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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 - 3장 철학의 은밀한 두 가지 흐름,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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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알튀세르

 

 

순자가 죽고 2000여 년이 지난 뒤, 프랑스에서는 알튀세르알튀세르는 사유나 문체에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프랑스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적 목표는 맑스의 사유에 철학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그가 스피노자, 루소, 마키아벨리 등을 철학적으로 다시 읽어내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궁극적으로 그가 맑스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철학은 헤겔과는 다른 반목적론적인 변증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저서로 맑스를 위하여, 철학에 대하여등이 있다라는 탁월한 철학자가 태어납니다. 그는 맑스(K. Marx, 1818~1883)의 정치경제학에 철학을 부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위대한 정치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정신병 발작으로 자신의 아내를 목졸라 죽인 비극적인 사건 이후에 그는 결국 고독하게 유폐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고독 속에서도 맑스에게 철학을 부여하겠다는 계획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1990년 그가 죽고 2년 뒤에 발간된 유고집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Le courant souterrain du matérialisme de la rencontre)」【「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은 다행히 우리나라에서 철학과 맑스주의: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라는 책 속에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은 이 논문을 읽는 데 도움을 주는 많은 자료들을 함께 담고 있어서,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으로 이름 붙여진 작지만 강렬한 문건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알튀세르도 자신의 이야기를 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비가 온다.

그러니 우선 이 책이 그저 비에 관한 책이 되기를.

말브랑슈는 왜 바다에, 큰길에, 해변의 모래사장에 비가 오는지를 자문했었다. 다른 곳에서는 농토를 적셔주는 이 하늘의 물이, 바닷물에 대해서는 더해주는 것이 없으며 도로와 해변에서도 곧 사라져버리기에.

그러나 하늘이 도운 다행한 비이든 반대로 불행한 비이든 이런 비가 문제인 것은 아니리라. 그와 전혀 달리 이 책은 유다른 비에 대한 것,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진술되자마자 즉각 반박되고 억압된 심오한 주제에 관한 것, 허공속에서 평행으로 내리는 에피쿠로스의 원자의 ’, 그리고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맑스, 하이데거 또 데리다와 같은 이들에게서 보이는, 스피노자의 무한한 속성들의 평행이라는 에 대한 것이다.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알튀세르는 비가 온다라는 짧은 문장으로 자신의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장에 앞서 문장 아닌 어떤 문장, 일종의 기호를 처음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 비입니다. (………………) 저에게는 사실 이 기호가 은밀한 감동을 주는데, 여러분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지금 하늘에서는 그냥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자 알튀세르는 바로 이 비를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는 말브랑슈(Maleblanche, 1638~1715)의 말을 생각해냅니다. “왜 바다에, 큰길에, 해변의 모래사장에 비가 오는지.” 비는 이것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농토에도 내릴 수 있지만, 전혀 다른 바다, 모래사장에도 내릴 수 있습니다. 내리는 비는 땅이나 혹은 바다, 어느 곳과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알튀세르는 바다와 모래사장에 내리는 비 속에서 일종의 무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이런 무의미의 발견이란, 순수한 우발성의 발견과 같은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비는 내리고, 그 비는 추락을 거듭하다가 무엇인가와 만나게 될 뿐입니다. 반면 농토에 내리는 비에는 분명 어떤 의미(sense)가 있습니다. 그것은 극심한 가뭄 속에 내리는 반가운 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고단한 노동을 도와주듯이, 혹은 우리의 기우제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내리는 비처럼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 달째 계속 쏟아 붓던 비가 오늘도 역시 농토에 내릴 수 있습니다. 이 비는 저주스러운 비가 되겠죠.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우리 인간의 오만을 나무라듯이, 혹은 하늘에 대한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비는 계속 내립니다.

 

알튀세르는 인간이 생각해내고 또 인간을 지배해온 모든 의미가 기본적으로 비와 어떤 곳의 만남과 같은 무의미 속에서 발생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필연성과 같은 의미는 모두 우발성과 같은 무의미가 우선 전제되어야만 발생한다는 것이죠. 이어서 그는 서양철학사의 전통 속에도 바로 이런 우발성의 철학, 무의미의 철학, 혹은 마주침의 철학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상기합니다. 그가 마주침의 유물론(matérialisme de la rencontre)’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이런 사유 전통이지요. 그는 이 철학적 사유의 흐름이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6?~55),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 홉스(Hobbes, 1588~1679), 스피노자, 루소(Rousseau, 1712~1778), 맑스, 하이데거, 데리다(Derrida, 1930~2004)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이어진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사유의 흐름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중요한 사람은 바로 에피쿠로스입니다. 그는 우발성의 철학, 마주침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숙고했던 최초의 사상가이니까요. 그럼 에피쿠로스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튀세르의 말을 통해 잠시 들어보도록 하지요.

 

 

에피쿠로스는 세계 형성 이전에 무수한 원자가 허공 속에서 평행으로 떨어졌다고 설명한다. 원자는 항상 떨어진다. 이는 세계가 있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동시에 세계의 모든 요소는 어떤 세계도 있기 이전인 영원한 과거로부터 실존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는 또한 세계의 형성 이전에는 어떤 의미(Sens), 또 어떤 원인(Cause), 어떤 목적(Fin), 어떤 근거(Raison)나 부조리(Déraison)도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의미가 앞서 있지 않다는 비선재성(非先在性)은 에피쿠로스의 기본적인 테제이며, 이 점에서 그는 플라톤에도 아리스토텔레스에도 대립한다. 클리나멘(Clinamen)이 돌발한다. (……) 클리나멘은 무한히 작은, 최대한으로 작은 편의(偏倚, Déviation, 기울어짐)로서, 어디서,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는데, 허공에서 한 원자로 하여금 수직으로 낙하하다가 빗나가도록’, 그리고 한 지점에서 평행 낙하를 극히 미세하게 교란시킴으로써 가까운 원자와 마주치도록, 그리고 이 마주침이 또 다른 마주침을 유발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하나의 세계가, 즉 연쇄적으로 최초의 편의와 최초의 마주침을 유발하는 일군의 원자들의 집합이 탄생한다.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에피쿠로스는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원자가 비처럼 평행으로 떨어지는 상태가 있었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어떤 마주침도 없는, 무의미한 상태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물론 이것은 실제적인 우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어느 순간 이 원자 중 하나의 원자가 평행에서 조금 이탈하는 운동을 하게 됩니다. 이 작은 차이, 거의 느껴지지도 않을 것 같은 미세한 편차를 에피쿠로스는 클리나멘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원자는 다른 원자와 곧 만나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만난 이 두 원자는 또 다른 원자와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계속되고, 마침내 이 세계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조그만 눈덩이가 산에서 굴러 다른 눈과 만나면서 거대한 눈사태가 발생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클리나멘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 마주침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클리나멘이 생기기 이전에 모든 원자가 평행으로 떨어졌다고 본 에피쿠로스의 생각이 아닐까요? 이것은 알튀세르의 말처럼 세계의 형성 이전에는 어떤 의미도, 또 어떤 원인도, 어떤 목적, 어떤 근거나 부조리도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에피쿠로스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세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창조주가 이미 존재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창조주는 이 세계의 근거이자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주란 존재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면, 그는 이미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세계 속에 숨겨져 있는 창조주의 뜻, 즉 분명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창조주의 뜻은 이미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에 주어져 있었을 테니까요.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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