과 진량 사이에 벌어졌던 철학적 논쟁을 검토하면서 주희의 철학적 고유성을 해명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그는 주희의 철학을 이기론이나 심성론의 틀보다는 공부론 혹은 수양론의 시각에서 살펴보면서, 기존의 연구 경향과는 다른 가능성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수양론에 입각한 저자의 연구 시선이 주희의 유학 사상이 지닌 구체성과 현실성을 보다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