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유쾌한 시공간 - 6부, 1장 연암과 다산

건방진방랑자 2021. 7. 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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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중세 외부를 사유하는 두 가지 경로

 

 

같은 책 다른 독법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史記)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구료. 왜냐구요.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을 연주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의 마음입니다. 경지에게 답함3[答京之之三]

足下讀太史公, 讀其書, 未嘗讀其心耳. 何也? 讀項羽, 思壁上觀戰; 讀刺客, 思漸離擊筑, 此老生陳談, 亦何異於廚下拾匙? 見小兒捕蝶, 可以得馬遷之心矣. 前股半跽, 後脚斜翹, 丫指以前, 手猶然疑, 蝶則去矣. 四顧無人, 哦然而笑, 將羞將怒, 此馬遷著書時也.

 

 

네가 지금도 사기를 읽고 있다니 그런 대로 괜찮은 일이다. 옛날에 고염무가 사기를 읽을 때 본기나 열전편을 읽으면서는 손대지 않은 듯 대충 읽었고 연표나 월표편을 읽으면서는 손때가 까맣게 묻었다고 했는데 그런 방법이 제대로 역사책 읽는 법이다. 기년아람(紀年兒覽), 대사기(大事記), 역대연표와 같은 책에서는 반드시 범례를 상세히 읽어보고 국조보감에서 뽑아 연표를 만들고 더러는 대사기압해가승에서 뽑아 연표를 만들어 중국의 연호와 여러 나라의 임금들이 왕위에 오른 햇수를 자세히 고찰하여 책으로 만들어놓고 비교해보면 우리 나라 일이나 선조들의 일에 있어서 그 큰 줄거리를 알고 시대의 앞과 뒤를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학유에게 부치노라[寄游兒]

汝尙讀史記云 亦自佳 然昔顧亭林之讀史也 其本紀列傳之篇 若手未嘗觸 而年表月表之篇 手垢黯然 此其所以善讀也 紀年兒覽大事記歷代年表之類 須詳其凡例 取國朝寶鑑作年表 或大事記 又取押海家乘作年表 而大國年號與列朝踐阼之年 詳攷而編比之 庶於國朝事先世事 知其大綱 別其時代先後也

 

 

앞의 것은 연암 박지원의 글이고, 뒤의 것은 다산 정약용의 글이다. 한 사람은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의 심정을 어린아이가 나비를 잡을 때와 같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은 사기를 제대로 읽으려면 연표를 놓고 하나씩 고증해야 한다고 했다. 나비를 잡으려다 놓친 아이의 심정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머쓱함, 아니면 분하고 안타까움? 그것과 궁형(宮刑)이라는 비극을 겪은 뒤, 비감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사마천의 글쓰기는 대체 어떻게 연관된단 말인가?

 

읽을 때마다 아리송하고 그 생각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연암의 글이라면, 다산의 글은 투명하고 진지하다 못해 냉각수를 끼얹는 느낌이다. 그 박진감 넘치는 본기열전은 대충 보고 연표, 월표는 손때가 묻도록 읽으라니. 지루하고 따분한 주입암기식 공부법이 그거 아닌가. 그런데 그거야말로 역사의 진수라고 자식한테 권하는 다산의 심정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를 수가 있을까?

 

 

작자 미상의 다산 정약용 초상

과연 다산답다!’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소감이다. 다산 초상을 보고 다산답다니,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싶겠지만, 이 보론을 읽으면 나의 이런 심정에 충분히 공감하게 될 것이다. 보론을 쓸 때 품었던 다산에 대한 이미지가 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의 뚝심, 견결한 기상, 드높은 이념적 열정 등등, 이 책의 앞에 실려 있는 연암의 초상과 대비해서 보면, 내가 두 사람의 관계를 평행선의 운명에 빗댄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오만과 편견

 

 

연암 박지원(1737~1805)과 다산 정약용(1762~1836). 이 두 사람은 조선 후기사에 있어 그 누구와도 견주기 어려운 빛과 에너지를 발산한다. 두 사람이 펼쳐놓은 장은 17세기 말 이래 명멸한 수많은 천재들이 각축한 경연장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이성의 지대이다. 그래서인가? 그들이 내뿜는 빛에 눈이 부신 탓인가?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서로 유사한 계열로 간주하고, 그렇게 기억한다. 그러나 앞에서 언뜻 엿보았듯, 그들은 한 시대를 주름잡은 천재요 거장이라는 공통점 말고는 유사성을 거의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런데 어째서 둘은 마치 인접항처럼 간주된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둘을 비춘 렌즈의 균질성이 차이들을 평면화했기 때문이다. ‘중세적 체제의 모순에 대해 비판했고, 조선적 주체성을 자각했으며, 근대 리얼리즘의 맹아를 선취했다는 식으로, 실학담론으로 불리는 이런 평가의 저변에 근대, 민족, 문학이라는 트라이앵글이 작동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비단 연암과 다산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온갖 징후들을 근대성으로 재영토화하는 동일성의 기제이기도 하다. 이 장에 들어오는 한, 차이와 이질성이 예각화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텍스트가 근대적인 것에 근접한가 아닌가 하는 척도로 계량화되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근대적 사유가 지닌 원초적 오만이 작동하고 있다. 오만이 낳은 무지와 편견!

 

연암과 다산은 18세기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중세의 외부를 사유했고, 실천했으며, 또 전혀 상이한 방식으로 근대와 접속했다. 근대적 척도의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봉쇄되었던 차이와 이질성들을 자유롭게 뛰어놀게 할 수 있을 터, , 이제 그 장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그때 다산이 있었던 자리

 

 

비평사적 관점에서 볼 때 문체반정(文體反正)은 하나의 특이점이다. 일단 문체와 국가장치가 정면으로 대결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그 사건으로 인해 18세기 글쓰기의 지형도가 첨예한 윤곽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열하일기가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었고, 연암이 정조의 당근과 채찍을 교묘하게 피해갔음은 이 책 2부에서 밝힌 바와 같다. 그렇다면 그때 다산은 어디에 있었던가?

 

혈기방장한 20대 후반을 통과하면서 관료로서의 경력을 쌓고 있었던 다산은 문체반정이 일어나기 직전, 이런 책문을 올린다.

 

 

신은 혜성(彗星)ㆍ패성(孛星)과 무지개 흙비 오는 것을 일러 천재(天災)라 하고 한발 홍수로 무너지거나 고갈되는 것을 일러 지재(地災)라 한다면, 패관잡서는 인재(人災)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 생각합니다. 음탕한 말과 더러운 이야기가 사람의 심령을 방탕하게 하며, 사특하고 요사스런 내용이 사람의 지식을 미혹에 빠뜨리며, 황당하고 괴이한 이야기가 사람의 교만한 기질을 신장시키며, 화려하고 아름답고 쪼개지고 잔다란 글이 사람의 씩씩한 기운을 녹여버립니다. 자제가 이것을 일삼으면 경사(經史) 공부를 울타리 밑의 쓰레기로 여기고, 재상이 이를 일삼으면 조정의 일을 등한히 여기고, 부녀가 이를 일삼으면 길쌈하는 일을 마침내 폐지하게 될 것이니, 천지간에 재해가 어느 것이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臣以爲彗孛虹霾 謂之天災 旱澇崩渴 謂之地災 稗官雜書 是人災之大者也 淫詞醜話 駘蕩人之心靈 邪情魅跡 迷惑人之智識 荒誕怪詭之談 以騁人之驕氣 靡曼破碎之章 以消人之壯氣 子弟業此而笆籬經史之工 宰相業此而弁髦廟堂之事 婦女業此而織紝組紃之功遂廢矣 天地間災害 孰甚於此

 

신은 지금부터라도 국내에 유행되는 것은 모두 모아 불사르고 북경에서 사들여오는 자를 중벌로 다스린다면, 거의 사설(邪說)들이 뜸해지고 문체가 한 번 진작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체책(文體策)

臣謂始自今 國中所行 悉聚而焚之 燕市貿來者 斷以重律 則庶乎邪說少熄 而文體一振矣

 

 

참으로 과격한 논법 아닌가? 패관잡서를 천지간에 비할 데 없는 재앙이라 규정지으며 책자를 모두 모아 불사르고 북경에서 사들여오는 자를 중벌로 다스리라니. 마치 불순분자를 뿌리 뽑겠다는 공안검사의 선전포고가 연상될 정도로 그의 태도는 단호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진두지휘한 국왕 정조의 입장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경상도의 작은 고을 안의현의 원님 노릇을 하던 중 배후조종자로 낙인찍힌 연암과 최선봉에서 발본색원을 외치는 다산, 한 사람이 부(), 권세도 없는 50대 문장가라면, 또 한 사람은 막 중앙정계에 입문한 패기만만한 청년이었다.

 

흥미롭게도 이런 대칭적 배치는 그들의 출신성분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히 전도되어 있다. 연암이 집권당파인 노론벌열층의 일원인 반면, 다산은 집권에서 배제된 남인의 일원이다. 그럼에도 연암은 애초부터 과거를 거부하고 권력 외부에서 떠돌며 문체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담론의 장을 열어젖혔고, 그에 반해 다산은 정조의 탕평책에 힘입어 일찌감치 정계에 진출하여 국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화려한 경력을 쌓는 도중이었다. 한쪽이 권력의 중심부로부터 계속 미끄러져나간 분열자의 행보를 걸었다면, 다산은 주변부에서 계속 중심부를 향해 진입한 정착민의 길을 갔던 셈이다.

 

그간 연암과 다산을 동질적으로 느꼈던 건 많은 부분 둘 다 모두 정치적으로 낙척(落拓)했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 혹은 국가권력과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둘은 상호 역방향을 취한다. 연암은 권력으로부터 계속 비껴나간 데 비해, 다산은 정조의 사후 유배생활 기간에도 중앙권력을 향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원심력과 구심력의 차이라고나 할까. 이 차이는 단순히 지배권력에 저항했는가 여부보다 훨씬 더 심층적인 차이다. 근본적으로 무의식욕망 혹은 신체적 파장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들이 생산담론의 이질성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벡터의 차이와 연장선상에 있다.

 

 

 

 

서학(西學), 또 하나의 진앙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서학이 그것이다. 정조 집권시에는 노론계열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패사소품 외에도 남인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던 서학 역시 정치적 소용돌이를 야기하는 또 하나의 진원지였다. 그럼에도 정조는 유독 전자를 문제삼음으로써 후자를 적극 보호해주었다.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지해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청초의 문집들부터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명분이었다. 서학과 패관잡기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언뜻 비약과 모순투성이로 보이는 이런 논법의 속내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서학은 교리가 너무 이질적이어서 솎아내기가 쉽지만, 패사소품은 은밀하게 침투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부를 교란한다는 것.

 

이것은 노론과 남인 사이의 균형, 곧 탕평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전략의 투영일 터이지만, 각도를 조금 달리 해서 보면 아주 흥미로운 논점을 내포하고 있다. 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서학은 확연히 구별되는 외부의 적이라면, 패사소품은 은밀하게 삼투하는 내부의 적이다. 명료하게 대척되는 외부의 적은 포획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에 통제불가능한 변이체들을 만들어내는 내부의 적에 비해 덜 불온하다. 개별인간이든 왕조든 혹은 지하조직이든 언제나 내부가 흔들릴 때 가장 위험한 법, 그렇다면 정조는 정치적 전략의 차원을 넘어 무의식적으로 서학보다는 패사소품의 파괴적 잠재력을 감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럼 여기에 대한 다산의 입지는 어떠했는가? 논란이 많긴 하지만, 다산은 천주교 신자는 아니다. 그의 고백에 따르면, 젊은 시절 친지와 가족들의 영향으로 서학에 깊이 경도되었으나 이후 지식이 차츰 자라자 문득 적수로 여기고, 분명히 알게 되어 더욱 엄하게 배척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의 수락 여부가 아니다. 신앙적 차원에서는 그 자신이 얼굴과 심장을 헤치고 보아도 진실로 나머지 가린 것이 없고, 구곡간장(九曲肝腸)을 더듬어 보아도 진실로 남은 찌꺼기가 없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서학과 결별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식론적 기저에 각인된 흔적까지 지우기란 쉽지 않다. 그가 구축한 담론의 체계는 분명 심층의 차원에서 서학의 그것과 직간접으로 공명하고 있다. 특히 상제(上帝), 신독(愼獨)’ 등의 개념이 지닌바 구조적 동형성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건 아니건 이미 그의 사유는 중세적 지배질서와 동거하기 어려운 외부의 하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정조시대에는 정조의 적극적 비호로 그 적대성이 첨예하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 연암은 서학을 대체 어떻게 평가했을까? 열하일기에서 보았듯이, 다른 북학파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서양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서는 그저 불교의 윤회설보다 좀 낮은 수준의 버전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실제로 면천군수 시절, 천주교에 빠진 지방민들을 각개격파식으로 설득해서 모두 전향(?)하게 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 그에게 있어 서학은 신종 이단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다산과 연암은 중세적 담론 외부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둘이 그린 궤적들은 결코 마주치기 어려운 포물선을 그린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포물선의 배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분명 하나의 특이점이다.

 

 

 

표현기계혁명시인의 거리

 

 

蘆田少婦哭聲長 갈밭 마을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길어라
哭向縣門號穹蒼 고을문 향해 울다가 하늘에다 부르짖네
夫征不復尙可有 수자리 살러 간 지아비 못 돌아올 때는 있었으나
自古未聞男絶陽 남정네 남근 자른 건 예부터 들어보지 못했네
舅喪已縞兒未澡 시아버지 초상으로 흰 상복 입었고 갓난애 배냇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三代名簽在軍保 할아버지 손자 삼대 이름 군보에 올라 있다오
薄言往愬虎守閽 관아에 찾아가서 잠깐이나마 호소하려 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처럼 지켜 막고
里正咆哮牛去皁 이정은 으르대며 외양간 소 끌어갔네
磨刀入房血滿席 칼을 갈아 방에 들어가자 삿자리에는 피가 가득
自恨生兒遭窘厄 아들 낳아 고난 만난 것 스스로 원망스러워라
蠶室淫刑豈有辜 무슨 죄가 있다고 거세하는 형벌을 당했나요.
閩囝去勢良亦慽 민땅의 자식들 거세한 것 참으로 근심스러운데
生生之理天所予 자식 낳고 또 낳음은 하늘이 준이치기에
乾道成男坤道女 하늘 닮아 이들 되고 땅 닮아 딸이 되지
騸馬豶豕猶云悲 불깐 말 불깐 돼지 오히려 서럽다 이를진대
況乃生民恩繼序 하물며 뒤를 이어갈 사람에 있어서랴.
豪家終歲奏管弦 부잣집들 일 년 내내 풍류 소리 요란한데
粒米寸帛無所捐 낟알 한톨 비단 한치 바치는 일 없구나
均吾赤子何厚薄 우리 모두 다 같은 백성인데 어찌해 차별하나
客窓重誦鳲鳩篇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시구편: 통치자가 백성을 고루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뻐꾸기에 비유해 읊은 시경의 편명)을 읊노라

 

 

다산의 시 애절양(哀絶陽)전문이다. ‘애절양(哀絶陽)’이란 생식기를 자른 것을 슬퍼하다라는 뜻이다. 다산은 이 작품의 창작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것은 가경(嘉慶) 계해년 가을, 내가 강진에 있으면서 지은 시이다. 노전(蘆田)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보(軍保)에 등록되고 이정이 소를 빼앗아가니 그 사람이 칼을 뽑아 자기의 생식기를 스스로 베면서 하는 말이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하였다. 그 아내가 생식기를 관가에 가지고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울며 하소연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아버렸다. 내가 그 사연을 듣고 이 시를 지었다.

此嘉慶癸亥秋, 余在康津作也. 時蘆田民, 有兒生三日入於軍保, 里正奪牛. 民拔刀自割其陽莖曰: “我以此物之故, 受此困厄.” 其妻持其莖, 詣官門, 血猶淋淋, 且哭且訴. 閽者拒之, 余聞而作此詩.

 

 

사실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그것을 직서적으로 담아낸 다산의 뚝심도 만만치 않다. 민중성, 리얼리즘, 전형성 등 80년대 비평 공간에서 다산의 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도 바로 그런 점에 기인한다.

 

 

 

 

거기에 비하면 연암은 상당히 기교파에 속한다. ‘레토릭에 기댄다는 뜻이 아니라, 의미를 몇 겹으로 둘러치거나 사방으로 분사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양반전(兩班傳)을 예로 들어보자. 정선 부자가 가난한 양반에게 돈을 주고 양반증을 산다. 양반이란 무엇인가?

 

 

오경이면 늘 일어나 유황에 불붙여 기름등잔 켜고서, 눈은 코끝을 내리보며 발꿈치를 괴고 앉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동래박의(東萊博議)를 줄줄 외워야 한다. 주림 참고 추위 견디고 가난 타령 아예 말며, 이빨을 마주치고 머리 뒤를 손가락으로 퉁기며 침을 입안에 머금고 가볍게 양치질하듯 한 뒤 삼키며 (중략) 손에 돈을 쥐지 말고 쌀값도 묻지 말고, 날 더워도 버선 안 벗고 맨상투로 밥상 받지 말고, 밥보다 먼저 국 먹지 말고 (중략)

五更常起, 點硫燃脂, 目視鼻端, 會踵支尻, 東萊博議誦如氷瓢. 忍饑耐寒, 口不說貧, 叩齒彈腦, 細嗽嚥津 (中略) 手毋執錢, 不問米價. 暑毋跣襪, 飯毋徒髻, 食毋先羹 (中略)

 

 

이게 첫 번째 문서다. 이거야 뭐 몸만 잔뜩 피곤하고 옹색하기 짝이 없지 않는가. 고작 그게 양반이라면 한마디로 밑천이 아까울 뿐이다. 양반 문서를 산 부자가 양반이라는 것이 겨우 이것뿐입니까[兩班只此而已耶]?”라고 투덜거리자, 두 번째 문서가 작성된다.

 

 

양반으로 불리면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 장사 아니하고, 문사 대강 섭렵하면, 크게 되면 문과 급제, 작게 되면 진사로세. (중략) 방안에 떨어진 귀걸이는 어여쁜 기생의 것이요, 뜨락에 흩어져 있는 곡식은 학을 위한 것이라 궁한 선비 시골 살면 나름대로 횡포부려, 이웃 소로 먼저 갈고, 일꾼 이 김을 매도 누가 나를 거역하리. 네 놈 코에 잿물 분고, 상투 잡아 도리질치고 귀얄수업 다 뽑아도, 감히 원망 없느니라.

稱以兩班. 利莫大矣. 不耕不商, 粗涉文史, 大决文科, 小成進士. (중략) 室珥冶妓, 庭糓鳴鶴. 窮士居鄕, 猶能武斷, 先耕隣牛, 借耘里氓, 孰敢慢我? 灰灌汝鼻, 暈髻汰鬢, 無敢怨咨.

 

 

증서가 반쯤 작성될 즈음, 부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빼면서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참 맹랑한 일이오. 장차 날더러 도적놈이 되란 말입니까[已之已之! 孟浪哉! 將使我爲盜耶]?”하고 머리채를 휘휘 흔들면서 달아나버렸다. 거들먹거리며 호의호식하는 양반의 삶이 이 평민 부자가 보기에는 여지없는 도둑놈 팔자였던 것이다. “종신토록 다시 양반의 일을 입에 내지 않았다[終身不復言兩班之事].”는 게 마지막 문장이다.

 

결국 이 작품의 골격은 두 개의 문서가 전부다. 그것을 통해 양반의 위선과 무위도식, 패덕 등을 간결하게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표 주체들의 겹쳐짐, 해학과 풍자, 아이러니와 역설 등 다양한 수사적 전략이 담겨 있어 저자의 의도를 한눈에 간파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이런 형식을 소설로 볼 수 있는가도 상당히 난감한 문제다. 문서 두 개로 진행되는 소설이라? 만약 그렇다면, 이건 마땅히 전위적인 실험의 일종으로 간주해야 한다.

 

 

 

 

표현기계의 발랄함

 

 

, 워밍업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연암이 표현형식을 전복하는 데 몰두한 데 반해, 다산은 의미를 혁명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은 두 사람의 비평적 관점에서도 그대로 확인되는 사항이다. 먼저, 연암 비평의 핵심은 주어진 언표의 배치를 변환하는 데 있다. 당대 고문이 지닌 경직된 코드를 거부하고 우주와 생의 약동하는 리듬을 포착하는 것이 연암체의 핵심이었다.

 

 

문장에 고문과 금문의 구별이 있는 게 아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따라 그 형상과 소리를 곡진히 표현하고 그 정경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만 있다면 문장의 도는 그것으로 지극하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4

常以爲文無古無今. (中略) 惟自爲吾文而已. 擧耳目之所睹聞, 而無不能曲盡其形聲, 畢究其情狀, 則文之道極也.

 

 

그가 보기에 당대의 문체는 경직된 코드화를 통해 생동하는 흐름을 가두고 질식시키는 기제이다. 중요한 건 삼라만상에 흘러넘치는 생의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것을 위해서는 고문의 전범적 지위는 와해되어야 한다. ‘옛날, 거기라는 초월적 허공에서 지금, 여기라는 지상으로의 착지! —— 이것이 연암이 시도한 담론적 실험의 요체이다. 그러한 욕망이 패사소품체와 접속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연암의 문체적 실힘이 소품체로만 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열하일기가 잘 보여주듯이, 그는 고문과 소품체, 소설 등 다양한 문체들을 종횡했던바, 연암의 특이성은 고문과 다른 문체들을 절충하거나 중도적으로 활용한 데 있다기보다 그러한 유연한 횡단성자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대상 및 소재, 주제 혹은 의미 등 배치에 따라 자유롭게 변이할 수 있는 능동성이야말로 표현기계로서의 연암의 우뚝한 경지인 셈이다. 그는 스스로 문장을 이렇게 자부하였다.

 

 

나의 문장은 좌구명, 공양고를 따른 것이 있으며, 사마천(司馬遷), 반고를 따른 것이 있으며,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을 따른 것이 있으며, 원굉도, 김성탄을 따른 것이 있다. 사람들은 사마천이나 한유를 본뜬 글을 보면 눈꺼풀이 무거워져 잠을 청하려 하지만, 원굉도, 김성탄을 본뜬 글에 대해서는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시원하여 전파해 마지않는다. 이에 나의 글을 원굉도, 김성탄 소품으로 일컬으니, 이것은 사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유만주, 흠영(欽英)

 

 

그의 문체실험은 이렇게 고문이 매너리즘에 빠져 어떤 촉발도 일으키지 못한 반면, 소품문의 발랄함에 열광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긴밀히 유착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 문장이란 신체적 촉발(혹은 공명)을 야기하는 정동(情動, affection)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주어진 기표체계에 새로운 내용을 담는 식으로가 아니라, 아예 표현체계의 전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그 전복적 여정 속에서 고문이 구축한 견고한 의미화의 장은 파열된다. 주어진 언표배치를 비틀고 변환함으로써 기존의 의미망들은 무력해지는 한편 그 자리에 생의 도저한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혁명시인의 비분강개

 

 

다산은 그와 달라서 지배적인 담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거대한 의미체계를 새롭게 구축한다. 연암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문장학의 타락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과거학의 폐해를 이단보다 심하다고 분개해 마지않았지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대안은 그것들이 잃어버린 원초적 의미들 혹은 역사적 가치들을 다시 복원하여 역동성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다산에게 있어 진정한 시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고, 세상을 경륜하려는 욕구가 충일한 상태에서 문득 자연의 변화를 마주쳤을 때 저절로 터져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런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不愛君憂國非詩也 不傷時憤俗非詩也]”. ‘군주시대’, ‘역사―― 그의 비평담론은 언제나 이런 거대한 기표체계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일견 전통적인 도문(道文) 일치론과 구별되지 않는 것도 핵심적 기표들의 유사성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담론은 그런 표면적 동질성을 무화시킬 만큼 강렬한 질적 차이들을 담론의 내부에 아로새긴다. 무엇보다 그는 문장이 담아야 할 내용을 수기(修己)’에서 치인(治人)’, 즉 사회적 실천에 관련된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주자학적 체계가 지닌 추상적 외피들을 파열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렬한 것이었다. , 그가 생각한 시의 도는 도덕적 자기완성의 내면적 경지가 아니라, ‘외부로 뻗어나가 실제적 성취에 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도()는 선험적 원리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 실천의 범주로서 변환되었다. 말하자면 그의 맥락에서는 실천해야비로소 아는 것이다. 실천에 대한 이 불타는 열정이 그로 하여금 요, , 주공, 공자가 다스리던 선진고경(先秦古經)’의 세계로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말하자면 다산은 경학이라는 의미화의 장을 통해 기존의 담론체계와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여 원망하면 옳겠는가. 그것은 안될 일이다. 그러나 자식이 효도를 다하고 있는데도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를 마치 고수가 우순을 대하듯이 한다면 원망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父不慈 子怨之可乎 曰未可也 子盡其孝 而父不慈 如瞽瞍之於虞舜 怨之可也

 

임금이 신하를 돌보지 않는다 하여 원망하면 옳겠는가. 그것은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신하로서 충성을 다했는데도 임금이 돌보지 않기를 마치 회왕이 굴평을 대하듯이 한다면 원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중략)

君不恤臣 怨之可乎 曰未可也 臣盡其忠 而君不恤 如懷王之於屈平 怨之可也

 

결국 원망이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 나머지 성인으로서도 인정한 사실이고, 충신, 효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충정을 나타내는 길이다. 그러므로 원망을 설명할 수 있는 자라야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고, 원망에 대한 의의를 아는 자라야 비로소 더불어 충효에 대한 감정을 말할 수 있다. 원원(原怨)

怨者聖人之所矜許 而忠臣孝子之所以自達其衷者也 知怨之說者 始可與言詩也 知怨之義者 始可與語忠孝之情也

 

 

원망하고 안타까워하는 힘, 이것이야말로 시를 추동하는 원동력이다. 왜냐하면 원망하는 마음은 지극히 사모하는 마음과 맞닿아 있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실천적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유학적 전통에서는 낮게 평가되거나, 때로는 악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정서의 격렬한 표출이 긍정되는 변환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분출은 공적이고 경세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로부터 벗어난 사사로운 욕망의 분출은 철저히 제어되어야 한다.

 

다산이 패시소품체를 격렬히 비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가 보기에 소품문들은 음탕한 곳에 마음을 두고 비분한 곳에 눈을 돌려 혼을 녹이고 애간장을 끊는 말을 명주실처럼 늘어놓는가 하면, 뼈를 깎고 골수를 에는 말을 벌레가 우는 것처럼 내어놓아, 그것을 읽으면 푸른 달이 서까래 사이로 비치고 산귀신이 구슬피 울며 음산한 바람에 촛불이 꺼지고 원한을 품은 여인이 흐느껴 우는 것 같은유의 것이다. 일단 그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고, 이런 유의 과장된 수사학에는 감정 혹은 욕망에 대한 그의 태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다.

 

, 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이 천리의 공()’이라면 배양 확충시켜야 하겠지만, ‘인욕의 사()’에서 나온 것이면 단연 꺾어버리고 극복해야 한다. 그의 비평담론이 지닌 혁명적 내용이나 그의 작품들이 지닌 봉건적 수탈에 대한 분노, 민중적 고통에 대한 절절한 연민 등은 이런 사유의 산물이다.

 

이처럼 그가 택한 행로는 혁명적이기는 하되, 성리학적 틀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이항대립적 마디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안에서 소수적이고 분열적인 욕망의 흐름이 틈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 예측불가능한 흐름들은 중심적인 의미화의 장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경세가인 다산이 엄청난 양의 시를 쓴 데 비해, 정작 문장가인 연암은 시의 격률이 주는 구속감을 견디지 못해 극히 적은 수의 시만을 남겼다. 전자가 시에 혁명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면, 후자는 시의 양식적 코드화 자체로부터 탈주하고자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신체의 파동을 지녔던 셈이다.

 

 

 

 

말과 사물에 대한 관점 차이

 

 

연암의 미학적 특질이 유머와 패러독스라면, 다산은 숭고와 비장미를 특장으로 한다. 앞에서 음미한 양반전(兩班傳)애절양(哀絶陽)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유머와 패러독스가 공통관념을 전복하면서 계속 미끄러져 가는 유목적 여정이라면, 숭고와 비장미에는 강력한 대항의미를 통해 자기 시대와 대결하고자 하는 계몽의 파토스(pathos)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런 미학적 차이 뒤에는 몇 가지 인식론적 접점들이 자리하고 있다.

 

먼저 말과 사물의 관계. 조선 후기 비평담론에 있어 언어와 세계의 불일치는 핵심적인 논제였다. 언어를 탈영토화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이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크게 보면, 언어를 탈영토화하는 방향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낡은 상투성의 체계로부터 탈주하여 예측불가능한 표상들을 증식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통사법을 뒤덮고 있는 먼지를 털어내고 최대한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연암이 전자의 방향을 취한다면, 다산은 후자의 방향을 취한다.

 

 

저 허공 속에 날고 울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생기가 발랄합니까. 그런데 싱겁게도 새 ()’라는 한 글자로 뭉뚱그려 표현한다면 채색도 묻혀버리고 모양과 소리도 빠뜨려 버리는 것이니, 모임에 나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겨진 것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더러는 늘 하던 소리만 하는 것이 싫어서 좀 가볍고 맑은 글자로 바꿔볼까 하여 새 ()’자로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글만 읽고서 문장을 짓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병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로 그늘진 뜰에 철 따라 우는 새가 지저 귀고 있기에,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마구 외치기를, “이게 바로 내가 말하는 날아갔다 날아오는글자요,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글월이다. 다섯 가지 채색을 문장이라 이를진대 문장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오늘 나는 참으로 글을 읽었다하였습니다. 경지에게 답함2[答京之之二]

讀書精勤, 孰與庖犧?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後世號勤讀書者, 以麁心淺識. 蒿目於枯墨爛楮之間, 討掇其蟫溺鼠渤. 是所謂哺糟醨而醉欲死. 豈不哀哉! 彼空裡飛鳴, 何等生意? 而寂寞以一, 抹摋沒郤彩色, 遺落容聲. 奚异乎赴社邨翁杖頭之物耶? 或復嫌其道常, 思變輕淸, 換箇禽字, 此讀書作文者之過也.

朝起, 綠樹蔭庭, 時鳥鳴嚶. 擧扇拍案胡叫曰 : “是吾飛去飛來之字, 相鳴相和之書.” 五釆之謂文章, 則文章莫過於此. 今日僕讀書矣.

 

 

마을의 어린아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다가 아이가 읽기 싫어하는 것을 나무랐더니, 하는 말이, “하늘을 보면 새파란데 하늘 ()’자는 전혀 파랗지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하였소. 이 아이의 총명함은 창힐이라도 기가 죽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 창애에게 답함3[答蒼厓之三]

里中孺子, 爲授千字文, 呵其厭讀, : ‘視天蒼蒼, 天字不碧, 是以厭耳.’ 此兒聰明, 餒煞蒼頡.

 

 

연암의 이 척독(尺牘, 짧은 편지)들은 언어에 관한 촌철살인의 아포리즘이다. 새 조()자에는 날아가고 날아오는’, ‘서로 울고 화답하는새의 생기발랄한 호흡이 담겨 있지 않다. 또 하늘은 새파랗기 그지없지만, 하늘 천 자는 전혀 푸르지 않다. 요컨대 부단히 생생하는 천지빛이 날로 새로운 일월을 문자는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생동하는 변화를 담아내려면 의미의 고정점을 벗어나 증식, 접속, 변이를 거듭해야 한다. ‘사마천(司馬遷)과 나비의 비유가 말해주듯, 진정한 의미란 대상의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잡았는가 싶으면 날아가버리는 그 순간에 돌연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의 중심적 기표로 환원되지 않는 수많은 의미들의 산포, 혹은 다층적 표상이다.

 

그에 비해 다산은 의미의 명징성을 추구한다. 그는 (), (), (), () 넉 자도 모두 원초의 뜻이 있으니 먼저 그 원초의 뜻을 알고 나서야 여러 경전에서 한 말의 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어 및 개념들은 본래의 투명한 원의미를 지니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그것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일일 뿐이다. 그래야만 사물을 분별하고 이치를 뚜렷이 알게 된다. 다산은 이렇게 성리학적 추상성에 의해 감염된 언어들을 최대한 투명하게 다듬어 본래의 생기를 되찾아야 한다는 어원학적 태도를 견지한다. 소품문이나 소설이 허황한 말들로 언어를 오염시키는 점을 신랄하게 비난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우주와 주체에 대한 관점 차이

 

 

다음, 우주와 주체에 대하여, ‘에 대한 연암의 관점은 천기론(天機論)’의 지평 위에 있다. 연암을 비롯하여,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이옥(李鈺) 등에 의해 구성된 천기론천리론(天理論)으로 표상되는 중세적 초원론을 전복하여 자연을 생성과 변이의 내재적 평면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욕망, 여성, 소수성(minority) 등 기존의 체계에서 봉쇄되었던 개념들이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장이기도 했다. “참된 정()을 편은 마치 고철(古鐵)이 못에서 활발히 뛰고, 봄날 죽순이 성난 듯 땅을 밀고 나오는 것과 같다는 이덕무의 언급이 그 뚜렷한 예가 된다. 이옥의 다음 글은 가장 명쾌한 선언에 해당된다.

 

 

천지만물은 천지만물의 성()이 있고, 천지만물의 상()이 있고, 천지만물의 색()이 있고, 천지만물의 성()이 있다. 총괄하여 살펴보면 천지만물은 하나의 천지만물이고, 나누어 말하면 천지만물은 각각의 천지만물이다. 바람 부는 숲에 떨어진 꽃은 비오는 모양처럼 어지럽게 흐트러져 쌓였으나, 변별하여 살펴보면 붉은 꽃은 붉고 흰꽃은 희다. 그리고 균천광악(鈞天廣樂, 천상의 음악)이 우레처럼 웅장하게 울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현악은 현악이고 관악은 관악이다. 각각 자기의 색을 그 색으로 하고 각각 자기의 음을 그 음으로 한다. 이언

天地萬物, 有天地萬物之性, 有天地萬物之象, 有天地萬物之色, 有天地萬物之聲.總而察之, 天地萬物, 一天地萬物也; 分而言之, 天地萬物, 各天地萬物也. 風林落花, 雨樣紛堆, 而辨而視之, 則紅之紅, 白之白也; 勻天廣樂, 雷般轟動, 而審而聽之, 則絲也絲, 竹也竹. 各色其色, 各音其音.

 

 

이 텍스트는 차이를 생성하는 장으로서의 천지만물에 대한 전복적 언표이다. 위의 논리를 이어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만물은 문자 그대로 만 가지 물건이고, 하나의 하늘, 하나의 땅이라 해도 서로 같은 순간, 동일한 곳이 단 하나도 없노[萬物者, 萬物也, 固不可以一之. 而一天之天, 亦無一日相同之天焉; 一地之地, 亦無一處相似之地焉].”라고, 항구성, 동일성의 표상이었던 자연이 이제 정반대로 무수한 변이의 장으로 변환된 것이다. 이 내재성의 평면에는 따로이 중심적 가치가 존재할 수 없고, 다만 지금, 여기를 구성하는 삶이 있을 따름이다.

 

그에 반해 다산은 천리의 초월성을 상제라는 새로운 초월성으로 대체한다. 삼대의 다스림을 꿈꾸었던 그는 송유들에 의해 그 인격성이 제거되었던 에 다시 인격성을 부여한다. 상제는 천지의 운행과 만물의 생성을 주재하는 존재로서, 유형의 세계로부터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이 세계를 창조하고 길러주는 초월자이다.

 

이법(理法)’이라는 형이상학학을 인격적인 초월자로 대체함으로써 언어적 명징함 및 의미의 투명성은 한층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것은 분명 서학이 아니라 선진고경의 세계에 그 젖줄이 닿아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둘 사이의 인식론적 동형성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당시 허다한 지식인군들 중에서도 유독 다산이 속한 남인, 특히 녹암(권철신)계 지식인들이 천주교에 기울어진 것도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강학 분위기는 종교적 제의에 가까울 정도로 경건함을 지향했던바, 서학에 대한 경도와 이런 지적 엄숙주의는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도 다산과 주변인물들의 진지무쌍함유쾌한 명랑함을 자랑했던 연암그룹의 분위기와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호락논쟁에 대한 관점 차이

 

 

한편, 18세기 철학적 논쟁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한 인물성동이논쟁과 관련하여 볼 때, 천기론이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강조한 동론(同論)의 입장과 연결된다면, 다산의 상제관은 이론(異論)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격신의 설정을 통해 이론(異論)보다도 훨씬 더 과격한 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한다. 다산에 따르면 인성과 물성은 결단코 다른 것이어서, 물성은 사물의 자연적 법칙에 한정된다. 인간의 존재는 이 물질계의 어떠한 유()로부터도 초월해 있으며, 이 모든 것을 향유하는 주체이다. 인간이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영명(靈命)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명은 기타 물질계와의 연속성이 부정된 독자적인 인식의 주체로서 작용한다.

 

자연의 모든 사물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목적론적 태도 역시 그러한 인간중심주의의 산물이다.

 

 

! 우러러 하늘을 살펴보면 일월(日月)과 성신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구부려 땅을 살펴보면 초목과 금수가 정연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는 사람을 비추고 사람을 따듯하게 하고 사람을 기르고 사람을 섬기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세상을 주관하는 자가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늘이 세상을 하나의 집으로 만들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고, 일월성신과 초목금수는 이 집을 위해 공급하고 받드는 자가 되게 하였는데…….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嗟呼 仰觀乎天 則日月星辰森然在彼 俯察乎地 則草木禽獸秩然在此 無非所以照人煖人養人事人者 主此世者 非人而誰 天以世爲家 令人行善 而日月星辰草木鳥獸 爲是家之供奉

 

 

이러한 관점은 연암의 인식론과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만큼 대척적이다. 주지하는 바대로, 연암은 인물막변(人物莫辨)’ —— 인성과 물성은 구별되지 않는다 —— 의 입장을 취한다. 나아가 만물진성설(萬物塵成說)’에 입각하여, 인간을 먼지에서 발생한 벌레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이런 구도하에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중심주의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에 대한 이러한 차이는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매우 상이한 태도를 낳게 된다. 연암이 주체의 끊임없는 변이를 추구하는 탈주체화의 여정을 취하는 데 비해, 다산은 주체의 자명성, 확고부동함을 주창한다.

 

 

我服地黃湯 내가 지황탕을 마시려는데
泡騰沫漲 印我顴顙 거품은 솟아나고 방울도 부글부글 그 속에 내 얼굴을 찍어놓았네
一泡一我 一沫一吾 거품 하나마다 한 사람의 내가 있고 방울 하나에도 한 사람의 내가 있네
(中略)  
斯須器淸 香歇光定 이윽고 그릇이 깨끗해지자 향기도 사라지고 빛도 스러져
百我千吾 了無聲影 백명의 나와 천 명의 나는 마침내 어디에도 자취가 없네
(中略)  
匪我映泡 以泡照泡 내가 거품에 비친 것이 아니요 거품이 거품에 비친 것이며
匪我映沫 以沫照沫 내가 방울에 비친 것이 아니라 방울 위에 방울이 비친 것일세
泡沫映滅 何歡何怛 포말은 적멸을 비춘 것이니 무엇을 기뻐하며 무엇을 슬퍼하랴 주공탑명(麈公塔銘)

 

 

대체로 천하의 만물이란 모두 지킬 것이 없고, 오직 나만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중략)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에 일정한 법칙이 없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도하면 떠나가고, 위협과 재앙으로 겁을 주어도 떠나가며, 심금을 울리는 고운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고, 푸른 눈썹에 흰 이빨을 한 미인의 요염한 모습만 보아도 떠나간다. 한번 가면 돌아올 줄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나[] 같은 것이 없다. 어찌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수오재기(守吾齋記)

大凡天下之物, 皆不足守, 而唯吾之宜守也. (中略) 獨所謂吾者, 其性善走, 出入無常. 雖密切親附, 若不能相背, 而須臾不察, 無所不適. 利祿誘之則往, 威禍怵之則往, 聽流商刻羽靡曼之聲則往, 見靑蛾皓齒妖豔之色則往. 往則不知反, 執之不能挽, 故天下之易失者, 莫如吾也. 顧不當縶之維之扃之鐍之以固守之邪?

 

 

앞의 글은 연암의 것이고, 뒤의 것은 다산의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이 두 텍스트는 주체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론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 할 만하다. 연암의 경우, 인간뿐 아니라 이름 혹은 정체성이라는 고정점을 허망하기 짝이 없는 포말, 곧 물거품으로 보지만, 다산에게 있어 는 실과 끈, 빗장과 자물쇠로 굳게 지켜야 하는 견고한 성채에 비유된다. 주체의 자주지권(自主之權)’은 상제가 부여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포말과 성채! 주체에 대한 두 사람의 상이한 지향을 이보다 더 잘 말해주기란 어려우리라.

 

 

 

 

그들은 만나지 않았다!

 

 

윤리학적 태도에 있어서도 그들은 전혀 달랐다. 연암이 우도(友道)’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데 비해, 다산은 효제(孝悌)’를 일관되게 주창한다. 다산에게 있어 효제는 독서의 근본이자 수행의 근간이다. 고정된 의미화를 거부하는 연암의 철학적 태도는 필연적으로 우정의 윤리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에 반해 주체의 명징성을 강조하는 다산에게는 우정보다는 효제라는 가치를 실천적으로 확충하는 것이 더 절실했던 것이다. 물론 이 차이는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행로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연암에게는 벗의 사귐이 일상의 요체였지만, 다산의 인맥은 대체로 가문과 당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전자의 경우, 중심적인 가치로부터 벗어나 상하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주력했고,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우정이라 이름할 수 있는 관계들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후자는 이미 젊어서부터 국왕의 총애를 받았고, 한평생 국왕과 중앙 정계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으며, 유배지에서도 아들들의 학문에 심혈을 기울였다. 유목민과 정주민 ―― 연암과 다산은 이토록 이질적이고 상이한 계열의 존재들이다.

 

끝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하나 있다. 세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연암과 다산은 동시대인이다. 게다가 둘다 정조시대가 배출한 최고의 스타들이다. 문체반정(文體反正)시에는 양극단에서 맞서기도 했다. 박제가(朴齊家),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 연암의 절친한 벗들과 다산은 직간접으로 교류를 나누었다.

 

그런데 둘은 어떤 교류의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몰랐을 리는 없다. 절대로! 둘 사이에 있던 정조가 연암의 사소한 움직임까지도 체크했는데, 정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다산이 어떻게 연암의 존재를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그들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침묵했다!

 

평행선의 운명을 아는가? 두 선분은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다만 서로 바라보며 자신의 길을 갈 뿐, 하지만 그들은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 평행선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나지는 못하지만 절대 헤어질 수도 없는 기이한 운명! , 연암과 다산은 마치 평행선처럼 나란히 한 시대를 가로지른 것인가?개정신판 책머리에서도 밝혔듯이, 이때의 질문이 스스로 증식, 산포되어 마침내 2013년여름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로 출간되었다. ‘다산과 연암 라이벌 평전 1이라는 부제를 달고서

 

두 사물을 같은 것으로 보려고 마음먹는다면, 어떤 것에서도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야 말 것이다.” 달라이라마가 자주 인용하는 대승불교 지도자 나가르주나(용수)’의 말이다. 그간 연암과 다산을 비롯하여 중세적 가치들을 보는 우리의 시선이 바로 그와 같지 않았을까? 동일성에 대한 집착 혹은 차이를 보지 못하는 무능력, 근대적 합리성의 실체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지. 이런 강박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조선 후기는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지적 향연의 장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일 것이다.

 

연암과 다산의 차이는 단지 그 서곡에 불과할 따름이다.

 

 

 

 

인용

지도 / 목차

과정록 /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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