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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높고 쓸쓸하게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1부 “나는 너고, 너는 나다” - 4장 그에게는 묘지명이 없다?, 높고 쓸쓸하게

건방진방랑자 2021. 7. 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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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쓸쓸하게

 

 

연암은 쉰을 넘어서야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선공감 감역, 안의현감, 면천군수 등을 지낸다. 그제야 철이 든 것일까? 그럴 리가! 사실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더욱 쓸쓸하다. 체질에 맞지도 않는 직장생활(?)을 하고, 그 좋아하던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으니.

 

그렇다고 그의 만년이 궁상맞은 건 결코 아니다. 가난이야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비록 외부자로 떠돌았지만 마음가는 대로 살았으니 가슴속에 새삼 울울함이나 회한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의 만년은 쓸쓸하면서도 여유롭다. 그 시절의 주요장면 몇 가지를 음미해보자.

 

안의현감 시절 낮잠을 자다 일어나 슬픈 표정으로 대나무 숲 속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깨끗이 쓸어 자리를 마련하고 술 한 동이와 고기, 생선, 과일, 포를 갖추어 성대한 술자리를 차리도록 하라[命於竹裏幽靜處掃地設席, 具一大壺酒魚肉菓脯, 盛備爲酒所]!”고 분부를 내린다. 평복 차림으로 몸소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올린 후 한참 앉아 있다가 서글픈 기색으로 음식을 아전과 하인들에게 나눠주었다. 한참 뒤 아들이 그 연유를 묻자, 연암은 이렇게 답한다. “접때 꿈에 한양성 서쪽의 옛친구들 몇이 날 찾아와 말하기를 자네, 산수 좋은 고을의 원이 되었는데 왜 술자리를 벌여 우리를 대접하지 않는가라고 하더구나. 꿈에서 깨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두 이미 죽은 자들이었다. 마음이 퍽 서글프더구나. 그래서 상을 차려 술을 한잔 올렸다. 그러나 이는 예법에 없는 일이고 다만 그러고 싶어서 했을 뿐이니, 어디다 할 말은 아니다[吾疇昔夢見城西舊遊幾人, 來語余曰: ‘君作宰好山水, 盍設酒飮吾輩?’ 覺而檢之, 皆已死者也. 甚愴然, 遂有一酹之擧. 然此, 無於禮, 特意設耳, 不必說].”

 

과정록(過庭錄)4에 나오는 이야기다.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는 목소리다. 이렇듯 연암의 친구 사랑은 늘그막에도 그칠 줄 모른다. 관아 한 곳에 2층으로 된 창고를 헐어서 연못을 파고 물을 끌어들여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어 즐기면서 술친구와 글친구를 불러들여 모임을 갖곤 했다. 정조가 이 말을 듣고 당시 검서관이었던 박제가(朴齊家)에게 박지원이 다스리는 고을에 문인들이 많이 가서 노닌다고 하는데, 너만 공무에 매여 가지 못하고 있으니 혼자 탄식하고 있었을 게다. 휴가를 내어 너도 한번 가보는 게 좋겠다[朴某之邑, 文人多往遊, 而汝獨縻公不能往, 宜有向隅之歎. 乞暇一往, 可也]”고 했다는 말이 과정록(過庭錄)2에 나온다. 국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이 모임이 유명했던 걸까? 아니면 소소한 일까지 국왕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그의 행적은 늘 주목의 대상이었던 걸까?

 

면천군수 시절, 마침내 천주교의 불똥이 그에게까지 미친다. 당시 서학이 8도에 번졌는데, 면천군도 마찬가지였다. 연암도 처음엔 신자들을 곤장으로 다스렸지만, 형벌로 다스리면 예수에 대한 절의를 지키려고 더더욱 뜻이 견고해진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 작전을 바꾼다. 그는 천주교 신자를 관아의 종으로 붙들어두고 매일 밤 업무를 파한 후 한두 명을 불러다 반복해서 깨우치고, 후회하는 것을 본 다음에야 풀어줬다고 한다. 재미삼아 말하자면, 신자들 입장에선 매맞는 것보다 더 심한 벌이 아니었을까. 날마다 똑같은 설교를, 그것도 연암처럼 기가 센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신앙으로 뜨거워진 가슴을 썰렁한논변으로 식혀 버리는 방편을 쓴 것이다. 어찌됐든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면천군은 피바람이 불지 않았다고 하니, 나름대로 이 작전이 주효하긴 했던가 보다. 과정록(過庭錄)3에 나온다.

 

당시에는 고을 원님이 하는 가장 주요한 일이 가뭄이나 기근 때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이웃 고을 관리로 있던 한 친구가 빈민구제로 고통을 호소하자, 이렇게 위문편지를 쓴다. “우리들이 하해(河海)와 같은 임금님의 은혜를 입어 갑자기 부자가 되어 뜰에다 수십 개의 큰 가마솥을 늘어놓고 얼굴이 누렇게 뜬 곤궁한 동포 14백여 명을 불러다가 매달 세 번씩 함께 즐기니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을 거외다. 세상에 이만한 즐거움이 대체 어디 있겠소? 뭣 때문에 신세를 한탄하며 스스로 괴로워한단 말이오[吾輩厚蒙天恩, 忽作富家翁, 庭列數十大鼎, 招倈一千四百餘口顑頷顚連之同胞, 月三與之湛樂, 樂莫樂兮, 何樂如之, 如之何其歎到身命, 自作苦况哉]?”라고, 짜증나는 업무를 축제의 장으로 바꿔버리는 능력! 여기서도 그의 빛나는 명랑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과정록(過庭錄)3에 나온다.

 

고을을 다스리는 그의 통치철학은 지극히 단순명료하다. 첫째, 비록 내일 당장 그만두고 떠날지라도 늘 1백년 동안 있으면서 그 고을을 다스린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둘째, 그러나 뜻에 맞지 않는 바가 있으면 헌신짝 버리듯 흔쾌히 그만두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머무름과 떠남에 집착과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안의현감을 그만두고 몇 년 뒤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고 하자, “그런 일을 하는 건 나의 본뜻을 몰라서다. 더군다나 그건 나라에서 금하는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너희들이 끝내 송덕비를 세우려 든다면 집안의 하인들을 보내 송덕비를 깨부셔서 땅에 묻어버린 다음 감영에 고발하여 주모자를 벌주도록 하겠다고 했다. 연암다운 기질이 한껏 느껴지는 대목이다. 아무튼 연암의 만년은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높고 쓸쓸하게. 과정록(過庭錄)2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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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열하일기

문체반정

박지원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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