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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 이토 진사이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 이토 진사이

건방진방랑자 2022. 3. 8.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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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진사이(伊藤仁齋)

타자의 발견을 통해 공자를 되살리다

 

 

일본의 어느 시장 풍경이다. 혼잡한 시장을 거닐면서도 우리는 홀로 있다는 느낌을 갖기 쉽다. 사람들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북적거리는데도 왜 고독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시장이라는 장소에서 우리가 다양한 타자들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이곳에 온 것일까? 이들은 이제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우리는 낯선 무엇인가를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그들이 말을 걸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오직 그 경우에만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일본 고학파 유학자인 이토 진사이는 바로 타자의 문제를 진지하게 숙고했던 보기 드문 유학자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욕망하는 것에 맞추어 상대방과 관계하려고 노력했다.

 

 

 

 

의사의 길을 거부하고 유학자가 된 소년

 

 

어느 집안에 총명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온 가족은 장남으로 태어난 그 아이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물론 그 아들이 출세하여 집안을 빛내주고 경제적으로도 지켜주길 원했지요. 가족은 아이가 당시 가장 안정적인 직업으로 인정받던 의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가족의 바람을 충족시키는커녕 도리어 어린 시절부터 철학에 깊이 빠져 위대한 사상가들의 책만 가까이합니다. 가족이 몹시 당황스러워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래서 가족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까지도 아이를 불러 야단치고 훈계하면서 철학을 포기하고 의학으로 진로를 돌리라고 무던히도 타이릅니다.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자신이 원했던 철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바로 1600년대 일본 교토(京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조숙한 아이는 훗날 일본 고학(古學)이라는 새로운 유학의 학풍을 창시한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입니다.

 

진사이는 16세에 처음으로 주희사서집주를 읽었을 때, 그 책을 단지 훈고학적인 저술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다가 19세에 주희가 늙은 스승 이통에게서 배운 가르침을 정리한 책 한 권을 읽게 됩니다. 그 책은 바로 유명한 연평답문(延平答問)이었습니다. 여기서 연평(延平)이란 주희의 스승 이통의 호를 의미하지요. 이 책을 읽고 나서 진사이는 마침내 주희의 사서집주가 단순한 훈고학적인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성인이 되려는 주희의 신유학적 목표가 사서(四書)를 해석하는 가운데 녹아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진사이는 앞으로 주희의 사유를 충실하게 따르리라 다짐합니다. 한때 그가 얼마나 주희의 사상에 매료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27세의 청년 진사이는 스스로 자신의 호를 교사이(敬齋)’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곧 그가 경() 공부로 상징되는 주희의 함양(涵養) 공부와 이를 뒷받침하는 주희의 형이상학적 본성론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교사이란 호는 다름 아닌 경 공부를 상징하는 것이니까요.

 

성인(聖人)이 되려는 주희의 공부법은 크게 두 가지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자기 내면의 본성을 밝히는 내향적 공부법[未發涵養]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외향적 공부법[致知格物]입니다. 전자가 경 공부였다면, 후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였습니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왕수인은 격물치지를 곧이곧대로 따르다가 주희를 비판하게 됩니다.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에도 이치가 있다고 보고 그 이치를 찾는 것이 바로 주희의 격물치지 공부였습니다. 왕수인은 관청에서 자라던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다가 7일 만에 병이 들었고, 마침내 주희의 격물 공부에 대해 회의하게 됩니다. 이런 왕수인의 경우와 달리, 진사이는 주희의 격물 공부가 아닌 경 공부를 곧이곧대로 따르다가 주희의 사상을 비판하게 됩니다.

 

주희의 경 공부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때 자신의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고요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공부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진사이는 너무 지나치게 경 공부에 집중해 발작까지 일으키는 심각한 신경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분명 혼자 있을 때라면 경 공부를 통해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의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고요하게 유지하기가 어렵겠지요. 오히려 마음이 상대방에 따라 격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경험을 겪은 진사이는 다시 혼자 경 공부를 수행했지만, 타인과 만나면 또다시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수차례 경험합니다. 이처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경 공부에 몰두한 그는 결국 심각한 절망과 신경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29세에서 36세에 이르는 동안 심각한 정신적 질병과 싸우면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성인이 되려는 진사이의 마음이 변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은둔 시기에 진사이는 주희가 제안했던 방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통찰을 얻게 되고, 이로부터 성인이 되는 새로운 방법을 숙고하게 됩니다. 마침내 8년에 가까운 은둔 생활을 끝낸 그는 교사이라는 호를 버리고, 공자의 인()을 나타내는 진사이(仁齋)’로 바꾸면서 자신의 사유가 전회(轉回)했음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분명하게 공표합니다. 그는 주희의 경 공부를 폐기하고 대신 공자의 인과 맹자측은지심(惻隱之心)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진사이는 타인과의 구체적인 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확장하면 충분히 공자가 말한 인자(仁者), 즉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지요. 진사이의 유학 사상을 고학(古學)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는 주희가 집대성한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을 넘어서 공자와 맹자의 원래 유학 정신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진사이의 이런 정신이 가장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책 하나가 바로 어맹자의(語孟字義)입니다. 글자 그대로 이 책은, 논어맹자에 기록되어 있는 공자와 맹자의 진정한 뜻을 자신이 밝히겠다는 포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희의 경() 공부를 비판하다

 

 

일본 고학파 유학을 창시한 이토 진사이는 먼저 주희의 경 공부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합니다. 주희가 강조했던 유명한 수양법의 하나인 경 공부는, 구체적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 자기 마음을 고요하게 응시하는 공부법이었습니다. 주희는 사적인 판단과 욕망을 가라앉히고 자기 내면을 응시하면,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본성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했지요. 그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비유를 든 것도 이런 상황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맑은 거울과 고요하게 그친 물처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내면에 깃든 본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진사이는 주희의 이런 신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과연 완전한 본성의 모습이 이미 내면에 갖추어져 있을까? 진사이는 이 점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그런 본성이 있다고 믿고 자기 마음만을 들여다보는 유아론적인 태도로는 다른 사람과 만나는 일상적인 행동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판단에서 그는 주희의 내면적 성향의 경 공부를 비판하게 됩니다. 이미 그 역시 경 공부만으로는 다양한 사태들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심각한 체험을 겪은 뒤였습니다. 그래서 진사이는 더욱 명료하게 주희의 공부법을 비판할 수 있었지요.

 

 

성인의 길은 오로지 사람을 대하고 사물과 관계하는 것을 임무로 삼을 뿐, 편안히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기지 않는다. 어맹자의』 「충서

聖人之道, 專以待人接物爲務, 而不居然以守心持敬爲事. 語孟字義』 「忠恕

성인지도, 전이대인접물위무, 이 불거연이수심지경위사.

 

 

고학파의 창시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진사이는 성인의 길이란 무엇인지부터 다시 묻습니다. 고대 유학을 개창한 공자, 맹자 같은 성인들이 진정으로 중시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한 것이지요. 그에 따르면, 옛 성인들이 자신들의 임무로 삼은 것은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다루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구체적인 인간 관계 속에서 고민하고 애를 썼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공자 시대에는 홀로 있으면서 내면을 응시하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는 이런 관점이야말로 고학의 입장이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진사이는 편안히 앉아서 자기 마음을 단속하고 경건한 자세를 취하는 주희의 경 공부를 성인의 책무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희의 명경지수(明鏡止水)를 비판하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주희내면적 경향의 공부법을 비판함과 동시에 진사이는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표현 자체를 거부합니다. 유학에서는 이 표현을 쓸 수 없다고 본 것이지요. 그는 불교노자(老子)의 사상을 언급하면서 그 공부법이 바로 명경지수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불교가 아무런 사유가 없는 맑디맑은 마음을 추구한다면, 노자는 무욕의 상태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모두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을 추구한 점에서 동일한 관점이라고 지적합니다. 진사이가 말한 내용을 살펴보지요.

 

 

불교와 노자의 가르침은 맑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무욕을 방법으로 삼는다. 공부가 무르익게 되면, 그 마음이 맑은 거울이 빈 것과 같고 잠잠한 물이 맑은 것과도 같게 된다. 조금의 허물도 마음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정결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은혜와 의리가 먼저 사라지고 윤리 규범이 모두 소멸되고 만다. 어맹자의』 「()

佛老之敎也, 以淸淨爲本, 無欲爲道, 曁乎功夫旣熟, 則其心若明鏡之空, 若止水之湛, 一疵不存, 心之潔淨. 於此恩義先絶, 而彛倫盡滅.

불노지교야, 이청정위본, 무욕위도, 기호공부기숙, 즉기심약명경지공, 약지수지담, 일자부존, 심지결정. 어차은의선절, 이이륜진멸.

 

 

진사이에 따르면, 불교노자가 주장한 공부에 무르익게 되면 우리 마음은 텅 빈 거울과 담담한 물처럼 고요해집니다. 바로 주희가 경 공부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심리 상태와 같다고 본 것이지요. 이런 심리 상태는 하나의 허물도 없고 정결하다는 점에서 바람직하게 보이겠지만, 진사이는 오히려 그 점이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사람에게는 당연히 어떤 윤리 규범에 대한 감각과 의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사유와 욕망이 없다는 것은 결국 인의(仁義)에 대한 의지와 감각조차 없다는 뜻이니까요. 만약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되면 공자가 말하고 맹자가 강조한 인의예지의 선한 덕목들은 존립할 자리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진사이는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담담하고 깨끗한 심리 상태를 얻기 위한 주희의 경 공부를 비판했던 것이지요.

 

인의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공부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과 만나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공부라고 진사이는 말합니다. 인간에게 윤리 규범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직접 구체적인 인간 관계에 뛰어들 필요가 있지요. 이런 관점에서 진사이는 자신의 철학 가운데 공자가 말한 충서(忠恕)’의 논의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공자는 서()의 실천 원리를 통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가르쳤지요. 이 경우, 우리의 윤리적 노력은 반드시 내가 만나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사이가 모든 공부는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다루는 데 있다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이 공자의 서()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진사이가 강조한 충서의 공부를 살펴보기에 앞서, 그가 맹자의 인의예지 개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인의예지를 실천하기 위한 공부법으로서 서의 중요성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맹자의 본성론을 다시 숙고하다

 

 

진사이는 주희의 경 공부와 그 공부를 통해 추구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심리 상태를 비판했습니다. 그 비판은 주희가 인간의 마음을 미발(未發)과 이발(已發)두 측면으로 나누어 이해한 점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희는 마음의 감정이 발동하기 이전의 상태를 미발이라 하면서,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의 본성을 살펴보기 위한 경 공부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물론 주희는 마음의 감정이 이미 발동한 때를 의미하는 이발의 때에도 나름의 공부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공자맹자의 유학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진사이는 애초에 공맹의 사유에는 미발과 이발의 구분 자체가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더구나 미발의 상태로 마음을 분석하면, 이는 마치 물이 땅속에 있는 경우를 논하는 것과 같아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마음의 영역을 따로 설정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 것이지요. 진사이에게 마음이란 오직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를 통해서만 의미 있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의 글을 통해 진사이의 주장을 알아보도록 하지요.

 

 

대개 맹자의 학문에는 본래 미발과 이발이라는 설명이 없었다. 지금 만약 송나라 유학자들의 설명을 따라서 미발과 이발로 구분하여 말한다면, 본성은 이미 미발의 상태에 귀속되어 선과 악으로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물이 땅속에 있으면 위와 아래를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맹자가 본성을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을 살펴보면, 그가 기질의 차원에서 본성을 말했음이 분명하다. 어맹자의』 「()

蓋孟子之學, 本無未發已發之說. 今若從宋儒之說, 分未發已發而言之, 則性旣屬未發, 而無善惡之可言. 猶水之在於地中, 則無上下之可言. 今觀謂之猶就下也, 則其就氣質而言之明矣.

개맹자지학, 본무미발이발지설. 금약종송유지설, 분미발이발이언지, 즉성기속미발, 이무선악지가언. 유수지재어지중, 즉무상하지가언. 금관위지유취하야, 즉기취기질이언지명의.

 

 

진사이의 입장을 명료화하기에 앞서, 그가 맹자』 「고자(告子)편에서 본성에 관한 근본적인 비유를 채용하고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성(人性)에 대해 고자와 논쟁하면서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다[性猶湍水也].”고 말한 적이 있지요. 고여서 흐르지 않는 물과 역동적으로 흐르는 물을 한번 비교해볼까요? 진사이는 전자가 바로 주희가 말한 미발의 상태이고, 후자는 맹자가 말한 선한 본성이 드러난 상태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진사이는 고여서 흐르지 않는 물과 같다면 본성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처럼 정체된 물의 경우에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자발성을 가졌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오직 고도의 차이로 물이 흘러갈 때에만 우리는 물의 본성이 아래로 흘러간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사이의 지적에 따르면, 미발의 상태 또는 그와 관련된 주희의 경 공부는 어떤 긍정적인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미발의 상태에서는 자발적으로 선을 향하는 본성의 계기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사실 진사이는 이렇게 되묻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수양의 최종적인 완성이 잠잠한 물과 같은 상태여야만 할까? 아니면 타자(他者)로 원활하게 흐르는 역동적인 물처럼 되어야 할까?”

 

진사이에 따르면 물이 고도의 차이로 흐르듯, 우리의 마음도 내가 아닌 타자와의 차이에 의해서만 작동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말해, 우리의 마음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타자나 외부 사태와 관계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명경지수(明鏡止水) 상태를 지향했던 주희의 사유는, 타자로 향해야만 하는 인간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내면의 방향에 수렴시켜 흐르지 않도록 만드는 사유, 다시 말해 유아론적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요.

 

 

 

 

맹자의 성선설을 다시 숙고하다

 

 

이제 진사이는 주희미발ㆍ이발 개념의 구조를 넘어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해명합니다.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어 너라고 모욕하면서 주는 음식도 받을 수 있고 동쪽 집의 처자를 유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수오지심이 있어 그것을 막기 때문에 그런 탐심을 함부로 풀어놓을 수 없다. 본성이 선하지 않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것이 맹자가 성선(性善)을 논한 본래 취지이다. - 어맹자의』 「()

人有嗜慾, 可以受嘑爾之食, 可以摟東家之處子. 然必有羞惡之心爲之阻隔, 不敢縱其貪心. 非性之善, 豈能然乎? 是孟子論性善之本也.

인유기욕, 가이수호이지식, 가이루동가지처자. 연필유수오지심위지조격, 불감종기탐심. 비성지선, 기능연호? 시맹자론성선지본야.

 

 

물의 본성은 아래로 흐르려는 자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외적인 압력으로 일시적으로나마 위로 흘러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두 경우는 모두 일정한 고도 차이를 전제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지요. 사람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배가 고픈 상황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모욕적으로 음식을 주었다고 해보지요. 이때 우리는 두 가지 경향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허기짐을 달래기 위해 음식을 받으려는 마음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입니다. 진사이에게, 전자의 마음은 외적인 압력으로 일시적으로나마 위로 올라가게 된 마음을 의미하고, 후자의 마음은 자발적으로 아래로 내려가려는 마음, 즉 선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비록 전자의 마음, 즉 탐심이 이겨서 부끄러운 음식을 받아먹었다 할지라도, 배를 채운 뒤 우리의 마음은 과연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아마 이전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더욱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한때의 배고픔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당했다는 자괴감이 생기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심리적 상황은 결국 인간 마음의 자발성, 즉 우리의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이 지점에서 진사이의 수양론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어렵지 않게 직감할 수 있습니다. 진사이는 딜레마가 발생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우리 마음이 가진 자발적인 경향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끝까지 관철하라고 강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모두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는 상태로 옮기는 것이 인()이다. 사람에게는 모두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해도 되는 상태로 옮기는 것이 의()이다. () 이른바 사람에게는 모두 차마 하지 못하는 것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의 두 가지 단서이다. ‘그것을 차마 할 수 있는 상태해도 되는 상태로 옮긴 뒤에야 인과 의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면, 사단(四端)의 마음이란 우리가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것이고, 인의예지란 곧 사단의 마음을 확충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맹자의』 「인의예지

人皆有所不忍, 達之於其所忍, 仁也. 人皆有所不爲, 達之於其所爲, 義也, () 所謂人皆有所不忍有所不爲者, 卽惻隱羞惡之二端也, 而謂達之於其所忍所爲而後能爲仁爲義, 則見四端之心, 是我生之所有, 而仁義禮智, 卽其所擴充而成也.

인개유소불인, 달지어기소인, 인야. 인개유소불위, 달지어기소위, 의야, () 소위인개유소불인유소불위자, 즉측은수오지이단야, 이위달지어기소인소위이후능위인위의, 즉견사단지심, 시아생지소유, 이인의예지, 즉기소확충이성야.

 

 

진사이에 따르면, 타인의 고통에 대한 동정심,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타인의 고통을 구제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고통을 못 본 체하는 것은 우리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구제하는 것만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 되겠죠. 마찬가지로 수오지심이 일어났을 때도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수치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불의를 물리쳐야만 하겠지요. 만약 타인의 고통을 구제하는 데 성공해서 동정심이 해소되었다면, 비로소 ()’이라는 덕목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불의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면, 비로소 ()’라는 덕목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결국 진사이에게 인의예지, 마음의 자발적 경향성인 본성을 따르는 실천적 노력에 의해서 달성되는 덕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사이의 이러한 관점은 매우 독특합니다. 주희맹자인의예지설을 분석하면서 인의예지는 선천적으로 우리 마음 안에 깃든 본성이며, 그것이 밖으로 실현되어 나온 단서가 바로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네 가지 마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사이는 주희의 입장을 반대하면서 어맹자의』 「인의예지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의예지는 도덕의 명칭이지 성()의 명칭이 아니다.”

 

여기서 진사이가 말한 도덕이란 실천을 통해 측은지심 같은 마음을 확충해나간 결과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진사이는 본성을 측은지심 등의 네 가지 단서로 이해했고, 이 단서를 바탕으로 보다 확충해나간 마지막 결과를 인의예지 네 가지 덕목으로 이해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진사이는 맹자의 인의예지는 내 마음 안에 깃든 선천적 본성이 결코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본성이란 것은 측은지심으로 작동할 뿐이고, 인간의 노력으로 측은지심의 마음을 확충함으로써 실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의예지라는 도덕이라고 본 것이지요. 이와 같은 진사이의 관점은 맹자성선설을 매우 독창적이고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진사이의 독특한 해석은 이후 다양한 유학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정약용도 바로 그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음을 나중에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仁義禮智 四端
朱熹 선천적 본성 본성이 밖으로 실현되어 나온 단어
伊藤仁齋 측은지심 등의 본성을 확충해 나간 마지막 결과 선천적 본성

 

 

 

 

공자의 충서를 새롭게 해석하다

 

 

진사이의 극찬에 따르면, 공자는 수많은 타자와 관계할 수밖에 없는 삶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최고의 성인이었습니다. 그것은 공자가 충서(忠恕)’라는 실천 방법의 가치를 설파했기 때문이지요. 앞서 살펴보았듯이, 진사이는 주희의 경 공부에서 공자의 충서의 방법으로 돌아섰고, 젊었을 때의 호 교사이(敬齋)’를 공자의 인()을 따라 진사이(仁齋)’로 바꾸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가 중시했던 공자의 인은 충서의 방법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 궁극적 가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충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요?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 ()’이고,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이다. 집주는 정자를 인용하여 자신을 다하는 것이 충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라는 글자를 해석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주소에서는 자신을 헤아리고[] 남을 헤아린다[忖人]’는 뜻을 기록하고 있으니, (정자가 서를 해석한 것은) ‘헤아린다는 글자로 서를 해석하는 것만큼 좋지는 않다. 이것은 타인과 관계할 때 반드시 그의 생각과 감정이 어떠한지를 헤아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주소에서) ‘자신을 헤아린다는 두 글자는 온당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잡아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말한다. 어맹자의』 「충서

竭盡己之心爲忠, 忖度人之心爲知. 按集註引程子, 盡己之謂忠, 當矣. 但恕字之訓覺未當. 註疏作忖己忖人之義, 不如以忖字訓之之爲得. 言待人必忖度其心思苦樂如何也. 忖己二字未穩, 故改之曰忖度人之心也.

갈진기지심위충, 촌탁인지심위지. 안집주인정자, 진기지위충, 당의. 단서자지훈각미당. 주소작촌기촌인지의, 불여이촌자훈지지위득. 언대인필촌탁기심사고락여하야. 촌기이자미온, 고개지왈촌탁인지심야.

 

 

주희는 정이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따랐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 충이고,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이입하는 것이 서이다.”

 

진사이는 충 개념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고 한다고 말한 정이와 주희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물론 진사이는 주희가 충 개념에 부여했던 일체의 형이상학적 관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했지요. 진사이의 충서 개념이 정이와 주희로 대표되는 성리학의 관점에서 탈피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사실 개념보다는 라는 개념에 있습니다. 진사이는 가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을 의미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본성에 침잠하는 주희의 경 공부는 기본적으로 우리 본성 가운데 삶의 세계를 관통하는 절대 기준이 내재되어 있다고 전제합니다. 이런 이유로 주희는 자기 수양으로서 의 공부가 이루어지면 는 저절로 실현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주희에게서 이란 자기 내면 공부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진사이는 주희가 믿었던 형이상학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았지요. 이 때문에 진사이는 주희가 충서를 해석했던 방식도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주희의 말대로라면 자기 수양으로서 이 가장 중요하며, ‘의 실천 역시 내 마음을 기준으로 타인의 생각과 욕망을 판단하는 것이 됩니다.

 

 

 

 

충서에서 타자의 논리를 찾아내다

 

 

그러나 진사이는 의 공부가 결국 타인의 고유한 욕망과 판단을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공부는 자기 수양으로서의 충 공부를 통해서는 확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나와 다른 누군가를 만나야만 의 공부가 실현되는 것이지요. 진사이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무릇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매우 분명하게 알지만, 남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막연하여 살필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남과 나 사이가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마치 북쪽의 호()와 남쪽의 월() 사이와도 같다. () 진실로 남을 대할 때 그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어떠하고, 그가 대처하고 행하는 것이 어떠한지를 살펴서, 그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고 그의 몸을 자신의 몸으로 삼아 자세히 살피고 헤아려야만 한다. () 정자는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이입하는 것을 서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건대,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이입하는 것은 서가 아니고 곧 서를 사용하는 요점일 뿐이니, 모두 서를 행한 이후의 일이다. 어맹자의』 「충서

夫人知己之所好惡甚明, 而於人之好惡, 汎然不知察焉. 故人與我, 每隔阻胡越. () 苟待人, 忖度其所好惡如何, 其所處所爲如何, 以其心爲己心, 以其身爲己身, 委曲體察, 思之量之. () 程子曰, 推己之謂恕. 愚以謂, 推己非恕. 乃用恕之要, 皆恕以後之事也.

부인지기지소호오심명, 이어인지호오, 범연부지찰언. 고인여아, 매격조호월. () 구대인ㅇ, 촌탁기소호오여하, 기소처소위여하, 이기심위기심, 이기신위기신, 위곡체잘, 사지량지. () 정자왈, 추기지위서. 우이위, 추기비서. 내용서지요, 개서이후지사야.

 

 

수양하는 자기 내면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서 진사이가 발견한 것은 바로 타자성이라는 문제였습니다. 타자란 나와는 다른 생각과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분명 내가 생각한 것, 그리고 내가 욕망한 것은 타자의 그것과 다를 수 있지요. 바로 이 지점에 진사이의 ()’ 개념이 지닌 고유한 철학적 의의가 있습니다. 그에게 서란 타자의 생각과 욕망, 그리고 행동 양식을 읽어내려는 주체의 의지와 사유 작용을 의미합니다. 우선 타자의 고유성을 제대로 포착할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타자에게로 이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사이는 자신의 마음을 남에게 이입하는 것은 서를 행한 이후의 일이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만약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만을 믿고 확충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의도치 않은 폭력으로 귀결될 수도 있습니다.

 

정리하면, 주희는 수양하는 주체와 자기 내면의 본성 사이의 관계에 보다 집중했던 인물입니다. 내 마음에 조금의 허위도 없다면, 마음속에 깃든 본성이 밝게 실현될 것이라고 주희는 확신했지요. 그리고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을 그는 성인(聖人)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와는 달리, 진사이는 수양하는 주체와 외부의 타자 사이의 관계에 집중했습니다. 나 자신에게 나만의 생각과 욕망이 있는 것처럼, 타자에게도 그만의 고유한 생각과 욕망이 있다는 점을 진사이는 긍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朱熹 伊藤仁齋
: 盡己
: 推己及人
: 竭盡己之心
: 忖度人之心
이 이루어지면 도 완료됨 는 별도의 공부 필요
같은 를 지닌 존재이기에 타인은 고유한 욕망을 지닌 존재이기에

 

 

 

이토 진사이의 선견지명

 

 

진사이가 타자에 대한 인식에 눈뜨게 된 계기를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이야기만으로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대대로 교토에서 상인으로 지내온 진사이의 집안에서는 그가 주자학을 공부하려는 것을 보고 상인이 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실용적인 의사가 되라고 강권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사이는 끝까지 자신의 결심을 바꾸지 않고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큰 상처를 받았고,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를 사랑함이 더욱 깊은 사람은 나를 공격하는 것에 더욱 힘쓴다. 그 고초의 상황은 마치 죄인이 심문대에 오르는 것과도 같았다. 고학선생문집(古學先生文集)1송편강종순환류천서(送片岡宗純還柳川序).”

 

마치 심문대에 올라 죄를 반성해야 하는 죄인처럼, 진사이는 학문에 정진하리라는 결심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절절하고 솔직한 회고입니까? 진사이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는 것과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가까운 친척들은 모두 나를 아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니, 나의 고유한 욕망과 판단을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갈등 속에서 진사이는 공자충서(忠恕)를 내 마음이 아닌 타인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공부로 재해석하게 되었습니다. 진정 상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기준으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주희가 말했듯이,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상대에게 밀고 나가면 이것은 결국 상대방을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경우, 상대를 사랑한다기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사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야겠지요. 진사이가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고, 상대의 몸을 내 몸으로 삼으라고 말한 것은 이런 점에서 비춰볼 때 대단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학파의 인물들을 다룬 최근의 일본 연구자들은 이토 진사이야말로 유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타자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도입한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현대 일본 사상계의 대표 학자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토 진사이론(伊藤仁齋論)이라는 글에서 진사이의 독창적인 사유에 대해 다룰 정도였으니까요. 그에 따르면, 진사이는 인간의 동일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마음이란 서로에게 낯선 타자적일 수밖에 없음을 직시했다고 합니다. 이런 평가는 모두 ()’의 공부는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서 들어주는 것이라고 본 진사이의 사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상대가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진 타자임을 인정했다는 면에서, 진사이의 사유를 타자 또는 차이를 탐구하는 현대 철학의 작업에 곧바로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그만큼 1600년대를 살았던 진사이의 사유는 놀라운 선견지명을 보여준 것이지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조선 후기의 몇몇 실학자들은 일본 고학파의 창시자인 진사이의 관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게 됩니다. 특히 이 문제에서도 정약용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약용이 어떻게 진사이의 사상을 흡수했는지의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먼저 일본 고학파의 또 다른 계열인 오규 소라이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같은 고학파이지만 소라이는 진사이를 비판하면서 고문사학(古文辭學)이라는 이질적인 학풍을 조성했습니다. 그는 진사이의 관점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주자학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내려고 애를 썼지요. 다시 말해, 주자학 비판의 강도가 훨씬 높아진 셈입니다. 그럼 고문사학파인 오규 소라이는 어떻게 공자맹자를 이해했고, 중국 고대의 경전들을 재해석했는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더 읽을 것들

 

 

1. 이또오 진사이(이기동, 성균관대출판부, 2000)

주희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을 넘어서 고학(古學)이라는 새로운 기풍을 탄생시킨 일본의 유학자는 바로 이토 진사이입니다. 얼핏 보면 이 책은 이토 진사이에 대한 연구서나 평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책에는 이토 진사이의 사상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에 이토 진사이의 주저 가운데 하나인 어맹자의(語孟字義)가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원문도 부록으로 함께 실려 있습니다.

 

 

 

 

2. 주자학과 근세일본사회(와타나베 히로시, 박홍규 옮김, 예문서원, 2007)

이토 진사이의 유학 사상이 출현하게 된 이유로 일본 특유의 정치ㆍ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일본인들의 삶은 중국 학자 주희의 유학 사상으로 완전히 정당화되기가 어려웠지요. 진사이의 고학(古學) 사상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압박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독자들은 이 책의 말미에 실려 있는 보론을 반드시 읽어보기 바랍니다. 진사이가 왜 주희의 유학을 비판했는지, 진사이의 유학 사상이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게 해주는 글입니다.

 

 

 

3.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마나모토 료엔, 박규태ㆍ이용수 옮김, 예문서원, 2000)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일본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전개되었던 철학 사상을 다룬 개설서입니다. 막상 책장을 넘기면 이 시대의 철학 사상이 대부분 유학 사상과 관련이 있음을 곧 알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일본 유학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 가운데 특히 3장의 고학 사상의 형성과 전개는 진사이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이 부분을 보면, 진사이의 유학 사상이 어떤 철학적 문맥과 동기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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