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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 백수공인이씨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 본문

산문놀이터/묘지명 & 애제류

박지원 - 백수공인이씨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

건방진방랑자 2021. 11. 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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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우리 집 살림을 책임 진 형수님을 그리며

백수공인이씨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

 

박지원(朴趾源)

 

 

대대로 벼슬했던 집임에도 가난했던 연암의 가문

恭人諱某, 完山李東馝之女, 王子德陽君之後也. 十六, 歸潘南朴喜源, 生三男, 皆不育. 恭人素羸弱身, 嬰百疾.

喜源大父, 爲世名卿, 先王時每擧漢卓武故事, 以增秩. 其居官, 不長尺寸爲子孫遺業, 淸寒入骨, 捐舘之日, 家乏無十金之產.

歲且荐喪, 恭人力能存活其十口, 奉祭接賓, 恥失大家規度, 綢繆補苴. 且廿載嘔膓擢髓, 甁槖垂倒, 屈抑挫銷, 無所展施. 每値高秋木落天寒, 意益廓然霣沮, 疾益發, 綿延數歲, 竟以上之二年戊戌七月廿五日歿.

 

어려운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애쓴 형수님

嗟乎! 貧士之妻, 昔人比之弱國之大夫. 其拄傾支覆, 莫保朝夕, 猶能自立於辭令制度之間, 而澗繁沼毛, 不餒其鬼神, 不腆之廚庖, 足以嘉會, 豈非所謂: ‘鞠躬盡瘁, 死而後已者耶?

夫弟趾源生子纔脫胞, 恭人視其男也, 遂子之, 今十三歲.

 

연암에서 형수님과 함께 살려던 꿈이 좌절되다

趾源新卜居華藏山燕岩洞, 樂其水石, 手剪荊蓁, 因樹爲屋.

甞對恭人: “我伯氏老矣, 行當與弟偕隱. 繞墻千樹種桑, 屋後千樹栽栗, 門前千樹接梨, 溪上下千樹桃杏, 三畝陂塘, 一斗魚苗, 巖崖百筒蠭, 籬落之間, 繫牛六角, 妻績麻, 嫂氏但課婢趣榨油, 夜佐叔讀古人書.”

恭人時雖疾甚, 不覺蹶然起, 扶頭一笑謝曰: “是吾宿昔之志.” 所以日夜望, 其同來者甚殷, 禾稼未熟, 而恭人已不可起矣.

竟以柩歸, 以其年九月十日, 葬于舍北園中亥坐之兆, 所以成恭人之志也. 地系海西之金川.

 

유언호가 지은 명

趾源求銘於其友人, 奎章閣直提學兪彥鎬. 彥鎬方留守中京, 地接燕岩, 爲助葬且銘之,

其銘曰: “燕岩之洞, 山窈而水淥, 繄惟小郞之所營築. 嗚呼鹿門盡室之計. 竟於焉而托體. 旣安且固, 以保佑厥後.” 燕巖集卷之二

 

 

 

 

 

 

 

해석

 

대대로 벼슬했던 집임에도 가난했던 연암의 가문

 

恭人諱某, 完山李東馝之女, 王子德陽君之後也.

공인(恭人)공인(恭人): 조선 시대에 국가에서 5품 관리의 아내에게 내리던 작호(爵號)이다. 연암의 형 박희원은 평생 벼슬한 적이 없지만, 그 할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지냈기에 박희원의 처가 죽자 나라에서 이런 작호를 내린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인의 이름을 뜻한다. 예전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실례라고 생각했기에 피하다’ ‘숨기다는 뜻을 갖는 라는 말을 이름이라는 뜻으로 썼다()아무개라는 뜻이다. 남자의 묘지명에는 다음에 이름을 적지만 여자의 묘지명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라고만 썼다. 조선 시대의 공식적 글쓰기에서 여자는 늘 익명이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름이 불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기껏해야 그 성에 자가 붙어 김씨니 박씨니 하고 불리든지, 서씨의 아내, 유씨의 아내라는 뜻인 서처, 유처로 불리든지, 난설헌이나 윤지당이니 하는 당호(堂號)로 불리든지, 수원댁이니 이진사댁이니 하는 택호(宅號)로 불릴 뿐이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이런 문화를 낳았다. 연암도 자기 시대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지라 이런 관습에 따라 글을 쓰고 있다는 완산 이동필의 따님으로 왕자 덕양군(德陽君)중종의 다섯째 아들이다의 후손이시다.

 

十六, 歸潘南朴喜源, 生三男, 皆不育.

16살에 반남(潘南)연암의 본관으로, 예전의 반남현(潘南縣,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에 해당한다박희원에게 시집 가 3남을 낳았지만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恭人素羸弱身, 嬰百疾.

공인은 본래 야위고 약한 몸으로 온갖 병에 걸리셨다.

 

喜源大父, 爲世名卿,

희원의 할아버지인 장간공(章簡公) 박필균(朴弼均)은 대대로 이름 난 벼슬아치였는데

 

先王時每擧漢卓武故事, 以增秩.

선왕 영조 시기에 매번 한나라 탁무의 고사탁무(卓茂): ()나라 때 인물로 백성들을 잘 다스린 유능한 관리였지만 왕망이 집권하자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후 광무제(光武帝)는 탁무의 재능과 지조를 높이 사 그를 태부(太傅) 벼슬에 임명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34724일 조()에 보면, “임금이 동돈녕(同敦寧) 박필균을 불러 보시고는 그 연로함을 슬퍼하신 후 그의 청렴함을 칭찬하시며 후한의 탁무 고사를 들어 그를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임명하셨다라는 말이 보인다를 열거하며 관직을 올려주셨다.

 

其居官, 不長尺寸爲子孫遺業,

장간공이 관직에 계실 적에 자손을 위한 재산을 조금이라도 늘리지 않아

 

淸寒入骨, 捐舘之日,

청빈과 한미함에 골수에 사무쳤고 관직을 떠나는 날엔

 

家乏無十金之產.

집안이 궁핍해 10냥의 재산도 없었다.

 

歲且荐喪, 恭人力能存活其十口,

한해에 또한 거듭 초상이 나니 공인께선 힘써 10명을 살 수 있도록 했고

 

奉祭接賓, 恥失大家規度,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함에 큰 집안의 규모를 잃는 걸 부끄러워하여

 

綢繆補苴.

꼼꼼히 준비하여주무(綢繆): 빈틈없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미리 준비함부족한 걸 보충하셨다보저(補苴): 결함을 보충하다 미봉하다.

 

且廿載嘔膓擢髓,

또한 20년에 창자를 쏟아내고 골수를 뽑아낼 정도로 애썼지만

 

甁槖垂倒,

쌀독과 주머니가 넘어 쏟아질 정도로 비어 있었고

 

屈抑挫銷, 無所展施.

의기가 굽히고 억눌리고 꺾이고 녹아도 펴내질 못하셨다.

 

每値高秋木落天寒, 意益廓然霣沮,

매번 하늘 높은 가을에 나무는 지나 날씨가 차가워지는 계절이 되면 의기는 더욱 확연히 위축되어

 

疾益發, 綿延數歲,

더욱 병이 거세져 여러 해 동안 계속 되다가

 

竟以上之二年戊戌七月廿五日歿.

마침내 정조 2년 무술(1778)525일에 돌아가셨다.

 

 

 

어려운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애쓴 형수님

 

嗟乎! 貧士之妻, 昔人比之弱國之大夫.

! 가난한 선비를 아내를 옛 사람은 약소국의 대부에 견주었다.

 

其拄傾支覆, 莫保朝夕,

기울어진 집안을 버티게 하고 전복된 걸 지탱하는 걸 조석(朝夕)에도 보전키 어려운데

 

猶能自立於辭令制度之間,

스스로 사령과 제도의 사이에 서서 처리하듯 하셨고

 

而澗繁沼毛, 不餒其鬼神,

계곡물과 늪에서 자란 음식간번소모(澗蘩沼毛): 계곡물과 늪에 자란 산흰쑥과 풀들이라는 뜻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 조에 진실로 분명한 믿음이 있다면, 계곡물과 늪가에 자란 풀이나 개구리밥·산흰쑥·조류(藻類) 같은 나물[澗谿沼沚之毛 蘋蘩薀藻之采]…… 귀신에게 바칠 수 있고 왕공(王公)에게 드릴 수 있다.”고 하였다으로 조상의 영을 주리지 않도록 하셨으며

 

不腆之廚庖, 足以嘉會,

변변찮은 음식이라도 모임을 대접하기엔 충분했으니,

 

豈非所謂: ‘鞠躬盡瘁, 死而後已者耶?

어찌 소위 몸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夫弟趾源生子纔脫胞, 恭人視其男也,

시동생 지원이 아들을 겨우 낳으니 공인께선 내 아들을 보시고

 

遂子之, 今十三歲.

마침내 양자로 삼았으니, 지금은 13살이다.

 

 

 

연암에서 형수님과 함께 살려던 꿈이 좌절되다

 

趾源新卜居華藏山燕岩洞,

나는 새로 화장산(華藏山)황해도 금천의 산 이름이다근처의 연암골에 집자리를 잡아

 

樂其水石, 手剪荊蓁,

물과 바위를 좋아하여 손수 가시덤불을 잘라내고

 

因樹爲屋.

나무를 잇대어 집을 만들었다.

 

甞對恭人: “我伯氏老矣, 行當與弟偕隱.

일찍이 공인께 말했었다. “우리 큰 형님은 노쇠했으니 행하여 마땅히 아우와 함께 삽시다.

 

繞墻千樹種桑, 屋後千樹栽栗,

천 그루의 뽕나무를 심어 담장을 두르고 집 뒤엔 천 그루의 밤을 심으며

 

門前千樹接梨, 溪上下千樹桃杏,

문 앞엔 천 그루의 배나무를 접목하고 시내가엔 천 그루의 복사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으며

 

三畝陂塘, 一斗魚苗,

3묘의 연못엔 한 말가량으로 물고기를 기르고

 

巖崖百筒蠭, 籬落之間, 繫牛六角,

벼랑엔 백개의 벌통을 놓고 울타리 사이엔 소 6마리를 메어 놓으며

 

妻績麻, 嫂氏但課婢趣榨油,

아내가 길쌈을 하거든 형수께선 다만 여종이 기름을 짜는 것만을 살펴

 

夜佐叔讀古人書.”

밤에 제가 옛사람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恭人時雖疾甚, 不覺蹶然起,

공인은 당시에 비록 병은 심했지만 뛰듯 일어나는 것도 모른 채

 

扶頭一笑謝曰: “是吾宿昔之志.”

머리를 부축하여 한 번 웃고선 감사해하며 이것은 저의 묵은 오래된 뜻이예요.”라고 말씀하셨다.

 

所以日夜望, 其同來者甚殷,

낮과 밤으로 바랐지만 함께 오는 것이 매우 적어져

 

禾稼未熟, 而恭人已不可起矣.

벼를 심은 게 익지 못했지만 공인께선 이미 일어날 수가 없었다.

 

竟以柩歸, 以其年九月十日,

마침내 운구하여 그해 910일에

 

葬于舍北園中亥坐之兆, 所以成恭人之志也.

집 북쪽 동산의 해좌(亥坐)묏자리나 집터 따위가 해방인 북북서쪽을 등지고 있는 방향의 방향에 장사지냈으니 공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다.

 

地系海西之金川.

그 땅은 황해도 금천에 속한다.

 

 

 

유언호가 지은 명

 

趾源求銘於其友人, 奎章閣直提學兪彥鎬.

나는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직제학直提學: 벼슬은 조선 시대 홍문관ㆍ예문관ㆍ규장각의 정3품 관직이다유언호유언호(俞彦鎬, 1730~1796): 정조의 총애를 받아 정조 즉위 이듬해 이조참의로 발탁되었고, 후에 형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연암의 절친한 벗으로 연암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문집으로 연석(燕石)이 전한다에게 묘지명을 요구했다.

 

彥鎬方留守中京, 地接燕岩,

유언호는 그때 개성중경(中京): 고려시대 수도 개경(開京)을 일컫던 이름에 유수유수(留守): 수도 외곽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에 두었던 유수부(留守府)의 장()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는 개성, 강화, 화성(지금의 수원), 광주(廣州)의 네 곳에 유수부가 있었다로 왔는데 땅은 연암협에 닿아 있어

 

爲助葬且銘之, 其銘曰: “燕岩之洞, 山窈而水淥, 繄惟小郞之所營築. 嗚呼鹿門盡室之計. 竟於焉而托體. 旣安且固, 以保佑厥後.” 燕巖集卷之二

장례를 도와줬고 또한 명까지 지어줬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燕岩之洞 연암의 골짜기는
山窈而水淥 산 깊고 물은 푸르스름하니
繄惟小郞之所營築 오직 시동생이 집을 마련했네.
嗚呼鹿門盡室之計 ! 은거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이끌고,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고 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표현이다할 집안의 계책을 다했었지.
竟於焉而托體 마침내 이곳에 몸을 의탁하게 됐다네.
旣安且固 이미 편안하고도 굳건하니
以保佑厥後 그 후손을 보우하소서.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과정록 146

1. 형수의 아버지가 형수를 보러 자주 찾아오다

2. 생활고에 병에 걸린 형수님을 부모처럼 모시다

3. 청빈의 가풍 때문에 엄청 고생한 큰 형수

4. 주부로 두 번의 상을 치르다

5. 가난 때문에 병들어 죽어간 형수를 그려내다

6.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가정살림을 돌보다

7. 에피소드를 삽입시켜 글에 생기를 불어넣다

8. 형수를 위로하려 연암협을 미화하다

9. 형수님은 연암협에 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네

10. 유언호가 명을 짓다

11.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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