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북벌론이란 관념에 갇히지 않고서
‘사이의 은유, 차이의 열정’을 당대의 첨예한 이념적 사안들에 투사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우리는 이미 앞에서 그가 중화주의, 북벌, 주자학 따위를 어떻게 비틀고 헤집고 다녔는지를 대강 살펴본 바 있다. 그걸 바탕 삼아 몇 가지 첨점들을 좀더 탐색해 보자. 때론 와이드 비전으로, 때론 현미경을 들이대고서.
당시 청왕조 치하의 한족 지식인들의 고심은 이런 것이다. 심정적으로는 절대 만주족 오랑캐의 통치를 인정할 수 없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들이 명왕조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일까. 천하를 통치하는 건 하늘의 뜻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오랑캐로 하여금 천하를 지배하게 한 그 하늘의 뜻은 대체 뭐란 말인가.
「곡정필담(鵠汀筆談)」에서 연암은 묻는다.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라고 합니다”만 “흥하고 망하는 즈음에는 귀신의 조화마저도 거짓과 진실이 번갈아 섞이고” “하늘이 나라를 주려는 사람에게 꼭 말을 하고서 주는 것은 아니겠으나, 몰래 붙들고 보호해주어 마치 간절하고 은혜로운 뜻이 있는 것처럼 합니다.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반드시 그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잔인하고 참혹하게 하기를 마치 철천지원수를 갚듯이 하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물론 그에 대한 정답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이걸 단서로 삼아 사유의 길을 모색해갈 뿐이다.
곡정 왕민호의 말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무릇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양쪽에서 줄을 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줄을 당기다가 줄이 끊어지면, 끊어지는 곳 가까이 처했던 쪽이 먼저 넘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거스르는 것과 순종하는 차이, 즉 밀고 당기는 차이는 있어도 어느 쪽이 옳다든지 어느 쪽이 틀렸다든지 하는 것은 없”는 법이니, “의리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라고.
그러면 청의 건국 역시 그런 것인가?
본 청나라 조정이 나라를 얻은 정정당당함은 천지에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나라를 처음 세우는 사람은 누구라도 혁명을 하는 시점에서 상대방을 원수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세우는 처음에 전 왕조를 위해 도리어 원수를 갚아주는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는 오직 우리 왕조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중략)
本朝得國之正 無憾於天地刱業者 莫不爲仇於革命之際 國朝還有大恩於定鼎之初 爲前朝報讎 惟我朝是已
단지 천하를 위하여 대의를 밝히고 나라의 원수를 갚았으며, 백성을 피바다와 해골더미의 산에서 건져내려고 했기에, 하늘이 편을 들고 백성이 따랐습니다. 「곡정필담(鵠汀筆談)」
只爲天下明大義復大仇 拯救斯民於血海骨山之中 天與之 民歸之
연암은 논변의 끄트머리에 이렇게 주를 달아놓았다. “그는 매양 청의 창건이 정당하다고 말끝마다 외고 있으나 그래도 이야기할 때는 때때로 자기의 본심을 드러냈으니, 특히 역대 왕조의 역순과 성패의 자취를 빌려서 이리저리 자기의 회포를 표시한 것이다[雖極口每誦淸得國之正 談說之際 時露本情 特借歷代逆順成敗之迹 以俯仰感慨 ]”라고.
만주족 오랑캐의 통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순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이 곤혹스러움. 물론 연암 같은 조선의 선비들 역시 그런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금 청나라는 명나라의 옛 신하들을 쓰다듬고 사해를 하나로 여겨, 우리나라에 혜택을 보태어준 것 또한 여러 세대가 지났다. 금이 조선에서 나는 물산이 아니라고 하여 공물의 물품에서 빼주었고, 무늬가 있는 조선 말이 쇠약하고 작다고 하여 면제시켜주었으며, 쌀ㆍ모시ㆍ종이ㆍ돗자리의 폐백도 해마다 바치는 양을 감해주었다. 근년 이래로는 칙사를 내보내야 할 일도 관례대로 적당히 문서로 처리함으로써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번거로운 폐단을 없애주었다.
今淸按明之舊 臣一四海 所以加惠我國者 亦累葉矣 金非土產則蠲之 綵馬衰小則免之 米苧紙席之幣 世減其數 而比年以來 凡可以出勅者 必令順付以除迎送之弊
이번에 우리 사신이 열하에 올 때에는 특별히 군기대신을 파견하여 길에서 맞이하도록 하였고, 사신이 천자의 뜰에 설 때에는 청나라 대신과 함께 서도록 반열을 명했으며, 연희를 구경할 때에는 조정의 신료들과 나란히 즐기게 해주었다. 또 조서를 내려, 정식 사신이 올리는 공물 이외에 특별 사신의 토산품은 바치지 말도록 면제해주었다. 이는 실로 전에 볼 수 없던 성대한 특전으로, 명나라 시절에도 받지 못했던 대우이다. 「행재잡록(行在雜錄)」
今我使之入熱河也 特遣軍機近臣道迎之 其在庭也 命班于大臣之列 其聽戱得比廷臣而宴賚之 又詔永蠲正貢外別使方物 此實曠世盛典 而固所未得於皇明之世也
‘중화/오랑캐’, ‘조선/청’ 이런 식의 이분법은 지식인들을 맹목으로 만든다. 그래서 청나라가 베푸는 호의에 대해서도 눈을 감게 만든다. 편협한 소중화(小中華), 조선/호탕하고 유연한 오랑캐, 청 ―― 실제 현실은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소중화주의에 사로 잡히면 잡힐수록 청의 대국적 유연함은 더한층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18세기 조선의 비극이자 아이러니다.
천하의 형세 분석
물론 그렇다고 연암의 의도가 청문명을 예찬하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이념적 명분이 아니라 지상에서 펼쳐지는 힘의 배치다. 연암의 정치적 촉수는 이 배치의 미세한 결을 더듬는다. 가령 조선의 선비들은 변발을 비웃는다. 변발은 청이 한족에게 강요한 야만적 습속 중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그럼 어째서 조선에는 그것을 강요하지 않았는가? 생각하면 정말 의아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무력으로서는 조선을 무릎 꿇리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을 터인데.
연암이 보기에 청나라 쪽의 입장은 이렇다. “조선은 본래 예의로 이름이 나서 머리털을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데, 이제 만일 억지로 그 심정을 꺾는다면 우리 군사가 돌아온 뒤에는 반드시 뒤엎을 터이니, 예의로써 얽어매어 두느니만 못할 것이다. 저들이 만일 도리어 우리 풍속을 배운다면 말타고 활쏘기가 편할 터인데, 이는 우리의 이익이 아니”라며 드디어 중지시켰다. 말하자면, 조선의 예를 존중해주는 척 하면서 사실은 문약(文弱)함을 그대로 방치한 것이었다.
이런 권력의 구도를 읽지 못한 채 변발한 중국을 손가락질하는 건 얼마나 웃기는 일인지. 한족의 경우에도 이런 넌센스는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족이 그 좋은 예다. 청이 지배하면서 여성의 전족을 금지하는 규칙을 여러 번 시행했다. 그런데 한족들이 그것을 종족적 정체성으로 간주하고서 끝까지 고수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족이 남성들의 경우는 변발을 하되 여성들은 전족을 고수하게 했으니, 여기에는 성차별과 한족 중심주의가 교묘하게 교차하고 있었던 셈이다. 연암은 길거리에서 전족을 한 채 뒤뚱거리는 한녀(漢女)들을 목격할 때마다, 그 우스꽝스러움에 혀를 찬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치적 명분, 문화적 습속의 표면만 읽어내고 흥분하거나 좌절하는 건 한마디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런 식으로 연암은 청과 조선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를 짚어낸다. 때론 거시적으로, 때론 미시적으로, 다음이 그 종합적 완결판에 해당된다. 열하를 보고서 연암은 천하의 형세를 다섯 가지로 변증한다.
첫째, “열하는 장성 밖 황벽한 땅이다. 천자는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변방의 구석까지 와서 거처하는 것일까.” 명분은 ‘피서’라 하지만 실상은 천자가 몸소 나가서 변방을 방비하는 꼴이니, 이로써 몽고의 강성함을 가히 알 수 있다.
둘째, “황제는 서번의 승왕(僧王)을 맞아다가 스승으로 삼아 황금으로 전각을 지어 그를 살게 하고 있으니, 천자는 또 무엇이 부족해서 이런 떳떳지 못한 예절을 쓰는 것일까.” 명목은 스승으로 대접하지만 그 실상인즉 전각 속에 가두어두고 하루라도 세상이 무사할 것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니, 이로써 서번이 몽고보다도 더 강성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보더라도 황제의 마음이 늘 괴롭다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셋째, “사람들의 문자를 보면 비록 그것이 심상한 두어 줄 편지라 하더라도 반드시 역대 황제들의 공덕을 늘어놓고, 당세의 은택에 감격한다고 읊조리는 것은 모두 한인들의 글이다.” 이런 과잉충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대개 스스로 중국의 유민(遺民)으로서 항상 걱정을 품고 스스로 혐의하고 경계하느라 입만 열면 칭송을 하고 붓만 들면 아첨을 해댄다. 한인들의 마음도 괴롭기 때문이다.
넷째, “사람과 필담을 할 때는 비록 평범한 수작을 한 것이라도 말을 마친 뒤에는 곧 불살라버리고 쪽지 하나도 남겨두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한인만이 그런 게 아니라 만인들은 더욱 심하다.” 그럼 대체 만주족 선비들은 왜 그러는가? “만인들은 그 직위가 모두 황제와 지극히 가까운 데 있는 까닭에 법령의 엄하고 가혹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단 한인들의 마음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천하를 법으로 금하고 있는 자의 마음도 괴로운 것이다.
이게 연암이 파악하는 천하의 형세다. 황제와 몽고, 서번, 그리고 한족과 만주족, 이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집약되는 한편, 그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제국의 배치가 한눈에 포착되지 않는가, 편협한 분별에 사로잡히지 않고, 심층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자만이 제시할 수 있는 지도 그리기, 그의 북학이념이 단지 근대적 민족주의로 포섭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자학과 이단들
주자는 주자주의자일까? 아닐까? 아마도 가장 정확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일 것이다. 긍정의 경우는 주자주의가 기존의 배치를 동요시키면서 새로운 담론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상황을, 부정의 경우는 주자주의가 교조적 담론으로 기능하는 상황을 상정한 것일 터이다. 즉 이 단순소박한 문답은 어떤 전복적 사유도 시공간적 배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뿐 아니라, 자신에 반하는 의미까지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준다.
중세의 텍스트를 다루는 이들에게 주자는 언제나 넘어서야 할, 탈주자주의의 맥락에서만 그 얼굴을 드러내는 존재다. 앞서 간략하게 짚었듯이 16세기 이후 조선은 주자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았고, 17세기 당파 간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육경(六經)에 대한 주자 이외의 어떤 해석도 ‘이단’으로 낙인찍히는 궤적을 밟아왔다. 따라서 조선 후기 텍스트를 다룰 때는 언제나 주자학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가가 그 사상의 진보성 여부를 판단하는 척도로 기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주자는 항상 저 드높은 초월적 위치에서 ‘천리(天理) 혹은 이법(理法)’을 설파하는 근엄한 표정으로만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주자가 자신의 학문을 구성하는 과정은 실로 역동적이다. 불교의 선(禪)에 깊이 침잠했으나 과감하게 그로부터 몸을 돌리고 북송(北宋) 도학(道學)의 계보를 집대성하면서 유학의 거대한 체계화를 시도하는 과정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숱한 지적 고수(!)들과의 만남, 1천 명에 달하는 제자들과의 공동생활, 논적(論敵) 육상산(陸象山)과의 치열한 논쟁 등 주자학은 하나의 거대한 지적 운동 속에서 태동되었던 것이다.
과거를 위한 학문을 그토록 조롱하고, 만년에 ‘위학(僞學)의 금(禁)’에 몰려 혹독한 탄압을 받았던 자신의 학문이 뒷날 과거시험의 교과서가 되고, 국가학이 되어 다른 종류의 학문들을 모조리 이단으로 낙인찍는 도그마가 되리라는 것을 주자는 아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맑스가 자신의 사유가 사회주의 국가학이 되어 ‘감시와 처벌의 도구’가 되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듯이. 그런 점에서 주자 역시 주자주의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주자가 언제나 탈주자주의의 맥락에서만 나타난다는 건 조선의 주자학이 늘 ‘인간 주자’의 학문이 아니라, 주자주의로만 기능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소중화주의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층위에서 작동한 것이라면 주자주의는 철학적 카테고리로서 그 내부를 떠받치고 있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공맹(孔孟)의 이념은 오직 주자로 귀결되고, 한족문화의 정통성 역시 주자주의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청왕조의 국가 이념 역시 주자주의였다. 강희제는 주자를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유학 십철의 다음에 모시고, 국가학으로 적극 장려하였다. 그 점에서는 조선과 하등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주자학 외부에 대한 태도가 조선과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주자를 정통으로 표방하면서도 청왕조는 주자학과 대척적인 것들이 공존할 수 있는 영역을 상당 부분 확보해두었던 것이다. 유목민의 유연함 때문인지 아니면 오랑캐의 근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연암 역시 조선의 주자학자로서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으리라. 연암의 분석은 이렇다. 청이 중국의 주인이 되면서 형세가 주자학으로 기울어졌음을 판단하여 주자의 도덕을 황실의 가학(家學)으로 삼자, 주자학과 대결했던 양명학은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다. “아! 그들이 어찌 진실로 주희의 학문을 알아서 그것을 취했겠는가.”, “중국의 대세를 살펴서 그것을 먼저 차지한 뒤, 온 천하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 자기들을 감히 오랑캐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천하의 글을 몽땅 거두어들여 『도서집성』과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을 편찬했다. 그러고는 천하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것이 바로 주자가 남기신 말씀이며, 주자가 남긴 종지(宗旨)다.” 말하자면, 한족 선비들보다 더 강경하게 주자를 전유해버린 것이다.
연암이 보기에 이렇게 그들이 걸핏하면 주자를 드높이는 것은 "천하 사대부들의 목덜미에 걸터앉아 그들의 목구멍을 누른 채 그 등을 어루만지는 격이다. 천하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예의절목의 구구한 항목에 골몰하여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다“. 이로써 “오늘날 주자를 반박하는 사람은 옛날 육구연의 학문을 따르던 이들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런 속내를 알지 못한 채 잠깐 중국 선비를 접촉할 때 대수롭지 않은 말이라도 일단 주희와 어긋나는 바가 있을라치면 눈이 휘둥그레지며 깜짝 놀라 그들을 육구연의 무리라고 배척하곤 한다. 또 귀국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는 육구연의 학문이 크게 번성하여 유학의 도가 땅에 떨어졌더구만. 쯧쯧.’”한다. 한마디로 사태의 본질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단과의 강도 높은 접속
정황이 그러하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을 유람하다가 마음껏 주희를 반박하는 이를 만나면, 반드시 범상치 않은 선비로 여기고 이단이라면서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차분히 대화를 이끌어 그 속내를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를 통해 천하의 대세를 엿볼 수 있으리라. 「심세편(審勢編)」
駁朱者 知其爲非常之士而毋徒斥以異端 善其辭令 徵質有漸 庶幾因此而得覘夫天下之大勢也哉
이 유연한 도움닫기! 여기에서도 역시 영토화하는 선분과 탈영토화하는 선분이 뒤섞여 있다. 그의 위치는? 두 선분의 사이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암은 주자주의와 청왕조, 지식인과 주자학, 주자주의와 반주자주의 등의 선분들이 교차하는 사이를 매끄럽게 왕래한다. 그렇다면 양명학을 포함하여 주자학의 외부, 불학과 도학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 연암은 이에 대해서는 간접화법을 즐겨 구사한다. 즉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논지를 펼치기보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하기를 좋아한다. 대표적인 것이 옹정제(雍正帝)의 조서이다. 불교과 도교를 배척하라는 상소에 대해 옹정제(雍正帝)는 이렇게 통유한다.
부처와 노자의 가르침은 인간 본원의 심성으로 돌아가고, 선악이 서로 감응하며, 이기(理氣)가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옛날에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이 유교의 인간 윤리를 근본으로 삼아 정치적 공적을 드러내려고 하니, 노자와 부처는 예악형정의 영역에 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것이 유교의 밝은 가르침에 방해가 될까 걱정을 하니, 밝고 현명한 임금들은 그 두 가르침을 소원하게 대한 적도 있었다. (중략)
佛老之敎 心性本源 善惡感應 理氣根窟 自昔理天下者 本之倫常 效之事功 則二氏之敎 無與乎禮樂刑政之區 恐其有妨於明敎 則哲王賢辟 踈而遠之則有之 (中略)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저들 불교와 노자를 욕하면서 자신들은 이치에 맞는 학문을 한다고 자처하고 있으니, 이런 습속이 도대체 어떤 경전에서 처음 나왔는지 모르겠다. 대저 성리학이란 학문은 몸소 행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법이거늘, 만약 부질없이 그들을 비방한다면 곧 성리학도 역시 야비하고 천한 학문일 것이다. 국가가 성리학을 존중하고 승상하는 뜻이 본래 이와 같은 데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요망한 말로 대중들을 현혹하고, 간사한 짓을 하여 죄과를 범하는 것이 모두 중들의 무리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그들의 가르침에는 궁행실천이 없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이 기강을 범하고 법을 무시하는 행동이 어찌 그들 본래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어서이겠는가? 「동란섭필(銅蘭涉筆)」
理學之人 先罵二氏 自以爲理學者 此習不知刱自何典 夫理學 貴於躬行實踐 若虛詆二氏 卽爲理學則卑淺矣 國家尊尙理學之意 本不如此 若云夭言惑衆 作姦犯科 皆出於僧徒 此等果於本敎 亦無躳行實踐 其干紀冒法 豈誠本敎之罪哉
옹정제(雍正帝)는 건륭제의 아버지면서 강희제를 잇는 황제로 평생 성실과 검약을 실천한 성군이다. 그의 이 조서만큼 주자주의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도 드물다. 석가와 노자를 비판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이단을 배척함으로써만이 존립할 수 있는 이념이란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도그마다. 도그마란 원초적으로 배제와 부정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서구 중세의 ‘마녀사냥’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긍정적 생성을 통해 가치를 계속 증식해나갈 수 있다면 굳이 이단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니, 이단이라는 개념 자체도 불필요할 것이다.
연암의 사유도 이 어름에 머무르고 있다.
세간의 불경이라는 책은 모두가 『남화경(南華經)』(장자)의 주석서에 불과하고, 『남화경』은 곧 노자 『도덕경』의 설명서에 불과하다. 그들 이단을 창시한 사람들은 모두 천품의 자질이 아주 뛰어나고 생각이나 도량이 탁월하였을 터인데, 어째서 인의예지가 모두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적인 법이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들은 불행하게도 말세에 태어나서, 본질은 없어지고 형식만 꾸미는 세상의 현실에 대해 눈살이 찌푸려지고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리하여 비분강개해서 도리어 문자가 없던 상고 시대의 정치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성인을 없애고 지혜를 버리며, 도량형 제도를 파괴해야 한다고 한 그들의 말은 모두 세태와 풍속을 분개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중략)
世間所有佛書 都是南華經箋註 南華經乃道德經之傳疏彼皆天資超絶 情量卓異 豈不知仁義禮樂俱爲治天下之大經哉 不幸生値衰季 蒿目傷心於質滅文勝 則慨然反有慕于結繩之治 其如絶聖棄智剖斗折衡之類 皆憤世嫉俗之言也
그런 책들이 비록 있다 하더라도 마침내 천하의 치란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당나라 한창려(韓昌黎, 한유)는 이단인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에 대항하여 배척했던 맹자의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하고는, 이에 노자와 불교를 배척하는 것을 자기의 독자적 노선으로 삼았다. 맹자의 본령은 단지 양주와 북적을 배척하는 것만으로 곧바로 아성(亞聖)이 된 것은 아닐 터인데도 한유는 단지 노자와 불교의 서적을 불살라버리는 것만으로 맹자의 뒤를 이으려고 하였다. 그들의 책을 불사르는 것만으로 과연 이단을 배척하는 본령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구외이문(口外異聞)」
其書雖存 竟亦無關於天下之治亂 韓昌黎依俙見孟子之距楊墨 乃以闢老佛爲家計 孟子本領非直距楊墨 爲亞聖 乃韓昌黎直欲火其書 以繼鄒聖 未知果有火其書本領否也
한유가 불교를 배척하는 데 앞장을 선 데 대한 논평이다. 마치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도교와 불교에 대한 입장을 툭, 던지고 있다. 이렇듯 그는 언제나 지배적인 이념들의 내부에서 그 심층 깊숙이 ‘외부’를 각인한다. 주자학의 대척점에 있었던 불교와 도교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저력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무엇보다 티베트 불교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두터운 금기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에도 그는 ‘판첸라마의 이목구비’에서부터 티베트 불교의 역사와 교리, 신이한 이적 등을 여러 편에 걸쳐 면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경계에 서서 ‘이단들’과의 강도 높은 접속을 시도했던 것이다.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열하에서 곡정과 필담할 때 담배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이 담배는 만력 말년에 절동(浙東)과 절서(浙西) 지역에 널리 유행했습니다. 이 물건은 사람들의 가슴을 막히게 하고 취해 쓰러지게 하는 천하의 독초이지요. 먹어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니건만 천하의 좋은 밭에서 나는 귀한 곡식과 이문이 같고, 부녀자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고기보다 더 즐기며 차나 밥보다 더 좋아합니다. 쇠붙이와 불을 입에 당겨 대니, 이 또한 세상 운수라 해야 할지. 아무튼 이보다 더 큰 변괴가 어디 있겠습니까.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萬曆末 遍行兩浙間 猶令人悶胸醉倒 天下之毒草也 非充口飽肚 而天下良田 利同佳糓 婦人孺子 莫不嗜如蒭豢 情逾茶飯 金火迫口 是亦一世運也 變莫大焉
그러자 연암은 “만력 연간에 일본에서 들어와, 지금은 토종이 중국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청나라가 아직 만주에 있을 때에 담배가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들어갔지요. 그 종자는 본디 일본에서 왔기 때문에 남초(南草)라 이릅니다[自萬曆間 從日本入國中 今土種無異中國 皇家在滿洲時 此草入自敝邦 而其種本出於倭 故謂之南草].” 하니, 곡정은 “본시 일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양 배편으로 온 겁니다. 서양 아미리사아(亞彌利奢亞, 아메리카)의 임금이 여러 풀을 맛보다가 마침내 이 풀을 얻어 백성들의 입병을 낫게 했다는군요. 인간의 비장은 토(土)에 속하므로 허하고 냉하여 습기가 차면 벌레가 생기고, 그것이 입에까지 번지면 바로 죽습니다. 이에 불로써 벌레를 쳐 목(木)을 이기고 토를 도와 해로운 기운을 이겨내고 습기를 제거하여 신통한 효과를 거두었으므로 영초(靈草)라 일컬은 것이지요[此非出日本 本出洋舶 西洋亞彌利奢亞王 甞百草 得此以醫百姓口癬 人脾土虛冷而濕 能生虫口蠧 立死 於是火以攻虫 剋木益土 勝瘴除濕 卽收神效 號靈草 余曰 吾俗亦號南靈草].”
연암은 순진하게 그 말을 곧이 듣고 “만약 이 풀이 아니었다면, 천하 백성이 모두 입병으로 죽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誠非此草 四海之人 安知不擧皆口瘡而死乎]?” 한다. 그러자 곡정은 “서양 인종들이 대체로 허황하여 이익을 낚는 재주가 교묘하니, 어찌 그 말을 다 믿을 수 있겠습니까[西人類多誇誕 巧於漁利 安知其言之必信然否也]?”하고 되받아친다.
근대 이전 담배에 대한 풍속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되지만, 무엇보다 동양과 서양의 접속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이다. 담배는 아메리카에서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다시 조선에서 만주로, 중원으로 퍼져갔던 것이다.
기하와 알파벳에 대한 언급도 눈에 띈다. 「망양록(忘羊錄)」에서 윤가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양 사람들은 역법(曆法)에 정통하고, 그들의 기하학의 학술은 정미하고 세밀하여, 무릇 물건은 모두 기하학을 응용하여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 중국이 기장 낟알을 포개어 길이를 재는 따위는 도리어 거칠고 조잡한 짓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문자는 소리를 뜻으로 삼는 표음문자여서 새나 짐승의 소리와 바람과 비의 소리조차 귀로 분변하고 혀로 형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답니다.
西人皆精曆法 其幾何之術 爭纖較忽 凡所製造 皆用此法 中國累黍反屬麤莽 且其文字 以聲爲義 鳥獸之音 風雨之響 莫不審於耳而形于舌
담배를 논할 때와는 또 다른 태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흔히 서구와 동양의 충돌이라면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떠올리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서구와 동양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문명 간 교류를 시도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의 관계는 20세기 초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20세기가 기술의 압도적 우위를 배경으로 서구가 동양을 지배하는 시대라면, 근대 이전은 힘의 우열이 선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명적 차이와 이질성이 훨씬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서양에 대한 일련의 표상을 일러 옥시덴탈리즘이라고 하면 어떨까. 오리엔탈리즘이 도래하기 이전의 옥시덴탈리즘.
중국이나 조선의 선비들에게 있어 서양이란 과학기술과 천주교 두 가지 코드로 인지되었다. 이 가운데 전자에 대해서는 대개 호기심(好奇心)과 포용력(包容力), 동경(憧憬) 등의 태도를 보인 반면, 후자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었다. 명나라 때 마테오 리치가 서학을 전파한 이래 중국에서는 천주교 신자가 날로 늘어났다. 조선에서도 남인(南人) 경화사족(京華士族)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세를 확산해갔다. 신앙으로 수락한 이들의 편에서 본다면 천주교는 구원의 종교지만, 그것을 단지학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편에서 보자면 그것은 하나의 신종 이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은 후자쪽이었다.
연암은 천주당의 방문을 연행의 중요한 코스로 잡는다. 한번은 열하에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기도 했다. “저는 만 리 길을 걸어서 귀국에 관광하러 온 신세입니다. 이 참에 서양인을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열하로 들어오는 바람에 아직 천주당을 구경하지 못했[鄙人萬里閒關 觀光上國 敝邦可在極東 歐羅乃是泰西 以極東泰西之人 願一相逢 今遽入熱河 未及觀天主堂 (鵠汀筆談)]”으니 한스럽기 그지 없노라고, 천주당을 방문하는 목적은 풍금이나 망원경, 기타 기계들의 표본 및 역법을 보기 위해서다. 물론 아직 서구 과학기술의 수준은 소박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문명의 도입이라는 거창한 명분보다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 흔히 지전설, 지동설 따위를 서구과학의 영향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연암이나 홍대용(洪大容)의 수준에서도 선취되고 있던 바였다. 요컨대 연암을 둘러 싼 동양의 엘리트들에게 있어 서구는 나름대로 과학적 진보를 이룬, 그러나 아직 그것이 동양보다 월등한 위력을 발휘할 수준은 아닌 낯선 문명권 정도로 인지되었다.
서구제국의 입장에서 시급한 목표는 기술보단 천주교의 포교였다. 문명의 충돌은 언제나 종교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천주교를 ‘땅끝까지’ 전파하는 소명을 위해 선교사들은 머나먼 이국땅을 밟았던 것이다. 과학이나 기술은 포교를 위한 부차적 사안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20세기에 들어서면 이 두 가지는 정확히 역전된다. 선교사를 보내 정지작업을 한 뒤에는 반드시 총과 대포가 뒤따라왔던바, 어디까지나 목표는 후자였다.
그러나 근대 이전 지식인들에게 있어 천주교는 철학적 측면에서 볼 때, 한참 낮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옹정제(雍正帝,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라는 책을 보면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당시 서양은 국왕과 교회의 권위에 비판의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터라, 유럽의 지식인은 세계의 동쪽 끝에 종교의 예속을 받지 않는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워하기도 하고 의아해하기도 하였다. 또 개중에는 중국과 같은 군주정치체제야말로 이상적인 정치방식이라고까지 격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즉 적어도 이 시기는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처지였던 것이다. 옹정제(雍正帝)의 아들인 건륭제 치세하에서 천주교의 영향은 한층 커졌고, 서양 역시 과학의 진보가 두드러진 때이긴 했으나, 아직 힘의 배치가 크게 바뀔 정도는 아니었다.
소박한 이단
『열하일기』에 그려진 천주교는 그래서 매우 유치한 수준이다.
대저 저 서양인들이 말하는 야소(耶蘇, 예수)는 중국의 군자나 토번의 라마와 비슷합니다. 야소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공경하여 온 천지에 교리를 세웠지만, 나이 서른에 극형을 당하고 말았답니다. 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몹시 애모하여 야소회를 설립하고는 그를 신으로 공경하여 ‘천주’라 부르게 되었지요. 그래서 야소회에 들어간 자는 반드시 비통해하면서 야소의 수난을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곡정필담(鵠汀筆談)」
耶蘇者 如中國之語賢爲君子 番俗之稱僧爲喇嘛 耶蘇一心敬天 立敎八方 年三十遭極刑 而國人哀慕 設爲耶蘇之會 敬其神爲天主 入其會者 必涕泣悲痛 不忘天主
왕곡정은 이런 식으로 천주교를 간단히 정리한 뒤, 이것이 비록 부처를 배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윤회의 설에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 아마도 ‘천당지옥설’을 불교의 윤회설로 간주한 것 같다.
그래서 연암이 묻는다. 천당과 지옥의 설을 신봉하면서 불교를 공격하기를 마치 원수와 같이 하는 까닭은 무엇이냐고, 곡정의 대답은 이렇다. “서학이 어찌 감히 불교를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西學安得詆釋氏]?” 중국에 들어와 중국인들이 불교를 배격하는 것을 보고는 거기에 편승하여 함께 비난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또 “중국의 경전에서 상제나 주재자 같은 말을 빌려 와서 우리 유학에 아부하였습니다. 그 본령이 원래 명물과 도수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는 우리 유학의 제이의(第二義)에 떨어진 셈입니다[於中國文書中 討出上帝主宰等語 以自附吾儒 然其本領 元不出名物度數 已落在吾儒第二義].” 한마디로 ‘넘버 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연암의 견해도 비슷하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의 학문은 근원을 연구하고 근본을 따지는 학문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뜻을 세움이 지나치게 높고 말하는 것이 편벽되고 교묘해서, 하늘을 기만하고 사람을 속이는 죄과를 범하는 데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보기에 천주교가 낯설게 느껴진 것은 이 종교가 수난과 원한에 휩싸여 있다는 점 때문이다. 앞서 곡정도 ‘나이 서른에 극형을 입었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몹시 애모하여 그 교에 들어간 자는 반드시 눈물지으며 슬퍼하여 잊지 않는다[年三十遭極刑 而國人哀慕 設爲耶蘇之會 敬其神爲天主 入其會者 必涕泣悲痛 不忘天主]’고 했는데, 연암의 인상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연암은 북경 천주당에서 ‘양화(洋畵)’를 보고 이렇게 묘사했다.
그림 속에는 한 부인이 대여섯 살쯤 된 어린아이를 무릎에 앉혀놓고 있는데, 어린애는 병들어 파리한 몸으로 눈을 흘기며 빤히 쳐다보고, 부인은 고개를 돌려 차마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곁에서 시중드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병든 아이를 굽어보고 있는데,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돌린 자도 있다 「황도기략(黃圖紀略)」
有婦人膝置五六歲孺子 孺子病羸白眼直視 則婦人側首不忍見者 傍側侍御五六人 俯視病兒 有慘然回首者
이렇듯 그가 본 기독교는 비탄과 수난의 종교였다. 원죄, 십자가의 수난, 마리아의 탄식 등. 동양의 종교에서는 이런 식의 구조를 찾기 힘들다. 잘 알다시피 불교는 도교든 동양의 종교는 생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생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와 더불어 기독교의 교리적 근원이 되는 인격신이라는 설정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원시유학에 상제(上帝)라는 개념이 있긴 했지만, 인격신적 요소는 사라진 지 오래다. 결국 연암이나 곡정이 보기에 그것은 원한에 찬 슬픔의 종교일 뿐 아니라, 소박하기 그지없는 ‘이단’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초 근대계몽기에 이르면, 이런 견해는 완전히 뒤집힌다. 창조설이나 천당지옥설 등 연암 당시엔 황탄하기 그지 없다고 평가되던 것들이 ‘유불도’를 넘는 최고의 원리로 격상되면서 문명의 빛, 진리의 빛으로 떠오른다. 옥시덴탈리즘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고, 오리엔탈리즘이 도래한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윤전을 거듭하는가?
▲ 100년 전 명동의 천주당
지금은 평범한 교회당이지만, 연암 당시에는 서구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당시 국내에선 서학이 점차 정치적 쟁점으로 불거지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면 연암에겐 더한층 의미심장했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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