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5. 지덕(至德)과 지도(至道)의 관계
待其人而後行. 그 사람을 기다린 후에야 행하여지는 것이다. 總結上兩節. 윗 문장을 총결지었다. |
그래서 하는 말이 매크로한 세계와 마이크로한 세계, 거대한 천지의 세계와 인간세의 사소한 예의적인 세계의 양면이 하나로 관통해서 실현될려면 “그 사람을 기다린 후에나 행하여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20장에도 있었죠? “문(文)과 무(武)의 정치는 반포되어 방책(方策)에 다 있으나, 그 사람이 있으면 정치가 일어나고, 그 사람이 없으면 정치가 멈춰버린다[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결국 그 정치가 잘 되냐 안 되냐의 핵심은 그 사람이라고 했죠?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바는 항상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되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서도 ‘대기인이후행(待其人而後行)’이라 할 때 핵심은 ‘그 사람[其人]’입니다. “그 사람을 기다린 후에야 행하여진다. 그 사람 여하에 따라서 그 매크로한 세계와 그 마이크로한 세계의 동시적 실천이 결정된다.”는 거예요. 주자는 주에서 “이것은 위의 두 절을 종합하여 맺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故曰: “苟不至德, 至道不凝焉.” 그러므로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쌓이지 아니한다.’라고 한 것이다. 至德, 謂其人. 至道, 指上兩節而言. 凝, 聚也, 成也. 지덕(至德)은 그 사람을 말한다. 지도(至道)는 윗 두 문장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응(凝)은 모인다는 것이니,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
‘고왈(故曰)’이라고 했으니까 ‘구부지덕 지도불응언(苟不至德 至道不凝焉)’이란 말은 중용(中庸)의 저자에게 있어서는 그 이전에 실제 존재했던 말이겠죠? 그런데 이 프라그먼트(Fragment)에 대한 인용의 출처는 알 수가 없어요. 어떠한 문학적 양식에 의하여 “그러므로 이러한 것이다.”라고 자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도 이 저자의 시기에 이미 존재하던 어떤 경구일 것입니다.
‘구부지덕 지도불응언(苟不至德 至道 不凝焉)’
주자 주에 보면, “지극한 덕(德)은 그 사람을 일컬은 것이고, 지극한 도(道)는 위의 두절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응(凝)은 모이는 것이요 이루는 것이다[至道 指上兩節而言 凝 聚也 成也].”라고 했는데, 여기에 중요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 27장은 중용(中庸)에서도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지덕(至德)과 지도(至道)가 나왔죠? 이것을 거꾸로 하면 노자 『도덕경(道德經)』의 도덕(道德)이 되죠? 고전이라는 것은 이렇게 상통하는 거예요. 사실 마왕퇴에서 나온 출토본에는 『도덕경(道德經)』이 아니라 「德道經」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왕퇴 본은 ‘상덕부덕(上德不德).’이라는 제 38장부터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확실히 알 수 있냐하면, 마왕퇴에서 나온 것은 죽간(竹簡)이 아니라 백서(帛書)기 때문이죠. 비단 위에 연속적으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순서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거기에는 덕경(德經)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도경(道經)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지금의 『도덕경(道德經)』 과 크게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텍스트의 순서에도 상당히 중요한 엄청난 문제가 내재해 있습니다. 그 단순한 변화가 우리에게 엄청나게 큰 추측을 가능케 한단 말이죠. 그것에 관한 기발한 학설이 내게 많이 있는데 아직 발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얘기하지 못하는 세계적인 학설이 있는데 앞으로 그것을 쓸 예정입니다. 왕필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도와 덕을 응축해가다
본문의 응(凝)이라는 글자는 무형적인 그 무엇이 모여 형성된다는 것, 구체화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옛날 사람들은 물이라는 것을 무형이라고 생각한 거죠. 이러한 무형의 물이 얼어서 형체를 띤 것, 즉 고체화되는 것을 응(凝)이라고 한 겁니다. 문자적으로 분석하면, 이 삼수변이 있는 걸로 봐서 물, 즉 삼수변에서 뭔가 빠진 것이 얼음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덕(德)이라든가 도(道)라는 것은 무형의 세계죠. 이러한 무형의 세계가, 마치 물이 응집되어 얼음이 되듯, 내 몸에 쌓여서 형성되는 것을 凝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덕은 쌓여서 형성되는 것이다[德蓄之].”라든지, “덕은 얻는 것이다[德得也].”라고 한 것이고, 내가 말하는 ‘공부론’도 몸의 단련, 즉 끊임없는 수신을 통해서 형성되는 축덕(蓄德)의 과정에 관한 논의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지도 불응언(至道 不凝焉)’은 “지극한 도(道)가 쌓이지 아니한다”라고 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본문에서 말하는 덕(德)과 도(道)의 관계가 밝혀진 것은 아니죠.
본문의 맥락에서 본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도(道)는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천지운행의 법칙이나 도덕적 원리로서의 ‘도(道)’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대목을 읽을 때 혼동을 하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도(道)는 말 그대로 구체적인 길(way)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세부적인 방법(method)이예요. 그에 반해서 덕(德)은 도(道)보다 상위개념으로서 형이상학적인, 본체적인, 원리적인 그 무엇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양양호 발육만물 준극우천(洋洋乎 發育萬物 峻極于天)’이 지덕(至德)과 지도(至道)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엇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지덕(至德)과 관련이 있겠죠? 그리고 ‘우우대재 예의삼백 위의삼천(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지도(至道)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리일분수(理一分殊)
주자학에 자주 거론되는 말로서 ‘리일분수(理一分殊)’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것도 사실 해석이 참 어려워요. 그래서 그 풀이도 사람에 따라 분분한데, “리(理)는 하나인데 그것이 나뉘어 차별이 생겼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리(理)는 하나이고 분(分)은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 세계는 외형적으로 볼 때 매우 잡다하고 부분적인 법칙에 의해 운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궁극에 가서는 하나의 단순한 법칙(a simple law)이 있다, 하나의 리(理)가 있다는 말이죠. 현대과학이 지향하는 거도 뭐죠? 지금 과학의 여러 분과에서 성립한 국부적인 법칙들(local law)이 있는데, 그러한 것들을 하나로 묶는 하나의 단순한 법칙이 있다는 전제하에, 예를 들면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처럼, 이 세계를 법칙화 해 나가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송(宋)·명(明) 유학에서 말하는 리일분수(理一分殊)라는 개념과 오늘날 사이언스가 지향하는 바가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본문의 구조속에서는 여기에서 말하는 지덕(至德)의 세계가 어떤 의미에서 현재 우리가 쓰는 도덕(moral)의 의미가 아니라 리일분수(理一分殊)에서 말하는 리(理)의 세계에 해당되고, 지도(至道)의 세계가 거꾸로 분수(分殊)의 세계에 해당됩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 문장을 분석해 들어가야 그 다음 절이 이해가 되요.
지덕(至德) | 지도(至道) |
형이상학적인, 본체적인, 원리적인 그 무엇 | 구체적인 길이자 세부적인 방법 |
洋洋乎 發育萬物 峻極于天 | 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 |
리(理) | 분수(分殊)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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