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1부, 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건방진방랑자 2021. 7. 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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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탈주ㆍ우정ㆍ도주

 

 

미스터리(mistery)

 

 

從古文章恨橘鰣 예로부터 훌륭한 글은 얻어보기 어려운 법
幾人看見燕岩詩 연암시를 본 이 몇이나 될까?
曇花一現龍圖笑 우담바라꽃이 피고 포청천이 웃을 때
正是先生覔句時 그때가 바로 선생께서 시 쓸 때라네

 

 

이 시는 연암그룹의 일원인 박제가(朴齊家)연암이 율시를 지은 걸 축하하며(하연암작율시賀燕岩作律詩)라는 시이다. 3천 년에 한 번씩 피는 꽃, 우담바라. 살아서는 서릿발 같은 재판으로 이름을 날리고 죽어선 염라대왕이 되었다는 포청천(包靑天), 본명은 포증(包拯), 송나라 때 유명한 판관이다. 한때 포청천이라는 중국 드라마가 우리나라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그에게서 웃는 모습을 기대하기란 요원하다. 그런데 박제가는 연암의 시짓기를 우담바라 꽃과 포청천의 웃음에 비유했다.

 

또 다른 친구 이덕무(李德懋)과정록(過庭錄)4에서 다음과 같이 비슷한 불평을 토로한 바 있다.

 

 

연암의 산문은 천하에 오묘하다. 그러나 공은 시만큼은 몹시 삼가 좀처럼 지으려 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포청천이 잘 웃지 않아 그가 한 번 웃는 일이 100년에 한 번 황하가 맑아지는 데 비견된 것처럼 많이 얻어볼 수 없다.

燕岩文章玅天下. 而於詩獨矜愼, 不肯輕出, 如包龍圖之笑, 比河淸, 不得多.

 

 

두 사람 모두 연암이 평생 동안 지은 시가 고체시, 근체시를 합해 50여 수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허풍과 익살로 빗댄 것이다. 저 향촌의 재주 없는 선비들도 적게는 수백 수에서 많게는 수천 수에 이르는 시를 남기는 게 조선조의 관례임을 떠올리면, 두 사람의 과장적 제스처도 그저 수사적 표현으로 치부할 일만은 아니다. ‘한유(韓愈)소식(蘇軾), 반고와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타고났으며’, ‘붓으로 오악(五嶽)을 누르리라는 꿈의 예시를 받았다는 그가 어째서 시짓기에 그토록 인색했던 것일까? —— 미스터리 하나.

 

 

당시 아버지의 문장에 대한 명성은 이미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래서 과거시험을 치를 때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아버지를 꼭 합격시키려 하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눈치채고 어떤 때는 응시하지 않았고 어떤 때는 응시는 하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과거시험장에서 고송(孤松)과 괴석(怪石)을 붓 가는 대로 그리셨는데, 당시 사람들은 아버지를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時先君文章之名, 已喧動一世, 每有科試, 主試者, 必欲援引. 先君微知其意, 或不赴, 或赴而不呈券. 一日在場屋, 漫筆畵古松老石, 一世傳笑其踈迂.

 

 

아들 박종채의 회고록인 과정록(過庭錄)1 일부다.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젊은 유학자가 과거시험 보기를 거부하고, 거기다 한술 더 떠 기껏 응시하고선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거나 고송과 괴석을 그리고 나오다니. 시험지에다 그림을 그리고 나온 건 내가 아는 한 연암이 유일한 케이스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으려 했는데, 꼭 응시해야 한다고 권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억지로 시험장에 들어가긴 했으나 답안지를 내지 않고 나왔다. 그때 장인이 시골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지원이 회시를 보았다고 하여 나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는데, 시험지를 내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으니 몹시 기쁘구나[某之會圍, 吾不甚喜也. 及聞其不呈券, 甚欣然也](과정록過庭錄1)”라고 했다나. 그 사위에 그 장인 한마디로 점입가경이다. 과거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으나 시대가 용납하지 않아서, 아니면 제도적 부정의 횡포 때문에 제도권으로의 진입을 봉쇄당한 천재들은 무수히 있었다. 하지만 거꾸로 시험 주관자는 어떻게든 합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데, 정작 당사자가 관문에 들어서기를 끝내 거부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대체 왜? —— 미스터리 둘.

 

언뜻 무관해 보이지만, 이 두 가지 미스터리는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이것들은 그가 청년기에 겪은 우울증에 연원이 닿아 있기도 하다. 이 미스터리들을 풀 수 있다면, 독자들은 청년기 이후 연암의 생애를 좀더 근경에서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분열자

 

 

청년기의 우울증을 거쳐 30, 젊음의 뒤안길을 통과하면서 연암은 마침내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을 보면, 연암을 자기 당파로 끌어들이려는 조정의 벼슬아치들에 대한 염증이 그 원인이라고 암시되어 있다. 하지만 선뜻 납득되지는 않는다. 소인배 없는 시절이 어디 있었으며, 당파 싸움 또한 어제오늘 일이 아닌 바에야, 그 정도로 아예 초연히 세상에서 벗어나겠다는 실존적 결단을 내렸다면 좀 지나친 결벽증 아닌가.

 

좀더 무게가 실리는 건 정국(政局)에 대한 심각한 회의다.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처숙(妻叔) 이양천이, 영의정에 소론계 인물이 임명된 조치에 항의하다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고, 또 벗 이희천(李羲天)이 왕실을 모독하는 기사가 실린 중국 서적을 소지한 혐의로 처형을 당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으며, 유언호(兪彦鎬), 황승원(黃昇源) 등 그의 지기들이 잇달아 정쟁에 휘말리는 사건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정치에 대한 환멸이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법하다.

 

하지만 이것도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 사화의 피바람이 그치지 않았던 조선왕조에서, 더욱이 세상을 경륜하는 것을 학문의 유일한 척도로 삼는 유학자가 이런 정도의 난맥상을 못 견뎌 뜻을 접는다는 건 뭔가 석연치 않다. 따지고 보면 과연 그 정도의 격랑이 없는 시대가 있었던가? 더구나 이용후생을 지식의 모토로 삼았을 만큼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그가.

 

물론 이 저간의 사정들이 함께 작용하긴 했을 터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이전에 그는 선천적으로 제도와 질서와는 절대로 친화할 수 없는 신체적 기질을 타고난 것이 아닐지, 사실 한 인간의 생을 규정하는 건 거창한 명분이나 사명감 따위가 아니다. 특히 기가 센인물일수록 시대가 부과한 기대 지평과 어긋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때의 균열이 정치경제학적 인과관계나 이념적 명분으로 환원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혹은 지각 불가능의 상태에서 돌연인생 코스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지 않은가. 예컨대 그를 못 견디게 한 건 정쟁이나 권력의 부패 이전에 과거장의 타락상이었던 듯하다.

 

 

어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이 줄잡아 수만 명이나 되었지만 창명(唱名; 급제자 발표)은 겨우 스무 명밖에 아니 되니 이야말로 만에 하나라 이를 만하지 않겠소. 시험장의 문에 들어갈 때 서로 밟고 밟히고 죽고 다치고 하는 자들이 수도 없으며, 형제끼리 서로 외치고 부르고 뒤지고 찾곤 하다가, 급기야 서로 만나게 되면 손을 잡고 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나 만난 듯이 여기니, 죽을 확률이 십 분의 구라 이를 만하지요. 지금 그대는 능히 십 분의 구의 죽을 확률에서 벗어나서 만에 하나의 이름을 얻었소.

凡言僥倖, 謂之萬一. 昨日擧人, 不下數萬, 而唱名纔二十, 則可謂萬分之一. 入門時相蹂躪, 死傷無數. 兄弟相呼喚搜索, 及相得, 握手如逢再生之人, 其去死也, 可謂十分之九. 今足下能免十九之死, 而乃得萬一之名.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만에 하나의 영광스러운 발탁을 미처 축하하기 전에, 속으로 사망률이 십 분의 구에 달하는 그 위태로운 장소에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을 축하할 따름이오. 즉시 몸소 축하해야 마땅하겠으나, 나 역시 십 분의 구의 죽음에서 벗어난 뒤라 지금 자리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으니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주기 바라오.

僕於衆中, 未及賀萬分一之榮擢, 而暗慶其不復入十分九之危場也. 宜卽躬賀, 而僕亦十分九之餘也, 見方委臥呻楚, 容候少閒.

 

 

북쪽 이웃의 과거 급제를 축하함[賀北鄰科]이라는 글의 일부다. 과거시험장이라고 하면 우리에겐 궁중악이 우아하게 깔리는 가운데 비원 뜰을 가득 메운 선비들이 나란히 정좌한 채 근엄한 표정으로 붓을 놀리는 장면이 떠오르지만, 실제 상황은 그와 전혀 달랐던 모양이다. 전국 각처에서 수험생들이 올라오면, 그들의 수행원들까지 포함해서 시험 당일 전에 이미 고사장 바깥이 장바닥이 되었고, 또 당일날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수행원들 사이의 닭싸움으로 북새통을 이루었으니, 수만 명이 서로 짓밟으며 형과 아우를 불러댄다는 연암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듯하다.

 

 

연암은 단지 제도의 부조리를 풍자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아수라장에서 간신히 벗어나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으면서 후회막심해하는 표정이 생생하게 손에 잡힐 듯하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러하다면, 이미 십대 후반 입신양명의 문턱에서 과거알레르기 증후군을 앓았던 그로서는 체질적 거부반응이 한층 심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설령 과거제도가 제대로 시행된다 해도, 그는 무엇보다 고정된 하나의 틀로 천만 편의 똑같은 글을 찍어내는바로 그 과문(科文)을 참을 수 없었다. ‘사마천(司馬遷)과 반고가 다시 살아난대도 / 사마천과 반고를 배우진 않으리라고 하여 고문을 답습하는 문풍을 격렬히 조롱했던 그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게다가 다만 격률의 완성도만 테스트하는 과문의 구속을 어찌 참을 수 있었으랴. 아니, 더 나아가 관료로서의 진부한 코스를 어찌 선택할 수 있었으라. 어떻게든 과거에 입문시키려는 주최측의 그물망을 피해 끊임없이 탈주를 시도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닐까?

 

포획과 탈주, 이후에도 이런 시소 게임은 계속된다. 뒤늦게 음관(蔭官)으로 진출했을 때, 음관들을 위한 특별 시험을 실시하면서 한 사람도 빠지지 말라는 왕명이 있었음에도 그는 근무지인 경기도 제릉으로 날쌔게달아난다. 과거를 포기한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시험을 치르게 하여 관료로 진출시키려는 포섭의 기획을 계속 와해시켰던 것이다. 말하자면 연암은 흔히 떠올리듯, 원대한 뜻을 품었으나 제도권으로부터 축출당한 불운한 천재가 아니라, 체제의 내부로 끌어들이려는 국가장치로부터 끊임없이 클리나멘(clinamen)’을 그으며 미끄러져 간 유쾌한 분열자였던 것.

 

그렇다면 시짓기에 그토록 인색했던 까닭에 대해서도 대충 감이 잡힐 듯하다. 그는 사실 매우 뛰어난 시인이었다.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총석정관일출, 叢石亭觀日出]를 비롯하여 남아 있는 작품들은 그 기상이나 수사학이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나다. 그런데도 그가 시를 멀리한 이유는 알고보면 꽤나 단순하다. ‘그 형식적 구속 때문에 가슴속의 말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없음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엘리트 집단의 공통 문법이자 문화적 징표인 한시의 형식도 견디지 못했던 연암, 거기에는 어떤 명분이나 사회적 이유를 떠나 태생적으로 탈코드화기질적 속성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만년에 자식들에게도 과거로 출세하기를 바라지 말라고 당부했고, 실제로 자식의 영달에도 무심했다. 그와 관련한 흥미로운 삽화 하나. 한번은 아들이 정시를 보는 날이었는데, 그때가 마침 연암골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친지들은 모두들 틀림없이 약속을 취소하고 집에서 시험 결과를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연암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히 짐을 챙겨 길을 떠났다고 한다. 가는 도중에도 일절 마음의 동요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그는 원초적으로 비정치적인’, 아니 권력 외부를 지향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대체 누가 이 사람의 탈주를 막을 수 있으랴!

 

 

▲ 「소과응시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있어 과거는 일생일대의 큰 행사였다. 입신양명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대부들의 숫자는 늘어나고 자리는 한정되어 있으니, 과거제도의 권위도 추락하고 말았다. 조선 후기 들어 과거제도가 부패하면서 자리 빼앗기에 컨닝까지 과거 시험장은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그림에서 보듯 응시자 한 명에 수행원이 너댓 명인 데다 마치 유람을 온 듯한 포즈들이다. 연암 같은 기질로 이런 분위기를 참아내기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연암그룹

 

 

아버지(연암)는 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 언제나 서너 사람은 더 됐다.

先君常喜與人合食, 合食者, 常不下三四人.

 

 

과정록(過庭錄)4에 나오는 참 재미있는 장면이다.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연암의 일상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배적 코드로부터의 탈주는 한편으론 고독한 결단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늘 새로운 연대와 접속으로 가는 유쾌한 질주이기도 하다. 과거를 포기하고 체제 외부에서 살기로 작정했지만, 연암에게 고독한 솔로의 음울한 실루엣은 전혀 없다.

 

그는 세속적 소음이 끊어진 산정의 고고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부과된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온갖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시정 속으로 들어갔다. 젊은 날 우울증을 치유하기 위해 저잣거리의 풍문을 찾아 헤맸던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만난다. 벗을 부르는 일이야말로 태양인 박지원의 타고난 능력 아니던가.

 

물론 십대에 이미 그러했듯 연암의 친구들은 재야 지식인, 서얼(庶孼), 이인(異人), 광사(狂士) 등 주류 바깥에 있는 소수자혹은 외부자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우정은 삼강오륜의 위계적 규범을 깨는 것이면서 소수자들의 연대라는 윤리학적 실천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그저 교양과 사교를 위한 사귐이 아니라, ‘매번 만나면 며칠을 함께 지내며, 위로 고금의 치란(治亂) 흥망에 대한 일로부터 제도의 연혁, 농업과 공업의 이익 및 폐단, 재산을 증식하는 법, 환곡을 방출하고 수납하는 법, 지리, 국방, 천문, 음악, 나아가 초목, 조수, 문자학, 산학에 이르기까지 꿰뚫어 포괄하지 아니함이 없는 새로운 지식인 집합체였다. 이름하여 연암그룹’! 구체적으로는 홍대용(洪大容)정철조(鄭喆祚), 서얼인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무인(武人) 백동수 등이 이 그룹의 핵심멤버다.

 

열하로 가는 길에도 이 친구들은 그와 함께한다. 연암은 여정 곳곳에서 자신보다 앞서 연행(燕行)을 체험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의 흔적을 계속 확인한다. 예컨대 피서록(避暑錄)의 한 대목을 보면, 풍윤성(豊潤城)에 올라 수염이 아름다운 한 선비를 만나는 장면이 있다. 그 선비가 연암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당신은 필시 초정(楚亭) 박제가의 일가시죠[君豈非楚亭族親乎]?” 한다. 연암이 놀라 그 사연을 물으니, 그 전해 박제가가 이덕무와 함께 그 고을을 지나며 한 집의 벽에다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에 변계함, 정진사 각과 더불어 함께 그 집을 찾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하였다. 주인이 등불 넷을 켜서 벽을 밝혀주기에 그 시를 한 번 낭독하니 이것은 곧 우리 집이 전동(典洞)에 있을 때에 형암(이덕무)이 왔다가 지은 것이다.

遂同卞季涵鄭進士珏, 入其中堂, 日已昏黑. 主人爲張四燈, 照壁一讀, 乃余家典洞時, 炯菴在余作也.

 

泬㵳秋令樹先知 쓸쓸한 가을 소식 저 나무가 먼저 아네
任忘暄凉做白癡 춥고 더움 다 잊으니 바보되고 말았구나.

 

백로지 두 폭을 붙여서 쓴 것인데, 글씨 자태가 물 흐르듯 하고 한 글자의 크기가 마치 두 손바닥을 맞대어 놓은 것 같다. 전날에 우리들이 중국 일을 이야기할 때에 부질없이 그리워만 하다가 이 몇 해 사이에 차례로 한 번씩 구경하였을 뿐 아니라, 이렇게 먼 만리 타향에서 이 시를 읽으매 마치 친구의 얼굴을 보는 듯싶었다.

聯白鷺紙二幅, 筆態流動, 一字恰如兩掌大. 先是, 吾輩談說中原, 空費艶羡, 數年之間, 取次一游, 又况萬里異鄕, 如逢故人一面哉.

 

 

이런 식으로 연암의 친구들은 열하일기곳곳에서 얼굴을 드러낸다. 이들이 나눈 우정의 파노라마는 별도로 책을 엮어야 할 정도로 다채롭지만, 여기서는 간략한 스케치 정도로 만족하기로 한다.

 

 

 

 

먼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연암보다 여섯 살 위지만 평생 누구보다 도타운 우정을 나누었다. 그 또한 과거를 폐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갔는데, 특히 과학과 철학에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했다. 연암은 홍덕보(홍대용의 자) 묘지명[洪德保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율력에 조예가 깊어 혼천의(渾天儀) 같은 여러 기구를 만들었으며, 사려가 깊고 생각을 거듭하여 남다른 독창적인 기지가 있었다. 서양 사람이 처음 지구에 대하여 논할 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말하지 못했는데, 덕보는 일찍이 지구가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고 논하니, 그 학설이 오묘하고 자세하여 깊은 이치에 닿아 있었다.

尤長於律曆, 所造渾儀諸器, 湛思積慮, 刱出機智. 始泰西人諭地球, 而不言地轉, 其說渺微玄奧.

 

 

홍대용 또한 연암에 앞서 연행(燕行)의 행운을 누렸다. 특히 북경에서 엄성(嚴誠), 육비(陸飛), 반정균(潘庭筠) 등 절강성 출신 선비들과 만나 뜨거운 우정을 나눈다. 이른바 천애(天涯)의 지기들을 만난 것. 그의 연행록을 보면, 이들 사이의 뜨거운 사귐과 홍대용의 단아하면서도 명석한 품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한문판이 담헌연기, 한글판 버전이 을병연행록이다). 아울러 홍대용은 음률의 천재였기 때문에 구라철사금(歐羅鐵絲琴, 양금洋琴)’을 해독하여 사방에 퍼뜨리거나, 풍금의 원리에 대해 명쾌하게 변론하는 등 음악사적으로도 탁월한 자료를 많이 남겼다. 홍대용(洪大容)이 죽은 뒤 연암이 집에 있는 악기들을 버리고 한동안 음악을 듣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홍대용이 영천군수로 있을 무렵, 연암협에 은거하고 있던 연암에게 얼룩소 두 마리, 농기구 다섯 가지, 줄 친 공책 스무 권, 2백 냥을 보내며, “산중에 계시니 밭을 사서 농사를 짓지 않을 수 없을 테지요. 그리고 의당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외다라고 했다. 친구에 대한 자상한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는 담헌에 비하면 지명도가 아주 낮지만, 그 또한 뛰어난 재야 과학자였다. 기계로 움직이는 여러 기구,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인중기, 물건을 높은 데로 나르는 승고기, 회전장치를 한 방아, 물을 퍼올리는 취수기 등을 손수 제작했으나 지금은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열하일기』 「알성퇴술(謁聖退述)편에 보면 북경의 관상대에 올라 혼천의를 비롯한 천문기구들을 보면서 정철조를 떠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뜰 한복판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내 친구 정석치의 집에서 본 것들과 비슷했다. 그러나 이튿날 가보면, 기계들을 모두 부서뜨려 더볼 수가 없었다.

而庭中所置, 亦有似吾友鄭石癡家所見者. 石癡甞削竹手造諸器, 明日索之, 已毁矣.

 

언젠가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두 친구가 서로 황()ㆍ적도(赤道)와 남()ㆍ북극(北極) 이야기를 하다가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나한테는 그 이야기들이 아득하기만 하여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자느라고 듣지 못하였지만, 두 친구는 새벽까지 어두운 등잔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甞與洪德保共詣鄭, 兩相論黃赤道南北極, 或擺頭, 或頤可. 其說皆渺茫難稽, 余睡不聽, 及曉, 兩人猶暗燈相對也.

 

 

홍대용과 정철조(鄭喆祚), 두 친구는 머리를 맞대고 황도, 적도, 남극, 북극 등 지구과학에 대해 열나게 토론하고 있는데, 옆에서 꾸벅꾸벅 졸다 잠을 청하는 연암의 모습이 한 편의 시트콤이다. 하지만 이때 주워들은 이야기로 뒷날 열하에서 중국 선비들한테 온갖 장광설을 늘어 놓으며 우쭐댔으니 참, 연암처럼 친구복을 톡톡히 누린 경우도 드물다.

 

 

 

 

앞에 나온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과 함께 모두 서얼 출신으로, 연암의 친구이자 학인들이다. 정조가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세운 아카데미인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흥미로운 건 이들 모두 정조가 끔찍이 싫어했던 소품문을 유려하게 구사한 작가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덕무(李德懋)18세기를 대표하는 아포리즘(aphorizm)의 명인이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청언소품(淸言小品)’들로 흘러넘친다. 서얼 출신인 데다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곧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부를 정도로 책벌레였던 그는 가난과 질병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유득공 역시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을 터, 여기 두 사람의 눈물겨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 집에 좋은 물건이라곤 단지 맹자(孟子)일곱 편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딜 길 없어 2백 전에 팔아 밥을 지어 배불리 먹었소. 희희낙락하며 영재 유득공에게 달려가 크게 뽐내었구려. 영재의 굶주림 또한 하마 오래였던지라, 내 말을 듣더니 그 자리에서 좌씨전(左氏傳)을 팔아서는 남은 돈으로 술을 받아 나를 마시게 하지 뭐요.

家中長物, 孟子七篇, 不堪長飢, 賣得二百錢, 爲飯健噉, 嬉嬉然赴冷齋大夸之. 冷齋之飢 亦已多時, 聞余言, 立賣左氏傳, 以餘錢沽酒以飮我.

 

이 어찌 맹자가 몸소 밥을 지어 나를 먹여주고, 좌씨가 손수 술을 따라 내게 권하는 것과 무에 다르겠소. 이에 맹자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더라오. 그렇지만 우리들이 만약 해를 마치도록 이 두 책을 읽기만 했더라면 어찌 일찍이 조금의 굶주림인들 구할 수 있었겠소. 그래서 나는 겨우 알았소. 책 읽어 부귀를 구한다는 것은 모두 요행의 꾀일 뿐이니, 곧장 팔아치워 한번 거나히 취하고 배불리 먹기를 도모하는 것이 박실(樸實)함이 될 뿐 거짓 꾸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오. 아아!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是何異子輿氏親炊飯以食我, 左丘生手斟酒以勸我? 於是頌讚孟左千千萬萬. 然吾輩若終年讀此二書, 何嘗求一分飢乎? 始知讀書求富貴, 皆僥倖之術, 不如直賣喫圖一醉飽之樸實而不文飾也. 嗟夫嗟夫! 足下以爲如何?

 

 

역시 연암그룹의 일원인 이서구(李書九)에게 보낸 편지다(與李洛瑞書). 오로지 책이 삶의 전부인 지식인이 책을 팔아 밥을 먹어야 하는 이 지독한 아이러니! 이덕무(李德懋), 그리고 그의 친구들의 아포리즘(aphorizm)은 이런 절대빈곤무소유의 한가운데서 솟구친 열정의 기록이었다.

 

백동수도 흥미로운 캐릭터 중의 하나다. 1789년 가을, 정조는 백동수를 박제가(朴齊家), 이덕무 등과 함께 불러들인다. 정조의 명령은 새로운 무예서를 편찬하라는 것. 이름도 미리 정해놓았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곧 무예에 관한 실기를 그림과 설명으로 훤히 풀어낸 책이라는 뜻. 이덕무에게는 문헌을 고증하는 책임이, 박제가에게는 고증과 함께 글씨를 쓰는 일이, 그리고 백동수에게는 무예를 실기로 고증하는 일과 편찬 감독이 맡겨졌다. 당시 백동수는 40대 중반으로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 초관의 직책에 있었다. 일개 초관에 불과한 인물에게 조선 병서의 전범이 될 책의 총책임을 맡기다니! 그러나 그가 당대 창검무예의 최고수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다지 놀랄 일만도 아니다.

 

장수 집안의 서자인 그는 십대부터 협객들을 찾아다니며 무예를 익혔다. 특히 당대 최고의 검객 김광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검의 원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나, 당시는 문반 엘리트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연암이 한 글에서 말했듯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으려는 뜻은 사대부에게도 부끄럽지 않았건만, 시운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무인에다 서자, 결국 그 또한 조선왕조 마이너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그가 연암 그룹과 일찌감치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이덕무와는 처남매부지간이자 평생의 지기였고, 박제가(朴齊家)와는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연암과도 역시 그러했다. 이들의 얼굴은 이 책 곳곳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마치 영화의 카메오처럼.

 

 

박제가(위쪽), 홍대용(洪大容, 아래쪽)의 초상

박제가 초상은 1790년 청나라 화가 나빙이 그린 것이다. 화질이 안 좋아 박제가의 풍모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서자 출신이었지만 연암그룹의 핵심멤버였고, 북학파 가운데서도 급진파에 속했다. 청문명을 동경한 나머지 중국어 공용론을 펼치기도 했다. 홍대용은 연암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18세기 사상사의 빛나는 별, 지전설, 지동설 등 당시로선 파천황적 이론을 펼친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하다. 엄성이 그린 이 초상화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터치가 홍대용의 풍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엄성은 홍대용(洪大容)이 유리창에서 사귄 중국인 친구 중의 하나로, 죽을 때 홍대용이 보내준 먹과 향을 가슴에 품고서 숨을 거두었다. 그것만으로도 둘 사이의 우정이 얼마나 뜨겁고 절절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붓끝에 담긴 엄성의 사랑을 느껴보시기를!

 

 

 생의 절정 백탑청연(白塔淸緣)’

 

 

에피쿠로스, 스피노자, 이탁오(李卓吾), 연암 —— 이들의 공통점은? 정답은 우정의 철학자’, 20대의 맑스가 박사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고병권 옮김)에서 재조명한 에피쿠로스는 우정의 정원으로 유명하고, ‘내재성의 철학을 통해 기독교적 초월론을 전복한 스피노자 역시 우정과 연대를 윤리적 테제로 제시한 바 있다. 명말 양명좌파(左派)의 기수였던 이탁오는 스승이면서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 친구이면서 스승이 될 수 없다면, 그 또한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라며 배움과 우정의 일치를 설파한 중세 철학의 이단자다.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주류적 사상의 지형에서 탈주한 이들의 윤리적 무기는 언제나 우정이었다.

 

연암에게 있어서도 우정론은 윤리학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미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마장전(馬駔傳)서에서 벗이 오륜(五倫)의 끝에 자리를 잡은 것은 결코 낮은 위치여서가 아니라, 마치 흙이 오행 중에서 끝에 있으나, 실은 사시의 어느 것에 흙이 해당치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부자가 친함이 있고, 군신이 정의를 지니고, 부부가 분별이 있고, 장유가 차례가 있다 하더라도 붕우의 믿음이 없다면 아니될 것이다. 그리고 오륜이 제자리를 잃었을 때에는 오로지 벗이 있어서 그를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벗의 위치가 비록 오륜의 끝에 있으나 실은 그 넷을 통괄할 수 있는 것[友居倫季 匪厥疎卑 如土於行 寄王四時 親義別叙 非信奚爲 所以居後 廼殿統斯]’이라고, 연암 특유의 우정론을 펼친 바 있다. 이 우정론은 단순한 우정예찬이 아니라, 우도(友道)를 중심으로 나머지 사륜(四倫)의 위계를 전복한다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이후 그의 우정론은 한결 깊고 넓어진다. 회성원집발(繪聲園集跋)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벗이란 2의 나[第二吾]’. 벗이 없다면 대체 누구와 더불어 보는 것을 함께하며,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 맛보는 것을 같이하며,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하며, 장차 누구와 더불어 지혜와 깨달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아내는 잃어도 다시 구할 수 있지만 친구는 한 번 잃으면 결코 다시 구할 수 없는 법, 그것은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대적 비극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정의 성리학적 표상인 천고의 옛날을 벗삼는다[尙友千古]’는 말을 조문하고, ‘아득한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이를 기다린다형이상학적 명제를 비웃는다. 즉 그가 말하는 바 우도란 초월적 원리에 종속된 도덕적 규범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자 의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이되는 능력의 다른 이름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이런 윤리는 연암 만의 것이 아니다. 연암그룹에 속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런 실천적 우정론에 공명했다. 특히 이덕무(李德懋)의 다음 글은 동서고금을 관통하여 친구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아포리즘(aphorizm)에 속한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 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선귤당농소

若得一知己, 我當十年種桑. 一年飼蠶, 手染五絲, 十日成一色, 五十日成五色. 曬之以陽春之煦, 使弱妻, 持百鍊金針, 繡我知己面. 裝以異錦, 軸以古玉 高山峨峨, 流水洋洋, 張于其間, 相對無言, 薄暮懷而歸也.

 

 

가슴 깊이 사무치지만 결코 센티멘털에 떨어지지 않는 이 오롯한 친구 사랑’! 이덕무(李德懋)의 섬세한 필치와 감각이 한껏 발휘된 이 글에는 연암그룹의 윤리적 지향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제의 삶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연암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의기투합하는 벗들과 서로 어울려 뒹굴던 때였다. 이름하여 백탑(白塔)에서의 청연(淸緣)’! 백탑은 파고다(탑골)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을 말한다. 당시 연암과 그의 벗들이 이 근처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1772년에서 1773년 무렵 연암은 처자를 경기도 광주 석마의 처가로 보낸 뒤 서울 전의감동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주도하게 된다. 박제가(朴齊家)가 쓴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는 당시 연암의 풍모 및 이 그룹의 분위기가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담겨 있다.

 

 

지난 무자(戊子), 기축(己丑)년 어름 내 나이 18, 9세 나던 때 미중(美仲) 박지원 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와 맞으며 마치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으셨다. 드디어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어보게 하셨다.

往歲戊子己丑之間, 余年十八九, 聞朴美仲先生文章超詣有當世之聲, 遂往尋之于墖之北. 先生聞余至, 披衣出迎, 握手如舊. 遂盡出其所爲文而讀之.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茶罐)에다 밥을 안치시더니 흰 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오고 술잔을 들어 나를 위해 축수(祝壽)하셨다.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나는, 이는 천고에나 있을 법한 멋진 일이라 생각하고 글을 지어 환대에 응답하였다.

於是親淅米炊飯于茶罐, 盛以𣲝甆, 庋之玉案, 稱觴以壽余. 余驚喜過望, 以爲千古之晟事, 爲文以酬之.

 

 

신분도 다르고, 나이도 거의 제자뻘 되는 친구를 극진한 정성을 다해서 맞이하는 연암의 풍모를 보라! 당시 이덕무(李德懋)의 사립문이 그 북쪽에 마주 서 있고, 이서구의 사랑(舍廊)이 서쪽 편에 있었으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서상수(徐常修)의 서재가 있었다. 또 북동쪽으로 꺾어진 곳에 유금, 유득공(柳得恭)의 집이 있었다. 기묘하게도 이들은 그 시절 같은 구역에 살고 있었는데, 이 글은 박제가(朴齊家)가 이 그룹에 합류하게 되는 순간을 담은 것이다. 이후 그는 한번 이곳을 방문하면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면서 시문(詩文)과 척독(尺牘) 편지글을 짓고, 술과 풍류로 밤을 지새곤 했다. 얼마나 이 교유(交遊)에 몰두했던지 아내를 맞이하던 날, 박제가가 삼경이 지나도록 여러 벗들의 집을 두루 방문하는 해프닝이 일어났을 정도다.

 

이들은 매일 밤 모여 한곳에선 풍류를, 다른 한편에선 명상을, 또 한쪽에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연암의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가 그 생생한 리포트다.

 

 

어느 날 밤, 한 떼의 벗들이 연암의 집을 방문했다. 미리 온 손님이 있어 연암과 담소를 나누자, 이들은 일제히 거리로 나와 산책하며 술을 마신다. 손님을 보내고 뒤따라 나온 연암도 함께 술을 마시고 운종가로 나와 달빛을 밟으며 종각 아래를 거닐었다. 밤은 깊어 이미 삼경. 거리 위에선 개떼들이 어지러이 짖어대고 있었는데, 오견(獒犬)이라 불리는 몽고산 개가 동쪽으로부터 왔다. 이 개는 사나워서 길들이기가 어렵고 아무리 배고파도 불결한 음식은 먹지 않는다. 사람 뜻을 잘 알아, 목에다 붉은 띠로 편지를 매달아주면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전해주는 명견이다. 혹 주인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주인집 물건을 물고서 돌아와 신표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사신을 따라 들어오지만, 대부분 적응하지 못하고 굶어 죽는다.

聖彥囊出五十錢沽酒. 少醉, 因出雲從衢, 步月鍾閣下, 時夜鼓已下三更四點. 月益明, 人影長皆十丈, 自顧凜然可怖. 街上群狗亂嘷, 有獒東來, 白色而瘦. 衆環而撫之, 喜搖其尾, 俛首久立. 甞聞獒出蒙古, 大如馬, 桀悍難制. 入中國者, 特其小者, 易馴. 出東方者, 尤其小者, 而比國犬絶大, 見恠不吠, 然一怒則狺狺示威. 俗號胡白’, 其絶小者, 俗號犮犮’, 種出雲南. 皆嗜胾, 雖甚飢, 不食不潔.

 

사람들은 이 개를 호백(胡白)라고 부른다. 오랑캐 땅에서 온 흰둥이라는 뜻이다. 이덕무(李德懋)는 먼저 이름을 바꿔 주었다. 무관(이덕무)이 술에 취해 호백(豪伯)’이라고 이름 붙여주었다. 잠시 후 어디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자, 무관은 구슬프게 동쪽을 향해 서서 마치 친구라도 되는 듯이 호백아!’하고 이름을 부른 것이 세 차례였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시끄러운 거리의 개떼들이 어지러이 내달리며 더욱 짖어댔다.

懋官醉而字之曰: ‘豪伯須臾失其所在, 懋官悵然東向立, 字呼豪伯, 如知舊者三, 衆皆大笑. 鬨街群狗, 亂走益吠.

 

 

호백이의 고독한 모습에 자신들의 처지를 오버랩시킨 것일까? ‘호백(豪伯, 호탕한 녀석 혹은 멋진 놈)’이라는 별명에는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호백이를 부르는 소리에 왠지 서글픔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운종교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언젠가 다리 위에서 춤추던 친구, 거위를 타고 장난치던 친구 등의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펼쳐진다. 그러다 보면 새벽 이슬에 옷과 갓이 젖고, 개구리 소리와 함께 아침이 밝아온다. 이것이 이들이 함께 보낸 날들의 풍경이다.

 

내친 김에 하나 더. 지식인 밴드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이들의 모임에는 늘 음악이 함께했다. 홍대용(洪大容)의 탁월한 음률 감각은 이미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그밖에도 이들 주변에는 풍류인들이 적지 않았다. 효효재(嘐嘐齋) 김용겸(金用謙) 역시 그중 한 사람. 그는 당시 도시 유흥의 번성을 주도한 예인들의 패트론 중 하나였다.

 

당시 거문고를 잘 연주하던 음악가로 김억(金檍)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새로 조율한 양금을 즐기기 위해 홍대용의 집을 방문했다. 마침 김용겸이 달빛을 받으며 우연히 들렀다가 생황과 양금이 번갈아 연주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자 김용겸이 책상 위의 구리쟁반을 두드리며 시경의 한 장을 읊었는데 흥취가 한참 무르익을 즈음, 문득 일어나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홍대용과 연암은 함께 달빛을 받으며 그의 집을 향해 걸었다. 수표교에 이르렀을 때 바야흐로 큰 눈이 막 그쳐 달이 더욱 밝았다. , 그런데 김용겸이 무릎에 거문고를 비낀 채 갓도 쓰지 않고 다리 위에 앉아 달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다들 환호하며 술상과 악기를 그리로 옮겨 흥이 다하도록 놀다가 헤어졌다. 과정록(過庭錄)1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한 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런 점에서 백탑청연은 연암 생애의 하이라이트이자 중세 지성사의 빛나는 별자리. 그들은 체제와 제도가 부과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윤리와 능동적인 관계를 구성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마음껏 발산했다. 북벌론(北伐論)에서 북학(北學)으로 사상사의 중심을 변환한 것도, 고문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체적 실험을 감행한 것도 모두 이런 역동적 관계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리라.

 

 

 

 

 연암이 연암(燕巖)으로 달아난 까닭은?

 

 

연암은 타고난 집시(vagabond)’였다. 과거를 포기한 뒤로, 서로는 평양과 묘향산,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 화양동과 단양 등 여러 명승지를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과거를 포기한 젊은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 유람 말고는 달리 없었던 것이다.

 

1765년 가을 금강산 유람 때의 일이다. 유언호와 신광온(申光蘊)이 나란히 말을 타고 와 금강산 유람을 제의하자, 연암은 부모님께서 계시니 마음대로 멀리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두 친구가 먼저 떠난 뒤, 연암의 조부가 명산에는 인연이 있는 법이거늘 젊을 적에 한번 유람하는 게 좋다[汝何不共往? 名山有緣, 年少一遊, 好矣]’고 허락했다. 하지만 노자가 없었다. 그때 한 지인이 들렀다 나귀 살 돈 100냥을 쾌척하여 돈은 마련되었는데, 데리고 갈 하인이 없었다. 이에 어린 여종으로 하여금 골목에 나가 이렇게 소리치게 했다. “우리집 작은 서방님 이불짐과 책상자를 지고 금강산에 따라갈 사람 없나요[有能從吾家小郞, 襆被擔笈, 入金剛山者乎]?” 마침 응하는 사람이 몇 명 있었고, 이에 새벽에 출발해 의정부 가는 길에 있는 다락원에 이르러 먼저 떠난 두 벗을 만났다. 뛸 듯이 기뻐하는 친구들. 그의 빼어난 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叢石亭觀日出]가 이때 지어졌다.

 

그가 연암골을 발견한 것도 전국을 정처없이 유람하던 이 즈음이었다. 협객 백동수와 합류한 어느 날 백동수는 그를 이끌고 개성에서 멀지 않은 금천군 연암으로 향했다. 연암골은 황해도 금천군에 속해 있었고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두메산골이었다. ‘연암(燕巖)’은 제비바위라는 뜻으로, 평계(平溪) 주위에 있는 바위 절벽에 제비 둥지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 화장사(華藏寺)에 올라 동쪽으로 아침 해를 바라보니 산봉우리가 하늘에 꽂힌 듯했다. 시내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니 기이한 땅이 있었는데, 언덕은 평평하고 산기슭은 수려했으며 바위는 희고 모래는 깨끗했다. 검푸른 절벽이 깎아지를 듯 마치 그림 병풍을 펼쳐놓은 듯했다. 고려시대에는 목은 이색(李穡)과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등 쟁쟁한 명망가들이 그곳에 살았지만 당시에는 황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두 친구가 찾았을 때는 화전민들만 약초를 캐고 숯을 구우며 살고 있었다. 둘은 갈대숲 가운데서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배기를 구획지으면서 말했다. “저기라면 울타리를 치고 뽕나무를 심을 수 있겠군.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갈면, 한 해에 조를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네.”

 

시험삼아 쇠[]를 쳐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으니, 꿩은 깍깍대며 놀라 날고, 새끼 노루가 앞으로 달아났다. 팔뚝을 부르걷고 이를 쫓다가 시내에 막혀 돌아왔다. 둘은 서로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백 년도 못 되는 인생을 어찌 답답하게 목석같이 살면서 조나 꿩, 토끼를 먹으며 지낼 수 있겠는가?”

 

하기야 어찌 서글프지 않으랴. 아무리 풍광이 빼어난 곳일지언정, 젊은 날부터 뒷날 물러나 생계를 꾸릴 터전을 마련해놓아야 하다니. 하지만 연암은 연암골이 마음에 꼭 들었다. 마침내 이곳에 은거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연암을 자신의 호()로 삼는다. 과정록(過庭錄)1에 나온다.

 

…… (前略)
此去叢石只十里 총석정은 예서 십리
正臨滄溟觀日昇 기필코 넓은 바다 마주하여 해돋이를 보리라
天水澒洞無兆眹 하늘과 물 잇닿아 경계가 없고
洪濤打岸霹靂興 성난 파도 벼랑에 부딪히니 벼락이 이는 듯
常疑黑風倒海來 거센 바람 휘몰아치니 온 바다 뒤집히고
連根拔山萬石崩 뿌리째 산이 뽑혀 바위더미 무너지는 듯
無怪鯨鯤鬪出陸 고래와 곤의 싸움에 육지 솟아난들 괴이할 것 없고
不虞海運値摶鵬 대붕이 날아올라 바다 옮겨간들 걱정할 것 없다네
…… (後略)

 

 

김홍도의 총석정도(叢石亭圖)

연암은 젊은 날 유람 중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 장시(長詩)를 남겼다. 워낙 시짓기를 꺼려했던 그로서는 매우 특이한 이력이다. 감동이 남달랐던가 보다. 자신도 이 작품이 흡족했던지 열하일기에도 전문을 다시 수록했다. 아래에 시의 몇 구절을 옮겨보니 김홍도의 화필과 함께 연암의 시적 정취도 음미해보시기를.

 

 

1778년 연암은 전의감동에서의 빛나는 밴드생활을 청산하고 황해도 연암동으로 떠난다. 그러나 이것은 젊은 날의 유쾌한 유람이 아니라 일종의 도주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왕위계승을 꺼려하던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국영이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삼종형 박재원(朴在源)이 홍국영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면서, 평소 홍국영에 대해 비판적인 언사를 삼가지 않았던 연암 주변에까지 점차 권력의 그물망이 조여들고 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친구들이 그에게 피신할 계책을 세우도록 재촉하는데, 이 장면도 한편의 드라마. 과정록(過庭錄)1에 나오는 이야기다.

 

홍국영 밑에 있는 협객들과 각별한 인맥을 가지고 있던 백동수가 먼저 정보를 입수하고선 급히 달려왔다. “서둘러 서울을 떠나야 하네. 한동안 연암골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죽은 듯이 지내는 것이 상책일 듯하이.” 마침 친구 유언호도 조정에서 돌아와 밤에 연암을 찾아왔다.

 

 

자네는 어쩌자고 홍국영의 비위를 그토록 거슬렀는가? 자네에게 몹시 독을 품고 있으니 어떤 화가 미칠지 알 수 없네. 그가 자네를 해치려고 틈을 엿본 지 오래라네. 다만 자네가 조정 벼슬아치가 아니기 때문에 짐짓 늦추어 온 것뿐이지. 이제 복수의 대상이 거의 다 제거됐으니 다음 차례는 자넬 걸세. 자네 이야기만 나오면 그 눈초리가 몹시 험악해지니 필시 화를 면치 못할 것 같네. 이 일을 어쩌면 좋겠나? 될 수 있는 한 빨리 서울을 떠나게나.

君何大忤洪國榮也? 啣之深毒, 禍不可測. 彼之欲修隙, 久矣, 特以非朝端人, 故姑緩之. 今睚眦幾盡, 次及君矣. 每語到君邊, 眉睫甚惡, 必不免矣. 爲之柰何? 可急離城闉

 

 

사실 이것도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관직에 뜻이 없고, 당파와 어울리지도 않았고, 그저 의기투합한 친구들과 놀기에 바쁜 일개 문인이 최고 세도가의 표적이 될 수 있다니. 지인들의 말대로, 평소 의론이 곧고 바른 데다 명성이 너무 높았던 게 화를 부른 원인이었을까? 남아 있는 연암의 글에는 당대의 중앙정계를 직접 겨냥한 언술은 거의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는 태생적으로 비정치적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남을 비판하는 것을 즐겨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대체 권세가들이 그를 꺼려한, 아니 두려워한 이유가 무얼까? 그 상세한 내막이야 알 길이 없지만, 다만 분명한 건 연암의 움직임 자체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정치적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정국은 연암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정형편 역시 좋지 않았다. 1777년 그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던 장인 이보천이 별세하고, 그 다음해(1778) 가족의 생계를 담당하던 형수마저 병사하자 연암은 스스로 생계를 마련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말하자면 먹고 살기위해서도 연암은 연암골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연암동에서 초가삼간을 짓고, 손수 뽕나무를 심었다. 열하일기』 「동란섭필(銅蘭涉筆)에는 이 즈음으로 추정되는 일을 회상하는 장면이 하나 나온다.

 

 

나 역시 성질이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가난하게 되었으나, 평생에 베낀 책을 점검해보니 불과 열 권이 차지 못하고, 연암 골짜기에 손수 심은 뽕나무가 겨우 열 두 포기이다. 그나마 긴 가지라는 것이 겨우 어깨에 닿을지 말지 하매 일찍이 슬픈 한탄을 금할 수 없었던 바, 이번에 요동벌을 지나오면서 밭가에 둘린 뽕나무 숲을 바라보다가, 끝없이 넓은 것을 보고는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余亦性不好貨, 故以至貧乏, 然點檢平生所寫書, 不滿十卷, 燕巖手所種桑纔十二株. 其長條纔得及肩, 甞不禁惋歎, 今經遼野護田桑林, 一望無際, 則又茫然自失矣.

 

 

물론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변방에서 잠수한 건 아니다. 연암골로 도주하자, 친구 유언호가 개성유수를 자임한다. 그의 주선으로 연암은 개성 부근 금학동 별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인근 지방의 젊은이들 가르치는 일을 담당한다. 유언호는 뒤탈을 막기 위해 조정에 들어가 짐짓 연암에 대해 가족을 이끌고 떠돌다가 그만 부잣집에 눌러앉아 늙은 훈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군요[其挈家流離, 來作松京富人家老學究也]’했더니, 홍국영(洪國榮)참으로 형편없이 됐으니 논할 것도 없구려[眞腐矣! 無足論也]’라고 했다나. 위기 탈출!

 

19세기 방랑시인 김삿갓이 말해주듯, 조선 후기 지식인의 광범위한 분화 속에서 촌학구(村學究, 시골 글방 스승)란 지식인이 다다를 수 있는 일종의 막장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홍국영(洪國榮)으로서도 마음을 놓을밖에. 그러나 연암은 이 기회를 제도권 밖에서 지식의 전수를 실험하는 일종의 열린 교육터로 활용한다. 즉 그는 오로지 과거시험밖에 몰랐던 변방의 젊은이들에게 학문하는 즐거움을 가르친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과거 공부 이외에 문장 공부가 있고, 문장 공부 위에 학문이 있으며, 학문이란 글을 끊어 읽거나 글에다 훈고(訓詁)를 붙이는 것만으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及聞先生敎誨, 始知功合之外, 有文章, 文章之上, 有學術, 學術不可但以句讀訓詁爲也].” 말하자면 연암은 입시 공부에 시달리는 학인들에게 사색하는 법, 토론, 분변(分辨)하는 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과정록(過庭錄)1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후 연암은 연암협과 서울을 오가면서 지내는데, 이 시절의 모습이 잘 그려진 자료가 있다. 먼저 제자 이서구가 쓴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 5월 그믐밤 이서구가 연암댁을 찾는다. 골목으로 접어들어 집 들창을 살펴보니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문으로 들어서자,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丈人不食已三朝矣, 方跣足解巾, 加股房櫳, 與廊曲賤隸相問答].” 이서구가 온 것을 보고서는 옷을 고쳐 입고 앉은 뒤, “고금의 치란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자세히 논했다. 밤은 삼경을 지나고 은하수가 등불에 흔들리는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런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은 뒤, 연암은 답장을 쓴다. 소완정의 하야방우기에 화답하다[酬素玩亭夏夜訪友記]가 그것. 그때의 상황이 좀더 상세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식구들은 이때 광릉에 있었, 그는 평소에 살이 쪄서 더위를 괴로워하는 데다 또 푸나무가 울창해서 여름 밤이면 모기와 파리가 걱정되고, 논에서는 개구리가 밤낮 쉴새없이 울어대는 까닭에, 매번 여름만 되면 항상 서울 집으로 피서를오곤 했다. 그런데 당시 홀로 계집종 하나가 집을 지키다가 갑자기 눈병이 나서 미쳐 소리지르며 주인을 버리고 떠나가 버려 밥지어줄 사람이 없었, 그래서 행랑채에 밥을 부쳐 먹다보니 자연히 가까이 지내게 되었. 이서구가 방문할 당시 과연 사흘 아침을 굶고 있었는데, 행랑채의 아랫것이 지붕 얹어주는 일을 하고 품삯을 받아와 밤에야 비로소 밥을 지어 먹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곤하여 누웠는데, 행랑채의 어린 것이 밥투정을 하자 그 아비가 화가 나서 밥 주발을 엎어 개에게 던져주며 욕을 해대는 걸 듣고는 이런저런 비유로 타이르는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정황 설명에 이어 당시 자신의 일상사를 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고요히 앉아 한 생각도 뜻 속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더욱 성글고 게으른 것이 몸에 배어 경조사도 폐하여 끊었다. 혹 여러 날을 세수도 하지 않고, 열흘이나 두건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손님이 이르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고, 혹 땔감이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다가 더불어 효제충신과 예의염치를 이야기하며 정성스레 수백 마디의 말을 나누곤 하였다.

靜居無一念在意. 時得鄕書, 但閱其平安字. 益習疎懶, 廢絶慶弔. 或數日不洗面, 或一旬不裹巾. 客至或黙然淸坐, 或販薪賣瓜者過, 呼與語孝悌忠信禮義廉恥, 款款語屢數百言.

 

 

말하자면 제 집에 있으면서 객처럼 지내고 아내가 있으면서 중처럼[其在家爲客, 有妻如僧]’ 사는 식이었던 것이다. 마치 흥부처럼 다리 부러진 새끼 까치에게 밥알을 던져주기도 하고, ‘자다가 깨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간 또 잠을자는데, 아무도 깨우는 이가 없고 보니,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쿨쿨 자기도 했다. 간혹 글을 지어 뜻을 보이기도 하고, 칠현금을 배워 몇 곡조 뜯기도 하고, 혹은 술을 보내주는 이가 있으면 기쁘게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한없는 유유자적함에는 깊은 적막과 쓸쓸함이 배어 있다. ‘금년에 마흔도 못 되었는데 이미 터럭이 허옇게 세었,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쇠락하여 담담히 세상에 뜻이 없다고, 그는 토로한다. 그 허허로운 목소리와 함께 열정어린 젊음의 뒤안길을 헤쳐나온 쓸쓸한 중년 박지원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인용

지도 / 목차

과정록 /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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